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은 다시 야학을 나갔다. 빈 교실에 책상 두 개를 맞대어 서로 마주 보며 수업을 하도록  철저한 일대일, 개인수업 구조 배열이다.

내가 이렇게 특별대우를  받아도 되나요 ?”

그럼, 난 너를 꼭 합격시키고야 말겠다는 각오로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했다는 거 아니냐 ? “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다분히 의도된 자부심을 과장했다.

연신은 마주 앉은 변선생의 반 팔 샤츠 아래 뻗친 팔뜩에 시선이 갔다. 검붉게 그을린 근육질 팔뚝은 연필을 쥔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힘살이 꿈틀댄다. 역동적이고 강인한  그의 근육을 보며  문득 연신은 심장이 쿵하며 메아리처럼 온 몸을 저릿하게 한다. 이런 느낌 처음이다. 어느 사람 앞에서 내가 수줍어 했던가.

그는 연신의 눈길을 느꼈는지

요새 농개활 운동 때문에 농촌에 들어가 농민들의 농사 개혁을 지도하고  있어.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스프링쿨러 시설과  유기농비료의 배양이나 시비방법 등도 가르치고 또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하지. 농업도 지금은 아주 첨단 산업형으로 바뀌고 있어. “ 하며 자신의 검붉은 팔뚝을 쓱 훑는다.

연신의 심쿵은 아직 그메아리가 끝나지 않고 그를 가만히 바라 본다.

, 한눈 팔지 말고 어서 계속해야지

연신은 화끈하는 얼굴을 숙여 이제까지 보던 국어 교과서를 다시 들여다 본다.

 

겨울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져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물 이랑 위에 불 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

-

-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忍苦의 물이

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지은이  (        )        제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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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 속을 꼭꼭 채우며 연신은 한숨을 포옥 내쉰다.

 

.

 

고줄 자격 검정고시 결과는 국어, 영어, 사회, 과학 모두 합격인데 수학이 적정 점수애 미달되어 불합격이다. 변선생은 그래도 이 만큼이나 잘 했다고 칭찬이지만 연신은 또 한 해를 꿇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했다.

연신아, 오늘 특별히 내가 맥주 한 잔 살테니 잠깐 들어갈까 ? “

변선생은 길가 생맥주 집 간판을 보며 묻는다.

아니요, 집에 예나가 기다리고 있어요. 빨리 가 봐야 해요

틀림없이 연신이 변선생의 가르침과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연신은 언제나 그에게 고자세이다. 이상하게 그에게는 당연하다는 듯 별로 미안하지 않다. 그 또한 이렇게 도도하고 경계하는 듯 거리를 두는 연신의 태도를 별로 개의치 않는다. 무심한 듯 하면서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뱃심인지 그는 초조하지 않다.

찬바람나게 돌아서서 걷던 연신이 문득 돌아 본다. 아직 그 곳에 서 있는 그를 보자 낭패했다는 듯 얼른 다시 뒤돌아 걷는다. 그도 천천히 연신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 날 밤 연신의 몸은 뜨거웠다. 온 몸의 신경이 올올이 곤두서 와일드켓처럼 어둠 속의 사방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유방이 긴장으로 단단해지고 유두는 꼿꼿하게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격젼의 준비를 하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 느끼지도 못 했던 낮선 곳에서 뜨거운 물이 고이고 있다. 답답함을 견딜 수없어  속치마, 적삼 바람에 활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싸하게 스치는 밤의 냉기도 그녀의 열기를 식히지 못한다. 한달음에 대문께로 나가 문을 연다. 철문에 매단 종이 파르르 떨며 맑은 쇳소리를 내지만. 텅빈 골목은 적막하다.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문을 닫으려는 순간 검은 뭉치 하나 담벽에서 튀어나와 보자기처럼 연신을 감싸 안는다. 기체처럼  무게감 없이 접근한 검은 뭉치의 힘은 연신의 육신을 거의 으스러뜨릴 듯 강력하다. 코 속으로 강하게 스며드는 둘풀의 비릿한 진액 냄새. 낮익은 냄새. 냄새 속 환상으로 몽롱하게 녹아든다.

내가 그이를 마주 안았던가 ? 그이와 맨 살을 비볏던가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그는 어디로 갔지, 내가 꿈을 꾼걸까  연신은 하체를 적신 뜨거운 물에 잠겨 모든게 비현실적이다. 옆자리 예나는 곤하게 자고 있다. 꿈을 꾸는지 방끗 웃기도 한다.

그래 아무 것도 변한 건 없어. 내가 꿈을 꾼거야.

연신은 예나의 뺨에 입을 맞춘다. 예나도 잠결에 엄마를 꼭 끌어 안는다.

 

예나야, 엄마가 오늘 가구점에 가서 예쁜 침대 사줄테니 이젠 건너방에서 공부도 하고 잠도 자고, 아가씨가 다 됐잖아

, 엄마 좋아요, 나도 이제 다 컷으니 독방이 필요해. 내 친구  민혜가 독방 쓴다고 자랑하더라구,  근데 엄마, “ 예나는 잠간 망설이며 엄마를 본다.

이상한데요, 밤마다 아빠 오셔요 ? “

연신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피이! 예나는 안 보고 일찍일찍 나가세요 ? 나 아빠한테 할 말 많은데

그는 밤마다 찾아 왔다. 문단속하고 불도 다 끄고 꿈 속으로 잦아드는 시간, 그도 살그머니 연신의 품 속으로 스며 들어 온다. 아무 말 없다. 다만 살이 부딪치고 비벼대고 빨아들이는 그 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연신은 들풀 냄새 가득한 벌판을 뛰고 구르며 그의 냄새에 흠뻑 취한다.

연신아, 나 이런 날을 몇 년이나 기다렸는지 아니 ? 몇 날 며칠이나 네 집 문 앞에서 밤을 새웠는지 아니 ?

그는 연신의 길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를 움켜잡으며 흐느끼듯  말한다.

