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세계사 - 지금의 세계지도와 역사를 결정한 59가지 전쟁 이야기
김성남 지음, 진선규 그림 / 뜨인돌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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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쟁이란 무엇일까? 독일의 유명한 군사전문가인 클라우제비츠에 의하면 전쟁은 고도의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한다. 정치적으로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았을 때, 최후의 방법으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된다. 그 유명한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자도,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야말로 상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인류사에서 전쟁은 필요악처럼 그렇게 존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김성남 씨가 글을 쓰고, 진선규 씨의 멋들어진 일러스트가 수를 놓고 있는 <전쟁세계사>에는 표지에 나오는 타이틀대로 “지금의 세계지도와 역사를 결정한 59가지 전쟁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제1장에서는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부제로, 전쟁터에서 뛰어는 모습을 보여 주었던 전사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테베의 150쌍의 동성연애자들로 구성된 신성군단 이야기와 바이킹의 광전사(狂戰士) 베르세르크가 광대버섯에 들어있는 암페타민 다시 말해 각성제를 먹고 전장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흥분해서 날뛰었다는 가설이었다. 테베의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신성군단은 그런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당시 최강의 육군으로 불리던 스파르타군을 대파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단다. 아무래도 전사 개개인의 개별 능력이 중시되는 고대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전쟁 도구와 기술의 발달사를 그리고 있는데, 역시 뭐니 뭐니 해도 고대 최강의 무기는 로마군의 제식 병기로 에스파냐에서 생산된 철로 만들어진 단검 글라디우스와 7세기 중반 칼리니코스가 발명했다는 동로마제국의 비밀병기 “그리스의 불”이었다. 단순한 운동에너지를 전달하는 타격 무기로서의 검의 기능성에 찌르기를 겸한 글라디우스는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팍스 로마나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핵심 무기였다. “그리스의 불”은 당시 욱일승천하던 이슬람 아랍군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717-8) 동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모면하게 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이런 기술들은 훗날 개발된 기관총 같은 대량살상무기에 비교할 순 없겠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 보았을 때 전세를 뒤집을 만한 첨단기술이었다.

이 책이 다른 전쟁을 다룬 책들과 변별이 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작가가 역사 속의 전쟁에서 어떻게 보면 비중 없이 다루어졌을 일반 병사들의 시점에서 종군기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특히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의 동방 원정을 따라 출정한 밀로스의 가상 일기는 인상적이었다. 변변한 장비도 갖추지 않은 채, 끝없는 알렉산드로스 왕의 원정에 신물을 내면서도 전투에서 이기고 약탈로 한몫 챙기겠다는 병사의 상상에서 당시 전쟁의 양상을 그려볼 수가 있었다. 아주 참신한 아이디어였던 것 같다.

역시 전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웅들의 일대기 중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명장으로 유스티아누스를 보좌한 벨리사리우스와 나폴레옹에 대해 폄하하기 위해 숙적 영국의 매스 미디어에서 나폴레옹이 단신이었다는 프로파간다가 눈길을 잡았다. 동로마 제국의 기초를 닦은 유스티아누스였지만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계속해서 기용하면서도, 혹시나 그가 역심을 품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카르타고와 이탈리아 원정에서 대성공을 거둔 벨리사리우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여 주지 못하는 모습에서 황제와 뛰어난 장군간의 조화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역시 프랑스 대혁명 이래, 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을 의도적으로 깎아 내리기 위해 그의 키가 작았다는 주장을 내놓은 영국의 매스 미디어들의 선전전 덕분에 아직까지도 나폴레옹에 대한 이미지 훼손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마지막으로 인류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전쟁들을 다루고 있는데 아마 무엇보다도 서방과 동방의 첫 대결이자 이후에 역사를 가른 페르시아 전쟁 당시의 테르모필레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을 저자는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전쟁의 승리로 인해 그리스 문명 세계가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 승리 운운하는 것은 좀 지나친 도약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지상전을 맡았던 스파르타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전제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고,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아테네 역시 극도로 억제된 신분에 의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찌됐던, 페르시아의 침공 실패로 그리스 문명은 기사회생하게 되면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건 사실이다.

