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예나의 걱정이 사실로 되어 있었다.

집으로 들어서니 자기네 식구들이 안채를 차지하고 있다안방 건너방의 번듯한 살림가구는 그냥 뇌두고 허접스런 물건들만 이랫방으로 어지럽게 던져 놓았다.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섰는 연신에게 닥아온 건 애들 할머니.

내 아들하고 많이 얘기해 봤다. 걔는 너와 절대 헤어질 수 없다 하더만. 그렇다고 엄연히 애까정 딸린 눈 시퍼런 조강지처를 내친다 말가, 그도 안 될 말이고만, 우리 집안이 모여서 의논을 했다 아이가. 둘이서 여기 한 서방 섬기며 오손도손 살아라카이. 우리 늙은이는 내려가 시골살이 하려니 우리 걱정은 말더라고. “

마치 큰 맘 쓴듯 나직나직 부드럽게 말한다. 연신은 숨이 콱 막혀 내쉬지가 않는다.

얼른 냉수를 한 컵 마시고 겨우 진정하며 묻는다.

그 사람이 이렇게 하자고 했습니까 ?  공무원씩이나 되서 법률상 축첩은 안 된다는거 모른답니까 ? “

그라이 우리끼리 조용히 살면 되는기 아이가 ? 자네도 알고 봉께 의지가지 읎이 딸 하나 델고 사는구만, 서로 기대 감서 의논껏 살면 안 되겠나 ? “ 할메는 어설프게 웃는다

내 아들 갸가 자네를 무척이나 고이더구마. 쟈와 갈라선다고 야단했쌋는데 오매, 쟈가 애엄씨가 되어 씨알이가 먹히나 그나마 자네를 받아들여 함께 살겠다고 하는 것도 크게 양보하는겨

 

지는 그렇게 죽어도 못합니다.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 “ 연신의 음성이 높아진다.

부엌에서 은근히 엿듣던 애어메가 우르르 뛰어 나오며 갈구리 손을 들어 푸들푸들 떤다.

오매,오매 이 빤빤한 년 좀 보소. 남의 서방 뺏은 년이 아주 서방 독차지하겠다네.

내 그만큼이나 이해하고 양보해서 서방 양 쪽에서 이렁저렁 살락켓는데 이년 욕심이 무지하고만이라. “

난 당신 서방 가운데 두고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다 소용없으니 애들 데리고 어서 이 집을 나가세요. 안 나가면 경찰에 신고할 거얘요.”

연신도 이 번은 질 수 없다하고 야무지게 나간다.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두 여인은 주춤 겁을 먹는다  그들이 쫄은 틈을 타 더 강도 높은 엄포를 놓는다.

어디 주인 없는 틈을 타 안방을 차지하고 주인을 뜰아랫방으로 내 몰아 같이 살자 합니까 ? 내 보기에 당신네들은 흉악한 도둑들입니다. 어서들  썩 나가소 ! “

 

이튿 날 예나가 학교에서 돌아 온 후 , 엄마에게 편지를 한 통 준다.

아랫방 아저씨가 학교까지 찾아와서 엄마에게 전해 주라하데. “ 쌀쌀맞게 말한다.

이런 심부름 담부턴 절대 해쌋지 마라. “ 연신도 엄하게 말하며 편지를 받는다.

거기에는 다만 ,만나 할 말이 있으니 나오라며  장소와 시간만을 간단히 적어 놨다.

하여간에 한 번 만나  관계를 정리하고 이 집안에 주저앉아 대놓고 뻔뻔하게 나오는 그 가족들의 문제도 해결해야겠지. ‘

집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 조용한 다방에서 본마누라가 나선 분란 이후 처음으로 그를 대했다.

연신아 내 생각은 이랫다. 먼저 애엄마와 이혼하고 너와 결혼하려 했어 .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너도 애엄마를 봤으니 알거다. 얼마나 무식하고 사나운지 컨트럴이 안 된다. 그게 내 불행의 원인이다. “

그는 평소 안 피우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이 빨아 들인다.

왜 진작에 처자식이 있다는 말을 안 했어요 ? 그게 속인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인가요 ?”

나는 네가 너무 탐났어, 너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내가 유부남인 걸 알면 너는 벌써 도망갔을거니까. “

그럼 이제와서 어쩌자는 건가요 ? 당신은 생각이 있기나 한거얘요 ?”

좀 더 참고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 내 꼭 이혼을 성사시키고 너를 정식 내 아내로 모셔올께

모두 한통속 아닌가, 역겹다. 연신은 발딱 일어섰다.

내 마음에서는 이미 당신을 지웠어요. 헛꿈꾸지 말고 자식들에게 좋은 아버지나 되세요, 그리고 빨리 가족들 데리고 내 집에서 나가 주세요. 안채를 다 차지하고 꿈쩍 않는 당신네 가족들이 이해할 수 없어요. “

애엄마가 저렇게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내 원 참 ! “ 그는 무력하고 소심하게  말한다.

연신은 뜰아랫방을 치우고 예나와 함께 지냈다.

신고를 하면 그의 사회적 입지가  매우 곤란해지고 그 가족들을 쫒아내자 해도  극성스런 애엄마의 악다구니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더 견디기 어려운 건 밤마다 기어드는 그였다. 이상하게 가족들과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 안채에선 모르는 척 아무 기척 없이 조용하다. 하지만 귀를 곤두세워 이 방을 염탐하고 있겠지 ?

, 이건 아냐, 이런 추접한 일에 얽혀들 수 없어

견딜 수 없어 저녁이면 예나를 데리고 낮에 일하는 식당으로 간다. 영업이 끝나 문을 닫은 가게방에서 자는 것이다.

예나야, 미안해. 조금만 참아. “

엄마 난 괜찮아요, 엄마가 너무 힘들어 하는게 속상해. “

이제 엄마는 이 세상 살아 가는데 너 하나 뿐이야, 넌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거지 ? “

엄마, 나도 엄마 하나 뿐이야. 엄마에게 좋은 딸이 될께요 모녀는 딱딱한 의자를 길게 붙여만든 불편한 침상에서 소근소근 서로를  위로하며 손을 꼭 잡고 잠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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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신은 맥없이 짐을 쌋다. 당장에 입을 옷가지와 돈을 챙겻다.

