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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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다. 어제 인천에 갔다가, 우연히 집어 든 책이 바로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기록을 찾아 보니 지금으로부터 딱 12년 전에 같은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가고, 독자의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되는가 보다. 지금으로부터 또 십년 뒤에 <베니스의 상인>을 읽게 된다면 어떤 감정일지 자못 궁금하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는 간단한다. 베니스의 거상 앤토니오의 절친 바싸니오는 벨몬트의 후계자인 포오셔 양에게 청혼하기 위해 거금 3,000다가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결혼도 그 당시에는 어쩌면 사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혼 사업에 뛰어드는 이를 위해서는 투자비가 요구된다. 학자이자 군인인 바싸니오는 사람은 좋지만 그런 거금이 없다. 앤토니오 역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다 위에 띄워 놓은 상태다. 전 세계에서 향료와 비단을 실은 배들이 베니스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앤토니오는 고리대금업을 하던 유대인 상인 샤일록을 증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자금을 융통한다. 그리고 자신을 모욕하는 앤토니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샤일록은 90일의 약속 기간을 정하고 만약 자금 회수 일정을 지키지 못한다면, 앤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취한다는 보증서를 작성한다.

 

이 보증서는 처음부터 악랄한 샤일록의 계략이었다. 처절한 복수를 원하는 그에게 3,000다카트의 12배가 되는 36,000다카트도 필요 없다. 오직 그에게 필요한 건 앤토니오 심장 부근의 살 1파운드다. 정말 살벌한 계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야만스러운 계약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계약의 쌍방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앤토니오는 계약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사태는 파국으로 흐른다.

 

희곡의 다른 축에서, 자금은 융통한 바싸니오는 포오셔의 작고한 아버지가 마련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고 마침내 포오셔의 남편이 되는데 성공한다. 이제 자신의 은혜를 갚을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보니, 그전에 포오셔는 모로코 군주의 피부 색깔 때문에 그가 배우자의 관문을 통과하지 말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 장면에서는 왠지 모를 인종차별주의적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포오셔의 이미지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페넬로페이아의 그것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영국 출신 구혼자에게는 이탈리아 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나. 그 장면에서는 또 제노포비아가... 아 너무 PC만 추구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어쨌든 포오셔는 바싸니오에게 언약의 반지를 건네 주고, 어떠한 경우에는 그 반지를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런데, 이런 설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앤토니오가 샤일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자신의 살점 1파운드를 떼낼 위기에 처한 것처럼, 바싸니오 역시 포오셔가 건네준 반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빌드업은 고전의 전형이라고 봐야 할까. 터부는 반드사 깨져야 하고, 깨진 터부가 불러온 운명의 소용돌이가 긴장감을 창출하는 내러티브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자비 대신 복수만을 울부짖던 샤일록은 벨라리오 박사의 추천을 받은 법률전문가(포오셔의 변장)의 등장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처음에 사람들이 요청한 대로, 원금이나 그 이상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면 별 문제 없이 끝났을 재판의 진행이 자신의 명예와 평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재산까지 송두리째 날리게 만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번에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읽으면서 샤일록이 정말 원한 것은 자신의 사업을 위협하는 경쟁자의 제거가 아니었나 싶다. 중세/근대 시대 고리대금업은 선량한 기독교인들이 할 법한 사업이 아니었다. 저주 받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사업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모양이다. 고리대금업을 천시하고, 원금에 대한 이자보상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앤토니오가 샤일록의 눈에는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바싸니오는 앤토니오를 양심적 상인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는 정말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향료와 비단 수입이 엄청난 수지가 남는 장사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전 재산을 그런 방식으로 투자하지는 않았다. 앤토니오가 샤일록을 통해 바싸니오에게 결혼 준비금을 융통해 주는 순간, 앤토니오의 모든 재산들은 바다 위에 불확실한 상태로 떠있었다. 만약 폭풍니나 해적에 의해 난파되거나 납치되었다면 앤토니오는 정말 알거지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샤일록의 딸 제시커도 아버지의 뜻에 거슬러 다이아몬드 일체를 가지고 사랑의 도주행에 나서지 않았던가. 아무리 이교도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탈은 허용되지 않았으리라. 중세 내내 탄압받던 유대인들을 이교도로 몰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라는 주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앤토니오의 심장 부근에서 살점 1파운드를 떼내겠다고, 샤일록이 시퍼렇게 칼날을 가는 장면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빌드업에 성공한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절정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자초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앤토니오가 덤덤하게 받아 들이겠다며 친구 바싸니오에게 말하는 장면은 희극적이기도 하다. 만약 사태가 그대로 진행됐다면, 친구의 도움을 받아 포오셔와 결혼하게 되는데 성공한 바싸니오가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으리라. 그가 진정 양심적인 학자이자 군인이었다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렇기 때문에 아내 포오셔가 나서서 조금은 사기가 연루(?)된 현명한 방식으로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 가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그동안 제목 <베니스의 상인>이 악랄한 유대인 상인 샤일록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다시 읽어 보니 멍청한 상인 앤토니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상당히 중의적인 의미가 아닐까. 또 한편으로는 상인이 추구하는 목적인 이윤이 샤일록이 집요하게 구가하다가 결국 패가망신한 복수에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셰익스피어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래 고전은 원래 이렇게 다시 읽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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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26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 예전에 읽었는데 살을 베어가겠다는 말이 나오죠.ㅋ

