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
이혜필 지음 / 컬처그라퍼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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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통해 미지의 세계와 만나게 되는 즐거움은 아마도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많은 기행에 관계된 서적 중에 보다 큰 즐거움을 주는 책은 바로 개인적인 경험이 있는 곳을 다룬 책일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가 내 삶에 들어왔다, 교토>가 그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2002년 처음으로 방문했던 교토에서의 그 무더웠던 여름이 내내 떠올랐다.

이제는 기억마저 희미해진 여행의 추억 가운데서 금각, 은각 그리고 기온과 청수사, 철학의 길 등의 지명들이 잔잔히 피어올랐다. 이 책의 지은이 이혜필 씨는 6개월 동안 교토에 살면서 그야말로 안 가본데 없이 다가보았지만, 열흘 남짓한 짧은 일정으로 간사이 지방을 다 돌아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출발한 내가 간사이공항에서 내린 뒤에 바로 찾은 도시가 일본의 유구한 역사가 자리 잡은 천년 고도 교토였다.

그리고 교토 관광에서 첫 번째로 꼽는 금각사를 찾았다. 그리고 나중에 은각사와 철학의 길도 갔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은각사가 더 호젓하니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은각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미국에서 온 모녀와의 대화들이 참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은각사 경내에서 미국에서 온 여자 분과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고, 내려오는 길에 척 봐도 그 둘이 모녀라는걸 알 수 있는 미국 할머니가 길을 잃고 있는 걸 보고서 따님이 은각사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었다. 그렇게 타지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 돕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가 보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일상의 삶을 박차고 나간 지은이가 당차게 일본 교토의 레오팔레스에 작은 둥지를 틀고 언어를 배우고, 진짜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보기에 참 좋았다. 나이가 점점 들면서 생기는 변명 중의 하나가 금전적이기 보다는 시간적인 게 아니던가. 느긋한 중년의 나이는 자연스럽게 인터내셔널한 우정을 쌓는데도 큰 도움이 되는 듯 싶었다. 물론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도 상대방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는데 일조를 했겠지만.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의 지기(知己) 안포토의 사진들도 꼭 필요한 구석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사진들을 통해 수년 전에 들렀던 교토를 다시 여행하는 기분이 흠뻑 빠져 들고야 말았던가. 푹푹 지는 7-8월 무더위 속에서 꾸역꾸역 걷고 정말 며칠 사이에는 도저히 볼 수 없어서 나중에는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까지 들게 하고 말았던 교토의 그 수많은 사찰과 신사 및 유적들이란. 내가 본 여름 외에의 모든 계절이 담겨져 있어서 더더욱 반가웠다, 비록 내가 그전에 한 번 가본 곳이라 하더라도 안본 것에 대한 미련은 여전한가 보다.

교토의 거주자가 아닌 뜨내기 여행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교토의 구석구석을 파헤치는 지은이의 작가 정신이 못내 부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내는 끝내주게 멋진 아름다운 인연들, 그야말로 사는 맛나는, 또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래서 여행은 나를 찾고, 또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관계 속으로의 발전이라는걸까?

이혜필 씨가 교토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교토라는 유무형의 도시가 그녀의 마음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럴 수 있었던 작가가 마냥 부럽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끝에 달려 있는 에필로그식의 이야기들도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는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 같다. 교토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해서, 이상향에나 등장할 법한 카페 <님>을 삼청동에 차리셨다고 했던가. 그 카페 <님>을 찾아가 말없이 한 잔의 차로 뜨내기 여행객의 다리를 쉰다면 그것 또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삶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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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쟁이 톨로키
자케스 음다 지음, 윤철희 옮김 / 검둥소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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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연한 기회에 남아프리카 출신의 작가 자케스 음다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음다의 작품 두 권이 도서출판 검둥소를 통해 소개가 되었는데 <행복한 마돈나>와 <곡쟁이 톨로키>가 그것이다. 왜 <행복한 마돈나>가 아닌 <곡쟁이 톨로키>를 먼저 선택을 했는지 아이러니하다. 아마 제목에 들어가 있는 “곡쟁이”라는 낯선 단어가 주는 자극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행복한 마돈나>도 수중에 있어서 곧 읽을 예정이다.

<곡쟁이 톨로키>의 주인공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곡쟁이라는 희귀한 직업을 가진 톨로키이다. 그는 스위스 롤에 파를 곁들여서 먹으면서 일상 가운데 죽음이 흘러넘치는 남아프리카의 어느 곳에서 곡을 하면서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어느 꼬마아이의 장례식에서 18년에 떠난 고향의 동향인인 노리아를 만나게 된다. 그 ‘건방진 계집’ 노리아는 자신의 아버지 즈와라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애증의 관계이다.

