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밤
존 디디온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NYT 독자 선정 금세기 베스트 100 가운데, 조앤 디디온이라는 작가의 <상실>이라는 책이 있다고 해서 냉큼 사서 읽기 시작했다. 분량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제목이 말해주듯 40년을 갈이 산 배우자와 사랑하는 딸 퀸타나의 "상실"에 대한 글이라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고, 내용도 그냥 평범한 에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조앤 디디온은 그야말로 평생 글쟁이로 '뉴 저널리즘'의 기수라고 불릴 정도로 평생 글을 쓴 대가였고, 그녀가 구사하는 상실의 이야기는 아직 진짜 "상실"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로서는 수용하기가 버거웠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절반 정도 읽었나 보다.

 

나의 책읽기는 항상 컬렉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던가. 스레드를 통해 알게 된 베른트 하인리히 작가의 생태를 다룬 책들과 더불어 조앤 디디온의 책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전자는 절판이 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조앤 디디온의 책이 수급이 쉬웠다고나 할까.

 

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푸른 밤>은 단박에 다 읽었다. <상실>과 달리 어제 만난 <푸른 밤>은 뭐랄까 일종의 리듬감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리듬감 섞인 독서를 하게 되면 책의 진도가 쭉쭉 나간다는 걸 간만에 느낄 수가 있었다. 나에게는 어제 읽은 조앤 디디온의 <푸른 밤>이 그랬다. 책의 분위기도 상대적으로 <푸른 밤>이 가볐웠고.

 

아무래도 조앤 디디온 작가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하다 보니 <상실>은 좀 더디게 진도가 나갔는데, <상실><푸른 밤>이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서 작가 내면세계에 좀 더 침투한 느낌이 들었다. 참고로 조앤 디디온은 3년 전인 2021년에 작고했다고 했다.

 

오랜 글쟁이로 다방면에서 활약하다 보니 조앤 디디온은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아는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주변의 다이애나라는 친구 덕분에 1966년에 딸 퀸타나를 입양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직접 낳은 딸은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더 퀸타나를 사랑했고 사춘기 딸의 고민을 함께 한 일련의 과정들이 그녀의 글을 통해 드러난다. 문득 퀸타나 루가 어쩌면 저명한 저널리스트였던 엄마 찬스 덕을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나 인형방에 영사기를 들여 놓자는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말이다.

 

선택과 버림받음에 대한 고찰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존과 조앤은 그 아이를 "선택"했다. 그렇다면 퀸타나 루는 태어나면서 "버림받"았다고 해야 할까. 그 아이가 버려지지 않았다면, 존과 조앤 부부에게 선택지는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과거의 어느 시점에 벌어지지 않은 사건에 대해 후일 시점에서 하는 이런 고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걸까. 마치 역사의 가정법처럼 말이지.

 

남편 존 그레고리 던을 갑자기 잃고 나서, 딸 퀸타나마저 병상에서 힘겨운 투병을 하던 과정을 조앤 디디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전달한다. 어쩌면 독자는 이런 글들을 만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게 된 상실에 대한 감정들이 전작 <상실>에서 넘실거린다면, 이번 <푸른 밤>에서는 상실에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극복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덧없이 흘러가는 그런 무수한 시간들을, 모든 걸 파괴해 버리는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간단한 진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퀸타나가 자신의 생물학적 여동생 그리고 생모를 만나게 되는 사건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그리고 보니 조앤 디디온은 퀸타나를 데리고 투산에 촬영갔다가, 문득 퀸타나의 생모가 투산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외부로부터 퀸타나를 철저하게 차단하려고 했다는 자신의 시도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 아이가 어려서 가졌던 고민들에 대해서도 반복해서 되뇌이면서 고민열차에 동참하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사실들은 또 굳이 알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조앤 디디온이 무심결에 툭툭 던지는 미국 현대사의 한 장면들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갓난쟁이 퀸타나를 데리고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미군들이 싸우던 베트남에 가겠다는 생각이나, 책의 어디에서 미국의 파나마 침공이 이루어졌을 때 바베이도스엔가 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어떤 중대 사건들이 우리네 일상 너머로 벌어지고 있더라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읽은 책은 구간이다. 재개정판으로 만나보고 싶었지만, 중고책방에서 나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마술적 사고의 해>도 마저 읽어야지. 우리는 원하지 않겠지만 "빛의 소멸"로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읽기와 쓰기 역시 빛의 소멸로 나가는 하나의 스텝일지도. 그러고 보면 참 시간이 덧없다. 그렇지 않은가.

