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트 - Pri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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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신의 만화가 형민우 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할리우드 영화 <프리스트>를 봤다. 잔뜩 기대하고 봤는데, 역시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더라는 말을 확인했다. 아직 만화를 보지 않아서, 만화와의 연관 관계에 대해 파악할 수는 없고 다만 앞으로 이 영화가 계속해서 제작된다면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캐낼 수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공존할 수 없는 두 존재인 인간과 뱀파이어 전쟁이 벌어진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능력을 뱀파이어 앞에 인간은 속수무책이다. 이때, 인간은 “프리스트”라는 비밀 병기로 단박에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다. 프리스트의 활약으로 인류를 전멸시킬 것처럼 보였던 뱀파이어의 위협은 사라진다. 이 복잡한 이야기를 영화에서는 2D 카툰으로 아주 가볍게 처리한다. 역시 영화의 위력이라는 말밖에.

그런데 뱀파이어는 없어진 걸까? 교회가 지배하는 도시 밖 황무지에 외롭게 사는 루시 가족을 일단의 뱀파이어가 습격한다. 홀연히 등장한 보안관은 우리의 주인공 프리스트(폴 베타니 분)에게 조카딸이 뱀파이어에게 납치되었으니 구하라는 말을 던진다. 뱀파이어와의 전쟁에서 크나큰 공훈을 세운 프리스트는 교회 최고회의에 도시 밖으로 나가 조카딸을 구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교회 우두머리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허락 없이 행동한다면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

이런 협박에 굴할 우리의 프리스트가 아니다. 시속 250마일에 육박하는 속도를 자랑하는 놀라운 속력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황야를 질주하는 프리스트. 도시 제리코에서 보안관과 만나 사라진 루시의 행방을 쫓기 시작한다. 보호구역에서 뱀파이어 병원균에 감염된 ‘하수인’에게 루시의 행방을 묻지만, 그들은 자신의 마스터에 대한 과신으로 프리스트를 얕잡아 본다. 해가 지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와의 대결이 벌어진다. 신종 뱀파이어의 모습은 중세의 고전적인 드라큘라라기 보다, <나는 전설이다>에 나온 그런 식의 뱀파이어다. 태양과는 척을 지니 당연히 눈은 달려 있지 않다. 그런데도 그들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하게 빠르다. 이건 뭐 총을 뽑을 새도 없이 당하겠는걸.

한편, 교회의 도시에서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프리스트 추적팀을 파견한다. 과거의 동료이자 프리스트를 사랑하는 프리스티스(매기 큐 분)가 합류해서 새로 출현한 뱀파이어의 본거지로 지목되는 솔라 미라로 출동한다. 그곳에서 엄청난 덩치의 하이브 가디언과의 대결은 이 영화 최고의 압권이 아닐까 싶다. 특히, 프리스티스가 던진 돌을 밟고 공중에서 하이브 가디언을 일격에 베는 프리스트의 내공은 일품이었다.

세 명의 나머지 프리스트들과 제리코를 쑥대밭으로 만든 현장에 도착한 프리스트 일행은 예전의 동료였다가 이제는 뱀파이어 퀸의 피를 받아 인간-뱀파이어가 된 “블랙 햇”이 이끄는 뱀파이어 군단과 마지막 대결을 치닫는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같은 달달한 뱀파이어 시리즈에서부터 하드코어 뱀파이어 영화까지 요즘 뱀파이어 영화가 인기다. 아마 그런 시류에 편승해서 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을 지울 수가 없다. 제작비가 대략 6,000만 달러 정도 들었다고 하는데 흥행 성적은 시원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형민우 씨의 원작의 할리우드 진출 쾌거라는 식으로 마케팅이 이루어지겠지만, 미국에서의 최종 스코어는 기대 이하인 것 같다.

우리나라 막장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도 <프리스트>에 빠지지 않는다. 아, 잠깐 잊었다. 이 영화의 원작 만화가 우리나라 작가였지. 사실 뱀파이어 영화 <프리스트>는 오프닝보다 앞으로 이어질 시퀄과 프리퀄이 더 기대된다. 뱀파이어 전쟁은 멋진 프리퀄로 써먹을 수 있을 것이고, 잠깐 모습을 드러낸 뱀파이어 퀸과 대결 역시 흥미진진한 요소다. 다만, 문제는 시리즈의 시작이 시원치 않다는 점일 게다. 또 다른 네거티브 포인트로는 특정 종교의 색채가 너무 강하다. 권력화된 종교가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경고는 그런대로 봐줄만 하다.