13세기 코레즘제국을 초토화시키고, 계속해서 이슬람 세계를 향해 파죽지세의 진군을 하던 몽골군은 지금의 팔레스타인 부근의 아인잘루트에서 이집트와 시리아 맘루크들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된다. 그동안 시리아와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중동의 패권을 두고 다퉈 왔지만, 몽골의 위협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연합하게 된다. 한편,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주력은 대칸[大汗]을 위한 쿠릴타이를 위해 몽골로 돌아가고, 키트보가가 이끄는 잔여 병력은 맘루크 연합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고 만다. 이슬람 세계를 무적의 몽골군으로부터 지켜낸 이 전투에 대해 모르고 있어서 그런지 짧지만, 인상적인 에피소드였다.

전반적으로 책의 구성을 보았을 때, 참신한 시도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책 읽기에 부담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설서적인 의도로 편집이 되어서 그런진 몰라도 깊이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도 무엇보다 좋았던 일러스트레이터 진선규 씨가 그린 일러스트들로 유머가 배어 있으면서도 적재적소에 배치한 일러스트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제 막 세계에 유서 깊은 전쟁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로서 제격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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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20세기 한국을 읽는 25가지 풍속 키워드
손성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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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 기자 출신의 손성진 씨가 지난 우리네 삶의 흔적들을 담은 책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의 키워드는 바로 정(情)이었다.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쫀드기, 뽑기 같은 불량식품 먹거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박가분-구리모 그리고 흑백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세기 대한민국 풍속사의 변천을 자세하게 그려냈다.

지난 세기 후반, 당시 지상과제였던 경제발전은 전근대적이었던 우리네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동시에 어쩌면 그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서들도 그 삶의 모습들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불량식품 이야기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을 보다 말고, 교직에 계셨던 어머니에게 물어 보면서 기억이 나지 않거나 하는 부분들에 대해 보강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가령 쫀드기나 뽑기 같은 불량식품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해 보았으니 안다고 하더라도, 송충이 잡기나 쥐를 잡아서 쥐꼬리 잘라오기 같은 숙제는 알 수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상세한 설명을 달아 주셔서 이해가 쉽게 갔다. 풀빵, 붕어빵 그리고 국화빵이 모두 한 형제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트렌드세터 에피소드들 가운데서는 장발, 미니스커트 그리고 통금이라는 주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판을 치던 가운데, 독재의 영속화를 위협한 것은 바로 젊은이들의 자유정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억압받아온 젊은 영혼들은 남자들은 장발, 그리고 여자들은 복장으로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표현해냈다. 하지만 독재정권 답게, 억압적으로 이런 시대정신을 억누르려는 사고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단속해서 결국에는 즉심, 입건 심지어는 구속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국민들의 기본권마저 침해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발상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통금 역시 미군정과 한국전쟁으로 장장 37년간이나 시민들의 자유를 옥죄어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통금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황급하게 귀가하던 어른들이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스파이더맨마냥 슬금슬금 집으로 향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통기타와 포크송이 주류를 이루던 70년대 음악계 이야기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 시절 오디오는 정말 귀한 아이템이었다. 실용을 추구하던 우리 부모님에게 오디오 컴포넌트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아마 그 시절에 지금과 같은 홈시어터 시스템을 구축할 수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하긴 그 시절에는 조그만 카세트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금지곡에 얽힌 이야기들은 역시 정치와 관련되어져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서 해외의 수많은 명곡들을 접할 수가 없었다. 유신독재 정권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행복해야만 했는지, 레드컴플렉스 때문에 ‘붉은’이란 단어에 극도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표지에 공산당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비틀즈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음반도 통째로 금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은 그게 아니었다. 비록 가난하고 못 먹고, 못 입고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사람냄새가 나는 삶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고도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진행된 핵가족화, 개인주의는 기존의 그런 공동체적인 우리 전통의 삶의 형태마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없는 것 없이 모두 갖춰진 현대적 삶은 그 시절의 정(情)을 담보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이렇게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정신은 날로 피폐해져 가는 것만 같다. 우리보다 반세기 전에 이미 이런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서구인들의 깨달음에, 우리는 이제서야 조금씩 접근해 가고 있는게 아닐까. 한 세기에 걸친 옛 시절에 대한 풍속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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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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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의천도룡기>에 보면 무당파의 장문인인 장삼봉이 큰 위기 가운데 사랑하는 제자의 아들 장무기에게 태극권의 비결을 알려 주는 장면이 나온다. 장삼봉은 태극권을 시전하고 나서, 장무기에게 얼마나 깨달았느냐고 묻는데 장무기는 시전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잊어 먹는다는 대답만을 한다. 이제 막 읽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완독하고 나서 든 나의 느낌이 그랬다.

