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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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정갈하게 하고서, 4년 전에 읽은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다시 읽었다. 역시 좋은 작품은 다시 읽어도 좋았다.

 

이 소설이 작가의 모국어인 이보어로 쓰였는지 아니면 영어로 쓰였는지 모르겠지만, 영어로 만나게 되더라도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을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주인공은 속편에 등장하는 우무오피아에서 발탁되어 영국 유학까지 마친 오비 오콩코의 할아버지 오콩코 어르신이다. 그 둘 사이에는 부족의 변절자로 취급받는 기독교 교리교사 은워예, 영국식 이름으로는 이삭 오콩코가 자리잡고 있다. 원래 작가는 변절자 이삭/은워예에 대한 소설도 구상했다고 하는데, 세상의 빛을 보지는 못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오콩코의 장남 은워예의 변절 스토리도 상당히 궁금했다.

 

항상 그렇듯, 서론이 길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오콩코는 18세의 나이에 우무오피아 최고의 씨름꾼으로 등극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가를 일군 자수성가의 표상 같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용맹한 전사이자, 농부였다. 한량 같은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얌 종자나 밭뙈기라도 조금 남겨 주었다면, 어쩌면 오콩코의 시련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지 않았을까.

 

나이지이라 이보족의 전통을 상징하는 전사 오콩코는 이웃 부족과의 분쟁으로 소년 인질을 하나 받아 들이게 된다. 그의 이름은 이케메푸나. 가족과 떨어져 불안해 하던 이케메푸나는 오콩코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진 것 같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케메푸나의 비극은 어쩌면 엔딩에서 오콩코가 맞이하게 되는 비극의 전주곡이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가 가지지 못했던 남자의 칭호와 상당한 양의 얌이 비축된 저장고(얌은 남자의 작물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3명의 아내 그리고 8명에 달하는 자녀들을 거느린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의 지도가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부족 장례식에서 오콩코가 고인의 자식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고가 발생하고 전사의 모든 꿈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7년간의 유배 뒤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등장하면서 오콩코의 계획은 한낱 꿈이 되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탈식민주의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출간된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혁명과 노동 착취로 자본을 축적하는데 성공하는데 성공한 서구 식민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과 원료를 거의 무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식민지는 계속된 번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무엇이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던 아프리카 대륙의 부족국가들은 좋은 멋잇감이었다. 우선 탐험대를 조직해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면서, 그곳의 정황을 파악했다. 그 다음에는 미개한 족속들을 개화시키고 복음의 빛을 전한다는 미명 아래 종교인들이 선발대로 현지에 파견했다. 기독교 신앙이 현지인들에게 너무나 낯선 무엇이었던 것처럼, 황제 비단뱀을 신으로 추앙하는 현지인들을 백인 선교사들이 어떻게 보았을까. 게다가 뱀은 기독교 규정하는 사탄의 대리인이자 인류에게 원죄를 제공한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었던가. 지금 한창 읽고 있는 <신의 화살>에서도 비슷한 결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아주 흥미롭다.

 

종교 다음 주자는 바로 교육이었다. 종교와 교육으로 도저히 개종시킬 수 없는 전통주의자들 대신 다음 세대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종교와 교육이 보다 부드러운 스타일의 정복 방식이었다면, 군대를 동원한 조직적 폭력은 자신들이 규정한 새로운 질서를 이식하기 위한 최종 무기였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현지인들을 복속시켰다. 백인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갈등을 빚다가(필연적 귀결이었다), 분노한 현지인들의 폭력에 희생당하기라도 한다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파견해서 부족 전체를 몰살시켜 버렸다. 아바메 부족 전멸 소식은 가공할만한 뉴스였다. 선진화된 백인들이 보유한 무기의 위력을 알게된 현지인들은 조용히 칼과 창을 내려 놓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은워예/이삭처럼 자신의 를 버리고 백인의 신에게 투항했다고 해서 바로 벼락을 맞아 죽거나 하는 일도 없지 않았나 말이다. 아니 오히려 백인과 협력하는 게, 삶의 도움에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이 자발적으로 개종자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주술사가 자신의 여러 아들 중의 하나를 백인 교회에 집어넣었을까.

 

어쨌든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와 예전 영광의 부활을 노리던 오콩코의 비극적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백인 치안판사들이 세운 질서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오콩코 개인은 물론이고 우무오피아 전체 부족의 생존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피 끓는 전사의 패기로 오콩코는 백인들이 지은 교회를 부수었다는 죄로 동료들과 감옥에 끌려가 머리가 밀리고 심지어 매질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오콩코의 선택은 백인들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그의 결정은 파국으로 귀결된다.