레삭매냐 2023-11-26 18:58   좋아요 0 | URL
이번에 다시 읽어 보니,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저 살 1파운드라고 되어 있더
군요.

그걸 샤일록이 무기 삼아 심장 부근
에서 살을 베어가겠다고...

법규정 적용의 허술한 점을 정확하게
타격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감 2023-11-26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으으 이거 진짜 재미있습죠.
셰익스피어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더라는.

레삭매냐 2023-11-26 18:59   좋아요 1 | URL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섞여 있
어서 그런지 말씀해 주신 대로 매력
뿜뿜이었습니다.

앤타이-세미티즘은 그 시절부터 존재
했었나 봅니다.

새파랑 2023-11-26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고전은 다시 읽어야 하는 법이군요~!! 레삭매냐님 리뷰 읽어보니 이 책 엄청 재미있을거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11-26 19:04   좋아요 1 | URL
대략의 줄거리들은 알고 있었으나
또 새롭게 보이니, 역시 고전 파워
가 아닌가 싶습니다 :>

페넬로페 2023-11-26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단순히 느꼈던 권선징악의 결과와는 다른,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유대인을 사악하게 몰아가는 법과 관습들이 지독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해봤어요~~

레삭매냐 2023-11-26 22:21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저도 단순하게
권선징악으로만 보았는데 다시 또
읽어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
습니다.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 유대인들을
이교도로 보고, 십자군 전쟁 때도
그랬지만 유구한 차별의 역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전집 2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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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달이 지나, 이번 주말 달궁 독서모임 출격할 때가 되었다.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이탈로 칼비노의 <반쪼가리 자작>을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백 쪽 남짓한 책이라 금방 다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판단착오였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렸다. 칼비노가 대단한 작가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투르크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테랄바 출신 화자의 외삼촌 메다르도 자작은 보헤미아로 황제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쟁터로 출발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비엔나 침공은 1529년과 1683년 두 번 있었다. 사실 <반쪼가리 자작>에서 판타지 서사의 개시를 예고하는 투르크의 침공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어쨌든 전장에서 메다르도 자작은 투르크군의 포탄에 맞아 몸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억세게 운이 좋게 응급조치를 받은 메다르도 자작은 반쪽의 몸으로 생환하는데 성공한다.

