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코스모스는 역시 길에 있어야 어울린다. 이런 길에 있어야 할 코스모스가 마당 한 곁에 가득하다(사진). 아내의 고집 탓. 그런데 환한 햇살아래 미풍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면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품었던 서운한 마음이 스르르 풀린다.

 

코스모스를 대하면 대학 시절의 한 교수님이 생각난다. ‘안조은교수님. 원 함자는 '안종운'인데, 학생들이 놀리느라고 만든 별칭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기 생각 자기 논리가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자랑이 심한 분이었다. 이분이 생각나는 건, 이 분의 글 중에 특별한 코스모스가 등장하기 때문. “나는 영원히 코스모스를 미워하렵니다.” 어머니 상을 당한 뒤 마을 길에서 접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그 꽃이 그렇게 밉더라고 했다. 이 분이 쓴 효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일절이다.

 

당시는 , 효자시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외물은 내면의 반영. 내면이 슬프면 외물도 슬프게 느껴지는 건데,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면 평소 예쁘게 보이던 꽃도 슬프게 보였으련만, 하늘거리는 꽃을 그 자체로 아름다이 봤다면 마음속에 슬픔이 가득 고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효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위선적으로 등장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 신이 세상을 만들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 꽃을 만들기로 했는데, 제일 처음 만든 것이 코스모스란다. 코스모스는 질서·조화·우주의 뜻도 갖고 있다. 코스모스의 꽃말과 뜻으로 보면, 코스모스가 밉게 보이는 날이 어쩌면 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미움이 가득하여 코스모스가 밉게 보인다면, 더 이상 순수하지 않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의 반증. 그렇다면 더 이상 세상에 머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겠는가. 아니, 머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게 우주의 조화에도 어울리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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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유불급(過猶不及). 과한 것과 모자란 것은 같다, 란 뜻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모자란 것'을 택하겠다. 이유는? 그냥, 삶의 경험상. 하하. 하여 나는 '과유불급'보다 '과불여불급(過不如不及, 지나치기보다는 모자란 것이 낫다)'을 선호한다.

  

서산 시청 앞 선정비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가 하나 있다. '군수류후민선정비(郡守柳侯旻善政碑)'가 그것.

  

류민은 광해군 때 서산군수를 지낸 인물로 염초를 많이 굽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하여 특진한 인물이다. 사관(史官)은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이조에서 은전(恩典) 대상자로 올렸다고 비판했지만, 어쨌든 은전을 받은 인물로 역사에 올라 있으니(이상 조선왕조실록 기사), 후손에겐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보일만도 하다. 하여 먼 후일 그의 후손 되는 광수(光秀)라는 이가 조상의 선정비를 수선(修繕)했다. 그리고 선정비 측면에 그 내용을 기록했다. '소화 17년 임오 8월 일 15세손 광수 수선(昭和十七年 壬午 八月 日 十五世孫 光秀 修繕)'. 소화 17년은 서기 1942년이다.

  

오호라, 소화라니! 조상은 필경 임진왜란을 겪어(광해군 때 지방관을 지냈으니 임진왜란을 겪었을 것은 불문가지) 왜놈이라면 이가 갈렸을 텐데, 그 후손 되는 이가 일제강점기 일본 천황의 연호를 써가면서 조상의 선정비를 수선하다니조상님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 아닌가! 조상을 애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되려 조상을 욕되게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수선하지 말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는가! 역시 '과불여불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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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일 화요일


드디어 금강산을 보게 되는 것이냐. 비록 먼발치로나마. 6, 몸을 일으켰다. 밤새 비가 왔는지, 몸이 늘어져 진즉에 눈을 떴지만 계속 누워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거의 버스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리고 서울에서 1박을 할 건지 집으로 내려갈 건지 결정을 못해 머리를 굴리느라 계속 누워 있었다. 두 녀석이 다툰다. 이 사람아, 그간 쓴 돈이 얼만디 또 서울서 1박을 한다는 겨. 그래도 마지막인디 서울서도 한 번 자봐야 되는 거 아녀? 모텔이 거기서 거기지 서울이라고 별 수 있나? 그래도... 둘이 옥신각신하다 결국 첫 번째 녀석이 이겼다. 맞어, 그간 쓴 돈이 얼만디! 커튼을 여니 비가 오고 있었다. 세차진 않지만 밤새 내린 모양으로 정면의 앞산이 흐물흐물해 보였다. 아침 제 의식 행사를 마치고 내려와 안내 프런트에 키를 반납하니, 810분이었다. 어제저녁에 통일 전망대 매표소 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5분 거리라고 했는데, 너무 일찍 내려왔다. 더구나 매표 시간이 9시라는데. 알고는 있지만, 자꾸 엉덩이가 들썩거려 방 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잠자는 건 곰의 유전자를 받고, 행동은 호랑이의 유전자를 받은 것 같다. 비뿌리는 도로를 뚫고 통일전망대 매표소(매점, 교육관 겸용)에 이르렀다. 장장 5분 만에.



