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9
빌렘 엘스호트 지음, 금경숙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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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박스올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 가운데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책이 바로 빌렘 엘스호트의 <치즈>. 엘스호트가 1882년 생이니 19세기 사람이네.

 

소설 <치즈>의 주인공 프란스 라르만스는 종합 해양 조선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30년째 장기 근무 중인 회사원이다. 정말 징하게도 한 직장에서 오래도 해먹었구나. 그에게는 8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었고, 고령의 어머니는 노망이 나셔서 한 개 중대분의 감자를 깎거나 솜이불의 보풀 뭉치를 해체하시는 일로 하늘나라에 가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 앞에서 임종을 맞으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우리가 언젠가 맞게 될 운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형님의 소개로 알게 된 독신남 변호사 판스혼베커 씨의 소개로 명망가 클럽에 들어가게 되고, 변변하지 못한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주선으로 어느 날 갑자기 라르만스는 사업가로 변신을 하게 된다. 명망가 클럽에서 라르만스는 해외여행도 해보지 못하고, 그네들이 나누는 레스토랑 순례기에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런 천덕꾸러기 행세를 한다. 요즘 같으면 맛집과 호화 여행지 사진들이 넘실거리는 SNS에서 소외된 중년의 전형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이 그에게 자극이 되었을까. 얼떨결에 네덜란드에 위치한 호른스트라사로부터 고지방 에담 치즈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판매하는 총책을 맞게 된 라르만스. 그것은 1933년 당시 마치 로또 맞은 그런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판단한 라르만스는 당장에 다니던 조선소를 때려 치울 생각을 하지만 식구(아내)와 열두 살이나 많은 큰형님의 만류로 직장과 사업을 병행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나중에 판명되지만 잘한 결정이었다.

 

자신이 만날 회사에서 계약서를 다루었으면서도 미처 호른스트라사와의 계약서에 독소조항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라르만스. 자신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가진 식구 덕분에 자신에게 유리해 보이는 계약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호른스트라사에서 자그마치 20톤에 달하는 어마무시한 양의 고지방 에담 치즈가 도착하면서 라르만스의 사업도전은 위기에 처한다. 아니 이걸 어떻게 다 팔지?

 

무엇보다 지난 30년 동안 월급쟁이로 매달 통장에 따박따박 꽂히는 월급의 노예였던 라르만스는 장사꾼의 기질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호른스트라사의 유통책이라는 직책과 앞으로 벌어들일 돈에 대한 유혹 때문에 49세 중년 남자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다. 큰형님 의사 라르만스는 처음부터 동생 라르만스의 실패를 정확하게 예견했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라르만스의 실패는 예고된 재앙이었다. 어마무시한 20톤이나 되는 에담 치즈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그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유통기한이 정해진 제품을 보관하기 위한 냉장 장치가 설비된 창고가 그에게는 필요했지만 사전에 생각하지 못했다. 사무실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자신이 사는 집에 마련했다. 시간이 돈이라는 걸 알면서도 중고 책상과 타자기를 사기 위해 일주일을 허비했다. 치즈를 팔기 위해서는 유통망이 필요했는데 그에 대한 준비도 전무했다. 부랴부랴 중개상 수배에 나섰지만, 책임감 있게 자신을 대신해서 치즈를 팔아줄 사람은 구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라르만스는 배수진을 친다는 의미에서 조선소를 과감하게 때려 치우려고 했으나 식구와 형님의 만류로 일단 자발적인 신경증 환자가 되어 3개월짜리 무급병가를 냈다. 아무리 신경증 환자라고 하더라도 조선소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기에 스파이처럼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다. 세상에 이런 악조건을 업고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문제 아닐까? 재밌는 장면 중의 하나는 조선소에서 그의 존재감이었다. 헨리 사장님에게 보고하지 않고, 장기 무급병가를 처리하겠다는 제안을 들어 보니 라르만스는 조선소 사무실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게 아닌가 말이다. 요즘 세상이라면 당장에 정리해고 대상 1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결국 라르만스의 일탈적 치즈 사업이 실패로 귀결되고, 그는 다시 자신의 원래 직장으로 조기 복귀한다. 모든 직장인이 꿈꾸는 그런 일탈을 라르만스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최소한의 손실로 틀어막는데 성공했다.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자면 소중한 인생경험을 한 것으로 퉁치자고 할까. 원래 상태로 복귀한 라르만스는 얀과 이다 그리고 식구와 더불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그런 삶을 지속하게 되리라.