 

오콩코의 몰락은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도래 때문에 발생한 개인사인 동시에, 엔딩에 등장하는 전언처럼 니제르강 하류 유역 원시 종족이 어떻게 평정되었가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서구 식민주의자들은 세계 각지에서 선배 식민주의자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체득한 종합 기술을 우무오피아에도 비슷하게 도입했다. 부족간의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미개하다고 비난했지만, 그들 역시 전쟁을 통해 첨예한 대립을 해소하지 않았던가. 식민주의자들이 타인의 문명을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폭력적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4년 전에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만을 읽을 적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이번에 다시 한 번 읽고 또 속편과 <신의 화살>까지 읽으면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진 느낌이다. 읽을수록 상호 연관성 덕분에 더 재밌어진다고 해야 할까. 치누아 아체베가 구상하다만 한 세대에 걸친 변절자 이야기까지 추가되었다면 금상첨화였지 않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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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6-19 1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품을 작가가 영어로 썼다고 알고 있어요.
작가의 이력이 아프리카와 영국 문화 두 군데에 다 속해있어 이것이 작가의 소설에 많이 투영되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넘 좋게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을 읽었어요^^

레삭매냐 2023-06-20 08:47   좋아요 1 | URL
아 그랬군요 :> 저도 문장이 간략해서
영어로 쓰인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나이지리아 작가가 쓴 영어책으로
영미문학이 계속해서 확장되는 느낌
이랄까요.

아체베 작가의 책을 잇달아 읽다 보
니 무언가 연결점이 보이게 되더라는.

새파랑 2023-06-19 1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나서 후속편들을 다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중고시장 염탐(?) 중인데 아직 물건이 안보이더라구요 ㅋ

얄라알라 2023-06-19 15:47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께서는 빌려보시기보다, 사서 보시는^^
염탐하시다가 기분 좋게 낚으시기를!

레삭매냐 2023-06-20 08:48   좋아요 1 | URL
저는 예전에 1권 읽고 있다가
2권은 램프의 요정에서 신속하
게 데려왔답니다. 기회가 있을
때 사자 !!!

인기가 있는지 잘 찾을 수가
없더라구요.

염탐 앤 겟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얄라알라 2023-06-1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몸을 정갈히 하고 읽으실 정도로 애정과 찬탄을 보내시는 작품!!!

Yam이 남성의 작물이라고 하는 점이 궁금하네요.
검색하니 좌르르....얌 비축된 저장고는 결국 남성성? 권위의 상징인가봅니다.

Evo어인지, ivo어인지를 잘 몰라도,이렇게 한국어판이 친절하게 나와 있다는 자체가 행복입니다^^

레삭매냐 2023-06-20 08:50   좋아요 0 | URL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극복과
동시에 이보족 특유의 가부장제
라는 시스템의 붕괴를 소설에서
다루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얌이야말로 신이 주신
최고의 작물이라는 걸 말하는
걸 보면, 아마 한국의 쌀과 비슷
하지 싶습니다.

어제 과한 노가다(?)의 후유증
으로 <신의 화살> 달리지 못했
는데, 독서 모임 이전까지 다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자목련 2023-06-20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 제목,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제목이네요.

레삭매냐 2023-06-20 13:26   좋아요 0 | URL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예이츠
의 시에서 그리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는 T.S. 엘리엇의 시에서 인용했다고 합
니다.

뭐랄까, 제목을 정하고 서사를 펼쳐
나가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요.

물감 2023-06-21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뭔가 비장하다는 인상이..
아프리카문학도 쉽지 않아보입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3-06-22 11:2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미지의 영역이다 보니
또 읽을 게 많더라는.

아체베가 구세대라면 아디치에
같은 작가는 신세대 갬성이라고
나 할까요.

읽을 책들이 너무 많아 걱정이
네요.

서니데이 2023-06-22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문학은 잘 모르기도 하지만, 이름부터 많이 낯선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자주 소개되고 많이 번역되면 그만큼 알려지는 작가도 많아지겠지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더운 하루 시원하게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7-09 22:09   좋아요 1 | URL
아이구 댓글이 늦었습니다 -
더위에 제가 그만 맛탱이가...

오늘은 비가 오락가락하더
라구요. 낼부터는 진짜 장마
가 시작되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삽하나 2023-07-09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라니... 축하 파티할까요? +ㅅ +