예나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집은 돌아보고 싶지도 않고 미련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믿었던 사랑 , 여기까지인가 ?

이제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을 예고하는 싸늘한 바람이다. 낙엽들이 바람따라 이리저리 뒹군다. , 공부, 그보다 변선생과의 뜨거운 사랑으로  계절을 잊었었다.

엄마, 어디 갈려구 ? “

오랜만에 엄마 고향 가 볼려구

강남 터미널에 나가 상주행 버스표를 사고 , 버스에 오르기 전 오래 된 수첩을 찾아 동생 동연의 집에 전화를 한다. 마침 동연이 전화를 받는다.

웬일이고 ? 누이 무신 일 있나 ?”

아이다. 그냥 고향이 가고잡아 나왔다. 내 저녁 8 시 쯤 상주 버스터미널에 내릴테니 네가 쫌 나온나. 오랜만이라 내 통 지리를 모린다 아이가? “

‘” 누이가 여길 오겠다고요 ? 지금 때가 좋지 않은데 뒷소리는 우물우물하며 당황해 한다.

왜 무신 일인데 그라노 ? 내 네 집에 신세짓는게 싫나 ? “ 연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 진다.

아이, 됏심더 .내 시간 맞추어 터미널에 나갈끼고만 . 그 때 보입시다. “

몇 년만에 만난 동연은 몸집도 크고 중후한 모습이 나이보다  노숙해 보인다.

장가를 일찍 가서 벌써 두 아이의 아범이 되더니 꽤 으젓하구만

연신은 몇 시간 전의 노여움은 사라지고 장성한 동생을 흐믓하게 바라 본다.

누님 오시느라 고생하싰구만요. 아이구 예나도 많이 컷네. 예나 배 고프지 않나 ? 외삼촌이 밥부터 살꾸로. “

모녀를 이끌고 큰 한정식 집으로 향한다.

네 처와 아들은 다 잘 있고 ? “ 연신도 인사를 차린다.

우리사 머 잘 있습니다. 내년 봄이면 한 식구 더 늘어예

그러나 ? 잘됐다. 축하한다. 그라모 머 더 바랄게 있을라고 연신도 기분이 좋아진다.

입에서 살살 녹게 맛있는 불고기와 뜨끈한 만두국으로 배를 채운 모녀가 일어설 채비를 하는데 동연이 목소리를 낮추어 연신에게 말한다.

지금 누이, 읍내나 고향 마을에 가서 사람 눈에 띄는거 좋지 않습니다.오늘은 여기 가까운 여관에서 하룻 밤 유하시고 낼은 어서 떠나는기 좋을끼요

연신의 의문과 노여움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동연이 얼른 이어 말한다.

자세한 말은 자리를 옮긴 담에 하입시다 무겁고 신중하게 말한다.

 

여긴 지금 소문으로 말이 많십니다. 아마 이 지방 신문에도 한 분 낫을끼요.”

무슨 소문 ? “ 연신이 궁금하고 답답해서 묻는다.

우리 죽은 어메귀신이 매형을 잡아가는 바람에 매형이 그렇게 급살을 하싯다네요

뭐라 ? 그기 먼 말인교 ?”

 “ 사실 매형 돌아가실 때부터 그런 소문이 있었십니다 마는 근거 없는 헛소리로 웃어 넘겼지러.”

말을 끊고 잠시 누나를 본다. 숱 검은 눈섭으로 미간을 좁혀 걱정스런 표정이다.

이제 삼 년이나 지냈시니께 잊혀질 만도 하구만, 사실 한 달포 전에 어메 살인범이

잡혔어요. 다른 사건으로 걸렸는데 취조를 하다 보니 매형 사건도 실토를 했더만이라. 그 눔 입에서 이만석이 어메를 죽이삐라고 사주를 했다카데. “

 다시 누나 연신을 지긋이 바라 본다. ‘ 니는 뭐 좀 아는기 없노?’ 하듯이.

, , 예나아빠가 어메를 와 ? “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연신에게 동연은 곤히 자고 있는 예나를 눈짓하며 입술에 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둘이는 다시 목소리가 작아진다.

그 눔 말에 매형이 어메 미쳐 떠돌던 때 몇 분 만났다카데. “

아마 엄마를 타일러 집으로 보낼락 한게 아니것나 ?”

연신이 짐작으로 부드럽게 말한다.

아이라, 어메가 남자만 보면 이만석, 이만석 하고 쫒아갔던기라. 그라이 읍내에 도대체 만석이가 누군데 그에 미쳤노 하고 쓱덕였다네. 읍내서 꽤 유지로 알려진 매형이 똑같은 이름에 엄청시레 맴이 불편했겠지. 더구나 사위 장모 간 아인가

그래서 와, , 죽이기까정, 너도 그 눔 말을 믿나 ? 매형이 이미 저세상 사람이라고 덮어 씌우는가 ? 매형은 그럴 사람이 절대 아이다. “ 연신이 힘 주어 말한다.

내도 누나처럼 믿고 싶지, 그란데 이상한 건 매형의 형님이란 작자가  비록 죽은 동상이지만 동생을 위해 아무 변호가 없는기라.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지만 이렇게 추접고 무서운 살인 사건에 연루된 동생을 위해 오직 난 모르쇠하는거야. 우와, 동생 재산 독차지해 부자가 됐으면서 어쩌면 그리도 인정머리가 없노 ? “

동연은 정말 속 터지고 열 받아 주전자 물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신다.

그라고 누나 왜 고향 동네 가지 말라고 하냐면, “ 동연은 눈을 감고 침을 삼킨다.

모두들 누나를 욕하고 미워 해. 누나 보면 죽일락 할게다

 

, ! 그카는데 ? “

어메 남자를 딸이 가로챘다고, “ 동연은 한숨처럼 내뱉는다.

“ 택도 읎는 소리 마라. 동연아 이 무슨 해괴한 소리야 ?” 연신이 비명을 지른다.

동연은 또 예나를 가리키며 입에 손가락을 댄다.

누나 누나, 나도 알지. 누나의 배꽃 같이 순백한 마음을  정연이하구 내는  알지.“   동연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가득차며  연신도 가슴이 먹먹하다.

