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고향                                                            



 고향을 생각하면 먼저 낡은 흑백사진 속, 한 가족이 떠 오른다.두텁고 거친 모직물, 더불버튼 료마이 쟈켓을 입고 정중앙에 자리해 근엄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아버지와 옆으로 정수리 위 반듯한 가리마와 가즈런한 눈섭, 흰 얼굴, 흰옷차림 어머니가 있다. 앞 줄 의자에는 성긴 흰수염 할아버지와 오목진 입매,볼이 홀죽한 할머니는 하강한 신선 같다. 그 주위를 위성처럼 둘러싼 우리 육남매, 할머니 무릎 위에는 어린 내가 앉아 있다.

예뻣던가, 귀여웠던가 희미한 기억에 검은 통치마 시무룩한 얼굴로만 상상된다.

엄격한 집안 식구들의 위계질서 속에서 내 편안한 안식처는 오직 할머니의 치마폭 속에서였다. 할머니의 염랑 주머니에서 엿도 나왔고,떡도 나왔고 특별한 소꼽살이 빨래방망이도 나왔다. 내 어린 시절 빨래를 많이도 했다. 방 한 구석에서, 손에 닥치는대로 수건과 양말 손수건들을 몰아서 주무르고 방망이로 두드리고 그리고 비틀어 짰다. 엄마들 하는대로 쉭쉭 힘 돋구는 소리까지 내면서.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할머니 임종시에도 할머니 이불 속에서 같이 잤다고 했다. 할머니 운명 후 조용히 안방으로 옮겼다지만 나는 할머니의 따뜻하고 아늑한 품만 생각난다.


 내 동네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고 그 건너 맛맛한 작은 동산이 있었다.그 등 넘어 공동묘지가 있어 아이들에겐 금기지역이었다. 가장 공포의 핵심곳은 생여도가였다.그곳은 동네 상사가 있을 때 필요한 상례 물품을 공동 저장하는 일종의 마을 창고인 셈인데 우리는 그곳에 늘 귀신이 죽치고 있는듯 엄청나게 두려워 했다. 피치 못하게 그곳을 지날 땐 멀리 돌아 진땀을 흘리며 뛰어야 했다. 여름 밤, 마당에 쑥불을 놓고 어른들 입담에 잠이 가물가물할 때 공동묘지 뒷등성에서 '어흐잉께갱 어흐잉께갱" 하는 요사한 소리가 들린다.

"할머니 저게 무슨 소리야?" 묻노라면

"아이구야, 여우가 애기 무덤 파먹을려고 내려 왔나부다" 하며 어른들은 가장 최근 장례를 치른 무덤에  대하여 수근수근 걱정들을 한다. 아이들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후다닥 일어나 아직 한낮의 열기가 남아 후덕지근한 방안으로 들어와 버석거리는 홑이불에 코끝을 묻는다.


 아직 일곱 살 어린애에게 시오리,학교 길은 너무 멀다. 내를 따라 동네를 벗어나 조나 수수,콩밭이 이어진 밭길을 건너고 억센 풀이 종아리를 간지르는 농로를 지나 번화한 읍내로 들어서면 또 무서운 경찰서 앞을 지나야 했다.보초 선 순경 아저씨가 한눈 파는 사이 잽싸게 그 앞을 뛰어 지나면 건조한 사각형 면사무소 건물이다.면사무소를 싸고 도는 담벼락을 거쳐 읍내를 벗어나면 비로소 멀리 학교가 보인다. 학교는  언덕길을 한참 올라 높은 지대에 있다. 그래도 언덕 위 학교를 보면 다 온 느낌이 들어 마음이 놓인다.씩씩거리고 뛰어 올라 학교 건물 기다란 복도에 다다르면 그때사 까먹고 하지 않은 숙제가 생각난다. '아 선생님이 아침 첫 시간에 숙제 검사하는데'생각이 미치면 그대로 복도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공책을 꺼낸다.연필에 침 발라가며 개발새발 꾹꾹 눌러 공백을 메꾸곤 이젠 당당하게 자리에 가 앉는다.

그래도 봄 가을은 친구들과 오가며 장난치는 재미라도 있지,겨울은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다. 눈이 대지를 뒤덮어 길이 안 보이고 칼바람마져 얇은 옷을 할퀴면 절로 눈물이 난다. 집을 봐도 멀고 먼 길, 학교도 멀기만 한 길, 중간에서 발에 걸친 뻣뻣한 고무신은 눈길에 자꾸 미끄러져 철버덕 벗겨지고 어린 꼬마는 마냥 울음이 터진다. 함께 가던 언니가 손을 잡고 끌어주어 억지로 억지로 가는 등교길, 눈물 콧물로 범벅되고 얼어 굳어진 몸으로 들어선 교실, 아 담임 선생님은 벌써 오셔서 장작불로 뜨겁게 난로를 달구어 놓았다.

"성애야 어서 와라,춥지? 우선 와서 난로에 손을 녹이거라"

선생님 말씀에 이미 마음은 스르르 녹아 들었다.


 동네 어구에 시골스런 예배당,종각에선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뎅뎅 울렸다. 우리 어린 것들은 뜀박질로 교회를 향해 달린다.엄마가 헌금하라고 주신 일원짜리 지전을 손에 꼭 쥐고서.

유년 주일학교를 초딩시절 꾸준히 다녔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성경은 그때 배운 것이 그대로 밑바탕 지식이다.찬송가를 고래고래 소리 높여 부르고 요절을 경쟁적으로 외우고 성경 말씀을 듣고,무한 상상을 펼치기도 했다. 참 열심히 다녀서 졸업장과 상장도 탔다.

중학생이 된 담에는 학생회에 들었다.학생회에 든 다음에 나는 갑자기 외모에 신경쓰고 동작도 조신한 여학생이 되었다.학생회 회장을 남몰래 좋아했던 것이다. 나보다 삼 년 위 조광원은 눈빛이 서늘하고 깊으며 대체로 조용했다. 우리 또래 사이에선 그가 같은 동급생 원미애 언니와 사귀는 사이라고 속닥거렸다.그런들 어떠랴,둘은 회장과 부회장으로서 진지하고 겸손하며 신앙심도 깊어 학생회를 잘 이끌어 갔다.학생회 예배 때 가끔 광원오빠가 짧막한 설교를 할 때면, 버릇처럼 사춘기의 까칠한 턱수염을 손바닥으로 슬슬 문지르며 바리톤의 낮은 목소리로 하는 말이 너무 멋있어 가슴을 울리며 호감은 더욱 짙어져 갔다.

내가 중 삼학년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가며 가장 서운한 것은 광원 오빠를 못 만나는 것이다.이왕 떠나게 된 마당에 오빠에게 내 마음만이라도 전하고 싶어,뭔가 특별한 이별을 계획해 보았다.

이사하기 전 마지막 수요일 저녁 예배가 끝난 뒤, 용기를 내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빠, 나 혼자라 밤길이 무서운데 좀 바래다 줬으면"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 결심한 듯 앞장을 섰다.밤하늘은 밝은 달빛으로 온 세상이 금가루를 뿌린듯 황홀하고 별들도 더 반짝였다. 나는 심장이 부풀어 가슴과 목을 넘어 입까지 차오른듯 말문이 막히고 숨도 못 쉬도록 쫄아 있었다. 얼마의 침묵이 이어지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 너네 집 서울로 이사간다며?"

"네 요번 토요일 떠나요"

"서울 가 살아도 가까운 교회 꼭 다니며 신앙을 잃어선 안 된다"

"네" 하는 내 순한 대답 뒤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있다.

"오빠 원미애 언니와 결혼도 할 거얘요?" 가슴 속 깊이 묻었던 의문이 풀썩 드러난 것이다.

앞서 가던 그가 획 돌아섰다. 나는 겁에 질려 우뚝 멈춰 섰다.

"성애야,우리는 아직 할일이 많은데 그런데 관심을 둘 새가 어디에 있겠니? .먼저  믿음을 굳건히 하고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게 중요해. 그리고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선 잡념에 빠지지 말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

내가 의도했던 대답은 아니지만 그 뜻은 알송달송하고 나는 마냥 부끄럽고 무안했다.