레삭매냐 2023-07-10 13:31   좋아요 0 | URL
운이 좋았습니다 :>

이달에도 다시 한 번 영광
을 ㅋㅋㅋ
 
더 이상 평안은 없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8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브루스 오노브락페야 그림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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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달궁 독서모임책으로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가 선정됐다. 기록을 찾아 보니 그 책은 4년 전에 읽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속편격인 <더 이상 평안은 없다>부터 읽기로 했다. 마침 회사 근처 중고서점에 있어서 사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도서관에서 빌려다 다시 읽고 나서야 속편을 다 읽었다. 그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나이지리아 출신 치누아 아체베 작가가 다루는 주제는 탈식민주의, 편견 그리고 인종차별주의 정도가 될 것 같다. 지금은 <신의 화살>까지 내쳐 도전 중인데,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을 가차 없이 침탈하던 시기에 대한 서사가 인상적이다. 종교와 교육을 앞세운 제국주의 세력들은 기존의 전통을 고수하던 이들을 미개인으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이 세운 가치를 현지인들에게 이식하고 강요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전편에서 우무오피아 마을의 대표 씨름꾼으로 자수성가한 오콩코가 어떻게 몰락해 가는가를 그렸다면, <더 이상 평안은 없다>에서는 그의 손자인 오비 오콩코를 주인공으로 삼아 3대에 걸친 오콩코 가문 몰락의 연대기를 완성한다. 용맹한 전사이자 농부였던 할아버지 오콩코가 오로지 자신의 두 팔로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면, 손자는 다른 방식으로 마을과 가문의 부흥을 꾀한다. 그것은 바로 영국식 교육이었다.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오비 오콩코를 우무오피아 마을에서는 거금 800파운드를 들여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 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의 바람대로 영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교육직 고위 공무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지원은 앞길이 창창한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족쇄로 작동하게 되는 역설적인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식민 모국 영국에서 근대화된 서구식 교육과 합리주의를 경험한 오비 오콩코는 부정부패가 난무하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좌절한다. 정말 식민주의자들의 말 그대로, 이보족 더 나아가 조국 나이지리아에는 답이 없단 말인가? 그렇게 뇌물이라면 질색하던 청년이 결국 부패의 연쇄고리에 가담할 수 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의 구렁텅이로 말려 들어가는 과정을 치누아 아체베 작가는 정말 냉정한 시선으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우무오피아 부족 사람들의 열렬한 응원과 후원은 오비 오콩코에게 든든한 지원인 동시에 부담이었다. 그들이 애써 모아준 돈 800파운드는 공짜가 아닌 언젠가는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을 돕는 것 역시 유망한 엘리트 청년의 몫이었다. 동생 존의 학비도 마련해야 했다. 수도 라고스에서 화려한 생활을 위해 장만한 자가용 유지비도 무시할 수 없는 지출의 수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오비 오콩코를 가장 괴롭히는 건, 그 중에서 그가 사랑하는 여인 클라라와의 관계였다. 그녀 역시 영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해서 수간호사로 일하는 엘리트 계급의 일원이었지만, 조국 나이지리아에서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오수(부랑아 천민 계급)였다. 전도유망한 청년 오비 오콩코가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장벽이 너무나 많았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도 예전에 유행한 신파극과도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우선 라고스에 있는 우무오피아 진보연맹에서 이 사실을 알고, 오비가 갚아야 할 유학자금의 지불유예를 허용하지 않는다. 계속 커지는 지출 규모를 줄이기 위해 청년 오비는 순간 욱하는 성질을 죽이고 어쨌든 자신을 후원해줄 우무오피아 진보연맹과의 관계 유지에 보다 힘을 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조금씩 파멸행 고속열차를 선택했다. 여자친구 클라라는 애인의 안쓰러운 상황을 듣고 50파운드를 빌려 주지만, 그 돈조차 자동차 털이범들에게 털리고 만다.

 

오비는 가족들을 설득하는 일에도 실패한다. 이른바 복음의 빛을 수용한 아버지조차 오수 출신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한다. 내가 봤을 때, 무신론자에 가까운 오비는 신의 평등한 사랑까지 들먹이면서 아버지의 주장을 설파했지만 실패했다. 그나마 온화한 어머니는 설득할 수 있을 거라는 오비의 판단 역시 오산이었다. 어머니는 한발 더 나아가, 클라라와의 결혼을 강행하면 죽어 버리겠다는 폭탄선언을 날린다. 그러니까 오비에게는 선택지가 하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클라라가 불법 임신중절까지 하게 되면서 오비 오콩코는 이도저도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코너로 몰리게 된다.

 

, 그렇다면 독자는 치누아 아체베 작가가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인 1950년대 후반 라고스와 이보족 마을 우무오피아를 배경으로 서술한 <더 이상 평안은 없다>에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저자가 오비 오콩코라는 지식인 엘리트를 통해, 앞으로 나이지리아 국가가 겪게 될 다양한 혼란상을 예고했다고 생각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아프리카 대륙의 독립은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서구 열강 제국주의 지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철지난 이데올로기였다.

 

그렇다면, 나이지리아 같은 신생국들은 자력으로 독립해서 국가를 경영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특히나 나이지리아 같은 다민족 국가에서 국가통합은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였다. 그 결과, 비아프라 내전 같은 참혹한 내부 갈등과 장기간의 군사독재로 석유와 인구 자원이 풍부함에도 지금까지 여전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 아닌가.