근데 누나야, 그 시댁네, 시아주버니라는 작자가 ,매형의 형이라는 눔과 그마누라가 그렇게 해괴한 이야기를 엮어 동네에 소문을 퍼뜨리는거야. 사람들은 또 그런 얘기를 좋아라, 입방아를 찧어대고, 누나 나도 여기서 사는거 괴롭다. 당장에 여기 뜨고싶지만 장인어른이 이 고장서 한 발도 못 움직인다카는데 데릴사위 내가 별 수 있노 ? 숨 죽이고 살 뿐이제.”

왜 니도 전답을 솔찮게 가지고 갔구만 기 좀 피고 살그라. “ 연신의 응원에 동연이 서글프게 웃는다.

그기 누나가 이만석씨에게 시집 가며 댓가로 받은 기 아니가 ? 그거 생각하면 내 피눈물 난다. 어찌 자랑스럽것노 ?”

밤이 이슥하도록 밀리고 막힌 이야기를 하다 동연이 집으로 가겠다고 일어선다.

한없이 서운한 연신의 맘이지만 붙잡지는 못한다. 그 서운한 마음을 알아 챈 동연이 말한다.

누나야, 여긴 잊어라. 모두 잊고 멀리 가그라. 손가락질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곳으로 떠나그라. “ 동연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에 잠긴다.

내 정연에게 말해 놨다. 누나 미국으로 델꼬 가라구, 아마 수속하고 있을끼구만. 연락 오면 퍼뜩 떠나그라. “

동연이 떠난 후 , 연신은 쑤세미처럼 뒤엉킨 머리 속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엄마가 이만석씨 때문에 미치다니, 그 엄마를 이만석씨가 사람을 시켜 죽이다니, 아니 절대 그럴 이가 없다 그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 연신은 세게 머리를 흔든다 머리 속은 더 엉망진창이다. 꼬리를 무는 해괴한 이야기들의 중심에는 연신 자신이 거기 있다. , 이번엔 연신이 미칠 것같은 혼란의 극치가 된다.

밤을 꼬박 지새운 연신은 예나에게 아침 밥을 사 먹이고 터미날로 나가 속초행 버스표를 끊었다.

예나야 바다 보러 가자. 엄마도 처음 보는 바다지만 아마 너도 보면 좋아할걸

예나는 불안하다. 그 낮선 사람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온 후 엄마는 이상해졌다.생전 돌아보지 않던 고향을 다 찾고 고향 마을을 자세히 돌아 보지도 않은 채 인젠 또 왠 바다인가. 엄마가 많이 심난하고 괴롭고 힘든 모양이다.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정작 할 말은 꾹 참는다.

엄마는 군것질거리를 한 봉지 사 들고 예나 심심하면 보라고 만화책도 몇 권 샀다.

 

바다는 정말 엄청나다. 넓고 시퍼렇고 또 파도소리, 새소리로 시끄럽다. 바다와 모래벌판을  휩쓸고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가워 금방 손발이 오그러든다.

엄마 춥다 민박 집의 따뜻한 방을 생각하며 엄마를 본다.

엄마는 찬 바람이 느껴지지 않는지 돌비석처럼 서 았다. 무척 슬퍼 보여 또 할 말을 꾹 참는다.  

연신은 대입 검정고시 공부할 때 달달 외었던 시를 생각한다.

<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

이제 많이 잊어 버렸지만  띄엄띄엄 기억 찾아 마음 속에 읊어 본다.

악의와 이기심, 치욕만이 가득한 저 바깥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다 .그냥 잠 들었으면 . 며칠 연신의 맘 속에 우뚝 불거진 고집이다. 그런데 아직 어린 내 딸 예나, 예나를 하며 연신은 깜짝 놀란다. 예나는 새파랗게 얼어 부들부들 떨고 있다.

아유! 미안해 엄마가 미쳐 몰랐네. 어서 집에 가자. “ 연신이 예나를 감싸안으며 걸음을 옮긴다. 예나의 반가운 음성이 들린다.

그럼, 엄마 오늘 당장 집에 가는거예요 ?” 연신은 민박집으로 향하며 딸에게 묻는다.

예나는 빨리 집에 가고 싶어 ?”

그럼, 엄마 벌써 5 일째나 결석해서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걱정해요. 나도 빨리 학교 가고 싶구요 예나는 뜸을 들여 망설이듯 엄마 눈치를 보며 말한다.

그리구, 그 사람들이 우리 집 몸땅 차지하고 살까봐 걱정돼요

하 하 ! 아무려면 주인 있는 내 집을 함부로 뺏을까봐 ? 예나 걱정꾸러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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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은 갖고 있는 옷 중 , 가장 최신의 화사한 옷을 골랐다. 특별히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손질하고 잘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고 핸드백도 갖춰 들고 거울을 본다.

서른 살이 조금 넘은  연신은 이젠 시골 때가 벗겨지고 적당하게 살집이 붙고 적당하게 균형잡힌 몸매가 활짝 핀 모란이다.

그는 눈 부신듯 연신을 응시한다. 잠시 동안 그는 여기가 어디인지 왜 와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머리가 텅 비었다.

선생님 음식 주문하셔야지요 연신이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꼬집는다.

찌릿한 감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에 선 웨이트리스를 쳐다보곤 메뉴 판을 받는다.

오늘은 우리 특별한 쌍칼잡이 식사다. 비프스테이크  이인분 주세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걸까 , 연신은 벅차게 용솟음치는 행복감에 살그머니 가슴을 누른다. 그렇치만 이렇게 맘 놓고 좋아라만 할 수 없지

선생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요. 만나 뵙게 해 주세요

그는 화들짝 놀란다. 취한듯 화사했던 얼굴에 짙은 구름이 낀다.

그래, 저 이를 처음 봤을 때는 늘 저런 얼굴이었어. 요샌 좀 표정이 환해졌는데.’

연신은 생각하며 이왕 말을 꺼낸 이상 망설이던 얘기도 쏟아낸다.

근데, 저어 아이 딸린 홀엄씨를 며느리로 받아 주실까요 ? 그게 걱정이 돼요. “

변기섭은 이마를 아드득 꾸기며 눈을 아래로 깐다. 투명한 유리잔 가득한 물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다. 한참 대답이 없다.