"너네 집에 다 왔구나,언젠가 만나게 되면 서로 좋은 모습으로 보자꾸나"

조광원은 입꼬리를 조금 올려 희미한 웃음을 띄운 후 돌아서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좋았던 오빠야, 좋았던 내 고향아 모두 안녕,내 행복한 어린 시절도 함께 안녕.'

그렇게 고향을 떠나며 그 후 나는 고향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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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오늘>                                                                  


  오늘,

처음 만나 반가운 인사.

지중해 깊은 불루, 드넓은 하늘

푸르른 대지 사이로

설레임 가득 꽃향기.


 어제는 잊었고

내일은 알 수 없는

오직 앞에 확실한 오늘

반짝이는 금강석으로

품 안에 왔다.


 한아름 끌어안은

소중한 선물로

부뜨막에서 요리를 한다.

소금 한 줌,

참기름 한 숟깔.


 가족과 함께 먹는

일용한 양식

더도,덜도 아닌

꼭 그만큼 분량인데

느끼는 허기.


 노을따라 부스스

떠나려는 손님,

옷자락 잡지만

손가락 새로 흩어지는 모래알

끝내 아쉬어 등불만 지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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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세인 이부생 노인은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

바램이 있다면 한 10 년 쯤 더 사는 건데 이는 매일 새벽 잠이 깨면 간밤 잘 자고 눈 뜬 것에 감사하고. 십년 쯤 더 살게 해 달라고 신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그건 하나님 섭리에 맡겨 버렸다. 그리고  지금 주어진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며 현재 삶에 집중했다.


 유난히 좋은 날이다. 겨울이 오기 전 하나님의 은헤로운 마지막 기을의 햇살이 띠시롭고 그 빛나는 햇살에 게으르던 벼이삭의 알이 알차게 여물고 과육의 달콤함,콩이나 팥이 깍지 안에서 바스락대며 터져 나갈 날을 초조하게 준비하는 자연의 혜택이 대기 안에 가득한 날.

 이부생 노인은 오늘 유난히 마음이 들떠 있다. 그녀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까,  과거 수학과 교수로 오래 재직하던 시절부터 습관이 된 수치로 예상할 때, 예쓰와 노우의 확률은 50:50으로 잡아 본다. 이 노인이 인생을 살아오며 여성에게 프로포즈를 한 적은 대학 시절에 한 번 있었고-물론 그 사건은 이국, 촌구석 한국 학생의 어설픈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번이 두 번 째의 서바이벌이다. 그는 물론 결혼도 하고 사십 여 년 긴 부부생활 중 두 아들을 낳아 소위 말하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 왔지만 아내와의 사이에선 이토록 애틋하고 가슴 설레인 여운이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조그만 오차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수학과 전공 학문에 시달리고, 가족에게는 책임감과 부담 등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쵸이,그녀는 예뻤다.생태적으로 70 넘은 나이지만 하얗고 주름살 없이 매끄러운 피부하며 의상도 언제나 새것인듯 새것 아닌, 눈에 거슬리지 않는 세련된 차림, 그녀의 목소리는 또 얼마나 고운가. 낮으면서 카랑한 목소리는 언제나 이 부생 노인의 청각 신경을 끌었고 기분이 좋을 때 그녀의 살짝 굴곡지는 비음은 노인의 오랜 동안 마르고 갈라진 심장의 율동을 자극하고 촉촉하게 따사롭게 녹여  주었다. 저런 매력적인 여인을 먼 데서 바라보기만은 너무 안타깝다. 한 번 터놓고 사귀어 보고 싶다. 젊은이들 처럼 데이트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함쎄 먹고 또 같이 먼 거리 여행도 한다면 ,하는 노인의 소망은 나날이 부풀어 가는 것이다.

 노인은 수양딸 삼아 가깝게 지내는 안나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았다.

" 안나, 네가 그 분에게 내 마음을 전해 줘.만약 허락해 준다면 나는 그이를 정말 행복하게 해 주겠어."

안나는 노인의 하소연을 듣자 우선 눈을 하얗게 흘겼다.

" 파파, 이 안나만으로는 부족한가 봐요, 서운해.---- " 하고 한 참 뜸을 들이다 한 숨을 포옥 쉬며

" 하지만 우리 파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사랑의 메신저가 되 드릴께요"  쿨하게 한 눈을 깜박하곤 일단 기다려 보라고 했다.

기다려 보라던 날짜가 오늘이다. 아, 어떨까? 부정적인 예측으로 미리 우울해지기는 싫다.

  안나로 부터 문자 메세지가 왔다.

< 파파 ,안 됐지만 단념하세요 >

비록 50%의 인파시블을 예상했던 바이지만 파시블리티 50%가 엄청나게 진동했다. 노여웠다. 나, 이래뵈도 꽤 괜찮은 남자야.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안다면 나를 이렇게 단칼에 거절하지 못할껀데.

이부생 노인의 생애에 흔치 않았던 타인으로 부터의 거부는 이노인의 자부심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1930 년대 한국의 시골 구석 촌에서 태어난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어려서 부터 인물이 좋았고 영리하여 부모로 부터 또 동네 사람들에게 까지 사랑받고 소중하게 키워졌다.고교 재학 중 육이오사변이 일어 나 전쟁에 참전, 치열한 전장을 누볐으나 언제나 총알이나 파편은 그를 피해 갔다. 아니 그가 미리 위험을 감지하고 스스로 위기를 재빠르게 모면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태생적으로 머리 회전이 빠르고 동작이 민첩했으니까. 한국전이 종전되며 그는 미군 부대 카츄샤로 복무했다. 만기 제대를 하거나 또는 만년 상사로 말둑을 콱 박아 다른  이로운 병과로 갈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카츄샤로 전역하여 미장교 오피스에서 통역 일을 자원하였다. 거기서 영어를 배우며 미국으로의 유학을 꿈꾸었다. 대망의 꿈이 이루어져 도미했지만 대학에서의 학업 생활도 만만한게 아니었다. 그는 닦치는대로 허드렛 일을 하여 의식을 해결하고 역경 속에서 그래도 치열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분야는 수학이었다.수학은 비교적 경쟁력이 낮고 언어 실력도 크게 요구되지 않아 그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의 전공이었다. 뛰어난 수리 능력과 노력으로 학사 코스를 무난히 마스터하고 석사와 박사는 크게 돈 들이지 않아도 장학금으로 이럭저럭 메꾸어졌다. 박사학위를 딴 후 그는 불안했던 보따리 강사 시절을 떨치고 대학 정교수로 미국에서의 첫 번듯한 직업을 갖었다. 그 때가 1972 년 그의 나이 41 세.

' 나, 그 힘 들었던 세월을 잘 견뎌 대학 교수를 40 년이나 해 온 사람이야. 나를 뭘로 알고 '

 그러나 그는 문득 그녀 또한 어려운 한국의 역사를 살아 왔다는 생각에 애써 노여움을 누르고 그녀의 인생 역사가 궁금해졌다. 그는 핸폰을 들어 안나에게 전화를 넣었다.

" 헤이 안나, 지금 뭐 하고 있어? 지금 통화할 수 있어?"

" 하이 파파, 좀 늦은 시간이지만 파파가 딸에게 할 급한 말이라면? 오케이" 안나의 목소리는 낭낭했다.

" 미세스 쵸이가 왜 거절했어? 너한테는 솔직히 말했을텐데. 내가 알고 싶어.이유를 말해 봐"

"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어요. 파파는 너무 나이가 많아서 믿고 의지할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거얘요. 이해되지 않아요? 물론 초이도 젊다고 말할 순 없지만 파파와는 너무 나이 차이가 많다는 건 맞는 말 아닌가요"

안나는 마치 초이의 부정적인 대답을 즐기고 있는 듯 달콤한 소리로 느긋하게 말했다.

" 흥 나는 앞으로 10 년은 버틸 수 있어, 년금으로 매달 $5000, 싫컷 쓰고도 남는 돈이 은행에 쌓여있고 커다란 집에다 버지니아 해안의 발라, 너도 알다시피 우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어. 나는 지금도 내 건강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항상 운동과 식이요법을 착실하게 실천하고 있어. 아마도 그 여자는 나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일꺼야" 열내서 하는 노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둥,안나는 '으흥,으흥' 헛대답만 하다가

" 파파 다른데서 전화 들어 와요. 다음에 얘기해요" 하고 끊는 것이다.

