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
유석규 지음 / 부표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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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외국 여행이 모든 대학생들의 로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에는 해외여행이 너무 일반화돼서 학창 시절에 배낭여행과 해외연수를 경험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늘어난 것 같다. 하지만, 해외유학은 또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예전처럼 유학이 어려운건 아니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도전임에는 틀림없다.

여전히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 일본유학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은 유학생활에 대한 환상 대신 주독야경하며 돈 없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청년기를 보낸 작가의 고군분투 일본유학기다.

가장 먼저 이 책은 무턱대고 그 나라에 가서 일단 부딪히면서 배워 보자라는 막무가내식 도전보다는 준비하는 자세를 강조한다. 예전에 비해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의 수집이 용이해진 만큼,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 버스를 타면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씩 걸려 걸어간단 말인가? 개인적으로 배낭여행을 하면서 느낀 점인데, 단 하루를 나보다 먼저 그 도시에서 지낸 동료여행객에는 배울 게 많았다. 하물며 수년씩 먼저 유학생활을 한 선배, 친구 유학생에게서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루트를 통해 수집한 정보로 든든해졌다면 다음 관문은 뭐니 뭐니 해도 어학이다. 책의 곳곳에 아르바이트로 집세며 생활비를 벌며 생활한 저자의 체험담이 배어 있다. 현지어로 말을 할 수 있다면, 소위 아르바이트 시급 단가가 다르다고 한다. 단 시간 내에 어학실력을 늘리겠다고 과욕을 부리는 대신,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기초를 다지고 레벨 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장기간의 해외 체류가 언어능력의 향상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유학 초기 4시간만 자면서, 생활비를 벌고 공부한 작가의 스케줄은 가히 초인적인 것이었다.

물설고 낯선 해외생활의 기초에서부터 시작해서, 건강을 유지하면서 생존에 필요한 지침과 유용한 정보가 <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에는 그야말로 넘쳐흐른다. 다른 유학성공기에서 다룬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나를 따라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식의 함정도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항상 하는 말이지만,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야말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돈 없이도 버티는 survival 일본유학>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사냥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이란친구 지미> 편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다카노 히데유키의 <별난 친구들의 도쿄 표류기>를 연상시켰다. 10년간의 일본유학생활 중에 만난 인연들에 대한 이야기가 못내 궁금하기도 했다. 좀 더 살을 붙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아울러 비주얼쪽으로 강화를 해서, 한 때 사진전공을 했던 작가의 사진이나 이미지를 책에 실었다면 좀 더 콘텐츠가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여전히 파랑새를 쫓는 이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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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2 - 네메시스의 팔 로마 서브 로사 2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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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더듬이 고르디아누스가 8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스티븐 세일러 작가의 대작 프로젝트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우리에게는 한 달 만에 찾아온 신작이다. 전작에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술라와 키케로가 등장했다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네메시스의 팔>에서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장식했던 마르쿠스 크라수스가 등장한다.

1편의 공간적 배경이 세계의 수도 로마였다면, 2편에서는 로마를 뒤흔들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로마에서 한다 하는 세력가들이 별장들이 있었던 나폴리 만의 바이아이를 공간으로 해서 고르디아누스와 그의 양자 에코의 활약상이 펼쳐진다.