사실 동료 프리스트와의 대결 구도를 예상했는데 민감한 부분은 뱀파이어 군단이 처리해 주었다. 폴 베타니가 맡은 프리스트 역할도 좀 더 종교적 계율과 인간적 성정 사이에서의 고뇌하는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졌어야 했는데, 그런 점이 부족했다. 블랙 햇과의 대결에서도 너무 일방적으로 얻어터져서 뱀파이어 전쟁에서 이런 실력으로 어떻게 뱀파이어를 이겼는지 궁금했다.

기대를 많이 했는데, 다 보고 나서 아쉬움이 많은 영화였다. 기대 중인 <혹성탈출>의 외전도 이럴까 봐 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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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SE : 스틸북 DVD (2disc)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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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 <혹성탈출>의 새로운 이야기가 개봉한다는 소식에 십년 전에 나온 팀 버튼 감독 마크 월버그 주연의 <혹성탈출>을 다시 봤다. 찰턴 헤스턴 주연의 원작에 비할 바 아니지만, 리메이크로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싶은 생각이다.

우주시대에 미공군 소속의 리오 데이비슨(마크 월버그 분)은 벌써 2년째 우주공간을 떠돌고 있는 중이다. 세이모스라는 이름의 침팬지가 사람을 대신해서 우주공간을 비행하는 훈련을 맡고 있던 리오는 엄청난 자기장을 만나 세이모스가 탄 알파비행선이 사라지자, 상부의 명령에도 스스로 비행선을 몰고 자기장 속으로 돌입한다. 초반에 나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한 영상이 등장하는데, 구조요청을 하는 시퀀스다.

리오가 불시착한 행성은 원숭이 아니 유인원이 지배하는 행성이다. 예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유롭게 살던 흑인들을 사냥하듯 유인원들은 인간을 노예로 잡아들인다. 유에스 에어 포스 소속의 리오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유인원 사회에서 하등동물 취급을 받는 인간옹호론자인 아리(헬레나 본햄 카터 분)의 도움을 받아 우주모선인 오베론의 신호를 찾아 나선다.

한편, 리오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쎄이드 장군(팀 로스 분)은 유인원 사회의 존속을 위해 아예 인간을 말살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펼친다. 리오의 정체를 알아본 쎄이드는 그를 끝까지 추격한다. 오리지널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단 찰톤 헤스톤은 죽어가는 쎄이드의 아버지이자 세이모스의 직계 후손으로 등장해서 아들에게 놀라운 비밀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유인원이 인간의 노예였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쎄이드는 리오를 반드시 찾아내 죽어야할 또 다른 이유가 생겼다.

리오 일행은 칼리마라는 인간 금지 구역이자 고대 유적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칼리마는 CAution LIve aniMAls의 약자였다. 그제야 리오는 모선 오베론이 자신이 우주공간에서 실종된 후, 이 행성에 불시착해서 유인원에게 습격당하고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팀 버튼은 시간을 교묘하게 조종하면서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간과 유인원 군단의 대격돌이 임박한 순간, 우주에서 유인원의 위대한 조상 세이모스가 도착하면서 가까스로 파국을 모면하게 된다.

아리와의 적당한 로맨스를 뒤로 하고 리오는 지구로 귀환을 서두른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지구로 돌아온 리오는 역시 불시착한 워싱턴 DC에서 놀라운 걸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영웅 쎄이드를 기념하는 동상이었다. 곧이어 도착한 유인원 경찰과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번 여름에 개봉하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원래 20세기 폭스에서 전작의 상업적 성공으로 속편을 제작하려고 하다가, 비슷한 모티브를 가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번에는 시저라는 이름의 뛰어난 재능의 침팬지를 가지고 실험을 하던 중에 거의 인간지능에 가까운 발전을 이루고, 동료 유인원들을 선동해서 인간에게 반항한다는 줄거리라고 한다.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유인원이 어떻게 첨단장비로 무장한 인간에게 대항할지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터미네이터3>에서 본격적으로 인간에게 반항하기 시작한 기계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기계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유토피아가 오리라는 과거의 보랏빛 전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기계와 컴퓨터가 대신하게 된 사무자동화의 영향으로 작금의 생활이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바뀌었을 진 몰라도, 인간의 노동도 마찬가지로 예전처럼 필요하지 않게 된 점을 주목해야할 것이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면서 우리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변하기 시작했다. <혹성탈출>에 나오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역전은 미래사회에어쩌면 인류가 직면할지도 모를 그런 경고가 아닐까.