 

* 이 책으로 찰리 파커의 <Relaxin' at Camarillo>라는 곡도 알게 됐다.

지금 다시 들어도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다.

그런데 카마리요가 우리로 치면 "언덕 위의 하얀집"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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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9-02 11: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느 방송에서 이 책을 소개한 걸 보고 바로 구매했는데 이상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았어요.
끝내 정리한 기억만 남았어요.

레삭매냐 2024-09-02 12:43   좋아요 1 | URL
저는 조심스럽게 전작인 <상실>과
함께 읽으면 좀 더 부드럽게 나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두 책이 서로 공명하고 뭐 그런 점
들이 있더라구요.

문제는 <상실>이 참 어려운 책이
라는 게 단점이라고나 할까요.
한 달 넘게 잡고 있는데 미처 다
못 읽고 있네요.

조앤 디디온 여사의 글쓰기에
대해서는 감탄했습니다.
내추럴 본 글쟁이라고나 할까요.
 
술탄 살라딘
타리크 알리 지음, 정영목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지난 6년 동안, 세 번이나 타리크 알리 작가의 <술탄 살라딘>을 읽었다. 리뷰를 쓰기 전에 주문 내역을 찾아보니 나는 이 책을 두 번 샀더라. 13년 전에 한 번 그리고 6년 전에 중고서점에서 한 번. 아마 처음 산 책은 분실한 모양이다. 지난 3일 동안, 중고서점에서 산 <술탄 알라딘>을 다시 읽었다.

 

두 번이나 읽었던 기시감 덕분인지 책의 진도를 쑥쑥 나갔다. 그만큼 익숙하고 또 흥미진진하다는 이야기겠지. 나의 쇠락하는 기억력 덕분에 마치 새로 만나는 그런 책처럼, 또 새롭게 다가왔다.

 

파키스탄계 영국 작가 타리크 알리의 걸작 <술탄 살라딘>1181년 카이로에서 출발한다. 소설을 이끌어 가는 화자는 유대인 역사학자 그리고 술탄의 총애 받는 서기가 되는 이삭 이븐 야쿠브(야곱). 추운 겨울의 어느 날 자신의 집을 찾아온 술탄은 이븐 마이문의 추천으로 이븐 야쿠브를 자신의 회고록을 쓸 서기로 발탁한다. 일찍이 동방원정에 나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에게 호메로스 같은 저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하던가. 영웅의 일대기를 위해서라도, 중세 기사들을 시종하며 그들을 칭송하던 트루바두르 같은 이들이 필요한 모양이다.

 

타크리트 산골짜리 출신의 쿠르드 족 출신의 술탄 살라흐 앗 딘은 서기에게 자신의 웅대한 꿈을 살짝 비친다. 그것은 바로 프랑크 족에게 90년 간 점령당한 알 쿠드스(예루살렘)를 탈환하겠다는 것이다. 이슬람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프랑크 족의 알 쿠드스 점거는 신자들에게 치욕의 상장이었다. 하지만, 무슬림 세계 내부의 분열 때문에 단일대오를 형성해서 강력한 프랑크 족 기사들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와 그의 숙부 시르쿠가 섬기던 술탄 장기가 이미 프랑크 족에 대한 지하드를 시작했다. 에데사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리던 장기는 환관에 의해 어이 없이 죽고 만다. 왠지 이름도 비슷한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비가 연상되는지. 이슬람의 두 보석 중의 하나라는 다마스커스의 지배자이자 장기의 후계자인 누르 앗 딘은 시르쿠를 이집트에 파견해서 분란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칼리파는 실권 없이 와지르들에게 휘둘리는 상태였다. 상시적 내부분열을 달고 살던 당대 무슬림들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공동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크 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국의 아말릭은 해안 도시들을 제압하고, 무슬림 세계의 이러한 내부 분열을 이용해서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카 살라흐 앗 딘을 대동한 시르쿠는 이집트로 달려가 와지르 일당을 소탕하고 실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영광의 순간에, 시르쿠는 식탐 때문에 어이 없이 죽고 만다. 바로 곁에서 이것을 목격한 살라흐 앗 딘은 평생 검소한 식생활을 하게 된다. 병약한 살라흐 앗 딘을 주변인들은 무시했지만, 삼촌 시르쿠를 따라 다니면서 전쟁을 배우고 아버지 아이유브로부터 가장 중요한 인내심을 배운 살라흐 앗 딘은 이집트의 실제적인 지배자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그의 부상을 우려한 다마스커스의 누르 앗 딘은 그를 견제하기 시작하지만, 살라흐 앗 딘의 아버지 아이유브의 현명한 대처로 시간을 번 살라흐 앗 딘은 결국 누르 앗 딘이 죽은 뒤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로 부상한다. 누르 앗 딘 사후, 다마스커스에 도착한 살라흐 앗 딘은 알레포와 모술을 차례로 공략해서 정복하고 드디어 알 쿠드스 원정에 나서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더해 타리크 알리는 살라흐 앗 딘의 최측근에서 그에게 고언을 마다하지 않는 샤디라는 가상의 인물을 배치한다. 샤디는 사실 살라흐 앗 딘의 삼촌으로 술탄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그런 존재였다. 역시 가상의 인물인 이븐 야쿠브 역시 술탄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면서 그의 삶을 양피지에 옮긴다. <술탄 살라딘>이 매력적인 전기소설이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역사의 빈 공간을 타리크 알리의 상상력이 채운다는 설정이다.

