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동아시아에서 서문(序文)은 주요 문학 장르 중 하나였다. 단순히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거나 찬사 일색의 낯 뜨거운 글이 아니고 글 쓰는 이의 사상과 관점을 드러내며 포폄을 정확히 가하는 글이었다. 그만큼 공들여 썼다. 과거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사상과 관점을 연구할 때 그들이 쓴 서문을 요긴한 자료로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서문은 과거와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대접이 시원찮으니 쓰는 이도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는다. 단순한 책 내용 소개나 글쓴이에 대한 찬양이 주조를 이룬다.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서문이 책의 얼굴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은 세심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생얼도 좋지만 화장한 얼굴도 좋지 아니한가!


아홉 번째 책 '수험생을 위한 서경'(아홉 번째 책이라고 하니, 혹, '대단한다'고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거금을 들여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는 책이 아니고 내가 편집해서 POD 방식으로 손쉽게 내는 책이다. 판매는 되지만 거의 팔리지 않고 나 혼자 사서 보거나 나눠준다. 취미로 내는 책인 셈이다. 그러니 결코 대단하지 않다. '별거 아니다')의 서문을 썼다. 전통을 잇는 차원이라면 꽤 공들여 써야 했으련만, 아무래도 현대인이 돼서 그런지,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찬양이 주조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만은 가상하다 할 만하다(사실 찬양할만한 것이 없기도 하지만. 하하).



책을 내면서

‘서경(書經)’ 해제를 겸하여


‘수험생을 위한 서경’을 펴낸다. ‘‘수험생을 위한 서경’이라고? 이런 저급한 제목의 책을 내다니…’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다. 경(經)을 홀대하는데 대한 꾸짖음이겠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고, 서경의 내용은 차치하고 그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이가 부지기수이니, 너무 타박하지는 마시기를!      


이 책을 손에 쥔 분들은 어느 정도 한문을 배운 분들이겠고, 한문으로 진로를 개척하려는 분들이라 생각된다. 한문으로 진로를 개척하려면 독해력이 관건이다. 그런데 ‘서경’은 한문으로 진로를 개척하려는 이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긴 하지만 독해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그다지 효험이 없는 책이다. 글이 지극히 난해하기 때문이다(여기 난해하다는 것은 의미 이해가 어렵다기보다는 문법에 잘 맞지 않고 압축적 표현이 많아 풀이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꼭 읽어야 하는 책이니, 이분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이런 다소 경망한 책을 내게 된 것이다.     


한문 독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선 우선 한자를 잘 알아야겠고 다음으로는 일체의 띄어쓰기나 토가 달리지 않은 백문으로 문장을 해석해 본 후 현토 문장(혹은 띄어쓰기 문장)과 번역문으로 자신의 해석을 대조해 보는 것이다. 다소 번거롭고 힘들지만 인내하고 꾸준히 이 과정을 밟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독해력이 향상돼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험생을 위한 서경’은 이런 독해력 향상 방법을 적용해, 난자(難字) ‧ 백문 (서경) 원문 ‧ 현토 (서경) 원문 ‧ 번역문의 순으로 편집을 했다. 가리는 종이를 사용해 가면서 이 순서대로 공부해 줬으면 좋겠다. 학습하는 요령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한 가지 더 권하는 방법은 가급적 소리를 내어 읽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학습 단계에서는 시청각 학습이 묵학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지만 의외로 많은 이들이 이 점을 놓치고 있어 노파심에서 당부드리는 것이다. 굳이 더 하나 부탁드린다면 익힌 본문을 손으로 직접 써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시청각 학습의 일환인데, 요즘처럼 타자가 필기 대용이 된 일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분명한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권해 드린다.     


번역문에 대한 이해를 구한다. 백문이나 현토문에 준해 직역을 하지 않고 의역에 주안점을 두고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서경’을 공부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굳이 축자역이나 직역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성싶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수험생의 입장에서 ‘서경’을 읽는 것은 독해력 향상과 더불어 서경의 전모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도 있느니만큼 약간 매끄러운(?) 번역문을 통해 서경의 전모를 쉽게 파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리한 것이니, 혹 축자역이나 직역을 기대했다면 너른 이해를 부탁드린다.      


