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일 토요일


몽롱한 상태에서 잠을 깼다. 똥둣간에서도 시간이 지나면 냄새를 못 맡는데 간밤의 탈취제 냄새는 사라질 줄 모르고 코끝에 달라붙어 계속 나를 자극했다. 밤새 몇 번을 깼다. 도대체 탈취제를 얼마나 뿌렸기에. 아무래도 평창 모텔 살인 사건의 주인공을 만들려고 했음이 틀림없다. 그래도 살아남은 것을 보면, 어머니 본향의 시조님께서 어여삐 여겨 살려주신 것 같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고도의 초월 축지법을 사용하야 3일 갈 거리를 단 하룻만에 가기로 했다. 안나 할머니께선 평창에서 마평 청심대, 마평 청심대에서 상원사, 상원사에서 양양 서림까지 3일에 걸쳐 이동하셨는데, 나는 곧바로 평창에서 양양으로 비상하기로 한 것. 할머니는 지인도 있고 템플 스테이도 예약을 해놓아 그런 일정이 가능했으나, 나는 그럴만한 형편이 못돼 숙소 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초월 축지법을 쓰기로 했다. 게다가 버스에서 구경하는 차창 밖 풍경은 내가 즐기는 오락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도보여행의 정도를 어기는 게 다소 아쉽지만, 어차피 이미 베린 몸, 뭔 대수랴! (아니, 이 자가 이젠...) 더구나 오후엔 비 소식도 있다. 그래도 상원사는 한 번 들려봐야겠다. 한암 스님이 6.25 전쟁 중 목숨을 걸고 지켜낸 절이라니, 도대체 어떤 절이기에 그랬나 한번 확인해보고 싶다. 아침을 먹은 뒤 간단히 세수를 하고 짐을 챙겨 모텔을 나왔다. 모텔에 대한 복수로 이부자리를 그대로 펼쳐놓고 쓰레기도 약간 던져놓을까 하다 그만뒀다. 소심한 자의 양심이 발목을 잡아 그간 해오던 대로 모두 정리를 하고 나왔다. 아줌씨, 제발 탈취제는 쓰지 말아 주세요~. 너무 괴롭습니다. 오늘 숙소는 양양의 () 모텔로 정했다. 후기에 호평이 많았기 때문. 가격도 적당했다. 5만 원. 토요일이니 이해할만한 가격이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평창에서 상원사를 가려면 우선 장평에 가야 하고 장평에서 다시 진부로 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상원사로 간다. 장평행 버스는 715분 출발. 1시간가량 시간이 남아 평창읍내를 한 바퀴 돌아봤다. 간 밤의 불쾌한 경험 때문일까, 이른 아침의 다소 스산한 느낌 때문일까, 평창읍은 마치 황량한 서부의 간이역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의 본향이라 보너스 점수를 주려해도 줄만한 점수가 없었다(평창 관련 분들 노여워 마셔요. 그냥 일 개인의 주관적 느낌이니,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작은 현수막 하나가 눈에 띈다. “촌집 팔아요. 4,900만 원. 주택지: 3002,500만 원.” 집은 그렇다 쳐도, 300평에 2,500만 원이면 평당 얼만겨? 8원 조금 넘네? 시상에, 이건 땅값이 아니라 똥값이네. 아니네, 똥값만도 못하네. 정화조 한 번 푸는데도 5만 원이니.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강원도 땅은 금 따는 콩 밭인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여. 그때 파 엎은 콩 밭이 아직도 회복이 안된 모양이지? 이 사람아, 지금 농담할 때여! 알어. 왜 모르겄어! 슬프니께, 그냥 한 번 웃으려고 농짓거리 한 거지. 작은 현수막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 여기까지는 당시 느꼈던 실제 느낌이다. 그런데 평당 8원은 나의 착오였다. 8만원이 맞다. 산수에 서투른 나의 오류.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나의 생각도 당연히 오류. 농촌 소멸 인구 소멸에 너무 집착하다보니 이런 생각을 한 것 같다. 8만원은 도시 땅값에 비하면 '똥값'이 분명하지만 일반 시골 땅값에 비하면, 잘은 모르지만, 아주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가격인 것 같다. 내용을 고칠까 하다가 당시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쓰고 싶어 오류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노출시켰다. 헤아려 읽으셨기를!


장계 찍고 진부 찍고 상원사 주차장에 내렸다. 상원사 들어오기 전 월정사 입구에서 때 아닌 간첩 심문을 받았다. 버스에 타고 있는데, 월정사 매표소 직원이 올라오더니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간첩에게는 5천 원을 받고, 현지인에게는 그보다 적게 혹은 그냥 관대하게 용서하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버스에 타고 있어 입장료는 안내는 줄 알고 얼씨구나 하며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러면 그렇지. 애고 그놈의 입장료, 입장료. (사찰 입장료는 54일 자로 몇 군데를 제외하고 폐지됐다. 대신에 국가나 지자체에서 보존해 준다.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니 그게 그거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절 들어갈 때마다 느꼈던 입장료 스트레스가 사라져 잘한 입법이라 생각된다. 굥한테 칭찬하는 것도 있네? 혹시 이것도 천공한테 자문받은 거 아녀?)

