우천염천 -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터키 여행 에세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제 24회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저명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웃나라 한국 대신 인류문명의 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광이 흐르는 땅 터키를 찾았다. 하루키 선생의 서정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글 솜씨야 다 아는 사실이고, 그가 과연 비오는 그리스와 불타는 터키에서 무얼 보고, 느꼈을까가 참 궁금했다.

아마 출판사에서 책을 쓰라는 계획 하에 여정에 나섰는지 사진작가와 편집자까지 동반한 여행이었다. <우천염천>은 그리스와 터키 기행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그리스 정교의 성질로 알려진 아토스 반도 기행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우라노폴리스에서 뱃길로 아토스 반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다프니라는 곳으로 향한다.

다프니 항구의 여권보관소에 여권을 맡기고, 아토스 반도에서 통행할 수 있는 체류허가증을 받는다고 한다. 역시 일반 관광지가 아닌 ‘신들의 정원’이라는 별칭답게 조건이 까다로운 모양이다. 아, 그리고 수도사들이 기도와 수도에 정진하는 곳이어서 그런 진 몰라도 여자들의 출입은 금지다.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은 많이 봤어도 그 반대의 장소는 또 처음이다.

아토스 반도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카리에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고,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도보 여행길이다. 마라톤광, 달리기광으로 알려진 하루키답게 그 정도 걷기는 문제가 아닌 듯. 하지만 동료들에게는 곤욕의 시간들이었나 보다. 스타브로니키타, 이비론 같이 정말 이국적인 이름인 수도원들을 하루키 일행은 순례한다. 아토스 반도에서 숙식을 모두 수도원의 호의에 의지해야하는 이방인들의 처지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서도 하루키는 먹을거리가 풍족해 보이지 않는 수도원에 둥지를 튼 고양이 가족들을 걱정해 주는 센티멘털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진 찍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수도사들 때문에 그들의 풍채를 볼 수 없지만, 빈약한 먹거리에도 불구하고 뚱뚱하다는 그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수도사들이 하루키네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만 맛난 것을 먹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젖기도 한다. 그런 깜찍한 발상이 재밌다. 순간, 아~ 역시 하루키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 외에도 필로세우, 카라칼르 그리고 그란데 라브라 등의 수도원을 일주한 하루키네는 안나 아기아라는 곳에서 체류기간을 넘어 지내다가 결국 배를 세내어 다프니 항구로 그리고 다시 ‘문명세계’로 점프를 한다. 다시 속세로 돌아온 그들은 식당에서 푸짐하게 한상 차려서, 실컷 맥주를 마신다. 역시 ‘신들의 정원’을 일부러 찾은 이들조차 속세의 즐거움은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짧은 그리스 여행은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은 하루키와 같은 나라의 후지와라 신야가 자신의 책 <동양기행>에서 ‘광물의 세계’로 표현한 터키로 하루키들은 이동을 한다. 2부 타이틀에 적어 놓았듯이 터키에 대한 하루키의 직접적인 인상은 차이, 군인 그리고 양이다. 차이는 터키식 홍차로 어딜 가든 차이하네(차이를 파는 터키식 카페)에서 차이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터키 남정네들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유럽 땅에는 이스탄불과 주변의 조각 땅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유럽인체 하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되어 있는 터키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눈에 띈다고 한다. 이란과의 국경 근처에서 만난 군인들과의 사진촬영에 얽힌 에피소드 역시 즐거웠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군사시설은 물론이고, 휴가 중인 군인의 사진을 찍는 것도 제재를 가하는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터키 사람들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양과는 도대체 친해질 수 없는 하루키의 말에서는 문화상대주의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모든 여행자들은 이방인이기에.

하루키는 일본인 특유의 상대방의 지나친 ‘친절함’에 당혹스럽기만 하다. 루스 베네딕트가 여사가 <국화와 칼>에서 언급한 온[恩]이 문득 떠올랐다. 상대방에게 그런 온을 받으면, 되갚아야 한다는 그네들의 생각 때문일까.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무슬림들의 속내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다 보니, 무에진이 외치는 모스크의 기도시간 알림 정도 외에 하루키는 철저하게 종교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비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것은 슬쩍 피하고 싶다는 본인의 스타일이려나.