‘서경’은 본래 ‘서(書)’라고 불렸다. 서는 문서라는 의미로, 왕 또는 왕과 신하들 간에 있었던 말과 행사에 관한 기록물이다. ‘서경’을 영역할 때 ‘Book of Documents’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서에 경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전국시대 말기부터이다. ‘서경’을 ‘상서(尙書)’라고도 하는데, 상(尙)에는 ‘옛날, 높다, 위’란 의미가 있는바 이 의미대로라면 ‘상서’는 ‘오래된 문서, 존숭 할 문서, 임금과 관련된 문서’ 정도의 의미가 되겠다. ‘상서’라는 명칭은 한초(漢初)부터 사용되었다. ‘서경’이 문서인만큼 그 작자는 특정인이 아니고 주로 조정에 근무하던 관료(사관)들이다. ‘서경’에 나온 글은 하, 은, 주대에 생산된 글들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서경’의 형태는 당대(唐代)에 확립됐다.      


‘서경’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바로 ‘금고문 논쟁’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이래 유전 돼오던 ‘서경’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한나라 문제 때 협서율이 폐지되면서 망실된 경전을 복원하게 되는데, 이때 제남 지방의 복생이 암송하고 있던 서경(29편)이 금문(한대 당시 쓰이던 예서체 글자)으로 복원된다. 이를 흔히 ‘금문 서경’이라 한다. 그런데 한나라 경제 때 노공왕이 자신의 사택을 넓히기 위해 공자의 구택을 허물던 중 다량의 죽간을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 서경도 나왔던 바 이는 당시에 사용되지 않는 과두문(선진 시대 문자 형태의 하나)으로 쓰여있었다. 이를 흔히 ‘고문 서경’이라 한다. 그런데 ‘고문 서경’은 ‘금문 서경’보다 편수가 많았고(45편. 기존 ‘금문 서경’과 중복되는 29편 외에 16편이 더 많음) 내용에도 편차가 있었다. 이후 양 경전은 학자들의 시빗거리가 되고, 초기에는 ‘금문 서경’이 우세를 점하다 한말(漢末)부터는 ‘고문 서경’이 우세를 점한다. 이후 ‘고문 서경’은 사라졌다가 동진 때 매색의 ‘위고문상서(58편. 현행 편수와 동일. 금문상서 29편을 33편으로 늘리고 고문상서 25편이 들어감)’가 등장한다. 거짓이란 의미의 ‘위(僞)’가 붙은 것은 이 판본에 의구심(매색이 조작했다고 보는)이 들어 후대 학자들이 붙인 명칭이다. 앞에서 당대에 들어와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의 ‘서경’이 나왔다고 했는데, 이 ‘서경’은 매색의 ‘위고문상서’를 답습한 것이다. 청대에 들어와 ‘위고문상서’의 조작을 밝히는 입증(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이 대표적 작품)으로 매색의 ‘위고문상서’는 진본이 아니란 판정이 났으나, 유의할 점은 현존하는 ‘서경’ 전체가 조작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금문 서경’과 ‘고문 서경’의 공통부분은 문제가 없고, ‘고문 서경’에 해당하는 내용만 위작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위작의 주 근거로 드는 것은 금문 상서에 비해 고문 상서의 문장이 훨씬 유려하다는 점이다. 후대에 인위적으로 쓰인 글이기에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고문 서경’의 진위 여부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하여 이 책에서는 어떤 것이 ‘고문 서경’이고 어떤 것이 ‘금문 서경’인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단지 서경에 깃든 정치사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할 터이다. 이는 ‘금문 서경’이든 ‘고문 서경’이든 공통된 점이기 때문이다.     


‘서경’의 저류에 흐르는 정치사상은 천명(天命) 그리고 경(敬)과 덕(德)이다. 천명은 하늘(하느님)의 명인데, ‘서경’의 하늘(하느님)은 인격신의 개념이기보다는 도덕적 당위의 추상적 최고위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비록 ‘서경’의 글에서 하늘(하느님)이 명을 내려 임금이 되게 하고 혹은 그 대(代)를 끊게 하고 복을 내리거나 화를 내린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그것은 인격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떠한 행위(잘 / 잘못에 대한)에는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인과론의 근거 대상으로 드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근거로서 사용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서경’의 천명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본주의적인 테제라고 볼 수 있다. 경과 덕은 지도자의 위치(임금이나 관료)에 있는 자들이 심명(心銘)해야 할 덕목으로, 이는 천명과 상관관계를 맺는다(천명을 받으려면 경의 자세를 가져야 하고 백성에게 덕치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서경’의 주요 정치사상은 민본주의라고 볼 수 있다. 백성을 피치자로 보면서도 하늘의 마음을 대변하는 소중한 존재로 보는 것이 ‘서경’의 민본주의이다.     