 

오비 오콩코를 통해 보여주는 다양한 갈등의 분출과 스펙트럼은 과거와의 단절이 얼마나 쉽지 않은 미션이라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잘 유지하면서, 백인 지배자들이 구축한 새로운 질서를 수용한다는 이상은 훌륭했지만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은 갈등을 푸는 방식으로 대화보다는 물리적 방식을 선호했다.

 

전편에서 할아버지 오콩코의 비참한 죽음으로 서구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패배를 극명하게 드러냈다면, 속편에서는 새롭고 혁신적인 교육을 받고 귀국한 엘리트 청년 관료가 자신이 비판하던 구태 관료화되어 가는 과정을 병렬배치하면서 시대 변화해도 또 새로운 문제들이 발생할 수 없다는 숙명론적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비 오콩코의 타락은 윌리엄 그린 같은 구 식민주의자들에게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피지배 계급에 대한 편견과 비판의 당위성을 옹호해주는 핵심 인자로 작동한다. 그가 백인들과 기득권층이 교묘하게 설치한 덫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지배와 조종에 능한 그들이 상대방의 어디가 가장 취약한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치누아 아체베 작가의 작품들을 잇달아 읽으면서 서구인들이 설계한 탈식민주의의 한계, 이제는 시간이 너무 지나 공고화된 구제불능의 편견 그리고 뿌리 깊은 인종차별주의의 연대기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제 일주일 남은 달궁 모임에서 우리는 또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벌써 해바라기가 피었다.


원래 6월에 해바라기가 피었던가?

우리집 해바라기는 비실비실한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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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8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18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3-06-18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삼부작 다 있는데 첫 번째 책만 읽어봤네요. 삼부작 다 읽으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나... 싶어요.
독서모임 다시 시작하셨나보네요~~레삭매냐님 계신 독서모임은 참 재밌을 거 같습니당~^^

레삭매냐 2023-06-18 23:08   좋아요 1 | URL
저도 4년 전에 1권만 읽고
<사바나>는 사두기만 하다가
지금 다시 읽고 있는데...

너무나 재미지네요.

1권과 2권 바로 끝나고
지금 3권인 <신의 화살>
달리는 중이랍니다.
<사바나>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주말에 가서 털 생각을 하니
짜릿하네요 고저.

Falstaff 2023-06-19 0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삼부작 보다 <사바나의 개미 언덕>을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왠만하면 이 책까지 달리시는 것이 어떨지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3-06-19 11:29   좋아요 1 | URL
지금 <신의 화살> 1/4을 읽었습니다.

토요일까지 <사바나의 개미 언덕>도
읽을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어제 사둔 책을 찾지 못해서 결국
도서관에서 빌렸답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3-06-23 20:20   좋아요 1 | URL
아체베 3부작은 다 읽었는데, 사바나의 개미언덕은 못읽었네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3-06-23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부작 다 좋았으나 제게는 이 책이!

레삭매냐 2023-06-24 08:56   좋아요 1 | URL
제가 지금 <신의 화살> 읽고 있는데,
전의 두 편만 못하다는 느낌이 -

저도 이 책이 왠지 더 마음에 드는
느낌적 느낌이 들었습니다.

달궁 모임 준비하느라, 논문을 다 읽
었네요 ㅋㅋㅋ 기대만빵입니다.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3 - 태평양 전쟁 후반부터 한국 전쟁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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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초기, 잘 나가던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절치부심한 미군에게 어퍼컷을 먹으면서 전세는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전쟁 초반,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의 고질적 문제들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허깨비 같은 군대의 실체가 있는 그대로 노출됐다.

 

남양군도 전선에서 잇단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버마 전선에서 연합군의 원장 루트를 차단하고, 인도 동부를 공략하겠다는 단순한 발상으로 시작된 임팔 작전은 일본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된다. 무엇보다 공세에 앞서, 보급문제를 좌시한 점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작전은 입안한 무타구치 렌야는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라는 기괴한 발상으로 전투에 필요한 충분한 보급 계획 없이 전장에 병사들을 몰아 넣었다. 초반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전투가 장기화되고 우기가 닥치면서 최전선의 일본군 병사들은 보급을 전혀 받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결국 전략적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채, 기아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숱하게 희생됐다.

 

한편, 라바울의 최전선에 배치된 초년병 미즈키 시게루는 운 좋게도 분초가 적의 기습으로 전멸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그의 튼튼한 위장은 전쟁의 와중에도 항상 먹을 것을 구가했다. 작가는 운 만큼이나 먹성도 좋았던 모양이다. 두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서 귀환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이런 식탐이 있지 않았을 싶을 정도다.