이노인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체력 단련을 위해 각종 기계들이 들어선 지하실로 내려가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과연 그는 척추가 곧게 뻗어 등판과 허리가 꼿꼿했고 두 다리의 근력도 단단하여 웬만큼 자신을 갖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름 잘 살아온 인생 아닌가.


   이 부생 노인은 그레이 모직 줄 선 바지에 매치가 멋진 체크 스포츠 쟈켓, 좁은 챙 스캇치 풍 모자로 잘 차려 입고 유리창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커다란 독립 빌딩으로 들어섰다. 시니어 센터는 늘 개방돠어 있다.푸론트에 있는 무인 기계에 아이디 카드를 입력하면 그 안의 모든 시설물을 자유로히 이용할 수 있다. 교육관에는 항상 노인들을 위한 평생 교육프로그램이 운영되고 ,각자 취미를 활용하는 특기방, 그리고 여럿이 모여 편하게 담소하는 로비가 있고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면 아침 점심 저녁 별, 각종 메뉴를 저렴한 가격으로 마음껒 골라 먹을 수 있다. 오래 살아 온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무한 여유 공간이다.

' 지금은 쵸이여사가 라인댄스하는 시간이겠지, 거기로 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꺼야' 이부생 노인은 당당하게 걸어 음악이 크게 울려나오는 자하 2 층 체육관으로 갔다.거기에는 실버 여인들이 티샤쓰와 쫄바지를 입고 능동적인 율동에 열중하고 있었다.과연 초이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팔 다리 동작을 크고 활발하게 움직이 며 열심히 도취해 있다.양 팔을 허리 골반 위에 걸치고 살랑살랑 회전하는 그 모습은 --- 이 노인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아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다. 열기로 가득한 분위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여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자신에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뚜벅뚜벅 걸어가 그녀 앞에 버티고 섰다. 놀란 그룹 여인들이 동작을 멈추고 그에게 시선을 꼿으며 급히 음악도 중단됐다.

" 초이여사, 내가 아내를 사별하고 15 년을 견디며 살아 온 건 아직 내 눈에 차는 여인이 없어서였소, 내 여인이 되는 기준은 이렇소, 나이는 60대, 결혼한 적 없이 흠이 없는 여자, 재산이 좀 있는 여자,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예쁜 여자요, " 그의 소리는 강당 안을 크게 울려 퍼졌다. 웃는 여자, 비난하는 여자 수근대는 여자 들 사이로 쵸이는 순간 핼쓱게 굳은 얼굴이 되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 다행이네요, 나는 나이도 그 기준보다 많고 결혼도 했었고,돈도 그렇게 없으며 그리고, 그녀는 말을 멈추고 어이없게 생긋 웃었다. " 그러나 내가 나이에 비해 좀 이쁘긴 하죠?"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여인들이 박수를 치며 야유를 퍼부으며 크게 웃었다. 이 노인은 붉어진 얼굴로 그 곳을 나왔다.


 " 오빠, 대단해요, 시니어 센터에 오빠 소문이 엄청나더라구요, "

영애씨는 언제나 먼저 연락을 해 왔다. 늘 저녁을 근사하게 사겠다고 유혹하는 것이다. 이 노인은 때로  영애씨의 집요한 애정 공세에 방패막이로 수양딸 안나를 데리고 나갔지만 오늘은 혼자 그녀를 만났다.

" 무슨 소문이 났다는게요? " 이 노인은 시침을 떼고 점잖게 물었다.

영애는 초승달 눈으로 애교있게 웃으며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 오빠 너무 멋져요.무슨 용기로 그렇게 당당하게 여자들만 가득한 거기에 가서 큰소리를 쳤을까요?"

" 뭘 오히려 내가 무안당하고 나왔는데" 그는 씩 웃었다.

그일이 있은 뒤 와글거리던 자존심의 상처가 어느 만큼 치유되고 마음이 후련해진 거였다. 그리고 지금도 소녀처럼 재치있고 당찬 초이가 밉지 않았다.

"비록 오빠가 채인건 맞지만 그 나이에 그런 청년 같은 기백이 너무 매력있다고 야단들이었어요."

이부생 노인은 맞은 편 테이블에 앉아 합죽한 입으로 오물오물 스테이크 조각을 씹고 있는 영애씨를 찬찬히 살펴 보았다. 반올림 숫자로 80에 가까운 주름진 얼굴이지만 정성스럽게 화장을 하고 푸릴이 가득 달린 검은 색 고급스런 상의에 손가락에는 푸른색 비취 반지가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그녀의 등이 눈에 띄게 굽은 건 젊은 시절 한때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는다는데, 피아노 연습을 너무 많이 한 후유증이라고 했다. 호남 지주 딸로 태어나 일제시대 일본 동경 음대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 피아니스트가 되어 당시 서울 제일 큰 시공관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던 여인, 촉망받는 의사 남편을 만나 미국에 와서도 시대의 첨단을 향유했던 행운의 여인이 이 늙으막 라스트 챤스를 왜 짝사랑으로 안타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살짝 안스런 생각도 들었다.

" 영애씨, 오늘은 내 카드로 쏠테니 최고의 맛난 것으로 디저트를 시켜요. 좋은 저녁 아니요?" 호탕하게 말하는 이부생 노인은 그러나 집을 나올 때 이 여인을 진지하게 사귀어 볼까 싶은 들떴던 낭만은 설풋 식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 우리는 언제나 뜻이 통하는 좋은 친구요, 깊은 속마음을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진실한 친구가 당신 아니겠소?"

이부생 노인은 와인잔을 들어 영애씨의 잔에 가볍게 부딪치며 쾌활하게 말했다.

" 그래요, 우리가 무슨 젊은 애들처럼 스킨쉽에 연연한 것도 아니고 저는 그저 이렇게 가끔 만나 함께 하는 시간만으로 행복하답니다. 먼저 간 남편에게도 덜 미안하구요. 저는 결국 남편 곁으로 갈거니까요"


  집 뒤뜰에서 이부생 노인이 아들과 맨손 체조를 하고 있다. 하나 둘, 하나 둘,구령을 하며 노인이 시범을 보이면 아들은 천진하게 팔 다리를 흔들며 따라 한다.한참 운동을 하여 온 몸이 담으로 젖자 집안으로 들어 와

" 지후야, 오늘은 다다하고 목욕하자.욕조에 물 받아 놓고 물장난도 치고 때도 씻고 놀자" 간만에 아버지와 목욕을 한다니 지후도 좋아서 당장 옷을 훌훌 벗는다.지후의 몸은 160 파운드 육박하는 40대 거구지만 지능은 겨우 7,8 세 수준 아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걸음마도 늦고 말도 늦고 성장이 느렸다. 그때 처음 엄마,아빠를 마마, 다다라 부르던 명칭을 아직도 사용하는 정신이 어리고 단순한 천사의 영혼이다. 큰 아들이 하나 더 있지만 미국 서부에 자리잡아 좋은 직업을 갖고 일가를 이루어 잘 살고 있으니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와주면 고맙고 소식이 없어도 별로 서운하지 않다.둘째 지후는 사회 적응이 전혀 안되는, 은둔형,자폐 지적 장애자이다. 제 어미가 살아 생전 저 아이 때문에 얼마나 애를 태우며 병원이고 교육기관이고 쫒아다니며 정상으로 키우려 고생했던가. 저 못난 자식 거두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아야 한다고 발버둥 쳤건만 저승사자에게 질질 끌려가듯 가고 말았다. 가기 전 피를 토하듯 남편 이부생에게 당부했다.' 지 힘으로 살아갈 능력 없는 가엾은 지후 잘 부탁해요,우리 아들 불쌍한 지후 사는 동안 잘 거둬 줘요' 그는 사실 교수로서 계속 학문에 몰두하고 학술 논문 쓰는 일과 강의 등 하는 일이 무거워  지후의 양육은 거의 아내에게 맡기고 관심을 크게 두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내가 간 후, 자기 앞에 전담 책임이 떨어지자,새삼 지후의 심각한 장애에 적잖이 놀라며 개선점을 심각하게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지후의 모자란 점을 늘 애처러워 하며 왕자처럼 떠받들어 지성껒 키웠다. 결과 지후는 30세 넘은 나이에도 스스로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 이 노인은 어디서 부터 손을 써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심했다.지후는 지능은 낮았지만 기운이 세다. 그 기운쓰는 마땅한 일을 가리켜 보자. 제 방 청소부터 시켰다. 마음이 착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랐다. 차츰 집 안 모든 곳의 청소를 맡기고 베큠 돌리는 법과 걸레질하는 것도 몸소 시범을 보이며 기르쳤다. 지호는 당연히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음식 만드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간단한 음식을 시켜 보았다.제가 만든 음식을 먹어 보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다.