아직 관능의 달콤한 여운 속에 나른한 연신이 졸린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낮에 한 번 만나요같이 점심 식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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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07 0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감하고 가네요. 건필하세요 ^^
 


예나가 일곱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연신은 사랑스런 딸, 예나의 머리를 빗어준다. 미리 준비해 둔 분홍  드레스와 짙은 핑크 코트를 입히고

어깨에 가죽 란드셀을 메워 준다. 오른 쪽 가슴에 < 이 예나 >라는 이름표와 그 아래에 길게 느러진 하얀 손수건, 영락없는 햇병아리 학생이 된 것이다.

“ 예나야, 이제 넌 으젓한 학생이야. 선상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 학생이 되야 하는기라. “

“ 엄마, 알았다카이. 이젠 쫌 그만 하그라 “

제 언니 가영이의 되바라진 말투 따라 예나도 말투가 고약하다.

그러나 새 옷 입고 학교에 간다는 설레임으로 반짝이는 눈과 벌름대는 콧구멍은  먼 초원을 향해 달리려는  어린 준마의 그 모습이다.

“ 가스나가 나대기는 , 얌전히 좀 기다리그라, 어매 옷 갈아 입고 나올게니.”

그 때 전화 벨이 울린다. 마을 금고에서 일하는 장주사이다.

“ 사모님, 큰 일 났어예. 사장님이 쓰러지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예 “

“ 음마 , 으찌 그리 되셨습니까 ? 어느 병원 가싰어요 ? “

“ 우선 가까운 늘사랑 병원으로 가싯습니다. 한 이십 분 됐실거로. “

“ 그걸 와 이제 알려주십니꺼 ? “ 연신은 소리를 빽 지르며 대답도 들을 새 없이 전화를 끊고


“ 할무이예 , 예나를 학교에 데리꼬 가 주소. “ 일하는 할매에게 예나를 부탁한다.

그리고  남편의 형인 시아주버님 댁에 전화한다. 동서가 전화를 받는다.

“ 행님 큰 일 났어예 예나 제아범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답니다. 늘사랑 병원이라 합디더. 지는 지금 곧 가 보꾸마요 “

연신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만석씨는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다. 서너 시간을 기다리느라 피를 말리는 긴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을 나오는 만석씨의 침상은 하얀 시트로 얼굴까지 모두 덮혀 있다.

주치의사 김형식 박사는 연신과 형님 가족 앞에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 죄송합니다. 병원에 왔을 때 이미 많은 피가 뇌 속에 차 있어 신속히 핏줄을 차단하고 고여있는 피를 뽑아내었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

만석씨의 사망 원인은 다량의 뇌출혈이라는 것이다.

오일장으로 치룬 만석씨의 장례기간 동안은 연신에게 시공이 아듣히 멀어져 간 무중력 우주 공간 같았다. 머릿 속은 텅 비어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모든 감각은 마비되어 느낌이 없었다. 곡기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여 홀쭉하고 창백한 볼에 눈만 퀭하게 번쩍일 뿐이었다.

“ 지어매, 내 숭늉을 진하게 끓였으니 한 모금이라도 마시게 “ 할매의 권에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듯 멍한 시선만 보이는 연신이다.

그런 연신이가 우주 속 무중력 공백 속의  현실에서는 엄청난 용틀임의 변화가 있는 줄, 어찌 알았을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장례 의식이 끝난 뒤, 연신의 집은 믿을 수 없도록 적막과 고요로 무겁게 가라 앉았다.개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고 이웃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연신은 기진하여 어두운 안방에 누워있고 예나마져 고양이 같이 가벼운 발자국으로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아버지의 흔적과 냄새를 찾는다. 할매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의 소음도 조심하며 가만가만 음식을 만들고 안 먹고 남은 숫한 음식을 공연한 죄책감으로 가슴을 조이며 몰래 두엄더미에 내다 버린다.


그동안 밖에서 시아주버니는 만석씨의 마을 금고를 차지하고 금융자산을 조사하여 명의를 바꾸고 그리고 상속인의 서열을 날조하여 많은 부동산을 합법적으로 차지한다.

연신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집 안의 식량이나 당장의 살림비용 마저 텅 빈 상태였다.

만석씨와 함께 산 이후로는 그가 항상 빈틈없이 만사를 배려해 주었으므로 연신은 일상 필요한 살림살이 비용이나 , 더구나 그의 재산 상태에 대해선  알 필요도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연신의 살아 온 생애 중 가장 안락하고 행복했던 십 년 세월 가운데는 만석씨가 있다.

만석씨는 언제나 연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완벽하게 감싸 주었다.

“ 아 ! 당신 , 나와 어린 예나를 두고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떠나셨습니꺼 ? “

그와의 이별 앞에서 절망과 아쉬움으로 피를 토하듯 울부짖건만 아무 대답이 없다.

당장에 살 길이 막막해진 연신은 생각다 못해  큰아주버님을 찾아 간다.

“ 예나 아부지의 많은 재산은 다 우찌 된 것입니까 ? 우리는 우찌 살아야 합니꺼  “

시아주버니 대신 동서의 싸늘한 대답이 먼저 날라 온다

“ 아니, 자네는 냄편 잃은게 며칠이나 됐는데 벌써 냄편 보다 재산 부터 챙기는가 ? “

하지만 시아주버님 , 선기침을 흠흠 하며

“ 걱정 마시요, 제수씨 , 내가 이녁  살도록은 돌봐 줄꾸마 “

진정 없이 허울  뿐인  무뚝뚝한 대답이다.

시아주버니가 내어 준 몇 푼의 돈을 손에 쥐고 나오며 연신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연신은 서울서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생 정연을 부른다.

“ 내 배운게 짧으니 으찌 알것나. 니가 매형의 재산일체와 그게 으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 봐 도고. “

정연은 누이의 부탁에 두 말 없이 내려 와 남겨진 서류랑 대조하며 실물을 살핀다.

며칠 후 전연은 누이에게 말한다.