 

우리 현대인에게 만족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절대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무언가를 사기 위해 노동하고, 돈을 벌어들이고, 그 돈으로 끝없는 소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작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탈을 꿈꾼다. 누군가는 그 일탈을 성공으로 이끌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러지 못하겠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웠던 프란스 라르만스의 실패 이야기가 누군가를 주저앉히는 이야기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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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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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을 기다렸다,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만나고 나서. 존 밴빌의 혁명 3부작중에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케플러>가 드디어 출간됐다. 그리고 존 밴빌의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펀딩을 해서 지난 토요일에 받아서 어제 다 읽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완독을 하루 끌었다. 그만큼 재밌다는 말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 들여, 수천년 동안 점성술 혹은 미신에 가까웠던 천문학을 새로운 학문의 경지로 끌어 올린 문제적 인물이 바로 슈바벤 바일데어슈타트 출신의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였다.

 

존 밴빌은 새로운 세계관을 창시자였던 코페르니쿠스에서 출발해서 아이작 뉴턴에 이르는 근대 자연철학자 열전 가운데 중간다리 역할로 케플러를 골랐다. 전작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이것이 전기소설인지, 아니면 바로 옆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은 관찰예능인지 모를 정도의 몰입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케플러의 아버지는 허풍장이 용병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타고난 독설가였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박쥐 날개 같이 요즘으로 치면 마약에 가까운,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물품을 취급하던 자연치료사, 당시 말로 하자면 마녀에 가까운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연대기적 흐름 대신, 소설은 1600년 그러니까 새로운 세기에 프라하 근처의 베나테크성으로 가족들과 함께 덴마크 출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학자 튀코 브라헤를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대 유수의 지식인이었던 케플러의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점성술에 힘입었다. 그 어느 때보다 혹독했던 겨울의 추위와 튀르크 군단의 침공을 예언하면서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쓴 <우주의 신비>보다 더 큰 관심을 모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케플러가 발견했다는 전체의 세 법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관심이 없는 분야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이었는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보다 루터 교도로서 자신이 믿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가톨릭 신앙이 대세였던 그라츠와 린츠 그리고 합스부르크 군주 밑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봉사해야 했던 인간 케플러의 고뇌에 더 관심이 갔다.

 

아내 바르바라 뮐러에게 케플러는 놀랍게도 세 번째 남편이었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수전노 같은 이미지의 장인과 바르바라에게 협공당하는 장면은 네이트판에 등장할 법한 스토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우주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전력투구하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역시 우리네 같은 그런 일상과 싸워야 했단 말이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그런 풍경이 문득 살갑게 다가왔다.

 

생존과 알량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장인과 달리 케플러는 평생 종교적 신념을 지킨 인물이었다. 케플러가 루터 교도로서 정체성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면 그의 신산한 삶에 한줄기 빛이 비추게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제국의 황제였던 루돌프 2세 앞에서도 눈치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떠들던 자가 바로 케플러가 아니었던가. 동행한 브라헤가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도 외골수였던 케플러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끝까지 십진법 체계이기 때문에 모든 수가 9로 나뉜다는 황제의 화두를 설명하는 장면은 케플러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존 밴빌식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훗날 화성 전쟁으로 알려진, 화성의 공전 궤도를 알아 내기 위해 무려 70번이나 되는 엄청난 계산을 마다하지 않고 7년이란 세월을 투자한 사나이가 바로 케플러였다. 어쩌면 그에게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운행과 천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어떤 하나의 놀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그런 놀이를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요하네스 케플러라는 문제적 인물이 가진 다양성의 본질과 인간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자의 서사에 놀랄 수밖에 없다. 물론 상당 부분을 후대에 쓰인 글들을 참조했겠지만, 그것을 뼈대로 해서 지근거리에서 자신이 직접 본 것을 글로 옮긴 것 같은 전언적 서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의붓딸 레기나와의 관계에서 특히 그런 점이 느껴졌다.

 

자신을 발탁한 튀코 브라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장년의 변덕스러운 브라헤 특의 오만함과 허영심에 질린 케플러는 그의 존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천문학계에서 코페르니쿠스를 계승해서 나름 빼어난 커리어를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자신이 크리스티안 롱베르나 텡나겔 같은 브라헤의 조수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과음 때문에 발생한 방광염으로 사망한 브라헤가 남긴 천문관측 자료들은 결국 그의 유언에 따라 케플러가 상속받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케플러에게 브라헤가 남긴 자료들은 그야말로 노다지가 아니었을까.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루돌프력을 만드는 수고 역시 케플러의 몫이 되었다.

 

브라헤 사후, 케플러는 제국의 공식 수학자가 되었지만 군주들이 원하던 점성술사로서의 역할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자신을 지지해주던 루돌프 2세가 강제로 퇴위되고 경쟁자 마티아스 그리고 자신과 악연으로 얽힌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케플러의 운명 역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30년전쟁>이라는 대전란 가운데,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페르디난트 2세의 치하에서 곡예에 가까운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케플러의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자신에게 한푼의 유산도 상속하지 않은 아내 바르바라는 끝내 케플러의 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었다. 의붓딸 레기나 역시 27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바르바라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도 유년기를 못 넘기고 사망했다. 우주의 신비와 질서를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친 케플러에게 삶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통의 원천이기도 했다.