" 지후야 다다 말 잘 듣고 네 방 청소도 깨끗이 하면 널 요리학교 보내서 유명한 쉐프가 되게 해 줄께" 하는 격려가 꽤 효과적이었는지 지후와 다다의 사이는 점점 부드러워지고 상부상조 집 안 청소와 음식은 거의 지후가 맡아 부자가 서로 조화롭게 잘 지내게 되었다. 따듯한 물이 가득한 욕조에 들어앉아 애기들처럼 얘기를 주고 받고 서로 등을 밀어주며 덩치 큰 아들을 찬찬히 구석구석 닦아주는 이부생 노인은 자상하고 따뜻한 아비이다.

" 지후야 이따 오후 세 시에 안나 누나가 네 동생들을 데리고 온단다.오후에 우리 바베큐 해 먹자."

" 야! 다다, 해리와 세라가 와? 그레잇,내가 갈비를 해 둘께"

미각과 손맛이 특출난 지후의 쇠고기 갈비를 포식하고 아이들은 뒷 뜰로 나가 놀고 이 노인과 안나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 파파 해리가 조기 입학 신청한 칼레지에서 합격 통지서가 왔어요,하지만 난 포기하라고 말했어요"

" 안나야,배우는 것도 적당한 때가 있어. 기회를 놓치면 나증에 후회하게 돼" 대학 강단에서 긴 세월을 보낸 이노인은 당연히 대학 진학을 권장한다.

" 알아요, 하지만 이혼하고 한국으로 내뺀 지 아빠는 연락도 안 되고 나 혼자 살림꾸려가기도 빠듯한데  어떻게 그 비싼 프리스턴 대학을 보내냐구요?" 안나는 보험사 에이젼시로 일하고 있으나 수입은 별로다.

" 안나야 내가 네게 준 커다란  다이야 반지는 왜 안 끼고 있는게냐? "

" 아, 파파 깜박했어요,너무 귀한거라 늘 빼 놓고 아끼고 있어요" 하며 안니는 백을 열고 작은 파우치에 간직했던 반지를 꺼내 약지에 낀다. 그 반지는 이노인이 과거 외국 출장 갔다가 큰 맘먹고 아내에게 선물한 꽤 큰 알알이 휘황하게 반짝이는 특별한 반지였다.이 반지를 받으며 아내는 얼마나 기뻐했던가,아내도 반지를 잃어버릴까 걱정된다고 곽 속에 고이 보관해 두고 가끔 들여다 보기만 했는데.

이 노인은 안나의 손을 잡았다.

" 네 손에 내 아내 반지가 끼어 있을 때 너는 우리 딸이란다. 그럼 너의 딸은 내 손녀이기도 하지. 이 할애비를 믿고 네 모든 걱정을 맡기거라" 안나는 기대하던 파파의 말을 들으며 은근히 웃음지었다.

" 파파가 있어 정말 든든하고 힘이 나요" 안나는 이노인의 나무 껍질같이 메마른 손등에 뺨을 비비었다.

'조상은 으례 후손의 밥이니라, 그 밥 많이 먹고 튼실하게 살아갈찌니' 이노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창 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밖에선 지후가 조카뻘 되는 안나의 두 딸 해리와 세라 앞에서 뽐내듯 트랙터를 몰며 잔디를 깎고 해리와 세라는 사가지고 온 꽃모종을 화단에 심으며 뭐가 재밋는지 유쾌하게 깔깔대고 있다.해마다 소녀들이 심어주는 꽃으로 노인의 집은 여름꽃이 무성하다.

' 좀 늦었지만 지후에게도 짝을 지어 줘야 하나' 노인은 또 갈피없는 생각에 잠기며 생기찬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봄이 무르익는 4 월이다.



건강 검진의 날이다.

이부생 노인은 샤워를 한 후 허리에 차고 있던 변 주머니를 떼어내고 피부 보호판을 새것으로 교환했다. 변 주머니 내용물을 비워내고 물로 헹구어 주머니 입구를 단단히 여미고 다시 제 자리에 끼어 넣는다. 외출시에는 반드시 허리 보정 벨트로 몸의 균형을 잡는다. 8 년 전 직장암에 걸려 수술로 15 센치 쯤 대장 끝부분과 항문 괄약근을 잘라내고 배 옆구리를 뚫어 영구 장루 시술을 받았었다.  직장암이 상당히 진행된 후 병변을 알았으므로 그 때는 죽음을 각오했었고 수술실로 들어갈 땐 죽도록 두려웠으며 배를 뚫어 장을 꺼내고 피부 보호판을 부착하여 연결한 주머니에 변을 배출한다는 데에는 엄청나게 공포스럽고 기괴망칙했다. 그러나 오늘 날엔 이력이 나서 능숙하게 관리하고 약간의 불편은 있을지라도 이만큼 건강하게 산다는게 고맙기만 하다. 세 달마다 주치의 사무실에 가서 장루 부분을 체크하고 피검사와 심전도,때로는 혈류 검사도 하고 의사와 대면하여 먹고 있는 약과 건강상태들을 상담한다. 이노인은 항상 검진하는 날은 긴장한다. 내 몸의 모든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으려나?

의사 오피스는 아담한 일층 건물이다, 넓은 대기실에 들어가 푸론트 안내에게 시간 예약을 확인하고 등록을 한다. 그리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린다. 대기실 긴 의자에는 여러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잡지를 보거나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대부분이 비슷한 또래 노인들이다. 노인들이 이렇게 최첨단 의료 혜택을 받고 있으니 장수 노인이 많아지는게 확실하다. 젊은이들은 노인의 장수로 인한 소셜 연금이나 의료비용의 적자를 걱정하지만 역시 노인들이 장수한다는 건 그만큼 살만한 좋은 세상으로 된게 아닐까. 상념에 잠기며 무심코 구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여인을 보았다. '아, 초이를 여기서 보다니, 이 곳은 주로 대장암이나 방관암 환자들이 오는 곳인데 혹시 저 여자는?'

" 하이,미세스 쵸이"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서 아는체를 한다.

쵸이여사는 무척 당황한듯

" 안녕하세요? 정기 체크업하러 오셨나 봐요" 마지못해 그래도 상냥하게 인사한다.

" 그런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주치의가 누구신데?"

그 때 쵸이를 호명하며 낮익은 간호사가 나왔다. 쵸이가 얼른 대답하며 간호사를 따라 들어간 방은 이노인 주치의의 방이다.


며칠 후 이노인은 시니어센터 라이브러리에 들렀다. 깔끔하고 조용한 방에는 책들이 꽂쳐있는 서가가 열 맞추어 늘어서 있고 오픈 열람할 수 있게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구비되어 있다. 발자국 소리조차 조심하며 살금살금 둘러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 초이가 있다. 그녀는 골똘이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다. 노인은 옆으로 살그머니 다가가 앉으며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을 넘겨다 보았다. 인체해부도가 그려진 의학 서적으로 보인다.인기척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고는 '아'하고 짧게 놀란다. 그리고 의아함 85% 15%의 엷은 반가움으로 억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 잠깐 나가서 얘기할까요" 이노인은 눈짓을 한다.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얘기하고 싶다.그녀는 책을 덮고 순순히 따라 로비로 나왔다.이 노인은 자판대에서 오렌지 쥬스를 두 개를 꺼내 와 그녀와 마주 앉았다.

" 수술을 하셨다구요? 얘기 듣고 놀랐어요. 고생했지요?"

