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연휴 동안,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순응주의자>를 읽고 싶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명절 전에 책을 내는 센스를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책은 이번 주말에나 올 판이다. 기다릴 수가 없어 미리보기를 좀 보았고 결국 책이 나온지 19년 만인 1970년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연출하고 누벨 바그 영화의 단골 배우였던 장-루이 트랭티냥 주연의 영화 <순응주의자>부터 먼저 보게 됐다.
아쉽게도 원작 소설이 주는 아우라 또는 오리지널리티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느끼게 되었다. 나는 그 점이 참 아쉽다.
원작소설에서는 아마 100쪽 정도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에서 우리의 주인공 마르첼로 클레리치 박사의 유년 시절을 그린 것 같은데 영화에서는 과감하게 그 부분을 드러냈다. 영화의 시작은 파리로 위장(?) 신혼여행을 떠난 34세의 공무원이자 고전문학 박사인 마르첼로 부부가 머무는 호텔 도르세에 전화가 한 통 걸려오는 장면이다.
마르첼로 역을 맡은 장-루이 트랭티냥의 표정에서는 영화 내내 웃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주인공은 참으로 진중한 그런 캐릭터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구속복을 입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고, 오래전 뮌헨의 맥줏집에서 만난 또라이 한 명을 추억한다. 그는 지금 독일의 최고 권력자 히틀러였다. 부군을 정신병원에 보낸 마르첼로의 어머니는 수시로 애인을 갈아 치우는 모르핀 중독자다.
그리고 자신이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마르첼로는 시각장애자이자 역시 파시스트였던 이탈로 몬타나리 동지(영화에서는 ‘카메나라’라고 부르는데 파시스트들 사이에서 동지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의 추천으로 파시스트 무솔리니 정권에 협력하는 길을 택한다. 그는 비밀요원으로 채용되어 자신의 스승이었던 루카 콰드리 교수를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세상의 지배자가 파시스트들이었던 시절의 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왠지 구속복을 입고 미쳐 버린 마르첼로 아버지의 모습에서 무기력한 당시 지식인들의 모습이 연상됐다.
마르첼로의 나이는 소설에서는 30세라고 그리고 영화에서는 34세로 되어 있다. 30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면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 없다. 유년 시절 자신을 괴롭히던 친구들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리노라는 미남자와의 모종의 관계는 성인이 된 지금의 마르첼로를 계속해서 괴롭힌다. 그리고 피스톨로 그를 죽였다는 자책감까지 안고서 말이다. 책을 읽어 보지 않아 영화에 보이지 않는 그런 디테일은 알 수가 없다.
콰드리 교수는 파리로 망명해서 반파시스트 운동의 선봉에 서 있던 지식인이었다. 마르첼로는 망가니엘로라는 특이한 이름의 요원과 접촉해서 파리로 가서 임무를 실행할 계획은 세운다. 그리고 매력적인 약혼녀 줄리아와의 결혼을 앞둔 마르첼로는 신혼여행지를 파리로 정하고 완벽한 위장을 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진정 영화에서나 가능한, 보여 주기
위한 완벽한 키스 시퀀스가 아니던가!
아마 요즘 이런 장면을 연출한다면 손발이
오그라 들지 않을까 싶다.
50년 전이라 가능했던 장면이 아닐까 싶다.)
마르첼로는 비록 무신론자였지만 미래의 아내 줄리아의 간청으로 결혼 전 신부님을 찾아가 리노를 자신이 죽였다는 고해성사를 한다. 고해소에 들어가 있던 신부는 집요하게 리노와의 관계를 캐묻는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가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을까?
파리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신부 줄리아는 자신이 처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신랑에게 고백한다. 어쩌면 마르첼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도록 유도한 것은 자신의 비밀도 밝히기 위한 그런 사전 단계가 아니었을까. 상대는 집안의 오랜 친구이자 결혼식의 증인이기도 했던 늙다리 변호사였다고 한다. 6년 동안 관계를 지속했고, 역겨웠다는 줄리아의 고백이 이어진다. 영화 초반에 마르첼로의 장모님에게 마르첼로의 아버지가 매독에 걸려 뇌질환을 앓고 있고, 그 병이 자식인 마르첼로에게까지 유전될 거라는 익명의 투서가 도착하는데, 줄리아는 그 투서를 보낸 이가 자신의 옛 애인일 거라는 사실도 말해준다.