하루키들의 일정은 어느 순간 끝난다. 그는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의 자세를 고수한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려고 하지 않고, 항상 차이하네에서 외롭게 글을 쓰며 맥주타령을 한다. 이 책 이전에 <먼 북소리>라는 유럽기행 에세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 책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을 들어왔지만, 그의 대표작들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거나 이렇게 그리스와 터키를 누빌 수 있었던 하루키가 마냥 부러워지는 순간들이었다.

*** 뱀다리 : 예전에 출간된 책에는 실려 있지 않은 하루키의 동행 마쓰무라 씨가 찍은 144컷의 사진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이 사진들이 없었더라면 좀 딱딱한 에세이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불제 민주주의 - 유시민의 헌법 에세이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0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시민 교수의 헌법 에세이라는 타이틀을 붙은 <후불제 민주주의>를 읽었다. 자신은 굳이 “프리랜서 지식소매상”이라고 불러 달라고 하지만, 현재 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니 유 교수님이고 호칭해도 무관할 것 같다. 작년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해서 “민주주의 절차”를 강조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왜 그가 그렇게 민주주의의 절차를 강조하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우선 간략하게 책 이야기를 해보면, <후불제 민주주의>는 1부 <헌법의 당위> 그리고 2부 <권력의 실재>로 나뉘어져 있다. 흔히 책 소개로 사용하는 헌법 에세이는 전자에 해당하고, 자신이 정치무대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경험한 이야기들과 우리나라 정치현실들이 2부에서 거론되고 있다.

1부에 첫 대목에 등장하는 행복, 자유 그리고 주권이야말로 아마 유 교수님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보편적 진리들에 대한 핵심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이 본질적인 질문은 책을 관통해서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한다. 다시 말해 주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위정자들이 아닌 국민에게 있다는 선언이다.

문제는 이런 보편적 진리들이 당위가 아니라 존재론적 가치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선배 민주주의 국가들인 프랑스, 영국 같은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치열한 삶의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를 얻은 것이 아니다. 1948년 일제로부터 해방 후, 제헌의회에서 이런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들을 거저 얻게 되었다.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이 귀중한 가치들을 얻었기 때문에, 반세기도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그 가치들에 대해 유예된 지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 표현 중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이 있다. 고통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 사회적 진화를 통해 가장 효율적이면서 인간 삶의 보편적 가치에 가까운 민주공화국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행복, 자유 그리고 주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유 교수님은 이런 주장에 기초해서, 새로운 정부 아래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 ‘문명 역주행’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지난 10년 간, 다분히 권력자의 선의에 의해 그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 가치들이 신자유주의 경쟁주의 무장한 보수와 수구 언론 그리고 MB정부 하에서 그야말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현실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금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치러야 하는 민주주의의 대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금의 현실을 냉정하고 판단하고,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각자가 가진 힘을 모아 연대해서 사법파시즘이 횡행하는 정상에서 이탈한 민주주의를 제 궤도에 올릴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한 번 잘못된 것을 다시 되돌리는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정확하게 우리가 자각하고 실천하는만큼 우리가 사랑하는 민주공화국은 진보하고, 그만큼 우리에게 보답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개인적으로 2부 <권력의 실재>는 1부만큼의 감동을 받지 못했다. <권력의 실재>는 유 교수님이 6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몸소 느끼고, 보고 들은 실전체험담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십년간 국외자였던 나에게 그가 말하는 사실들은 모두가 새롭고 놀라운 일들이었다. 심지어 그가 주장하는 정당민주화과 선거제도 개혁 등의 주장들은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 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현실을 비추어 볼 때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가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의 실재>에서 유 교수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큰 공감을 한 부분은 “도서관”이었다. 불필요한 사교육에 의해 마치 정글의 약육강식을 방불케 하는 경쟁이 아닌, 어린이들부터 성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미래의 민주시민으로서 소양과 지식을 키울 수 있는 공공도서관을 곳곳에 마련하자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도서관 건립 프로젝트는 외형적인 도서관이 아닌 콘텐츠의 문제이다. 이미 대한민국의 모든 도서관들이 본래의 목적인 독서와 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각종 시험공부를 하기 위한 ‘독서실’로 전용이 되어 버린 현실을 볼 때마다 입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도서 구입 예산은 삭감하면서,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 하나 없다고 개탄하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생각일진 모르겠지만, 옥의 티처럼 <권력의 실재> 부분에서는 유 교수님의 정치참여와 지난 참여정부 시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왠지 변명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래서일까 1부 <헌법의 당위>에서 제기한 이슈들이 2부에서 유기적인 추동력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별개의 문제처럼 다뤄지면서 어느 순간 소멸해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래도 <후불제 민주주의>는 여전히 매력적인 책이다. 그동안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담고 있는 헌법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 60여권의 책을 읽었는데, 읽으면서 가장 큰 독서의 보람을 느낄 수가 있는 책이었다. 주변의 지인들에게 진심으로 권해 주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 인물로 읽는 한국사 (김영사) 9
이이화 지음 / 김영사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책은 작가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을 한다. 특히 역사를 다룬 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운 이이화 선생과 김영사의 역작 “인물로 읽는 한국사” 시리즈 중에서 9번째 책이다. 작년 1월에 1권을 시작으로 해서 올해 2월까지 모두 10권의 책이 나왔다. 이이화 선생의 책과는 첫 만남이었는데 우선 읽기 쉬운 역사책의 출간이라는 대의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이이화 선생은 머리말에서 역사의 주역은 누구인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태적인 영웅사관에는 반대하지만, 또 지나온 유구한 역사가 특정 인물들에 의해서 진행되어져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민초들의 삶 역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기록은 사서에 실려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가장 가까운 조선의 역사만 하더라도 몇 백 년이 지난 지금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1차 사료들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어쨌든 이이화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경쟁관계에 놓여져 있었거나, 혹은 목숨은 건 사투를 벌였던 또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격려와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던 다양한 인물군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인물들의 선정한 이유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보통의 경우 처음부터 책을 읽는데 <그대는 동지인가 적인가>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송병준과 이용구>였다. 구한말 대한제국을 일제에게 팔아넘기는데 있어서 가장 앞장섰던 이 두 인물에게 이이화 선생은 가차 없이 “매국노와 민족반역자”라는 레테르를 붙여 주었다. 작가의 서릿발 같은 재단이 그들에게 가해졌는데, 과연 이 친일주구들이 살아 있다면 어떤 변명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조선 초에 극렬하게 대립했던 수양대군(훗날 세조)과 김종서의 충돌은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숙부가 어린 조카의 제위를 찬탈한 쿠데타로 그 어떤 명분도 설 수가 없는 명백한 반역이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군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보게 된다면, 일방적으로 수양대군의 전횡만을 탓할 수도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이런 이이화 선생의 문제 제기는 계유정난 이후, 단종 복위를 꿈꾸는 성삼문과 신숙주와의 관계에서도 재현된다.