이탈리아가 배출한 뛰어난 문인인 이탈로 칼비노가 자신이 선정한 서양 문학의 고금을 아우르는 작품들에 대해 저술한 다양한 글들을 모은 <왜 고전을 읽는가>는 오늘날 고전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본격적인 책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이 책을 나름 쉽게 보았다가 낭패를 당한 이의 기록이자 개인적으로 그동안 얼마나 고전과 담을 쌓고 살았는지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먼저 칼비노는 책의 머리에서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짧은 에세이에 대해 우리가 읽어야만(물론 전혀 그런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고전들에 대한 개인의 고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는 고전을 “읽는다”가 아니라, 항상 “다시 읽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고전에 대한 허풍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신간들과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평생이 걸려도 가능하지 못할 고전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전(古典)에 대한 정의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기원한 클래식(classic) 즉 다시 말해 무조건 오래되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야겠지만, 전적으로 칼비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개인적으로 근현대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소중한 경험과 특별한 영향력을 미친 작품이라면 응당 고전의 범주에 무난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작고한 김소진 작가의 “신풍근 배커리 약사” 같은 작품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

그의 주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의 하나는 바로 고전을 읽으면서, 독자 스스로가 작품 자체를 바꿀 수도 그리고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고 가정한 부분이었다.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라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제공해 주고, 또 읽었던 책이라면 또 새로운 경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나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경험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소중한 독서의 체험이 아니던가 말이다.

고전과의 만남을 통해 그 구조를 파악하고, 인류 역사를 통해 설정되어져온 규정들을 체험하며 언젠가는 그 고전들로 채워진 나만의 서가를 꿈꾸는 것은 독서인 모두의 꿈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가 있었다.

그 외에 모두 해서 35편의 글들을 통해 호메로스의 인류 시초의 원초적 모험기 <오디세이아>로 시작을 해서 현대 작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인류학과 민속신화학을 아우르는 인간 희생 제의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군들을 만나게 된다. 칼비노의 인류의 문화사 전반에 걸친 예리한 분석과 시공을 초월하는 공력 앞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독서를 해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시샘마저 들었다.

