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금요일


5시에 일어났다. 평소 집에서는 4시에 일어나는데, 늦게 일어난 편이다. 어제 일정은 차 탄 것이 거의 전부인데, 은근 피곤했던가 보다.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땅끝마을에서 남창까지 '길찾기'를 검색해보니, 22km, 도보로 5시간 54분 걸린다고 나온다. 첫날부터 많이 걷는 것은 무리. 적당한 거리와 시간 같다.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정리하여 640분에 모텔을 나섰다. 길치라, 어떻게 경로를 잡아야 하는지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살펴봤다. 친절하게 안내가 나오는데, 이상하게 방향을 잘 잡지 못하겠다. 서너 번 헤매다 겨우 방향을 잡았다. 지나오면서 뒤돌아보니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경로인데, 너무 상세하게 안내해줘, 되려 헤맸던 것 같다. 과도한 친절은 불친절과 매한가지란 생각이 든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이른 시각이라 공기도 상쾌하고 차량 통행도 적다. 아침 햇살 빛나는 바다를 보며 걸으니 절로 흥이 난다. 시 한 수 읊을 만도 한데, ', 바다여~' 밖에는 읊을 말이 없다. 애고, 이놈의 퍽퍽한 감성. 이봐, 너무 타박하지 말어. 저 아름다운 풍경이 자네 몸에 알알이 박혀 언젠가는 시가 되어 나올지도 모르니. 좋은 풍경 만났다고 금방 시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지나치게 성급한 겨. 그런가?

벚나무 가로수에 벚꽃이 한창이다. 어제 땅끝 표지석 찾아갈 때는 간간이 꽃망울 터뜨린 것만 보여 만개한 것을 보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차량 통행이 적어 벚꽃 가로수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보았다(이건 처음 공개하는 비밀인데, 스마트폰을 구입한 후 처음으로 셀카를 찍었다. 스마트폰을 구입한 건 3년 전이다).



땅끝마을이 점점 멀어져 보일 즈음,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무심히 지나치는 게 서먹하여 기세 좋게(?) 인사를 했더니, "좋은 여행 되세요."라고 화답해줬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도중(道中)에 고마운 분을 한 분 더 만났다. 소형 트럭을 몰고 가던 분이었는데, 사탕 한 개를 건네주며 힘내라고 했다. 작은 친절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해안도로 걷기를 끝내고 일반 국도로 들어섰다. 길옆 밭에 유채꽃들이 만발했다. 오호라, 너희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잠시 유채꽃밭에 들어가 셀카를 찍었다. 작년 늦가을에 나도 밭에다 유채꽃씨를 뿌렸었다. 그런데 겨울 날씨가 너무 따뜻해 그만 싹이 터버렸고, 다시 추워진 날씨에 시들고 말았다. 유채꽃을 못 보게 된 아쉬운 마음을 여기서 달래본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관리했기에 이렇게 유채꽃이 만발했지? 이상 기온을 여기도 겪었을 텐데



남창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는다. 조금 욕심을 부려 북일면까지 가기로 했다. 남창을 지나 북평면에서 짜장면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1시가 조금 지나 들어갔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어 살짝 당황했다. 점심 타임이 끝났는데, 눈치 없이 들어왔구나. 홀대받겠는데. 다행히, 아니었다! 내 뒤로 손님들이 네 다섯 명 더 들어왔다. ~ 다행. 노인 한 분이 들어서며 짜장면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물은 셀프'라고 써있는 것을 못 보셨는지, 주인장이 물 갖다 주기를 멀뚱멀뚱 기다리는듯한 모습이 안쓰러워 물 한 잔을 떠다 드렸다. 약간 어색해하며 고맙다고 하셨다. 이거 내가 괜히 과도한 친절을 베푼 건가? 노인분도 '물은 셀프'라는 걸 알고 계시는데, 괜스레 오지랖 넓게 친절을 베푼 건가? , 그래도 나쁜 일 한 건 아니니


점심을 먹고 식당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건물들은 을씨년스럽고 사람들은 노인 일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면서 도로 주변의 폐가도 여러 채 보았다. 출발 즈음의 싱그럽던 풍경과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 똑같은 해남군인데 어찌 이리. (이곳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 만나는 여러 지역이 대부분 비슷했다.) 



북일면에서 1박을 해야 하기에 숙박지를 검색했는데, 펜션 하나만 검색되었다. 가격이 비쌀 것 같아 약간 염려하며 전화했는데, 4만 원이란다. 그 정도면 땡큐지~. 펜션을 향해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전화가 왔다. 좀 전에 통화했던 펜션 주인. 방이 없단다. 손님 한 분이 간다고 했다가 다시 묵는다고 했다며, 미안하단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조심해서 오세요~. " 허허, 이거 참. 알겠다고 말하면서 혹시 다른데 묵을 곳이 없냐고 물었더니, 옆 사람과 뭐라고 말하더니, 교회에 한번 물어보라고 한다.