뭐 고민이 있나요 ? 말해 봐요

마침 아직도 철판 위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비후스테이크가 왔다.

갓 구운 구수하고 말랑한 빵이 담긴 바구니와 버터, , 그리고 수북하게 담긴 싱싱한 셀러드 .

한 상이 잘 차려진다.

연신아 어서 먹자. 먹고 힘내고, “ 그는 눈을 찡긋한다. 연신은 살짝 눈을 흘기며 나이프과 포크를 양 손으로 잡고 비후스테이크 해체작업에 들어 간다.

 

연신아 걱정 마. 부모님은 장성한 아들이 객지에서 하숙집 밥 먹고 사는 걸, 몹시 걱정하셔. 널 데려가서 보이면 무척 좋아하실꺼야. 우리 부모님은 아들 밥 잘 해 먹이고 뒷바라지 잘 해 주면 그걸로 만족하실꺼야. 니 음식 잘 하나 ? “

 

그럼요 선생님 서울 세련된 멋쟁이 음식은 못하지만 우리 고향 경상도 음식은 모두 잘 해요 . 장어탕, 육게장,

, 네가 차려주는 밥, 빨리 먹고 싶다

연신은 그를 본다. 손색없이 잘 생긴 얼굴, 강한 뼈를 유연하게 감싼 면도자국이 파르스럼한 턱선은 연신을 숨 막히게 한다. 그는 부자는 아니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공무원이다. 별 볼일없는 나를 몇 년이나 친절하고 열심으로  지도해 준 선생님, 아마 예나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 줄꺼야.

인물, 학식, 직업 출중하고 , 나이도 나랑 비슷하고 ,거기에 우리는 마그마 같은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어.

연신은 결심하고 말한다.

선생님, 우리 집 뜰 아랫방이 비어 있어요. 거기 들어 오셔서 하숙하세요. 물론 하숙비는 톡톡히 내시구요

뭐락 하나 ? 네 집에 들어와 살라꼬 ? 네가 밥도 해 준다꼬 변기섭은 깜짝 놀라 얼결에 고향 사투리 발음이 그대로 튀어 나온다.

직장까지 거리가 멀어 출퇴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마을 버스 타고 다녀도 되잖아요 ?

 

연신은 저녁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밥상을 차려놓고 시계를 본다. 배곺은 예나를 위해선 따로 조그만 소반에 차린 밥을 먹인다.

엄마도 나하고 같이 먹자아 예나가 혼자 먹기 싫다고 조른다.

난 선생님 오시면 먼저 드리고 먹을꺼야

피이, 엄마는 뭘 몰라 예나는 눈섭을 꼿꼿이 세우며 엄마를 똑바로 본다.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 “

그 선생님은 엉큼하단 말이야, 속이 꺼멓다는거야

어머, 얘가 무슨 소리 하는거야 뭘 보고 하는 말이야 ?”

그 사람은 솔직하지 못해 단언하듯 소리를 빽 지른다.

예나는 서둘러 밥을 먹고 후다닥 제 방으로 들어 간다. 예나가 제법 컷다고 질투를 하나.

연신은 쓰게 웃지만 한편 예나의 경고에도 신경이 쓰여  그이를 객관화시키며  꼼꼼히 점검한다. 그는 사소한 약속을 어긴 적은 없다. 또 연신에게 대학 진학을 목표로 꾸준히 공부할 것을 권하며 수학 문제지도 계획적으로, 단계적으로 만들어 지도해 준다.

그의 짝이 되려면 대학은 나와야지 않것나, 그나저나 어서 그이의 시부모님을 뵈어야 할긴데. ‘ 그기 맘에 걸리는구만 .오늘 저녁은 그 문제를 좀 더 확실히 해 두려 한다.

 

 

 

그 날도 연신은 식당 일을 일찍 끝내고 집에 오자, 그이의 방을 청소하고 때묻은 옷들을 걷어내어 마당 수도가에서 빨래를 한다. 속옷은 애벌 빨은 다음 뽀얗게 삶아서 햇빛 쨍쨍한 빨랫줄에 널어 놓으니 기분이 산뜻하고 흐믓하다.

그 때 철문에 달린 종이 뗑그렁 울리며 사람 기척이 난다.

예나 왔니 ? “ 하며 나가서 문을 여니 아이를 업은 젊은 여인과 늙수그레한 두 여인이 서 있다. 자세히 보니 애 엄마 뒤에 또 한 사내아이가 엄마 치마에 얼굴을 묻고 수줍게 서 있다.

여기가 변 기섭씨 하숙하는 집이우 ? 늙수그레한 여인이 나서며 묻는다.

, 맞는데요. 무슨 일로 찾아 오셨습니까 ? ‘

아직 문을 막은 채 묻고 있는 연신을 확 제쳐 밀은 것은 젊은 애 엄마다.

엄니,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당게요. 제가 다 알고 있구만이라. 저 년이 바로 애 아버지를 꼬신 여시랑께요. ‘그 여자는 보란듯 부끄럼 타는 아이 손을 부여잡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적의로 번득이는 눈초리가 사방을 훓는다 이윽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 앉아 악을 악을 쓴다. 등에 업은 아이까지 덩달아 쇳되게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이 저 것 좀 보소, 제 서방맨치로 빨래까정 저렇게 해 널었당게로. 아주 이것들이 살림을 차려 꿀떡 같이 살고 있구만이라아이구 억울해라 이일을 어짤꼬 ? 어쩔꼬

벌써 그녀의 입 가장자리는 게거품으로 허옇게 엉긴다.

이를 어쩌노 ? 기도 안 찬다. 이 보소, 남의 서방을 이리 가로채면 되는교 ? 이 아들은 변선생 아들이란 말이시. 난 그 어매고, 여긴 아 어맨게라 . 정말 몰랐던교 ? “

연신은 하얗게 질려서 이들의 모습을  크게 뜬 눈으로 똟어지게 바라 본다.

시어매의 역성에 힘을 얻은 애엄마가 벌떡 일어서더니 댓짜고짜 달려들어 연신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휘휘 흔들어 댄다. 힘이 여간 쎈게 아니다. 연신도 제법 한 힘하는 편이지만 지금은 너무 갑자기 당하는 사태에 속수무책이다.