파리에 도착한 마르첼로는 망가니엘로와 짝을 이루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잠시 들른 곳에서 얼굴이 긴 흉터가 있는 매력적인 여성을 만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가 자신의 사부였던 콰드리 교수의 젊은 아내 안나가 아니었던가. 영화는 마치 장르물 같은 미스터리를 구사하면서 동시에 파시스트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는 장면들을 아주 빠른 속도로 잡아낸다. 서로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아마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알아서 연관지으라는 그런 주문이었을까.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핍진성 차원에서 알베르토 모라비아 작가는 과연 어떤 식으로 연결 고리들을 만들었을지 궁금하다. 결국 원작을 봐야 한다는 말이겠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영화 최고의 장면들은 바로 파시스트 지성을 대표하는 젊은 마르첼로와 고전 철학의 대가이자 어긋난 시대정신에 경도된 파시스트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루카 콰드리 교수의 대화 장면이 아닐까 싶다. 그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에 비친 그림자 전설을 화두로 꺼내면서 두 지성은 치열한 토론 배틀에 나선다. 칼이나 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마르첼로와 콰드리 교수 간의 대화는 소설/영화가 말하고 싶은 주제들을 압축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굴의 원시인들이 본 그림자는 과연 오리지널리티의 그것을 담보하고 있었던가? 그 시대의 숱한 파시스트들 역시 문제의 본질이나 핵심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그 아우라가 비추는 그림자에 홀려 궁극적으로 자신의 신세를 망친 게 아닐까 싶다. 그림자는 자연히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광 앞에서 스러지기 마련이 아니었던가. 히틀러나 무솔리니로 대변되는 파시스트 인사들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아마 그동안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부분에 대한 수정 대신 그릇된 확증편향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어왔던 이데올로기를 단숨에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았으리라.
어쨌든 루카 콰드리와 발레리나 선생 안나는 마르첼로의 정체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파리에 남아 있느라는 마르첼로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남편과 함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에 매복해 있던 네 명의 비밀요원들에 의해 콰드리 교수는 수차례 칼에 찔려 죽고, 그것을 보고 도주하던 안나 역시 그들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사랑하는 딸 마르타의 아빠가 된 마르첼로. 그는 라디오에서 이탈리아 국왕에 의해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권력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추락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이탈로 몬타나리를 만나러 나선다. 거리에는 몰락한 파시스트 권력자 무솔리니 동상의 머리를 끌고 산탄젤로 성 앞을 행진하는 시위대의 모습이 보인다. 이탈로 동지를 만난 마르첼로는 재빨리 그의 가슴팍에서 파시스트 당원임을 상징하는 배지를 잡아 뜯는다. 파시스트가 되는 이유는 두려움이나 돈 때문이라고 영화 어디에 나왔던 것 같은데, 마르첼로는 두려움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파시스트가 되길 거부하지 않았나 싶다. 역설이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사도 베드로처럼 자신이 믿고 따랐던 동지이자 친구 이탈로 몬타나리를 파시스트라며 배신하는 마르첼로. 그는 자신을 오래전 유혹했던 노년의 리노를 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놀라움에 휩싸인다. 자신은 총으로 리노를 쏴 죽였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 왔는데 그는 멀쩡하게 살아남아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거리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서는 정상의 삶을 추구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비정상인 젊은 파시스트의 고뇌에 방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주인공 마르첼로 클레리치의 개인적 고뇌보다는 루카 콰드리 교수를 쫓는 첩보요원으로서의 활동에 좀 더 비중을 두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연출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줄리아와 안나라는 두 명의 더블 팜므 파탈을 배치해서 퇴폐적 관능미를 유감 없이 보여주었다. 전자가 백치미 넘치는 그런 여성상을 그렸다면, 후자는 독립적이면서도 도발적인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파리의 어느 댄스홀에서 줄리아와 안나가 춤추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백미였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결말과 소설의 결말은 상당히 다른 것 같은데 이제 영화를 다 봤으니 이제 원작소설을 읽으면서 비교해 보면 될 것 같다. 원래 내 계획은 소설을 먼저 읽고 나서 영화를 보는 거였는데, 명절 배송에 발목이 잡혀 먼저 영화부터 보게 됐다. 아마 나의 소설 읽기는 영화의 복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