북일면의 얄궂은 펜션 가까이에 도착한 것은 515. 6시 전에는 숙소를 잡아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펜션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 멀리 교회가 보인다. 펜션 주인이 말한 교회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대가리 도치 삼아 한번 재워달라고 통사정해보자. 목사님이 길 잃은 어린 양을 그냥 내치지는 않으시겠지.

교회에 도착해 목사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초면에 죄송합니다.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 문을 열고 나온 목사님. 인상이 선해 보인다.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1박을 부탁드리니, 이런저런 얘기 끝에, 묵고 가라고 허락하셨다. "감사합니다!" 교육관으로 쓰는 곳을 안내해주며, 전기 난방을 켜준다. 갈 때는 코드를 꼭 빼고 가라며, 이부자리가 없으면 교육관에 있는 이부자리도 쓰란다. 몇 시에 출발할 거냐고 하기에, 보통 4시에 일어나니 늦어도 6시에는 출발할 거라고 답했더니, 깜짝 놀란다. 늦게 출발하면 다음 날(토요일) 교회 행사에 혹 지장을 줄까 봐 걱정하셨던 모양인데, 예상보다 너무 일찍 출발해 놀라신 모양이다.



누룽지와 구운 계란 포도 젤리로 저녁을 때웠다. 씻기가 귀찮아 물수건으로 고양이 세수를 한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교육관이라 그런지 여러 서류와 사진 책들이 진열돼있는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인분들이 전부 노인이었다! 목사님은 무슨 흥으로 목회를 하실까, 별 쓰잘데기 없는 염려를 했다.

가족 단톡방에 2신을 띄우고, 괴괴한 어둠 속에서 잠을 청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다.) 내일은 강진읍까지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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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일 목요일

 

마침내 출발했다. 530, 집을 나섰다. 1시간 40분 걸어서 서산 버스터미널에 도착, 815분 광주행 버스를 탔다. 나이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뜬금없는 국토 종단 도보 여행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다. 아내에게는 '구도(求道) 여행'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 개구라다. '그냥' 나선 것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냥'도 하나의 명분이다. 목숨이 붙어있으니 '그냥' 사는 것처럼, 사지(四肢) 움직일 수 있으니 '그냥' 길을 떠나보는 것이다. 물론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는 있다. 내가 태어난 이 땅을 끝에서 끝까지 한번 걸어보고 싶다, 퇴직 이후의 삶을 그려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세상 물정을 경험하고 싶다 등등. 그러나 역시 개구라다. '그냥'이 정답이다. '그냥'이야말로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명분이다. 아닌가?

  

장기 여행을 위해서는 시간, 건강, 비용, 가족의 후원이 필요한데, 이번 도보 여행엔 이 모든 것이 완비되었다. 특히 가족의 심적 후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내의 전폭적인 응원, 군대 간 아들과 해외에 있는 딸의 격려. , 내가 그간 헛살지는 않았군!

  

버스가 광주에 들어선다. 광주에 들어설 때는 항상 숙연한 마음이 든다. 피로써 지켜낸 민주화의 성지이니 그런 마음이 어이 아니 들지 않으랴. 광주에서 땅끝마을 가는 버스를 찾으니, 없다! 오잉? 터미널에서 안내 서비스를 하는 분에게 물으니, 직통이 한 대 있는데 이미 갔고, 해남에 가서 갈아타면 된단다. 아이고, 고마워라!

 

해남 터미널에서 키오스크로 차표를 끊지 못해 당황해하는 노인분을 도와드렸다. 매표소가 옆에 있는데, 키오스크를 이용해 달라는 문구를 써 붙여 놓았다. 매표소를 폐쇄하고 키오스크를 설치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노인은 얼마 전까지도 매표소를 이용해 표를 끊었던 듯싶다. 이 노인 같은 경우가 얼마간 계속 나타나겠지? 이런 경우를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했던가? 급격히 자동화되는 시대에 스트레스받는 노인들이 많으실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나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연세 많으신 분들은 어떠실꼬?