 

자 이제부터 소설은 판타지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최전선에서 들것에 실려 테랄바로 돌아온 반쪼가리자작은 순식간에 악마의 화신으로 변신한다. 기존의 선한 부분은 대포에 맞아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테랄바의 영주로 공정한 재판을 행해야 하는 자작은 그야말로 독재정의 진수를 보여준다. 재판에 회부된 약탈자들도, 그리고 그들을 고소한 피해자들도 모두 사형에 처해 버렸다. 농민들이 세금을 제 때에 내지 않아도 자작은 무조건 처형으로 응수했다. 어쩌면 칼비노는 이 지점에서 법치만능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싶었나.

 

참 그리고 보니 그전에 아버지 아이올포 자작도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불구 아들의 횡포에 놀라 비명횡사해 버렸다. 그리고 자작은 자신을 어머니처럼 키워준 유모 세바스티아나도 문둥병으로 몰아 추방해 버렸다. 반쪼가리 자작의 폭정은 계속된다.

 

이탈로 칼비노 작가는 1차 세계대전에서 비록 전승국이 되었지만,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가 집권한 이탈리아의 암울한 현실을 반쪼가리 자작의 폭정이라는 설정에 녹여낸다. 그렇다면, 소설 도중에 등장하는 위그노들은 누구인가. 아마 기근과 페스트에 시달린 보통의 이탈리아 사람들을 상징하는 하나의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작의 조카인 화자는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한다.

 

전후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파시즘에 맞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공산당이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대의명분과 민중의 지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 있었다. 칼비노 역시 공산당원이었다. 하지만, 서방세계에서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선거로 집권하는 것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에서는 기존의 파시스트들이 극적으로 변신한 우파의 집권을 지원했다. 전후 일본과 서독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몸의 오른쪽 부분만 남은 반쪼가리 자작의 만행이 도를 더해 가고 있을 때, 투르크군의 대포에 맞아 산산 조각난 것으로 알고 있던 자작의 나머지 반쪽이 등장한다. 그리고 보니 그전에 양치기 소녀 파멜라에게 영혼을 빼앗긴 사악한 반쪼가리 자작이 그녀를 성으로 잡아가겠다고 협박을 했던가. 자작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숲속의 동굴에 숨어 사는 길을 택한 파멜라. 그리고 그런 파멜라에게 세상의 소식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맡은 게 바로 화자라고 했던가. 그 장면에서는 무솔리니 정권에 저항하면서 무장투쟁에 나선 빨치산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금 진부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나머지 반쪼가리 자작의 성격은 정확하게 사악한 반쪼가리 자작의 그것과 정반대였다. 이런 설정은 분열하고 갈등하던 이 둘이 만나 결국 결합하게 된다는 건, 루키노 비스콘티 같은 네오리얼리스트들에게는 그야말로 판타지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던 서사가 비극이 아닌 나름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게 아쉬웠다. 어쩌면 이 소설이 발표되던 1952년의 시대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모든 갈등과 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선택된 방식이 전통의 결투라는 점도 상징적이다. 근세적 발상이라고나 할까. 결투에 나선 둘 중의 하나는 끝장이 나야 마침표를 찍는 방식이 과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아예 문제를 발생시키는 요소를 제거시키는 방법이 옳은 것일까. 결투 무대에서 온전하지 않은 육신으로 상대방에게 파멸적 일격을 가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상이한 자아들의 자기분열적 모순을 이탈로 칼비노는 극대화시킨다. 만약 누군가 이 장면을 스크린에 담는다면,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인터메조를 BGM으로 깔면 좋지 않나 싶다. 아주 느린 연출로.

 

책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정치적으로 접근한 게 아닌가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 또한 나란 인간의 한계인 것을.

 

[뱀다리] 또다른 문제적 인간들인 기술자 피에트로키오도와 의사 트렐로니, 한센병 환자 갈라테오에 대해서는 토요일날 좀 들어 봐야지. 다시 들어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인터메조는 웅장하고 짜릿하다.

 

[인용 104페이지]

 

그렇게 테랄바에서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색깔을 잃어버렸고 무감각해져 버렸다.