“ 누나 정말 무섭십니다. 마치 매형이 이래 될 줄 미리 알고 꾸며낸 일처름 모두 치밀하게 처리됫십니다. 다만 이 집만이 남아 있지만 이것도 언제 날라갈지 모립니다. “

“ 매형과 누나의 가짜 인감도장도 모두 완벽하더만요. “

연신은 눈 앞이 캄캄했다.

‘ 내가 뭐 으쨋다고 ‘

남편 여읜 슬픔 이전에 내 처신을 찾고 살아갈 일이 사막이다.

“ 아주바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 내 남편과 그의 딸 예나의 재산 지분을 강탈하시면 안 되지요 “

연신은 다만 직선적인 항의 외에 방법을 몰랐다.

“ 에이 , 이 보게, 나는 자네를 내 동생 만석이가 엄청 싸고 도니 으쩔 수 없었고만 자네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한 일은 전혀 읎네. 자네 에미의 해괴한 소문이 내 동상을 얼매나 힘들게 했는지 아는가 ?  자네 복은 여기 까정인게 이젠 보따리 싸게. 한영이와 가영이는 우리 사돈과 잘 타협하여 갸들 사는데 지장 읎이 한 자락 떼어 줄테니 그건 걱정 말드라고. “

연신의 무지개  다리는 만석씨이고 이제 그 무지개는 스러져 갔는가 ?


동생 정연이가 하는 말이,

사귀고 있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정연은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녀를 따라 이민을 갈 것인가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 누나, 여기 있어봤자 , 똥밭이다 . 누가 우리를 옳게 봐줄까 말이다. “

“ 아직 그누마들의 손길이 안 간 몇 뙈기 논 밭이 있더라, 내 단대이 넘어가지 않게 손 봐 났다.

이걸 잽싸게 팔아 거두면 우리 미국 가서 자리 잡는데 도움이 될꺼로. ‘

연신에게 남은 건 소중한 딸 예나, 할매는 워낙 이 집 안에서 오래 살아왔으니 이 집 안의 소속이고 연신이 책임 질 일 없으니 그녀의  입지는 가볍다.


연신은 한밤 중에 그 곳을 떠났다.

예나에게 두툼한 겉 옷을 입히고 큼직한 가방을 든 채 가벼운 행장으로 야밤, 사랑하던 만석씨의 집을 떠난 것이다.하도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삼엄하여 슬픔에 빠질 경황도 없었다.

학에 국어 과목과 영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다.

본래는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인데 삼양동 산동네에 몰려 사는 저학력 계층에게 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많은 시간을 쪼개어 야학에 모이는 각종 사람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도시에 나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연신은  학력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동생 정연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누나 연신에게 간곡하게 총고했다.

이다호기심과 궁금함으로 이제 연신은 장로님의 기도 밀씀이 귀에서 멀어진다옆자리 인물에 급관심이 쏠린다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연신은 살그머니 실눈을 뜨고 옆자리를 살짝 훓어 본다.

‘어멋 ! 변기섭 선생님이 ! .< 연신의 봄 >


변기섭 선생은 연신이 다니는 야, 공부해야 해. 지금도 늦지 않아. 야학이나 학원에 다니며 뒤떨어진 실력을 보충하고 검정고시를 보고 고졸 자격증만 따면 대학 갈 수 있어. 누나는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아서 결심만 하면 잘 할 수 있어. “

삼양동 산동네는 무허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있고  주로 시골서 도회지로 나온 사람들이 처음 수월하게 자리잡는 곳이다. 전세나 월세가 비교적 헐했고 없는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사는 만큼 악을 쓰고 싸우는 소리도 자주 있지만 서로 도와주고 기대는 인정도 훈훈한 곳이다.

연신은 이 곳에  안방, 건너방, 손바닥만한 마당 건너 뜰아랫방까지  갖춘 조그만 집을 구입했다. 비록 무허가 집이지만 연신이 딸 예나와 함께 살기에는 넉넉한 공간이다.. 뜰아랫방이 맘에 들었던 건 거기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 수입이 불확실한 연신이 월세로 놓아 생활비에 보태 쓰기 위함이었다.

예나를 지역에 있는 학교로 전학시키고 연신도 시청에서 무료로 교육시키는 야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연신은 문맹은 아니어서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준비반으로 들어 갔다. 일년이 지난 후 이 시험에 합격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핸 준 이가 변기섭 선생이었다. 그는 연신이 고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 준비도 도와 주겠다고 계속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연신은 동네 어귀에 있는 한 식당에서 허드레 일을 하기 시작하며 그 주인의 인도로 교회에도 나가게 되어 바쁘고 고된 생활에 공부는 등한하게 되었다. 사실 연신이 결정적으로 야학을 멀리 한데에는 어느 때 부터인가 변선생의 눈초리가 끈적하게 변해있던게 무척 거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학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일상에 쫒기는 바쁜 나날이 거의 일 년이나 지난 거다.

 

이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왜 찾아왔단 말인가. ‘ 연신은 뜨악한 마음으로 눈을 내리깔고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예배시간이 끝난 후 교육관으로 이동하여 성경공부를 하는 곳에도 그는 따라 왔다. 연신은 시선을 돌려 그를 무시했다. 새침하게 대하는 연신에게 그는 말을 걸어오지 못 했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어린이 예배실에 들러 예나를 찾았다.예나는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제 열 한 살이 되어가는 예나는 다리가 길쭉하고 살빛이 하얘 금방 눈에 띄었다.

예나야, 오늘 목사님 설교 말씀 잘 들었어 ? “

엄마, 난 다행이야

? “

요셉은 형제들이 많아 질투와 시기를 받아 죽을 뻔했고 애급의 노예로 팔려 갔잖아 ? “

나도 사실 , 한영이 오빠, 가영이 언니한테서 많이 맞았다. 아빠가 나만 예뻐한다고 가영 언니는 나를 마구 꼬집기도 했어. “ 예나는 심각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 그랫구나. 왜 그 때 내게 말하지 않았어 ? 아빠한테 일렀으면 걔들 혼 났을텐데.”

