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작품 '장미의 이름'은 서양사 교수들이 추천하는 역사 추리소설이다. 에코 자신이 중세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문가인데다 그 전문적인 지식을 가장 대중적 장르 문학인 추리에 접목시켰기에 학생들이 흥미진진하게 중세사를 공부할 수 있는 도서가 되기 때문이다. '장미의 이름' 이후 이 작품을 본뜬 팩션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나, 아직은 이를 넘어선 작품이 없는 듯하다(한 때 '다빈치 코드'가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으나 역시 한 때의 바람에 불과했던 듯싶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읽어 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추리 소설임에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다(나만 그런지도 모른다). 현학적인 지식의 나열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기 때문. 이렇게 되면 저버릴만도한데 이상하게 더 매력을 느끼게 된다. 다가가기 어려울수록 더 매력을 느끼게 되는 건 아마도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내력일 터이다. '장미의 이름' 초판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리커버판(사진)을 또 구매했던 것도 이런 이유이다.

황당한 꿈을 꾼 적이 있다. '장미의 이름'과 같은 역사 추리소설을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서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한대(漢代)에 복원된 경서로, 뒤늦게 공자의 집에서 발견된 서경과 내용이 불일치되어 그 시비가 오랫동안 끊이지 않았던 경전이다. 그 시비를 둘러싼 내용들에 얼마간의 상상을 덧보탠다면 재미있는(?) 역사 추리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내와 주변 지인에게 내게 이런 '꺼리'가 있다며 자랑아닌 자랑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오늘 나의 아홉번 째 책으로 준비한 '수험생을 위한 서경' 편집을 마치면서, 그 꿈을 접었다. 고문 서경이든 금문 서경이든 아무리 내용의 편차가 있어도 그 기본 이념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천명' 사상으로 신비적인 요소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신비적인 요소와 인본적인 요소의 상충점들이 있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 틈이 안 보였던 것이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 팩션의 많은 소재를 제공하는 건 거기에 함유된 신비적 요소 때문인데('장미의 이름'에도 요한계시록이 등장한다), 아쉽게도 '서경'에서는 그런 요소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막연히 '금고문 논쟁'이라는 흥미로운 논쟁에만 기대어 그야말로 황당한 꿈을 꾸었던 셈이다.

그러나, 혹, 모르겠다. '서경'을 좀 더 공부해보면 뭔가 '꺼리'를 찾아낼런지도(원래는 신비적 내용이 많았는데 의도적으로 인본적인 내용만 추렸다고 본다면 여기에는 모종의 음모가 작용한 것이고 그것을 입증하는 작품을 쓴다면 꽤 괜찮은 역사 추리소설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텐데, 자료 수합이나 고증을 할 능력이 없고 보면, 이 역시 불가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꺼리'가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역시 화와에게서 물려받은 '미련'이라는 유전 요인 때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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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잡생각. 


중국의 과거 역사책을 읽다 보면 그 시대가 그 시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란 그저 정권이 바뀌는 것뿐. 헤겔이 중국의 역사를 '정체'라고 말한 것도 일리 있는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정반합의 발전적/직선적 사관을 가졌던 그에겐 어쩌면 당연한 인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중국 역사(나아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는 '정체'됐었던 걸까? 그것은 혹 역사 기술의 방법(흔히 말하는 기전체나 편년체 기술법과 같은)에서 비롯된 그릇된 인식은 아닐까? 나아가 역사를 꼭 발전적/직선적으로만 보는 게 옳은 관점일까? 역사를 '현상'과 '당위'의 순환적 관점으로 볼 수는 없을까? 