수위인듯한 분이 왔다 갔다 한다. ‘왜 이렇게 일찍 왔냐!’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걸어서는 못 가요! 차 타고 가야지!” 한다. 할머니의 여행기를 읽어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고 있는 상태. 할머니는 무슨 협조를 받아 통일 전망대까지 걸어갔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혹시, 나도?’ 하는 막연한 바램을 가지고 왔는데, 이뤄질 수 없는 바램 같다. 버스가 있냐니, 버스는 없고 택시만 있다며 한 5~6만 원 줘야 할 거라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눈알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려고 하는 것을 힘줘서 도로 밀어 넣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왠 후줄근한 차림새의 사내가 힘차게 매표소 근처로 올라오더니 평화의 종!’하고 쳤다. 오잉, 저런 게 있었나? 뭔가를 알고 온 모양이다. 그런데 9시에 매표소 문 여는 건 모르는지 잠겨진 매표소 문을 열려고 했다. “9시부터 문을 연답니다.” 하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 쪽으로 온다. 통일 전망대 가는 방법을 말하니, 이 이 역시 몰랐는지 살짝 당황해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안을 한다. “저하고 반반씩 내고 가시는 건 어떤가요?” 괜찮을 것 같다. “, 그러시죠.” 사내가 택시 회사인지 개인택시 인지에 전화를 하고 이것저것 물어본다. 바로 이곳까지 택시가 올 수는 없고 제진까지 걸어오면 거기서 타고 갈 수 있단다. 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 일단 가허락을 했다. 매표소 추녀 밑에 두 중늙은이가 우두커니 서 있으니 참 거시기하다. 조금 있다 보니 왠 말끔한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가 올라와 매표소 문을 열려고 했다. 사정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약간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혹시 태워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차를 가지고 온 것을 봤기 때문). 초면이지만 처량한 상태에 있는 것을 봐서 그런지 흔쾌하게 허락을 했다.


9시가 되어 표를 산 뒤 그렇고 그런 안보 영상을 시청한 후 친절한 두 내외분 차에 올라탔다(후줄근한 차림의 사내도 당연히).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이것저것 물어가며 대화를 했다. 두 내외는 포항 출신인데 근 1년에 걸쳐 동파랑길을 걸었고,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날씨가 쾌창했으면 좋았을 텐데 다소 아쉽다고 했다. 그거야 십분 공감. 동승한 남자분은 이제 동파랑길 시작이라며 어제 부산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아하, 그래서 출발의 의미로 평화의 종을 울렸던 거구나.


차가 통일 전망대 주차장에 섰다. 차에서 내리는데, 감개무량하다. 중간에 차를 타긴 했으나, 어쨌거나 처음 목표했던 대로, 땅끝(마을)에서 이곳까지 오긴 왔구나! 출발 때 날이 흐렸는데, 도착해선 비가 오니, 나름 수미일관한 특별한 날씨다. 전망대 타워에서 금강산 쪽을 바라보는데, 맑은 날씨였으면 분명히 보였을 산들이, 우중이라 모호하다. 현금의 남북관계를 보여주는 듯도 하고, 통일 상황을 보여주는 듯도 하고,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너무 확대 해석? 내가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북한이다. 이러저러한 편견 없이 그냥 북한 땅 여기저기를 걸어보고 싶은 것. 내 생애 그런 날이 올까? 염원을 담아, 흐릿한 풍경의 금강산을 사진에 담았다.



운전자 분의 배려로 ‘DMZ 박물관까지 견학을 한 후, 우리는 거진에서 헤어졌다. 친절했던 두 내외 분께 감사를! 함께 했던 후줄근한 사내 분은 무사히 일정 잘 마치시길! (‘후줄근한 사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모욕하는 뜻은 없으니 너른 마음으로 용서하시길!) 거진에서 한 방에 서울 가는 차가 있어(너무 기뻤다!) 표를 끊었다. 1215분 행. 차비가 물경 23,300원이다. 3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다. 차를 타기 전 점심을 해결하려 빵집에 들어가 카스텔라와 초코 우유 하나를 샀다. 냠냠 짭짭. 매표소 근처 화장실에서 작은 볼 일을 해결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다, 마침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 풍경 감상하기가 취미인데, 취미 생활을 못하고 거의 졸면서 갔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 중에 거의 취미 생활을 제대로 못했네. 애고, 아쉬워라.



4시가 되어 서울에 도착, 지하철을 타고 꿈에 그리던(?)’ 익선동 교동초등학교에 갔다. 당연히 옛 자취는 찾아볼 길이 없다. 학교에서 서성거리는데 학교 보안관께서 오시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무슨 일로?” 사정 얘기를 했더니, 반색을 하며 두루두루 보라고 하신다.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아 편하게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때 타고 놀던 양(석상)이 있었는데 그게 남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했더니, 놀랍게도, 있단다. 안내까지 해주셨다. 정말 정원 속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작은 거냐? 그때는 컸던 것 같은데. 보안관께 이 말을 했더니, 웃으면서 자신도 그런 걸 느낀다며, 운동장도 그렇지 않냐고 한다. 운동장을 쳐다보니 진짜 그렇다. 오호,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고? 보안관님과 다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기념사진을 한 장 같이 찍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찰칵.