조선 최고의 명군이었던 세종으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성삼문과 신숙주의 관계는 계유정난을 계기로 갈라지게 된다. 국가/국왕에 대한 충성이라는 유가의 도의 차원에서는 성삼문의 충절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문화와 학문에 대한 기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신숙주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과 이상에서의 괴리는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에 읽은 <칼의 노래>에서 작가 김훈 선생은 일방적으로 원균에 비해, 이순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아무리 선조가 전후에 편파적인 논공행상을 했다고 하더라도 원균도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일등공신에 올랐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만약에 선조가 터무니없이 은상을 베풀었다면 조선조의 그 깐깐한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서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이화 선생이 밝힌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이순신과 원균 간의 갈등의 소지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순신이 자초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세의 평가는 한 사람은 성웅(聖雄)으로 추앙을 받고,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간웅(奸雄)으로 지탄을 받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가 있겠다.

작가가 대중적인 역사 읽기를 염두에 두고 저술을 해서 그런지 책 읽기에는 부담이 없어서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역사를 전공해서 그런진 몰라도, 등장인물들을 좀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깊이 있는 역사의 라이벌들을 조명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그리고 라이벌 구조가 조선이라는 특정시대에 편중되어 있는 것도 옥의 티라고 할 수가 있겠다.

여러 유형의 라이벌들이 <그대는 적인가 동지인가>를 통해 소개되고 있는데, 특히 국난의 위기 중에 서로 대척점에 서 있던 인물들이 국가를 위해 간담상조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서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네이크 스톤 -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물
제이슨 굿윈 지음, 박종윤 옮김 / 비채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제이슨 굿윈 작가의 홈페이지에서 찾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스케치)

이스탄불, 지금은 터키 땅이지만 고래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관문으로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삼은 이래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왔다. 그 후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가 정복하면서 터키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맞은편에 자리 잡은 이스탄불은 고대와 현대가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다. 영국 출신의 작가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잔틴 역사를 전공한 제이슨 굿윈은 바로 이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는 일단의 연작들을 발표했고, <스네이크 스톤>은 두 번째 이야기에 해당한다. 이미 그 첫 번째 이야기인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이 우리나라에 지난 2007년에 이미 소개됐다.