조금 오르니 상원사 소개 입간판이 보인다. 눈길을 끄는 내용이 있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 세조 10(1464) 왕사(王師)인 사미 등이 상원사의 중창 경위와 내역에 대해 기록한 것이란다. 왕실의 어첩과 권선문의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선문은 한문과 한글로 적혀있는데 한글 권선문은 한글 창제 당시의 서체와 표기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써놨다. 국보란다. 그런데 핵심이 빠져 있다. 상원사 중창은 세조의 만수무강을 빌기 위해서 벌인 사업이며, 이 때문에 왕실에서 적지 않은 물품을 하사해 이런 기록물이 남게 된 것인데, 이 사실이 빠져있는 것. 입간판의 중창 권선문 사진을 보니 쌀이 5백 석, 비단이 5백 필, 베가 5백 필, 철이 15천 근 내려진 것으로 나온다. 굉장한 시주이고, 세조(왕실)()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세조의 원찰이었기에 가능했던 하사품이다. 그런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자에게 무슨 만수무강을 빌어주며, 또 그것이 고마워 하사품을 내려주는 것은 무슨 행위란 말인가. 대자대비한 부처님이니 다 용서하고 받아주실 것이라 믿었던 것일까? 내겐 문화재적 가치보다 정교(政敎) 밀착의 추태를 보여주는 산 증거로 보인다 (하긴 그런 것도 문화재적 가치라면 가치라고 할 수도 있겠다). 과한 생각일까?



상원사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다. 대웅전도 없고 문수전이 대웅전 구실을 한다. 거기다 새로 불사를 해서 허여멀건하기 까지 하다. 뭐여, 기대한 것 하곤 딴 판이네? 경내(境內) 찻집에서 주인에게 물으니, 상원사는 원래 암자였단다. 그려? 선초에 왕실의 총애를 받던 절인데, 암자였다고? 이상한디? 혹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녀? 그러나 절의 규모가 뭐 그리 대수랴. 절에 머물렀던 사람이 더 대수지. 상원사가 유명한 건 6.25 당시 이곳을 불태우려던 국군의 작전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절을 지켰던 한암 선사와 그의 제자인 불전(佛典) 한글 번역의 금자탑을 쌓은 탄허 스님 때문이다. 만약 이 두 분 스님이 없었다면 상원사는 별 볼일 없는 절이었을 것이다. 강진에서 다산을 빼면 시체인 것과 매한가지로 말이다. 두 큰 스님의 족적 때문에 이 작은 사찰은 길이 세인/수도인의 메카가 될 것 같다. 상원사를 나오며 시원시원한 현판 글씨 사진을 찍었다. 탄허 스님의 글씨. 어떤 인물이었을지 능히 짐작케 한다.



경내 찻집에서 사치를 부렸다. 대추차 한잔을 마신 것. 7천 원인데, 진했다. 손님이 없어서 그런지 서비스로 고구마 2개를 덤으로 줬다. 이른 점심으로 가름하기로 했다. 찻집 주인이 적멸보궁을 한 번 가보라고 권한다.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곳으로 불자들의 필수 코스란다. 시간이 얼마냐 걸리냐니, 남자 걸음으로 한 40분 걸린단다. 불자는 아니지만 시간이 될 듯하여 가보기로 했다. 아까 상원사 주차장에서 올라올 때 간이 승강장의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는데 상원사에서 진부로 가는 버스가 1145분에 있었다. 시계를 보니 1015. 깄다가 버스 시간에 맞춰 내려오려면 시간이 약간 빠듯하지만 올라가는 시간은 40분이래도 내려오는 시간은 그보다 단축될 터이니, 갔다 올만 하겠다. 찻집을 나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주말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꽤 붐빈다. 적멸보궁 가는 길은 가파르기도 하거니와 계단으로 돼있어 생각보다 오르기가 힘들었다. 이런 길인데도 연세 드신 분들이 오르는 것을 종종 봤다. 사람의 신심(信心)이란 참으로 힘이 센 특이한 물건이다. 가는 중간중간 희한한 돌들이 설치돼 있었다. 끊기지 않고 깎아놓은 사과 껍데기 모양의 소형 돌들이었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여기서 소리가 났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오잉, 가만히 가서 살펴보니 속에 앰프 시설이 돼있었다. 적멸보궁의 법회를 중계방송하고 있는 듯했다. 거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뭐 저렇게까지 하는 비웃음도 나오는 물건이었다. 재미 삼아 사진 한 장, 찰칵. 적멸보궁을 한줄기 바람처럼 쓱 휘돌아 본 뒤 바로 하산했다. 부처님, 다음에 시간 여유 있을 때 와서 천천히 둘러볼게요~.