 

소설 후반에 아주 짧게 페르디난트 2세의 총사령관으로 전장에서 맹활약한 발렌슈타인과의 인연도 등장한다. 구두쇠 황제는 자신이 케플러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돈을 발렌슈타인에게 떠넘긴다. 케플러를 천문학자라기보다 자신의 개인 연금술사나 점성술사 정도로 받아들인 발렌슈타인은 케플러가 바라던 후원을 해주지 않았다.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발렌슈타인이 황제의 총애를 잃고 몰락해 버리면서, 케플러는 연구와 책의 인쇄를 위한 자금줄이 막혀 버렸다. 다시 한 번 황제에게 자금 출연을 호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케플러는 1630111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르네상스 부흥으로 촉발된 인문주의와 자연철학의 세례, 새로운 세계관을 상징하는 종교개혁 그리고 인쇄술의 진보에 힘입어 요하네스 케플러는 새로운 천문학의 길을 닦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식들과 부인을 차례로 잃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마녀 재판에 회부되어 송사로 수년간 시달려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케플러는 신이 창조한 우주의 질서와 신비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케플러의 인생 후반기는 역병과 기근이 끊이지 않던 30년 전쟁이라는 대전란의 시기였다는 점이다. 다사다난한 개인사, 종교적 핍박과 역경의 시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케플러의 3법칙과 훗날 뉴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행성 간의 중력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는 사실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단순하게 근대 천문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케플러가 품고 있던 다채로운 삶의 스펙트럼을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무대에 올려 독자에게 소개한 저자 존 밴빌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혁명 3부작의 마지막 주자인 아이작 뉴턴이 등장하는 <뉴턴 레터>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뱀다리] 인별그램에서 케플러에 대한 피드가 있나 해서 검색해 보니, 죄다 걸그룹 케플러에 대한 피드만 보여서 좀 실망했다. 21세기에는 천체와 행성 전문가 케플러보다 아티스트 케플러의 유명세가 더 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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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12-19 0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언제 다 읽으시고 이렇게 정성들여 쓰셨나요^^ 대단하세요! 저도 받아서 표지만 구경한 상태입니다^^ 혁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기다려지네요!

레삭매냐 2023-12-19 08:24   좋아요 1 | URL
너무 재밌어서 손에 잡는 순간,
놓을 수가 없더라구요.
고고씽!~입니다.

언능 <뉴턴 레터>가 나왔으면
합니다.

존 밴빌은 책도 많이 썼는데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책이 많이 없더라구요.

독서괭 2023-12-19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재밌어 보이네요! 1부 코페르니쿠스도 몰랐는데 혁명3부작, 찜해갑니다~~

레삭매냐 2023-12-19 08:25   좋아요 1 | URL
아숩게도 <닥터 코페르니쿠스>는
절판돼서 이제는 구할 수가 없더라
구요. 중고서점에도 없구...
도서관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케플러> 너무 재밌었습니다.

blanca 2024-01-09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온지도 몰랐네요. 존 밴빌 <바다>는 지금도 그 강렬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는데 케플러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별들의 흑역사 - 부지런하고 멍청한 장군들이 저지른 실패의 전쟁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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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면 미처 출간된 지도 몰랐던 책들과 만나는 그런 즐거움이 있다. 이번 주말에도 <별들의 흑역사>라는 책을 만났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에 만났던 패전사와 비슷한 궤적의 책이 아닌가 싶더라. 실패한 전쟁에서 배우는 교훈이라고나 할까.

 