톨로키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에서, 아버지 즈와라는 대장장이였다. 그리고 노리아는 즈와라의 친구 제시베와 ‘산골 여자’의 딸이었는데, 노리아는 즈와라의 창작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존재로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즈와라는 자신만의 입상들을 만들곤 했다. 즈와라는 자신의 자식인 톨로키보다도 노리아를 더 사랑했다. 인물이 변변치 않은 톨로키는 내내 그렇게 이웃들이나 친구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

소설은 계속해서 현재에 벌어지는 톨로키와 노리아의 관계 가운데서, 플래시백으로 독자들을 과거로 향한 시간여행을 인도한다. 마치 하나하나 그 둘에 얽힌 이야기들이 풀어져 나가면서 그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들이 풀려 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나 우리에게는 전혀 낯선 남아프리카 공동체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들은 물론이고, 부족 간들의 갈등, 극단적인 폭력과 그에 수반한 죽음들이 일상화되어 버린 그네들의 삶은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주인공 톨로키가 고향을 떠나 도시로 도망쳐 갔을 때, 얼핏 그 이유를 댔던 것처럼 “사랑과 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도시에서의 삶은 외롭고 신산하기만 하다. 특별한 기술이 전무했던 톨로키가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상의 죽음에서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한 ‘곡쟁이’라는 직업을 개발해낸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그는 남들이 가지지 않은 “슬픈 눈동자”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편, 노리아의 형편 역시 나을 것이 없었다. 톨로키가 대개의 시골 청년들의 삶을 반영한다면 노리아의 경우는 시골 처녀들의 그것이었다. 나푸라는 남자와 눈이 맞아 가족들을 버리고 도시로 향했지만 그들에게 미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경제적 무능력은 그들 가정의 파탄을 예고하고 있었다. 결국 첫 번째 아들 부타와 전 남편 나푸를 비참하게 잃은 그녀는 결국 도시의 판자촌에서 다시 자신의 삶을 찾게 된다.

아이들마저 놀려 대는 톨로키에 대해 살아가는 법을 안다면서 존경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 노리아. 그리고 정말 어울리지 않는 실크해트에 망토로 무장한 소위 작업복을 입은 톨로키는 동향의 동생 노리아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 한다. 정착촌의 자경단인 젊은 호랑이들의 비행으로 두 번째 부타를 잃고 집마저 화재로 잃어버린 노리아를 돕는 톨로키. 그들은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 달려가는 남아프리카 사람들의 표상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동안 미국이나 유럽의 소설 혹은 한동안 금지되어 있던 이웃 일본의 소설들은 많이 읽을 수 기회가 있었지만 아프리카나 남태평양 같은 제3세계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마도 소재의 다양성이나 우리가 비교적 잘 알지 못하는 문화권의 이야기들이 전자들의 그것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최근 출간되고 있는 제3세계권 문학들의 소개는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얼마 전에 읽었던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에 이어 읽게 된 자케스 음다의 <곡쟁이 톨로키>는 이런 최근의 추세를 반영하고 있는 책 중의 한 권이다. 물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고려하게 되는 수익성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다양성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현실에 자신의 직업을 투영시킨 톨로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의 남아프리카의 현실을 보게 된다. 농촌에 사는 이들이 모두 톨로키가 말했던 ‘사랑과 부’를 찾아서 나서는 모습은 산업화에 따라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모습을 닮아 있다. 우리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서로 적대시하는 부족 간의 갈등에서 비롯한 유혈폭력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이었다. 상당수의 죽음이 바로 이 갈등에서 비롯되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또 역설적으로 자신의 공동체에서 떠난 이들이 물설고 낯선 도시에서 의지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동질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서였다. 노리아와 톨로키처럼 그들은 서로에게서 위안과 격려를 받고,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배워간다.

죽음이라는 실존적 상실이 곳곳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들지만, <곡쟁이 톨로키>는 사람간의 관계와 화해를 도모하는 따뜻한 소설이다. 곡쟁이 톨로키는 이렇게 우리에게 묻는다.
“그대, 살아가는 법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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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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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장소를 알 수 없는 곳에 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마치 지구 멸망의 날을 겪은 것 같은 그 곳에서 그 둘은 살아남기 위해 따뜻할 거라고 생각되는 남쪽 바닷가로 향한다. 그 둘은 단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식과 부모의 관계만큼 서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역설적으로 철저하게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물자들은 하나도 없다. 도대체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 <로드>의 저자 코맥 매카시는 독자들에게 어떤 유추를 해낼만한 그 어떠한 정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온 세상이 잿빛으로 가득하고, 사방에 죽음이 널려 있다는 것 정도다. 어쩌면 그렇게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읽는 이들은, 그런 인과관계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생존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의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아버지는 사방을 경계하고, 유사 이래 모든 아버지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생존 게임에 나선다. 연명을 위한 식량 확보와 가족의 안전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이 부자(父子)의 일상적인 약탈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그리고 역시 자신들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결정이 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어린 아들에 대해 계속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불어 넣어준다. 죽음을 꿈꾸는 이가 역설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외부로부터 얻고 싶어 하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와 식량 외에는 모두가 적대적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 또래의 사내아이도 모두 자신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잠정적인 위험요소들이다. 물론 총과 칼 혹은 원시적인 화살로 무장한 이들이 끊임없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식량과 보잘 것 없는 물건들을 노리고 있다. 내부는 안전하고, 외부는 위험하다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이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날을 사는 미국인들의 그것을 닮아 보인다. 9-11이라는 전대미문의 충격에 깜짝 놀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감정적인 대응 말이다.

