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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좋은 때라 마음만 정하니 미국 가는 수속은  신속히 이루어져 처음으로 상면하는

사돈 아가씨를 따라서 미국 땅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지루한 절차를 끝내고 로비로 나오니 사돈 내외와 며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느리가 다가와 공손히 절하며,

" 어머님 연노하신 몸으로 먼 여행에 고생하셨지요?" 하고 말을 하나, 엄 노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듯 며느리 어깨 너머만 살핀다.

" 어머님, 아범은 거동이 어려워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시지요."

엄 노파는 안면이 생소한 사돈 내외와 어설픈 인사를 나누고 제 부모 따라가는 사돈 처녀에게

고맙다는 치사도 미처 못한 채, 며느리를 따라 차에 오른다.

엄 노파는 궁금한게 너무 많아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검은 안경으로 얼굴을 반나마 가리고

앞만 똑바로 응시한 채 운전대를 잡은 며느리의 골돌한 모습에 별로 대답할 분위기가 아니다.

' 조금만 있으면 만사 다 알아지것제.'  왠지 안다는게 무서운지도 모를거란 생각에 우선 머리를

비우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미국 땅은 아득하도록 넓다 . 산도 언덕도 없이 밋밋한 들판이

한참 펼쳐진가 하면 하늘을 가린 키 큰 나무들이 병풍처럼 길 양 쪽을 에워싸고 있다.

길 가 작은 나무에서 문득 작은 새가 포르르르 난다.내 고향에도 흔한 참새다. 그런데 여기 참새는

머리 꼭데기에 빨간 깃털이 달려 앙증맞고 귀여워 노파는 잠시 걱정을 잊고 미소 짖는다. 

다시 초원이 이어지는데 여기저기 흰 천을 펼친 듯 무더기로 야생화가 가득하다.

무슨 꽃이 저리도 무성히 자라는고?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 아 ! 망초 꽃. 고향의 산야에서도

지천으로 널린 꽃이 여기서도 저리 흔하구나. 생각하며 다시 시름에 젖는다.

저승 문턱에 지천으로 피어 있어, 저 쪽 피안으로 넘어가는 영혼들에게 이승의 기억을 깡그리

잊게 해준다는 꽃.하기사 이승의 고락과 인연을 모두 잊어서야 망자는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피안으로 향하는 나룻배를 타겠지. 이곳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 삶과 죽음이 있고, 삶의 고뇌와

행복이--- 하는 생각에 이르자 노파는 또다시 등골을 달리는 써늘한 한기에 오싹 몸을 웅크린다.

허지만 다시 노파는 ' 아니 절대 놀래지 않으리라. 닥치는 일에 결코 물러나지 않으리라....'다짐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뻑뻑한 눈을 감는다.

차는 여염집이 아닌 큰 병원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건물 안 로비와 복도에는 갖가지 색갈 피부의 사람들이 오가나, 발소리도 안나게 조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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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르릉 때르릉 " 전화 벨이 울린다.

' 누구여? 안적 식전인데' 딸들은 지금 이 시각 즈이 남편 , 애들 학교 보내고 출근시키랴

바쁠긴데,  대체 누굴꼬?' 하며 엄 노파는 수화기를 집어 든다.

" 여보시요?" 댓구하자, 저 쪽에서 잠깐 낮은 숨소리가 나며 잠잠하다.

" 아니, 누구시유? 전화했음 말을 해야지" 하고 재촉하자, 망서리며 묻는다.

" 엄 선녀씨 댁 맞습니까? " 이상하게도 매우 낮고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노파는 갑자기 심하게 툭탁이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묻는다.

" 너 명호,  명호야?" 반응이 없자, 속삭이듯 다시 묻는다. " 명호 맞지야?"

저 쪽에서 흐느끼듯. 말소리가 목구멍으로 기어들듯

" 네, 명호입니다. 어머니. 저를 금방 알아 보시는군요."

" 그럼 이 어미가 널 어찌 잊겠느냐? 지금도 널 생각하고 있었어야. 이 무정한 눔아."

끝으로는 사설조의 울음이 묻어난다.

네 놈이 이십육 년 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를 죽은 자식으로 잊으라고 울부짖으며

떠난 너지만 이 어미가 어찌 너를 잊을 수가 있겠느냐?목울대를 비집고 가득이 북받치는

한숨같은 넋두리를 지그시 삼키며 신중하게 묻는다.

" 게가 어디냐? 왜 어미에게 당장 오지 않고 전화인게냐?"

" 어머니 죄송합니다. 여기는 미국이얘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 건강은 어떠세요?연세도 많으실텐데요."