사실 그가 이 책 <왜 고전을 읽는가>를 통해 소개해 주는 많은 고전들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미처 내가 모르고 있는 방대한 양의 고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어떤 책들은 예전에 읽었어도 채 망각 속으로 사그라지어 버린 책들이 많았으며, 대부분의 책들은 국내에 소개가 채 되지 않아 접하고 싶어도 접할 수가 없는 책들도 있었다. 특히 그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최고로 꼽았던 <우리 서로의 친구>의 경우에는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칼비노가 흠모해 마지않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현대 영화가 가시는 가시성과 영화편집의 요소들을 들어가며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를 지배해 왔던 프톨레마이오스적인 닫힌 우주관에 반대해서, 열린 시공간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분석은 경이와 찬사를 보낼만하다. 물론 매력적인 이야기와 플롯의 구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어렴풋이 들었던 갈릴레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에서는 보다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알파벳이라는 기호를 통해 인류의 귀중한 정보들을 동시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고 또 후세에도 전달할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그의 주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의 정수였다. 또한 알파벳은 운동과 변화의 근본 요소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다시 인식하게 된 스탕달, 발자크 그리고 디킨스의 작품들과의 조우는 최근의 독서를 하는 가운데 느꼈던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비롯된 뜨거운 혁명의 기운이 대륙에 가득했던 시기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스탕달과 발자크의 작품들에 대한 진정한 매력들에 대해 희미하나마 맛을 보면서 원전을 읽고 싶다는 의욕을 칼비노는 사정없이 고취시키고 있었다. 디킨스는 발자크가 촉발한 공간적 서술 대상으로 도시가 지니고 있는 요소들에 더해,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인물 군을 추가하면서 산업사회로 전진해 나가고 있던 19세기 영국 사회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최근에 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과 만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읽던 중에 마크 트웨인의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란 단편소설과 접하게 됐다. 칼비노의 쓴 적용을 통해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와 그 책의 저자 마크 트웨인을 재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됐다. 19세기 청교도적인 도덕률로 무장한 ‘정직한’ 미국 시민사회의 위선과 탐욕을 사정없이 까발려 내면서, 자신의 조국이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던 가치들을 조롱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마크 트웨인의 적당한 중립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칼비노는 해들리버그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진짜 죄악은 어디에 있었는지 묻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 있다.

물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설명과 레몽 크노의 철학을 다룬 글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 것도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내공이 칼비노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말이다.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는 올해 내가 읽은 160번째 책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책도 칼비노의 책처럼 나에게 이렇게 책읽기, 특히 고전에 대해 도전을 던져주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책읽기를 배운 소감이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왜 어느 상황에서 세부묘사가 필요한가, 어느 특정한 공간의 설정이 어떤 상황에서 중요한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어떤 철학적 접근이 필요한가 등은 정말 소중한 체험이었다. 나도 칼비노가 말한 대로, 나만의 소중한 경험과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고전들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나의 이 첫 걸음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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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
타카하시 신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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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해 마지않던 다카하시 신의 <톰 소여>가 어제 막 도착을 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다 읽고 나서 정말 오래 전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마크 트웨인이 창조해낸 그 유명한 캐릭터들에 대한 향수에 빠졌었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아마 어려서 이 두 캐릭터에 대한 이름을 들어 보지 않고 자란 이가 없을 것 같다. 나도 그들처럼 해적이 되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빠졌던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바다도 그리고 나무집을 지을 만한 나무도 없었다.

다카하시 신은 원작에 대담한 각색을 감행했다. 허클베리 핀은 도쿄에서 살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 만화의 배경이 되는 작은 어촌 마을을 찾은 미대생 하루로 대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꼬마 영웅이자 말썽꾸러기 주인공 톰 소여 역은 타로에게 돌아간다. 만화에서 타로는 계속해서 외쳐댄다, 어른들은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 어른의 범주에 하루도 포함되어 있는게 아닐까. 원작의 큰 줄거리를 따라 가면서, <톰 소여>는 진행된다.

원작에 나오는 최고 악당 인디언 조는 마을의 불한당 오다기리로 바뀌고, 하루와 타로는 죽은 검정고양이를 묻으러 공동묘지에 갔다가 오다기리의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역시 트웨인식 비밀, 살인과 미스터리라는 장기가 유감없이 펼쳐진다. 히루와 타로 일행은 해적놀이를 위해 찾은 어촌 마을 앞에 있는 무인도에서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보물들과 명화 그림들을 발견하게 된다.