팩션의 형식을 취하면서, 고대 탐정 소설이라는 장르의 신기원을 만들어가는 스티븐 세일러 작가는 실존 인물과 실재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해서 흥미진진한 가공의 살인사건을 해결하는데 자신이 만든 멋진 캐릭터 고르디아누스를 투입한다. 로마의 갑부 크라수스를 대신해서, 바이아이의 사업을 총괄하던 리키니우스가 어느 날 살해당하고, 범인으로 그의 수하에 있던 두 명의 노예가 지목된다. 한편, 당시 이탈리아 전토를 충격 속에 몰아넣었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크라수스는 일벌백계의 고대 로마 정신을 부활시키겠다면서, 리키니우스의 노예들을 모두 학살할 계획을 세운다. 고르디아누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일! 그동안에 리키니우스의 진범을 잡고 무고하게 죽음을 당할 상황에 부닥친 99명의 노예를 구하는 시간과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우리의 주인공 고르디아누스는 역시나 사건의 단서들을 하나씩 모아, 자신의 머릿속에서 발효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간다. 크라수스의 의뢰로 사건을 맡긴 했지만, 파헤칠수록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복잡다단한 음모의 전모가 조금씩 밝혀지면서 고르디아누스와 에코는 예상했던 대로 죽음의 위협을 접하게 된다. 1편을 읽고 나니, 어느 정도는 스티븐 세일러의 소설 스타일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의뢰인에게 금전적 보상을 받고 하는 일이긴 하지만, 고르디아누스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 의뢰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게 된다. 바이아이로 가는 갤리선에서, 노젓는 노예의 처참한 광경에 같은 인간으로서 분노한 고르디아누스는 살인사건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은 꼬마 메토와 아폴로니우스에 대한 연민으로 그들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답게, 독자는 스티븐 세일러가 그린 등장인물 중에 범인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고인이 된 리키니우스의 빌라에 있는 이들을 차례로 탐문해 가면서, 1인칭 화자 고르디아누스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여느 장르 소설답게, 끝까지 진범에 대한 확증을 미루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가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울러, 전작에서 대도시 로마의 화려함을 묘사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지방도시 바이아이의 빌라와 자연 그리고 쿠마이의 시빌레 같은 비의를 다루는 데 있어서 탁월한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해 주고 있다. ‘저자의 말’을 참고해 보니, 다양한 문헌을 통해 고대 로마의 일상을 꾸준하게 연구한 저자의 힘이 느껴졌다.

<로마 서브 로사> 시리즈는 계속해서 진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1편에서 고르디아누스가 독고다이 해결사로 나섰다면 이번 <네메시스의 팔>에서는 수양아들 에코를 사이드킥으로 삼아 종횡무진 활약상을 보여준다. 고르디아누스가 상대하는 보이지 않는 적의 음모가 사악하고 복잡할수록 그를 돕는 이들 역시 그만큼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이번 편에 새로 고르디아누스 팀에 합류하게 된 영리한 꼬마 노예 메토의 활약이 앞으로 더 궁금해진다.

이번 편에서는 폼페이우스의 이름이 살짝 등장을 했는데, 뒤이어 등장하게 될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공화정 말기를 장식한 영웅들의 활약과 중년으로 접어드는 더듬이 고르디아누스의 탐정 오디세이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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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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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은 참 대단하다. 1994년 그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읽기 전부터, 주눅이 들어 버렸다. 게다가 그전에 작가의 다른 책을 읽었더라면 모르겠는데, 집필 50주년을 기념해서 마치 백조의 노래를 떠올리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으려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담감에 시달리게 됐다.

1935년생으로 일흔 살을 훨씬 넘긴 오에 겐자부로는 10살 때, 패전한 조국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일본 최고의 명문이라는 도쿄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1957년 문단에 데뷔한 오에 겐자부로는 극우파가 활개를 치는 일본 문학계에서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자이자 행동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프로토타입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펴낸 <가면의 고백>의 미시마 유키오 같이 스스로 제 배를 째고 죽은 극우파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의 시간적 배경은 전후 일본이다.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로 무장한 채, 대동아공영이라는 허울 좋은 식민제국주의를 꿈꾸던 20세기 전반의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통해 미국으로 대변되는 서양세력이 처절한 패배를 당한다. 전쟁에 지면 패전국의 남자는 보이로, 여자는 창녀가 된다고 했던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미영귀축을 외치며 1억 총옥쇄와 본토결전을 운운하던 일본 군부와 국민은 천황의 무조건 항복 선언에 따라, 일본을 점령한 미군의 처분에 온순한 양처럼 따르게 된다.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 소설은, 작가의 기존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전개된다. 시나리오를 위한 소설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변절한 한국의 어느 시인의 구명을 위해 단식투쟁도 불사했다고 하는데, 그 무렵에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걸작 단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일본 내 영화화라는 <M 프로젝트> 구상으로 대학시절 서먹서먹했던 친구 고모리 다마쓰와 아역 배우 출신으로 화려한 커리어의 주인공 사쿠라 오기 마거섁이 뭉치게 된다.