  

땅끝마을에 도착했다. 245. , 여기가 한반도의 끝이란 말인가!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별반 없다. 땅끝 표지석이 있는 곳을 향했다. 날씨가 흐려서 바다 전망이 그리 선명하지는 않다. 중간중간 꽃망울을 터뜨린 벚나무들이 보인다. 여행을 마칠 때쯤엔, 벚꽃이 다 졌겠지? 땅끝 표지석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보수 공사를 하고 있다. 일하시는 분께, 송구한 마음으로, 사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다. "바쁘면 안 찍는디, 다행히." 위세를 부리며 사진을 찍어준다. , 그럴 수 있지. 누구는 뼈 빠지게 일하는데, 누구는 놀러 다니고. 여하간 찍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돌아 나오는 길에 땅끝 전망대에 올랐다. 매표소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오지 않았으면 입장료를 내야 한단다. 아이고, 오나가나 이놈의 입장료 타령. 과한 비용(1천 원)은 아니지만 약간 떨떠름한 마음으로 입장료를 내고 전망대에 올랐다. 남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날이 흐려 그다지 큰 감흥이 일지 않는다. 지자체마다 조금 이름 있는 곳에 전망대 세우는 게 유행인 듯싶다. 개인적으론, 그다지 호감 가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땅끝마을 산 정상에 서면 절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데, 굳이 이물질 같은 전망대를 세우고 또 거기로 이동하는 모노레일을 설치할 필요가 있을까? 자연 훼손이 과도하다. 관광이란 명목으로 인공물을 설치하는 것에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약간 이른 저녁을 먹고, 6시쯤 '푸른 모텔'에 들어갔다. 한 민박 주인이 소개해 준 곳이다. 그 민박에 머물려고 했는데, 예약이 차서 불가하다며 이곳을 소개해줬다. 침대방이 4만 원, 온돌방이 3만 원이란다. 당연히 온돌방이쥐! 야한 영상물을 좀 볼까 하고 채널을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안 나온다. 이 사람아, 정신 차리게!

  

가족 단톡방에 1일 보고를 하고 속옷을 빨아 넌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8. 내일은 해남 남창까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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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그 정(情)을 말한 것이다. 말로 나타낸 정을 다듬어 글로 표현한 것을 시가(詩歌)라 한다. 노래 중에서 최고의 노래는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악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연스럽게 천기(天機)를 드러낸 것이다. 시경의 국풍(國風)은 대부분 마을과 골목에서 불려진 것들이나 마음을 순화시키고 그릇된 정치를 풍자하려는 뜻이 있었다. 이들 노래는 요순시대의 노래처럼 진선진미(盡善盡美)하지는 않으나 올바른 성정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받았다. 때문에 각 나라에서 이를 채집해 올린 뒤 태사(太師)의 선별을 거쳐 가락을 덧붙여 궁중의 연회에 사용됐고, 더불어 공부하는 선비들과 전야(田野)에서 일하는 백성들도 함께 부르고 즐겼다. 하여 모두 그 노래를 부르고 즐기면서 자신도 모르게 선한 마음을 배양했으니, 이것이 바로 시교(詩敎)였다.  

   

그런데 주나라 이래로 화이(華夷)가 뒤섞이고 방언(方言)이 날로 달라졌으며 풍속도 부박해지고 사특함도 늘어났다. 방언이 달라지면서 시가(詩歌)의 체제(體制)도 달라졌고, 풍속이 부박해지고 사특함이 늘어나면서 정(情)과 글도 상응하지 않게 되었다. 때문에 성률(聲律)과 격조는 날로 세련되고 고상해졌지만 그럴수록 자연스러움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글의 이치(理致) 또한 바르게 보이긴 했지만 천기와는 점점 더 거리가 있게 되었다. 이러하니 그러한 노래를 가지고 시경의 풍아(風雅)를 이어 나라를 교화하려 한들 될 수 있었겠는가! 