삶 가운데 행운과 불운이 교차하듯이 생명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우연히 음식과 각종 물자로 가득 찬 벙커를 발견하고 부자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위험하다고 말을 하면서 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아버지. 왜 이 소설에서 여성성은 제거되고, 남자들만이 등장할게 되었을까? 아마 아버지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진 어머니가 존재했더라면 갈등은 더 심화되고 이야기는 복잡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가부장적 시스템’은 노인과 자기 또래의 소년에 대한 인도적인 아들의 발언들에 대해 어떠한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 아버지가 말하면, 아들은 따라야만 하다. 왜? 늘 그래왔으니까.

어쩌면 저자 코맥 매카시는 소설 <로드>를 통해,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무시된 세상의 끝에서 오늘날의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의 해결이나 갈등의 해소를 위한 대화는 부재한 가운데, 일방적인 의사소통만이 넘쳐흐르는 현재의 모습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약육강식 같은 삶의 전쟁터에서 먹고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으로 보이는 <로드>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이다. 이 소설이 현재, 코엔 형제의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이어 다시 영화화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자꾸만 윌 스미스가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 <나는 전설이다>와 <행복을 찾아서>의 이미지들이 중첩되는지 모르겠다.

사족으로 카피에 ‘<성서>에 비견되었던 소설’이라고 하는데, 뭐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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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에센스] 서평단 알림
경제학 에센스
한진수 지음 / 더난출판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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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하면 고리타분하고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부터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 오늘 읽은 한진수 교수가 쓴 <경제학 에센스>는 나의 그런 고정관념을 뒤흔들어 주었다. 경제학이, 아니 우리네 실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 적절한 비유와 친절하면서도 쉬운 설명이 그야말로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박히는 느낌이었다.

우선 가장 먼저 편익, 기회비용 그리고 최대 효용의 개념들을 초반부터 확실하게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무언가 배웠다면 바로 현실에 적용해 볼 일이다. 우선 이 책 <경제학 에센스>를 읽는데 든 기회비용은 무엇일까. 책을 구매하는데 든 금전적인 비용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책을 읽는데 든 시간이라는 무형의 재화일 것이다. 물론 책을 읽는 시간 동안에 다른 일들도 가능했을 것이다. 밤에 조금 더 잘 수가 있었을 것이며, 출퇴근 시간의 만원전철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했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저러한 기회비용에 비해, 이 책을 읽은 후에 나에게 발생하는 편익은 어떤 것일지에 대해 생각해 보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바로 합리적인 선택을 좀 더 할 수 있게 되었다라는 나의 생각이다. 21세기 주체적인 소비자로서, 생산자들에게 내가 가진 소비자잉여를 빼앗기지 않고(혹은 착취당하지 않고) 보다 적절한 정보들을 취합해서 개인의 상황과 능력에 맞는 합리적인 선택 궁극적으로는 소비하는 법을 배웠다는 편익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 책에는 우리 현실세계에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흔하디흔한 예화들을 통해 복잡한 경제학 이론들을 아주 쉽게 풀이해 주고 있다. 하나의 예로, 학교 근처에 짜장면 집에서 일반과 학생에 대한 가격차별화가 등장한다. 이는 또한 탄력성의 개념과도 연관이 되어 있는데 짜장면과 같이 수요가 가격에 민감한 탄력적인 상품에는 소비자들이 가격인상에 예민하다는 게, 저간의 사정을 돌아볼 때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매몰비용을 설명하면서 든 미국의 베트남전 예화 또한 백미이다. 사실 미국은 아무런 명분도 없이 프랑스의 뒤를 이어 개입하게 된 베트남전에서 국내외의 반대와 천문학적으로 치솟는 전비(戰費) 그리고 사상자수에도 불구하고 확전에 확전을 거듭했다. 초기에 투자비를 매몰비용으로 생각하고 베트남에서 손을 뗐다면, 결국 전쟁에서 참패하지 않고 명예로운 철군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과거의 교훈에서 미국이 잘 배웠다면 현재 이라크라는 수렁에 다시 빠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메이저리그에서 1941년 테드 윌리엄스 이래 4할 타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 또한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다. 선발 투수가 한 번 등판을 하면 이기건 지건 간에 한 경기를 모두 책임지던 60년 전과는 달리 현대야구에서는 선발투수, 중간계투, 원포인트 릴리프 그리고 마무리 투수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인 분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그만큼 타자들의 근력강화 프로그램 그리고 타구의 비거리가 늘어난 보다 강한 야구 배트가 나오긴 했지만 투수들이 타자들에 비해 비교우위에 서 있기 때문에 더 이상 4할 타자의 등장이 요원해졌다는 분석은 그야말로 무릎을 탁 칠 정도였다.