" 어떻게 아셨어요? 난 광고하고 싶지 않아 비밀이었는데요."

" 다 아는 수가 있어요, 세상에 비밀이 있나요? 그래 회복은 잘 되고 있는거지요?"

" 아,몰라 그렇게 꼬치꼬치 알려고 하지 마세요.아시면 괴로와요" 그여자는 배시시 웃었다.

" 그 괴로움 함께 나눕시다.기쁨은 나누면 두 배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셈법 모르세요?"

이부생 노인은 마주앉은 쵸이를 자세히 살폈다. 관심이 있었으니 먼 빛으로 늘 봐왔고 지난 번 라인댄스 때 만남은 너무 긴장해서 머리가 하앳었고 오늘에사 가까이 그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녀는 눈매가 어글어글해서 웃는 상으로 주름이 몇 가닥 있고 다정하고 온화해 보여 어떤 말에도 친절하게 응답해 줄 것 같은 따뜻한 인상이다.'아,사람을 편안하게 해 줄 것 같은 저 모습에 내가 끌렸던 거구나 그러나 이면에 독성있는 가시에 대한 경계도 안심할 수 없어, 한 번 당해봤잖아, 긴장하지만 역시나 가슴이 쩡해 진다.

" 나도 대장을 잘라내 옆구리로 변을 빼낸다오,벌써 8 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이럭저럭 잘 살고 있어요"

" 어머 어머," 쵸이는 눈을 호동그레 뜨며 커다란 놀라움으로 입을 막는다. " 어쩜 어쩜 그래도 건강해 보이세요"

정면으로 촛점을 맞추어 노인을 직시하는 쵸이의 눈길이 따깝다.노인의 얼굴이 또 붉어진다.

"그래봤자 마른 무말랭이처럼 쪼그라진 얼굴이요,나이는 어쩔 수 없는거지요." 노인은 멋쩍게 말하며 슬며시 웃는다.

"저는 방광암 수술로 방관을 절제했어요, 소장을 연결해 요루주머니를 차게 됐어요.수술한지 이제 한 달 됐어요. 엊그제는 요루 주머니 관리하는 방법을 배우러 갔던 거얘요.아직까진 방문 간호사가 도와 주었지만 이젠 나도 직접 해 보려구요.하지만 너무 겁나고 끔찍했어요"

" 염려 말아요, 내가 옆에서 도와 주리다. 동병상린이란 말도 있지않소?"

"옆에서 도와 주다니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호다닥 놀라는 초이의 과장스런 몸짓에는 앙큼한 여인의 향기가 묻어났다.


 오랜만에 절친 김박사로 부터 전화가 왔다.그 역시 오랜동안 수술전문 의사로,또 대학교 교수로 바쁜 세월을 보내고 이제사 여유롭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 날씨 좋은데 골프나 한 라운딩 돌자구, 어서 나와"

김박사는 여전히 두툼한 몸매에 혈색 좋은 얼굴을 하고 있다.빨간색 바지와 빨간색 스트라이프가 들어 간 폴로셔츠, 이마를 가리는 챙 넓은 모자,그를 보면 언제나 삶의 활기가 넘친다.

" 이교수,요새 자네의 알록달록한 소문이 우리 늙은이들에게 화제거리라네"

역시 그게 궁금해서 불러낸 거구나, 생각하면서도 불쾌하지 않다.오히려 광고라도 하고 싶은 심정인데.

골프 라운딩은 핑게거리고 뜻이 맡는 친구끼리 만나면 남자들도 무척 수다스러워진다. 몇 코스 돌다가 흐지부지 발걸음은 휴식처 정자아래 벤치로 향한다.오월의 연초록 잔디와 프르른 하늘 무한공간을 거쳐오는 오월의 바람이 상큼하고 감미롭다.

"한 공식 만찬회장에 크린턴 대통령,조지 부시,버럭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이 초대를 받았다네.그런데 보좌관들의 실수로 이들은 이 행사를 하오의 가든파티 쯤으로 생각하고 넥타이 없이 오픈 셔츠와 캐주얼 복장으로 갔는데,웬걸, 다른 이들은 모두 정장 턱시도 차림이었다네"

"먼저 클린턴은 캐주얼 복장을 해도 큰 실례가 아님을 설득하니 그 말빨에 넘어가 참석자 중에는 자기 넥타이를 푸는 사람까지 있었다? 자네도 그 칼럼을 읽었나 보네"

"한 냉소자가 말했지,'구라'하고는"

"다음 부시는 어쨋었지?"

"부시는 놀란 기색으로 이딴 장소에는 오지 않겠노라며 곧장 집으로 돌아가 아직도 분을 사기지 못하고 그 따위 사교파티나 디너파티는 모두 시간 낭비고 사회악이라며 금지령을 운운했다네,"

" 역시 뒷말이 있었지 '그 성질머리하구는---' 그런데 오바마는?"

" 오바마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조용히 세면실에 들어가 셔츠 목 단추를 채우고 만찬장 한 구석에 말없이 앉아 저녁을 먹고 자기 어중간한 복장에 눈길이 쏠리지 않도록 얼른 나갔대요."

" 누군가 말했다나, '소심하기는' 하하 그런데 트럼프는 역시 스케일이 달라.날씨도 좋은데 왜 이 갑갑한 실내에서 저녁을 먹나,자리를 정원으로 옮겨 가든파티를 하자는거야,결국 정원에다 다시 세팅한 가든 파티에서 트럼프만 골프셔츠에 쟈켓, 특유의 야구모자 까지 완벽하게 어울리는 복장이 되었지. 그는 매우 만족해서 엄지 척했다는 거야"

"역시 뒷말이 있었지,'욕심하나는---'큭큭! 이제 김정은도 국제무대에서 한 몫하잖아, 빠질 수 없지"

"트럼프나 정은이나 삐까빼까 맞먹는 악당들인데 정은이 억지가 한 수 위지,자기 캐주얼 양복에 맞추어 정원의 나무를 모두 베어 파티장 안으로 옮겨 오라는거야,하아 또 누군가 말했다네 '뱃짱 하나는---"

두 노인은 한가로이 떠도는 솜뭉치 구름을 보며 으핫핫 웃고

"누가 만든 말인지 참 그럴듯 해"

이들은 항상 만나면 공통의 관심사나 화제를 이야기로 나누며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이다. 본관 건물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시원한 맥주도 한 잔 마신 후 서로에게 건강에 유념할 것을  당부하며 헤어지려는데 순간 문득 이노인이 김박사를 불렀다.

"어이 한 번 자네 부인 모시고 식사나 하자구, 소개할 사람이 있어"

"아, 알아듣겠네,이제 우리 각자 짝들 데리고 자주 만날 수 있겠구만, 그동안 자네가 홀아비라 내 처와 같이 나오는걸 삼가했거든"

"아니 내가 자네 처 눈독 들일까봐 숨겨놨던게야? 에끼,이 사람! 이젠 내가 자네를 조심해야겠어"

"제수님이 꽤 미인이신가 보네,덩달아 내 가슴이 뛰는군"

두 사람은 그렇게 또 한 번 요란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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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오리진 - 전2권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감사한 일이다.

시력이 시원치 않아 읽기 매우 어려운데도 구매한지 5 일만에 1,2 권을 독파했다.

재미있냐구? 음, 솔직히 재미는 별로다. 몇 번의 반전이 있었지만 이건 댄 브라운의 특기이고 그것이 끝까지 잘 발휘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읽었을까, 그 모티브가 되는 건 '지적 호기심 유발'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모든 세월을 통 털어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호기심과 의문을 갖게 되는 /종교와 과학의 충돌/을 과감하게 핵심 주제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일단 사람을 흥미를 자아낸다. 댄 브라운의 해박한 지식과 종교,또는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종횡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솜씨가 과연 대가답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으로 제시되는 스페인의 이름 난 건축물 대성당 명화등 예술적 영감과 해설적인 묘사도 독자들의 흥미를 돋구고 감상의 시야를 넓히는데 크게 일조한다.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로버트 랭던의 제자이며 뜻이 통하는 제자 에드먼드 커시,그는 천재이며 억만장자 컴퓨터 사업가, 미래학자이며 발명가이다. 그가 이제까지의 신의 창조와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하고 실증적인 사실을 세계에 공표하기 전 중교계의 대 지도자 세 명에게 먼저 조언을 구한다. 천주교의 대주교,유대교의 랍비 또 이슬람의 사예들 알파들이 그들이다.