연신은 바늘 끝 같이 따가운 시선을 느끼곤 우쭐 힘을 써 그 여자를 떼어 밀쳐낸다.

학교에서 돌아 온 예나가 이 난장판을 날카롭게 쏘아 보고 있는 것이다.

애를 업은 채 땅바닥에 주질러 앉았던 애엄마가 다시 벌떡 일어서며

내 이 연놈들의 세간을 빠삭빠삭 뽀사 버릴끼다 하며 우르르 마루에 올라서 안방으로 향한다. 그 때 , 여리지만 쇳소리 나게 쨍쨍한 목소리가 마당을 울린다.

이봐요, 아저씨 방은 거기가 아니고 저 방이얘요 하고 뜰아랫 방을 가리킨다.

애엄마와 할머니는 흠칫 놀라고 기세가 한껏 누그러진다. 그들이 그 방으로 물러 간 뒤 연신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이 사태를 정리해 본다.

그 이는 유부남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고 그 아내는 여간 아니게 사납고 무대뽀이다. ‘

예나는 아무 말 없이 뽀로퉁해서 제 방으로 들어가고 연신은 생각난 듯 밖으로 나간다.

동네 입구에 있는 전화부스로 가서 그의 사무실에 전화를 건다. 그는 외근 나가고 자리에 없다고 한다.

, 나는 어떻게야 되는거야 이게 뭐야 이마를 전화 부스 창에 콩콩 박는다.

어쩌면 좋아  난 너무 바보, 어이없는 실수를 한거야 머리를 더 세게 박는다.

연신아, 여기서 뭐 하는거야 반가운 소리, 그러나 지금은 한 없는 고뇌의 근거가 되는  원망스런 그 목소리. 등에서 목덜미로 찬바람이 소름끼치듯 지나간다.

당신, 뭐야 내를 속인거야 ? “ 그가 난해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 온다.

우린 이제 끝장이야 !   나 어떻게 살아 ? “ 연신이 그의 목을 끌어 안는다. 그는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된 채 연신을 마주 껴안는다. 둘은 서로 죽도록 껴안는다. 사방은 투명한 유리박스 , 그러나 둘은 세상을 잊는다.

아니, 이 것들이 여기서 만나 엉키고 설키고  있당게. 내 이상타 하고 나와 보니 --애시당초 이럴 줄 알았당게 벼락 같이 울려 퍼지는 애 어메의 고함소리, 그녀는 또 우르르 들어와 대짜고짜 연신을 끌어내어 갈구리 손으로 머리칼을 잡아  전화 부스에서 끌어내  바닥으로 팽개치고는 사방으로 외친다.

동네 사람들 나와 보드랑게, 이 꼬랑지 열 둘 달린 여시년이 남의 서방 꼬셔내어 살림을 차렸당게. 이 육실한 년 좀 보드라고 그 기세가 워낙 등등하여 연신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기섭은  망연실색 사색되어  보고 있다. 근처 주민들과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큰 구경거리가 난 듯 흥미있게 지켜 본다. 그가 한 박자 늦어 상황을 알아차리고 두 여자를 양손으로 질질 끌어 집으로 향한다.

아랫 채 방에서는 큰 소동이 났다. 밤 늦도록 애어매의 패악치는 소리 노파의 울음 섞인 꾸지람과 하소연간간이 젖먹이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그리고 그이의 낮은 , 아주 낮은 달래는 목소리. 그리고 자정이 넘으며 소음도 잦아든다. 조용해진다. ‘ 어떻게 달랫을까 ? 어쩌면 그 막무가내 아내를 품에 안아 잠 재웠을까 ? ‘ 상상만으로도 명치가 뻐근해지며 불꽃이 정수리까지 치솟아 뜨겁다.

이튿 날 이른 아침 일어난 연신은 밥과 국을 넉넉히 하고 예나를 학교에 일찌기 보낸 뒤, 그리고 아랫채 낮선 가족에게도 아침상을 보냈다.

그이는 일찍 직장에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밥을 다 먹은 후 애엄마가 빈상을 들어 연신의 부엌으로 들여 논다.

잘 먹었당게, 아우. “ 일단은 순하게 말했지만  다음 단호하고 고집스럽게  말한다.

우리 아이들과 여기에 눌러 살기로 했당게, 냄펜을 객지로 보낸 후 언제나 맴이 펜찮았는디 겔국에는 이 꼬라지 된게 아닝가. 그라니 자네가 물러나세.”

이 내용을 간밤에 의논한게 아닌가 ? 연신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이봐요, 여긴 내 집이얘요. 당신네들이 나가 살아야지요. “

아니 이 년이 안즉도 주뎅이가 살았당가 ? 내 서방 붙어묵는 년을 어예 놔두고 내가 나가 살꼬. 네 못믿어 난 여기 살란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

그 여자의 막된 언행은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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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은 다시 야학을 나갔다. 빈 교실에 책상 두 개를 맞대어 서로 마주 보며 수업을 하도록  철저한 일대일, 개인수업 구조 배열이다.

내가 이렇게 특별대우를  받아도 되나요 ?”

그럼, 난 너를 꼭 합격시키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거 아니냐 ? “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분히 의도된 자부심을 과장했다.

연신은 마주 앉은 변선생의 반 팔 샤츠 아래 뻗친 팔뜩에 시선이 갔다. 검붉게 그을린 근육질 팔뚝은 연필을 쥔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힘살이 꿈틀댄다. 역동적이고 강인한  그의 근육을 보며  문득 연신은 심장이 쿵하며 메아리처럼 온 몸을 저릿하게 한다. 이런 느낌 처음이다. 어느 사람 앞에서 내가 수줍어 했던가.

그는 연신의 눈길을 느꼈는지

요새 농개활 운동 때문에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의 농사 개혁을 지도하고  있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스프링쿨러 시설과  유기농비료의 배양이나 시비방법 등도 가르치고 또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하지. 농업도 지금은 아주 첨단 산업형으로 바뀌고 있어. “ 하며 자신의 검붉은 팔뚝을 쓱 훑는다.

연신의 심쿵은 아직 그메아리가 끝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 본다.

