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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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작가가 2005년 <카스테라> 이후 5년 만에 내놓았다는 두 번째 소설집 <더블> 비사이드를 읽었다. 모두 9개의 소설로 이루어진 <더블>의 두 번째 권부터 먼저 읽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 연작소설이 아닌 바에야, 무엇부터 먼저 읽으면 어떠리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다시 한 번 박민규 작가는 글 쓸 줄 아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다.

내가 읽은 그의 작품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유일했다. 어려서 삼미 슈퍼스타의 팬이어서 그런지 그의 소설에서 묘사되는 곰돌이 베어스에게 처절하게 연패당하는 슈퍼스타답지 않은 삼미 팬의 심정이 마치 나의 고백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는 천명관 작가의 <고래>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뛰어난 데뷔작이라고 생각한다.

늘 그렇듯이 서설이 길었다. 단편 소설의 핵심은 초반 독자의 몰입이다. 장편 소설과는 달리 서사의 캐릭터와 구조로 단기간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단편에서는 독자의 흥미를 잃지 않게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 작가는 <더블>에서 단박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1번 타자로 등장하는 <낮잠>에서는 상처를 하고 재산도 정리해서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요양원에 자발적으로 들어가서 여생을 보내는 주인공의 삶을 조명한다. 그리고 만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서사의 중심에 둥지를 튼다. 별이 인간 나부랭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인간이 별을 헤아려야 한다는 노년의 고백은 애잔함 그 자체로 다가선다. 첫사랑은 그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어야 했던가? 요실금으로 기저귀를 차고, 떨리는 옛사랑과 모교를 찾은 나는 그만 실수를 하고 만다. 비루한 일상은 말년의 로맨스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소설집 <더블>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소설을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하지 않고 <龍龍龍龍>을 선택하고 싶다. 이제는 잊힌 장르가 된 무협지를 현대에 맞춰 패러디한 이 소설은 금강불괴 영원불사의 몸으로 역사의 격랑을 헤치고 살아온 네 명의 무림 대협을 전면에 내세운다. 일제강점과 독립,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 같은 파란만장한 한국현대사가 절대 무공을 가진 무림 고수의 회상을 통해 펼쳐진다. 신의와 의리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던 강호세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대협의 제자들은 오로지 돈이 최고라며, 무예가 아닌 기예가로 비루한 일상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상상에 바탕을 둔 판타지는 현실세계에서마저 힘을 못 쓰고 스러져 버릴 뿐이다.

그 사이에 등장하는 <루디>는 색다른 느낌의 소설이다. 빙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미국 알래스카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인질극의 주인공이 된 나는 ‘기적의 아기’에게 포로가 되어 갖은 수모를 당하고, 라이플과 권총으로 무장한 냉혈한이 아무런 이유 없이 살인를 하는 장면을 목격해야 한다. 폭력의 극한에서 비로소 구원의 길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뉴스에서나 볼법한 일상의 폭력을 경험하게 된 어느 방관자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아스피린>은 정말 한 번 상상해 봤을 법한 판타지의 구현이다. 서울 상공에 거대한 비행물체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비루한 일상의 삶이 중단되지는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경쟁 피티를 해야 하는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인 주인공은, 수없이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끼니를 때우고 야근해야 한다. 회의와 일의 반복이라는 일상에 이 기이한 비행물체의 등장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급기야 재난지구로 선포되기까지 하지만 주인공의 일상은 바뀌지 않는다. 비루한 일상의 포로가 된 현실에 작가는 예리한 시선을 투척한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에서는 무능력한 가장으로 한때는 잘 나가던 차팔이였으나 이제는 영락해서 계약직으로 밀려난 세일즈맨의 비루한 일상이 등장한다. 몇 개월째 차를 팔지 못했으니 당연히 수입이 없을 테고, 카드마저 정지되어 서민에서 빈민으로 사회적 자체강등에 반항해 보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암울한 현실은 도대체 어쩔 거냔 말이다. 게다가 거시기마저 서지 않아, 아내가 딜도를 장만했다는 사실에 주인공은 벼랑 끝에서 추락을 경험한다. 한바탕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찜질방으로 도피한 나는 예전에 동료로부터 화성으로 판로를 넓혀 보라는 충고를 듣는다. 경기도 화성? 아니다, 달나라 화성 말이다. 기발하다 기발해.