엄마, 언니 말이 맞잖아 ? 아빠가 나를 얼마나 귀애했는지 언니 오빠들에게 미안했어. 그래서 그냥 맞았어. “

기집애, 네가 몇 살이나 됐다고 어린게 그런 생각까지 했니 ? “ 예나는 엄마 말에는 딴청을 하며

아빠 보고 싶어, 고향 가면 아빠 거기 있지 않을까 ?”

변선생은 아직도 모녀의 뒤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따라 오고 있다.

집에 도착한 연신은  예나에게 쥬스를 한 잔 주며 책상 앞에 않아 숙제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연신은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 본다. 역시 그는 거기 있었다.

좀 짜증스런 맘이 났지만 꾹 누르고 그에게 다가 간다.그 둘은 나란히 경사진 동네 어구 길을 내려 온다.

사 월 정오가 살짝 지난 한낮의 햇볕은 밝고 따사로우며 이 메마른 산동네에도 듬성듬성 봄꽃들이 피어 있다.

문득 연신은 옛날 푸른 들판에서 소에게 먹일 꼴을  낫으로  써억썩 베어 낼  때 강하게 풍기던 풀냄새를 맡는다. 쌩뚱맞게 이 냄새는 뭔가. 옆에 나란히 걷는 그 남자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결에서 그 냄새는 연신을 어느 한 때, 싱싱하고 달콤한 환상으로 이끈다.

이 냄새! ‘ 코를 흠흠대며  중얼대는 연신을 보며 변기섭은  샤쓰를 펄럭여 슬쩍 냄새를 맞으며 씩 웃는다. ‘ 오데콜론 바꾸기 잘 했다

그리고 그참에 용기를 내어 말한다.

연신아 고졸 검정고시 날짜가 정해 졌어. 7 월 말 쯤인데 아직 세 달이 남았으니 우리 다시 한 번 더 노력해 볼까 ? 그 말을하려고 널 찾아 온거야. “

연신은 지나친 걱정으로 그를 경계헸던 자신의 행동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믿어도 될까 ? 꺼려졌지만 시침을 떼고 관심 없다는 듯 심상하게 묻는다.

선생님 제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요 ?”

당연하지, 넌 틀림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찾아 온거야

 변선생은 열열하게 말한다. 

연신은 그의 과장된 어투체 피식 웃는다.

그도 뒤 늦게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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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의 노래   5   - 급전직하 -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다 -



예나가 일곱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연신은 사랑스런 딸, 예나의 머리를 빗어준다. 미리 준비해 둔 분홍  드레스와 짙은 핑크 코트를 입히고

어깨에 가죽 란드셀을 메워 준다. 오른 쪽 가슴에 < 이 예나 >라는 이름표와 그 아래에 길게 느러진 하얀 손수건, 영락없는 햇병아리 학생이 된 것이다.

“ 예나야, 이제 넌 으젓한 학생이야. 선상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 학생이 되야 하는기라. “

“ 엄마, 알았다카이. 이젠 쫌 그만 하그라 “

제 언니 가영이의 되바라진 말투 따라 예나도 말투가 고약하다.

그러나 새 옷 입고 학교에 간다는 설레임으로 반짝이는 눈과 벌름대는 콧구멍은  먼 초원을 향해 달리려는  어린 준마의 그 모습이다.

“ 가스나가 나대기는 , 얌전히 좀 기다리그라, 어매 옷 갈아 입고 나올게니.”

그 때 전화 벨이 울린다. 마을 금고에서 일하는 장주사이다.

“ 사모님, 큰 일 났어예. 사장님이 쓰러지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예 “

“ 음마 , 으찌 그리 되셨습니까 ? 어느 병원 가싰어요 ? “

“ 우선 가까운 늘사랑 병원으로 가싯습니다. 한 이십 분 됐실거로. “

“ 그걸 와 이제 알려주십니꺼 ? “ 연신은 소리를 빽 지르며 대답도 들을 새 없이 전화를 끊고


“ 할무이예 , 예나를 학교에 데리꼬 가 주소. “ 일하는 할매에게 예나를 부탁한다.

그리고  남편의 형인 시아주버님 댁에 전화한다. 동서가 전화를 받는다.

“ 행님 큰 일 났어예 예나 제아범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답니다. 늘사랑 병원이라 합디더. 지는 지금 곧 가 보꾸마요 “

연신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만석씨는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다. 서너 시간을 기다리느라 피를 말리는 긴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을 나오는 만석씨의 침상은 하얀 시트로 얼굴까지 모두 덮혀 있다.

주치의사 김형식 박사는 연신과 형님 가족 앞에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 죄송합니다. 병원에 왔을 때 이미 많은 피가 뇌 속에 차 있어 신속히 핏줄을 차단하고 고여있는 피를 뽑아내었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

만석씨의 사망 원인은 다량의 뇌출혈이라는 것이다.

오일장으로 치룬 만석씨의 장례기간 동안은 연신에게 시공이 아듣히 멀어져 간 무중력 우주 공간 같았다. 머릿 속은 텅 비어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모든 감각은 마비되어 느낌이 없었다. 곡기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여 홀쭉하고 창백한 볼에 눈만 퀭하게 번쩍일 뿐이었다.

“ 지어매, 내 숭늉을 진하게 끓였으니 한 모금이라도 마시게 “ 할매의 권에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듯 멍한 시선만 보이는 연신이다.

그런 연신이가 우주 속 무중력 공백 속의  현실에서는 엄청난 용틀임의 변화가 있는 줄, 어찌 알았을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장례 의식이 끝난 뒤, 연신의 집은 믿을 수 없도록 적막과 고요로 무겁게 가라 앉았다.개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고 이웃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연신은 기진하여 어두운 안방에 누워있고 예나마져 고양이 같이 가벼운 발자국으로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아버지의 흔적과 냄새를 찾는다. 할매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의 소음도 조심하며 가만가만 음식을 만들고 안 먹고 남은 숫한 음식을 공연한 죄책감으로 가슴을 조이며 몰래 두엄더미에 내다 버린다.


그동안 밖에서 시아주버니는 만석씨의 마을 금고를 차지하고 금융자산을 조사하여 명의를 바꾸고 그리고 상속인의 서열을 날조하여 많은 부동산을 합법적으로 차지한다.