이항(里巷)의 노래는 자연스러운 가락에서 나온 것들로 그 박자는 비록 화이의 차이는 있으나 노랫말 대부분은 그 풍속의 사정(邪正)에서 나온 것인바, 대상에 감응하여 말로 표현된 점에 있어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지금의 음악이 옛 음악과 다를 바 없다”는 맹자의 말 그대로인 것이다. 그러나 그 노랫말들이 옛것을 본받지 않고 사리(詞理)가 비속하여 나라에서 채집하지 아니하였고 태사도 이를 도외시해 천자에게 올리지 않았다. 때문에 후세에 치란득실(治亂得失)의 자취를 상고할 수 없게 됐으니, 시교(詩敎)는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동방의 이족(夷族)이다. 기풍이 편협하고 성음(聲音)도 좋지 않아 시율(詩律)의 공교함은 애초부터 찾을 수가 없다. 노래라는 것은 모두 상스러운 말에다 간혹 문자(文字)가 섞여 있는 정도로, 옛것을 좋아하는 사대부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무시했기에, 대부분 우부우부(愚夫愚婦)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다. 하여 군자들은 이를 제대로 평가하거나 취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저 시경의 풍이라는 것은 바로 민간에서 통상적으로 얘기되던 것을 노래로 읊은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 당시 그 노래를 들은 것이 지금 사람이 지금 민간에서 불려지는 노래를 듣는 것과 똑같다 할 수 있다! 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비록 그 노래들이 입으로 소리 내어 박자를 맞춘 형편없는 것들이지만 그 말들은 모두 충심(衷心)에서 나와 이리저리 억지로 짜 맞춘 것이 아닌 천진(天眞)이 발로된 것이라고. 나무꾼의 노래나 농부들의 노래 또한 자연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왔기에 이들의 노래도 저 사대부들의 이리저리 퇴고하여 그 말은 옛것을 본받았으나 천기는 잃어버린 작품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살필 수 있는 자가 그 노랫말이나 가락의 천근함에 매몰되지 않고 마음으로 그 노래의 진의를 살필 수 있다면 백성들의 선한 마음을 진작시키고 풍속을 순후하게 만드는데 쓸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예와 이제의 차이가 있겠는가! 또 그 노랫말에서 비유를 쓰고 흥(興)을 사용하며 시대를 아파하고 옛날을 생각하는 것은 간혹 현인 군자의 입에서 나온 것도 있을 것인즉 그 충군애상(忠君愛上)의 뜻은 말이 끝나도 여운이 남을 것이다. 이런 것은 시경 풍아(風雅)의 유지(遺旨)를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 말은 천근하면서도 분명하고 그 뜻은 자연스러우면서 분명히 드러나 아녀자들도 그것을 들으면 노래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위아래에 두루 통하는 시교에 적합하니, 이는 결코 버려둘 바가 아니다.     


삼가 예부터 지금까지 전해오던 것을 채집하여 2책으로 만들어 『대동풍요(大東風謠)』라 이름하니, 천여 편이 된다. 또 별곡(別曲) 수십 수를 그 뒤에 함께 붙여 태사의 선별을 기다린다. 이를 취한다면 성스런 조정에서 민간의 풍속을 살피려는 정사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시가의 내용 중 다소 외설스러운 것이 있는데, 공자께서도 음란한 노래라 평가받는 정나라와 위나라의 시들을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은 취지로 그대로 두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또한 주자도 그런 시들을 통해 반성하며 권선징악의 자료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던 바를 상기하면 좋을 것 같다. 윗자리에 있는 이들은 더더욱 알아야 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대동풍요서(大東風謠序)』이다. 홍대용은 실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선진적 식견을 견지했던 이라고 할 수 있다. 위 글에서도 그런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사대부들의 고상한 한시 대신 민간 가요에 주목한 점이 그것이다. 시대의 흐름과 민간의 사정을 알 수 있는 노래를 음풍농월의 한시보다 높게 본 것은 지금봐도 확실히 선진적인 식견이었다 평할 만 하다.

 

그런데 이를 홍대용만의 탁월한 식견이라고 보는 것은 성급한 평가이다. 민간의 가요를 중시한 것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문학 전통이기 때문이다. 위 서문에 보이는 '천기'라는 언급도 유의해야 할 점이다. 마치 홍대용만의 독특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공자 이래의 전통적 시관(詩觀)인 ‘사무사(思無邪)’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 홍대용의 언급에서 특별히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우리말로 된 노래― 그것의 구체적인 모습이 여기에는 나타나있지 않다. 어떤 이는 시조라고도 하는데, 민요가 아닐까 한다 ―의 의미 정당성을 언급할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역외춘추(域外春秋)' 주장과 마찬가지로 자주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언급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다른 실학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혁신적인(?) 언급은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정치로 귀결되던 시대에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혁신적인 것이라 해도 당대에는 빛을 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비록 역사적으로는 높이 평가될 수 있어도 말이다.