 

비인간적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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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1-09 20: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을 통해서 왠지 레삭매냐님께서는 언변이 출중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독서모임에서는 읽고 생각한 것을 잘 정리해 말해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이탈로 칼비노 작가의 작품은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는데 관심 가져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3-11-10 00:41   좋아요 3 | URL
출중한 언변까지는 아무래도 무리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가 봅니다 ^^

그래서 보통 독서모임에서 할 말들을
적어 가곤 한답니다. 물론 대개 처음
에 의지와는 다르게 돌아가지만요.

저는 15년 전에 <왜 고전을 읽는가>
라는 살벌한 책으로 칼비노 작가를
처음 만나고 나서 두 번째인가 싶습니다.

서니데이 2023-11-0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소설가의 책들은 가끔 낯선 판타지 느낌이 들어요.
아마도 우리 나라와는 다른 문화라서 그런 거겠지 싶기도 합니다.
이 작가는 유명한데도 읽은 책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다음 기회엔 조금 더 찾아봐야겠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11-10 00:42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그 동네 사람들이
판타지물을 좋아하는가 봅니다.

곰돌이들이 시칠리에서 사람과 싸
우기도 하구요...

감사합니다 꾸벅 -

그레이스 2023-11-16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칼비노는 세 권 정도 읽었는데 요 책은 아직입니다.
내용이 흥미롭네요.
꼭 읽어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3-11-16 18:14   좋아요 1 | URL
저는 이번이 칼비노의 두번 째
책이었답니다.

뭔 도시인가도 하나 개지구 있
는데, 상당히 철학적인 책이라
는 말을 이번 모임에서 얼핏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왜 고전을 읽는가>로 처음
만났는데, 너무 어려워서 ㄷㄷ
 
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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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트 기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너튜브 <역전다방> 태평양전쟁 편을 통해서였다. 사실 난 해당 프로그램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곳곳에서 전투에 대한 소개를 기대했지만, 역전다방 4인방은 자세한 전투의 개요 대신, 전쟁의 전반적인 흐름과 새롭게 개발된 전쟁무기 같은 기술을 소개해 주더라.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막대한 전비를 들여 개발한 슈퍼포트리스 B-29와 원자폭탄이 과연 전쟁 종결에 도움이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을 이 책의 말콤 글래드웰은 묻고 있다.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의 발전은 전쟁의 흐름까지 바꿀 기세였다. 훗날 미공군의 주축이 되는 맥스웰필드의 이른바 폭격기 마피아들은 상대를 압도하는 공군력만으로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조를 가졌다. 과연 그랬을까?

 

지금은 레이더 항법장치와 GPS의 발전으로 정밀폭격이 가능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까지만 해도 그것은 불가능했다. 히틀러 정권의 2인자였던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은 루프트바페를 동원해서 유럽대륙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영국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이런 영국 항공전에서 전혀 교훈을 배우지 못한 미국의 폭격기 마피아들은 공군력을 동원해서 적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등장하는 문제적 인물이 바로 폭격조준기를 발명한 칼 노든이다. 그러고 보니 역사의 진보는 칼 노든 같은 괴짜와 집착의 결합에서 나온 무엇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고도 정밀폭격이라는 신화에 집착한 폭격기 마피아들은 도무지 포기할 줄 몰랐다.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하던 헤이우드 핸셀과 커티스 르메이는 전혀 성향이 다른 캐릭터들이었다. 전자가 폭격기 마피아의 이상을 대변하는 몽상가였다면, 후자는 전형적인 실천적 인물이었다. 적을 패배시킬 수 있다면, 르메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런 실전형 장군이었다. 그런 점에서 르메이는 적국의 생산수단을 무력화시키는 고고도 공중폭격이라는 원래의 의미 대신, 하버드 대학에서 개발된 네이팜탄을 이용해서 민간인까지도 쓸어버리겠다는 전쟁광 같은 인물이었다. 결국 미국의 전쟁지도부는 핸셀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호전적인 르메이를 배치시키면서 일본에 대한 대대적인 공중폭격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폭격기 마피아들이 독일에서 볼베어링 산업을 마비시켜 나치 독일의 전쟁의지를 꺾기 위해 시도한 슈바인푸르트와 레겐스부르크 폭격의 효과 역시 미비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들의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효과적 전쟁의 수행이라는 폭격기 마피아들의 의도는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판타지가 아니었을까.