신자유주의 경쟁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파라다이스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프로파간다와는 달리, 주변의 일상은 왜 이렇게 비루하기만 한 것일까. 애인이라고 생각했던 여자의 빨대짓으로 거덜 난 남자는 콩밥을 먹고 나서 살기 위해 대리운전을 뛰고, 산재로 다친 남자는 직장에서 잘려 한강다리 아치에 오르고, 잘 나가던 가장은 영락해서 죽고 싶다고 하니 말이다. 이러한 비루한 일상은 고작 판타지의 세계에서나 기를 펼 수 있다는 묵시일까?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된 걸까. 그것은 아마 우리네 삶만큼 복잡하고 해석이 불가할 따름이다.

표지를 보면서 회사 동료가 <복면달호>냐고 물었다. 난 송강호의 <반칙왕>을 떠올렸는데 말이다. 확실히 세대 차다. 비루한 현실에 이런 복면을 씌우면 판타지로 변하게 되는 걸까? 그야말로 엉뚱한 상상이다. 작가의 말대로 깊어가는 가는 가을에 독자를 찾아온 멋진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제부터는 A Side...

B Side와 마찬가지로 A Side에도 모두 9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을 접하면서 드는 생각인데, 긴 호흡으로 가는 장편보다 단편에 작가의 내공이 더 드러나지 않을까 싶다. 비교적 넉넉하게 캐릭터와 시공간의 배경을 다룰 수 있는 장편에 비해, 단편에서는 짧은 시간에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아야 하는 강박관념이 작가에게 있지 않을까? 물론, 소설을 써보지 않은 어느 독자의 생각이겠지만.

A Side에서도 일상의 비루함은 이어진다. 현직에서 은퇴한 가장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고, 자식들의 뒤를 돌봐준다. 사업하겠다고 나섰다가 망한 아들의 빚을 갚아주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하는 딸내미의 임용을 위해 아낌없이 남아 있는 집을 처분한다. 건강검진을 받고, 앞으로 30년 이상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인공은 좌절한다. 예전에는 삶의 미덕 중의 하나로 칭송받던 장수를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다는 변한 세태를 반영하는 송가라고나 할까. 부세를 조기라고 우기면서, 시부모님을 대접하는 며느리를 보면서 그저 열심히만 살아 달라는 부탁을 속으로 되뇐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와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 애잔하기만 하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살던 주인공은 병원에서 간암 말기 선고를 받고 낙향한다. 태평양 바다를 유영하던 연어가 고향을 찾듯, 주인공 역시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고향이란 그런 것일까? 이렇다 할 고향의 추억을 갖지 못한 이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컨셉일지도 모르겠다. 이십 년 전 친구들과 함께 묻은 타임캡슐을 파내 추억을 곱씹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은 마치 물에서 막 걷어올린 붕어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시나브로 주인공을 찾아온다. 얼떨결에 살을 섞게 된 옛 여자 동창으로부터 돈을 빌려달란 말은, 죽음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끈질긴 생명력의 선언처럼 들릴 뿐이다.

행사장 도우미를 하는 여친과 몰래 동거하는 동민 역시 비루한 삶의 주인공이다. 이 이야기를 읽다가 요즘 즐겨봤던 케이블 텔레비전의 <루저전>이 떠올랐다. 주류사회로부터 소외된 주인공들이 지하셋방에서 살면서, 취업과 신분상승을 사다리를 밟고 언젠가는 폼나게 한 번 살아보겠다는 좌충우돌 모험기가 동민의 그것과 묘한 동조를 이루고 있다. 시골 마을에까지 대형마트가 진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동민의 보스는 기구를 띄워서 홍보하겠다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하지만, 기구 제플린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와중에 기구는 날아가 버리고 동민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기구를 되찾아 오라는 명령 아닌 명령에 비호감 제이슨 형과 함께 출동한다. 은근히 이 모든 문제가 제이슨 형 탓이라고 생각하지만, 동행 길에 제이슨 형에 대한 재발견으로 갈등은 저절로 해결된다. 결말 부분의 요양원 할머니의 등장은 쌩뚱 맞았지만.