똥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하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비밀 독립군이라는 말로 온갖 조롱을 받으며 기세 좋게 출발한 임팔 작전을 망친 영웅무다구치 렌야다. 태평양 전쟁 당시 남양군도과 여러 곳에서 프로 삽질러의 전형을 보여 준 숱한 일본군 똥별 장군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다구치의 활약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3개 사단 자그마치 10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인도의 임팔을 공략하고, 중국을 지원하는 연합군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로 시작된 작전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그런 작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보급이었고, 그 다음은 아라칸 산맥과 이라와디-살윈 강 같은 엄청난 규머의 강 같은 지형이었다. 연합군에 비해 치중 부대에서 차량이 아닌 우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일본군에, 무다구치는 물소의 등에 짐을 지워서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여차하면 그 물소를 잡아먹겠다는 얼토당토않은 구상을 했다. 하지만 물소가 기존의 소나 말처럼 부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게다가 험준한 지형에서 통제를 따르지 않다가 절벽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무다구치는 1944년 전인 2년 전에 이미 비슷한 작전을 구상했다가 보급이 여의치 않을 거라는 점을 들어 작전 계획을 취소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무슨 심정의 변화가 생겼는지 임팔 작전 강행에 나서게 된다. 2년 전에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보급이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던 무다구치는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현지의 풀을 먹을 것을 주문했다고 하던가. 그들이 그렇게 환호작약하던 황군정신만으로는 영국군의 중화기와 강력한 전차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초전에 31사단이 코히마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영국군의 매서운 반격과 결국 18군의 발목을 잡게 된 보급 부족으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현지 사단장들의 판단으로 후퇴에 나서게 된다. 특히 31사단장 사토 고토쿠는 독단으로 철수명령을 내려 병사들을 후방으로 소개시켰다. 일본군 창설 이래, 첫 번째 항명 사건 1호로 기록된다. 극우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전선 기록에서는 무다구치와 사토와의 악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둘이 구원으로 티격태격했다고 한다.

 

어쨌든 제대로 된 전략과 현지 지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충분한 보급 없이 무턱대고 전선에 뛰어 들었다가 대패한 일본 육군 최악의 무모한 시도가 바로 임팔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연출에 있어 무다구치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물건이었다. 물론 그 위의 상관들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 마사카즈와 남방총군 대장 데라우치 히사이치도 조연으로 이른바 백골가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임팔 작전에 앞서 시행된 하호 작전에서 하나야 다다시라는 똥별이 보여준 시대착오적 전투도 주목할 만하다. 세상에 전투를 적의 보급품을 뺏어서 하는 거라는 구시대적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만주사변에서 이시하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지로의 대활약에 가려져서 그렇지, 엘리트 육군 출신으로 특무기관 소속이었던 하나야 다다시도 한몫 단단히 했었다고.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 출신 엘리트였던 하나야 다다시는 오만에 쩔어, 자신보다 못한 경력의 인사들이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무시했다. 상관도 안중에 없던 모양이다. 이런 일본군의 하극상이야말로 고질적 병폐였다. 심지어 군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에 쳐들어가 기자와 사원들을 폭행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단장이라는 고위직 지휘관이었던 하나야 다다시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급자들을 폭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싸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온갖 구타와 폭언 그리고 무분별한 공격 강요로 애꿎은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심지어 작전이나 전투에 실패한 휘하 지휘관들에게 할복을 강요해서 할복 사단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일본군 3대 오물에 비교해 볼 때, 하나야 다다시는 역량과 액션에서 조금도 떨어지는 선수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눈길을 북아프리카로 돌려 보자. 어라, 그리고 보니 <패전사>에도 나오는 인물과도 겹치네. 마셜 원수에게 픽업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전차전의 귀신 롬멜과 상대하게 된 로이드 프레덴들의 이야기다.

 

히틀러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만 하더라도, 전쟁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던 미국은 서둘러서 전시 징병제를 실시해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많은 병사들이 모집되어 훈련이 필요했다. 로이드 프레렌들은 바로 이런 역할에 적합한 인사였다. 하지만 총알과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은 조건이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상대는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폰 아르님과 사막의 여우 롬멜이 아니었던가.

 

적정 시찰에 적극적이었던 롬멜과 달리 프레덴들은 안락한 후방에서 모호한 지시들을 내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이제 막 전선에 투입된 경험이 일천한 미군 병사들이 역전의 롬멜 아프리카 군단병들을 상대할 수가 있었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마셜 장군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연합군 간의 조정과 인사권 행사라는 점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해냈지만, 적어도 북아프리카 전선에 프레덴들을 투입한 것은 그의 치명적 실수 중의 하나였다. 시디부지드와 카세린 협곡에서 뼈아픈 일격을 당한 미군은 패전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곧바로 엘 궤타르 전투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킨다. 물론 조지 패튼이라는 맹장을 투입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은 장제스와 스틸웰 간의 심각한 갈등을 다룬 부분이었다. 정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의 만남은 중국 전선에서 대원수 장제스와 미국인 군사고문 조 비니거스틸웰의 그것이었다. 일본의 거센 공격에 밀린 중국은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와 장비 그리고 미군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인종주의자이자 장제스를 경멸했던 스틸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신편해서 애지중지 기른 정예 병력들을 전략 예비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목표였던 버마 탈환에 집중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해전에서 미군에게 잇달아 패배하고,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동남아의 전쟁 물자를 본국으로 후송하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육로로 수송하겠다는 고육책을 내기에 이른다. 광대한 중국 대륙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각처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중국군을 격파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중원을 가로 지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육로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5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서 대륙타통작전 이른바 이치고 작전을 시행했다.