오늘날은 노래로 민간의 의사를 살필 필요는 없는 시대이다. 여론을 살필 수 있는 다양한 경로가 마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들 걱정하듯이, 그 여론이 조작 가능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정치하는 이들이 여론에 귀를 닫아서는 안될 것이고, 더욱더 귀를 기울여 세심하고 현명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홍대용도 노랫말과 가락의 천근함에 얽매이지 말고 노래에 담긴 의미를 잘 살피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론을 잘 살피려면 살피는 자의 수양(修養)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오늘날은 위정자의 수양이 과거보다 더 요구되는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위정자들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대동풍요(大東風謠)』는 아쉽게도 현재 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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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 이종락(李種洛, 1939~현재) 선생은 재야 한학자이다. 오랫동안 공주, 대전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했고, 『춘추좌씨전 두주』, 『논어강설』 등 묵직한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최근에 제자와 자녀들이 『병주집(屛洲集)』을 간행했는데, 오래전 선생께 1년 동안 강의를 들은 적이 있어 이 책을 남다른 느낌으로 읽었다(나도 제자라면 제자랄 수 있는데, 오랫동안 선생께 연락을 하지 않아 기억하실는지도 모르겠기에, 감히 제자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선생은 초려 이유태(우암 송시열과 동문인 분이다)의 후손으로 이른바 명문가 자손이지만 일제강점기 일제에 저항하는 집안의 가풍 때문에 신학문을 접하지 못하고 한학만을 하셨다. 일제에 토지도 강탈당해 극빈한 생활을 했지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며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다. 선생을 생각할 때면 이런 재야 한학자들이 정식으로 대학 교단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선생의 문집을 숙독하며 그분의 내면세계(여기서는 내면세계 관점 생각 등을 같은 의미로 뒤섞어 사용한다)를 음미하는 것도 의미 있겠지만, 글을 써 남기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어 단상을 써본다. 전통학문을 한 분에 대한 일 증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여기서는 전통학문 구학문 한학 등을 같은 의미로 뒤섞어 사용한다). 선생을 긍정 혹은 부정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포폄(褒貶)은 지양하고 되도록 객관적 시각으로만 선생을 보려 한다.   


전통학문은 문·사·철(文·史·哲)이 종합된 학문이다. 선생의 내면세계도 문·사·철이 종합된 세계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들을 분류하여 살펴볼 생각이다. 한 가지 더 첨언할 것은 선생의 내면세계를 살피는데 주 자료가 시(詩)라는 점이다. 전통문학을 대표하는 시는 ‘언지(言志)’라 하여 의사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시에는 일상의 잡사에서부터 형이상학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선인들의 문집에 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병주집』도 마찬가지이다. 1책이 7권으로 돼있는데, 이중 1~4권이 시이다. 시에는 단순히 문학적 감수성만 담긴 것이 아니라 역사와 철학에 대한 생각도 내포돼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를 주 자료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굳이 또 하나 이유를 들자면 역사와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의론을 펼친 산문이『병주집』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에 대한 선생의 생각부터 살펴본다. 대개 문집 서문에는 저자의 문학 성향에 대한 압축된 평이 등장한다. 『병주집』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평이 등장하는데, 선생의 조카 되는 분이 쓴 것이다. 선생의 조카는 선생의 문학 경향, 좀 더 정확하게는 시풍에 대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시문(詩文)은 담백하면서 법도가 있고 우아하여 일가를 이루었으나 이는 계부(季父)의 허드레 일이지 경중을 논할 중요한 일은 아니다. 至於詩文之沖澹典雅 自成一家文氣 然季父之餘事 不足爲輕重. (「서(序)」,『병주집』 건(乾) 6쪽)     


선생의 시풍을 ‘담백하면서 법도가 있고 우아하다’란 말로 압축해 표현하고 있다. 이는 선생의 시풍이 문학적 감수성을 드러내는데 치중하지 않고 수양된 내면의 도덕적 면모를 드러내는데 치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카 되는 분의 언급에서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대목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시 창작은 ‘허드레 일’에 불과한 것이지 전력을 기울인 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전통 성리학자들이 갖는 시에 대한 관점인 ‘여기(餘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인데, 선생도 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생은 시인을 지향하기보다는 도학자를 지향했던 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를 ‘여기’로 여기는 선생의 시작 태도를 선생의 직접 언급을 통해 다시 한번 살필 수 있다.     


시를 짓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오 / 그저 상황에 맞는 뜻이 생길 때 옮겨 쓸 뿐. 屛洲非是愛吟詩 詩是屛洲取適時. (「화요부수미음(和堯夫首尾吟)」,『병주집』 건, 238쪽)      


이쯤에서 선생의 시를 한 편 직접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해설은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군더더기가 되어 선생의 시 감상에 되려 누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찬찬히 되씹어 읽어보면 왜 선생의 시를 ‘담백하면서 법도가 있고 우아하다’란 평을 했는지 느낄 수 있을 성싶다. 시제는 ‘그림자를 아낀다[愛影]’이다(여기 ‘아낀다’란 번역은 ‘절약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사랑한다’의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사랑의 감정은 ‘사랑한다’는 표현보다 ‘아낀다’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했기에, 선생도 이런 의미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아낀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相隨不去有何情     무슨 정이 있기에 늘 따라다니며                                                                         