 

단순한 역사라면 아마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작가 타리크 알리는 술탄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술타나 자밀라/할리마 그리고 여러 환관들을 통해 이븐 야쿠브(아마도 본인의 페르소나)의 펜 끝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 술탄이 공석일 때 이집트를 실제로 다스린 카디 알 파딜, 다마스커스의 행정가이자 문장가인 이마드 앗 딘 등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향연도 빼놓을 수 없다.

 

본격적인 알 쿠드스 해방전쟁이 시작된 다음에는 정치를 담당하던 문인들의 이야기에서, 술탄의 조카 타키 앗 딘이나 아미르 케우크부리들로 이야기의 중심이 넘어가는 전환도 인상적이었다. 본질적인 무력으로 이슬람 세계를 통일을 이룬 술탄은 알 쿠드스 해방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병사들과 아미르들을 끌어 모으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술탄은 툴루즈의 베르트랑이라는 항복한 기사나 첩자들을 통해 알 쿠드스의 내부 정보를 모으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자신이 원하는 장소인 하틴에서 기 왕와 샤티용의 레지날드가 이끄는 십자군 주력부대를 섬멸했다. <킹덤 오브 헤븐>에 나오는 이벨린의 발리앙이 지휘하는 한줌의 예루살렘 수비대 앞에 이슬람 전사들이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전략과 전술, 보급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모든 면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수비대는 술탄 부대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88년 전, 알 쿠드스를 점령한 십자군 부대는 무슬림들은 물론이고 유대인 콥트교도 가릴 것 없이 성 안의 모든 이들을 학살했다. 과거를 아는 이들은 살라흐 앗 딘에게 항복하기를 주저했다. 이길 방법은 없고, 항복해도 모두 죽게 된다면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살라흐 앗 딘은 복수심에 불타는 자기 휘하의 제장들을 만류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술탄의 위대함이 돋보였다. 술탄은 예루살렘 수비대에게 목숨도 살려 주고, 재산까지도 성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 중세의 전쟁에서 이런 전례가 있었던가? 신자들의 사령관이었던 살라흐 앗 딘은 그들에게 성지였던 알 쿠드스 해방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기독교도들이 성을 비우자, 살라흐 앗 딘은 가장 먼저 성에 들어가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살라흐 앗 딘의 최측근으로 유대인 이븐 야쿠브가 발탁되어 활약한 것처럼, 술탄 가신단의 많은 이들이 무슬림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능력만 있다면, 유대인이고 콥트 기독교도고 할 것 없이 술탄은 그들을 기용했다. 저자가 책의 어디에서 말하는 것처럼, 당대의 이슬람과 근본주의만 강조하는 현대의 이슬람은 전혀 다르다는 말에 공감이 갔다.

 

이런 정치적 격변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소소한 개인들의 일상도 놓치지 않는다. 12세기 이슬람 세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는 술타나 자밀라는 술탄을 따라 알 쿠드스 해방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비극적으로 끝난 샤디의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할리마를 자신의 애인이자 제자로 삼은 자밀라의 행각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가 이븐 야쿠브에게는 못할 말이 없다. 그만큼 신중한 그의 성격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이븐 야쿠브는 타리크 알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문득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을 넷플릭스 같은 곳에서 영상화하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해봤다.