이번 ‘수험생을 위한 서경’을 내면서 국내에 나온 번역본들을 참고했다. 성백효 씨와 김동주 씨의 ‘서경집전’(전통문화연구회), 김희영 씨의 ‘서경신역’(청아출판사), 권덕주 교수의 ‘서경’(삼덕출판사), 이기동 교수의 ‘서경 강설’(성균관대학교 출판부)이 그것이다. 저마다 장단점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굳이 그 장단점을 말하지 않겠다. 그저 이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어줍잖은 나 같은 이가 이런 책을 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드릴 뿐이며, 더불어 본 책의 번역에는 이분들의 번역을 전재(轉載)한 것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린다(일일이 그 출처를 명시하지는 못했다. 저자 분들의 너른 양해를 빈다). 그러나 이번 번역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채침(1176~1230)이다. 잘 아시겠지만, 채침은 주자의 제자로 그의 유지를 받들어 서경에 주를 단 ‘서전’을 펴냈는데, 이 책의 저술에 거의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이 이의 주가 없었다면 본인은 물론 위 번역자분들의 번역도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채침에게 감사의 마음을 아니 가질 수 없다.      


‘수험생을 위한 서경’은 한문으로 진로를 개척하려는 분들에게 드리는 일종의 보약 같은 책이다. 잘 드시고 기운 내서 좋은 성과 있으시길 기원드린다.


                                                                                                    2024. 2.

                                                                                                     김동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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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장미의 이름'은 서양사 교수들이 추천하는 역사 추리소설이다. 에코 자신이 중세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인데다 그 전문적인 지식을 가장 대중적 장르 문학인 추리에 접목시켰기에 학생들이 흥미진진하게 중세사를 공부할 수 있는 도서가 되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 이후 이 작품을 본뜬 팩션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나, 아직은 이를 넘어선 작품이 없는 듯하다(한 때 '다빈치 코드'가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으나 역시 한 때의 바람에 불과했던 듯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읽어 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추리 소설임에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나만 그런지도 모른다). 현학적인 지식의 나열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 이렇게 되면 저버릴만도한데 이상하게 더 매력을 느끼게 된다. 다가가기 어려울수록 더 매력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도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내력일 터이다. '장미의 이름' 초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리커버판(사진)을 또 구매했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황당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장미의 이름'과 같은 역사 추리소설을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서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한대(漢代)에 복원된 경서로, 뒤늦게 공자의 집에서 발견된 서경과 내용이 불일치되어 그 시비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던 경전이다. 그 시비를 둘러싼 내용들에 얼마간의 상상을 덧보탠다면 재미있는(?) 역사 추리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내와 주변 지인에게 내게 이런 '꺼리'가 있다며 자랑아닌 자랑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오늘 나의 아홉번 째 책으로 준비한 '수험생을 위한 서경' 편집을 마치면서, 그 꿈을 접었다. 고문 서경이든 금문 서경이든 아무리 내용의 편차가 있어도 그 기본 이념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천명' 사상으로 신비적인 요소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비적인 요소와 인본적인 요소의 상충점들이 있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 틈이 안 보였던 것이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 팩션의 많은 소재를 제공하는 건 거기에 함유된 신비적 요소 때문인데('장미의 이름'에도 요한계시록이 등장한다), 아쉽게도 '서경'에서는 그런 요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막연히 '금고문 논쟁'이라는 흥미로운 논쟁에만 기대어 그야말로 황당한 꿈을 꾸었던 셈이다.

그러나, 혹, 모르겠다. '서경'을 좀 더 공부해보면 뭔가 '꺼리'를 찾아낼런지도(원래는 신비적 내용이 많았는데 의도적으로 인본적인 내용만 추렸다고 본다면 여기에는 모종의 음모가 작용한 것이고 그것을 입증하는 작품을 쓴다면 꽤 괜찮은 역사 추리소설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텐데, 자료 수합이나 고증을 할 능력이 없고 보면,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꺼리'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역시 화와에게서 물려받은 '미련'이라는 유전 요인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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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잡생각. 