연신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집 안의 식량이나 당장의 살림비용 마저 텅 빈 상태였다.

만석씨와 함께 산 이후로는 그가 항상 빈틈없이 만사를 배려해 주었으므로 연신은 일상 필요한 살림살이 비용이나 , 더구나 그의 재산 상태에 대해선  알 필요도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연신의 살아 온 생애 중 가장 안락하고 행복했던 십 년 세월 가운데는 만석씨가 있다.

만석씨는 언제나 연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완벽하게 감싸 주었다.

“ 아 ! 당신 , 나와 어린 예나를 두고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떠나셨습니꺼 ? “

그와의 이별 앞에서 절망과 아쉬움으로 피를 토하듯 울부짖건만 아무 대답이 없다.

당장에 살 길이 막막해진 연신은 생각다 못해  큰아주버님을 찾아 간다.

“ 예나 아부지의 많은 재산은 다 우찌 된 것입니까 ? 우리는 우찌 살아야 합니꺼  “

시아주버니 대신 동서의 싸늘한 대답이 먼저 날라 온다

“ 아니, 자네는 냄편 잃은게 며칠이나 됐는데 벌써 냄편 보다 재산 부터 챙기는가 ? “

하지만 시아주버님 , 선기침을 흠흠 하며

“ 걱정 마시요, 제수씨 , 내가 이녁  살도록은 돌봐 줄꾸마 “

진정 없이 허울  뿐인  무뚝뚝한 대답이다.

시아주버니가 내어 준 몇 푼의 돈을 손에 쥐고 나오며 연신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연신은 서울서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생 정연을 부른다.

“ 내 배운게 짧으니 으찌 알것나. 니가 매형의 재산일체와 그게 으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 봐 도고. “

정연은 누이의 부탁에 두 말 없이 내려 와 남겨진 서류랑 대조하며 실물을 살핀다.

며칠 후 전연은 누이에게 말한다.

“ 누나 정말 무섭십니다. 마치 매형이 이래 될 줄 미리 알고 꾸며낸 일처름 모두 치밀하게 처리됫십니다. 다만 이 집만이 남아 있지만 이것도 언제 날라갈지 모립니다. “

“ 매형과 누나의 가짜 인감도장도 모두 완벽하더만요. “

연신은 눈 앞이 캄캄했다.

‘ 내가 뭐 으쨋다고 ‘

남편 여읜 슬픔 이전에 내 처신을 찾고 살아갈 일이 사막이다.

“ 아주바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 내 남편과 그의 딸 예나의 재산 지분을 강탈하시면 안 되지요 “

연신은 다만 직선적인 항의 외에 방법을 몰랐다.

“ 에이 , 이 보게, 나는 자네를 내 동생 만석이가 엄청 싸고 도니 으쩔 수 없었고만 자네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한 일은 전혀 읎네. 자네 에미의 해괴한 소문이 내 동상을 얼매나 힘들게 했는지 아는가 ?  자네 복은 여기 까정인게 이젠 보따리 싸게. 한영이와 가영이는 우리 사돈과 잘 타협하여 갸들 사는데 지장 읎이 한 자락 떼어 줄테니 그건 걱정 말드라고. “

연신의 무지개  다리는 만석씨이고 이제 그 무지개는 스러져 갔는가 ?


동생 정연이가 하는 말이,

사귀고 있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정연은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녀를 따라 이민을 갈 것인가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 누나, 여기 있어봤자 , 똥밭이다 . 누가 우리를 옳게 봐줄까 말이다. “

“ 아직 그누마들의 손길이 안 간 몇 뙈기 논 밭이 있더라, 내 단대이 넘어가지 않게 손 봐 났다.

이걸 잽싸게 팔아 거두면 우리 미국 가서 자리 잡는데 도움이 될꺼로. ‘

연신에게 남은 건 소중한 딸 예나, 할매는 워낙 이 집 안에서 오래 살아왔으니 이 집 안의 소속이고 연신이 책임 질 일 없으니 그녀의  입지는 가볍다.


연신은 한밤 중에 그 곳을 떠났다.

예나에게 두툼한 겉 옷을 입히고 큼직한 가방을 든 채 가벼운 행장으로 야밤, 사랑하던 만석씨의 집을 떠난 것이다.하도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삼엄하여 슬픔에 빠질 경황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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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신의 노래  4    - 오늘 흐르는 물은 어제 물이 아니네 -


동연은 제가 원하던대로 웬만한 중농의 외동딸과 혼인하였다.

부모가 아직 정정하고 활력 있지만  도와 줄 장성한 아들이 없어 늘 허전했던 집안이었다.

거기에 용모가 반듯하고 젋은 청년, 부모가 모두 돌아가시어 데릴사위 삼아 가족으로 들이기에 부담이 없으니 됐고, 중학교만을 졸업했다는 짧은 학력이 걸렸지만

딸내미 분이도 싫지 않은 기색이어서 좀 이른듯 하지만 후다닥 혼사를 치룬 것이다.


연신은 우선 외로운 동생 동연에게 짝이 생기고 의지깐이 생겨 안심이 되고 좋았다.

그래서 결혼 예물로 너돈쭝 쌍가락지와 채단을 넉넉히 하고 사돈댁 선물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동연의 혼사가 일사천리로 마무리되고 젊은 그네들이 재미나게 사는 걸 보며 연신은 기쁘고 뿌듯한 마음 이면에 쓸쓸함이 마음에 가득 찬다. 수족 하나가 잘린 듯, 잘린 수족 하나를  영영 아쉽고 그리워하며 허전하게 살 것 같은 마음.

그 예감대로 동연은 처가집에 적극적으로 몸담아 본래부터 그 집 아들이었던 것처럼 한 식구로 충실하게 살고 있다. 그 집으로 기우는 만큼, 누이에게는 덤덤하고 멀어지고, 또 연신의 자격지심인지 모르지만 손 아래 올케 분이도 형님인 자기를 별무시하는듯 뜨악한 느낌이다.