 

갑자기 술탄의 총애를 받아 최측근이 된 이븐 야쿠브의 기구하고 신산한 삶도 드라마 같지 않은가. 인간 살라흐 앗 딘의 매력에 빠져 가정을 소홀히 한 이븐 야쿠브는 어느 순간 오쟁이진 남자가 되었다. 그것도 자신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이븐 마이문에게 아내를 빼앗긴 남자라니. 그리고 보니 그전에 이븐 마이문이, 너무 술탄의 일에 빠져 가정과 아내 라헬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고 한 사람도 이븐 마이문이 아니었던가. 비탄에서 이븐 야쿠브를 벗어나게 해준 것 역시 술탄과의 동행이었다.

 

이븐 야쿠브를 기다리는 가혹한 운명의 장난은 알 쿠드스가 해방된 다음에 벌어졌다. 역설적으로 알 쿠드스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자면, 이븐 야쿠브 가정의 비극도 벌어지지 않았을까. 이븐 야쿠브의 비극을 기점으로 해서 전기소설의 활기와 역동성은 사라지고, 차분하게 이븐 야쿠브가 카이로의 이븐 마이문에게 전하는 편지로 진행된다.

 

좋은 책은 세 번이나 읽어도 변함없이 좋았다. 그냥 우연히 지난 2월에 조금 읽다만 책 생각이 나서 펼쳤다가 삼독을 하게 됐다. 내가 같은 책을 세 번 이상 읽은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술탄 살라딘>은 처음으로 사독을 하게 되는 그런 책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디 타리크 알리의 나머지 이슬람 5부작도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선 <돌기둥 여인>부터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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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9-02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거 재밌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제 장바구니에도 재출간 알림 신청해놨는데,,, 5부작 모두 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9-02 15:09   좋아요 2 | URL
기회가 되신다면 이슬람 5부작
가운데 1편에 해당하는 <석류
나무 그늘 아래서>를 감히 추천
해 드리는 바입니다.

인생작이라 부를 만한 그런 작품
입니다.

과연 재출간 혹은 나머지 작품들
도 출간이 될런지... 젭알 되었으
면 좋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잉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7
비키 바움 지음, 박광자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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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처서였다. 폭염의 시절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낮에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최악의 더위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더위 핑계를 고만 대고, 이제 책을 읽을 시간이다. 네 개의 단편이 실린 비키 바움의 <크리스마스 잉어>를 읽었다.

 

비키 바움 작가의 책은 <그랜드 호텔> 이래 두 번째던가. <크리스마스 잉어>는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테마를 잡아 출간 중인 흄세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됐다. 오스트리바 빈 출신의 유대계 작가 비키 바움이 지난 세기 어느 순간들의 시대상을 담은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배치된 단편들의 역순으로 <백화점의 야페>부터 시작해 보자. 올해 17살 먹은 제화 수습공 출신의 프롤레타리아 청년 야페 플룬트가 주인공이다. 그의 삶의 배경은 초라하고, 변변한 기술마저 없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기술을 쌓고 있는 중이다. 가난한 청년이라고 해서 욕망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세상의 온갖 상품들이 넘쳐흐르는 백화점에서 멋진 넥타이를 보고는 그걸 목에 매면 왠지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다는 망상, 아니 착각에 빠지게 된다. 문득 그전 이야기에 등장한 신경증에서 광증으로 전이되는 피아노 교사의 이미지가 바로 떠올랐다.

 

돈 없는 청년에게 6마르크 짜리 넥타이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까스로 마련한 1마르크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는 넥타이 밖에 살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페의 선택은 어디로 흐르게 되는 걸까. 청년은 백화점에 잠입해서 모두가 잠든 사이에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한다. 초반에는 그의 소망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총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야페의 존재 자체가 이질적이었다는 점이다. 단순한 물질적 욕망에서 출발한 야페의 일탈은, 파괴 욕망으로 변질되고 결국 자신마저 날려 버리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세 번째 이야기인 <굶주림>은 더 비극적이다. 예전에는 잘 나가는 집안의 규수였지만 지금은 쇠락해서 보잘 것 없는 연금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는 미스 가브릴로프스키가 주인공이다. 미스 가브릴로프스키의 궁색함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녀의 유일한 벗은 죽은 약혼자가 남긴 스컹크 한 마리다. 아니 애완견도 아니고, 반려 동물이 스컹크라니. 이런 설정부터 혀를 차게 만든다.