, 한눈 팔지 말고 어서 계속해야지

연신은 화끈하는 얼굴을 숙여 이제까지 보던 국어 교과서를 다시 들여다 본다.

 

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져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忍苦의 물이

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지은이  (        )        제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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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을 꼭꼭 채우며 연신은 한숨을 포옥 내쉰다.

 

.

 

고줄 자격 검정고시 결과는 국어, 영어, 사회, 과학 모두 합격인데 수학이 적정 점수애 미달되어 불합격이다. 변선생은 그래도 이 만큼이나 잘 했다고 칭찬이지만 연신은 또 한 해를 꿇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했다.

연신아, 오늘 특별히 내가 맥주 한 잔 살테니 잠깐 들어갈까 ? “

변선생은 길가 생맥주 집 간판을 보며 묻는다.

아니요, 집에 예나가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가 봐야 해요

틀림없이 연신이 변선생의 가르침과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연신은 언제나 그에게 고자세이다. 이상하게 그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별로 미안하지 않다. 그 또한 이렇게 도도하고 경계하는 듯 거리를 두는 연신의 태도를 별로 개의치 않는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뱃심인지 그는 초조하지 않다.

찬바람나게 돌아서서 걷던 연신이 문득 돌아 본다. 아직 그 곳에 서 있는 그를 보자 낭패했다는 듯 얼른 다시 뒤돌아 걷는다. 그도 천천히 연신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 날 밤 연신의 몸은 뜨거웠다. 온 몸의 신경이 올올이 곤두서 와일드켓처럼 어둠 속의 사방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유방이 긴장으로 단단해지고 유두는 꼿꼿하게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격젼의 준비를 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 느끼지도 못 했던 낮선 곳에서 뜨거운 물이 고이고 있다. 답답함을 견딜 수없어  속치마, 적삼 바람에 활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싸하게 스치는 밤의 냉기도 그녀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한달음에 대문께로 나가 문을 연다. 철문에 매단 종이 파르르 떨며 맑은 쇳소리를 내지만. 텅빈 골목은 적막하다.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문을 닫으려는 순간 검은 뭉치 하나 담벽에서 튀어나와 보자기처럼 연신을 감싸 안는다. 기체처럼  무게감 없이 접근한 검은 뭉치의 힘은 연신의 육신을 거의 으스러뜨릴 듯 강력하다. 코 속으로 강하게 스며드는 둘풀의 비릿한 진액 냄새. 낮익은 냄새. 냄새 속 환상으로 몽롱하게 녹아든다.

내가 그이를 마주 안았던가 ? 그이와 맨 살을 비볏던가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그는 어디로 갔지, 내가 꿈을 꾼걸까  연신은 하체를 적신 뜨거운 물에 잠겨 모든게 비현실적이다. 옆자리 예나는 곤하게 자고 있다. 꿈을 꾸는지 방끗 웃기도 한다.

그래 아무 것도 변한 건 없어. 내가 꿈을 꾼거야.

연신은 예나의 뺨에 입을 맞춘다. 예나도 잠결에 엄마를 꼭 끌어 안는다.

 

예나야, 엄마가 오늘 가구점에 가서 예쁜 침대 사줄테니 이젠 건너방에서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아가씨가 다 됐잖아

, 엄마 좋아요, 나도 이제 다 컷으니 독방이 필요해. 내 친구  민혜가 독방 쓴다고 자랑하더라구,  근데 엄마, “ 예나는 잠간 망설이며 엄마를 본다.

이상한데요, 밤마다 아빠 오셔요 ? “

연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이! 예나는 안 보고 일찍일찍 나가세요 ? 나 아빠한테 할 말 많은데

그는 밤마다 찾아 왔다. 문단속하고 불도 다 끄고 꿈 속으로 잦아드는 시간, 그도 살그머니 연신의 품 속으로 스며 들어 온다. 아무 말 없다. 다만 살이 부딪치고 비벼대고 빨아들이는 그 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연신은 들풀 냄새 가득한 벌판을 뛰고 구르며 그의 냄새에 흠뻑 취한다.

연신아, 나 이런 날을 몇 년이나 기다렸는지 아니 ? 몇 날 며칠이나 네 집 문 앞에서 밤을 새웠는지 아니 ?

그는 연신의 길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흐느끼듯  말한다.

아직 관능의 달콤한 여운 속에 나른한 연신이 졸린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낮에 한 번 만나요같이 점심 식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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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07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감하고 가네요. 건필하세요 ^^
 


예나가 일곱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연신은 사랑스런 딸, 예나의 머리를 빗어준다. 미리 준비해 둔 분홍  드레스와 짙은 핑크 코트를 입히고

어깨에 가죽 란드셀을 메워 준다. 오른 쪽 가슴에 < 이 예나 >라는 이름표와 그 아래에 길게 느러진 하얀 손수건, 영락없는 햇병아리 학생이 된 것이다.

“ 예나야, 이제 넌 으젓한 학생이야. 선상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 학생이 되야 하는기라. “

“ 엄마, 알았다카이. 이젠 쫌 그만 하그라 “

제 언니 가영이의 되바라진 말투 따라 예나도 말투가 고약하다.

그러나 새 옷 입고 학교에 간다는 설레임으로 반짝이는 눈과 벌름대는 콧구멍은  먼 초원을 향해 달리려는  어린 준마의 그 모습이다.

“ 가스나가 나대기는 , 얌전히 좀 기다리그라, 어매 옷 갈아 입고 나올게니.”

그 때 전화 벨이 울린다. 마을 금고에서 일하는 장주사이다.

“ 사모님, 큰 일 났어예. 사장님이 쓰러지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예 “

“ 음마 , 으찌 그리 되셨습니까 ? 어느 병원 가싰어요 ? “

“ 우선 가까운 늘사랑 병원으로 가싯습니다. 한 이십 분 됐실거로. “

“ 그걸 와 이제 알려주십니꺼 ? “ 연신은 소리를 빽 지르며 대답도 들을 새 없이 전화를 끊고


“ 할무이예 , 예나를 학교에 데리꼬 가 주소. “ 일하는 할매에게 예나를 부탁한다.

그리고  남편의 형인 시아주버님 댁에 전화한다. 동서가 전화를 받는다.