작가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위해 두 개의 특별한 텍스트를 사용한다. 하나는 제목에 나오는 에드가 앨런 포의 사후에 발표된(1849년) 연시 <애너벨 리>이고, 다른 하나는 16세기 작센 지방의 말 장사였던 실존 인물 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의 생애를 그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단편 소설이다(1811년 발표). 프로이센의 토지귀족 융커의 횡포에 분연히 저항해서 자신의 정당한 법적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저항에 나선 <미하엘 콜하스>애는 19세기 초 전 유럽을 석권했던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한 독일 국민의 저항이라는 정치적 함의와 더불어, 미국에 패하고 나서 아무런 저항 없이 지배를 받아들인 일본 국민에 대한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었다. 작가는 과연 그런 점까지도 모두 고려를 해서 예의 <M 프로젝트>를 구상했던 걸까. 종교개혁 시대 반봉건 인물이라는 멋진 텍스트 때문에, 클라이스트의 단편 소설을 구해서 지금 읽고 있다.

<메이스케의 출진>이라는 작가의 어머니가 공연했던 연극을 시나리오로 한 영화 작업과 동시에 사쿠라 씨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대한 치유가 병행된다. 그녀의 보호자로 훗날 남편이 되는 데이비드 마거섁은 사쿠라 씨에게 구원자인 동시에 약탈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은사 와타나베 선생의 죽음으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작가의 상처를 보듬고 치유해준다. 작가는 굉장히 객관적인 시선에서 사쿠라 씨의 과거를 조명하기 시작한다. 작가, 고모리 그리고 사쿠라 씨라는 기묘한 삼각 축은 오에 겐자부로의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다. 감정에 극한에 다다른 고모리는 작가에게 주먹질까지 해대지만, 그의 리치(reach)는 아쉽게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 결국, 데이비드의 죽음을 앞두고 <애너벨 리 영화> 무삭제판이라는 금기를 통해, 사쿠라 씨의 깊은 상처를 다시 헤집고 다른 차원의 치유를 향한 전진을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읽으면서 오에 겐자부로가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고갱이를 나는 독자로서 제대로 짚어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굳이 브레히트의 거리두기(소격효과)를 말하지 않더라도, 반백 년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은 작가의 시나리오 소설은 낯설기만 했다. 작가의 전작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에드가 앨런 포의 <애너벨 리>에 대한 번역이 너무 이상했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가 일부러 그렇게 번역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125쪽)를 “애너벨 리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보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애너벨 리가 아름답다는 건지 아니면 애너벨 리의 눈동자가 아름답다는 건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는 해석이 눈에 밟힌다.

오에 겐자부로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무엇인지 찾아보니 <만엔원년의 풋볼>이라는 작품인데, 재출간된 지 불과 3년 만에 절판이 됐다. 천하의 노벨상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팔리지 않으면 바로 절판이 되어 버리고 마는 책의 숙명이 새삼 진중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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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2-1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고려원에서 출간된 <만연원년의 풋볼>은 절판되었죠. 지금은 같은 역자가 <만엔원년의 풋볼>로 웅진에서 재출간해 구해볼 수 있구요.
 
안나 카레니나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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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안나와 브론스키, 키티와 레빈의 개인적인 연애사에 치중했다면 2부는 1부와는 사뭇 다르게 전개가 된다. 대하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본격적인 사회소설적 측면이 드디어 그 찬란한 여명을 발하기 시작한다.

실연을 당하고 시골에 칩거 중인 레빈은 자신을 찾아온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의 현학적인 자세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낙향해서 농촌 생활의 실상을 깨달은 레빈에게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는 그저 허위와 위선으로 가득 찬 카니발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쩌면 작가 톨스토이 자신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농지에서 농부들과 함께 목초를 베면서 레빈은 비로소 무욕의 마음으로 노동의 본질과 그 노동이 주는 즐거움과 상쾌함을 만끽한다. 도회에서 공부하고 자란 이가 느끼는 순수한 노동이 주는 무아의 순간에 대한 대가의 묘사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여섯 아이와 예르오쉬구보 마을로 이주한 돌리네 가족의 삶은 레빈의 그것과는 대조적이다. 돌리는 스티바의 끝없는 바람기, 애정없는 결혼생활 그리고 철없는 남편의 낭비벽으로 경제적 궁핍에 시달린다. 키티에게 청혼을 했다가 보기 좋게 바람맞은 레빈은 거절로 말미암은 씻을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에 시달리면서도 여전히 키티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놀란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큰언니 돌리네로 향하는 키티를 보게 되고 내내 고민하던 삶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품은 사랑의 수수께끼를 해결해 버린다.