내심 쎄이드가 어떻게 지구에 오게 됐고, 지구에서 영웅대접을 받게 된 과정을 설명해줄 속편을 기다리던 팬의 입장에선 외전격의 새로운 버전을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10년이 지나는 동안, 영화제작 환경이 광속으로 바뀌다 보니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과연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하다. 새로운 외전의 개봉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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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넘버 포 - I Am Number F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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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어떻게 정의를 해야 할까. 영화 <아이 엠 넘버 포>를 보면서 자꾸만 크립톤 행성에서 날아와 지구를 외계의 악당으로부터 지키는 슈퍼맨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재밌는 건 슈퍼맨은 넘버 원을 상징하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존(알렉스 페티퍼 분)은 아주 처음부터 대놓고 자신이 넘버 포란다. 물론 그 말에 수긍하는 이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어느 정글 같아 보이는 곳에 은신하던 로리언 행성 출신의 넘버 쓰리를 모가도리언이라는 이름의 외계인들이 습격한다. 미국 플로리다의 바닷가에서 놀던 넘버 포 존은 발에 타는 통증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수호자인 헨리(티모시 올리펀트 분)와 함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아무도 모를 어느 곳, 오하이오주 패러다이스로 떠난다.

플롯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존은 로리언 행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9명의 전사 중의 한 명이다. 넘버 쓰리까지 당했으니, 앞으로 남은 6명이 힘을 합쳐서 잔인무도한 사냥꾼인 모가도리언에에게 대항해야 한다. 다만, 신세대 젊은이답게 존은 은둔의 삶이 아닌 나름 달달한 사랑도 해보고 싶고 보통 청소년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물론 그의 수호자 헨리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만.

패러다이스에서 이들의 은둔의 삶을 방해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새라(다이아나 애그론 분). 동네 청년들이 모두 좋아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원치 않게 동네 노는 형들인 마크 제임스 패거리와 어울리게 되면서 좀 꼬이게 된다. 한편, 진짜 아버지를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왕따 소년 샘도 빼놓으면 안되겠다. 어느 영화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종류의 사이드킥은 빠지면 안되는가 보다. 넘버 포 존의 뒤를 쫓은 정체불명의 오토바이 아가씨와 흉포한 모가도리언의 숨 막히는 추적이 시작된다.

DC코믹스의 만화 같은 <아이 엠 넘버 포>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달랑 넘버 포와 넘버 식스만이 등장했다. 앞으로 나올 캐릭터가 이 둘 말고도 넷이나 더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속편이 예정되어 있다. 단, 그 시기는 언제인지 모를 뿐. 외계에서 온 소년이 전사로 탈바꿈한다는 통과의례 같은 공식 외에 청소년들의 달달한 로맨스도 가미된 전형적인 오락물로 보면 될 것 같다.

영화 <트랜스포머>에서도 등장했던 티모시 올리펀트는 수호자로 뛰어난 모습 대신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게 인질이 되어 모가도리언의 일격에 당하는 단발성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의 역할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최첨단 장비를 이용해서, 존이 플로리다에서 남긴 온라인상의 흔적을 모두 지우는 장면이었다. 물론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의 헨리도 바닷가에서 존이 찍힌 영상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흔적을 따라 넘버 식스와 모가도리언들이 존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비스틀리>에서도 잘생긴 훈남으로 등장했던 알렉스 페티퍼는 <아이 엠 넘버 포>에서도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해냈다. 이런 외모에 뛰어난 운동신경 그리고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스터리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답답한 시골 마을을 떠나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새라와의 러브라인은 그래서 더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혹시 새라 대신 넘버 식스와 삼각관계로 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로리언 행성인들은 사랑에 한 번 빠지면 영원하다는 금언의 족쇄가 그들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들어 준다. 섬세하게 이런 장치까지 마련하다니 대단하다.

역시 전편보다 더 궁금해지는 속편에서는 로리언 행성인과 모가도리언들의 숙원 그리고 새로 등장할 다양한 개성과 능력의 나머지 ‘넘버’들이 기대된다. <아이 엠 넘버 포>가 가벼운 몸풀기였다면 속편은 본격적인 본 프로 상영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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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The Wres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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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을 봤다. 그의 장편 데뷔작 <파이> 이후 아마 처음이지 싶다. 극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파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유대 카르발라 신비주의 같은 수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남자의 이야기, 드릴을 든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요즘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블랙 스완>으로 작품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2008년 <레슬러>를 뒤늦게 봤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듬해 아카데미상은 이 영화에서 열연한 미키 루크에게 돌아가야 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미키 루크가 누구던가? 1980년대 킴 베신저(지금은 베이싱어로 불리지만, 오래전 이 이름이 더 좋다)와 함께 출연했던 <나이 하프 위크>에서 그 멋진 꽃미남 배우가 아니던가. 한 때 권투선수로 배우 대신 외도도 했다고 하는데, 환갑 줄에 들어서서 엉덩이마저 다 드러내고 출연한 영화가 바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이거노믹스로 힘센 미국을 주창하던 바로 그 시대, 198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AFKN을 통해 가끔 보던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시절이 떠올랐다.