상원사에서 다시 진부로 돌아와 강릉 가는 표를 끊었다. 1230분 차다. 그런데 차가 안 왔다. 뭐여? 시골이니께, 이해 혀! 바로 이어지는 차가 1250분 차라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차에 학생들이 많이 탄다. 강릉으로 놀러 가는 것 같다. 그려, 한참 젊은 나이에 별 볼일 없는 면()에 뭐 볼 것이 있겄어. ()나 가야 볼 것이 있겄지. 문득 중학교 때의 황당한 추억이 떠오른다. ㅇㅇ이와 공주에 영화 보러 놀러 갔었는데, 그게 어떻게 선생님들의 눈에 띄어 다음 날 구타를 당한 것이다. 지금으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추에이션이었는데, 당시는 그게 통했다. 나는 그냥 선생님께 싹싹 빌었다. 가슴 아픈 건 이 사건 이후 ㅇㅇ이는 학교를 데면데면 나오다 결국은 그만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잘 살고 있는지? 영화를 보러 가자고 꼬드긴 건 바로 나였기 때문에 ㅇㅇ이를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서울에서 파고다와 피카딜리 극장을 다녀본 적이 있는 내게 면 단위의 답답한 문화 환경은 말 그대로 답답 그 자체였다(초등학교 4학년 때 시골로 내려왔다). 더구나 머리가 살살 굵어지는 나이인 중학교 때는 그 답답함이 더했다. 하여 모처럼만에 ㅇㅇ이를 꼬드겨 영화 구경을 갔던 것인데, 그 사단이 생긴 것이다. 학교 현장에 있을 때 어쩌다 학생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 학생들은 정말요?”를 연발했다. 그때는 그랬다.



강릉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뉴스를 들으니 산불이 심하던데, 터미널이라 그런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하겠다. 이른 점심 때문에 배가 고파 던킨 도너츠에 들어가 5,900원어치 도넛을 사서 허기를 채웠다. 미제의 구정물(지인이 부르는 커피의 별명)도 마실까 하다 그만뒀다. 그간도 주제넘게 많이 마셨는데2시 출발 양양행 버스표를 끊고 대합실 터미널에 물끄러미 앉아 있었다. 차창으로 구경하는 풍경도 재미있지만 대합실 터미널에 물끄러미 앉아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맞은편에 로또 판매점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지만 끊어질 만하면 오고 끊어질 만하면 온다. 자기네 판매점에서 ㅇ등 당첨자가 나왔다는 홍보물을 써붙였는데, 그게 한몫하는 것 같다. 사실일까? 그럴지도 모르지! 학교 다닐 때 대립각을 세웠던 교감이 자신은 자식들에게 절대 복권을 사지 말라고 강조한다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양반, 평소 목소리가 내 큰 목소리의 두 배는 되었다.) 속으로 그러셔? 그건 나하곤 의견이 맞으시네.’ 했다. 나는 복권(로또)() ‘소확행이란 이름을 내걸고 사람들의 피를 빨어먹는 흡혈귀라고 생각한다. 나도 절대로 아이들에게 복권(로또) 사지 말고 차라리 그 돈으로 빵 사 먹으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계속 구경하다, 문득 이병욱 선생님을 떠올렸다. 춘천에 계신데, 갈 수도 있는데. 퇴임했으니 춘천에 올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들리라고 하셨는데. 막국수와 닭갈비를 사주시겠다며. 사실 양양행 버스표를 끊기 전 춘천에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예의 수줍은 성격 탓에 막상 선생님을 봬도 당장이야 반갑지만 이후엔 할 말이 별로 없을 것 같아(술을 마시게 된다면 취해서 횡설수설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뒀다. 온라인상으로 뵙는 것 하고 실제 뵙는 것은 다르지 않은가. 이병욱 선생님은 알라딘 블로그에서 알게 된 소설가이다. 교사 출신이신데 작고한 소설가 이외수와 자별하게 지내셨다. 최근에 그와 얽힌 청춘 시기를 그린 세 남자의 겨울이란 작품을 펴내셨다. 문단 세계에 과문해 선생님의 위상을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 생각으론, 매우 저평가된 숨은 보석 같은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페북에 이따금 올리는 짧은 글들을 보면 이 분의 내공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여, 세 남자의 겨울을 한 번 사 읽어 보시라! 내 말이 과히 그렇게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메이저 출판사에서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외수 작고 즈음 전후하여 출판되고 빵빵한 광고 날렸으면 적지 않은 부수가 팔렸으리라 생각한다. 선생님께 전화라도 한 번 할까 하다 이 역시 그만뒀다. 어쩌면 그리운 채로 그냥 멀리 지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피천득이 아사코를 마지막 만났을 때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차라리 아니 만났으면 좋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냥 온라인상으로만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양양행 버스가 왔다. 양양으로 양양하게 출발~.