 

중국 전선에서는 비교적 약체인 중국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대륙 타통작전을 실행했지만, 미군을 상대로 해전에는 연전연패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설정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대국방선은 사실상 지도 위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허황된 계획일 뿐이었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쏘기로 알려진 대로, 일본 항공기들은 봄날에 흩어지는 벚꽃마냥 그렇게 무수히 미군에게 격추되어 추락했다. 전쟁 말기, 일본 항공기 에이스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미숙련 조종사들이 탑승한 제로기는 더 이상 미군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군인은 물론이고 숱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사이판 결전 역시 미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육군 원수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도주하면서 공언한 대로 레이테에 상륙하면서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개인적으로 맥아더 자신의 욕심으로 전개된 필리핀 전역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전투였다. 해군 니미츠 제독의 주장대로, 뉴기니-필리핀 라인이 아니라 일본 본토와 남방을 잇는 보급선을 제압할 수 있는 대만을 먼저 공략했다면 마닐라 시가전을 포함해 필리핀 각지에서 전개된 지옥 같은 전투들을 생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초년병 미즈키가 속해 있던 중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라바울의 사령부에는 부대가 모두 옥쇄했다고 알려지는 바람에 어이 없게도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모두 죽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즈키 시게루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구 일본 군대가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전쟁을 지도하던 대본영의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선에 파견된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전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중에도 총리대신이자 육군대신으로 전후 A급전범으로 사형된 도조 히데키는 허세를 부렸다. 히로히토 국왕은 물론이고 시민들에게도 시시각각 본토로 다가오던 미군의 진격상황을 속였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사이판 실함 후, 결국 내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주지하다시피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토 결전 운운하다가 원폭을 두 방이나 맞고 북방의 소련이 개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조건 항복을 결의한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종전을 맞이한다.

 

그동안 서방에서는 미국의 원폭투하가 종전을 앞당겼다는 설이 우세했지만, 정작 일본 전쟁 기계의 전쟁의지를 꺾은 것은 바로 소련군의 참전이었다고 한다. 종전 후에 미군 사령부가 패전국 일본의 국체를 유지하게 허용하고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것과 달리 만주의 관동군을 일소한 소련군은 일본군 패잔병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심지어 스탈린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까지 소련의 영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일본군과 중국 대륙에서 싸운 장제스의 강력한 반대로 일본 분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제스는 일본의 은인인 셈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일본이 패망으로 치닫는 동안, 라바울에 있던 초년병 미즈키 시게루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도무지 군대에 적응할 것 같지 않았던 시게루는 비록 한쪽 팔을 잃었지만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한다. 팔을 다친 뒤에도,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사람에게 어떤 운명이 있다면, 아마 미즈키 선생은 미증유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귀국해서 만화가가 될 팔자였던가.

 

비록 군대에서는 골칫덩어리였지만, 숲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귀환하지 않고 현지에서 소집해제해서 그들과 함께 살 생각을 다했을까. 작가 양반이 토페토로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구원을 얻었다면 너무 멀리나간 해석일까나. 우연히 제8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과 조우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토페토로 사람들에게 7년 뒤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행 배에 오른다.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후, 전쟁책임자는 평화의 사도로 극적인 변신에 나선다. 미군 주도 아래, 신헌법이 제정되고 군국주의의 잔재를 해체하고 평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이식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광들이 설치던 병영국가가 하루아침에 평화를 간구하는 민주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미영귀축이라는 말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경시하던 일본 시민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신들을 무릎 꿇린 미국의 만든 새로운 질서를 군말 없이 받아 들였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만큼이나 다양하면서도 기이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저자는 냉정하게 지적한다. 뾰족한 기술이나 재주가 없었던 미즈키 시게루는 생선장사도 해보고 학교에도 다녀 보고 또 종이연극 작가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았는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훗날 만화가로 일가를 이루게 된 그의 길은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작가의 형이었돈 소헤이는 뉴기니 전선에서 미군 병사 처형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B급전범으로 분류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웃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패퇴시키고 대륙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결국 본토를 지키는데 실패한 장제스는 대만으로 철수했다. 서방 진영은 철의 장막을 치고 공산주의 세력을 전파시키려는 소련의 스탈린과 냉전에 돌입했다. 열전에 못지않을 냉전의 시발점으로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태평양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내던져진 개인이었던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생존귀환기가 주는 울림은 기대 이상이었다. 역사의 순간마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개인의 육성기록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태평양전쟁을 다룰 적에는 역사적 사건에 중점을 두었다면, 숲 사람들과 만남 그리고 귀환 후의 이야기에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그런 감정들을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권 리뷰를 하고 나서, 3권 리뷰를 썼는데 역시 대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3일 동안,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에 투자한 시간들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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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6-15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보고 나니 저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시리즈를 도전해 볼까 싶네요.
시리즈를 선호하지 않는 건 낱개로 읽으면 다양한 책을 볼 수 있는데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 러 나 고런 생각을 하면 안 되겠죠. 많은 공부가 되었으리라 봅니다. 아깝지 않은 투자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레삭매냐 2023-06-16 10:56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
대단하십니다. 응원하는 바입니다.