내가 다닐 때만 해도 교동초등학교는 지금의 강남 8학군 학교와 같아 학생이 버글버글 했다. 지금은, 보안관님의 말에 따르면, 학생이 없어 한 때 폐교 논의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라는 문화적 가치 때문에 어찌어찌 살렸는데 장래는 그리 밝지 않다고 했다. 또 한 번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것을 실감한다. 난 사실 교동초등학교에 대해 그리 행복한 추억은 없다. 이곳에 오게 된 것도 부모님의 무슨 교육 열망 때문에 오게 된 것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익선동에 한복 가게를 내시는 바람에 오게 된 것뿐이다. 학생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그다지 명민하지 않은 나는 선생님의 별 관심을 받지 못하는 그저 그렇고 그런 학생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학교에 다니던 상당수의 학생은 내로라하는 집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선생님의 관심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내노라 하는 집 학생들의 수준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린이 회장 선거를 하는데 후보로 나온 여학생이 자기가 회장이 되면 학교에 시계탑을 건립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놀랍지 않은가. 1970년대 중반 초등학교에. 4학년 때 시골 고향으로 전학을 왔을 때 당시 학생 중에는 보자기에다 책을 싸 오는 아이도 꽤 있었다. 얼마나 격차가 심한가!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결과적으로 시골에 내려온 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본다. 서울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아이가 시골에 내려오니, 주변 아이들이 워낙 공부에 소홀해, 본의 아니게 선생님들의 주목을 받게 됐고 자존감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자존감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나는 어렸을 때의 자존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깊이 신뢰하고 있다. 그나저나 당시 시골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들은 나와 달리 다 서울로 서울로 도회지로 도회지로 갔고, 나는 더 시골로 시골로 내려갔다. 서울로 도회지로 간 친구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친구도 있다. 그러나 나는 , 만약 내가 서울에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진짜 시골에 살게 된 걸 너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럼 시골에서조차 주목받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찌질하게 산다는(살아야 한다는) 것이냐, 고 물을 수 있겠다. 논리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꼭 논리대로만 되는 것이 세상은 아니잖은가. 시골서조차 주목받지 못했으나 서울로 도회지로 가 주목받고 성공한 친구도 많다. 나는 다만 내 경우만 말한 것이다.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옛적에 다녔던 학교에 오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나저나 시골 고향의 초등학교도 자치하면 폐교가 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안타까움의 한숨만 나온다.



학교를 나와, 한 때 살았던 익선동을 찾았다. 그런데, 여기도 왜 이리 좁아터진 거냐. 원래 그랬냐, 아니면 축소된 거냐. 땅과 집이 오무라 들었다 늘었다 할리는 만무. 저 좁은 골목에서 한 때 내가 활보했단 말이지. 하하하. 익선동은 모던 한옥촌이다. 1920년대부터 개발된 곳이다. 짐작컨대 우리나라 학구열상 교동초등학교를 끼고 있어 사람들이 더 몰려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온갖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한 상가가 되었다. 젊은이들과 외국인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란다. 정말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약간 한산한 데를 찾아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살던 곳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익선동 주변을 걸어보는데, 그간의 극심한 시대 변화를 생각하면, 의외로 그렇게 변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줬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는데, 이곳에 살 때 있던 그 플라타너스가 아닌가 싶다. 창덕궁이 보인다. 심심하면 놀러갔던 곳이다(당시는 무슨 궁인지도 몰랐다). 한 때 친하게 지냈던 홍ㅇㅇ의 아버지가 운영하셨던 '낙원약국'을 찾아봤는데, 없다. 애고, 나도 60이 다 됐는데 ㅇㅇ이의 아버지가 그 약국을 하고 계시겠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ㅇㅇ이네는 꽤 부유해서 그 집에 놀러 가면 놀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느 하늘에서 잘 살고 있는지?



길을 걷다 아내에게 줄 선물로 작은 모자 하나를 사고 전철을 타러 갔다. 이젠 집에 가야지. 표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예매해 놓았다. 8시 차.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저녁을 먹으러 지하에 있는 신세계 매장으로 갔다. 떨이로 파는 음식을 약간 싼값에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마음으로 온 사람들일까, 매장이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초밥을 하나 사서 푸드코너 매장에서 먹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고 시끄러워 밥이 입에 들어가는지 코에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란한 매장을 나와 서산행 노선 앞 대합실에서 가족 단톡방에 올린 사진들을 정리하고 그간 쓴 비용도 결산해보았다. 20일 동안 쓴 총비용이 1,453,580원이다. 대략 하루에 7만 원가량 쓴 셈이다. 숙박비만 저렴하면 지출이 훨씬 덜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짧은 해외여행 비용과 견줘보면 그렇게 많이 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역시 100만원 넘긴 비용을 20일간 여행 비용으로 썼다고 생각하니, 살짝 부담감이 밀려온다. (다행스럽게도 이 비용은 퇴직 후 받은 전년도 성과급으로 가름할 수 있었다) 이보쇼, 누가 자본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안 할 까봐 여행 막바지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요? 그간 겪고 생각한 게 어딘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고, 돈타령을 하다니. 한심하오! 그렇네요~ 그래도 그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쩐대요? 그리고 제 이름이 ''에다가 ''이잖아유. 이름 값은 해야쥬. 어허, 이 사람이, 갈수록... 수양 좀 더 혀! , .


750, 8시 서산행 버스가 터미널에 들어왔다. 이 터미널에서 서산행 버스 탄 것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오늘처럼 서산행 버스가 정겹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너무도 정겨워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8시 정각에 버스가 출발했다. 드디어, 집으로 간다. 터미널에서 집까지, 처음처럼 걸어 갈려고 했는데, 처가 만류했다. 마중을 나온단다. 으흠, 역시 헛살진 않았군. 여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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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일 월요일

 

해 저문, 아니 해 담은에서 눈을 뜬 것은 5시 반. 앱을 켜고 금강산 콘도까지 거리를 확인하니 40km에 도보로 10시간 4분 걸린다고 나온다. 날씨를 확인하니 오후 늦게 비 소식이 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다. 순대에 내용물 채우듯 꾸역꾸역 아침 식사를 한 후 간단히 세수하고 주변 정리를 한 뒤 모텔을 나섰다. 해변에 나가 아침 녘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햇빛을 바라보고 찍어서 그런지 얼핏 보면 석양 녘 풍경 같다. 보는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 허겄지. 해변 위쪽에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있다. 피정의 집 같기도 하고 요양원 같기도 한. 어느 것이든 좋은 위치에 마련한 것 같다. 피정의 집이라면 다음엔 저기에 가서 묵었으면 좋겠다. 다시 올 기회가 있긴 할까?