 

중일전쟁을 통털어 최대의 병력을 동원한 이치고 작전으로 일본군은 기세를 잡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던 정저우, 쉬창 그리고 창더를 함락시켰다. 다만, 헝양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간신히 한 숨 돌릴 수가 있었다. 화베이에서 팔로군을 상대하던 일본군들이 중국 중앙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해 버리는 바람에, 팔로군이 급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전 후, 곧바로 벌어지게 되는 국공내전에서 결국 장제스군이 패하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바로 이런 위기를 대비해서 장제스가 길러둔 소중한 전략 예비대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버마 전선에 갈아 넣어 버린 것이 바로 스틸웰이었다. 오래 전, 타임라이프에서 나온 월드워2에 실린 버마 철수작전을 찍은 사진들도 결국 스틸웰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여론전이었단 말이지. 비록 일본군에게 난타당하긴 했지만, 미국의 동맹국의 수장이었던 장제스에 대한 예우를 갖춰야 하는 참모 격의 스틸웰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려고 한 점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버마 전선에서 스틸웰이 선전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장제스가 자신의 전략이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한 스틸웰은 장제스를 암살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국부천도로 비록 대륙을 잃긴 했지만, 중일전쟁 당시 정예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의 대군을 중국 대륙을 묶어두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장제스의 신원을 위해서도 저자는 상당한 부분을 할애했다. 중국전선을 망쳐 먹은 희대의 빌런 스틸웰이 서구 언론에 선전한 대로 과연 장제스는 대륙을 상실할 정도로 무능력한 인사였을까? 아마 장제스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중국의 항일전은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1차 국공합작을 결렬시킨 19274월의 상하이 쿠데타와 국부천도로 이어지는 국공내전 패전의 최고 책임자 역시 장제스였다. 공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장제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본격적인 항일전에 나서기 전에 마오쩌둥의 홍군을 격멸해야 했다. 역사에서 이런 했다면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한 수 잘 배우고 간다.

 

[뱀다리] 오탈자 감수에 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콜트 권총을 콜드로, 일본군을 본군 같은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아주 간단한 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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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3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무다구치 렌야? 를 떠올렸습니다 ㅋ 영원히 조롱받는 사람... 중일전쟁에 저런 배경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ㅋ

레삭매냐 2023-12-13 10:03   좋아요 1 | URL
제목을 아예 똥별들의 흑역사라
고 지었으면 대박이 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나야 다다시 장례식장에는
부하들이 아예 나타나지 않았지만...

무다구치 장례식장에는 부하들이
등장했다고 하더라구요. 빈소를
때려 부수러요.

오랫동안 서구 중심의 역사서술
을 들어 왔는데, 전쟁의 이면을
볼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13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잘 몰랐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우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23-12-13 10:03   좋아요 1 | URL
나름 그쪽 분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책은 재밌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12-23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똥별^^ 영화 보고 난지 두주 지났지만 아직도 귀에 생생 똥별

요책 연결해 읽으면 딱이겠어요

레삭매냐 2023-12-23 23:00   좋아요 0 | URL
2023년 연말을 관통하는 영화가 바로
<서울의 봄>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똥별들을 치우자고
쿠데타를 도모한 인간들이야말로 똥
별이 아니었을까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10개월 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올해 처음 본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후배 녀석은 정말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을 마치 어제 있었던 일들처럼 그렇게 나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10개월 전의 일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물론 나의 기억도 그 녀석이 수정해 주었다.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은 여전히 만족스러웠다. 좀 추워서 집에 오는 길에 고생을 하긴 했지만. 뭐 정도는 감수해야지.

 

주말행사인 도서관 방문을 했고, 난 세 권들의 책들을 빌렸다. 그리고 도서관에서만 읽을 수 있는 만화를 좀 읽었다. <앨런의 전쟁>은 분량이 좀 있는 책이라, 다음에 가서 또 읽는 것으로. 그래도 한 60쪽 정도 읽었나 보다. 간만에 마스다 미리의 책이 눈에 띄어 골라 읽었다.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그전에 심심한 그림체의 마스다 미리 작가의 책들을 계속 읽었던 것 같은데 아닌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0년차 서점 직원인 쓰치다 신조가 주인공이다. 나이는 32. 도쿄에 작은 공간에 서식하는 초식남이다. 연애는 6년인가 7년 전이 마지막이라고. 당연히 설정은 성실하고 마음에 따뜻한 친구다. 이 책이 나온 게 9년 전이니 또 지금의 서점 상황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의 출판시장과 서점은 동반 몰락하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걸 집어 삼켜 버린 너튜브와 각종 OTT 덕분이 아닐까 싶다.