 

폭격기 마피아들의 신조였던 고고도 정밀폭격의 신화는 사실 효과가 없었다는 게 전후에 상세한 보고서로 입증되었다. 르메이크는 인도 콜카타에서부터 험프(히말라야 산맥)를 넘어, 청두 그리고 일본 본토 공격에 나섰지만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 특히나 청두에 연료 공급을 위해서는 1리터를 위해 12리터를 사용해야 하는 아이러니와 직면했다. 험프를 넘다가 항공기 손실은 물론이고, 폭격기에 탑승한 항공병들도 무수히 죽어나갔다. 적의 생산시설에 심대한 타격을 가한 것도 아니었다.

 

르메이는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 수십억 달러를 들여 개발한 슈퍼포트리스를 그냥 놀릴 수는 없었다. 이 논리는 나중에 핵폭탄 사용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나중에 수정주의 역사가들의 전후 연구에 따르면, 원자폭탄을 두 방이나 맞고서도 끝까지 저항하던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 낸 결정적 요인은 바로 극동에서 150만 소련군의 참전이었다. 일본의 패전이 뚜렷해져 가는 상황에서, 굳이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할 이유가 있었을까. 소련군의 참전과 더불어 기존의 해상봉쇄만으로도 충분히 일본의 패망은 예견되었다. 심각한 기아에 직면한 일본 사람들을 위해 파란 눈의 쇼군 맥아더는 1945년 말에 막대한 양의 식량공급으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네이팜탄이 하버드 대학에서 개발되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자는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한 사탄의 경우를 들어 핸셀과 르메이를 비교하기도 했는데, 기가 막힌 비유가 아닌가 싶다. 몽상가는 유혹을 거부했지만, 당장 실적을 군부와 수년간에 걸친 전쟁에 지친 시민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던 실천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르메이는 적국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대해 주저하던 자신의 전임자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도교대공습에 나서기에 앞서, 작전 목표를 전달받은 슈퍼포트리스 조종사들의 항의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우리의 맹목적 실천가는 그들의 항의를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전쟁에서 미국이 졌다면, 바로 전쟁범죄로 처벌받을 만한 그런 명령이 아니었을까.

 

지난달에 사서 조금 읽다 다시 집어 들었는데, 하루 만에 다 읽어 버렸다. 가독성 하나는 가히 최고였다. 그리고 그동안 보고 들은 것들이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효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역시 독서는 이런 점에서 종합적 배움과 깨달음의 최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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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1-06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밌는가 봅니다. 저는 전쟁사는 영...ㅠ
이러고 저러고 지간에 전쟁이나 어떻게 좀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소식을 듣는 것도 괴롭더군요. 덕분인지 러-우 전쟁은 잠잠한 것 같기도 한데...
말에 의하면 전쟁은 그동안 만든 무기를 소모시키기 위한 거란 말도 있던데
그러기엔 인간은 참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ㅠ

레삭매냐 2023-11-07 21:02   좋아요 1 | URL
전쟁사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르라 종종 읽는답니다 ^^

이 분은 전사가도 아닌데, ‘집착‘
으로 글을 쓰셨다고 하시더라구요.

소위 말하는 전쟁상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애써 만든 무기들을 소
진할 그런 전쟁을 원한다고 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전쟁 대신 평화가
오기를 기원합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 사계절 만화가 열전 21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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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이 16,800원이다. 그전에 웹툰(?)인가로 나왔다는 소식에, 잠깐 유료(, 유료서비스를 했던가?)로라도 봐야 하나 싶었지만 언젠가 도서관에 비치될 거라는 작은 희망을 걸고 패스했다. 그게 지난 7월이었나 보다. 석달이 지난 10월에 예약도서로 감격의 상봉을 했다.