755, 청간정에 올랐다. 표현력 없다 보니, 두 마디만 나왔다. 우와! 멋있다! 장대한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절로 사진을 찍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하 대통령 필적이 걸려 있다.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 필적이라, 감상은 패스! 택당 이식의 시도 걸려있는데 고사를 사용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외려 홍경모가 쓴 청간정 기사가 관심을 끈다. 끙끙거리며 읽어본다. (애고, 평생 한문 선생을 했는데, 실력이 왜 이리 요 모양이냐. 하긴 시계불알처럼 왔다 갔다만 했으니 뭔 실력이 있으랴. 어디 가서 절대로 한문 선생했다고 말하지 말자!)



청간정은 간성군 남쪽 45리 되는 곳에 있다. 천후산 한 자락이 뻗어 내려 바닷가에 가로로 작은 언덕을 펼쳐 놓았는데 앞에 석봉(石峰)이 있어 우뚝 솟아 층대(層臺)를 이루고 있다. 이 장소를 만경대라 부른다. 높이가 수십 길로, 위에는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얼기설기 삼면에 걸쳐 드리워져 있다. 맑은 바닷물이 부딪치며 솟구치는 소리가 웅장하다. 옛적에 이곳에 누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만경대 남쪽 2리쯤 되는 곳 시냇가에 역정(驛亭)이 있는바 이것이 청간정이다. 만경루가 없어짐에 만경대 옆으로 이 역정을 옮겨오고 만경대 편액을 걸어 놓았는데, 본시 시냇가에 있던 건물이라 세간에서는 통칭 청간정이라 부른다. 정자가 바다로부터 수십 발짝 떨어져 있을뿐더러 모퉁이에 위치해 있고 물속의 방패막이 지형이 파도를 막아줘 수해를 입지 않는다. 정자가 넓고 통창하여 거대한 바다를 내려다 보기 충분하며,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모습, 갈매기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풍경, 어촌의 밥 짓는 연기, 하늘과 물이 만나는 아득한 정경들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소용돌이치는 물이 정자 아래 있는데 티 없이 맑아 그 밑바닥이 보이기에 머리털과 수염이 비칠 정도이다. 바람이 불어 파도의 포말이 드날릴 때는 서리와 눈이 사방에 흩날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산림에 은거하고자 하는 뜻이 생기는 바 이런 풍경은 낮에 더 보기 좋다. 달 뜨는 밤 창가에 누워 바람과 파도 소리가 창문을 흔드는 소리를 들으면 흡사 물 위에서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배를 타고 가다 정자에서 1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면 해변에 자마석(自磨石)이란 것이 있다. 자마석은 돌무더기 가운데 있는 일() 거석(巨石)인데 소와 같은 모양새이다. 여기에 한 거석이 그 위에 덮여 있고 그 사이로 주먹 하나 들어갈만한 틈이 있다. 윗 돌과 아랫 돌 중간에 나 있으며 돌을 갈아낸 흔적이 있어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지역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긴다. 나도 그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 세 곳 모난 데에도 모두 이런 모양이 있는바, 이는 파도가 항시 바위 틈새로 왔다 갔다 하는 고로 바람과 파도가 세찰 때 바위 또한 거기에 휩쓸려 물결과 상호작용을 하다 보니 그리된 걸 것이다. 이 이치로 보면 하나도 괴이할 것이 없다.



유래와 풍경을 세밀히 묘사해 실감난다. 끙끙거리며 읽은 보람이 있다. 잠시 앉아 풍경을 감상했다. 다시, 출발~.


소나무 우거진 길을 벗어나 잠깐 큰 도로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이인(異人)이 나타났다. 작은 손수레 같은 것을 허리춤에 매어 끌고 오는데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옷은 꾀죄죄하지만 눈빛은 형형하다. 풍기는 아우라가 만만치 않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수인사를 했다. “여행 중이신가 봐요?”(하나마나한 멍청한 질문. 보면 모르나?) “~” “저는 해남에서 왔는데, 어디로?” “동파랑길 따라가고 있습니다.” 손수레 같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으니, 숙박 장비라고 했다. 손수 제작했단다. 200여 일 넘게 전국을 일주하고 있다고. 식사는 어떻게 하시냐니, 주로 사 먹으며 어쩔 수 없을 때는 라면으로 때운단다. 가본 곳 중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곳이 있냐니, 제주의 한라산 둘레길과 탐모라질 길을 추천해 준다. 숙박비가 너무 많이 들어 여행하기 힘들다고 했더니, 동조하며 그래서 자신은 숙박 장비를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잠시 이것저것 더 얘기를 하는 중 이인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더 얘기하기는 뭐해 작별 인사를 했다. 도보 여행을 나오면서 막연히 길에서 만날 그 어떤 인연을 기대했는데, 이 이인으로하여 충족된 느낌이다. 확실히 이번 여행은 하늘이 점지해 주신 게 틀림없다. ,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아멘, 아미타불,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 알라 알라 기타 등등.