중국의 과거 역사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가 그 시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란 그저 정권이 바뀌는 것뿐. 헤겔이 중국의 역사를 '정체'라고 말한 것도 일리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정반합의 발전적/직선적 사관을 가졌던 그에겐 어쩌면 당연한 인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중국 역사(나아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는 '정체'됐었던 걸까? 그것은 혹 역사 기술의 방법(흔히 말하는 기전체나 편년체 기술법과 같은)에서 비롯된 그릇된 인식은 아닐까? 나아가 역사를 꼭 발전적/직선적으로만 보는 게 옳은 관점일까? 역사를 '현상'과 '당위'의 순환적 관점으로 볼 수는 없을까? 


역사를 '현상'과 '당위'의 순환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생각은 영/정/순조 때 관각문인의 대표 격인 남공철의 '여김극기문론서'를 번역하다 든 생각이다. 남공철 당시는 정조가 '문체반정'을 명할 정도로 정통 고문의 아성이 흔들리던 시기였다(그 중심에 우리가 잘 아는 연암 박지원이 있다. 남공철은 박지원과 대척점에 있었다). 정통 고문의 아성이 흔들리는 것은 '현상'이다. 여기에 고문 창작을 강제하는 '문체반정'같은 것은 '당위'에 해당한다. 둘은 길항 관계이고, 이는 순환된다. '당위'에서 '현상'이 나오고, 그 '현상'은 다시 '당위'가 되기 때문. 이를 다른 분야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위와 같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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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무더운 한낮) '화엄경' 독송을 마치고 시냇물에 몸을 씻을 때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족 지연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욕구는 즉시보다 지연시켰을 때 충족감이 더 크다는 것. 인용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나오는 일절들인데(책을 분실해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스님은(이라서 그런지) 이 법칙을 체험적으로 터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일반인도 조금 나이를 먹으면 이 법칙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
    아침마다 스마트폰과 전쟁을 벌인다. 아침 독서를 방해하기 때문. 2시간 '통감절요' 읽는 것을 아침 중요 일과로 정했는데, 약간 방심해 스마트폰을 켜면 그날 아침 독서는 물 건너간다. 당연히 즉각적 만족감은 있지만 풍족한 만족감은 느끼기는 힘들다. 오늘, 힘겹게 스마트폰의 유혹을 물리치고 아침 독서를 끝내 흡족한 마음이 들기에 몇 마디 주절거렸다. 축하해 주시라!
    여담. '무소유'에서 인용한 첫대목은 70년대 고관대작들이 골프를 취미로 삼는 것에 일침을 놓는 가운데 한 말이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시절, 서민의 아픔을 공감해야 할 고관대작들이 현실과 괴리된 '골프'라는 고상한 취미를 갖는 것에 스님은 동의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다소 자학적이기까지 한 저 멘트에서 시대를 걱정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스님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나는 골프가 대중화된 듯한 지금 현실에서도 스님의 일갈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 두번째 인용 대목은 스님의 독서기에 나오는 것인데, 스님은 더위서 어떤 일도 하기 힘든 시기인 여름이야말로 독서에 제격이라며 무더운 여름날 좁은 방에서 가사장삼을 입은 채 비지땀을 흘리며 화엄경을 읽었던 경험을 들려준다. 나도 스님을 흉내 내 무더운 여름날 좁은 방에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해본 적이 있는데, 현기증이 일어 죽는 줄 알았다. 하라. 법정 스님이었기에 가능했던 독서라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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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고 /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 도로 남이 되는...


    대중가요 '도로 남'의 한 대목. 점 하나로 그 의미가 현격히 달라지는 우리 글의 묘미(?)를 재치 있게 표현했다. '남'과 '님'은 그 의미가 얼마나 다른가!


    어제 우연히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을 읽다 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일 선전 포고문은 한문으로 돼있어 번역문을 참조해(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 읽었는데 마지막 항목 풀이가 황당했다(위 사진).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로 번역할 것을 '만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로 풀이해 놓았던 것. 전자의 풀이대로라면 연합군의 대일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후자의 풀이대로라면 만주군(일본의 괴뢰 정부)의 대연합군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는 의미가 되어, 완전히 상반된 의미가 된다. '점' 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의미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 글의 묘한 특성을 새삼 실감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은 이런 우리 글의 묘한 특성을 말로 바꿔 표현한 속담일 터이다. 말과 글을 쓸 때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됐다. 그나저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가 저리 부실해서야...'오류 신고'가 있긴 하다만서도(어제 오류 신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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