이것아 어미가 그렇게 궁금하면서 이제사 전화냐? 하는 원망이 쏟아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 오냐, 어미는 잘 지낸다.편하게 잘 지내니 건강도 괘않다. 근데 너는 무고하냐? 처자식도 잘

거느리고?" 명호는 " 네" 하고 애매하게 대답을 끌다가 " 어머니," 하고 부른다.

" 여기로 한 번 오셨으면 하는데요. 오실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음성은 어둡고 침울하며 쥐어짜듯 나즉하고 또렷했다.

엄노파는 등골을 달리는 서늘한 한기를 떨치지 못한 채 " 왜 무슨 일이 있는게냐? 어서 말을 하여라."

"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저 뵙고 싶어서지요. 구경삼아 오세요."

태연한 척 딴청을 부린다.

엄노파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 오냐, 내가 너를 기다려 이 때까지 살아 왔거늘

너를 보러 지옥엔들 못 갈까?네가 나를 보고잡아 부르는데 가야지. 암 가고 말고,

뱅기 타도 끄떡없다 가마, 곧 가마."

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지금 처제가 한국 나가 있으니 필요한 수속이랑 해서 잘 모시고 올겁니다.

곧 뵈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요' 의 여운이 좀 길어지며, 전화 속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꿈을 꾼 양 . 믿기지 않는 듯 사방을 새삼 두리번거리며, 얼빠진 듯 서 있는 노파의

어깨 너머로 아침 해가 화사하고 싱그럽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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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노파가 잠을 깼을 때는 아직 이른 새벽.

늘 같은 시각이다. 노파는 하앟게 세어 성긴 머리칼을 손갈퀴로 대충 쓸어 넘기며

뒤란 우물가로 나왔다. 하얀 김이 뽀얗게 솟아 오르는 우물 속에 두레박을 넣어 맑은

물을 찰랑찰랑 길어 올린다. 우선 달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머금어 입 안을 가신 후,

주름 진 얼굴을 뽀득뽀득 소리나도록 말갛게 씼는다.

두 번 째 떠올린 물은 조루에 담아 장독대 옆으로 가꾸어 놓은 꽃 밭에 뿌린다. 거기에는

키 순서대로 젤 앞에는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따알리아, 접시 꽃들이 새벽 이슬에

함초롬이 젖은 채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하다. 노파는 조루를 높이 쳐들어 듬뿍듬뿍 물을

준다. 빨갛고 노란 꽃 잎, 푸른 잎사귀 위로 또르륵 또르륵 굴러 떨어지는 수정 물방울들이

언제나처럼 가슴저린 그리움으로 젖어든다.

분홍 꽃 송이 조롱조롱 매달고 낮으막한 봉숭아는, 밑으로 아직 어린 두 딸 애들같고, 물 맞을

때마다 우쭐대는 따알리아 접시 꽃은 쑴벅쑴벅 잘도 크던 아들들 같다. 영감이 있고

오남매가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시끌벅적 살 때는 하루하루를 꾸려가기가 참으로 바쁘고

살기에 골몰했었지.

먼저 저 세상 떠나버린 영감과 두 아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찌르는듯 생생한 아픔이나--

노파는 새삼 고개를 저으며 털어버리고 만다.

두 딸은 제각기 좋은 서방 만나 잘 살고 있으니 감사하고, 그리고 세 째 명호가 아직 있다.

오랜동안 못보고 있으나 언젠가는 기어코 이 어미를 찾을 것이다.

' 암 오구 말구' 엄노파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 째 물을 길어올려 걸레를

힘차게 빨아 헹구어, 마루사이로 둔 건너 방으로 간다.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고 구석구석 깨끗이 닦는다. 빈 방인듯 냉냉한데 매일 닦아

반짝이는 장판 방이며 오래된 서랍장과 책상이 누군가를 기다리는듯 긴장되어 있다.

 낡아서 모서리가 둥굴고 칠도 벗겨져 수없는 흠집과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책상을 닦으며

' 이게 우리 집 우등생을 길러낸 책상이여. 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상타고 대학까정 다닌게여.'

하며 장한 명호의 학생 때 모습을 떠올린다.그러나 지금 노파 꼍에 없는 명호를 생각하며 자기

최면을 걸듯 ' 암1 올거여 오구말구, 그러니 언제라도 오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치워놔야

되지 않것어? ' 또 다짐하며 옷소매를 걷어올려 가늘게 드러난 팔뚝에 울근불근 힘줄이 솟도록 

힘차게 닦고 또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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