큰 도로를 따라 걷는데 옆으로 걷기 좋은 산책길이 있다. 짤막한 게 아니고 지금 걷고 있는 도로와 병행하는 긴 길이다. 굳이 큰 도로로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걷던 길을 바꿨다. 큰 도로와 산책길 중간에 꽃나무를 심어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는데 무지막지하게 타고 넘어 들어갔다. 운전자들이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산책길 옆으로 펼쳐지는 호수가 장관이다. 무슨 호수일까? 앱을 켜고 살펴보니 송지호. 바다도 멋진데 이런 멋진 호수까지. 고성은 복 받은 고장인 것 같다. 이곳만 여유 있게 걸어도 하루 여행 일정이 될 듯해 보였다.



어찌어찌하야 다시 해변 길을 걷는다. 시계를 보니 12. 점심때이다. 적당한 식당이 있으면 한 끼 사 먹고 싶다. 이런 내 마음을 하느님이 알아차리신 것일까, 근사한 식당이 눈에 띈다. 이름도 멋지다. ‘금강산도 식후경.’ 고성 최고의 맛집이란다. 최근에 지었는지 건물이 산뜻하다. 입간판에 메뉴를 소개해 놨는데, 물회가 눈에 띈다. 더구나 물회가 전문이란다. 그려? 한 번 먹어볼까? 그런데 가격이 세다. 만육천 원. 까짓 거, 막판인데. 이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주인이 창가 쪽 1인 테이블 석으로 안내해 준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받는다. 점점 자동화되는 음식점. 나중엔 음식 배달도 로봇이 해줄 것 같다.



창가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는데, 두 젊은 남녀가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물컵을 근경에 두고 바닷가 두 젊은 남녀를 카메라로 바라보니, 물컵은 거대한 수조처럼, 두 젊은 남녀는 미미한 사물처럼 보인다. 물컵의 물을 두 사람에게 쏟으면 물에 빠져 허우적 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리에 차이에서 비롯되는 유머러스한 미감. 재미있는 사진이 될 것 같아 한 장 찍었다. 스토커 아닙니다~.



물회가 나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먹어보는 회다. 말 그대로 차가운 물에 담긴 회인데, 고춧가루와 식초가 많이 들어가 맵고 시다. 국수가 함께 나왔는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그냥 물회에 넣어 함께 먹었다. 더운 참에 맛있게 먹었는데 먹고 나와 뱃속이 불편해 한참 고생했다. 너무 빨리 먹어 소화가 안된 탓도 있지만, 물회가 너무 차가워서 그랬던 것 같다. 차가운 음식이 불편한 걸 보면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다시, 출발.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어 확실히 그간 지나온 길들에 비해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게 이쪽 길이다. 게다가 자전거 도로가 대부분 해변을 끼고 나 있어 바다 감상까지 하며 걸을 수 있기에 더 좋다. 신나게 걷고 있는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쓰레기를 만났다. 오토바이. 세상에, 오토바이까지. 관광 강원 얼굴에 먹칠하는 물건이다. 진태 씨, 신경 좀 써주셔~. 아니 그런데 이건 또 뭐냐? 금방 자전거 도로를 칭찬했는데, 자전거 길 통행금지 띠를 둘렀네. 뭐여, 내 허락도 안 받고 언제 저런 거를 한 겨. 진태 씨, 정말 이렇게 할 겨~. 자전거 도로를 따라오던 자전거 여행자들이 무척 당황할 것 같다. 빨래 보수되기를!



440. 화진포의 김일성 별장과 이기붕 박마리아 별장을 들렸다. 사실 별 매력 없는 인물들의 별장이지만 한 때 역사의 틀을 짜고 권력의 못을 박은 자들이라, 어떤 곳에서 자빠져 자고 밥을 먹었는지 궁금해 들려보기로 했다. 김일성 별장은 외국인 선교사의 집이었던 것을 김일성이 자신의 별장으로 쓴 것인데,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사용했단다. 관광객에게 실감 나는 관광을 하라고 당신이 지금 딛고 있는 계단이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댓살 때 사진 찍은 장소라며 당시 사진을 계단 벽면에 붙여 놓았다. 별 재미없는 실감. 별장에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김일성은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잠시 복잡하고 힘든 정무를 뒤로하고 쉬러 왔을 테지만, 시대 상황을 두고 보면, 왠지 마음 편히 쉬며 바다를 감상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땅에서 죽었는가. 자네는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여. 이제 지상을 떠난 지금, 그곳에서 평생을 X 잡고 반성하며 민족의 제단 앞에 사죄토록 하게나.



이기붕 박마리아 별장은 숙소까지 가야 할 시간이 촉박해 그냥 지나칠까 하다 입장료가 아까워 잠깐 들렸다. ()와 박()은 굥과 김()의 본보기 같은 인물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줄 알았는데 되풀이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쓱 한 번 훑어보고 나왔다. 박마리아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현대사의 많은 추악한 일에 관련된 인물이다. 이화여대를 나오고 미국 피바디 대학에서 석사까지 받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했던 건 오로지 돈과 권력이었다. 남편 이기붕은 그녀의 손에 놀아난 꼭두각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에고, 그만하자, 입만 더러워진다. 댁들도 지상을 떠난 지금, 그곳에서 평생 무릎 꿇고 두 손 든 채 민족의 제단 앞에 사죄토록 하시오!