비가 와서 그런가 약간 노곤하다. 양양에 도착할 때까지 간간이 졸았다. 터미널이 외진 곳에 있었다. 의외. 비 뿌리는 속을 돌진하여 중간에 마트에 잠깐 들렀다 숙소인 몽 모텔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4시였다. 숙소에 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러나 우중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이거 애초 약속과 다르다. 숙박비가 6만 원이라고 돼있다. 사람도 없고 키오스크로만 결재하게 돼있다. 순간 기분이 ~’해졌다. 1만 원이면 식사 한 끼 값인데야속했지만, 다른 데를 찾기가, 우중이라, 너무 귀찮다. 그냥, 결정! 짐을 풀고 아까운 만원을 생각해 간이식으로 저녁을 때울까 하다가 우중에 30여분 이상을(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걸어와 뜨거운 국물 있는 것을 먹고 싶어 과감히(!) 저녁을 사먹으러 모텔 밖으로 나갔다. 칼국수 집이 바로 눈앞에 띄었다. 우중에, 칼국수, 좋지! 망설임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완전한 저녁 시간대라 아니라 그런가 썰렁하다. 손님 두 분이 소주를 들고 있었다. 닭칼국수 메뉴가 눈에 띄어 주문했다. 내온 칼국수는 그렇고 그랬다. 그래도, 뜨듯한 국물 있는 것을 먹을수 있으니, 이게 어디냐! 정신없이 먹었다.


숙소로 돌아와 일찌감치 저녁 제 의식을 치르고 침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여기도 제천에서처럼 TV가 거대하다. 요즘 큰 화면의 TV 설치가 모텔의 유행인가? 채널을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역시나 볼만한 게 없다. 그런데 이 모텔, 그간의 모텔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TV밑에 성인방송 채널 시청 비번을 붙여 놓은 것.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있나! 그런데 성인 방송 채널을 눌러보니 지금은 준비 중운운하며 10시 이후에 시청이 가능하다고 나온다. 10시까지 기둘러? 아이고, 앓느니 죽지. 그냥 이것저것 서로 저 잘났다고 저 좀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애들을 그려 그려하며 고루고루 쓰다듬어주다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밤 꿈엔 오랜만에 내 님이나 한번 만나보자. 불을 끄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내일은 고성 봉포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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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일 금요일


아버지는 끝내 꿈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긴 돌아가신 이후 한 번도 꿈속에서 뵌 적이 없는데 뭐 급한 일이 생겼다고 갑자기 꿈에 나타나실까. 지금 계신 곳에선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내시는지 모르겠다. 앱을 켜고 평창읍까지의 거리를 확인하니 42km11시간 9분 걸린다고 나온다. 서둘러야겠다. 시답잖은 먹을거리로 아침 식사를 한 뒤 여타 제 의식을 끝내고 출입문을 나섰다. 모텔 현관으로 내려가는데 어제는 무심코 지나쳤던 그림 한 점이 눈길을 끈다. 클림트의 그림인가? 화사한 황금빛으로 나무 세 그루와 들판을 그려 놓았다.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 보일 듯 말 듯한 작은 사람 하나를 그려 놓았다. 아니, 그려 놓았다기보다 살짝 점을 찍어 놓았다. 뭔가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한 듯한 느낌이 든다. 내 눈길을 끄는 걸 보니 나의 그 어떤 무의식 세계를 설명해 줄 그림 같은 생각이 든다. 사진 한 장, 찰칵. 심리학을 전공하는 분한테 왜 저 그림에 호감이 갔는지 물어보면 뭔가 그럴듯한 해설을 해줄 것 같다. 모텔 문을 나서서 시계를 봤다. 65. , 평창을 향하야 출발! 오늘 숙소는 평창장 여관으로 정했다. 가장 저렴한 가격이었기 때문. 이제는 쓰지 않는 여관이란 이름이 향수(鄕愁)를 일으킨 것도 한몫했다. 그리 좋은 느낌의 향수는 아니지만.



숙소를 나와 큰 도로를 걸으며 노변 풍경을 하나 찍었다. 아버지를 추억하며. 다시 제천에 올 일이 있을까? 앞날은 헤아리기 어렵지만, 올 일이 거의 없을 것 같다. 안녕~, 제천!



희한한 구호를 써붙인 중학교가 보인다. “나는 내토 중학교 주인임이 자랑스럽습니다.” 또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 진다. ‘는 재학생이여? 졸업생이여? 교장이여? 교직원이여? 그리고 뭐가 그렇게 자랑스러운 겨? , 대충 무슨 의도에서 써붙인 것인지 짐작은 가지만 꼬치꼬치 따지고 들면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애매모호한 구호이다. 아무 이해상관도 없는 넘의 중학교 구호를 보고 괜한 꼬장을 부리는 것을 보면 난 정말 구호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체질인 것 같다. , 거창하게 체질까지.