종교를 정면 부인하고 생명의 원천이 신의 창조가 아니라는 커서의 주장은 그들에게 깊은 우려와 근심을 유발한다.커서는 어쩐 일인지 서둘러 자신의 새로이 정립한 창조론에 정면 부정하는 도전적인 과학적 이론과 학설을 대중에게 대대적인 프레젠테이션으로 공표하려고 스페인의 유명한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을 초청한다. 현대 거장들의 예술적 조형물이 잘 전시된 미술관에서 과연 컴퓨터 천재 커시의 초청에 참석한 손님들과 전 세계 생방송으로도 이목이 집중된 멀티미디어 프레젠테이션은 호사스럽게 시작된다./ 주제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서론이 지나고 막상 본론으로 들어서 커시가 등장하여 대중들에게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을 때 한 남자가 불시에 저격한 총탄을 이마 한가운데 맞으며 커서, 그는 즉사한다.미스테리한 사건이 연달아 이어지며 랭던과 미술관장 암브라는 에드먼드의 황당항 죽음을 목격하고 미쳐 발표하지 못한 그의 실체를 대중들에게 발표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으로 커시의 나머지 자료를 찾아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를 인공지능 컴퓨터 윈스턴의 안내를 받으며 끈질기게 추적한다.미스테리한 살인은 계속 자행되고 황태자 홀리안의 약혼녀 암브라 비달은 홀리안을 살인의 배후가 아닌가 의심한다.그녀는 좋은 친구였던 에드먼드 커시를 위해 꼭 커시의 발표하려던 내용을 공개하기 위해 랭던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커시의 행적을 더듬어 나간다.드디어 무수한 커시의 암호를 해독하고 인공지능 컴퓨터 윈스턴의 도움으로 커시의 나머지 학설을 전세계 오억이 넘는 대중들에게 발표하게 된다.

프레젠테이션의 욧점

생명의 기원--->물리학적 법칙 ,자연발생적

인류의 소멸---->제7계로 돌연 나타난 테트늄에 의하여 인간이 흡수됨.

암브라는 황태자와의 오해가 풀려 더 깊은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한 편 랭던은 생존시한이 얼마 남지않은  인공지능 윈스턴과 대화를 나누며 과연 완벽하고 선한 과학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지게 된다.학문적 종교,과학의 갈등과 도전 속에 미스테리와 역전의 의외성과 또 훈훈한 인정이 양념처럼 어울려 재미를 유발하는 훌륭한 스토리였다.


 책 속에서 한 줄.

*인류의 지식 중심에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다시 말해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운명'이죠.이거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수수께끼입니다.

*인간의 창조와 운명은 전통적으로 종교의 영역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목적은 과학 진실을 이용해 종교 신화를 무너뜨리겠다고 말입니다.

*보편적인 규칙에 따르지 않는 획기적인 선견자라는 점

자연을 유기적 예술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 -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 원시 스프

새롭게 창안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자연에 기록되어 있다.독창성은 기원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안토니 가우디

*윈스턴 처칠의 일화; 종교인들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적이 있나?잘 됐군 그것은 자네가 뭔가를 지지한다는 뜻이니까.

*고갱의 작품 중 제목;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신은 죽었다.여전히 죽어 있다. 우리가 죽였다.

살인자 중에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니체

*어두운 종교는 지나고 달콤한 과학이 지배한다.

*아담과 이브가 정말로 존재한 것은 아니다.진화는 사실이다.그것을 부정하는 크리스천은 우리 모두를 바보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걸 솔직히 인정해야지요 ---- 나는 우리에게 분별력과 이성과 지성을 부여하신 하나님이 -----그걸 하나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을 리는 없다.

사그라파밀라가 마치 미래의 교회처럼 느껴지거든요---자연적으로 직잡적으로 연결된 교회라고나 할까요?

*다가오는 과학시대에 기독교가 살아 남는 길은 과학의 영적 동반자가 되어 우리의 폭넓은 경험~수천 년에 걸친 철학과 개인적 성찰,명상과 영적 탐구~를 활용함으로써 우리를 통합시키고 일깨우며 더욱 높은데로 이끌도록 노력해야 해요.

*사실 윌리엄 불레이크는 종교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고 믿었지요,창의적인 사고를 억압하는 어둡고 독단적인 면과 ---자기 성찰과 창의력을 북돋는 밝고 탄력적인 면 말입니다.

*달콤한 과학이 어두운 종교를 몰아낼 것이다.---개화된 종교가 꽃을 피울수 있도록.

*한 때는 모든 것의 중심에는 자연이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그런 통일성은 오래 전에 사라져 자신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질적인 종교로 갈라졌다.

* 성공이란 열정을 잃지 않고 한 번의 실패에서 다음 실패로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이다. 윔스턴 처칠

*위대함의 대가는 ----책임감이다.   처칠

*에드먼드 커서의 '미래를 위한 기도'

 우리의 철학이 우리의 기술을 따라잡게 하옵소서.

 우리의 연민이 우리의 권력을 따라잡을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이 변화의 동력이 되게 하옵소서.

*역사는 내게 친절할 것이다.내가 역사를 기록하기로 마음 먹었으니. 처칠


뿌듯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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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3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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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04: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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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1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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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5 1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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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1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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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1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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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2 0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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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으로 다가온 너> 


  이제 너를 생각하면 나는 너를 자세하게 묘사할 자신이 없다. 네 얼굴의 눈 코 입 어느 것도 기억이 안 난다.심지어는 너의 말소리, 네가 좋아했던 음식이나 취향도 뚜렷이 아는게 없다.

다만 너를 처음 보았을 때, 강렬했던 이미지, 네 전체가 하나의 큰 빛덩어리로 다가왔던 걸 희미하게 기억할 뿐이다.청바지로 성큼성큼 걷는 다리가 길쭉했고 힙을 덮은 헐렁한 귤감색 울 쟈켓이 네 스스로 뿜어내는 아우라 속에 흐릿한 윤곽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너의 뽀얀 자연피부,쌩얼을 디테일하게 보았다기 보다 그것마져 순수하고 맑은 아침 첫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방울의 이미지로 뭉뚱그려 브레인 기억 창고에 톡 떨어졌었다.

네가 처음 나를 보며 미소지었던가.알 수 없다. 다만 하나의 커다란 광채로만 보였으니까.

 "오빤 왜 잔뜩 찌푸리고 나를 봐요? 뭐 잘 못 됐어요?"

 참으로 천진한 어린 목소리에 나는 움찔 놀랐다. 처음 보는 낯선 아이다. 순간 자각한, 내가 선배라는 우월감으로 슬쩍 목소리를 깔아 거만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엊그제 입학한 캠퍼스 초보 쟈니키타예요. 같은 과 선배님께 인사하고 있는데요."

 "쟈니키타, 그런 이름이 어딨냐? 농담 따먹기는 집어치우구"

 "너무 길다면 키타는 빼시던지요."

너는 별 일 아니라는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았다, 쟈니라고 부르면 되겠구나.오늘은 햇볕이 쎄구만, 난 먼저 들어간다."

 난 우리 노탱들이 모여앉아 지나다니는 애들 품평이나 하고 쓸데없는 개그놀이나 하는 본관 건물 앞 벤치에서 몸을 일으켜 강의실로 들어갔다.'무신 개풀 씹어먹는 소리, 쟈니키타가 이름이라니 말야' 마음속으로는 투덜댔지만 여전히 눈이 부셔 찌그러졌던 눈은 아직 제 시력을 회복하지 못한채 건물 안 어둑컴컴한 복도에서 잠시 휘청거렸다.


"요즘 한국서 유학이랍시고 오는 애들 말이야. 현지에 적응해서 열공할 생각은 개뿔도 없고 지들 끼리끼리 모여 잘도 놀더라. 주말 저녁이면 뉴욕씨티 나이트로 튀는거야, 간도 크지,"

 평소 쓸데없이 흥분 잘하는 탐이 포문을 열었다.