딸을 시집으로 보내는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고 서글플까,

그래서 어무이는 그렇게 정나미 뗄려고 이상하게 변하셨던가.

연신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다만 동연이가 행복하게 살면 그 뿐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이럴 땐 정연이라도 곁에 있어 이 허전함을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건만 정연은  지금  서울에 올라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


정연은 정상적으로 중학교와 읍내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K 법대로 진학했다.

진짜 촌놈에다 ,  한미하고 어려운  집안에서 엄청난 발전이고 자랑스런 일이다.

정연이는 어려서 부터 인생의 쓴맛에 질려 버렸는지 악착같이 공부에 매달렸다.

이 길만이 나의 살 길이란듯 .

또한, 그 뒤에는 누나 연신의 헌신적인 뒷바라지가 있어서 가능하다는 걸 그도  잘 안다.

때문에 더욱 공부에 매진하며 일류대학에 진학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하루 빨리 사법고시에 패스하겠다는 야망을 잊은 적이 없다.

연신은 때때로 서울로 올라가 객지에서 외롭게 사는 동생을 찾아 가  보고 싶다.

하지만 그 다음,

‘ 우리 삼남매 한 둥우리에서 한 솥 밥 먹고 살던 때는 지났다. 결국 제 갈 길 찾아 각기 떠나는게 인생살이 아니가, 낸 누나로서 그들이 행복하게 만족하게 사는 것만 보면 되는기라. 내 뭘 더 바라것나.’

하며 스스로를 타이르며 다독인다.


연신이 낳은 딸 예나는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

집안은 언제나 드나드는 손님으로 북적였고 연신은 자라나는 세 아이들의 어미로서 소임을 다 하고 한 집안의 모든 일을 총괄하고 지휘하는 일이  골몰하고  바쁘다.

연신이 처음 이 집으로 혼인해 들어 왔을 때 11 살이었던 한영이는 16 살이 되었고 가영이도 13 살 , 부쩍부쩍 장성하여 고등학생, 중학생이 되어 있다.

이들은 연신이가 지성으로  사랑과 정성을 쏟아 공을 드렸건만 연신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녹녹지 않다.

배운 것도 없는 가난한 집 딸이 돈에 팔려와 지들의 어미 노릇하는 걸 어떻게 순순히 받아들이느냐 하는 생각인지  이들의 머리가 굵어질수록 거부와 빈정거림은 더욱 거세게 드러난다.

이 곳서 멀지 않은 부산 대도시에 한영이 남매의 외가가 있다.

외조모가 건재하고 형편도 살 만하다 .  딸을 일찍  여읜 외할머니는 홀랑 남겨진 어미없는 어린 외손주 남매의 성장과 안위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경계하여 아이들을 자주 불러 들였다.

‘ 어린 아이들이 어찌 그리 형펜을 자세히 알고 내게 맞먹겠노, 지 외할매가 쯧쯧거리며 하던 말을 야들이 들은거지 ’

연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는게 얘들이 외갓집만 갔다 오면 더욱 쌜쭉해지고 어깃장을 부리는 것이다.

애들 외할머니는 올 봄 부터는 아예 큰 도시 부산에 좋은 학교가 많이 몰려 있으니 아이들을 그 곳으로 전학시키라고 성화를 부린다.

만석씨는 골머리를 앓다가 가영이는 아직 어려서 중학교나 졸업하면 생각해 보겠노라 하고 우선 한영이만 부산 애들 외갓댁으로 보냈다.

한영이는 이미 중학교를 졸업하였기에  부산에 있는 제일고교로 진학시킨 것이다.

몇 달 만에 방학으로 집에 내려온 한영은 키가 크고 등판도 넓직한게 부쩍 자라 으젓하게 보인다.

만석씨도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잘난 모습이 기꺼워서 만면에 웃음이다.

“ 한영이 많이 컷네, 길에서 보면 몰라 보겠다 아이가  ? “

어린 예나도 오빠가 반가워서  

“ 오빠야, “ 하며 종종걸음으로 뛰어 온다.

잠깐 한영은 착잡한 눈길로 예나를 바라 본다. 그리곤 도저히 내키지 않는듯 살짝 고개를 가로 흔든다. 만석씨도 어이없고 놀란듯

“ 이누마, 한 번 안아 주거라. 반갑다고 하는거를. “

연신은 천가지 만가지 생각과 감정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며 한영을 지그시 노려   본다.

마침 가영이가 팔랑팔랑 마당으로 들어서며

“ 오빠 왔나 ? " 반기며 죽 둘러서 있는 가족들이게 " 와 이리들 서 있십니까  ?

오빠 가방 주고 어여  들어가자 “

남매는 손을 잡고 한영의 거처로 들어 가고 마당에 고였던  긴장도 서서히 흩어진다.

만석씨의 가슴은 잠깐 구름이 스쳐갔지만 연신은 맥이 탁 빠지며 다리에 힘이 풀린다.

‘ 앙이  되겠다. 한 번 야들 데불고 얘기를 해 볼거구만 ‘

하지만 얘기를 해 볼 새도 없었다.

하루를 쉬고 난 다음 날 한영이는 학교에서 여름방학 보충수업을 해야 한다고 부산으로 되돌아 갔다.워낙 학교의 공부가 이들에게 지엄하니 천하의 만석씨도 암말 없이 아들을 부산으로 보냈다.

그런데 2학기 개학한 지 한 달 쯤 지난 10 월 어느 날 , 만석씨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한영이가 살인미수로 경찰서에 들어 와 조사를 받고 있다는 연락이다.

“ 보호자가 꼭 오셔야 합니다. “

한영이는 부산서도 가장 악명 높은  고교 연합 깡패 조직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조직은 < 빡사리>라는 명칭으로 학생들 사이에선 공포의 대명사라고 한다  .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는 품행이 바르고 학업 성적도 좋은 모범 학생이었다

이를 빈방에 감금시키고 몇 날 동안이나  여럿이 돌아가며 패고 담뱃불로 지지며, 심지어는 뜨거운 물을 사타구니에 부어 심한 열상을 입히고 그도 모자라 눈을 마구 찔러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도 한영은  이들을 선동하고 몸소 행동으로 옮기고,앞장 선 아주 죄질이 나쁜 학생으로 지목된데에 만석씨는 놀라움을 넘어 거의 기절할 지경이다.