531. 날이 점점 흐려진다. 간간 빗방울이 던진다. 길가에 민박들이 즐비하다. 그런데 왜 이리 청량리 588 같은 느낌인지 모르겠다. 흐려진 날씨에 후주글한 외양 바쁜 발길이 그런 느낌을 자아내게 한 것 같다. 비가 쏟아질 듯 해, 금강산 콘도를 포기하고 어느 한 군데에 들어갈까도 생각했는데 기분이 영 내키질 않아 그만뒀다. 드디어 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꺼내 들었다. 저 멀리 금강산 콘도가 보인다. 65, 금강산 콘도에 도착했다. 방을 달라니, 전망 좋은 곳은 없다며 5만 원이란다. 이미 안복은 충분히 누리고 온 터, 전망이 무슨 상관이랴. 방에 들어갔는데, 시설이 많이 노후돼 있다. 씻고 정리하기 전에, 우선 따뜻한 밥부터 먹고 싶어 콘도 내 편의점에서 사 온 햇반 1개를 전기밥통에 넣은 뒤 취사 스위치를 눌렀다. 금방 밥이 됐다. 찬장에 있는 밥공기를 꺼내 밥을 퍼 담았다. 잠시 두 손으로 밥공기를 잡고 따뜻한 밥 냄새를 맡아본다. 이게 얼마 만에 맡아보는 밥 냄새냐. 편의점에서 사 온 깻잎을 반찬으로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샤워를 하고 나머지 제반 저녁 행사를 치렀다.



한동안 부질없이 티브이를 켜고 이것저것 보다가 불현듯 치킨 생각이 나서 콘도 내 치킨집에 내려갔다. 주인이 밥을 먹고 있었다. 튀김 치킨 가격을 보니 19천 원이다. 부담스럽다. 트라이를 해보는데, 통하지 않는다. 주인도 진강원주인이 아니고 나도 이미 밥을 먹었기에 절실하지 않아 그랬던 것 같다. 그냥 나올까 하다, 실질적인 여행 마지막 날이라 자축 겸해 주문을 했다. 술도 한 잔 할까 하다,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만뒀다. 방에 가지고 와 먹는데, 역시나 부담스럽다. 1/3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싸서 화장실에 갖다 놨다. 방에 냄새가 밸까 봐. 다시 이빨을 닦고 침대에 기대 TV를 켜고 아우성치는 애들 머리를 고루고루 쓰다듬어 주었다. 얘들아, 이제 자야 할 것 같다. 너희들도 그만 자렴. 뭔가 극적인 밤이어야 할 것 같은데, 비가 와서 그런지, 힘들어서 그런지, ()극적인 밤이다.


내일은 통일 전망대를 거쳐 서울 익선동으로 간다. 익선동은 초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 처음엔 갈 생각이 없었는데 왠지 여행 막바지에 이르니 가고 싶어졌다. 회귀본능일까?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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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일 일요일


여보, 식사!” “!” 맛있는 콩나물 김칫국이 식탁에 올라와 있다. 후루룩 쩝쩝! 처가 제발 입 다물고 먹으라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 트림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불러 뿌듯하다. 갑자기 작은 것이 마렵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찰나, 잠에서 깨었다. 오매, 다 늙어서 실수할 뻔했네. 그것도 남의 이부자리에다. 불현듯 처가 끓여주는 콩나물 김칫국이 먹고 싶다. 입맛만 다시고, 어제 마트에서 산 그렇고 그런 끼닛거리로 아침을 때웠다. 여행이 끝나갈 때가 돼서 그런가 점점 더 그렇고 그런 끼닛거리에 싫증이 난다. 아이고, 미안타, 야들아. 그래도 니들이 큰 힘이 돼줬는데, 종국엔 찬밥 취급하다니(실제로 찬밥이긴 하지만). 만원 더 낸 게 아까워 뽕을 뽑으려고 샤워를 한 뒤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앱을 켜고 고성 봉포까지의 거리를 살펴보니 23km5시간 54분 걸린다고 나온다. 여유 있다. 오늘은 리버사이드 모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평도 괜찮고 가격도 괜찮아 결정했다.


도로에 인적이 별반 없다. 차들도 한산하다. 어제 양양 읍내에 들어설 때, 우중임에도, 사람들이 붐볐는데 오늘 너무도 상반된 도로 풍경을 대하니 굉장히 낯선 느낌이 든다. 어제 풍경은 혹 꿈속의 풍경이었나? 기념으로 도로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어제 내렸던 버스 터미널을 지난다. 길가에 영산홍과 철쭉이 한껏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다. 꽃을 좋아하는 처를 위해 사진 한 장, 찰칵. 이런, 처는 영산홍과 철쭉을 별반 좋아하지 않는데. 처는 들꽃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 잔디밭에 돋아나는 이름 모를 풀꽃들도 함부로 뽑지 않는다. 잔디밭엔 잔디만 있어야지 여타 잡 것들이 있으면 잔디 관리도 안되고 나중에 잔디 깎기도 불편해, 처한테 타박을 하지만 고치질 않는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아예 영역을 분담하기로 했다. 앞 잔디밭은 처가, 뒤와 사이드 잔디밭은 내가 담당하기로 한 것. 과연 처는 잔디밭을 잘 관리할 수 있을는지? 자칭 생명주의자요 자연주의자인 사람이. (예상했던 대로 귀가한 이후 처는 내게 SOS를 보냈다. 도와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잔디밭에 즐비한 야리야리한 여러 풀꽃들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자치하면 풀을 뽑으려다 고것들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는 것. 처한테 나도 모르게 세뇌당한 것 같다.)