 "요새 젊은 것들을 어째 막냐  지들 하고싶은대로 살다가 죽는거지"

 노탱 멤버들이 대여섯 모였으니 대화가 제법 활기차다.노탱은 글자 그대로 대학생치고 몇 년씩 꿇어 나이 좀 들은 '아재' 같은 애들이다.따라서 이들의 대화는 약간 노파심 비슷하고 회고성 다분한  대화들이 오간다.

필라델피아 시티 한 복판에 자리한 템플 대학교는 공룡대학이다. 전 세계에 해외 켐퍼스를 두고 유학 컨설런트를 파견하여 미국으로 유학오고 싶어 안달하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를 하였다 . 입학 과정이 까다롭지 않고 학비도 비교적 저렴하다. 따라서 세계 각처에서 몰려온 학생수가 대단히 많고 이들의 수요충족을 위해 학교 시설 규모도 해마다 커져 이제는 손 꼽히는 매머드 대학이 되었다.

캠퍼스에서 한국 유학생들도 꽤 많이 보게 된다. 또한  교포 학생들도 미주 원근각지에서 모여들어 한인 학생들은 어디서나 쉽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묘한 것이 얼굴도 비슷하고 언어도 동일권인 유학생들과 본토 학생들은 결코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학생파와 본토파로 나뉘어져 서로 눈도 맞추지 않고 물과 기름처럼 겉돈다. 왜일까, 여러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교포측 노탱들은 불만이 많았다.

 "쨔식들이 말이야 한국에서 시시한 대학은 가기 싫구 인서울In seoul 대는 실력이 딸리니 핑게좋게 유학이랍시고  온거 아니냐, 집에서 또박또박 부쳐주는 돈에 잔소리하는 부모도 없겠다 시간은 널널하겠다 가뜩이나 날나리 노는데 이골난 놈들이 이 신천지에 와서 공부에 집중이 되겠냐?"

상당히 신랄한 에릭의 말이다.


"그래두 굼벵이도 굴르는 재주가 있다고 그치들 똘똘 뭉쳐서 족보돌리며 학점 메꾸는거 보통 통빡 아니더라. 족보가 선배부터 착착 대물림이 되어 학점은 어영부영 채우며 넘어가는거야. 쨔식들 눈치만 빠삭해 갖구 말야"

탐이 아니꼽다는듯 침을 찍 뱉으며 말했다.

 " 와우! 걔들 뒷배경 장난 아니더라, 오자마자, 락세스,비엠더불유, 쌈쌈한 스포츠카 포르셰,그런 죽여주는 신차를 빼서 몰고 다니니 계집애들이 안 꼬이겠니?

이십 년이 다 되어 털털거리는 쉐비 웨건을 끌고 다니는 창수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여기 노탱들은 사실 그런 호사를 누릴 처지가 아니다. 강의가 없을 땐 부모 옆에서 비지니스를 도와야 하고 용돈도 노동과 바꾸며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장학금이 아니면 부모에게 학비를 기댈 수 없으니 공부하는게 온통 론(학자금 대출)이고 그나마 학업에 올인할 형편이 안되면  과목 별로 수강 신청해서 졸업 학점을 맞추려니 하세월 나이만 먹고 학업에도 요령이나 부리는 능구렁이가 되었다.

 "야 밥,아까부터 왜 길만 보냐? 누구 기달려 ?"

탐의 말에 몽롱하던 나는 고개를 돌렸다.딱히 누구라 할 거 없이 자꾸 정문 쪽에서 들어오는 애들에게 눈길이 가고 있었다.누구를 기다리는지는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다. 역시 말없이 우르르우르르 몰려들고 나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아담이 불쑥 말했다.

"이번 학기에 새로 들어온 법대지망  신입생, 쟈니라고 했던가 ,그 기집애는 유학파니? 본토파니?"

 불쑥 여럿에게 물었다.

 "걔 유학생 아니다, 쨔식아, 말 좀 인격적으로 써라.기집애가 뭐니"

 나는 대답인지 뭔지 화가 난 목소리를 퉁명스럽게 아담에게 던졌다.

"햐 저는 더한 말도 잘 하면서 새삼, 뭐 못 먹을거 먹었니?"  

 아담이 내게 눈을 부릅뜨고 항의하자 나는 대꾸 없이 벌떡 일어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젯 밤 너의 집 앞에서 오랜 시간 머물며 네 생각을 했다.

너는 어제 저녁 7 시 반에 집에 들어왔다. 네 방에는 9시 쯤에 불이 켜졌고 그 불은 오랫동안 꺼지지 않았다. 너의 오렌지 빛 환한 창문을 바라보며 네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머리 속에 그려보는게 무척 흥미로웠다. 너는 방에 들어오자 백팩을 책상 위에 던지고 네 연한 살구색 피부를 감싸고 있던 투박한 청바지를 벗어던진다. 베스룸으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바디클린져를 풀어 온 몸에 골고루 칠한다.레이스같은 비누방울로 뒤덮힌, 물줄기 속의 너의 나신, 거기서도 눈부신 빛을 뿜을까,잠깐 상상속의 유리문이 수증기로 덮힌듯 뿌얘지며 현기증이 났다. 젖은 긴 머리는 해초같이 네 어깨를 덮고 너는 기분좋은 콧노래를 부를까.상상은 한없이 이어진다.늦도록 불 켜진 네 창문을 바라보며  마감이 빠듯한 리포트 작성에 잠을 잊은 걸까 짐작해 보기도 했다.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네 방 창문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하며 나도 서서히 네 집 앞을 떠났다. 네게 주려고 준비해 간 꽃다발은 이미 시들고, 시들어가는 장미향이 차 안에 숨 막히도록 가득해 차창을  내려 심호흡을 했다.

오늘, 너를 꼬셔 보려  준비했던 꽃다발을 주지 않은게 다행이야

쟈니, 넌 바라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내 맘이 가득차, 잘 자라. 내 사랑 쟈니

쟈니, 나는 좋은 놈이 못 돼, 20 대 초반, 젊은 놈이 해볼 만한 나쁜짓은 칼 든 강도짓 빼곤 다 해봤고 계집애들도 수없이 건드렷다 걷어차서  눈물께나 빼게했지.대개의 계집애들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사내에게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초대받고 꽃다발로 프로포즈까지 받으면 꼴닥 넘어가거든. 특히 너같은 애송이 초짜들 말이야. 너를 대상으로 그런 사기성 코스프레를 할 맘이 싹 가셨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난 내 수준에 맞는 다른 계집애한테나 가서 이 허전한 맘을  풀어내야겠구나. 쟈니 너에게 내 더러운 욕망의 꾸정물을 덮어씌울 수 없어. 잘 자라 순결한 쟈니


"오빠, 오빠는 나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너의 한 옥타브 쯤 높은 목소리에  펄쩍 놀라 나는 우선 주위부터 둘러 보았다. ' 얘가, 얘가 뭘 믿고 이렇게 앞서가니' 독심술이라도 배웠던거야. 하지만 난 무심한 척 말했다.

"너 도끼병이 단단히 든게야, 너무 드리대지 마라. 소문 나면 네가 곤란하다"

 "오빠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를 몇 가지로 대 볼까요?"

너는 장난꾸러기가 되어 거리낌 없이 다가오며 킥킥 웃었다.

 "첫 째, 오빠의 시선은 늘 나를 따라다녀요. 근데 웃기는 건 내가 보면 얼른 시침을 떼고 딴데를 봐요.

 둘 째 , 다른 사람들에게는 늘 유쾌하고 재미있다가도 나를 보면 갑자기 무뚝뚝하고 부자연스럽게 버벅대다 머쓱하게 자리를 뜨고 말아요"

 흠, 제법 논거가 그럴듯 해, 나도 모르는 사이 흥미를 느끼며 세 번 째는 뭐냐고 물었다. 쟈니는 더욱 얼굴을 내 가까이 디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빠는 왜 번번히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감시하지요? 나 점점 무서워지려 해요"

아, 그건, 그건 하며 손이 머리로 갔다.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마구 긁적댄다.