動止於吾效作程     앉으나 서나 똑같이 행동하는지                                                                           

燃燭對書動靜坐     등 밝히고 책 읽을 땐 가만히 앉아있고                                                                  

淸宵步月共閑行     맑은 달 밤 소요할 땐 조용히 따라오네                                                                  

屈伸只可任舒捲     구부렸다 펴는 것 또한 똑같이 하나니                                                                   

用舍偏憐識晦明     그저 아쉬워하는 건 어둡고 밝은 것뿐                                                                   

愼獨工夫由爾戒     신독(愼獨) 공부 너로 하여 살피니                                                                       

爾雖無語喚余醒     너는 말없이 나를 일깨우는구나                                                                          

(「애영(愛影)」, 『병주집』 건, 49쪽)     

 

역사에 대한 선생의 관점을 살펴본다. 앞서 선생이 추구한 삶은 도학자의 삶이라고 했다. 도학자의 역사관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통론’이다. 주자가 삼국시대의 정통을 위나라에 두지 않고 촉에 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주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조선조 사대부들도 역사에 있어 정통론을 중시했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도학자의 삶을 추구했던 선생 역시도 이런 정통론 중시의 역사관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 시는 현대의 대통령들을 비판한 내용인데, 그 관점은 정통론에 입각해 있다. 이 역시 부연 설명을 덧붙이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 그 자체로 선생의 역사관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며, 설명이 되려 사족이 되어 시 감상에 방해가 될까 싶어서이다.   

  

光復伊來七大統     광복이래 일곱 대통령                                                                                        

歷數無人合正統     헤아려보니 정통에 맞는 이 하나도 없네                                                                

桀驁不良李大統     더럽고 오만한 이대통령                                                                                     

戕賢庇逆曷云統     어진 이 죽이고 사악한 자 비호했으니 어이 대통령이라 할 수 있나                              

安坐得志尹大統     편안히 앉아 대통령 된 윤대통령                                                                          

責在內閣無所統     책임을 내각에 맡겼으니 할 일이 없었네                                                                

經國濟民朴大統     경국제민 박대통령                                                                                            

民國史中惟此統     유일하게 대통령다운 대통령이었네                                                                      

胡不再任遜大統     어이 재임 시 대통령 직을 양보하지 아니하고                                                          

畢竟維新失體統     끝내 유신 펼쳐 체통을 잃었던가                                                                          

危疑攝居崔大統     어려운 때 책임 맡은 최대통령                                                                             

低回不敢言治統     머리 숙이고 딴짓하며 아무 말도 못 했네                                                               

威權擅用全大統     제멋대로 권세 부린 전대통령                                                                              

誅求無厭盧大統     가렴주구 노대통령                                                                                            

賈勇蓄財兩大統     위세 팔아 축재한 두 대통령                                                                                

後先囹圄一系統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두 영어의 몸 되었네                                                             

野合先任金大統     야합하여 대통령 된 김대통령                                                                              

用奸用術有傳統     간교한 계책 내력이 있구나                                                                                 

蔑視法統豈大統     법통을 무시한 이가 어찌 대통령이리                                                                    

自誇文民笑厥統     문민 대통령이라 자랑 타니 웃기기도 웃길사                                                           

而今不見國論統     국론통일 지금까지 안 보이니                                                                              

南北何時至統一     남북은 어느 때나 통일이 될는지                                                                          

(「대통사(大統詞)」, 『병주집』 건, 259쪽)  

   

철학에 대한 선생의 관점을 살펴본다. 선생의 역사관이 도학의 ‘정통론’을 계승한 것이라면 선생의 철학적 입장은 당연히 성리학(도학)적 관점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조선철학사를 관통한 이기철학의 어느 한 관점일 터이다. 선생의 철학적 관점은 다음 시에서 찾아볼 수 있다.     


栗翁曾闡道     율곡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네                                                                                     

氣局理相通     기에는 막힘 있어 차이가 나지만 이는 하나로 통한다고                                                   

此意誰同照     이 뜻을 뉘와 함께 알릴꼬                                                                                         

火輪出海東     붉은 해가 동해에서 떠오르네                                                                                    

(「모춘감흥십육수(暮春感興十六首)」, 『병주집』 건, 327쪽)   

  

선생의 철학적 관점은 기호학파의 거두인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율곡 이이의 이통기국은 보편적 이(理)를 중시하면서도 현실적 문제와 연관된 기(氣) 또한 중요시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이(理)와 기(氣)의 우열구분을 중시하는 영남학파의 거두 퇴계 이황과 다른 점이다. 선생이 이통기국의 관점을 따르는 것은 선조의 학통을 계승한 것도 있지만(초려 이유태도 기호학파이다) 현실적 궁핍을 감내한 삶에서 체득하게 된 관점이 아닐까 한다.