길가의 쓰레기 중 역사적인 기념물이 될 쓰레기 사진을 하나 찍는다. 레쓰 비(Let’s be) 커피 캔. 길을 걸으며 가장 많이 본 쓰레기이다. 앞으로도 가장 많이 볼 것이 틀림없다. 강진읍 한 24시 마트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른다. 찢어진 배낭을 버릴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사러 갔는데, 약간 맛이 간 듯한 중년 사내가 레쓰 비를 사려고 했다. 여주인이 일갈했다. “아저씨, 이제 그만 드셔!” 가게 주인에게 듣기 어려운 말을 들었음에도 이 중년 사내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 왜 그랴, 먹고 싶어.”라고 했다. 여주인이 계속 안 팔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가게를 나왔다. 저 정도 되면 중독이라고 해야 할 것, 아니, 중독이다! 싼 값의 달콤한 커피 음료로 잠시나마 고단한 세상사 잊고 즐거워지고 싶은 사내의 마음을 능히 헤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저 사내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우리나라 수많은 이들이 레쓰 비로 인하여 커피 중독이 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통계를 본 적도 내 본 일도 없지만 여행 중 접한 레쓰 비쓰레기를 보건대 틀림없지 않을까 싶다. 제조사인 롯데칠성음료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과문해서 그런지, 롯데칠성음료가 이에 대해 뭔가 합당한 조치를 했다는 소식은 접한 적이 없다. 장사하는 이들에게 무슨 도덕을이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최소한의 도덕을 덧칠해 놓는 것이 종국적으론 그들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을까 싶다. 롯데칠성, 내 말 잘 귀담아 들어주셔. (위키 백과를 검색해 보니, ‘Let’s Be‘우리 함께라는 뜻의 ‘Let’s Be Together’에서 ‘Together’를 줄인 말로 '캔커피를 마실 때에는 항상 레쓰 비를 마시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나온다. 나는 막연히 '살아갑시다정도의 의미로 이해했는데, 오해였다.)



하천에 수북이 올라온 잡초들을 본다. 문득 뜬금없는 생각을 한다. 저 풀들이 없다면 세상은.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꽃이나 나무보다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저 하천에 수북이 올라오는 풀들 같다. 새삼 사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고맙다, 얘들아~. 기념사진도 한 장, 찰칵.



시멘트 공장을 지난다. 분진이 많아 잠시 마스크를 썼다. 위용이 대단하다. 사진을 찍어보는데 평면 각도에서 상향 각도로 바꿔 찍어보니 그 위용이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산업사회 역군의 대명사 시멘트 공장. 이제는 왠지 뒷전에 나앉은 노인 느낌이다. 그래서 그럴까, 대단한 위용임에도 괜스레 슬퍼 보인다. 이런 나의 애잔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대형 트럭들이 왔다 갔다 하며 빨리 가라고 먼지를 일으킨다. 알았슈, 가면 될 거 아뉴~.



송학면 장곡리(제천시 소재다)를 지나다 신경림 시인의 시집 을 주웠다. 그런데 이거 참 묘하다. 길가에서 책을 주운 것도 그렇고, 하필 주운 책의 제목이이란 것도 그렇다. 또 한 가지 묘한 것은 이 시집을 노변의 무덤 앞 길에서 주웠다는 것이다(노변엔 이 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어떤 작자가 지각없이 버린 페휴지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연속에 숨겨진 그 어떤 의미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제 멋대로 상상의 날개를 편다.


아버님(어머님), 소자 이제 고향을 떠나고자 하옵니다. 아버님(어머님)이 즐겨 읽으시던 책을 무덤 앞에 놓사오니 인연 닿는 자 만나면 주시옵소서. 언제 또 올까 모르겠습니다. 다시 뵈올 때까지 안녕히. 쿨럭쿨럭(기침).

이런 상황에서 만나게 된 책이 아닐까? 시집을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책은 숙소에 도착해 휴지로 깨끗이 닦고 헤어 드라이기로 말렸다. 노변에 여러 날 방치됐는지 책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 은 신 시인의 기행시집이라 혹시 내가 지나온 곳 혹은 갈 곳과 일치되는 곳이 있나 살펴봤는데(내가 느낀 것과 비교해 보고 싶어서), 한 두 곳 일치되는 곳이 있을 뿐 대부분 달랐다. 일치되는 곳도 그 지역에 대한 적실한 객관적 느낌보다 다분히 주관적인 느낌을 그려 별반 호감이 가지 않았다. 애써 주워온 것에 비해선 별 볼일 없었던 셈. 집에 돌아올 때까지 간직했는데, 책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심해 결국 버리고 말았다. 대신 기념의 의미로 중고판 을 한 권 새로 샀다. ‘우연속에 숨겨진 그 어떤 의미은 결국 이런 거였다. “이보게, 길가에 버려진 책은 그냥 두고 지나가시게.”)



강원도로 넘어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런데 환대하는 태도가 너무 밍밍하다. 충북에서는 번듯한 인사를 받았는데. 진태 씨, 신경 좀 쓰셔~. 작은 친절이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하는지 모른다우. 허기사 맨날 높은디서만 생활해서 낮은 곳 사정을 워치게 알겄어? 강릉 산불 났던 날도 골프 치셨다매? 좌우지간 신경 좀 쓰셔. 하대하는 말투도 너무 기분 나뻐하지 마시고. 같은 본은 아닐지래두 항렬을 보니 증손자 뻘 같아서 약간 말 놓은 겨. 이해 허시지?