 

돈 없는 이들이 아낄 수 있는 건, 음식이었다. 양배추 수프인가 만날 싸구려 음식만 먹던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결국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찰해 주던 의사는 그녀에게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해준다. 잘 먹고 건강을 챙기라고. 아니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돈이 없다고. 그래서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표현이 너무 역설적인가!) 피아노 교습을 가기 위해 타야 하는 전차비를 아끼느라 걸어 다니기 일쑤다. 도저히 건강을 챙길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란 말이지.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미스 가브릴로프스키가 세들어 사는 집 아들이 홍역에 걸리면서 그녀에게도 운이 트기 시작한다. 빌리의 홍역 간호에 자원하면서, 미스 가브릴로프스키 하루에 다섯 끼나 얻어먹게 된다. 더 큰 문제는 그녀가 빌리를 왕진하던 의사 에밀 쾨벨링을 자신의 연인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닥터 쾨벨링은 순전히 그녀의 평범하지 않은 신경증에 호기심을 가졌을 뿐인데 말이다.

 

이번 이야기 역시 비극이라는 결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미스 가브릴로프스키는 오랫 동안 제자 빌리의 간호에만 치중하다가 기존의 피아노 교습을 받던 학생들을 모두 잃어 버렸다. 닥터 쾨벨링 역시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미스 가브릴로프스키의 광증에 가까운 신경증이 폭발해 버렸다. , 그것 참.

 

<>은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행복하지도 않은 친칸 부인의 지극히 평범한 삶에 대한 간단하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는 이야기다. 작가는 빠듯한 예산으로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하는 친칸 부인은 번듯한 옷장을 하나 장만하러 나섰다가 비를 맞고, 폐렴을 앓다가 수백만 영겁의 파도 속의 하나의 파도가 되는 순간들을 잡아낸다. 친칸 부인이 죽음의 고비를 몇 번 넘기는 장면에서 왜 나는 저승사자가 연상되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어느 작품에 대한 해석은 오롯하게 그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독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과 만찬이라는 이번 흄세 시리즈의 키워드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은 역시 표제작 <크리스마스 잉어>였다. 잉어 요리가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의 명절(크리스마스)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말리 고모의 등장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화가 사라지기 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한다. 명절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렇게 음식을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 나도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가족들이 모여 왁자지껄한 한 시절을 보냈지만, 파편화된 핵가족 시대에는 그럴 일이 없게 되어 버렸다. 이제 곧 우리의 명절이 다가오는게 좀 아쉽다라는 느낌이다.

 

명절 만찬을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말리 고모는 잉어 쟁탈전에서도 유감 없는 실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멋진 잉어를 공급해 주는 이가 나중에는 배척당하게 되는 유대계 상인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그렇게 좋았던 시절은 1938년 안슐루스로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웃의 이상한 독재자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로는 더더욱 크리스마스 잉어가 구하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뒤바뀐 시절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잉어 없는 크리스마스 명절은 상상할 수가 없다. 말리 고모가 명절에 보여주는 일종의 책임감은 마치 오래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녹두빈대떡을 만들기 위해 불린 녹두를 맷돌에 갈아 내리는 신성한 작업을 묵묵하게 수행하던 젊은 시절의 작은 아버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말리 고모가 어렵게 구해온 크리스마스 만찬 식탁에 오를 잉어 요리 후보를 욕조에 넣어 보살피게 되면서 라너 박사의 식구들은 잉어를 애착하기 시작한다. 요리를 하기 위해 잉어 아달베르트를 잡아달라는 말리 고모의 말에 전쟁터에서 적군과 사납게 싸우던 조카들이 차례로 꼬리를 내려 버린다. 누가 어느덧 가족 같이 되어 버린 아달베르트에게 먼저 포크를 내밀 것인가.

 

좀 더 고차원적 해석을 더해 보자면, 욕조에 갇힌 채 명절 식탁에 오르길 기다리던 잉어 아달베르트는 독일/오스트리아의 선량한 민중들이 아니었을까. 게르만 민족을 패전의 수치와 무지막지한 실업, 살인적 인플레이션에서 구할 민족의 지도자로 착각하고 칭송했던 독재자는 레벤스라움을 위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그들에게 파멸적 재난을 제공하지 않았던가. 순간의 판단착오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걸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잉어>에서 뭐랄까 어떤 유쾌함을 기대했건만, 저자 비키 바움은 왠지 독자들에게 쓴맛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다. 그 또한 피할 수 없는 우리네 삶의 리얼리티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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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8-24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길이 머물렀던 소설의 글을 읽고나니 더 관심이 가네요.

레삭매냐 2024-08-24 23:03   좋아요 1 | URL
흄세의 식욕과 만찬 키워드 픽업
이 멋진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4-08-25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흄세 시리즈는 책 표지가 참 예뻐요. 근데 읽어본 책은 한 권도 없네요. 조르주 상드 책 표지가 너무 예뻐 사서 책장에 그림처럼 세워놨는데 볼때마다 좋습니다.