지구 멸망을 하루 앞두고 이웃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며 폭음을 하기도 하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 <프레데터스>의 전주곡처럼 어디선가 끌려와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을 마치 팝콘을 튀기듯이 학살하기도 하고, 극한의 해저에 도전하는 신인류에 대한 묘사 그리고 자신이 전생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육체파 여배우였다는 자전소설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박민규 작가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에 그저 감탄할 수밖에. 물론, 너무 낯설어서 소설의 진행을 따라가기에도 급급한 적도 있긴 했지만, 역시 대단한 구라꾼이라는 생각에 잘 정제된 두 권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는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개인적으로 야구를 무척 좋아하는데, 책을 읽다가 옥에 티를 하나 발견했다. 자전소설을 표방하는 <축구도 잘해요>에서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자 메이저리그의 전설로 등장한 조 디마지오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유리창을 깰 수 있다는 장담하던 팀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아니라 뉴욕 자이언츠였다. 자이언츠가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로 이사 간 것은, 디마지오가 은퇴하고 나서 7년 뒤의 일이었다.

이 멋진 작가가 다음번에는 또 어떤 소설적 경이로 찾아올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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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탈 - 개정판
조정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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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보고 리뷰를 남긴 적이 있다. 지금 보니 장황하게도 썼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런 극적 이야깃거리를 소설로 쓰면 좋겠다 싶었는데 조정래 선생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책이 바로 오늘 단박에 읽은 <사람의 탈>이다.

1944년 6월 6일, 나치 독일 제3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서유럽 해방을 위해 고대해 마지않던 제2전선이 열렸다. 이날 잡힌 나치 동방대대 소속의 병사 사진과 그에 대한 기록이 조정래 선생의 <사람의 탈>의 모티프로 작용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소설은 1939년 만소국경의 노몬한에서 벌어진 소련과 일본의 충돌을 이야기의 발화점으로 삼는다.

한 때 천하무적이라 불리던 일본 관동군은 소비에트의 주코프 장군이 이끄는 기계화 병단과 맞붙었다가 참혹한 패배를 당한다. 중국에서 군벌집단을 상대해온 관동군은 오로지 황군 정신으로 소비에트의 전차대에 도전했다가 낭패를 당한다. 계속되는 침략전쟁으로 병력 부족에 직면한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사지에 몰아넣기 시작한다. 조선에만 주둔하고, 돌아오면 면 서기직은 준다는 달콤한 제안을 남발한다.

그렇게 노몬한 전선에 파견된 주인공 신길만은 보급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무지막지한 소련군을 상대한다. 황군에게 항복이나 포로가 되는 것은 수치라고 외치면서 수많은 일본군이 옥쇄를 감행하지만, 신길만과 일단의 조선 청년에게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아버지가 전장으로 향하는 길만에게 화두처럼 던진 총알을 피하는 살아남는 게 최고의 선이다. 동귀어진하자는 옥쇄 파트너를 찌르고 길만은 소련군의 포로가 된다.

기미독립선언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세대에 해당하는 신길만은 소작농의 자식이라는 계급적 이유로 인해 징병당한다. 예나 지금이나 무산계급은 희생의 대상일 뿐이다. 일본의 통치가 영원할 것 같았던 변절의 시기에 그들이 과연 조국 독립의 꿈을 꿀 수가 있었을까? 소련군의 포로가 된 길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소련 군복을 입고 나치 독일의 마수에 맞서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된다. 이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그가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혹독한 포로수용소 생활 끝에 동방대대라는 이름으로 노르망디 전선으로 파견되고 미군의 포로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조명한다. 어쩌면 이렇게 기구한 팔자를 타고났을까.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개연성과 상상을 더하긴 했지만, 정말 그럴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 모든 역경을 거쳐 살아남은 길만네를 기다리고 있는 비극은 참으로 가혹했다. 일본, 소련 그리고 독일은 모두 주인공 신길만을 필요에 따라 철저하게 이용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들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고, 나라 없는 백성은 어쩔 수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비애를 조정래 선생은 예리하게 짚어낸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라 그런지 확실히 책은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왠지 결혼식 피로연에 가서 뷔페를 먹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무언가 많이 먹은 것 같긴 한데, 헛헛한 느낌이 든다. 노몬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역사의 큰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개인의 기구한 운명이 묻혀 버렸다는 느낌이랄까. 속도감 넘치는 전개가 마음에 들면서도, 2% 부족함 느낌이다.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신길만네가 포로수용소를 만드는 장면에서는 홀로코스트를 떠올렸다. 그랬다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졌을까? 주인공 신길만의 개인적 고뇌와 간난을 좀 더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계속되는 투항 그리고 연이은 적(敵)으로의 변신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식민지 청년의 애환에 보다 방점을 찍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소설을 읽던 중에 문득 “인두겁”이란 말이 떠올랐다. 보통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 말이, 총탄이 빗발치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처럼 갈리는 순간에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몇 번의 서로 다른 인두겁을 뒤집어써야 했던 어느 무국적자의 비운과 공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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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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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에서 “세계문학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중인 시리즈의 한 편인 바진 선생의 <차가운 밤>을 읽었다. ‘인민작가’라는 호칭으로, 격동의 중국현대사를 모두 체험하며 101세까지 천수를 누리고 영면한 노작가 바진이 문학적 완숙기에 발표한 <차가운 밤>(1947)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임시수도 충칭을 무대로 한 작품이다.