선생이 삶에서 가장 보람을 느끼며 사명을 가지고 한 일은 ‘교육’이었다. 선생은 50세 되던 해(1985)부터 교육을 시작했는데(屛洲先生略歷, 『병주집』 곤(坤), 590쪽), 이로부터 20년 이상을 교육에 일로매진했다. 선생이 교육에 몰두한 것은 ‘전도(傳道)’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다음 글에서 선생의 이러한 점을 간취해 볼 수 있다.     


세상이 나를 허여 해주지 않아 도를 펼칠 수 없다면 세상을 피해 살뿐 번민하지 않으며, 세상의 지지를 받지 못해도 번민하지 않는다. 하늘을 생각하며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다듬어 후대에 가르침을 전수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태도로, 이 점은 요순보다도 훌륭한 점이라 평가할 만하다. 世不我與  道不得行 則遯世無憫 不見是而無憫 太上立言 垂敎來世者 實吾夫子之賢於堯舜者也. (「점화상익박사논문(點化相益博士論文)」,『병주집』 곤, 120쪽)   

  

공자의 훌륭한 면모를 그의 교육에 두고 언급한 대목인데, 이는 바로 선생 자신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선생은 자신이 배우고 찾은 진리를 후대에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기에 강학에 매진했던 것이다. 이런 사명감이 없었다면, 별반 경제도 혜택도 없는 강학을 그 오랜 세월 지속했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선생은 공자가 그토록 자부심을 드러내어 말했던 ‘배우는데 싫증을 내지 않고 가르치는데 게으르지 않는다[學不厭 敎不倦].’를 그대로 실천했다고 평할 만하다.     


이상 간단히 선생의 내면세계를 살펴봤는데, 과연 첫머리에 언급했던 것처럼 구학문을 한 분에 대한 일증언의로서의 가치가 있는 글이 됐는지 좀 회의적이다. 아무래도 부족한 실력으로 탄탄한 내공을 지닌 분을 평하려니 필력이 딸려 그렇지 않았나 싶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선생께도 당연히! 끝으로 선생의 삶에 대한 자세를 잘 표현했다고 여겨지는 시 한 편을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이 역시 군더더기 설명은 덧붙이지 않는다.      


滄茫歲暮天     푸르고 아득한 세모(歲暮)의 하늘                                                                               

滿地堆新雪     온 대지엔 하얗게 눈이 내렸네                                                                                   

世界淨琉璃     온 세상 깨끗하기가 유리와 같아                                                                                

渾忘孰優劣     우열을 잊어버렸네                                                                                                  

且莫勤除治     두어라 눈 쓰는 일                                                                                                   

我願如斯潔     나도 저같이 깨끗하고 지고                                                                                       

梅笑暎朝暾     밝은 햇살에 매화 웃음 지으니                                                                                   

氣香眼欲纈     은은한 향기 눈에 감기네                                                                                          

芸窓坐兀然     창가에 단정히 앉아                                                                                                 

舊句加塗乙     옛 시구를 만지며                                                                                                    

遙憶孤舟翁     찬 강에 홀로 낚시하던 노인을 생각노니                                                                       

徒然慕淸絶     그 맑고 곧은 절개를 사모하노라                                                                                

人各爲吾爲     사람은 제각기 자신의 일을 하면 될 뿐                                                                         

不須論得失     이해득실을 따져 무엇하리오                                                                                     

(「설중작(雪中作)」, 『병주집』 건, 285쪽)          


*한문 실력이 부족해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너른 이해 부탁드리고, 눈 밝은 분들의 바로잡음을 요청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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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를 꿰뚫어 보고 당세를 민망히 여겨 마침내 무너진 문풍(文風)을 크게 구원하여 사람들에게 (표절을 탈피하여스스로 짓도록 가르치니당시 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고 중간에는 웃고 배척하였으나, 선생이 더욱 견고하자 끝내는 흡연히 따라 안정되었다.”