‘ 왜 네 눔이 이런 끔찍한 짓을  ‘



청을 넣어 경찰 구치실에 있는 아들 한영을 만난 만석씨는 잘 생겼지만 아직 어린 아들의 얼굴을 심난하게 바라 본다.

“ 한영아 네 엄마는 착한 여자였어. 네 꼴을 본다면 얼마나 슬프고 실망하시겠노 ? “


무심코 첫 번 째 나온 말이다.

“ 아버지, 엄마를 입에 담을 자격이나 있나요 ? “ 싸늘한 한영의 대답.

“ 그 무신 말이고 ? 네 내게 무신 유감있나 ? “

“ 아부지가 새엄마를 들이고 난 뒤 부터 난 아부지를 떠났십니더,

그래 난 이제 내 맘 내키는대로 살겠십니다. 나를 내비러 두소 “

만석씨는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오고 억장이 무너진다.

“ 아들아 ,나는 너를 경찰에 선처해 달라고 빌 생각은 전혀 없데이 네 죄가 뭐신지 깊이 생각하고 그 죄값을 다 받고 나오그래이 "

쓴웃음을 지으며 한영을 한 번 더 바라 본 후 그 곳을 나왔다.

만석씨는 피해학생을 찾아 병원에 들르고 그 부모에게 깊이 사과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성심을 다 하겠다고 약속했다.

다행히 학생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다만 눈을 크게 다치고 열상이 심하므로 긴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충격,  실망과 낙담에 힘이 빠진 만석씨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왔다.

연신은 그의 양복 저고리를 받아 장에 걸며 남편의 피곤한 얼굴을 본다.

“ 한영이가 아주 빗나갔더군, 깡패 중에도 상깡패가 되었어. “ 한탄한다.

연신은 아무 대답이 없다.

“ 당신은 그걸 애당초 눈치도 채지 몬했나 ? ‘

“ 대강은 느끼고 있었십니다. 그란디 이제 겨우 부산 가서 몇 달 만인데 그런 대담한 짓을 벌리리란 걸

전인들 우찌 알았겠습니꺼 ? “

연신은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한다.

만석씨는 한영의 반항적인 비수같은 눈초리가 서늘하게 다가오고  연신의 지극히 당연스럽고 합리적인 말에 불현듯 혼란스러워 진다.

‘ 나에게 죄가 많은가 '

아들의 질풍노도 같은 사춘기 변화를 접하며 만석씨는 여느 아버지 보다 더

깊은 회의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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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신의 노래 4 -  읍내 마을 괴담 -




이 여인 몇이 모여 으시시한 대화를 나눈다.

“ 원한 맺힌 귀신이라카이 “읍내에서  해괴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

수상한 소문은 여인들 입으로부터 시작한다.

시냇가 빨래터는 여인네들이 동네 소식을 전하며 수다떨기 더 없이 좋은 장소다.

더위가 한 풀  꺽인 어느 오후, 느즈막

“ 구신은 12 시 넘어서 다니는거 아닌가 ? “

“ 천년 묵은 여시가 둔갑을 했다하데 “ 다른 여인의 숨 죽인 말이다.

“ 에이 ! 그건 옛날 야그에 나오는 거 아이가 ? 설마 그럴라고 “ 하하 웃는 여인에게 다른 여자가 말한다.

“ 맨날 산 너머 공동묘지에서 울던 여시 다 알제 ? 그기 요샌 잠잠하구만. 그기 둔갑한거 아일까? “듣던 여인들은 싸하니 목덜미에 소름이 끼친다. 산 그림자가 제법 길게 내려 와 있다.. 여인들은  갑자기 바쁘게 서둘러 빨래를 개울물에 헹구어 다라이에 담고  어둡기 전에 집에 간다고  제각기 종종걸음으로 혜어진다.


저녁 어스름이 내리는 장터에는 인적이 끊어져 휑한 바람 뿐이다.

거기에 형광색이 돌도록  프르스름한 얼굴로  소복한 여인이 배회하고 있다.

큰 길을 한 바퀴 휘돌아 골목길을 꺽어 돌며 혹시 늦도록 전을 연 술집 앞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돌아 댕기는거다.

여인네나 아이들이 수상하게 쳐다 보면 얼른 눈을 깔고 고개를 외로 꼬며 소리없이 지나치는 걸 보면 아주 정신놓은 미친년은  아닌듯 하다.

그러나 기골이 좋아 힘께나  쓸 만한 장정을 만나면 살그머니 눈을 치떠  헤브즉이 웃는다.

정신이 올바른 사내라면 ‘ 에이 재수없는 여시 년’ 하고 침을 탁 뱉으며 처자식 기다리는 집으로 가겠지만

술이 한 두 잔 올라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거나 말거나, 쌀독에 쌀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아새끼들이 배고파 울거나 말거나 거나하게 정신줄 헐렁한 한량들, 그리고 동가숙 서가식하는 부랑아,  또는 게으르고 마련없어 장가 못간 노총각들에게  이런 횡재가 어딜쏜가.

더구나 흥정도 않고  앙탈도 없이 사내가 손을 잡아 끌면  순순히 따라간다지 않는가.

그리고  헛간에서건, 으슥한 산비탈 흙바닥에서건, 심지어 막다른 외진 골목에서도 치마를 깔고 다리를 벌린다는 소문은 어디서 난걸까.


동네에서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과수댁네는 여인들의 마실터다.

“아유, 망칙스러버.  사내에 환장한 년이 지랄병하고 다니는 거랑게. “

왈가닥스럽고 입이 거친 사평댁이 들어 앉자마자 초장에  본론으로 직행한다.

“ 그 소문 듣고선 우리 서방은  초저녁 부터 절대 못 나가게 하고 있구만 “

“ 그럼 , 그래야지러.   어데 맴 놓고 밤마실 다닐랑가 ?”