 

그런데 1편보바도 더 싱거워진 느낌이랄까. 새로운 인물로 진짜 사서(라이브러리언)인 다크 섹시 설기 씨가 등장하고, 히말라야 고향으로 돌아간 예티 대신 그의 친족으로 추정되는 사스콰치가 새로운 멤버로 등장한다.

 

사실 좌충우돌하는 이야기의 전개 때문에 서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일단의 독서 중독자들이 펼치는 서사가 궁금할 뿐. 그리고 보니 우리도 달궁에서 비슷한 짓거리들을 하지 않는가 말이다. 십년이 넘게 만난 이들의 이야기 창고는 가득하여, 새로운 이야기들 뿐 아니라 옛 이야기들 그리고 한동안 자리를 빛내 주다가 이제는 잊혀진 인물들의 섭렵까지. 아마 그래서 경찰이 바이커 갱들을 소탕하겠다며 다시 등장할 적에는 살짝 감동을 먹기도 했다.

 

우리 고인물 때문에 점점 더 새로운 피 수혈은 쉽지가 않다. 게다가 우리 두목은 아르헨티나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어떻게 지금까지 끌어온 독서모임의 과거와 현재가 그저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2편을 보기에 앞서 1편을 다시 복습했지만, 독서 중독자답게 내용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또 다시 볼 생각은 1도 없다. 그냥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퇴근하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예약도서를 받아왔고, 생선구이 냄새가 진동하는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설거지까지 다 마친 다음에 정갈한 마음으로 다른 독서 중독자들의 이야기를 훔쳐보기 시작한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천상 독서 중독자의 일원이 아닌가 싶다. 사실 회사 근처 동네의 독서모임을 알아보았는데, 나이가 많다고 바로 까여 버렸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아마 좀 더 나이가 덜 먹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이제는 그것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나이가 된 모양이다.

 

단박에 휘리릭 읽고 나서 무언가 싱겁고 아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1편에는 뭐 탈이 나면 사자도 풀을 먹는다 그런 멋진 문구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2편은 그런 1편과 달리 왜 이리 시큰둥한 건지 모르겠다. 프랭크처럼 어중간하다고 해야 하나 어쩌나.

 

<욕망의 동토>는 진짜로 존재하는 책인가 싶어서 검색해 봤는데 아닌가 보더라. 대신 마이클 돕스의 숫자 시리즈 책들은 세 권이 실제로 존재했다. 다크 섹시는 사서답게, 독서 중독자들이 책 이름을 대면 바로 기계적으로 청구번호를 대는 신공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는 행위가 독서 중독자들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지 그리고 받아도 주는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지 않을 거라는 그런 심정을 이창현 작가는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사서 다크 섹시는 사서답게 제발 책에 생물학적테러는 가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보니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구석탱이에 라면 국물 테러의 흔적을 만난 적도 있지 아마. 한동안 어이가 없어서, 멍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그렇게 독서 중독자들과 유은실 작가의 <순례 주택>을 빌려서 품에 안고 나오는 길에 도서관 옆에 자리한 독립서점 <책방 연두>를 살짝 들여다봤다. 어둠이 내린 뒤라, 잘 보이지 않더라. 그전에 들어 보니 화요일날 저녁에 책읽기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어쨌나.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아 대충 사진 한 장 찍고 후퇴했다. 집에 가까운 거리에 독립서점이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미처 몰랐는데 이창래 작가의 신간이 나올 모양이다.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됐다. 계속해서 책을 사대는데 마무리하는 책이 없다. 나도 책에 대한 애정과 집착 그리고 허세를 어쩔 수 없는 독서 중독자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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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10-25 06: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독서 모임의 최대 고민은 새로운 회원 영입의 어려움인 것 같아요. 늘 보던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즐겁고 좋지만, 자주 참석할 것 같았던 고정 회원이 갑자기 빠지면 모임 존속이 어려워져요.

레삭매냐 2023-10-25 10:08   좋아요 2 | URL
거의 모든 독서 모임이 그러하군요.

기존 코어 멤버들은 가두리에 가두
면서,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ㅋㅋㅋ

오랜 만에 보게 되면 참 좋더라구요.