저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네요 ㅠㅠ

말씀해 주신 대로 시간 투자가 아
깝지 않았답니다 ^^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4 - 강화에서 고도성장 이후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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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즈키 시게루의 <쇼와사>(이 책의 원제)3권까지는 간토 대지진에서 출발해서 한국전쟁 시기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권에서는 패전의 충격을 딛고 고도 성장기를 거쳐 경제대국으로 성장해 나간 시절 이야기를 미즈키 시게루 작가는 그린다.

 

어느 일본 정치인이 말했듯, 이웃 한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은 일본의 부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미군 점령하의 일본의 궁핍과 가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시게루 같은 복원병들을 위한 일자리를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누구에게나 그 시절은 어려웠다. 시게루 선생이 잠시 종사했던 그림자연극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모든 물자가 부족한 마당에, 만화 따위를 사서 볼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까.

 

1950년대의 한국전쟁 그리고 1970년대 베트남전쟁 특수로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도약을 하게 됐다. 그 와중에 도쿄 올림픽도 개최하게 되고 신칸센과 나리타공항 등 신일본은 상징하는 일단의 사건들을 저자는 그대로 중계해준다. 물질적 풍요가 시작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행복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1권에서 3권까지 쇼와 전쟁사를 중점적으로 다뤘다면 마지막 권에서는 미즈키 시게루라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남양군도 전쟁에 투입되어,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결국 한쪽 팔까지 잃은 장애용사는 만화가로 성공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꾸역꾸역 만화를 그렸다. 신은 고생하는 인간을 외면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40세도 훨씬 넘어서 비로소 미즈키 선생은 만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허접한 출판사도 외면하던 작가가 이제는 어시를 무려 7명이나 거느린 대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궁핍하던 시절에도 생존을 위해 중노동 같은 작업을 했지만 성공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 다음에도 선생의 노동은 멈출 수가 없었다.

 

전쟁 말기, 남쪽 나라 토페토로 마을 사람들을 그리워한 미즈키 선생은 옛 전우들과 함께 30년 만에 옛 전장을 다시 찾았다. 아마 나라면 전우가 죽어 나가고, 일상화된 구타 그리고 말라리아로 생사를 오가던 시절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아마 가지 않았을 곳을 저자는 자신만의 아르카디아로 규정하고 그리워한다. 자신의 염원대로 그곳을 방문한 저자의 실천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이후에도 십여 차례나 그곳을 찾았다고 한다.

 

고도경제 성장기에 일본에서 벌어진 다양한 사건사고들을 미즈키 선생은 그림으로 독자에게 소개한다. 한 때, 기세를 올리던 일본 학생운동의 종말을 고한 아사마 산장사건과 프랑스 유학생의 식인사건, 괌과 필리핀 정글에서 전쟁이 끝난 뒤에서 수십 년간 저항을 계속하던 귀환병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일본 검찰의 위력을 만방에 떨친 록히드 사건 등이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다.

 

전권까지 세계사적 흐름의 차원에서 쇼와사를 다뤘자면 마지막 권에서는 보다 개인사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시리즈를 생산해낸 요괴들에 대한 애착, 죽음에 대한 공상들(사실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등이 줄지어 등장한다.

 

미즈키 시게루가 저술한 <일본 현대사>의 한계는 명백하다. 대동아 성전을 부르짖으며, 아시아 각국을 침략했던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최고의 책임자였던 히로히토 국왕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전쟁의 시작도 마지막도 모두 히로히토가 하지 않았던가.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 대전쟁의 책임은 마땅히 최고 책임자인 히로히토가 졌어야 했다. 하지만, 연합국 GHQ는 일본이 포츠담선언의 요구사항인 무조건 항복을 수용하는 대신, 국체유지라는 허울 아래 히로히토 국왕의 단죄를 면하게 해달라는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군국주의 일본을 뿌리째 개조하기 시작했다. 일단 재벌을 모두 해체해 버렸고, 전범들을 공직에서 모두 추방시켰다. 후자는 나중에 완화되기는 했지만 가미카제 특공이니 일억옥쇄 타령을 해대며 일본 시민들의 목숨을 공공연하게 요구하던 전쟁지도자들의 추락은 당시 획기적인 조치가 아니었을까. 미군정은 또한 신헌법을 제정해서, 이른바 강요된 민주주의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중국 대륙과 남양군도에서 미쳐 날뛰던 군국주의 일본이 갑자기 평화주의의 화신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과히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왔다.

