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황현필 아저씨 너튜브에서 조선 역사 컨텐츠를 줄기차게 보고 있는 중이다. 어제는 이순신과 관련된 임진왜란 이야기들을 시청했다. 가장 최근에 올라온 임진왜란 당시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이었다는 22세의 항왜 사야가, 모화당 김충선(1571~1642)의 삶을 컨텐츠로 봤다. 일본 사무라이로 22년 그리고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 같았던 김충선의 삶은 정말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삼천포로 가는구나. 중종, 진성대군 (이혁:1488~1544)이야기에 집중해 보자.
중종에 앞선 조선의 군주는 바로 악명 높은 연산군이었다. 그는 아버지 성종의 뒤를 이어 총 12년간 집권했다. 그 중에서 폭정의 시기는 말기의 2년이었다고 한다. 어머니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1504년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자신의 계모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귀빈 엄씨와 정씨를 참혹하게 주살하고, 그들이 낳은 이복동생들도 모두 귀양 보내 사약을 내렸다.
이렇게 폭정을 하는 가운데, 연산군은 아마 반란이 일어날 경우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반란군들이 옹립할 것을 경계했으리라. 그중에 가장 유력한 인물이 바로 훗날의 중종, 진성대군이었다. 미래의 왕위 경쟁자들은 모두 죽였으면서도 진성대군을 살려둔 것도 미스터리다.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된 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1482~1530)가 낳은 적자였다.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은 바로 문관으로서는 성희안(이조참판) 그리고 무관으로서는 박원종(중추부지사)이었다. 그들은 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 형제에게도 반정에 참가할 것을 종용했지만 신수근 브라더스는 거부했고, 결국 그들 삼형제는 반정의 와중에 살해됐다. 반정군이 진성대군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들을 보냈을 때, 진성대군은 반정이 실패하고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러 병사들을 보낸 것으로 판단하고 자결하려 했으나 조강지처 신 씨가 만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은 신 씨가 중전이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내쫓기게 되었다. 권력이 없는 허수아비 왕의 실체가 아닐까. 사가로 내쳐진 신 씨가 인왕산인가 어딘가에 중종이 좋아하는 빨간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는 치마바위 전설의 시작인가 어쩐가.
그 후 중종은 두 번째 부인으로 장경왕후를 들여 인종을 낳고, 장경왕후가 죽은 다음에는 문정왕후를 들여 명종을 낳는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그야말로 잘 나가던 조선을 수렁에 빠트린 그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너튜버 황현필 아저씨에 따르면 조선의 16세기는 중종 38년과 명종 22년 치세로 60년 정도를 해먹는다고 한다. 성종-중종 연간에 나온 삼강행실도(?)와 (신)동국여지승람 등의 출판물이 나왔고, 삼포왜란으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중종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양명학이 유래되었고, 풍기군수 주세붕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 다음에는 군적수포제도 실시되었다고 하는데 이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다. 무슨 제도인지 검색을 좀 해봐야겠다.
*** 군적수포제 – 기존의 불법적으로 운용되던 방군수포제(병역을 행할 수 없는 이들이 부득이하게 병역 대신 한 달에 베 3필이나 쌀 9두를 받는 제도)를 양성화한 제도로, 16개월마다 양인 정남에게 베 2필을 징수하여 용병을 고용하는 제도다. 부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종 36년(1541년)부터 실시되었다.
이전 세기인 15세기에는 폭군 대접을 받기는 했지만 태종과 세조 같은 군주들이 부국강병책을 실시했고, 세종과 성종 같은 성군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세자 교육도 받지 못하고, 공신들의 견제를 받게 된 중종은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다. 조광조(1482~1520) 같은 신진 사림들을 기용해서, 훈구파 대신들을 제압하려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도덕군자 조광조는 사림의 숭앙을 받는 선비로 그가 계속해서 중종의 신임을 얻어 개혁정치를 실시했다면, 어쩌면 중종은 후대에 성군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물론 기득권 계급인 훈구파의 반발을 무마할 수 없어서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주초위왕(走肖爲王)’이 단초가 된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년)로 조광조가 실각하고, 귀양보내진 뒤 사약을 받으면서 중종 시대의 개혁은 물 건너가 버렸다. 중종 대에는 역모와 반란에 대한 고변이 빈번했는데, 그것도 아마 자신감이 결여된 군주 자신의 모습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국가 조선이 중흥할 수 있었던 모든 기회를 무산시켜 버린 군주 중종, 38년의 재위 시절이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