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라는 비극에 대한 하나의 르포르타주
미치게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가 그랬고, 이번에 만난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가 그랬다. 어떻게 영문 파일을 구해서 떡제본으로 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영어책이라 읽지 않고 쓰담쓰담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국의 모든 도서관을 연결하는 상호대차 서비스인 책바다가 생각났고 <뜨거운 달>과 <타니오스의 바위>에 이어 드디어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를 만나게 되었다. 참고로 도서관에서 내가 사는 부근의 도서관으로 책이 오는 비용은 1,700원이었다. 물론 그 이상이라도 내가 원하는 책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었다. 책을 소유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컨텐츠를 “읽는” 것이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서론이 좀 길었다. 소설 <파키스탄 행 열차>는 뜨거웠던 1947년 여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1956년에 발표된 책이다. 국내에 몇 번 나온 적이 있는데 물론 절판됐다. 내가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1947년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 해 인도가 식민종주국 영국의 오랜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고수해왔다. 광활한 인도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구가 4억이나 되는 광대한 식민지를 현지인들의 협력 없이 통치하기간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거기에 종교라는 문제까지 살짝 얹었다. 힌두교도와 회교도 그리고 시크 교도가 평화롭게 어울려 살던 인도는 영국이 떠나면서 유혈 폭동의 공간으로 변했다. 힌두교도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 본토에서 상대적으로 소수파였던 무슬림들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간디 선생의 비폭력 노선은 분리 독립에 눈이 먼 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공허함 그 자체였다.
포커스를 좀 더 좁게 만들어서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 펀잡 지방의 마노 마즈라라는 마을로 가보자. 마노 마즈라에는 라호르와 수도 델리는 잇는 기차가 선다. 기차는 이제는 적대적으로 변한 두 개의 공간을 잇는 연결점이다. 평화롭던 시절에는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던, 연착이 기본인 열차가 이제는 비극의 메신저가 되었다. 사건은 총과 칼로 무장한 강도 말리 5인조가 마노 마즈라 마을에 사는 힌두교도 고리대금업자 랄라 람 랄의 집을 습격하면서 시작된다. 끝까지 그들이 요구하는 금고 열쇠를 내놓지 않은 람 랄은 결국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하긴, 금고 열쇠를 줬다고 해서 그가 살아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무렵 온갖 비행으로 집행유예 중이던 시크교도 청년 주거트 싱(주가)은 무슬림 이맘 바크시의 딸 누란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절도와 살인죄로 교수형당한 도둑 알람 싱의 아들이다.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는 주가는 말리 패거리도 두려하는 그런 싸나이다. 시크교도 주가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맘의 딸 누가의 만남이 비극으로 이어지리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중년의 뻔뻔하고 탐욕스러운 치안판사 후컴 찬드가 등장한다. 민중의 공복이라는 고위 관료가 역설적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에서는 며칠간의 선거 운동기간에만 굽신거리고 당선된 후에는 공복이 아닌 주인행세를 하는 무한루프의 반복이 떠올랐다.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선전은 떠올랐다. 내가 소설을 통해 만난 인도식 민주주의는 정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치안을 맡은 후컴 찬드는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마노 마즈라 일대에 사는 이들의 안녕과 안전에는 관심이 1도 없고, 오로지 술과 푸짐한 식사, 낮잠 같은 향락에만 집중한다. 어린 무슬림 가수 소녀(하씨나 베감)를 금전으로 착취하는 건 남세스러운 비밀도 아니었다.
랄라 람 랄이 살해당한 다음 날, 마노 마즈라에 영국에서 최상위 교육을 마치고 조국에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하방’한 인도인민당 출신의 이크발 싱이 도착한다. 시크교도에게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친절이 선택이 아닌 의무였던 모양이다. 부제 미트 싱은 청년 이크발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선량한 미트 싱이 보여주는 비위생적인 모습에 진저리치는 이크발의 모습은 문명의 충돌이랄까. 지식인 이크발 주변에 모여든 마노 아즈라 마을 사람들은 그로부터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묻는다. 인도의 앞날에 대한 민중들의 걱정과 우려가 드러나는 결정적 장면이다.
병행해서 만나고 있는 에드거 모건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도 나오는 것처럼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인도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나서 현지인들을 위한 치안과 질서를 유지한다고 떠들어댄다. 그들의 교묘한 선전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영국인들이 떠나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혼란이 이어지자 민중들은 그래도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이 좋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언제나 그렇듯 희미한 과거의 기억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탈색과 변색의 과정을 거쳐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경찰 당국에서는 이크발 싱이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람 랄 살해용의자로 체포해서, 집행유예를 위반한 주가와 같이 구금한다. 치안판사 후컴 찬드로 대표되는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에게 진범 검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직 정치적 판단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진범들인 말리 패거리를 잡고서도 다른 이유로 이크발과 주가를 계속해서 잡아두고, 말리 일당은 풀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풀려난 말리 일당이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치안판사가 놔준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교활한 후컴 찬드의 일승이다.
한편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기차에 시크교도들의 시신들이 실려 오기 시작하면서 마노 마즈라 마을 역시 눈먼 분노와 차별이 들끓기 시작한다. 제발 이성적 판단을 하라는 족장 반트 싱이나 부제 미트 싱의 고언은 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시크교도들의 복수를 위해 회교도들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넘실거린다. 설상가상으로 진실 이상의 가짜 뉴스들이 횡행하면서 그야말로 불난 집에 가스통을 던지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조상 대대로 마노 마즈라에서 살아온 회교도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을을 떠날 결심을 한다. 이에 대응해서, 일단의 자경단 무리들이 나서서 떠나는 회교도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다짐한다.
힌두교도와 회교도 그리고 시크교도들의 정치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인도 소설과 달리 카스트제도에 대한 비판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인도 독립 당시, 비등하던 종교적 갈등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를 통해 그런 지식의 갈증이 조금은 해소된 그런 느낌이다.
분리 독립이라는 정치인들만의 대의를 위해 종교 갈등을 극단적으로 조장한 결과, 1946년부터 인도 각지에서는 피로 피를 씻는 폭력이 난무했다. 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민족대이동을 강제 당했다. 그런 강제이주 와중에 몬순 때문에 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소설에서처럼 신생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을 오가는 기차는 희생된 엄청난 시신들을 실어 날랐다. 수트레즈강도 학살되어 죽은 수많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이것은 소설이라기보다 시대의 참상에 대한 르포르타주처럼 다가온다.
저널리스트, 변호사, 외교관 그리고 직업 정치인이었던 쿠쉬완트 싱은 격동의 1세기(99세에 사망)를 살면서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분단의 비극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을 <파키스탄 행 열차>를 통해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30년 전의 번역이라 그런지 표기는 조악하고, 오탈자는 난무했다. 그럼에도 쿠쉬완트 싱이 다루고 있는 비극의 재현이 갖는 성취는 기대이상이었다. 한 세기를 산만큼 소설과 단편, 에세이 등 다양한 저술이 존재하는데 국내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엔 그의 대표작이라는 <델리>(미리 수배해 두었다)를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