영월 들어서는 입구를 지났다. 조금 전에 대형 트럭이 지나갔는데, 저 앞에서 차가 선다. 좀 위험해 보인다. 뭐여, 길 가에다 대형 트럭을 세우고. 속으로 약간 투덜거리며 지나려는데 기사 분이 나보고 뭐라고 한다. 뭐지? 볼 일 없는데? 못 들은 척하고 지나려는데 또 부른다. “?” “도보여행 중이신가요?” “, !” 기사 분한테 갔더니 고생한다며 커피 음료를 주신다. 세상에!! 너무 감동해 180° 인사를 드렸다. 얼굴을 보니 내 나이 또래이거나 조금 아래일 것 같다.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허락하신다. 또 한 번 감사 인사를 하고 발길을 옮겼다. 기사 분이 뒤에서 출발해 지나갈 때 손을 흔들었더니, 기사 분도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속으로 기원했다. ‘기사님, 많이 힘드시죠?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기사 분이 준 커피 음료를 배낭에 넣기도 뭐 하고 갖고 다니기도 뭐 해 그냥 한 번에 다 마셔 버렸다. 더운 날씨에 고카페인 커피를 들이키니 몸에서 가짜 힘이 막 솟구친다. 나는 야, 에너자이저! 이 사람이...여행 중 은근 여러 차례 커피 먹었어. 안뎌, 자네 몸엔 안 맞는 음료여. 조심혀. ~.


단종대왕 유배길이라는 안내판을 만난다. 그러고 보니, 영월은 단종의 유배지로구나. 애달픈 임금, 이 외에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도대체 정치가, 권력이 무엇이기에 삼촌이 조카를 죽인 것이냐. 수양대군(세조)을 이리저리 재평가도 하더만서도 그 이의 가장 큰 실책은 역시 유교 이념 국가의 그 이념을 스스로 뒤집은데 있다. 그것도 주춧돌을 놓는 국초에. 하기사 할아버지 태종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 장악에서 이미 그것은 뒤집혔다만서도. 어쩌면 수양대군은 그 뒤집힌 것을 아예 뭉개버렸다고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다. 애달픈 임금, 단종. 학교 때 배웠던 왕방연의 시조를 읊어 본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 울어 밤길 예놋다



오매, 저것이 뭣이다냐? 배 가르기 좋아하는 일본 놈들, 칼로 배 가른 뒤 꾸물럭 꾸물럭 삐져나온 허연 내장 같은 것들이 건공중에 이어져있다. 뭐지? 길이가 한 참 된다. 가까이 가면서 붙여놓은 표지판을 보니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을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이다. 그러고 보니 저 멀리 석회석 채취 산이 보인다. 저기서 채취해 이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가공 공장으로 옮기는가 보다. 중간 기착지인듯한데를 지나는데 회사 사람이 나온다. 점심 시간대라 점심 먹으러 나가는 듯싶다. 다짜고짜 방금 전에 확인한 사실을 다시 한번 물어 재확인한 뒤, 저기 보이는 산에서 얼마간 채취했고 앞으로 얼마간 더 채취하냐고 물으니, 30년 채취했고 앞으로 한 50년 정도 더 채취할 수 있다고 답해줬다. 눈빛이 유난히 반짝이는 분이었는데, “뭐냐? 너는?”하는 경계의 눈빛이 역력했다.



30년 동안 갈취당했고 앞으로 50년 동안 더 갈취당할 산을 지난다. 그런데 이게 뭔 요상한 마음이냐? 갈취당한 헐벗은 산을 보는데 애처로운 느낌보다 장엄한 느낌이 드니. 황야의 돌산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 것. 이건 필시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로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자!



문곡 초등학교 덕산 분교장이란 폐교를 지난다. 원래부터도 분교였으니, 조그마한 학교였을 터. 흡사 반공 소년 이승복이 다녔을 법한 학교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딸과 아들이 다닌 초등학교에 이승복 상이 있었는데(지금도 있다), 그게 아직도 유효한 상()인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배가 고프다. 배낭에서 누룽지를 꺼내 씹으면서 간다.



드디어 평창 입성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반가운 인사는 없다. 얼마간 가니 원동재 정상이라며 해발 400m라는 것을 알려주는 입간판이 보인다. 별생각 없이 발길을 옮겼는데 상당한 고지(高地)에 올라온 것이다. 눈길을 돌려 아래를 쳐다보니 해발 400m라는 고지가 실감 난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다. ‘해발 400m’라는 고지(告知)보다 무척 높은데 왔슈. 한 번 내려다 봐유.’라고 써놨으면 어땠을까? 정상에 섰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인생도 마찬가지겠지?



노거수(老巨樹)를 만난다. 안내판을 보니 400년이 넘는단다. 가만히 나무를 안고 귀 기울이면 수많은 사연들을 들려줄 것 같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받을까 봐. 강원이라 그럴까, 아직 벚꽃이 한창이다. 하얀 팝콘을 터뜨린 지 얼마안 된 벚나무를 만났다. 아내에게 줄 선물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아니, 여기가. 평창이씨시조재실(平昌李氏始祖齋室)을 만난다. 오늘은 참 묘한 날이다. 길에서 이란 시집을 줍더니, 어머니의 본향 시조를 모신 사당을 만나다니. 우연엔 어떤 숨은 의미가 숨어있는 것일까? 이 사람아, 그 이전에 자신을 좀 반성 혀. 평창, 하면 당연히 먼저 어머니의 본향이란 걸 떠올렸어야 하는 거 아녀? 저 재실을 보기 전엔 그런 생각 꿈에도 못했지? 기껏 떠올린 건 아마 평창동계올림픽 정도였을 껴, 맞지? 반성 혀! 그렇구나! , 나의 무심함이여! 어머니, 죄송합니다!