낙산 해수욕장 안내판이 보인다. 들어갈까, 말까? 시간도 넉넉해 들어가기로 했다. 바닷가에 살고 있지만(실제 바닷가는 아니다. 바닷가에 가려면 적어도 20분 이상은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바다에 가면 늘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체시 소재를 바다와 소년으로 잡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물끄러미 바다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 나오려는데, 저쪽에서 뭔가 공사가 한창이다. 벌써 해수욕장 개장 준비를 하나보다. 인부들 얼굴을 보니 거의 내 대중이거나 더 많아 보인다. 시계를 보니 838분인데, 이른 시간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 같다. 아침들은 든든하게 자셨는지. 문득 홀로 생활하시는 형님이 생각난다. 처도 자식도 있건만 조그만 원룸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형님. 마음만 좋고 경제에 너무 어두워 여러 번 사기를 당하고 종국엔 식구들한테도 외면을 받아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서 드리는 생활비로 근근이 생활하고 계신다. 마음만 안타까울 뿐 도와드리는데 한계가 있어 누님들과 매번 아쉬움을 토로하며 형수와 조카들을 성토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말 시대가 많이 변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시절과 비교해 보면. 그래도 어떻게 자기 남편을, 아버지를. 오늘 아침엔 무엇을 드셨을까? 지난번 뵙을 때 여쭤보니 아침은 라면으로 때우신다고 들었는데, 오늘도 라면으로 아침을 드셨을까? 그러나 나의 형님에 대한 안타까움은 그저 공허한 안타까움일 뿐이다. 뭘 화끈하게 해 드릴 수 없기 때문. 형님, 그래도 건강 관리 잘하셔요. 그래야 형제들 얼굴 오래 볼 수 있죠. 그리고 혹 그 네 가지가 없는 조카 X들이 회심해서 형님께 잘할는지도 모르니. 형수는 이미 황새 울었으니, 기대하시지 말고요.



낙산사 들어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왠지 들어가고 싶다(‘왠지가 적중했다. 절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건 낙산사가 처음이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다). 예의 그 입장료 스트레스를 받으며 낙산사에 들어갔다. 휴일이어서 그런가 관광객들이 붐빈다. 화재로 전소된 후 새로 지어서인지 건물들이 멀끔하고 조경도 단정하다. 대지도 넓은 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원통보전을 보고 나오며 작품 사진을 하나 찍었다. 원통보전을 찍은 게 아니라 원통보전 추녀를 배경으로 하늘을 찍은 것. 우리나라 건축물은 선이 아름답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은 것 같아 확인 차 한 번 찍어본 것인데, 찍고 나서 확인해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주워들은 말이 거짓은 아닌 듯싶다.



해수관음상을 보러 갔다. 한 아주머니가 절을 하고 계셨다. 아주머니가 일어나 자리를 비꼈을 때 냉큼 사진을 찍었다.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름대로 미감이 느껴진다. 베트남 다낭에 갔다가 본 거대한 해수관음상과 대비된다. 그 관음상은 정말 거대만 했지 어떤 미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그 관음상을 보며 베트남도 경제가 좋아지면서 최고 최대를 숭상하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합장을 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나저나 바닷바람이 센데 너무 옷을 얇게 입고 계신 것 같다. 사시사철 저렇게 입고 계실 텐데, 건강이 염려된다. 보살님, 감기 조심하셔요~.



낙산사의 하이라이트는 '의상대'가 아닐까? 동해 일출 사진과 함께 꼭 등장하는 의상대. 바닷가 한 끝 언덕 위에 조신한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의상대를 대하니, 괜스레 못매무새를 가다듬게 된다. 한복 곱게 차려 입은 약간 도도한 새색시를 보는 느낌이다. 사진을 아니 찍을 수 없다. 곁에서 사진을 찍던 수다스러운 아주머니 한 분 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양한 포즈를 취해 보라며 성의 있게 찍어 주신다. 감사합니다~.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는데, 중간중간에 경내(境內)에 있는 찻집(기념품 집)을 찾지 말아 달라는 신도(信徒) 호소문 입간판이 눈에 띈다. 그간 임대로 영업을 해왔는데, 계약 기간이 끝났음에도 철수하지 않고 있으며, 건물도 제대로 보수를 안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호소문만 보면 영업점이 악덕 업주인 것 같은데, 저쪽 입장을 들어보지 않아 정확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그럴까, 애타는 호소문에도 불구하고, 찻집(기념품 집)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바닷가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저절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는 찻집이다. 나도 저절로, 애타는 호소문을 무시하고, 찻집(기념품 집)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버글버글하다. 기념품을 돌아보는데 고개를 까딱이며 절을 하는 귀여운 동자승 인형이 보인다. 절로 웃음이 나온다. 기념품을 파는 이 한테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물으니, “얼마냐고요?”라고 되묻는다. , 동문서답? 사진을 찍어도 괜찮냐는데, 얼마냐라니? 사람은 듣고 싶어 하는 것만 들으려는 경향이 있나 보다. 다시 되묻고 허락을 받아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가격이 15천이라 살만 해 하나 사고 싶었지만, 빤스 한 장도 버거운 여행 배낭에 동자승 인형을 넣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 그만뒀다(집에 돌아와 많이 후회했다. 여러 쇼핑몰을 뒤지며 낙산사에서 본 그 동자승 인형을 사려고 했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동영상만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대추차를 한 잔 주문해 마셨다. 7천 원이다. 거의 점심 값. 한과 1개를 덤으로 준다.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했다. 답답한 실내를 나와 밖에서 마시는데, 아무도 나오는 이가 없다. 날씨가 약간 추운 데다 바람이 불어 그런 것 같다. 기모 바지에다 살짝 두꺼운 외투를 입은 내겐 아무렇지도 않다. 본의 아니게 실내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차를 마셨다.



