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바람 불어 구름 날리네 大風起兮雲飛揚

해내에 위엄 떨치고 고향에 왔어라 威加海內兮歸故鄉

어찌하면 용사 얻어 천하를 편안케 할꼬 安得猛士兮守四方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대풍가. 천하 통일 후 고향인 패현을 들렀을 때 불렀단다. 제왕의 기상이 잘 드러나 있다. 대풍가가 전주 한옥마을 오목정(梧木亭)에 편액으로 걸려있다(사진). 이성계가 왜적 소탕으로 명성을 날릴 때 고향인 전주에 들렸다가 이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노래를 불렀다는 장소에 오목정을 짓고 시 편액을 걸어 놓았다고. 당시 이성계 옆에 정몽주가 종사관으로 있었는데 이성계의 이 노래를 듣고 불쾌해서 자리를 떴단다. 노래에 제왕의 기상이 들어 있으니, 후일 단심가를 불렀던 정몽주에겐 듣기 거북한 노래였을 법하기도 하다.


시참(詩讖)’이라는 게 있다. 시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앞일을 드러낸다는 것인데, 흔히 드는 예가 율곡의 화석정이다. 10세 전에 이 시를 지었는데, 마지막 구절에 성단모운중(聲斷暮雲中, 기러기 울음소리 저무는 구름 속에서 끊어지네)’이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이 단명할 운명을 암시했다는 것. 율곡은 48세에 돌아갔다(글쎄, 48세가 꼭 단명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호사가의 믿거나 말거나 얘기지만, 그의 단명과 관련지으면 그럴듯한 얘기가 된다. 어쩌면 이성계도 단순한 공명심에 저 노래를 부른 것이지만 알게 모르게 후일 왕이 될 자신의 운명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 것은 아닐런지?


시참같은 고상한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언어에 주술성이 있다는 것은 옛날부터 체험적으로 인식됐던 것 같다. 비근한 예로 속담 말이 씨가 된다를 들 수 있을 듯. 체험적으로 인식된 것은 그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해도 왠지 신뢰가 간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시대, 한 번쯤은 자기 쏜 말과 글의 화살이 어느 과녘으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비록 쏜 화살이기에 되돌릴 수는 없다 해도. 그래야 조금은 좋은 운명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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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는 만물이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 세월은 영원한 과객. 부평초 같은 인생 한바탕 꿈과 같나니, 천지간에 살면서 기쁨을 누리는 날이 얼마나 되던가.”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첫대목. 놀아야 되는 명분을 참으로 거창하게 내걸었다. 어제 이백의 말을 핑계 삼아 ~’ 순창에 있는 용궐산에 다녀왔다. 암벽에 설치된 잔도에서 바라보는 섬진강의 풍경이 별미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나는 이백을 닮기 어려운가 보다. 풍류를 풍류대로 즐기지 못하고 쓸데없는 불만을 떠올렸기 때문. 암벽에 설치된 잔도가 마땅치 않았고, 추사의 글씨를 억지로 바위에 새겨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이 사람아, 그러면 아예 가덜 말었어야지!”


그러게요. 그래서 제가 더더욱 이백을 흉내 내기 어려운 소인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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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이미 6부를 정하고 나서 이를 반씩 둘로 나누어 왕의 딸 2명으로 하여금 각각 부() 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무리를 나누어 편을 짜서 가을 716일부터 매일 아침 일찍 대부(大部)의 뜰에 모여서 길쌈을 하도록 하여 밤 10시 무렵에 마쳤는데, 8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따져 진 쪽은 술과 음식을 차려 이긴 쪽에게 사례하였다. 여기에서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가 모두 벌어졌으니, 그것을 일러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이때 진 쪽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회소(會蘇)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 아름다워 후대 사람들이 그 소리에서 말미암아 노래를 지으니, 회소곡(會蘇曲)이라고 이름 지었다.” (삼국사기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

  

한 번쯤 들어봤을 추석의 유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특별한 구절이 있다. “진 쪽에서 한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회소(會蘇) 회소(會蘇)”라고 하였는데, 그 소리가 슬프고도란 구절. 진 쪽에서 내뱉는 탄식이니 슬플 수도 있겠다 싶지만,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가 벌어지는 잔치마당인데 너무 안 어울리지 않는가? 그리고 또 그 슬픈 탄식조의 회소란 말은 무슨 뜻인가?