계제에 어머니 얘기나 한 번 해야겠다. 어머니는 1924년생 이시다. 일제 강점기, 당시 여성에게는 비교적 고학력인 보통학교를 나오셨다. 결혼 전에 신용조합에도 얼마간 다니셨다. 또래의 다른 분들에 비해서는 개화되신 편이었던 셈. 어머니의 삶이 꼬인 건 결혼부터였다. 외할아버지는 대처승이셨는데 어머니의 사주를 보고 후처로 들어가야 명이 길다고 어머니를 후처로 결혼시키셨다. 결혼 당시 아버지는 상처(喪妻) 상태셨다. 그리고 먼저 간 처에게서 얻은 딸도 있었다. 그런데 시집을 와보니 애매한 상태의 여자분이 집에 있었다. 아버지 수발을 들어주고 있던 분이었는데, 이분과의 사이에서 얻은 딸도 있었고 게다가 이 여자분이 데리고 들어온 딸도 한 집에 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맞닥뜨린 젊은 새색시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분은 한동안 어머니와 함께 지냈는데, 결국엔 집을 나갔다. 어머니와의 불화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가 돌아간 부인에게서 얻은 딸 등쌀에 못 이겨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은 죽은 자식을 포함해 6 남매였다. 그런데 어머니 호적엔 이후에 본인이 낳지 않은 기() 두 딸을 포함해 세 명의 자식이 더 올라가게 된다. 어머니와의 혼인 이후 아버지의 바람기로 얻은 자식들이었던 것.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의 바람기로 얻은 자식은 그 어머니 되는 분이 건사한 것이다. 아버지와 돌아간 부인의 몸에서 난 딸은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았지만, 평생 어머니께 깍듯한 대우를 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집을 나간 분의 딸과 어머니 사이는 좋지 않았다. 그 딸이 어머니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처럼 위장해 아버지가 어머니를 핍박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딸은 이렇게 어머니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오랜 세월 어머니 곁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많은 자식을 두었음에도 가정사에는 등한해 살림할 돈을 내놓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살림을 꾸리려 독학으로 바느질을 배우셨고, 이는 어머니의 평생 직업이 됐다. 이후 어머니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친 건 ‘6.25’()’였다. 6.25 당시 인공 치하에서 어머니는 여맹위원장을 맡을 뻔했다. 사는 게 하도 괴로워 하려고 했던 것. 그런데, 아버지가 그거 하면 다시는 자식 볼 생각 말라.”고 해서 하지 못했다. 만약에 여맹위원장을 했다면, 진즉에 돌아가셨을 것이다. 신묘하게도 외할아버지의 점은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는 어머니가 살림을 위해 벌였던 것인데, 중간에 자기 몫을 타고 도망한 사람들이 생겨 지금으로 말하면 연쇄부도 비슷한 상황이 돼 계주였던 어머니는 도망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 60년대 말이었다. 어머니는 7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서 한복점을 하셨다. 나중에 내가 찾아보게 될 익선동에서 왕성 한복이란 한복점을 하셨는데, 꽤 잘 됐다. 그런데 보험 사기를 당하셔서 종국엔 거의 무일푼으로 다시 고향에 돌아오셨다. 이후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바느질로 빚진 곗돈을 갚으셨다. 그런데 어머니의 빚진 곗돈 갚기는 내게까지 이어졌다. 고향에 돌아오신 이후 드신 계를 어머니 생전에 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머니 사후에 내가 갚은 것이다(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그저 내가 철이 일찍 들어 대출이라도 받아 어머니 생전에 홀가분하게 빚을 청산해 드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머니는 생애 말년에 큰 일을 하나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여자 혼자 추레하게 살면 남보기 안좋다며 집을 거의 새로 짓다시피 개조하신 것. 자식들 도움 하나도 안 받으시고 혼자 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결혼한 뒤 위암 3기 판정을 받으시고 6개월 후에 돌아가셨다. 1996년이었고 72세 셨다. 나는 막내 누님과 나이 차이가 8살이고 큰 형님과는 18년 차이가 있어, 위에 써 내린 사연들 대부분은 어머니나 누님들한테 들은 것이다.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아버지의 흉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삶을 되돌아보는 건 어머니의 삶이 너무도 안타깝기 때문이며, 어머니의 안타까운 삶을 통해 남자로서 남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마음을 다지는데 반면교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머니는 자신의 삶에 괴로워하시면서도 자식들에게는 결코 아버지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고 늘 주의를 주셨는데, 이 점이 존경스럽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귀에 어머니의 당부가 들리는 듯하다. “너는 그래도 아버지한테 잘해야 한다.” 자식들이 엇나갈까 봐 노심초사하셨던 어머니의 염려 때문에 오늘날 남한테 손가락질 안 받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우연히 만난 평창이씨시조재실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라는 것 아닐까? 특히, 남편이 더.