바진은 소설의 중심축에 기존 왕조중심의 봉건질서를 타파하고 공화정으로의 이행을 촉발시킨 신해혁명 이후, 표출된 전통가치와 신문화의 충돌을 배치한다. 여자는 모름지기 집에서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며 지아비를 내조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를 하는 주인공 왕원쉬안의 어머니와 그의 아내 청수성이라는 각각 구세대와 신세대를 대변하는 캐릭터가 정면대결을 벌이면서 중국판 ‘사랑과 전쟁’을 엮어낸다.

만주에 이어 중국 전토를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폭력적 제국주의 침략 앞에, 전시 임시수도 충칭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다. 죽음을 상징하며 일상화된 적기의 공습경보는 이제 친근하기까지 하다. 시대의 불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반 국영기업의 출판사 편집부에서 교정을 담당하는 왕원쉬안은 빈곤과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은행에 다니는 아내 청수성은 애당초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가 자라면서 교육비 부담은 날로 느는데, 그들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왕원쉬안은 아이들 교육에 중국의 미래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의 꿈을 키우지만, 아내와 어머니의 심각한 불화로 자신의 꿈 따위로 고민할 여유가 없다. 수성에 대한 애정과 어머니에 대한 효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우유부단한 지식인의 그림자가 얼비친다.

대학교육을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수성은 지금보다도 앞으로의 삶이 더 걱정이다. 신여성답게 그녀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파티를 즐기고, 브리지 게임을 하지만 그녀 역시 전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이런 수성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질색하고, 며느리를 비난한다. 대략 요즘 우리나라 막장 드라마를 연상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바진은 대척점에 서 있는 이 두 여성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꼬집는다. 근대화를 지향하면서도, 과거의 유산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새로운 세대의 고민을 왕씨 가족의 불화를 통해 담담하게 그려낸다. 두 여자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능력한 인텔리의 모습은 조금은 진부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원쉬안은 가정 내부의 모순을 항일전 탓으로 돌린다. 그리고 그저 무조건 참아내면, 지금의 불행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판이었다. 결국, 원쉬안은 치명적인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그의 곁을 떠나면서 불행의 열차는 폭주를 시작한다. 이런 구조는 외세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던 장제스가 이끌던 국민당 정부의 무능력을 왕씨 집안의 가장인 원쉬안에 대입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승전의 순간에 맞는 죽음은 비극 그 자체로 다가온다.

중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던 바진의 글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정치적인 암시와 복선을 제시한다. 세 주인공에 대한 치밀한 심리묘사와 일본과의 전쟁이라는 최악의 폭력 상태를 통해 당시 중국 민중이 가지고 있던 불안의 본질을 조명한다. 중년으로 접어든 혁명세대의 희망과 좌절을 원쉬안과 수성의 갈등 속에 바진은 멋지게 녹여낸다.

이 소설에서 ‘차가운 밤’은 사랑하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아내와의 이별의 순간이며, 마지막에는 비극의 조종을 상징하는 시간이다. 무정부주의를 꿈꾸면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대작가 바진과의 첫 만남은 만족스러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소개된 그의 다른 작품에 호기심이 생겼다. 조만간 바진과의 새로운 랑데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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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헤르메스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헤르메스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레삭매냐 2010-11-18 22:15   좋아요 0 | URL
먼저 부족한 제 서재에 들러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서평단을 신청하고 그 중에서 선정하는 방법인 것 같군요.
좋은 제안 감사드립니다.
 