 

미즈키 시게루는 전쟁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평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원하는 행복에 대한 질문은 던진다. 전쟁에서 한쪽 팔과 영혼이 털린 이가 평화를 원하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히로히토 국왕의 죽음으로 쇼와 시대가 끝나고, 헤이세이 시대가 열렸다. 마침내 자신의 삶에 계속된 불안 요소였던 전쟁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었다. 왠지 홀가분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미즈키 선생은 자신의 작품들이 잇달아 성공을 거두면서 마침내 원하던 물질적 풍요를 이루게 되었다. 이 괴짜 작가는 육신은 일본에 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던 남쪽 나라 숲 사람들과의 인연을 잊지 못한다. 전쟁 중에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남쪽 나라로 날아가 그들에게 자동차를 선물해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을까.

 

70년에 걸친 쇼와 시절을 관통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은 확실히 흥미로웠다. 방대한 이야기들을 다루다 보니, 깊이는 좀 부족했을지 몰라도 요괴전문가가 그린 거시사적 접근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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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6-14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국전쟁은 일본을, 베트남전쟁은 우리나라를 먹여 살렸죠.
남의 나라 전쟁으로 누군가가 성장하는 아이러니가 참 그러네요.

일본인이 쓴 글은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 같습니다 ㅠㅠ

레삭매냐 2023-06-14 20:31   좋아요 1 | URL
전쟁국가 일본도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세계대전
으로 열강의 자리에 올랐죠.

미국도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
축했구요.

말씀해 주신 대로 비판적
시선의 견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23-06-15 18: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평양전쟁 최고의 책임자였던 히로히토 국왕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한다는 점을˝
- 김남일 작가 님의 ‘서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글이 나옵니다.
시대에 따라 올바른 생각을 갖는 것과 올바른 말을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가 봅니다.^^

레삭매냐 2023-06-16 10:58   좋아요 1 | URL
나쓰메 소세키 작가도 결국 제국
주의가 넘실거리던 시절의 일본
사람이다 보니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식인으로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기란 어렵지 싶습니다.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2 - 중일 전쟁부터 태평양 전쟁 전반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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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 전, 야마오카 소하치라는 일본 작가의 <태평양전쟁>이라는 책을 읽었다. 아마 지금도 집 어딘가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일본 국민작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통해 그가 얼마나 극우성향의 작가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침략군으로 동원된 일본군을 황군으로 부르며 찬양하는 모습에 기가 질려 버렸다.

 

적어도 미즈키 시게루는 그런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아 다행이다. <일본 현대사> 두 번째 권에서는 대미 개전 과정과 개전 초기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전황에 대한 소개가 중심을 이룬다.

 

서방에서는 나치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두 번째 세계대전의 막이 오른다. 그전에 일독이 삼국동맹으로 파시즘 국가들이 세계를 집어 삼키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계 정세가 그렇게 급박하게 흘러가는 가운데, 주인공 미즈키 시게루의 일상은 안일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보면 사회 부적응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는 일이 없으며, 학업이나 일 모두 적응하지 못한다. 신문배달 일을 하지만 그것도 실패다. 왠지 나중에 군에 끌려가게 되었을 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걱정이 될 정도다.

 

거대한 중국을 집어 삼키겠다고 나선 중일전쟁도 무모했지만, 태평양의 패권을 두고 미국과 맞장을 뜨겠다고 나선 주전론자들의 현실인식은 큰 문제였다. 그리고 결국 나라를 패망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19406월 히틀러의 기갑부대가 프랑스를 석권하고 파리마저 점령하면서 동아시아에는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일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프랑스령 북부 인도차이나에 진주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동아시아 확장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미국내 일본 자산 동결조치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일석유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일본 군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립정책을 유지하고 있던 미국의 잠재적 공업생산력을 일본은 과소평가했던 게 아닐까. 말만 중립이었지 미국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병기창을 자처하며, 유럽 대륙에서 히틀러를 가까스로 상대하고 있던 영국에 무기 원조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복잡한 대일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던 개전 전야,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반년이나 1년 정도는 미국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지만 그 다음은 장담할 수가 없다고 했던 예언이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당시 일본 내각에서는 원만한 대일교섭으로 개전을 원하지 않았지만, 외무대신 마쓰오카 요스케의 대미 강경노선으로 결국 그를 외무대신에서 사퇴시키기 위해 내각총사퇴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였다.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해야 하는 외무대신이 오히려 전쟁 충돌을 조장하는 장면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19411126일 미국 국무부장관 헐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조건 없이 철군하고 삼국동맹을 사문화하라는 이른바 헐 노트를 보내고 이에 격분한 일본 군부는 개전을 결정한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나구모 주이치가 이끄는 연합함대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분쇄하기 위해 진주만 기습에 나서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됐다.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전쟁을 환영한 이가 있었으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였다. 선제공격을 당한 마당에 미국내 전쟁반대론은 설 자리가 없었다.