이한(李漢)의 창려문집서의 일부분으로창려 한유(韓愈, 768824)의 문풍 개혁 이른바 고문운동(古文運動)에 대한 평가를 언급한 대목이다(번역문성백효). 고문운동은 위진남북조이래 수식과 운율 중시의 변려문을 내용 중시의 질박한 산문으로 변화시키려 한 문학사조를 말한다당대에 등장한 신진사대부의 호응을 받았던 바기득권층의 변려문풍에 대항한 정치적 개혁 세력을 대변하는 문학사조이기도 했다한유는 이 운동의 선구자이자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한유를 생각할 때마다 조동일(1939현재)을 떠올린다조동일도 그와 비슷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수필은 식민지 시대의 불행을 전해주는 잔재이다서양의 에세이에서 유래한 귀하신 몸이라고 신분 세탁을 해도 정체를 감출 수 없다수필은 에세이처럼 생각을 풀어주는 논설이 아니고순진한 사람들을 사로잡는 올가미이다붓 가는 대로 쓰면 된다고 유인해 겁먹지 않게 하고서계절감각을 필수로 하는 신변잡담을 미문으로 써야 하는 까다로운 요건에다 감금시키는 것이 식충식물과 같다고 하면 더욱 적절한 비유이다. (…) 수필이라고 하는 고약한 녀석이 어쭙잖은 폭군 노릇을 하면서 일세를 풍미해 글을 망치고문화 수준을 낮추고세상을 혼미하게 한다수필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온 국민에게 숨 막히는 매연을 덮어씌우지 않을까 걱정이다이제 정신을 차리고 글쓰기를 바로 잡아야 할 때이다.”(우리 옛글의 놀라움』, 15)


조동일도 후일 한유와 같이 새로운 문풍의 선구자 혹은 핵심 인물로 평가받을지는 잘 모르겠다과거에는 문인 혹은 학자가 바로 정치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의 글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지만지금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외려 지금은 글을 쓰는 이들이 정치의 영향을 받아 글을 쓰는 경우가 더 많기에 한 사람의 문인 혹은 학자가 사회 전체의 글쓰기 경향에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조동일의 주장은 찻잔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 수도 있다그렇다 해도 그가 한유처럼 새로운 문풍을 외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여겨진다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아니 생각하지 못한 면을 지적하여 우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어느 누가 미문 취향의 수필을 식민지의 잔재라며 질타한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이단을 배척하여 노불(老佛)을 물리치며 틈과 새는 곳을 땜질하고 그윽함과 아득함을 장황(張皇)하여아득히 실추된 전통을 찾아 홀로 사방으로 수집하고 멀리 계승하며백천(百川)을 막아 동쪽으로 흐르게 하여 미친 여울물을 이미 거꾸로 흐르는 데서 돌리려 하니선생은 유학에 있어 공로가 있다고 이를 만합니다.”


한유가 진학해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자신의 유학 부흥에 대한 공로를 언급한 대목이다(번역문: 성백효)한유는 송대에 만개한 신유학 즉 성리학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받는다보다 직접적으로는 이고(李皐)의 복성서가 언급되지만 그 이전 한유의 원도가 있었기에 복성서도 나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동일도 한유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유학 부흥에 관한 주장은 아니지만새로운 학문에 대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근래 한국문학을 그 자체로 연구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두 가지 방향으로 연구영역을 확대하고 있다하나는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논해 문학연구의 이론적인 착상을 다지고학문 일반의 문제를 새롭게 해결하자는 것이다다른 하나는 한국문학과 외국문학의 관계를 다루어 세계문학 일반론을 다시 이룩하자는 것이다한쪽의 작업이 체()에 관한 것이라면다른 쪽의 작업은 용()에 관한 것이다.”(한국의 문학사와 철학사, 12)


조동일도 후일 한유와 같이 새로운 경향의 학문을 개척한 선구자 혹은 핵심 인물로 평가받을지는 잘 모르겠다과거의 학문은 종합적이었기에 한 학자의 학문 경향이 사회 전반의 학문 기풍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지만 지금의 학문은 분과화되었기에 한 학자의 학문 경향이 사회 전반의 학문 기풍에 큰 영향을 끼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그렇다 해도 그가 한유처럼 새로운 학문을 외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여겨진다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아니 생각하지 못한 면을 지적하여 우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어느 누가 분과화된 학문이 당연시되어서는 안 되며 통합될 필요가 있다고 한 적이 있으며, 또 그러한 작업을 우리 전통학문의 이론을 가지고 시도한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한유나 조동일은 학문에 있어 왕재(王才)들이다. 이 왕재들은 천재적인 면에 노력을 보태어 꽃을 피웠다(그들의 노력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생략한다). 이 점은 범재(凡才)에게 용기를 북돋워 준다. 왕재도 노력하는데 범재(凡才)는 어떠해야겠는가, 라는 경각심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조동일은, 팔순이 넘었는데도, 조동일 문화대학이라는 유튜브 활동을 하고 있다촌스럽기 그지없는 유튜브지만 그 내용은 말할 수 없이 고매하다이 또한 그의 문풍 개혁 주장이나 새로운 학문 주장과 일치되는 것 같다이런 사람이 우리 시대에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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