미키 루크가 맡은 랜디 더 램 로빈슨은 1980년대 끗발 날리던 레슬링 선수였다. 당대의 호적수 아야톨라와 경기에 대한 미디어 뉴스가 파노라마처럼 소개된다. 1989년 4월 6일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랜디는 그저 예전의 영광과 추억을 뜯어 먹고 사는 한물간 레슬러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미국 레슬링이 쇼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확인해주듯 랜디는 경기에 나서기 전에 면도날 트릭 같은 고전 수법과 대결할 선수와 사전 조율을 한다. 한 때,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했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링 위에서의 격투로 인한 청력 상실 그리고 근육강화를 위해 시시때때로 복용한 약물에 찌든 육신뿐이다. 게다가 트레일러 월세마저 못내 관리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생업을 위해 인근 대형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뛰고 있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스트립클럽의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 분)와의 짧은 만남이다. 싱글맘으로 근근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캐시디는 단골 손님인 랜디의 말에 곧잘 귀를 기울여준다. 어라, 이거 너무 신파조로 흐르는 거 아냐? 은퇴를 앞둔 레슬러와 스트립클럽 댄서의 사랑이라. 그렇다, 그들이라고 해서 행복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말란 법이 없다. 다만, 그들이 벗어나려고 하는 수렁이 너무 깊을 따름이다.

랜디는 어느 시합에서 결국 무리 끝에 정신을 잃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심장수술을 받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담당 의사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almost died) 랜디에게 경고한다.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은 랜디는 곧 있을 아야톨라와의 20주년 재시합에 대비해서 몸만들기에 나서지만, 심장수술을 받은 몸으론 무리다. 캐시디에게 조언을 구한 랜디는 역시 가족뿐이라는 말에 거의 의절하다시피 한 딸 스테파티(에반 레이철 우드 분)을 찾아가지만, 그녀에게 문전박대당한다.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랜디에게 스테파티는 폭언을 퍼붓는다.

레슬러로서의 인생과 가족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잃어버린 가족애를 되찾고, 자신이 사랑하는 캐시디 아니 팸과의 로맨스를 위해 랜디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으로 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오로지 레슬링뿐이었고, 그를 구속하는 다른 책임으로부터 도망쳤었다. 이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퇴락한 영웅 랜디 역에 미키 루크 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이 든 미키 루크는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관객들의 흥분된 환호에 중독된 레슬러는 링 위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가족보다, 연인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몸으로 외친다. 현대판 로마의 검투사처럼 상대방을 향해 돌격하는 쇼비즈니스 업계의 전사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딸 스테파니와 모처럼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한 번의 실수로 날려 버린 랜디는 결국 목숨을 걸고 마지막 무대에 오른다.

방부제를 복용한 것 같이 나이를 먹지 않은 배우 마리사 토메이는 어느새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랜디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스트립댄서라는 밑바닥 인생을 그야말로 품위 있게 연기한 중견배우 역할이 그녀만큼 적격인 배우도 없을 것 같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연 배우인 미키 루크를 지원사격하는 최고의 연기였다.

캐시디의 조언으로 스테파니의 선물을 고른 랜디와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래트의 “Round and Round"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둘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모멘텀이라고 할까? 랜디에게 닫혀 있던 캐시디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특히, 랜디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스트립클럽에서 뛰쳐나간 그녀가 랜디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심장을 걱정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지만, 아야톨라와의 경기를 앞두고 건즈 앤 로지즈가 부른 “Sweet Child O'Mine"의 그 유명한 기타 리프가 흘러나오는 순간, ”오! 컴 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하진 작가처럼 <레슬러>의 연출을 맡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역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에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짜릿한 감동을 연출해낸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레슬링 포기하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지만 적응에 실패한 옛 영웅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게다가 과거의 영화를 되새겨 주는 헤비메틀이 전성을 구가하던 시절의 음악까지 곁들이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랜디의 마지막 다이빙은 전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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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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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도미니크 아벨, 피오나 고든 그리고 브루노 로미 트리오의 <룸바>(2008)를 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전작인 <빙산>(L'iceberg)(2005)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아주 어렵게 구해서, 원어로 자막도 없이 <빙산>을 접할 수가 있었다. 아쉽기만, 대사가 나오는 부분들은 모두 패스하고 봤다. <룸바>처럼 그다지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도미니크 아벨과 피오나 고든의 마임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지라 영화를 보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었던 것 같다.