역사를 '현상'과 '당위'의 순환적 관점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싶은 생각은 영/정/순조 때 관각문인의 대표 격인 남공철의 '여김극기문론서'를 번역하다 든 생각이다. 남공철 당시는 정조가 '문체반정'을 명할 정도로 정통 고문의 아성이 흔들리던 시기였다(그 중심에 우리가 잘 아는 연암 박지원이 있다. 남공철은 박지원과 대척점에 있었다). 정통 고문의 아성이 흔들리는 것은 '현상'이다. 여기에 고문 창작을 강제하는 '문체반정'같은 것은 '당위'에 해당한다. 둘은 길항 관계이고, 이는 순환된다. '당위'에서 '현상'이 나오고, 그 '현상'은 다시 '당위'가 되기 때문. 이를 다른 분야에도 적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위와 같은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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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취미는 끝없는 끝없는 인내다."
    "(무더운 한낮) '화엄경' 독송을 마치고 시냇물에 몸을 씻을 때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족 지연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욕구는 즉시보다 지연시켰을 때 충족감이 더 크다는 것. 인용문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나오는 일절들인데(책을 분실해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스님은(이라서 그런지) 이 법칙을 체험적으로 터득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일반인도 조금 나이를 먹으면 이 법칙을 자연스럽게 터득한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
    아침마다 스마트폰과 전쟁을 벌인다. 아침 독서를 방해하기 때문. 2시간 '통감절요' 읽는 것을 아침 중요 일과로 정했는데, 약간 방심해 스마트폰을 켜면 그날 아침 독서는 물 건너간다. 당연히 즉각적 만족감은 있지만 풍족한 만족감은 느끼기는 힘들다. 오늘, 힘겹게 스마트폰의 유혹을 물리치고 아침 독서를 끝내 흡족한 마음이 들기에 몇 마디 주절거렸다. 축하해 주시라!
    여담. '무소유'에서 인용한 첫대목은 70년대 고관대작들이 골프를 취미로 삼는 것에 일침을 놓는 가운데 한 말이다.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 시절, 서민의 아픔을 공감해야 할 고관대작들이 현실과 괴리된 '골프'라는 고상한 취미를 갖는 것에 스님은 동의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다소 자학적이기까지 한 저 멘트에서 시대를 걱정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스님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나는 골프가 대중화된 듯한 지금 현실에서도 스님의 일갈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고 있다. 두번째 인용 대목은 스님의 독서기에 나오는 것인데, 스님은 더위서 어떤 일도 하기 힘든 시기인 여름이야말로 독서에 제격이라며 무더운 여름날 좁은 방에서 가사장삼을 입은 채 비지땀을 흘리며 화엄경을 읽었던 경험을 들려준다. 나도 스님을 흉내 내 무더운 여름날 좁은 방에서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해본 적이 있는데, 현기증이 일어 죽는 줄 알았다. 하라. 법정 스님이었기에 가능했던 독서라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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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를 지우고 /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 도로 남이 되는...


    대중가요 '도로 남'의 한 대목. 점 하나로 그 의미가 현격히 달라지는 우리 글의 묘미(?)를 재치 있게 표현했다. '남'과 '님'은 그 의미가 얼마나 다른가!


    어제 우연히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을 읽다 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대일 선전 포고문은 한문으로 돼있어 번역문을 참조해(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 읽었는데 마지막 항목 풀이가 황당했다(위 사진).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로 번역할 것을 '만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로 풀이해 놓았던 것. 전자의 풀이대로라면 연합군의 대일전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후자의 풀이대로라면 만주군(일본의 괴뢰 정부)의 대연합군 승리를 미리 축원한다는 의미가 되어, 완전히 상반된 의미가 된다. '점' 하나의 차이가 이렇게 큰 의미 차이를 가져온다. 우리 글의 묘한 특성을 새삼 실감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은 이런 우리 글의 묘한 특성을 말로 바꿔 표현한 속담일 터이다. 말과 글을 쓸 때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지만 이번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게 됐다. 그나저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가 저리 부실해서야...'오류 신고'가 있긴 하다만서도(어제 오류 신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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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도리에 있는 햄버거 가게, 인생 버거(사진). 미식가인 아내가 칭찬을 해서 해변길 걷기 중 들렸는데(수요일, 10:40) 문을 열지 않아 그 맛을 못 보았다. 그런데 가게 이름이 참 재미있다. '인생 버거'라, 직유법으로 보면 '인생 같은 버거'가 되겠고, 은유법으로 보면 '인생은 버거다'가 되겠고, 우스개로 읽으면 '인생 별거 있어'가 되겠다. 


    '인생 같은 버거'라면 희로애락이 함께하는 것이 삶이니 이 집 버거는 그런 달콤 쌉쌀한 맛이 난다는 것일 터이다. '인생은 버거다'라면 인생은 천지간에 살아가는 존재이니 이 집 버거는 그런 우주론적 의미를 지닌 존엄한(?) 버거라는 것일 터이다. '인생 별거 있어'라면 삶이 꿀꿀할 때 한 잔 마시며 꿀꿀함을 풀듯 이 집 버거를 먹으면 그런 효과가 난다는 것일 터이다. 날이 꿀꿀한 오늘, 마지막 의미로 '인생 버거'집 의미를 풀이하고 싶다. 하하. 재미있는 가게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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