천국은 다른 곳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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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의 칼럼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초기작, 대표작 그리고 최근작을 읽는 것이 첩경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거의 반세기 동안 꾸준하게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위의 공식에 요사 선생의 작품 세계를 대입해 보면, 초기작으로는 <녹색의 집>, 대표작으로는 <세상 종말 전쟁>과 <염소의 축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근작으로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천국은 다른 곳에>를 꼽을 수가 있겠다.

우선 그동안 꾸준하게 우리나라에 소개되어왔지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더불어 남미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대중적인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미출간 작품들이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해서 다투어 소개되고 있다. 물론 그의 팬으로서 반가운 소식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에서 가장 빨리 요사 선생의 신간으로 출간되었기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주문 클릭을 눌렀다.

전작 <염소의 축제>에서 선보였던 서로 다른 층위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에 플래시백을 추가한 서사 구조는 <천국은 다른 곳에>서 단순해졌지만, 더욱 정교해진 형식으로 집중력을 높였다. 리얼리즘과 허구(픽션)의 조화 역시 인상적이었다.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한 ‘평전 소설’의 재미와 감칠맛은 여전하다. 아마 번역을 맡은 역자 김현철 씨의 문학적 체화가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요사 선생의 부름을 받은 역사 인물은 바로 19세기 중엽, 여성해방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을 통해 인류의 구원을 제창했던 플로라 트리스탄과 그녀의 외손자로 화성(畵聖)으로 추앙받는 고흐와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한 때 이상적 예술 공동체를 꿈꾸다가 야만과 원시 그대로의 예술혼을 불사르기 위해 폴리네시아 타히티로 갔던 외젠 앙리 폴 “코케” 고갱이다.

<염소의 축제>에 주인공 중의 한 명으로 등장한 상원의원의 딸이자 미국에서 교육받은 엘리트 여성의 한계에 대한 비평을 의식한 탓일까?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전작에 등장한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에서 한참 앞서나간 여성운동가 플로라 트리스탄을 <천국은 다른 곳에>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19세기 중반 급격한 산업화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플로라는 노동자와 여성의 연대를 통한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던진다. 부르주아 계급의 귀부인을 “아리따운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플로라는 인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경찰과 종교계의 지속적인 탄압에도 프랑스 전역을 순례하면서 <노동조합> 설립을 통한 노동자/여성의 권익 신장과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자고 주장한다. 작가는 1844년이라는 플로라의 인생 마지막 해의 강렬했던 투쟁에, 신산한 개인의 삶을 플래시백으로 다루고 있다.

여자 메시아 플로라 트리스탄의 이야기가 <천국은 다른 곳에>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외손자로 전 세계를 누비던 선원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유능한 주식 중개인에서 중년에 전업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폴 ‘코케’ 고갱이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이렇게 플로라 트리스탄과 폴 고갱에 대한 교차 서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별개의 소설로 읽더라도 무난한 정도의 개별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정치과 예술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에서 나름대로 ‘천국’을 지향했던 인물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상상력이라는 물감으로 재창조해낸 문학적 초상화다.

플로라와 코케 모두 어쩌면 자신이 편입되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와 위선을 배격하고, 각각의 분야에서 냉정과 열정을 오가는 치열한 삶을 살았던 캐릭터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에릭 홉스봄의 원서강독을 하면서 들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푸리에-프루동의 이름이 먼지 쌓인 기억의 창고에서 주술처럼 그렇게 소환됐다. 샤를 푸리에와 로버트 오언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사유재산제의 부정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플로라는 기존의 결혼제도를 여성의 남성에 대한 구조적인 종속이라는 악의 근원으로 보고, 완벽한 남녀평등을 주창한다. 당시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진 착취와 불평등이라는 시대모순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과 실천이라는 서사적 논거를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양심은 정확하게 짚어낸다.

