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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르릉 때르릉 " 전화 벨이 울린다.

' 누구여? 안적 식전인데' 딸들은 지금 이 시각 즈이 남편 , 애들 학교 보내고 출근시키랴

바쁠긴데,  대체 누굴꼬?' 하며 엄 노파는 수화기를 집어 든다.

" 여보시요?" 댓구하자, 저 쪽에서 잠깐 낮은 숨소리가 나며 잠잠하다.

" 아니, 누구시유? 전화했음 말을 해야지" 하고 재촉하자, 망서리며 묻는다.

" 엄 선녀씨 댁 맞습니까? " 이상하게도 매우 낮고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노파는 갑자기 심하게 툭탁이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묻는다.

" 너 명호,  명호야?" 반응이 없자, 속삭이듯 다시 묻는다. " 명호 맞지야?"

저 쪽에서 흐느끼듯. 말소리가 목구멍으로 기어들듯

" 네, 명호입니다. 어머니. 저를 금방 알아 보시는군요."

" 그럼 이 어미가 널 어찌 잊겠느냐? 지금도 널 생각하고 있었어야. 이 무정한 눔아."

끝으로는 사설조의 울음이 묻어난다.

네 놈이 이십육 년 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를 죽은 자식으로 잊으라고 울부짖으며

떠난 너지만 이 어미가 어찌 너를 잊을 수가 있겠느냐?목울대를 비집고 가득이 북받치는

한숨같은 넋두리를 지그시 삼키며 신중하게 묻는다.

" 게가 어디냐? 왜 어미에게 당장 오지 않고 전화인게냐?"

" 어머니 죄송합니다. 여기는 미국이얘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 건강은 어떠세요?연세도 많으실텐데요."

이것아 어미가 그렇게 궁금하면서 이제사 전화냐? 하는 원망이 쏟아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 오냐, 어미는 잘 지낸다.편하게 잘 지내니 건강도 괘않다. 근데 너는 무고하냐? 처자식도 잘

거느리고?" 명호는 " 네" 하고 애매하게 대답을 끌다가 " 어머니," 하고 부른다.

" 여기로 한 번 오셨으면 하는데요. 오실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음성은 어둡고 침울하며 쥐어짜듯 나즉하고 또렷했다.

엄노파는 등골을 달리는 서늘한 한기를 떨치지 못한 채 " 왜 무슨 일이 있는게냐? 어서 말을 하여라."

"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저 뵙고 싶어서지요. 구경삼아 오세요."

태연한 척 딴청을 부린다.

엄노파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 오냐, 내가 너를 기다려 이 때까지 살아 왔거늘

너를 보러 지옥엔들 못 갈까?네가 나를 보고잡아 부르는데 가야지. 암 가고 말고,

뱅기 타도 끄떡없다 가마, 곧 가마."

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지금 처제가 한국 나가 있으니 필요한 수속이랑 해서 잘 모시고 올겁니다.

곧 뵈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요' 의 여운이 좀 길어지며, 전화 속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꿈을 꾼 양 . 믿기지 않는 듯 사방을 새삼 두리번거리며, 얼빠진 듯 서 있는 노파의

어깨 너머로 아침 해가 화사하고 싱그럽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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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노파가 잠을 깼을 때는 아직 이른 새벽.

늘 같은 시각이다. 노파는 하앟게 세어 성긴 머리칼을 손갈퀴로 대충 쓸어 넘기며

뒤란 우물가로 나왔다. 하얀 김이 뽀얗게 솟아 오르는 우물 속에 두레박을 넣어 맑은

물을 찰랑찰랑 길어 올린다. 우선 달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머금어 입 안을 가신 후,

주름 진 얼굴을 뽀득뽀득 소리나도록 말갛게 씼는다.

두 번 째 떠올린 물은 조루에 담아 장독대 옆으로 가꾸어 놓은 꽃 밭에 뿌린다. 거기에는

키 순서대로 젤 앞에는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따알리아, 접시 꽃들이 새벽 이슬에

함초롬이 젖은 채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하다. 노파는 조루를 높이 쳐들어 듬뿍듬뿍 물을

준다. 빨갛고 노란 꽃 잎, 푸른 잎사귀 위로 또르륵 또르륵 굴러 떨어지는 수정 물방울들이

언제나처럼 가슴저린 그리움으로 젖어든다.

분홍 꽃 송이 조롱조롱 매달고 낮으막한 봉숭아는, 밑으로 아직 어린 두 딸 애들같고, 물 맞을

때마다 우쭐대는 따알리아 접시 꽃은 쑴벅쑴벅 잘도 크던 아들들 같다. 영감이 있고

오남매가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시끌벅적 살 때는 하루하루를 꾸려가기가 참으로 바쁘고

살기에 골몰했었지.

먼저 저 세상 떠나버린 영감과 두 아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찌르는듯 생생한 아픔이나--

노파는 새삼 고개를 저으며 털어버리고 만다.

두 딸은 제각기 좋은 서방 만나 잘 살고 있으니 감사하고, 그리고 세 째 명호가 아직 있다.

오랜동안 못보고 있으나 언젠가는 기어코 이 어미를 찾을 것이다.

' 암 오구 말구' 엄노파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 째 물을 길어올려 걸레를

힘차게 빨아 헹구어, 마루사이로 둔 건너 방으로 간다.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고 구석구석 깨끗이 닦는다. 빈 방인듯 냉냉한데 매일 닦아

반짝이는 장판 방이며 오래된 서랍장과 책상이 누군가를 기다리는듯 긴장되어 있다.

 낡아서 모서리가 둥굴고 칠도 벗겨져 수없는 흠집과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책상을 닦으며

' 이게 우리 집 우등생을 길러낸 책상이여. 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상타고 대학까정 다닌게여.'

하며 장한 명호의 학생 때 모습을 떠올린다.그러나 지금 노파 꼍에 없는 명호를 생각하며 자기

최면을 걸듯 ' 암1 올거여 오구말구, 그러니 언제라도 오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치워놔야

되지 않것어? ' 또 다짐하며 옷소매를 걷어올려 가늘게 드러난 팔뚝에 울근불근 힘줄이 솟도록 

힘차게 닦고 또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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