“ 행님 큰 일 났어예 예나 제아범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답니다. 늘사랑 병원이라 합디더. 지는 지금 곧 가 보꾸마요 “

연신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만석씨는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다. 서너 시간을 기다리느라 피를 말리는 긴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을 나오는 만석씨의 침상은 하얀 시트로 얼굴까지 모두 덮혀 있다.

주치의사 김형식 박사는 연신과 형님 가족 앞에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 죄송합니다. 병원에 왔을 때 이미 많은 피가 뇌 속에 차 있어 신속히 핏줄을 차단하고 고여있는 피를 뽑아내었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

만석씨의 사망 원인은 다량의 뇌출혈이라는 것이다.

오일장으로 치룬 만석씨의 장례기간 동안은 연신에게 시공이 아듣히 멀어져 간 무중력 우주 공간 같았다. 머릿 속은 텅 비어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모든 감각은 마비되어 느낌이 없었다. 곡기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여 홀쭉하고 창백한 볼에 눈만 퀭하게 번쩍일 뿐이었다.

“ 지어매, 내 숭늉을 진하게 끓였으니 한 모금이라도 마시게 “ 할매의 권에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듯 멍한 시선만 보이는 연신이다.

그런 연신이가 우주 속 무중력 공백 속의  현실에서는 엄청난 용틀임의 변화가 있는 줄, 어찌 알았을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장례 의식이 끝난 뒤, 연신의 집은 믿을 수 없도록 적막과 고요로 무겁게 가라 앉았다.개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고 이웃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연신은 기진하여 어두운 안방에 누워있고 예나마져 고양이 같이 가벼운 발자국으로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아버지의 흔적과 냄새를 찾는다. 할매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의 소음도 조심하며 가만가만 음식을 만들고 안 먹고 남은 숫한 음식을 공연한 죄책감으로 가슴을 조이며 몰래 두엄더미에 내다 버린다.


그동안 밖에서 시아주버니는 만석씨의 마을 금고를 차지하고 금융자산을 조사하여 명의를 바꾸고 그리고 상속인의 서열을 날조하여 많은 부동산을 합법적으로 차지한다.

연신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집 안의 식량이나 당장의 살림비용 마저 텅 빈 상태였다.

만석씨와 함께 산 이후로는 그가 항상 빈틈없이 만사를 배려해 주었으므로 연신은 일상 필요한 살림살이 비용이나 , 더구나 그의 재산 상태에 대해선  알 필요도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연신의 살아 온 생애 중 가장 안락하고 행복했던 십 년 세월 가운데는 만석씨가 있다.

만석씨는 언제나 연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완벽하게 감싸 주었다.

“ 아 ! 당신 , 나와 어린 예나를 두고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떠나셨습니꺼 ? “

그와의 이별 앞에서 절망과 아쉬움으로 피를 토하듯 울부짖건만 아무 대답이 없다.

당장에 살 길이 막막해진 연신은 생각다 못해  큰아주버님을 찾아 간다.

“ 예나 아부지의 많은 재산은 다 우찌 된 것입니까 ? 우리는 우찌 살아야 합니꺼  “

시아주버니 대신 동서의 싸늘한 대답이 먼저 날라 온다

“ 아니, 자네는 냄편 잃은게 며칠이나 됐는데 벌써 냄편 보다 재산 부터 챙기는가 ? “

하지만 시아주버님 , 선기침을 흠흠 하며

“ 걱정 마시요, 제수씨 , 내가 이녁  살도록은 돌봐 줄꾸마 “

진정 없이 허울  뿐인  무뚝뚝한 대답이다.

시아주버니가 내어 준 몇 푼의 돈을 손에 쥐고 나오며 연신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연신은 서울서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생 정연을 부른다.

“ 내 배운게 짧으니 으찌 알것나. 니가 매형의 재산일체와 그게 으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 봐 도고. “

정연은 누이의 부탁에 두 말 없이 내려 와 남겨진 서류랑 대조하며 실물을 살핀다.

며칠 후 전연은 누이에게 말한다.

“ 누나 정말 무섭십니다. 마치 매형이 이래 될 줄 미리 알고 꾸며낸 일처름 모두 치밀하게 처리됫십니다. 다만 이 집만이 남아 있지만 이것도 언제 날라갈지 모립니다. “

“ 매형과 누나의 가짜 인감도장도 모두 완벽하더만요. “

연신은 눈 앞이 캄캄했다.

‘ 내가 뭐 으쨋다고 ‘

남편 여읜 슬픔 이전에 내 처신을 찾고 살아갈 일이 사막이다.

“ 아주바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 내 남편과 그의 딸 예나의 재산 지분을 강탈하시면 안 되지요 “

연신은 다만 직선적인 항의 외에 방법을 몰랐다.

“ 에이 , 이 보게, 나는 자네를 내 동생 만석이가 엄청 싸고 도니 으쩔 수 없었고만 자네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한 일은 전혀 읎네. 자네 에미의 해괴한 소문이 내 동상을 얼매나 힘들게 했는지 아는가 ?  자네 복은 여기 까정인게 이젠 보따리 싸게. 한영이와 가영이는 우리 사돈과 잘 타협하여 갸들 사는데 지장 읎이 한 자락 떼어 줄테니 그건 걱정 말드라고. “

연신의 무지개  다리는 만석씨이고 이제 그 무지개는 스러져 갔는가 ?


동생 정연이가 하는 말이,

사귀고 있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정연은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녀를 따라 이민을 갈 것인가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 누나, 여기 있어봤자 , 똥밭이다 . 누가 우리를 옳게 봐줄까 말이다. “

“ 아직 그누마들의 손길이 안 간 몇 뙈기 논 밭이 있더라, 내 단대이 넘어가지 않게 손 봐 났다.

이걸 잽싸게 팔아 거두면 우리 미국 가서 자리 잡는데 도움이 될꺼로. ‘

연신에게 남은 건 소중한 딸 예나, 할매는 워낙 이 집 안에서 오래 살아왔으니 이 집 안의 소속이고 연신이 책임 질 일 없으니 그녀의  입지는 가볍다.


연신은 한밤 중에 그 곳을 떠났다.