제이슨 굿윈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터키 궁정의 환관(eunuch) 출신인 야심(Yashim)이다. 야심은 오스만 제국의 30번째 술탄인 마흐무트 2세(재위기간 1808-1839)의 봉신으로, 비록 신분은 환관이지만 냉철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터키 지식인의 전형이다. 개혁군주 마흐무트 2세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터번을 두르고 다니지만 그에게서 일체의 무슬림이 가진 종교색은 보이진 않는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작가의 중립적인 태도라고 할까.

이야기는 이스탄불의 모처에서 일어나는 린치와 살인사건으로 시작된다. 역시 팩션 소설들의 장기인 살인과 미스터리가 빠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엉뚱하게도 오늘날로 치면 흥신소업을 하며 조용하게 살려고 하는 야심의 목을 죄어온다. 야채장수 조지가 린치를 당하고, 책방주인과 자신에게 도움을 청해왔던 프랑스인으로 자칭 고고학자라는 르페브르가 살해당하면서 야심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뿐이다.

미스터리의 중심에는 1453년을 끝으로 역사상에서 사라져 버린 천년제국 비잔티움의 전설이 서려 있다. 터키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막 난입을 하기 전, 아야 소피아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 집전을 했던 총대주교가 의전 때 사용한 성찬 도구들의 향방이 관건이다. 혹자는 성배라고도 하고, 의견이 분분하다. 작년에 읽었던 존 J. 노리치의 비잔티움 연대기 삼부작이 이 책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도.

굿윈은 미스터리에 으레 등장하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나 냉철한 추리를 해내는 멋진 캐릭터 대신에, 그랜드 바자르로 대표되는 미로와 같은 이스탄불의 거리들을 삽입하고 온전하지 못한 존재인 환관 야심을 기용한다. 오스만 제국의 환관 출신인 야심은 그리스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로 된 소설을 자유롭게 즐긴다. 게다가 또 한 요리하면서, 미각적인 즐거움까지 선사해주고 있다. 터키 음식이라고는 고작해야 케밥 정도 밖에 모르는 나에게, 아주 다양한 터키 음식의 소개는 색다른 체험이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동양기행>에서 언뜻 본 음식들이 떠올랐다.

작가는 현재의 이스탄불을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이스탄불의 세 가지 정체성을 각각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의 개념으로 치환시키면서 천수백년을 이어온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물론 그 중심에서는 ‘물의 도시’(어쩌면 이 표현이 이 소설의 키워드인지도 모르겠다)와 유스티아누스 대제가 건립한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아야 소피아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제이슨 굿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중적인 신화적 요소들을 <스네이크 스톤>에서 많이 채용하고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보물을 찾아 지하 수도를 헤매는 아멜리에와 야심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테세우스와 아드리아네의 근대 버전이었다. 미궁을 벗어나기 위해, 실타래를 푸는 아멜리에의 모습에서 예의 장면이 바로 연상이 되어졌다. 그리고 아마 작가의 프랑스 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평생 동안 프랑스 파리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야심이 당시 프랑스의 유명작가들인 발자크와 스탕달을 읽는 장면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아주 구체적인 작품의 이름까지 등장을 하는데 <고리오 영감>과 <적과 흑>이 그것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이 팩션의 시대적 배경이 언제였는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나의 궁금증은 책을 읽으면서 찾아낸 하나의 단서로 바로 풀렸다. 154쪽에서 키오스 섬의 학살 사건(1822)을 언급하면서,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었다는 기술이 나오는데 그것으로 이 책의 시간적 배경이 1838년이라는 점을 알 수가 있었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가 아주 쉽게 풀렸다.