 

극 중에서 마스다 미리는 쓰치다의 입을 빌려 왠지 흔들리는 전철에서 문고본을 읽는 어른들의 모습이 참 멋졌다는 말을 무심코 내던진다. 어제 약속 장소로 가는 전철 안에서(만원 전철이라 무엇을 할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유디트 헤르만의 신간 <레티파크>를 가방에 담아 갔지만 정작 읽지는 않고 대신 핸드폰 게임을 했다. 2023년 한국의 전철 풍경은 그랬다.

 

얼마 전, 신문에서 서점에 들러 책을 사는 충동구매가 현저하게 줄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문제는 주변에 그럴 만한 서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서점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신간 소설 대신 참고서와 문제집만 즐비하다. 왜냐구? 소설책 판매만 해서는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주에 갔던 경인교대 근처에는 서점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명색이 대학인데 말이다. 이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책과의 연결점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뭐 대충 잡아 2014년의 일본에서는 그래도 월급날이면 주머니가 두둑해진 월급쟁이들이 스스로에게 보상해 주기 위해 서점에 들러 책도 사고 그러던 시절이었나 보다. 왠지 낭만이 느껴지지 않나 싶다. 월급날이면 서점의 매출이 올라갔다는 말이 좀 신기하게 다가왔다. 정말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로구나. 요즘에는 주머니에 돈이 생겨도 책을 사지 않는다구요 마스다 미리 씨. 그리고 보니 나는 소소하게 공모주 청약으로 번 돈을 책 사는데 쓰고 있구나 싶다. 지난 금요일에 번 돈으로는 옆지기에게 타코 플래터를 사주었다. 다음주에 혹여 공모주로 조금 벌게 된다면, 이달에 나올 예정이라는 존 밴빌의 <케플러> 펀드에 응모하고 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쓰치다 씨는 자신의 일에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소시민의 전형이다. 보통 혼자 먹는 저녁 메뉴로 할인된 장어 도시락을 기대하기도 한다. 거기에 나마비루까지 한잔 곁들인다면 아마 더 바랄 게 없겠지. 나도 아까 마트에 들렀다가 몰슨 비어가 4캔에 7,000원이라고 해서 잠시 혹했다. 지난주에만 두 번이나 달렸는데 당분간 자제해야지 싶어서.

 

서점 직원으로 아마도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쓰치다 씨는 자기 인생의 의미에 생각하는 멋쟁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생각을 잘하지 않으면서 살지 않나? 어려서 읽은 SF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빗대 우주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마스다 미리 작가의 경험에서 나온 서사라면, 왠지 작가의 심리 상태에 연결되었다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한다. 쓰치다는 후배 마쓰다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는 일들을 무람하게 해낸다. 서점 고객을 찾아 간다거나, 다른 서점에서 아이들을 위한 좌석 배치 혹은 동화 읽어주는 프로그램들을 자신의 서점에도 도입하는 건 어떻겠냐며 점장을 설득하기도 한다. 책을 팔아 수익을 내야 하는 서점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프로젝트가 아닐지.

 

요코하마에서 병으로 고생하시는 큰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원래는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역기 사람 좋은 쓰치다 씨는 큰아버지를 찾아가 쓸데없는 이야기로 웃기기도 한다. 병이 나으면, 긴자의 맛집을 찾아가자고 했던가. 병상의 큰아버지는 큰어머니에게 조카가 좋아하는 장어덮밥을 사오라고 부탁하신다. 병실에선 먹는 장어덮밥은 맛있지 않았다고 돌아오는 길에 쓰치다는 회상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흘러가는 모양이다.

 

마쓰다가 주선한 미팅은 완벽한 실패였다. 미팅에 나온사키에게 쓰치다는 호감을 표현하지만, 사키는 결혼할 애인이 있고 대타로 나온 거라고 말했다. 아니 이런! 그런데 정작 마쓰다의 애인이라고 생각했던 야요이가 여자사람친구였고 쓰치다에게 관심을 보여 둘은 영화도 보고 연애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첫날 쓰치다가 야요이에게 대담한 제안(?)을 해서 독자를 놀래키키도 한다. 어라 이 친구, 이런 면이 다 있었네하고 말이다.

 

뭐 이 정도면 내가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대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오랜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시간에 쫓기며 관내열람 전용 만화를 보고 낮잠을 늘어지게 잔 다음, 일어나 교촌에서 허니콤보 치킨을 주문해서 실컷 먹고 나서 낮에 본 만화에 대한 소소한 감상들을 적는다. 그거면 된 거다. 그런데 설거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손등이 많이 텄다. 핸드크림을 발라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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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12-03 2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주식으로 돈을 버시는 분이셨군요 레삭매냐님 존경♡ 직장 근처에 큰 서점이 있어서 가끔 점심시간에 책을 사곤 했었는데(현저히 줄었다는 충동구매 일인;) 최근 그 서점이 폐업을 했네요 ㅠㅠ;;

레삭매냐 2023-12-03 22:17   좋아요 2 | URL
아닛 누가 보면 목돈을 버는 줄
알갔습니다.
그런 건 아니고, 아주 소소하게
초큼 책값 정도 모으고 있답니다 ^^

새로 회사가 이사간 곳에 K문고
가 있어서 저도 점심 먹고 나서
가끔 구경간답니다. 새책 구경하
는데 제격이지요.