원작에서는 아마 소년들의 모험이라는 주제에 보다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카하시 신과 그의 스탭들이 다시 창조해낸 21세기 <톰 소여>에서 작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 톰 소여/하루에게 누구 하나 다가오지 않는 마을에서, 타로와 그 친구들만이 유일하게 도시에서 온 하루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한다. 역시 여름에만, 마을에 와서 지내곤 하는 타로 역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마을 공동체는 역시 끈끈한 유대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미국에서 태어난 <톰 소여>의 일본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어른이면서도 여전히 유년의 기억 속에 사로 잡혀 있는 하루의 캐릭터는 참 매력적이었다. 성장 과정에서의 어두운 면들을 가지고, 결국 마을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하루의 캐릭터를, 계속해서 캔 맥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워대는 주인공을 여성으로 치환시키면서, 고전에 관한 충실한 재해석을 시작한다.

그리고 만화에서 몇 컷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하루와 타로에게 많은 것을 알려 준 겐조 할아버지의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비밀 엄수와 신분노출이라는 위험 때문에, 정말 좋아하는 이를 구해 주지 못해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의 고뇌를 비주얼로 멋지게 형상화시키는데 성공한 것 같다.

역시 고전 원작을 만화화하는데 있어서 정수는 바로 작가의 유머감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심각하고, 거의 데생에 가까운 터치를 보여 주다가도 일러스트 스타일의 간소화로 ‘결정적 순간’들을 잡아내는 다카하시 신의 미학이 눈부셨다.

후기에 실린 작가의 말대로, 다시 여름이 되면 하루와 타로가 빚어내는 <톰 소여>를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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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 마크 트웨인 걸작선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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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현대 미국 문학의 대가라고 하지만 왠지 나에게는 어린 시절 톰 소여와 그의 절친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만 각인되어 있는 작가였다. 그리고 20년도 넘게 그의 작품들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그의 단편 걸작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이라는 책과 만나게 됐다. 125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다시 빛을 보게 된 책의 제목의 동명의 타이틀을 제목으로 뽑았다.

이 책에는 모두 5개의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가 그 첫 번째 이야기인데, 정직함을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삼고 있는 한 마을 해들리버그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우선, 그 마을 사람들에게 개인적 원한을 지닌 사나이가 현금 4만 달러에 상당하는 금화가 든 돈 자루를 에드워드 리처즈 집에 맡기면서 시작이 된다.

그리고 같이 동봉된 편지 한 장으로 하여금, 마을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 돈에 대해 욕심을 갖게 만들어 버린다. 그 사나이가 그전에 마을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2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도박으로 딴 돈으로 하여금 그에게 은혜를 갚고자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암호 같은 말을 기억하는 이가 주인공이라는 거다. 그가 의도한 대로 마을에 사는 19가구의 가장들은 모두 자신들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고 하면서, 일의 집행을 맡은 버지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해들리버그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사나이의 교묘한 덫에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해들리버그 사람들은 걸려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개적인 망신.

마크 트웨인이 여기서 고안해낸 장치들은 참으로 교묘하기 그지없다. 물질에 대한 개인적 탐욕에 대한 스케치는 그야말로 너무나 정교하다.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은 정직함으로 ‘무장한’ 해들리버그 개인들의 위선적인 가면을 남김없이 발가벗기고 만다. 왜, 그들은 처음에 그 선행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고한 바클리 굿슨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들이 그 돈 자루를 챙기려고 했을까. 아마 이 이야기를 통해 마크 트웨인은 한창 자본주의적 성과가 고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미국의 모습을, 쁘띠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위선의 탈을 벗기려고 했던 것 같다. 이야기의 결말은 너무나 교훈적이다.