미미 2023-10-25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회사근처 그 독서모임은
귀한 멤버를 놓쳤네요!

1권은 저도 가물가물해서
한 번쯤 다시볼 의향이 있습니다^^

조금 오래된 도서관 책 뒷장에는
대출이력같이 이런저런 오염에
관해 적어두었더군요. 적다가
사서도 포기한듯 합니다.ㅋㅋㅋ

레삭매냐 2023-10-25 14:37   좋아요 1 | URL
탐문이나 해볼까 한 거라
그다지 아쉽지가 않더라는 ^^

공공의 재산인 도서관을 좀 더
소중하게 다루어 주었으면 하
는 작은 바람이 있습니다.

초란공 2023-10-25 14: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주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멤버가 있다면 배울 수 있는 것들도 많아 좋긴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오래될수록 젊은 층은 더 오기 부담스러할테고요... 친구 별로 없는 저는 그나마 알라딘 서재가 제 놀이터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10-25 14:38   좋아요 1 | URL
그렇죠 :>

저도 독서 모임에 가서 배우는 게
참 많답니다.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다른 분들은? 역시나 같은 텍스트를
읽으면서도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구나 싶어서 무릎을 치게 됩
니다.

저희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주셨네요.
모임이 오래 되다 보니, 뉴비들이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그레이스 2023-10-29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많은 분들이 리뷰 올리셔서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e북 찾아 읽어보려구요.
방금 이창래 작가 신작 소식 봤습니다.
영원한 이방인 원서까지 사놓고 못읽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신작까지 읽어봐야겠네요.
9년만의 신작이라던데...

레삭매냐 2023-10-29 22:06   좋아요 1 | URL
1편도 그랬지만, 2편에서도 그 결을
같이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창래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 9년 전
이었나요 세상에... 시간이 참 빠르네요.

오래 전에, 서울에서 직접 뵙고, 책에
사인도 받아서 참 기부니가 좋았더랬습
니다.

새 책은 일단 수급해 두었는데 오늘부
터 읽어야겠네요.

고양이라디오 2023-11-06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모임이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으신가요? 10년 쉽지 않을텐데 대단합니다^^

레삭매냐 2023-11-06 16:57   좋아요 1 | URL
펭귄클래식 독서 모임으로 출발하야,
자그마치 12년을 달려 왔네요.
그 시절에는 격주에 한 번 씩 모이기
도 했다는...

유구한 역사네요.

이번 주말에는 이탈로 칼비노의 책
으로 만난답니다.
 
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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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세기의 미남이라던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를 봤다.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맷 데이먼이 나오는 <재능있는 리플리>라는 제목의 영화를 봤다. 희대의 사이코패스-시리얼 킬러 톰 리플리를 주인공으로 한 동명의 소설과 그렇게 연결점을 찾아냈다.

 

미국 출신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이상하게도 본국이 아닌 유럽에서 먼저 그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선지자는 무릇 그 고향에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했던가. 하이스미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니 어쩌면 자기 나라보다 유럽을 자신의 문학적 이상향으로 설정한 탓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발표한 네 번째 소설이자 대표작 <재능있는 리플리>의 주된 배경은 이탈리아 몬지벨로, 로마 그리고 베네치아다.

 

별다른 재능이나 학벌 혹은 든든한 집안의 후원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톰 리플리에게 선박 재벌 그린리프 씨가 접근한다. 그렇지 않아도 자잘한 수표 사기 때문에 경찰의 추적을 두려워하던 리플리는 그린리프 씨가 자신에게 의뢰한 사건을 덥석 문다. 무엇 하나 잃을 것 없는 리플리가 거절할 리가 없지.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보내주는 돈으로 한량 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아들 디키 그린리프를 찾아 본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는 거래다. 디키의 어머니는 백혈병으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 더 그린리프 씨의 의뢰를 타당하게 만들어 준다. 유럽에 가는 여행과 체류 비용을 모두 대주겠다는 거의 백수/수표 사기꾼 같은 삶을 리플리가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심리 스릴러 소설답게 진행이 빠르다. 군더더기 없는 전개와 속도감 넘치는 진행은 두 번이나 영화화된 소설의 아우라를 극대화시킨다. 개인적으로 영화 <재능있는 리플리>의 맷 데이먼의 역할이 계속해서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는 그의 모습과 중첩되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이탈리아에 건너간 리플리는 천신만고 끝에 디키의 절친이 되고, 그를 미국으로 보내기 위한 회유에 들어간다. 하지만, 리플리는 곧 이탈리아에서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이 풍족하게 지내며 삶을 즐기는 디키가 미국에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미션은 이미 끝난 게 아니던가.