한편, 안나와 그녀의 남편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갈등은 도무지 그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정계에서 승승장구하는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지만, 결혼한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죄로 만 오쟁이 진 남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를 알게 된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는 자신은 불행해지면 안 되고, 안나와 브론스키 역시 행복해지면 안된다는 비논리적인 접근으로 풀어지지 않는 고민의 무게를 더한다. 결국, 알렉세이는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끊으라는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덕으로 안나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지만, 사랑에 그만 눈이 먼 두 남녀를 막을 수 있는 건 이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내의 의무를 지키지 않은 채, 권리만을 주장하는 안나의 막무가내에 점잖은 신사 알렉세이 안드로비치의 인내는 그만 바닥을 드러낸다.

개화된 지식인으로 개조의 치열한 노력가 사물의 자연적 질서 사이에서 공동의 이익을 도모하던 레빈은 농업의 근간인 농민들의 노동과 지주 계급의 이해는 언제나 상충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사실 보이지 않는 실연으로부터 도피해서, 실존적 노동이라는 농업을 선택한 레빈은 끊임없이 자신의 삶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던진다.

바로 이 시점에서 톨스토이는 1860년대 러시아의 농노해방령 이래, 국민개병제와 사법제도 개혁 등의 굵직한 사회 현안들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다양한 견해를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레빈이라는 양심적 지식인의 초상을 통해, 러시아 농업 전반에 대한 고민을 설파하며, 합리적인 방식의 농업 혁신, 학교를 통한 교육제도의 개선,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빈곤과 무지를 타파하기 위한 시대의 흐름을 톺아 낸다. 바로 그런 역사적 흐름에 레빈이라는 내적인 동요와 계급적 불만을 적절하게 배합해서 소설적 재미와 역사적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다.

농장의 공동경영이라든가 초기 노동조합 형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자세한 설명에서 서유럽 부르주아 경제법칙에 대한 톨스토이의 생각을 엿보기도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공상적 사회주의 일반론의 허구성을 톨스토이는, 러시아 인민의 보편적 행복의 달성이라는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주제에 천착한다. 결국, 그 개인의 행복이라는 것은 안나와 브론스키가 도전한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이렇게 톨스토이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라는 시대정신에 초점을 맞추면서 개인적 영역에서 사회로의 치환과 문학적 확대를 도모한다.

나는 그를 내러티브와 문학적 묘사에 있어 놀라운 기술의 저글러(juggler)라고 부르고 싶다. 톨스토이는 당대를 휩쓸던 자연철학적인 측면에서 자신의 탁월한 지식을 유감없이 소설 곳곳에 부비트랩처럼 설치한다. 진정한 휴머니스트로,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산업화한 사회로의 발전을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회의 하부구조에 해당하는 절대다수 러시아 농민의 의식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그의 박애주의가 빛을 발한다. 그리고 어쩌면 불타는 시대의 흐름이었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까지도 힘닿는 대로 포용하려고 노력한 어느 지식인의 노고가 가슴에 와 닿았다.

알렉세이 안드로비치는 결국 이혼 소송을 결심하고, 자신의 매제 스티바에게 자신의 본심을 모두 털어놓는다. 스티바의 아내 돌리는 자신의 결혼을 위기에서 구해낸 안나의 결백을 주장해 보지만, 패덕하여 본성이 타락한 처자라는 말로 안나를 내치는 알렉세이 안드로비치! 그들의 결혼은 결국 파경으로 치닫는다. 반면, 키티에 대한 사랑이 수많은 난관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한 레빈은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 드디어 키티와의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레빈이 추구하던 사랑에는 과연 망각도, 용서도 필요 없었을까? 결국, 사랑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 레빈.