레삭매냐 2024-08-25 23:38   좋아요 2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흄세 시리즈의 표지는 가히 판타스틱
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드의 책은 예술이네요.

전 개인적으로 <폴과 비르지니>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레이스 2024-08-27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용이 뭔가 있을것 같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네요.
흄세시리즈는 안사봤는데, 한권 사면 다 사서 꽂아놓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그런 책일듯요
하지만, 그래도 요 책은 사보고 싶네요^^

레삭매냐 2024-08-28 09:19   좋아요 2 | URL
세문 시리즈가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클만 하더라도, 나중에라도
사서 읽어야지 싶었는데...
어느 순간 다 절판되어 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다른 버전으로
나오고 있긴 하지만요.

얇은 소설집이라 금방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헛된 기다림 민음사 모던 클래식 63
나딤 아슬람 지음, 한정아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책이 국내에 출간된 지 11년이 지났다. 책은 절판됐다. 결국 중고서점에서 구해서 읽었다. 왠지 이 책은 꼭 구해서 읽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인생책으로 부를 만하지 않나 싶다.

 

요즘 무더위에 책읽기가 지지부진했지만, 매일같이 조금씩이라도 나딤 아슬람의 <헛된 기다림>을 읽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다 읽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되었다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파키스탄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나딤 아슬람은 무려 5년에 걸쳐 이 소설을 썼다. 과연 그만한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그런 책이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래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된 아프간의 우샤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헛된 기다림>은 방점을 찍는다.

 

아프간 땅에 이슬람이 들어오기 전, 불교가 있었다. 영국 출신 의사 마커스 콜드웰의 아내 카트리나가 만든 향수 공장에 있던 돌부처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마커스는 아프간 출신 아내 카트리나와 결혼하기 위해 개종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과 그림을 좋아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어 버렸다. 그리고 소련과 미국의 침공(아 그전에는 영국이 개입했었나) 그리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이슬람 근본주의로 무장한 무자헤딘 전사들의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래,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들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금지해 버렸다. 이슬람과 평등주의는 양존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던가. 탈레반이 준동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상실의 시대가 도래했다. 소설 초반에 왼손을 잃은 마커스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지난한 독서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방의 이교도와 결혼한 의사이자 화가였던 카트리나는 투석형을 당해 죽는다.

 

지식과 남녀가 평등한 교육을 경멸하는 탈레반을 피해, 마커스들은 천장에 책을 못질해서 매달아둔다. <헛된 기다림>의 표지에 등장하는 못에 뚫린 책의 이미지는 기가 막힌 선택이었다. 책을 탄압하는 탈레반의 모습에서 타리크 알리의 소설 <석류나무 그늘 아래> 초반에 등장하는 가르나타를 정복한 기독교도들이 책을 불사르는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종교에서나 근본주의는 그렇게 무서운 게 아니었나.

 

마커스의 집에는 삶에서 상실한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우선 아프간에 파병되어 실종된 동생 베네딕트를 찾아 나선 소련여자 라라(라리사 페트로브나)가 있다. 남편 스테판의 죽음 그리고 동생의 실종으로 무너지는 영혼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보석상으로 위장한 전직 CIA 요원 데이비드 타운은 역시 소련군에게 납치되어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마커스 딸 자민의 과거를 추적하는 중이다. 이십대 초반의 카사는 이교도와 자신의 땅을 침략한 미군을 상대로 지하드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용의가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세례를 받은 청년이다. 두니아는 파괴와 살육의 땅에서 희망을 놓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다. 이들에게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의 왼손을 잃은 마커스는 자신의 집을 그들의 영적 힐링을 위한 공간으로 아낌없이 내어준다.

 