 

바로 그 지점에서 리플리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운명과 대척점에 서있는 디키의 그것을 바라보며 분노와 시기, 질투 같은 복잡한 감정의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간다. 소설 역시 그의 감정의 폭풍과 함께 날카로운 변곡점을 그리기 시작한다. 본 시리즈(Bourne series)에서처럼 리플리 역의 맷 데이먼은 하이스미스가 그린 냉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25세의 꿈 많은 젊은이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살인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마침내 자신의 의지대로 거머쥔 리플리는 계속되는 행운에 힘입어 자신을 옥죄어 오는 수사망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행운과 더불어, 몬지벨로에서 만난 디키를 사모하는 미국인 아가씨 마즈 셔우드 양의 도움도 한몫했다. 새로 리메이크된 영화에서는 마즈 역을 기네스 팰트로가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시나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디키와 닮은 외모와 비슷한 체형을 이용해서 수사망을 이리저리 빠져 나가는 리플리의 행운은 1950년대나 가능한 일이었지 영상의 실시간 조회가 가능한 지금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으리라. 어쩌면 50년 전의 그런 구식 전개를 한 수 접어주고 본다면 이해가 갈 법도 하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2차 세계대전 후, 팍스 아메리카나 고성장 시절에 주류 사회에서 도태된 청년이 서서히 사이코패스가 되어 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냈다. 다른 사람처럼 아니 그 이상의 들끓는 욕망을 가진 리플리가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깨닫고, 성공의 사다리로 올라갈 수 없다는 걸 자각했을 때 벌어지는 사태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자신을 디키 그린리프로 동질화시키면서도 동시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별 볼 일 없는 톰 리플리로 변신하는 과정에 대한 합리화는 상황에 맞춰 자신의 몸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카멜레온을 연상시킨다. 물론 동물의 왕국에 사는 카멜레온은 누군가 해치지 않지만, 리플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설을 다 읽고 났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오래된 <태양은 가득히>보다 앤소니 밍겔라의 최신 버전이 낫겠지 싶다. 영화로 다시 한 번 톰 리플리의 재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소설 제목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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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0-24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보면서 리플리의 거짓말이 들킬까봐
괜히 제가 다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납니다.ㅎㅎㅎ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고 스토리도 마음에 들어서
책으로 꼭 읽어봐야지 해 놓고 여태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요.

레삭매냐 2023-10-24 15:34   좋아요 1 | URL
되짚어 보니 그런 점에서
스릴러가 아닌가 싶네요.

결국 언젠가 리플리의 행각이
발각이 될 텐데... 아 쫄렸습니다.

절판되었다가 이번에 새로 다시
나왔나 봅니다.

하이스미스의 다른 책도 수배해
두었는데 미처 못 읽고 있네요.

유부만두 2023-11-09 0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커버링인가봐요. 예전 표지(작가 얼굴 있는 것)로 갖고 있는데 읽어야지 결심만 몇번인지 몰라요. 매번 그러다 영화를 보고 맙니다. 옛날 알랭 들롱 나오는 거요.

레삭매냐 2023-11-09 14:44   좋아요 0 | URL
아마 기존 판권이 소멸하여 새로운
출판사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알랭 들롱 주연
의 <태양은 가득히> 결말 보고 충격
을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리플리>도 나름 갠춘하지 않았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