패스트푸드 가게의 매니저로 일하는 피오나(피오나 고든 분)는 어느 날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깜빡하고 냉동고에 넣지 않은 물건 생각이 난다. 바닥 청소를 다 마친지라, 바닥에 신발 자국을 내지 않기 위해 천조각 위에서 낑낑대며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희화적으로 그려진다. 어이없게도 목에 두른 목도리 때문에 그만 피오나는 냉동고에 갇히게 된다. 




그 다음 날, 극적으로 동료 직원들에 의해 구조된 피오나. 하지만, 그녀의 남편 쥘리앵(도미니크 아벨 분)과 아이들은 그녀 없이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를 잘 보낸다. 아주 평온해 보이던 피오나 가정에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확실히 냉동고 사건 이후, 피오나는 변했다. 피오나는 침대에서 울먹이며 남편과 대화를 시도해 보지만, 진지해 보이지 않는 쥘리앵!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가족들은 깜짝 파티를 준비하지만,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자신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냉동고가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가게 앞에 서 있던 냉동고 트럭에 갇힌 채 어디론가 떠나는 피오나. 그 냉동고 안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들이 마구 나타난다. 알고 보니 불법체류자들과 함께하게 된 그녀는 “YES"와 ”NO"로 나뉘는 체험도 하게 된다. 한편, 또다시 피오나의 부재를 알아차린 쥘리앵과 아이들은 그녀를 찾아 나서지만, 그녀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 망연자실해진 아빠 쥘리랭을 대신해서 딸아이가 대신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피오나는 단체 관광객 틈에 끼어서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와 함께 바닷가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천국보다 낯선 마을에서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요트 “Le Titanique"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생활을 하는 르네(필리페 마르츠 분)다. 바다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르네는 세상사가 덧없기만 하다. 아내를 잃은 쥘리앵은 마침내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는데 성공한다. 고생 끝에 피오나를 집으로 데려 오지만, 그녀는 다시 르네에게 돌아간다. 




피오나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가 싶었던 르네는 돌멩이에 자신을 매달고 등대에서 삶을 마감하려고 한다. 그 때 등장한 피오나. 르네와 피오나는 요트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들의 뒤를 필사적으로 쫓는 쥘리앵, 과연 이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도미니크 아벨과 피오나 고든은 브루노 로미와 함께 연기는 물론, 직접 연출까지 맡았는데 그들은 내러티브 보다는 마임이 중심이 되는 행위의 미장센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하염없이 긴 롱테이크와 결합된 주연 배우의 연기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쥘리앵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한 피오나가 바닷가 마을에서 채소에게 물을 주는 장면을 보면, 르네가 바닷가에서 죽은 애인에게 줄 꽃다발을 들고 그녀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이고 화면을 들락날락하는 장면은 오해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잘못 읽은 콘텐츠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관객의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다시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등장해서, 비석을 껴안고 울부짖는 르네, 애달픈 감정의 고갱이가 바로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마을의 식당에서 르네를 발견한 쥘리앵은 가차 없이 그를 구타한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자신의 사랑만큼은 양보할 수 없노라는 보통남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정말 피오나를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 가겠다는 작정이다. 옥신각신 끝에 바다에 빠진 두 남자가 구명정 하나를 잡고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은 참 가관이었다.

한편, 피오나는 자신이 동경하던 ‘빙산’을 찾기 위해 르네와 무작정 떠나지만 그를 잃고 만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시 빙산을 찾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빙산과 조우하게 된 피오나, 하지만 빙산이 녹으면서 그녀를 다시 현실세계로 복귀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삼각관계 이야기를 브루노 로미 트리오는 잘도 풀어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일상과 매너리즘에 빠진 관계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피오나는 홀가분하게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찾고, 갯벌에서 흥에 겨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감정에 빠져 진흙에 엉망진창이 되면서도 즐거워한다. 연출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건 바로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까. 물론, 피오나의 남편 쥘리랭의 눈물겨운 순애보도 빼놓을 순 없다. 늘 하는 말이지만, 좀 있을 때 잘할 것이지.

불어를 좀 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이 영화를 보면서 딱 하나 그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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