<헛된 기다림>을 읽기 전에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인터뷰에 대한 내용을 보고, 아프간 현대사에 대해 글들을 찾아봤다. 1970년대 말, 미국의 정치인들은 아프간을 소련의 베트남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저자 나딤 아슬람은 정보요원 데이비드 타운을 통해 미국인들의 그런 시각을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자신의 사랑하는 형 조너던을 베트남에서 잃은 데이비드는 조국과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아프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벌어진 각종 비밀업무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런 이들의 행동이 과연 아프간 땅에 평화와 안녕을 가져 왔던가. 아마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시도들은 미국과 아프간 사이의 물리적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나 싶다. 투석형, 절단형 그리고 탈영하거나 낙오돼서 포로로 잡힌 소련군 병사들을 부즈카시로 참혹하게 다룬 장면에서는 '야만'적이라는 말이 자동으로 튀어 나올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딤 아슬람 작가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벌어졌던 그런 야만적 행위들을 통해, 여전히 아프간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일들을 직시하라고 주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서방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간극은 영원이 메울 수 없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자신만의 사연을 품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카사의 스토리에 가장 관심이 갔다. 어려서부터 알라를 위한 성전 전사로 키워진 카사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쟁 병기였다. 신을 위해 모든 인간적 욕망을 거세하고 철저하게 신의 전사로 성장한 카사가, 마커스의 '힐링 하우스'에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과 3일을 보내면서 미세한 심경변화의 조짐을 보여준다. 나딤 아슬람은 바로 이런 식으로 암울한 아프간의 미래에 한조각 희망을 심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투신한 두니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의 차이일 뿐.

 

<헛된 기다림>에는 문학작품이 품을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오래 세월에 걸친 가슴 아픈 로맨스가 등장하기도 하고, 고대에서 출발해서 현재에 이르는 아프간의 역사, 무지에서 비롯된 이슬람 종교에 대한 오해, 잃어버린 혈육 혹은 사랑을 찾기 위해 자신의 안위 따위는 무시하고 달려드는 맹목적 헌신과 엔딩에 배치된 실종에 대한 미스터리의 해결 등... 400쪽 남짓한 책에 이런 다채로우면서 매혹적이고 또 슬픈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 나딤 아슬람의 역량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정말 "아름답게 쓰인" 책이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다.

 

지금까지 나딤 아슬람은 다섯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8년에 나온 <헛된 기다림>이 그의 세 번째 소설이었다. 과작(寡作)으로 유명한 그의 다른 작품들의 국내 출간을 기대하기란 과연 난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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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8-22 17: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인생책을 만나셨군요. 저도 중고책 구해봐야겠어요. 아프가니스탄 배경 소설은 호세드 할레이니 책만 읽어봤는데 기대되네요.

레삭매냐 2024-08-22 18:55   좋아요 2 | URL
[귓속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쿠팡에서 새책을 파는 것 같습니다만.

할레이니의 책과 수준이 다르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coolcat329 2024-08-22 19:27   좋아요 2 | URL
바로 샀어요! 알라딘 중고도 있는데 2만원 채워야해서 담아두기만 했거든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용!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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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매불쇼에 출연한 유시민 작가의 방송을 들었다. 뭐랄까, 요즘 자주 듣다 보니 유시민 작가와 내적 친밀감이 생겼다고나 할까? 방송 중에 보니 지난달에 사서 어제 다 읽은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 눈에 띄었다. 유 작가는 한 20만 권 정도 팔리면 좋겠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나도 유시민 선생이 바라는 1/200,000에 일조하지 않았나 싶은 마음에 뿌듯했다.

 

민심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쏜 종이로 만든 탄환에 맞아 현 정부는 지난 총선에서 참패했다. 하지만 바뀐 건 아무 것도 없다. 국회에서 내놓는 법안에 ""는 족족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전과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을 거라는 점을 시사했다. 답답한 마음에, 임기종료일을 검색해 보니 1006일이 남았다고 한다.

 

그가 구축한 성공 방정식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대선 승리의 기세를 몰아, 지방선거에서 압승했다. 밴드왜건 효과는 대단했다. 하지만 정치 초보인 알파 메일은 연승이 가져다주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승리의 원인이었던 연합 정치의 토대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우선 눈엣가시 같았던 젊은 당대표를 몰아냈다. 그 다음에는 지지율 바닥을 달리던 당대표 후보를 당의 간판으로 만들었다. 총선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강서구청장 선거에서 민심을 읽지 못하고,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후보를 사면해서 다시 후보로 내세웠고 참패했다. 당대표를 날려 버리고, 정치 초보인 자신의 심복을 비대위원장으로 삼아 총선을 치렀다.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다.

 

지난번 총선에서도 180석 예상으로 노스트라다무스를 뺨치는 예언을 했던 유시민 작가는 이번에도 냉정하게 데이터를 기반으로 해서, 총선 결과를 예측했다. 선거 전까지 그야말로 드라마를 뺨치는 듯한 일들이 허다했지만, '정권심판 프레임'이라는 거대한 줄기는 꺾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총선을 앞두고 공천과 경선 과정에서 많은 잡음을 생산해냈지만(이 또한 보수언론의 과민반응이었다), 현역 물갈이에 성공하고 역대급 성적을 기록했다.