서점의 폐업, 그저 안타깝습니다.

2023-12-04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4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12-06 0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핸드크림 어디거 쓰시나요?
치킨 먹고픈 마음이 들게 하네요.
잔잔한 이야기인듯 보입니다.

레삭매냐 2023-12-06 10:58   좋아요 1 | URL
저는 아트릭스를 사용한답니다 ^^
집에도 하나, 사무실에도 하나
그리고 차에도 비치해서 며칠
동안 죽어라 쳐발쳐발했더니
손등이 다 나았답니다.

어젯밤에 먹다 나은 허니콤보 치
킨에 샘 애덤스 비루 한 깡 했습
니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세계사를 흔든 패전사 이야기 - 유튜브 채널 패전사가 들려주는 승리 뒤에 감춰진 25가지 전쟁 세계사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시리즈
윤영범 지음 / 북스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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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튜브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절이 왔다. 이제는 너튜브로부터 책으로 진화하는 그런 시절이 되어 버렸다. 사실 <패전사>는 예전에 빌레르 보카주 전투를 다룬 콘텐츠로 이미 접했지 싶다. 무장친위대 소속 SS 전차지휘관이었던 미하엘 비트만의 신들린 활약에 아마 넋을 놓았더랬지. 어떻게 아무리 독일군의 티거 전차가 막강하다고 하더라도, 영국군 전차여단을 무력화시킬 수 있단 말인지.

 

세상은 승리만 기억할 뿐, 패배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쓰라린 패배의 기억으로부터 도피하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승리보다 패배가 훗날 더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전쟁에서 그런 점을 배우게 된다면 그건 비극이다. 인명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지휘관의 명령과 고집 때문에 수십만의 병사들이 전장에서 죽어나간 게 불과 100년 전의 일들이다. 아니 전쟁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예를 들어 태평양전쟁의 도화선이 된 진주만 공격을 예를 들어 보자. 중일전쟁으로 광대한 중국이라는 전장에 발이 빠져 버린 일본에 대해 태평양에서 서로 이해가 충돌하던 미국은 전쟁을 그만 두고 철군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군부가 조종하는 일본 정부는 그럴 수가 없었다. 19417월 일본군이 비시 정부의 식민지였던 남부 베트남에 진주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은 미국내 일본 자산의 동결, 그리고 일본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인 석유금수조치를 취하면서 좀 더 강경하게 중국에서 철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연합함대 총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처음에는 대미개전에 반대했지만,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로 앉아서 죽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결국 기동부대를 진주만에 전개하게 된다. 미국도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안일한 대응으로 결국 진주만에서 정박 중이던 태평양 함대의 상당수가 격침되고 파괴되었다. 일본군이 무리를 해서라도 진주만에 대한 3파 공격에 나섰다면, 확실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고 미국은 진주만에 침몰한 전선들을 인양해서 곧 반격에 나서게 된다. 항모전단이 진주만에 없었던 것도 천운이었다. 미국의 진주만 패전은 패배가 아니었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 성공은 완벽한 성공도 아니었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후, 파죽지세로 파리를 해방하고 독일의 심장부로 진격해서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내겠다는 영국군 원수 몽고메리의 야심찬 계획이 바로 네덜란드를 해방시키겠다는 마켓가든 작전의 기본 얼개였다. 몽고메리는 우선 노르망디 상륙 후, 휴식을 취하고 있던 미국 82, 101 공수부대와 영국 1공정사단을 마켓 부대로 네덜란드 요충지에 강하시켜 교량을 확보하고, 지상에서 영국 30군단이 전차로 밀어 붙이는 가든 부대로 서부전선에서 패배를 거듭하고 있던 독일군을 일거에 섬멸하겠다고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이젠하워를 설득했다.