비록 결혼이 사랑의 완성은 아닐지라도 사랑하는 키티와의 결혼을 통해 구원에 갈구하던 레빈은 결혼생활이 주는 환멸과 매혹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 대척점에서는 알렉세이 안드로비치가 사랑과 감동 그리고 관용을 오가며 안나와의 깨진 결혼을 반추해 보지만, 안나와의 이별은 그에게 정치적 사망 선고로 다가온다. 자, 이제 톨스토이가 창조해낸 매력적인 주인공들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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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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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의 운명은 참 기구하기만 하다. 작년에 처음으로 칠레 출신의 망명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쉽게도 거의 대개의 책이 절판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우선 시중에서 살 수 있는 책들은 죄다 사고, 또 절판돼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은 중고서점을 돌아다니면서 힘들게 구했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과 <귀향> 모두 그렇게 구했다. 하지만, 세풀베다의 또 다른 책인 <소외>는 도저히 구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인근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게 됐다.

<소외>(Historias marginales)는 2000년에 나온 모두 35편의 길고 짧은 에세이들을 모은 수필집이다. 개인적으로 세풀베다의 책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런 간결성이다. 그가 발표한 다른 소설들도 예외 없이 길지 않은 장편(掌篇) 스타일의 글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글에 깊이가 없는 건 절대 아니다. 그의 글에는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어쩔 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수구초심의 마음으로 조국 칠레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리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대한 절절한 세풀베다의 애끊는 심정이 투박하게 묻어 있다. 세풀베다는 정의에 대한 선동 같은 과격한 방법 대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그대로 글로 담담하게 풀어내기에 더 멋진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를 상대로 맞짱 뜬 세풀베다는 가장 먼저 독일의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이자 네덜란드 소녀 안네 프랑크가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베르겐 벨젠 수용소로 독자를 차분하게 안내한다. 수용소의 어느 돌멩이에 새겨진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절규가 새겨진 문구는 지난 세기 인류의 양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힌 일대 사건에 대해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강제한다. 뒤에 나오는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레지스탕스 아브라함 슈츠케버와 나치의 만행을 자신의 존재로 입증해 보인 페데리코 아무개(프리츠 니만트)의 이야기들은 서로 공명하면서,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는 과거사를 조명해 준다.

한 때 그린피스 활동을 했던 작가는 지중해 고래 존재의 소중함에 대해, 독일에서 망명생활 중에 한 가족처럼 지냈던 소로바스의 죽음을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면서 삶의 소중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파하기도 한다. 지구의 끝 파타고니아의 난개발을 막기 위해 몸으로 맞선 이들의 영웅적인 모습과 혹한의 영지 라플란드 체험기, 아마존 마누 밀림이 가진 종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조국을 침략한 파시스트 군대에 대항해서 전투기를 직접 몰고 싸웠던 스탈린그라드의 백장미 여전사들과 사랑하는 애인을 잃고 엘살바도르의 정글에서 불의에 맞서 싸운 게릴라 여의사의 이야기에서도 역시 가슴 뭉클한 감동의 전이를 체험한다.

<소외>에는 이런 영웅적인 이야기 말고도, 고급 레스토랑이 아닌 시장통에서 보통 사람들에게 정말 맛있는 파스타를 양껏 제공해준 아름다운 여인 로셀라 아주머니, <죽음만 빼고는 모두 해결 방법이 있다>라는 신조로 죽는 날까지 가난한 고객들의 수도관을 걱정한 마에스트로 코레아 그리고 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폐선장을 차려 배를 해체하는 미스터 심파 등 우리네 삶 가운데 있는 보통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역시 수필집 <소외>에서 압권은 바로 세풀베다의 조국 칠레의 암울했던 피노체트 군사독재 시절을 이겨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얼결에 꿀과 젖이 흐르는 땅 아메리카(미국)이 아니라, 고기를 무한정으로 먹을 수 있다는 라틴 아메리카에 둥지를 틀게 된 이방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형집행인’들로부터 모진 학대와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콤파녜로(동지)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불구가 되거나 혹은 자신의 귀중한 생명마저도 잃은 사람들, 오로지 진실을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아날리시스> 잡지를 발행한 세풀베다의 고집스러운 친구 후안파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아픈 상처의 퍼즐을 세풀베다는 투덕투덕 이어 붙이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읽을 수가 있어서 루이스 세풀베다의 글을 사랑한다.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때로는 투박하고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 그의 글이 너무나 좋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세풀베다의 조국 칠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작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절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소중한 생명마저 초개같이 내던진 나의 영웅 살바도르 아옌데의 묘소를 언젠가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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