플로라 트리스탄의 삶이 냉정함을 담보한다면, 그 대척점에는 열정의 사나이 폴 고갱이 서 있다. 고갱의 파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친 네덜란드 놈”에 대한 언급에서는 이 화성에 대한 애증과 그의 죽음에 대한 고갱의 죄의식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고갱의 할머니 플로라가 이상적 공동사회에 대한 꿈을 꿨다면, 고갱은 예술 공동체로서의 아르카디아(Arcadia)의 건설을 희망했다. 하지만, 화성은 정신병으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고갱은 야성과 문명을 허물기 위해 폴리네시아의 타히티로 또 더 나아가 마르키즈 제도에까지 도달했지만 끝내 자본에 종속된 화가의 숙명(마몬 신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한편, 기독교 문명인의 허울을 벗고 스스로 야만인/이방인이 되고자 한 고갱의 모습에서 1990년대 초반 페루 대선에서 후지모리에게 패한 후, 조국 페루를 떠나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얼터 이고(alter ego)가 읽혔다.

<천국은 다른 곳에>는 과거 역사 서술의 ‘마스터’라고 할 수 있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후기 작품세계의 걸작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정치와 예술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해 ‘천국’이라는 이상향을 모색한 거장의 문향에 그만 흠뻑 취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세상 종말 전쟁>에 도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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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짐승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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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타 뮐러의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지난 8월부터 <마음짐승>을 읽었지만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있다가 기나긴 연휴의 끝자락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의 다른 작품에도 꾸준하게 등장하는 차우셰스쿠 독재 아래 시대의 불안은 <마음짐승>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낸다.

경찰국가 루마니아의 일상은 도청과 감시가 지배한다. 마치 벽과 하늘에도 귀와 눈이 달린 듯이 그렇게 보통 사람의 모든 것이 낱낱이 감시당한다. 독재자와 그의 감시원은 친구마저도 못 믿게 하는 일상의 불안을 바탕으로, 두려움을 분배한다. 그래서 모든 루마니아 사람들, 특히 슈바벤의 소수민족인 독일인은 목숨을 걸고 도나우 강을 건너 그들의 모국어가 사용되는 곳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마음짐승>을 읽으면서, 과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나”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르타 뮐러의 자전적 소설은 대학교에서 체육 강사의 추행으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롤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궁핍한 가운데, 검댕으로 만든 마스카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기숙사 안의 네모에 거주했던 어느 여대생의 회상이 이어진다.

시골에 사는 가족을 두고 도시생활을 하는 나의 아버지는 전쟁 중의 나치 무장친위대원이었다. 아버지는 여느 슈바벤 남자처럼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나의 엄마를 만나 가정을 꾸리고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즈음해서 느슨한 관계를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암울했던 과거와의 단절이 읽혔다.

한편, 노래하는 할머니는 모두가 가슴에 ‘마음짐승’을 데리고 있다고 말한다. 종일 피곤하게 놀았으니 그 마음짐승을 쉬게 해주어야 한다고도 하고, 자신의 심리상태를 그 생쥐나 토끼 같은 마음짐승에 빗대 표현하기도 한다.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마음짐승은 어떤 녀석인가 자문해 본다. 이게 헤르타 뮐러의 소설을 읽고 나서 맞는 적용일까? 이래서 그녀의 글은 읽을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닐까 싶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에서 번역사로 일하게 된 나는 끊임없이 경찰의 감시에 시달린다. 벌거벗은 상태에서 심문을 당하고, 소지품 목록을 작성하는 모욕은 감시가 일상화가 루마니아의 무시무시한 삶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친구라고 믿었던 테레자는 경찰의 끄나풀이었고 자신을 감시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망명지 독일까지 찾아온다.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였던 파스빈더 감독의 작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가 불쑥 떠올랐다. 이런 시대의 불안 속에 온전한 영혼을 유지하기란 난망하지 않았을까.

<마음짐승>을 읽으면서, 모국어와 살고 있는 나라의 국가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작가 헤르타 뮐러의 정체성이 궁금해졌다. 그녀의 책에 나오는 많은 부분이 루마니아 독재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경향을 띠고 있지만, 저술활동은 그녀가 ‘모국어’라 부르는 독일어로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핍박과 위협으로 결국 독일로 망명한 그녀는 결국 독일인으로 보아야 할까? 서구의 언론에서는 숫제 그녀를 루마니아 출신의 작가가 아닌 German writer로 표현한다. 기회가 된다면 작가에게 직접 묻고 싶은 질문이다.

국내에 출간된 헤르타 뮐러의 다섯 권의 책을 모두 읽어서 마치 숙제를 다 끝낸 듯한 후련함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과연 헤르타 뮐러 작가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된다. 헤르타 뮐러 텍스트 분석 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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