"그러니까 오빠, 의심스런 행동말고 자수하여 광명 찾자구요. 쟈니는 품이 넓은 여자랍니다"

 나는 앞뒤 없이 불쑥 말했다.

  "너, 너 볼링 좋아하니? 생각있으면 토요일에 볼링장으로 나와라"


 그래서 너는 우리 노팅팀에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함께 어울렸다. 때로는 네 친구들 까지도 합세해  우리 노팅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주었다. 진정 우리 노팅들은 너희들의 신선한 공기를 공급받자 아주 신바람이 나서 꺼칠하던 얼굴에 쉐이브도 자주 하고 그리고 제법 오데콜론의 향기까지 풍기는 거였다. 너는 늘 내 곁에 껌딱지처럼 딱 붙어서 내 주인 행세를 하였다.나는 네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건 내가 너를 마크하지 않으면 어짜피 다른 놈이 접근할텐데 그 꼴은 내가 못 보지.그렇찮아도 아담 녀석은 항상 너를 넋놓고 보잖아? 언젠가는 내게 불평도 하는거였다.

" 얌마, 넌 애리는 어쩌구 양다리냐?내가 확 애리한테 꼰지를거다." 하며 제법 엄포까지 놓는거다.

'아, 애리' 생각하자 갑짜기 짜증이 차올랐다.그 계집애를 어떻게 너와 나란히 비교한단 말인가.애리는 애초 순수하지 못하게 나한테 접근해 왔다. 부잣집 아들, 앞길이 확 트인 공부 잘하는 법대생, 졸업한 후 변호사 자격시험만 통과하면 지 미래는 따놓은 당상이다.하며  육신공양도 서슴치 않는 거 나는 알고 있다.그런 속셈을 알면서도 넘어가 주는 나는 또 뭐냐.다루기 쉽다고 함부로 이용해 먹는 나란 놈은 또 괜찮은 놈이냐.욕지걸이로 투덜대며 분풀이를 위해서라도 오늘 저녁 애리를 불러낼 생각을 했다.젠장!


네가 자신의 베프 혜진을 탐과 연결해주어 칸막이 바에서 거창하게 쏘맥 파티를 하며 언약식을 치룬 날이다.그들이 공식 커풀로 인정되어 '오늘 밤 베이비만은 좀 유보해라'같은 진한 농담을 던지고 뿔뿔이 흩어진 후, 아까 언약식 때는 진행자로 나서서 신나게 웃고 떠들던 네가 영 기분이 꿀꿀한지 말이 없다.

"쟈니, 왜 그래? 뭐 잘 못 됐어?" 나는 너의 침묵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물었다.쟈니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그리고 역시 대답이 없다.나는 공연히 불안해지고 조급증이 나고 안절부절해서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말을 하라구, 말을 해야 알아 먹지"

"혜진이가 부럽더라" 너는 어깨 너머로 그 말만을 던지며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에 세워 둔 네 차로 갔다.

너의 하얗고 깜찍한 포드 스포츠카 스탐이 과격한 엔진소리를 내며 출발하고 난 다음 나는 얼빠진 놈이 되어 마후라에서 쏟아져 나온 매케한 매연을 고스란이 덮어쓰고 한참이나 있었다.


드디어 아담 녀석과 한 판 붙었다.이건 피치 못할 숫컷들의 운명적인 대결이다.평소 녀석이 네게 넋이 빠진 건 알고 있었지만 요즘은 너와 썸을 타고 있는게 내 눈에도 훤히 보이더라.

이 번 주말 영화나 보러 가자고 맥없이 던지는 내 말에 너는 눈을 반짝이며 주말에는 뉴욕 간다고 했다.

"아담 오빠가 이번 주말 나 보여주려고 브로드웨이 티켓 끊어 놨대 < 바람난 고양이들 >보고 싶었는데 기대 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니"

이런 젠장,내가 너무 나르시즘에 빠져 뒤쳐지고 있는게 아냐? 뭔가 결단의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

이젠 너는 나만 보면 아담오빠가 어쩌구저쩌구, 아담오빠가 이 번에는 또 머시기 거시기 아담 오빠가 입에 걸렸다.내가 기가 막혀 뺑하니 입을 벌린채 듣고 있노라면 너는 더욱 신바람이나서 침을 튀기는 거였다.

아담 내 이 녀석 쌍판에 한 방 펀치를 먹일테다.네가 내 순결한 쟈니를 채가려 하다니.

"아담 너 파크 왼편 숲으로 가자,할 말이 있어" 녀석도 각오하고 있었던 듯 "좋아, 당장 가지"하며 당당히 앞 서 가는 것이다. 사람 기척이 뚝 끊어진 후미진 숲으로 들어서자 나는 기선을 잡아 기습적으로 녀석의 면상에 강펀치를 날렸다, 주먹 쥔 손 끝으로 인간의 여린 뼈와 살이 뭉개지는 느낌, 아싸! 네 녀석 정면으로 맞았구나.그러나 녀석의 순발력 있는 강한  주먹 또한 내 얼굴을 노리고 뻗어왔다.귀바퀴를 스치는 살기어린 바람을 느끼며 한 주먹은 얼굴을 커버하고 한 주먹은 놈의 턱을 향해 또 한방 어퍼컷의 순간을 노렸다.녀석도 한 치의 방심없이, 나를 꼬나보며 우린 그렇게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았다.녀석의 얼굴에 코뼈가 나갔는지 피가 엄청나게 번져 흐르고.눈두덩도 점점 부풀며 한 눈이 찌부러지고 있다.순간순간 변하는 아담의 면상을 보며 문득 겁도 나고 따라서 전의도 상실되어,

"얌 마,우선 피나 닦아라" 내 셔츠를 훌떡 벗어 그에게 던졌다.놈은 내 셔츠로 면상을 훑으며 낭자한 피와 욱신거리는 통증으로 고통스러웠는지 짐승같은 목소리로 울부짓는 것이다.

"밥 이 나쁜 놈아,넌 계집애들마다 건들고는 걷어차는 바람꾼이 아니냐?쟈니는 너한테 일회성으로 그렇게 끝날 애가 아니다. 쟈니를 너같은 악당한테 방임할 수 없어,쟈니는 내가 지킨다

넌 애리나 잘 챙겨라."

젠장, 또 애리 그 계집애가 내 앞길을 막는구나.


엊그제  애리의 아버지를 만났다.그는 이 곳 카운티에서 제법 큰 교회 목사이다. 하필 목사의 딸이라니,쩝, 그는 점잖을 빼며 나를 이래 위로 꼼꼼히 스캔한다.이건 뭐냐,내 아버지인 한국계 은행의 행장과 그 녀의 아버지 대형 교회 목사가 결탁하고 여우같이 간교한 애리가 연출 하여 나를 옴짝 못할 코너로 몰아 넣자는 음모 아닌가,

"자네 변호사 시험은 언제 있는가?" 묻지만 그는 내 대답은 상관하지도 않고 소위 인륜지대사로 매듭을 짓는다.

"어서들 날짜 잡아,그만했으면 사귀기도 오래됏으니 알만큼 다 알것이고,내 딸 애리는 나이도 과년하여 이 애비의 체면도 있고 하니 말야, 자네 아버지와도 다 의논이 되었네.자네 결정만 남았어"

아, 바비킴의 청춘은 내 원한 바가 아닌 막다른 길로 빠져드는가.이렇게 끝나가는가. 눈부신 광채 속에

내 순결한 쟈니, 천사같은 쟈니를 눈 앞에 두고도 잡지 못하 채, 끝이 뻔한 허상의 인생에 목매어 끌려가게 되는가.


"쟈니 나 약혼하게 됐어,집안과의 결정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한 밤 중 전화선 저 너머에서 너는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다.

"네가 나를 소망한 만큼 나를 미워해라.욕을 해도 싸다.그치만 내 진심은 이렇다.내 인생 오직 하나 뿐인 내 사랑 너, 너를 계속 보는 것만도 닳을까봐 아까워 늘 눈길을 떨구던 나였다. 이건 내 영혼의 고백이다"

나는 전화선 너머에서 심하게 흐느끼는 네 울음 소리를 들으며 전화의 종료버튼을 거칠게 눌렀다..

그리고 스스로를 심하게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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