찻집(기념품 집)을 나와 낙산사 나가는 길로 들어서려는데, 멋진 문구를 새긴 표석을 만났다. '길에서 길을 묻다.' 길에서 이란 시집을 주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길에서 길을 만나다.'란 표석을 대하니 이 또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번 여행은 필시 하늘이 내게 점지해 주신 여행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길을 떠난 자에게 딱 어울리는 사물들을 만날 수 있으랴~. 오오~ 하늘이시여~! 속으로 무한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낙산사를 나왔는데 화재 당시 참상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 안내판이 눈에 띈다. 한 번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갔는데, 생각 외로 끔찍한 모습은 별반 없었다. 하기사 화재에 전소됐는데, 뭐가. 당시 탔던 목재로 지은 정자(범종각)와 석물 파편들을 늘어놓았다. 남대문도 그랬고 이곳도 그렇고 우리 문화재들은 대부분 목재라 정말 화재에 취약하다. 우리 문화재가 갖고 있는 숙명. 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터.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큰 도로를 따라가다 자전거 도로 안내판이 있어 과감히 걷던 길을 바꿨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도 고성 봉포 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을 듯했던 것(실제도 그랬다). 자전거 도로와 동파랑길 안내가 잘 돼있어 마음 편히 해안 길을 따라 걷는다. 번잡한 차 소리 듣지 않고 시원한 파도 소리 들으며 길을 걸으니, 그간 여행하면서 마음 졸였던 모든 압박감이 일거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몽돌 해변을 지난다. 둥근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라 바닷물이 밀려왔다 나가면, 모래사장과 달리, 와그르르 소리가 난다. 그릇에 담긴 바둑 돌을 바닥에 쏟을 때 나는 듯한 소리. 와그르르.



다시 큰 도로로 나와 걷는데 저 멀리 바닷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잠수복을 입고 즐기는데 유독 저곳에서만 사람들이 붐빈다. ‘물치 해변인데, 너울성 파도가 다른 해변보다 커서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아직은 추운데지나면서 서핑을 마친 사람들이 벌벌 떨며 따뜻한 커피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고, 그런 험한 것은 아랫사람들한테 시킬 것이지, 뭐 하러 손수 하느라고한바탕 훈수를 두었다(속으로).



금강대교를 지난다. 높은 다리를 지나며 본의 아니게 아래에 사는 사람네들 집 지붕을 보게 된다. 살림들이 곤고한지 많은 지붕이 슬레이트이고 검은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 한쪽에선 추운 날씨에 서핑한다고 지랄 발광하는 모습이 보이고, 한쪽에선 곤고한 생활에 힘들 사람들 사는 곳이 보이니마음이 좀 거시기하다. 내려보던 시선을 거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서 빨리 숙소를 향하야! 시계를 보니 4시다. 낙산사를 들린 데다 해변을 걸으며 종종 쉬었더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다. 갑자기 주변에 모텔이 있으면 들어가 쉬고 싶어 진다. 그런데 하느님이 내 마음을 아셨나, 길가에 해 담은 모텔이란 입간판이 눈에 띄었다. 얼마 들어가지 않는다. 갑자기 마음이 급회전을 한다. 굳이 방포까지 갈 필요는 없다. 얼마 안 남기는 했지만. 저기 가서 한 번 살펴보고 괜찮으면 머물기로 하자. ‘해담모에 도착했는데 시설이 너무 훌륭하다. 아파트형인데, 지은 지 얼마 안 된듯 조경수들에 지지대를 해놓았고 흙들이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다. 바가지요금을 받을 게 분명해 보여 발길을 돌렸다. 다시 도로로 나와 발길을 옮기려다 그냥 전화나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 해담은입니다.” 싱그러운 여인의 목소리. “혹시, 방 있나요?” “, 몇 분 이시죠?” “도보여행 중인데, 혼자입니다. 가격은 얼마?” “5만 원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이 싸다(?). 망설임 없이 들어가 결재를 하며 왜 이렇게 가격이 싸죠?”했더니, 일요일엔 평일 가격을 받는다며, 또 혼자 묵는다고 해서 5천 원을 깎아줬다고 한다. 오매, 좋은 거! 여주인 얼굴을 보니 얼굴이 해맑다. 그래서 해 담은이라고 모텔 이름을 지었나? 카드를 받아 들고 방에 들어갔다. 우와! 그간 지내왔던 모텔 중에서 가장 훌륭한 모텔이다. 무인텔 급의 시설에다 베란다까지 있다. 전망도 좋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매, 좋은 거! 베란다 밖 바다 풍경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모텔에서 사진 찍기는 처음이다. 나중에 혹 이쪽으로 여행을 오게 되면 다시 한번 오고 싶은 모텔이다. 만약 외관만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연락을 해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상황이 어려워 보인다고 금방 포기하지 말고 한 번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새삼스런 생각을 해본다. 샤워를 하고 여타 제 의식 행사를 마친 뒤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다 잠이 들었다.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있으니 마음도 그같이 변했나 야리꾸리한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내일은 고성 통일 전망대 근처 금강산 콘도까지 간다. 앞으로 이틀이면 여행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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