예나에게 두툼한 겉 옷을 입히고 큼직한 가방을 든 채 가벼운 행장으로 야밤, 사랑하던 만석씨의 집을 떠난 것이다.하도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삼엄하여 슬픔에 빠질 경황도 없었다.

학에 국어 과목과 영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다.

본래는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인데 삼양동 산동네에 몰려 사는 저학력 계층에게 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많은 시간을 쪼개어 야학에 모이는 각종 사람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도시에 나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연신은  학력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동생 정연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누나 연신에게 간곡하게 총고했다.

이다호기심과 궁금함으로 이제 연신은 장로님의 기도 밀씀이 귀에서 멀어진다옆자리 인물에 급관심이 쏠린다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연신은 살그머니 실눈을 뜨고 옆자리를 살짝 훓어 본다.

‘어멋 ! 변기섭 선생님이 ! .< 연신의 봄 >


변기섭 선생은 연신이 다니는 야, 공부해야 해. 지금도 늦지 않아. 야학이나 학원에 다니며 뒤떨어진 실력을 보충하고 검정고시를 보고 고졸 자격증만 따면 대학 갈 수 있어. 누나는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아서 결심만 하면 잘 할 수 있어. “

삼양동 산동네는 무허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있고  주로 시골서 도회지로 나온 사람들이 처음 수월하게 자리잡는 곳이다. 전세나 월세가 비교적 헐했고 없는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사는 만큼 악을 쓰고 싸우는 소리도 자주 있지만 서로 도와주고 기대는 인정도 훈훈한 곳이다.

연신은 이 곳에  안방, 건너방, 손바닥만한 마당 건너 뜰아랫방까지  갖춘 조그만 집을 구입했다. 비록 무허가 집이지만 연신이 딸 예나와 함께 살기에는 넉넉한 공간이다.. 뜰아랫방이 맘에 들었던 건 거기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 수입이 불확실한 연신이 월세로 놓아 생활비에 보태 쓰기 위함이었다.

예나를 지역에 있는 학교로 전학시키고 연신도 시청에서 무료로 교육시키는 야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연신은 문맹은 아니어서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준비반으로 들어 갔다. 일년이 지난 후 이 시험에 합격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핸 준 이가 변기섭 선생이었다. 그는 연신이 고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 준비도 도와 주겠다고 계속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연신은 동네 어귀에 있는 한 식당에서 허드레 일을 하기 시작하며 그 주인의 인도로 교회에도 나가게 되어 바쁘고 고된 생활에 공부는 등한하게 되었다. 사실 연신이 결정적으로 야학을 멀리 한데에는 어느 때 부터인가 변선생의 눈초리가 끈적하게 변해있던게 무척 거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학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일상에 쫒기는 바쁜 나날이 거의 일 년이나 지난 거다.

 

이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왜 찾아왔단 말인가. ‘ 연신은 뜨악한 마음으로 눈을 내리깔고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예배시간이 끝난 후 교육관으로 이동하여 성경공부를 하는 곳에도 그는 따라 왔다. 연신은 시선을 돌려 그를 무시했다. 새침하게 대하는 연신에게 그는 말을 걸어오지 못 했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어린이 예배실에 들러 예나를 찾았다.예나는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제 열 한 살이 되어가는 예나는 다리가 길쭉하고 살빛이 하얘 금방 눈에 띄었다.

예나야, 오늘 목사님 설교 말씀 잘 들었어 ? “

엄마, 난 다행이야

? “

요셉은 형제들이 많아 질투와 시기를 받아 죽을 뻔했고 애급의 노예로 팔려 갔잖아 ? “

나도 사실 , 한영이 오빠, 가영이 언니한테서 많이 맞았다. 아빠가 나만 예뻐한다고 가영 언니는 나를 마구 꼬집기도 했어. “ 예나는 심각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 그랫구나. 왜 그 때 내게 말하지 않았어 ? 아빠한테 일렀으면 걔들 혼 났을텐데.”

엄마, 언니 말이 맞잖아 ? 아빠가 나를 얼마나 귀애했는지 언니 오빠들에게 미안했어. 그래서 그냥 맞았어. “

기집애, 네가 몇 살이나 됐다고 어린게 그런 생각까지 했니 ? “ 예나는 엄마 말에는 딴청을 하며

아빠 보고 싶어, 고향 가면 아빠 거기 있지 않을까 ?”

변선생은 아직도 모녀의 뒤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따라 오고 있다.

집에 도착한 연신은  예나에게 쥬스를 한 잔 주며 책상 앞에 않아 숙제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연신은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 본다. 역시 그는 거기 있었다.

좀 짜증스런 맘이 났지만 꾹 누르고 그에게 다가 간다.그 둘은 나란히 경사진 동네 어구 길을 내려 온다.

사 월 정오가 살짝 지난 한낮의 햇볕은 밝고 따사로우며 이 메마른 산동네에도 듬성듬성 봄꽃들이 피어 있다.

문득 연신은 옛날 푸른 들판에서 소에게 먹일 꼴을  낫으로  써억썩 베어 낼  때 강하게 풍기던 풀냄새를 맡는다. 쌩뚱맞게 이 냄새는 뭔가. 옆에 나란히 걷는 그 남자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결에서 그 냄새는 연신을 어느 한 때, 싱싱하고 달콤한 환상으로 이끈다.

이 냄새! ‘ 코를 흠흠대며  중얼대는 연신을 보며 변기섭은  샤쓰를 펄럭여 슬쩍 냄새를 맞으며 씩 웃는다. ‘ 오데콜론 바꾸기 잘 했다

그리고 그참에 용기를 내어 말한다.

연신아 고졸 검정고시 날짜가 정해 졌어. 7 월 말 쯤인데 아직 세 달이 남았으니 우리 다시 한 번 더 노력해 볼까 ? 그 말을하려고 널 찾아 온거야. “

연신은 지나친 걱정으로 그를 경계헸던 자신의 행동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믿어도 될까 ? 꺼려졌지만 시침을 떼고 관심 없다는 듯 심상하게 묻는다.

선생님 제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요 ?”

당연하지, 넌 틀림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찾아 온거야

 변선생은 열열하게 말한다. 

연신은 그의 과장된 어투체 피식 웃는다.

그도 뒤 늦게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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