두 번째 이야기 <100만 파운드 은행권>은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미 잘 알려진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재확인하는 느낌이랄까. 주인공 헨리 애덤스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요트를 타다가 조난이 되어서, 런던으로 하는 범선에 구조를 받고 런던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역시 황당하면서도 매혹적인 설정이다,

그리고 어느 영국의 내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두 노인네들의 제안에 휘말려서 30일 간 실제로 영국 정부에서 발행된 100만 파운드 은행권을 건네받고 생활하게 된다. 내기의 쟁점은 총명함과 정직함을 두루 갖춘 외국인이라는 조건에 부족함 없이 딱 들어맞는 헨리 애덤스가 제격이었다. 영국의 두 후보 형제 신사들은 고약하게도, 단돈 한 푼 없는 주인공이 30일 동안 굶어 죽느냐 그렇지 않냐를 가지고 내기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헨리 애덤스가 원하는 일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조건이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모든 것을 움직인다고 하지만, 이런 고약한 제안에 쓴 입맛이 다셔졌다. 하지만, 주인공으로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당장 자신은 손해 볼 일이 없으니 말이다.

주인공이 가진 100만 파운드 은행권은 그야말로 카드 판에서 조커 같은 역할을 한다. 우선 허름한 식당에 가서 문자 그대로 배가 터지게 음식을 먹고, 예의 지폐를 제시한다. 그 주인이 거스름돈을 거슬러 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삶의 방식을 터득한 그는 옷도 거저 입게 되고, 호화판 호텔에 머무르면서 외상을 지게 된다. 그리고 상류 사회의 인사들과도 어울리게 되면서 유명인사가 된다. 물론 빠지지 않고 자신의 평생의 반려자도 만나게 된다.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다.

예상된 대로 파멸보다는 유쾌한 결말로 매듭이 지어지지만, 역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삶에 모든 것들이 내기로 귀결되는 영국식 삶의 방식에 대한 마크 트웨인 식의 신랄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으로 화폐가 가진 지위와 힘으로 해결이 되는. 현대 유럽에서는 물질에 근거한 소비주의가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회 전반에 걸친 의식이 형성되었지만, 당시 19세기 폭발하는 자본주의의 힘은 상류사회로의 진입도, 친구와의 관계도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마저도 맘모니즘(Mammonsim)의 위력 앞에서는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1865년에 발표가 돼서 마크 트웨인에게 비로소 전국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캘러베러스 군의 악명 높은 개구리>와 맨 마지막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는 전형적인 단편의 구성을 가진다.

역시 이 책의 백미는 타이틀인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이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의 주 배경을 이루는 미주리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 속에 예의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이라는 인간의 욕망들을 드러나는 주제들이 담뿍 배어져 있다. 가난한 농장주 존 그레이는 자신의 딸인 메리를 휴 그레고리라는 부유한 집 자제와 결혼시켜 한 몫 잡아 보려는 엉큼한 속셈을 가지고 있다.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결마저도 금전적인 욕망과 결합되어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메리가 존 그레이의 형인 데이비드 그레이의 상속녀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존 그레이를 경악한다. 왜냐하면, 메리를 사랑하는 휴 그레고리는 데이비드와는 앙숙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둘이 결혼한다고 한다면 데이비드는 자신의 상속 유언을 철회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기서 존 그레이는 냉철하게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한다. 휴 그레고리가 상속받을 재산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은 돈을 가진 형의 재산이 탐이 난다.

이 때, 조지 웨인/휴버트 디 폰테인블로 그리고 장 메르시에라는 이름을 가진 미스터리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메리에게 청혼을 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오락가락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하고, 휴 그레고리가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몰리게 된다. 이야기는 독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마크 트웨인의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은 확실히 읽기에 재밌다. 과연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정말 100여 년 전에 쓰인 것인가 할 정도로 현대의 그것들과 많은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팽배한 물질주의 가운데 하루가 다르게 그 자취를 감춰 가고 있는 휴머니즘에 대한 통렬한 마크 트웨인의 지적이야말로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유머와 재치가 넘치면서도, 그의 장끼인 ‘인간의 탐욕과 위선의 가면’을 사정없이 폭로해 버리고야 마는 그의 필력에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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