 

원대한 계획이었으나, 이 또한 처절하게 실패한 작전으로 판명되었다. 현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들이 수집한 정비를 위해 2개의 독일 SS 기갑부대들이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영국군은 애써 무시했다. 가장 중요한 목표인 아른헴 대교(영화 <머나먼 다리>의 배경)를 영국 1공정사단인 붉은 악마들이 악전고투 끝에 성공적으로 확보했지만, 후속부대인 30군단의 진격이 독일군의 치열한 저항에 요격되면서 결국 실패했다. 연합군이 압도적인 공군력을 이용해서 공중 보급에 나섰지만, 대부분의 물자들이 독일군에 수중에 들어갔다. 훗날 영국군을 포로로 잡은 독일군들이 연합군이 공중에서 보급한 보급품으로 적군과 싸우는 수지 맞는 장사였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켓 가든 작전>은 처음부터 너무 낙관적인 전개를 기대했기 때문에, 작전이 실패할 경우 어떻게 한다는 플랜 B에 대한 구상도 없었다고 한다. 경무장한 소수의 공수부대가 독일군의 기갑부대를 상대한다는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전투가 그렇듯, <마켓 가든 작전> 역시 지휘관의 무책임한 태도 때문에 애꿎은 병사들만 전장에서 소모된 경우였다. 아니 성공하면 오히려 이상한 작전이 아니었을까.

 

진주만 기습 후, 말레이 앞바다에서 벌어진 영국과 일본의 말레이 해전 역시 전쟁사의 흐름을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전은 거함거포 위주의 포격전이 중심이었다. 세계의 바다를 제패한 영국은 해상에서 압도적 전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해 왔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역시 적어도 바다에서는 영국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함재기를 탑재한 항공모함의 등장으로 해전은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미 진주만에서 항공모함이 주축이 된 기동함대로 재미를 본 일본은 이번에는 영국을 상대로 자신들의 혁신적 기술과 전략을 시험대에 올렸다. 태평양전쟁 개전 초기만 하더라도, 일본 전투기 조종사들은 훈련과 실전을 통해 얻은 실력으로 미영 연합군을 압도했다. 본국이 독일과의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동방에 주력 부대를 파견할 수가 없었던 영국은 그래도 동양의 양대 진주(홍콩, 싱가폴)로 불리는 거점 가운데 하나인 싱가폴을 방어하기 위해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먹잇감을 발견하고 그야말로 벌떼처럼 달려드는 일본 함재기의 공격 앞에 대영 제국의 전함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본국에서 두 전함들의 격침 소식을 듣고 전시 수상이었던 처칠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훗날 비슷하게 일본이 자랑하던 거함 야마토와 무사시가 비슷한 궤적을 겪게 되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비교적 가까운 사례인 20056월 네이비 실이 투입된 레드윙 작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탈레반 2인자 아흐마드 샤를 암살하기 위해 투입된 네 명의 네이비 실 정찰조의 위치가 탈레반 전투원들에게 노출되면서 적들의 공격에 노출된 대원들의 이야기다. 악전고투 끝에 마이클 머피 중위가 무선전화로 본부에 구조 요청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탈레반의 총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다.

 

애초에 정찰 대원들이 아프간 민간인들에게 노출되었을 때, 자신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그들을 처치해야 한다는 논쟁부터 시작해서 본부와 무전연락이 두절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마지막으로 고립된 대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했던 동료 대원들이 탄 치누크 헬기가 탈레반의 RPG 공격을 받고 추락하면서 헬기에 탑승했던 대원들이 모두 전사하는 참극이 발생했다.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론 서바이버>라는 영화가 8년 뒤에 제작되기도 했다. 마크 월버그가 연기한 마커스 러트웰은 부상당한 채, 현지 파슈툰 사람인 모하메드 굴랍의 도움을 받아 구출되었다. 영화에서는 배우들이 실제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연기를 스턴트 없이 직접 연출했다고 했다던가.

 

너튜브 패전사에는 나오지만 책에서는 빠진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독일군이 처음으로 맞붙은 시디부지드 전투와 카세린 협곡 전투도 주목할 만하다. 토치 작전으로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미군이 약체 비시 정부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다가, 정예 독일군과 처음으로 상대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쓴맛을 제대로 보게 됐다. 모래먼지가 이는 사막에서 전차 운용을 해본 적이 미군의 기동부터 시작해서, 미군 지휘관 로이드 프레덴덜은 처음부터 너무 안일하게 독일군을 상대했다.

 

미군이 독일군과의 첫 교전에서 당한 쓰라린 패배에서 교훈을 얻었다가 이 패전의 주된 서사다. 난 그런데 그 점보다 패튼 장군의 사위가 포로가 되었다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결국 패전 무렵에 가서야 포로생활에서 풀려난 패튼의 사위는 훗날 장인보다 더 많은 별을 단 사성장군이 되었다던가.

 

다양한 패전의 서사 속에서 내가 읽어낸 것은 전쟁은 반드시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9-19 합의파기로 한반도에 다시 무력충돌의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어떤 형태의 전쟁에도 반대한다. 어떤 평화라도 전쟁보다 낫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지 그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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