자신의 성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야심의 캐릭터는 아주 매혹적이다. 이스탄불의 터줏대감, 미로 같은 도시의 곳곳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술탄의 모후라는 든든한 빽도 가지고 있다. 프랑크 여인 아멜리에 르페브르와의 스쳐가는 로맨스 처리도 일품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랄라(실권을 지닌 부유한 가문에 봉사하는 신뢰할 만한 환관:45쪽) 야심의 다음 모험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야심의 세 번째 이야기인 <벨리니 카드(Bellini Card)>가 미국에서는 이번 달에 출간이 됐다고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인슈타인의 꿈 - 당신은 어떤 시간에 살고 있나요?
앨런 라이트맨 지음, 권루시안(권국성)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 신문에서 어느 신예 작가의 내 삶의 책인가 하는 코너로 이 책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됐다. 그 글에서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지인들에게 자주 선물하곤 했다는 말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좋은 책이길래 하는 생각으로 온라인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니, 절판되었단다. 온라인 헌책방을 샅샅이 뒤졌어도 <아인슈타인의 꿈>은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다산북스에서 재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 자리에서 공중부양이라도 할 듯이 기뻤다.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실존 인물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특정 시기, 1905년을 그린 소설이다(이 해는 그가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기념비적인 해이다). 글쓴이는 물리학자 출신의 앨런 라이트맨이다. 화려한 그의 경력을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리학자이면서도 인문학의 소양을 두루 갖춘 지식인이라고 해두자.

소설의 배경은 스위스 베른이다. 도시를 굽어 흐르는 아레 강, 그리고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명인 마르크트 거리와 베른 동쪽의 니데크 다리를 구글 맵의 도움으로 찾으면서 미지의 도시에 대한 윤곽을 잡아냈다. 참 세상 좋아졌다. 전지적 시점의 작가는 “시간은 원이다”라는 명제 하에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바로 원형(圓形)의 순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문득 기시감, 데자뷰(deja vu)가 떠올랐다. 더불어 불가에서 말하는 억겁의 윤회도.

작가는 미래에서 온 나그네를 임시주인공으로 해서 ‘만약에’라는 매혹적인 가정으로 독자들에게 시간의 일회성에 대해 각인시켜 준다.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시간의 진리,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를 조각한다는. 그리고 갑자기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라는 세 가지 가능성으로 어떤 일들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적 설명이 불쑥 튀어 나온다. 놀랍다, 마치 오래 전에 본 영화 <런 롤라 런>의 감독 탐 튀크베어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 순간마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하면서 살지만 그 중요성에 대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요성에 대해 정말 심각하게 깨닫게 된다면, 바로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가 문득 시간의 본질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명명한 “시간의 아티스트”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던 중에 시간을 이해하고 싶게 되었다고 하던데. 그 이유가 뭐래더라, 신에게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내가 보기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절대적이면서도 너무나 상대적이다. 게다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엉켜 있는 느낌이다. 앨런 라이트맨 같은 물리학자처럼 구체적으로 뭐가 어때서 그렇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등장하는 세계 종말에 대한 가정은 인간들의 내면을 아주 조금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해 준다. 모두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면서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아마 누구나 세상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았거나,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어느 순간 앨런 라이트맨의 전지적 시점에서 진행되던 책은 드디어 아인슈타인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곧 다시 그 이야기는 작가의 시점으로 돌아간다. 곧 이어 등장하는 계절에 따른 사람들의 심리묘사는 탁월하면서도 유쾌한 경험을 제시해준다. 질서 가운데 살기를 원하면서도, 무질서를 원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라고나 할까. 봄기운이 뻗치면 모두들 무질서를 받아들이고, 다시 여름이 오면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앨런 라이트맨의 서정적인 스위스 베른의 곳곳에 대한 풍경 묘사는 가히 예술적이다. 공학도 출신의 작가가 논리적인 글뿐만 아니라 이런 멋진 묘사의 기술을 보여준다니 놀랍기만 하다. 게다가 일상의 삶을 통해, 그 복잡하고 어렵다는 상대성 이론에 독자들을 이끌고 가는 솜씨는 역시 대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인간이 자신의 인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시간의 존재에 토론 이야기는 일품이었다(103쪽). 더 나아가 그는 이 진지한 토의를 시간미학으로까지 승화시킨다.

이 책에는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유이하게 실존이 확인되는 유일한 인물로 그의 취리히 시절부터 친구였던 미켈레 베소(Michele Angelo Besso, 1873-1955)가 등장을 한다. 공교롭게도 아인슈타인과 같은 유대인이었고, 실제로 베른의 특허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었다. 과도하게 연구에 매달리는 아인슈타인을 진정으로 걱정해주는 카메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꿈>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도대체 시간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 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을 해봤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 시간에 대한 논의는 자못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과학 계통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어서 그런진 몰라도, 개인적으로 인문학적 접근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이 우주에는 절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진리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로 인해 그 절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새삼 깨닫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