  

김성호(비류 백제와 일본 국가 기원의 저자)는 추석이 신라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북방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그 근거로 위 기사에서 추수감사의 성격이 짙은 노래와 춤과 온갖 놀이가 모두 벌어진 것과 회소(會蘇)”를 향찰 표기로 봤을 때의 의미를 든다. 추석 즈음의 절기는 추수가 일찍 끝나는 북방에서는 추수감사제를 열 수 있는 절기이나, 남방에서는 아직 수확이 이루어지는 시기가 아니기에 추수감사제를 열만 한 절기가 아니다. 따라서 추수감사제 성격의 추석은 북방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 풍속을 가져온 북방 사람들은 진시황의 탄압을 피해 남으로 내려온 이들일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이주 시기에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해마다 북방에서 행하던 추수감사제 성격의 추석을 남방에서 행할 때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는 가무를 행했을 것이며, “회소(會蘇)”는 그때의 가무에서 발한 탄식일 것으로 본다. 그러면 회소(會蘇)”란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회소(會蘇)”를 향찰 표기로 보면 왔소가 될 것으로 본다. ‘()’에는 오다라는 뜻이 있기에 그 의미로 쓴 것이고, ‘()’는 음만 빌려 쓴 것으로 보는 것. 부연하면, ‘그리운 그대, 왔소이까?’ 정도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서는 당연히 애절하지 않았겠냐고 말한다.

  

추정이지만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추정이다. 이 추정이 맞느냐 틀리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할 터이다. 논리적 정합성이 있다 해도 추정은 추정일 뿐이니까. 다만 삼국사기의 기사에서도 그렇고, 추정에서 살펴본 내용도 그렇고 추석의 본질이 무엇이냐를 살피는게 중요할 것이다. 추석의 본질은 무엇일까? ‘만남아닐까? 그것이 이루어져서 즐겁든, 이루어지지 못해서 슬프든 말이다. 갈수록 만남이 희소해지고 있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만남이 사라지는 추석은 무의미한 추석이 될 것이다. 즐겁든 슬프든 어쨌든 만나야 추석이라 할 터이다.

 

추석을 추석답게 보내고 계신지, 껍데기 추석만 보내고 계신지들 궁금하다. 부디 추석을 추석답게 보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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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꽃(사진). 무릇은 물기가 많은 땅 위라는 뜻의 물웃에서 유래됐다고. 구근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달인 것이었을까, 쟁여놓았던 것이었을까? 흐물흐물 씹히던 무릇. 생각해보니, 이름 값에 어울리는 간식거리였네 그려.


 ‘강한 자제력 혹은 인내라는 꽃말을 갖고 있단다. 그런데 꽃 이름 무릇을 대하면 물웃보다는 발어사 무릇[]’이 먼저 떠오른다. 근엄한 말을 하기 전에 양념격으로 하는 그 무릇말이다. “무릇, 사람이라면... ” ‘인내라는 꽃말은 이 꽃의 생태적 특성보다 혹 유사 발음의 이 발어사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런지? 하여 무릇이라고 부를 때에는 물웃이란 본뜻에 발어사로서의 무릇이란 의미도 은연중 곁들여 사용한 것은 아닐런지


그나저나 발어사로서의 무릇의 의미가 요즘처럼 필요한 때도 흔치 않을 것 같다.“ ‘무릇대통령이라면(국방장관이라면, 감사원 사무총장이라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이라면, 여당 대표라면)...” 얘야, 네 이름 덕에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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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빈 의자를 대하면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던 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가 생각난다. 세대교체를 의자의 내어줌을 통해 표현했다고 배운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고상한 작품보다 유행가 가락이 더 실감 나게 와닿는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


모름지기 의자란 '권좌'의 상징. 의자를 차지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교체를 의미하며, 그것은 결코 순순히 이뤄지지 않고 싸움(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을 통해 이뤄진다. 저 고상한 시는 이런 실상을 도외시한 채 낭만적인 교체를 읊조리고 있기에 실감이 덜한 것이다.


그나저나 저 의자(사진)엔 앉는 사람이 없는지 낙엽이  깔려 있다. 앉을 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들 한 걸까? 그것도 괜찮겠다. 앉을 만한 자리가 아닌데 굳이 앉는 것보다는. 자신이 앉을만한 자리가 아닌데 굳이 앉아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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