늙스구레한 영수 엄니 말.

“ 우리 주접은 저녁만 되면 엉뎅이를 들썩들썩 내뺄 궁리만 하는디 ?

왁자한 웃음소리.

“ 이아니, 근데 그기  구신이 맞다 카데. 일만 끝나면  연기처럼 사라져 흔적이 읎다 안 카나 ? “

“ 참으로 모를 일이제, 둔갑한 여시가 사내들 정기를 쏙쏙 빨아 사람이 될라카는게 아인교 ?”

“ 상사병이라 캅디더. 상사병이 깊으모 미친 지랄이 나서 산지사방 쏘다닌다 안 그렇습디어 ?  그 기집이 숨을 색색 헐떡이며 만석이, 만석이 하더랍니더 “

반짓고리를 갖고 와 조용히  버선 볼을 깊던 젊은 새댁이  낮은 소리로 말한다.  새댁의 낮은 목소리는 마침 사평댁이 떠드는 열띤 주장에 덮여 좌중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새댁은  어젯 밤 남편의 말이 길게 여운으로 남은 것이다.

사평댁의 말은 이렇다.

우리 여자들이 나서서 그 미친년이 우리 동네에  들어 오지 못하게 지키자는 것이다. 못 믿을 것은 남정네들잉께 우리가 낼로부터 마을 입구에서 그 미친 년이 못 들어오게 교대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나문 동네 한가운데로 끌고 가 온 남정네가 보는 앞에서 태장을 치자는 것이다.

“ 맞십니다. 맞애요. 우리 서방들은 우리가 지켜내야 합니더. 발쎄 넘어 간 놈이 있구만요 “

갑자기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드는 새댁의 열띤  모습에  모두들 놀라 할 말을 잊고  입을 헤 벌린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연신은 마음이 뒤숭숭하니, 매일 밤 꿈자리까지 사납다.

못 견디게 어매가 걱정되는 것이다. 신행에서 돌아올 때 어매는 어데 갔일꼬.

어매의 시름진 얼굴이 이해가 안 되면서 그래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마음 같아선 한 걸음에 친정 집 가고 싶지만 이제 그 절차가 녹록지 않다.

남편에게 얘기하고 허락받고. 그리고 차편이야 대 주겠지만 그것도 부담스럽다.

그리고 오후에 학교서 돌아오는 한영이와 가영이, 이제 겨우 친해지고 있는데.

정연이는 고등학교 공부를 위해 서울에 가 있고 하는 수 없이 동연에게 인편을 보낸다.

‘ 누나가 너를 보고잡구나, 일간 와 주거라 ‘

동연은 연락을 받자 곧 누나 보러 왔지만 ,

오히려  누나를 보자마자 제 불평부터 한다.

어매가 통 농사일은 뒷전이니 혼자하기 너무 힘들다고.

“ 어매는 뭐 하는디 ? 모 하고 있다냐 ? “

“ 어매는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하고,  언제나 어매와 난 같이 아침밥을 먹는다. “

“ 그럼 고마분거 아이가 ?

“ 그리고 뭐하는디 ? “ 연신의 성급한 물음에 동연은 느긋하게 대답한다.

“ 상 치우고, 집안 청소하고 , 그리고 세수하고 나가 버린다. “

“ 어데로 가는데 ? “ 연신의 물음에

“ 낸들 아나 , 어매는 미쳤다. 옛날 우리 어매가 아니다. “

“ 동연아, 네가 단대이 어매를 살피거라. 난 걱정이 되서 잠도 안 온다 카이 “

“ 누이야, 어매보다 내가 더 힘든기라. 농사를 어예 짓는지 내가 어찌 알겠노  ? “

“ 그럼, 차라리 머슴 하나 두거라. 그만한 규모의 농사라면 머슴 하나 감당 안 되겠나 ? “

하는 연신의 말에는 별무관심으로

“ 누이야 내가 기양 장가 들면 어떻겠노 ? 아내와  함께 농사짓고, 사돈 집안도  생기니 의지되고 ,

난 의지가지가 필요한기라. “

동연은 심각한 얘기를 하면서도 히힛 웃는다.

“ 으야튼 좋고, 우선에 어매를 잘 살피그라 “  연신도 웃고 만다.





그 해괴한 소문은  얼마  되지 않아 늦가을, 어느 날  속절없이  스러졌다.

인가에서 한참  떨어진 외진 산  골짜기, 으슥한 구덩에 목이 졸린 채 숨져 있는 여인이 발견된 것이다.

흙법벅 치마지만 단정히 여며있고  의외로 그 얼굴은 고요하다.

 인고하며 남아있는  평안한 보살의 미소.  그 미소가 그녀의 죽음을 덜 슬프게 한다.

“ 에이 ! 어떤 개노무새끼가 이렇게 끔찍한 짓을 “

시체를 거두는 경관은 그 처염한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며 침을 탁 뱉는다.


연신은 나서지 않았다.

동연에게 돈을 주어 사람을 사고 야밤을 이용해 조용히 매장하였다.

‘ 어매 와 그리 처참하게 갔노 ?  누가 그랫노 ? 어매는 그런 헤설픈 사람이 아니었는기라. 왜 내 가슴에 못을 박고 가 비릿노 ‘ 남 몰래 가슴을 칠 뿐이다.

연신은 풍문으로 들었다. 어매가 정신이 나가 버리면 헛소리처럼  ‘ 만석이’를 불렀다고.

‘ 만석이가 누고 , 설마하니 -- 만석이 하나 둘이 아닐끼고, ‘

그러나 마음은 쿵쿵 심장을 두드리며  평안치 않다.

그러나 또 어쩌랴, 연신의 뱃 속에는 사랑하고 의지하는 남편 만석씨의 어린 생명이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만석씨는  성실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다. 그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나 파란 없이 언제나  일정 하다.

연신이 회임한 것을 안 후론 더욱 연신을 위해주고  극진하다.


그들은 서로 불행한 어매에 대해선 약속이나 한듯이 아무 말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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