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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3 - 태평양 전쟁 후반부터 한국 전쟁까지
미즈키 시게루 지음, 김진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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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초기, 잘 나가던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절치부심한 미군에게 어퍼컷을 먹으면서 전세는 역전되기에 이르렀다. 전쟁 초반, 승승장구하던 시절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일본군의 고질적 문제들이 패색이 짙어지면서 허깨비 같은 군대의 실체가 있는 그대로 노출됐다.
남양군도 전선에서 잇단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버마 전선에서 연합군의 원장 루트를 차단하고, 인도 동부를 공략하겠다는 단순한 발상으로 시작된 임팔 작전은 일본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된다. 무엇보다 공세에 앞서, 보급문제를 좌시한 점이 비판받아 마땅하다. 작전은 입안한 무타구치 렌야는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라는 기괴한 발상으로 전투에 필요한 충분한 보급 계획 없이 전장에 병사들을 몰아 넣었다. 초반에는 성공적이었지만, 전투가 장기화되고 우기가 닥치면서 최전선의 일본군 병사들은 보급을 전혀 받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과 마주하게 됐다. 결국 전략적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채, 기아와 말라리아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숱하게 희생됐다.
한편, 라바울의 최전선에 배치된 초년병 미즈키 시게루는 운 좋게도 분초가 적의 기습으로 전멸당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다. 그의 튼튼한 위장은 전쟁의 와중에도 항상 먹을 것을 구가했다. 작가는 운 만큼이나 먹성도 좋았던 모양이다. 두 번이나 말라리아에 걸려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서 귀환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의 이런 식탐이 있지 않았을 싶을 정도다.
중국 전선에서는 비교적 약체인 중국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대륙 타통작전을 실행했지만, 미군을 상대로 해전에는 연전연패했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설정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대국방선은 사실상 지도 위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허황된 계획일 뿐이었다.
마리아나의 칠면조 쏘기로 알려진 대로, 일본 항공기들은 봄날에 흩어지는 벚꽃마냥 그렇게 무수히 미군에게 격추되어 추락했다. 전쟁 말기, 일본 항공기 에이스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미숙련 조종사들이 탑승한 제로기는 더 이상 미군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군인은 물론이고 숱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사이판 결전 역시 미군의 승리로 끝났고, 미육군 원수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도주하면서 공언한 대로 레이테에 상륙하면서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개인적으로 맥아더 자신의 욕심으로 전개된 필리핀 전역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전투였다. 해군 니미츠 제독의 주장대로, 뉴기니-필리핀 라인이 아니라 일본 본토와 남방을 잇는 보급선을 제압할 수 있는 대만을 먼저 공략했다면 마닐라 시가전을 포함해 필리핀 각지에서 전개된 지옥 같은 전투들을 생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초년병 미즈키가 속해 있던 중대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라바울의 사령부에는 부대가 모두 옥쇄했다고 알려지는 바람에 어이 없게도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모두 죽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즈키 시게루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구 일본 군대가 얼마나 인명을 경시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전쟁을 지도하던 대본영의 군부 지도자들에게 전선에 파견된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전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중에도 총리대신이자 육군대신으로 전후 A급전범으로 사형된 도조 히데키는 허세를 부렸다. 히로히토 국왕은 물론이고 시민들에게도 시시각각 본토로 다가오던 미군의 진격상황을 속였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사이판 실함 후, 결국 내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주지하다시피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 패배하고 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토 결전 운운하다가 원폭을 두 방이나 맞고 북방의 소련이 개입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조건 항복을 결의한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고 종전을 맞이한다.
그동안 서방에서는 미국의 원폭투하가 종전을 앞당겼다는 설이 우세했지만, 정작 일본 전쟁 기계의 전쟁의지를 꺾은 것은 바로 소련군의 참전이었다고 한다. 종전 후에 미군 사령부가 패전국 일본의 국체를 유지하게 허용하고 비교적 관대하게 대한 것과 달리 만주의 관동군을 일소한 소련군은 일본군 패잔병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심지어 스탈린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까지 소련의 영역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한다. 일본군과 중국 대륙에서 싸운 장제스의 강력한 반대로 일본 분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장제스는 일본의 은인인 셈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일본이 패망으로 치닫는 동안, 라바울에 있던 초년병 미즈키 시게루의 운명도 크게 바뀌었다. 도무지 군대에 적응할 것 같지 않았던 시게루는 비록 한쪽 팔을 잃었지만 무사히 고국으로 귀환하는데 성공한다. 팔을 다친 뒤에도,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사람에게 어떤 운명이 있다면, 아마 미즈키 선생은 미증유의 전쟁에서 살아남아 귀국해서 만화가가 될 팔자였던가.
비록 군대에서는 골칫덩어리였지만, 숲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귀환하지 않고 현지에서 소집해제해서 그들과 함께 살 생각을 다했을까. 작가 양반이 토페토로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구원을 얻었다면 너무 멀리나간 해석일까나. 우연히 제8방면군 사령관이었던 이마무라 히도시 중장과 조우한 에피소드도 인상적이었다. 토페토로 사람들에게 7년 뒤에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행 배에 오른다.
신처럼 떠받들어지던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후, 전쟁책임자는 평화의 사도로 극적인 변신에 나선다. 미군 주도 아래, 신헌법이 제정되고 군국주의의 잔재를 해체하고 평화주의와 민주주의가 이식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광들이 설치던 병영국가가 하루아침에 평화를 간구하는 민주국가로 변신한 것이다. 미영귀축이라는 말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을 경시하던 일본 시민들은 압도적인 무력으로 자신들을 무릎 꿇린 미국의 만든 새로운 질서를 군말 없이 받아 들였다.
전후의 혼란스러운 사회상만큼이나 다양하면서도 기이한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점을 저자는 냉정하게 지적한다. 뾰족한 기술이나 재주가 없었던 미즈키 시게루는 생선장사도 해보고 학교에도 다녀 보고 또 종이연극 작가도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았는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훗날 만화가로 일가를 이루게 된 그의 길은 다른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작가의 형이었돈 소헤이는 뉴기니 전선에서 미군 병사 처형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B급전범으로 분류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웃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패퇴시키고 대륙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을 받으면서도 결국 본토를 지키는데 실패한 장제스는 대만으로 철수했다. 서방 진영은 철의 장막을 치고 공산주의 세력을 전파시키려는 소련의 스탈린과 냉전에 돌입했다. 열전에 못지않을 냉전의 시발점으로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태평양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내던져진 개인이었던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생존귀환기가 주는 울림은 기대 이상이었다. 역사의 순간마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개인의 육성기록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태평양전쟁을 다룰 적에는 역사적 사건에 중점을 두었다면, 숲 사람들과 만남 그리고 귀환 후의 이야기에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그런 감정들을 독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4권 리뷰를 하고 나서, 3권 리뷰를 썼는데 역시 대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3일 동안,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에 투자한 시간들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