 

개전 초기 진주만 기습 성공으로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말레이 반도(싱가포르)를 필두로 해서, 바타비아와 필리핀, 홍콩 등을 석권한다. 물론 일본군의 대비와 전략 전술도 개전 초기 승승장구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유럽에서 히틀러와 싸우는데 전력을 다하는 바람에 동아시아 식민지 군대는 2선급이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필리핀 전선에서 미군을 격퇴한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종전 후 바탄 죽음의 행진 사건 때문에 전범으로 교수형 당한 것에 대해 저자는 사령관 책임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포로 수용 문제에 있어 일선 부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현지 사령관이지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일본의 남방 진출이 영국과 네덜란드의 오랜 식민 지배에 대항하기 위한 <대동아 성전>이라는 선전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일부 독립 세력들을 일본이 지원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설계된 철저한 프로파간다였을 뿐이다. 서구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일본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일본이 남방에서 새로 확보한 영토들은 오로지 자원 수탈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피지배 계급의 반발은 명약관화했다.

 

남양군도 각지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주인공 미즈키 시게루 역시 이미 해군 장교로 선발된 형 소헤이에 이어 소집영장이 떨어졌다. 소헤이는 뉴기니 전선에서 고사포 부대원이었는데,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 처우 문제로 훗날 전범으로 처벌받았다고 한다. 군에 들어가면서부터 후임병 시게루의 고난이 시작됐다. 구 일본 제국 군대의 문제점 중의 하나인 일상적 구타가 시게루에게 이루어졌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게루의 대답이 예에~”처럼 늘어진다고 마구 두들겨 패대는 게 일과였다.

 

미즈키 시게루 작가는 팔라우부터 시작해서 웨이크섬, 알류션 제도 등 잘 알려지지 않은 태평양 전쟁의 거의 모든 전역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잘 나가던 일본이 해전에서는 미드웨이 그리고 육전에서는 과소평가했던 미군에게 과달카날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면서 역사의 변곡점에 도달했다. 많은 인구가 살고 있던 중국 대륙의 전투에서는 현지조달(이라고 쓰고 약탈이라고 부른다)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솔로몬 제도 같이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전투는 중국 전선과 같은 현지조달이 전혀 불가능했다. 도쿄의 대본영에서는 이런 현지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과달카날 비행장 점령에 투입된 미군의 실력에 대해서도 개전 초기 무기력하게 무너진 식민지 부대 전투력 정도로 과소평가한 게 문제였다. 이런 악조건을 이기고 일본군이 과달카날에서 승리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게 아니었을까.

 

원래부터 솔로몬 제도 공략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던 해군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장관의 주장대로 2개 사단을 투입해서 비행장 점령에 나섰다면 전황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치키 지대, 가와구치 병단에 이어 2사단과 38사단을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소모전으로는 도저히 압도적인 물량공세를 펼치는 미군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보급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빈약한 보급과 말라리아 때문에 일본군은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를 수가 없었다.

 

시게루는 드디어 팔라우를 거쳐 뉴브리튼의 라바울로 전속된다.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패전을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계속해서 허위 승전 사실로 호도한다. 심지어 과달카날의 패전도 후방으로의 전진이라는 말로 시민들을 속였다. 이런 상태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걸까. 공업 생산력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일본의 생산력을 압도했다. 미해군의 활약으로 남방에서 자원 입수가 어려워진 일본이 남양군도에서 입은 손실들을 점점 만회할 수 없게 된 반면, 미국은 전함과 항공모함 그리고 전쟁 물자들을 생산해냈다. 태평양전쟁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쟁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었다.

 

뉴브리튼에서 저자의 종군 일기는 예전에 다른 작품에서 만난 적이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뉴기니를 거쳐 필리핀 해방을 목표로 삼은 맥아더는 원래 라바울 공략을 원했지만, 요새화된 라바울 공략이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치열한 전장에서 빗겨 나가게 됐다. 아마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가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뉴기니 전선이나 필리핀 전선에 투입되었다면 아마 현지에서 옥쇄라는 이름으로 전사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면서, 일본군은 발악적인 옥쇄전으로 미군을 상대했다. 항공모함 전력과 유능한 전투기 조종사들이 잇달아 전사하면서 사실상 연합함대 소속 기동부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일본의 전쟁지도부가 조기에 패전을 모면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면, 무의미한 희생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폭주를 거듭하던 전쟁기계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학업이나 일에서 근성을 보여주지 못한 미즈키 시게루 작가가 전후에 이런 방대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선대에서 유래한 바보 같은 짓이 집안의 전통이라던 작가가 남긴 대단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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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6-13 15: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만화로 볼 수 있는 일본 현대 전쟁사네요! 재밌을 거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3-06-13 17:40   좋아요 3 | URL
전쟁 이야기는 3권에서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저자 자신의 빈곤과
가난과의 전쟁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레이스 2023-06-13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데... 섣불리 덤벼들고 싶지 않은 그런 책이네요. 그래도 저장!

레삭매냐 2023-06-13 23:58   좋아요 1 | URL
전 3일 만에 주파했네요 -

속이 다 시원합니다. 고고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