이 책을 다 읽는데 모두 해서 3일이라는 시간적 기회비용이 소요되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효용이라고 얻게 된 편익은 너무나 값진 것 같다. 책 표지에 나오는 카피대로 복잡한 세상 가운데, 쿨(cool)한 선택을 하기 위한 너무 멋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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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오드리!
로빈 벤웨이 지음, 박슬라 옮김 / 아일랜드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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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에 사는 16살 난 오드리. 그녀에게 특별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여느 또래들처럼 같이 학교에 다니고 쇼핑몰의 아이스크림 매장에서 알바를 뛰는 지극히 평범한 여학생이다. 굳이 남들과 다른 점을 찾는다면, 음악에 대해 조예가 거의 마니아급이라는 것 정도? 아 하나 더, 그리고 언젠가 오버 그라운드를 꿈꾸며 밴드활동을 하는 남친이 있다. 바로 이 중요한 포인트가 바로 이 책 <잠깐만, 오드리!>의 시발점이 된다.

자신보다는 오로지 음악에만 매달려 사는 남친 에반에 대해 오드리는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절교를 선언한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실연을 당한 에반은 이 실연을 소재로 해서 노래 <잠깐만, 오드리!>를 만들고, 그가 이끄는 밴드 ‘두 구더스’는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사방에서 <잠깐만, 오드리!>가 들려오고, 보통의 삶을 원했던 오드리는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일반적인 칙릿 소설 같기도 하지만, <잠깐만, 오드리!>에는 얼핏 보면 그냥 무심코 넘기기에는 심오한 주제들이 많은 것 같다. 일단, ‘두 구더스’로 대변되는 음악 산업계의 일면이 그 하나이다. 팝차트 정상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어느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기타를 뜯고, 드럼을 두들겨 대는 밴드의 자화상이 보인다. 대중음악이라는 것은 결국 팬들의 관심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거대한 소비 시스템 하에서 움직이고 길들여지는 주인공들이 어떻게 보면 체스 판의 말과도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밴드들은 대중이 좋아할만한 노래들을 만들기 위해 고심을 하고, 대중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소비한다. 소비의 통로는 정말 다양하다. 우리나라에 싸이월드에 해당하는 마이스페이스가 그들의 주요 홍보매체가 되고, 메신저과 핸드폰은 그런 음악 상품들을 계속해서 확대 생산하는데 있어서 한몫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아주 일상화가 되어 버린 파파라치들은 확실하게 “뜬” 대중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사진을 찍어서 대중들에게 전달한다. 이런 상황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이 되었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한편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가정의 중요성은 어김없이 다시 한 번 등장해서 오드리를 지키는 마지막 방어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새로 사귄 남친과 다투고 절친 빅토리아와도 대판 붙어서 그야말로 어디에 마음 둘 데 없는 오드리의 최후의 보루는 결국 아빠와 엄마 그리고 뚱뚱한 애완고양이 벤도몰레나가 지키는 홈 스윗 홈(home sweet home)인 것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헤어진 남자 친구가 만든 노래 때문에 일상의 삶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그런 사건(!!!)이 없었더라면 이 소설이 쓰일 일도 없었을 것 아닌가. 자신은 앵무새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은근 콘서트 장에서 VIP 대접을 받고, 백스테이지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그런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권을 마냥 즐기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전히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에 놓여 있는 그 넓은 태평양 바다만큼의 거리감이 느껴졌다. 자유로운 그네들 미국의 십대들의 삶은 역시나 입시지옥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네 그것과는 메울 수 없는 괴리감이 느껴졌다. 각 장의 부제처럼 달려 있는 팝송들 또한 예전 같았으면 모두 꿰고 있었을 테지만, 팝송에 대한 미련을 던 지금으로서는 낯설기만 했다. 물론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밴드의 곡들도 있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대개의 경우 거의 모르는 밴드들이 많았다. 이런 노래들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었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좀 더 이해가 잘 되었으련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X세대, Y세도 아닌 아이팟, 메신저와 마이스페이스로 무장한 새로운 Z세대의 삶을 관통하는 즐거움이 있는 <잠깐만, 오드리!>의 세계에 빠져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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