 

유시민 작가는 방송에서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기존 레거시 미디어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고 한다. 현재 우리 언론 저널리즘의 현 주소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말이다. 최근 유시민 작가와 함께 MBC 대담에 등판한 한국일보 기자는 여전히 레거시 미디어의 순기능에 대해 설파했지만, 돌아선 시청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일들에 대해 취재하고 방송하지 않는가? 왜 소수의 저널리스트들이 뉴스 가치를 재단하고,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제약하는가에 대해 묻고 싶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거시 미디어의 권력은 급전직하 중이고, 상대적으로 너튜브의 실력을 갖춘 저널리스트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권력을 이양받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내가 낸 세금으로 강아지 배변지나 동남아에서 물건을 쌀 때 사용하는 친환경 포장지로 재활용되는 신문사에 지원한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질 판이다. 사람들이 보지도 않는 신문을 광고수주 때문에 판매부수를 늘리기 위해 찍어내고, 바로 트럭에 실려 폐지가 되는 과정을 보자니 기가 찰 노릇이다.

 

유시민 작가는 정치인과 정치업자를 구분한다. 정치인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니까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거다. 하지만 정치업자는 권력 쟁취에만 관심이 있다. 우리의 알파 메일은 단 한 번 선거로, 가장 큰 판에 걸린 판돈을 얻는데 성공했다. 그가 최고권력자로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무리 지난 2년을 복기해 봐도 알 수가 없다. 말로는 노동시장, 연금 그리고 교육개혁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모두 실기했고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게 없다. 모두 법 개정이 필요한 사항들이고, 거대 야당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하지만 정치로 이런 복잡한 개혁들을 풀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협조를 구하는 게 아니라, 제거해야할 정적으로 규정하고 사정기관을 총동원해서 사냥에 나섰다. 그전에 무혐의 받은 건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선에서 석패한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를 겨냥한 수사는 매서웠다. 작년 가을에는 구속의 위기까지 몰리지 않았던가. 유시민 작가는 자신은 정치인으로 이런 수모를 견딜 자신이 없어서 정치를 그만뒀다고 썼던가. 보통의 멘탈로서는 공개적으로 조리돌림당하고, 자신에 적대적인 언론에 의해 당하는 수모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에, 이런 일들을 참고 있다고 저자는 쓴다.

 

이재명이 '죽을 뻔한' 사람이었다면, 그전에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국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이미 죽었던 법학자 조국은 정치인으로 거듭나서 당당하게 국회의원이 되어 돌아왔다. 지역구에서 민주당과 경쟁하지 않고, 비례정당 승부수를 띄웠고 조국혁신당은 대성공을 거뒀다. 중도를 표방하는 민주당에 비해, 보다 선명성을 강조하는 조국혁신당의 시원시원한 발언과 강령에 시민들은 24% 비례표로 화답했다. 조국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가 보여줄 정치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분투를 응원한다.

 

유시민 작가는 일찍이 고블린의 예를 들어, 알파 메일의 말로가 매우 비참할 것이라는 점을 예언했다. 그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예상되는 비극의 재현을 막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임기단축이나 대연정 같은 방안들이다. 알파 메일이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아마 그 방안들을 받아 들였겠지만, 정치업자는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것 같다. 저자는 닉슨 대통령의 경우를 들어 '놀리 프로시콰이 (Nolle prosequi:항구적 불기소 특별사면)'라는 생소한 개념을 소개한다. 참신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기대난망이다.

 

다시 현실이다. 아직도 1006일이 남았다. 주권자의 수준이 국가의 수준을 결정한다고 한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초래한 후과가 너무 크고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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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08 00: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1006일로 끝나면 그나마 괜찮겠지만,
그대로 답습되어 연장되면 어떡하지요?
ㅠㅠ

레삭매냐 2024-08-08 15:40   좋아요 2 | URL
너무 급작스럽게 시스템이
무너져 버려서, 나중에 후
유증이 오래갈 것 같습니다.
걱정입니다.

초란공 2024-08-08 00: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명대사가 맴도는 밤이네요.
“저놈의 목을 쳐라!”

레삭매냐 2024-08-08 15:42   좋아요 1 | URL
So be it.

고양이라디오 2024-08-21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리뷰를 보니 책이 읽고 싶어지네요ㅎ 리뷰에 공감합니다. 아직도 1000일 가까이 남았다니 많이도 남았네요ㅠ

레삭매냐 2024-08-21 10:43   좋아요 2 | URL
천일동안...
오래 전에 어느 가수가 부른 노래
생각이 나네요.

참 긴 시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