415분이 돼간다. ‘원미 막국수라는 홍보 간판이 보인다. , ~국수! 그래 오늘 저녁은 저걸로! 식당에 도착했는데, 5시부터 저녁 시작이라며 기다리란다. 기다리는 거야, 선수지! 산골 물을 끌어들인 수도가 있어 성난 발들을 달래주고 잠시 쉬었다. 정각 5시가 되니, 들어오란다. 한 사람분만 만들 수 없어 5시부터 들어오라고 했단다. 다른 손님이 안 오면 어쩌냐니, 온단다! 미안함을 살짝 덜어내고, 주인집 딸이 내온 막국수를 대했다. 오매, 맛있는 거! 후루룩 쩝쩝. 단숨에 비웠다. 값을 보니 75백 원이라고 돼있다. 주인집 딸에게 만 원짜리 현금을 내니 3천 원을 거슬러준다. 5백 원 더 받으셔야는데하니, 됐다며 쾌활하게 웃는다. 튼실한 몸매에 얼굴도 너부대대한데, 왜 이리 이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목표했던 숙소, ‘평창 여관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거 장소가 영~ 후미진 데다 주변도 어수선하다. 이름도 여관에서 모텔로 바뀌어 있다. 혹 잘못 찾아왔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큰 규모의 모텔을 봤는데, 거기로 갈까 하다 그냥 머물기로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나오는데 순창에서 만났던 그 여주인의 언니쯤 돼 보이는 이가 나온다. , 잘못 들어왔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방을 달라며 얼마냐고 물으니, 4만 원이란다. 금요일이니 받을만한 금액이긴 한데, 그래도 왠지 비싼 느낌이다. 배정된 방으로 가는데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날 듯한 상황일 때 보여주는 그런 음산한 분위기가 맴돈다. 이거, ‘평창 모텔 살인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거 아녀? 방에 들어갔는데 예상했던 대로 시설이 후줄근하고 예의 노후된 숙소 특유의 냄새가 난다.


배낭을 내려놓고 방바닥에 댓자로 누웠다. ,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났구나. 언제부턴가 시간이 금방금방 지나간다는 느낌이다. 눈떠서 움직이면 어느새 숙소에 도착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이제 점점 마지막 지점에 다가오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 빨리 저녁 의식 행사를 치르고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가 난다. 샤워를 하고 나와 제 저녁 의식을 치르고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런데 이부자리에서 탈취제 냄새가 난다. 모텔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민박에서도 이러지 않았다. TV를 켜고 이것저것 시답잖은 프로를 보다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자는 중에 자꾸 잠을 깼다. 탈취제 냄새 때문. 최악의 여관이었다. 평창에서의 잠은 결코 平昌(평창)하지 않았다). 내일은 양양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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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일 목요일


센트럴 파크, 아니 새재 파크에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5시다. 그 동네에선 달리기들을 하더만, 나는 밤새 산을 탔는지 무릎이 좀 아프다. 아니, 나 같은 건각(健脚). 맨손 마사지를 하고 멘소래담을 발랐다. 발도 좀 부어있다. 무릎만 마사지했더니 심통이 났나 보다. 살살 어루만져 달래줬다. 앱을 켜고 괴산 버스 터미널까지 거리를 살펴보니 76km에 도보로 21시간 2분 걸린다고 나온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조령 제3관문을 보고 수안보까지만 걷고 버스를 타야 할 것 같다. 살짝 아픈 무릎과 심통 난 발에겐 다행이다. 어제 산 간식거리로 아침을 먹고(, 아침다운 아침이여, 언제나 내게 찾아올 것이냐?) 세수를 한 뒤 제반 아침 의식 행사를 모두 마쳤다. 무릎과 발에게 힘내라고 봉지 커피도 한 잔 마셨다. 힘이 불끈! 파크 현관 앞에 서니, 65분이었다. , 제천을 향하야 출~~! 숙소는 드림 모텔로 정했다. 가성비 짱, 친절 짱이란다.


원흉 아닌 원흉, 스토리 모텔을 지난다. 그런데 어제와 달리, 건물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폐업을 결정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모르긴 해도 코로나19 여파가 아닐까 싶다.)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건네 본다. “언젠간 호시절이 오겠죠. 너무 낙심 말고 기다려 보세요!” 부디, 그런 날이 빨리 오기를!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磨崖二佛竝坐像)’이 보인다. 두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은 처음 본다. 한 분은 필시 석가모니불일 터이고, 또 한 분은 누구실까? 고려 때 조성되었다는데, 불교 왕국 시절의 작품치곤, 미감이 형편없다. 서산에 살기에 나도 모르게 서산마애삼존불의 그 온화한 미소와 우아한 자태를 기준 삼아 봐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한 번 높아진 눈높이는 내리기가 쉽지 않다. 마애불은 귀족보다 서민과 가까운 조상(彫像)이다. 저 마애불도 그럴 터. 어떤 간절한 바램을 가지고 돌을 깎았을까? 그리고 그 바램은 이뤄졌을까? 부디, 이뤄졌기를! 아미타파~. 발걸음을 옮기다 다시 한번 뒤돌아봤는데, 무뚝뚝한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만 계신다. 아이고, 살가운 말씀 좀 한마디 해주시지. 서산마애삼존불님은 갈 때마다 살갑게 말씀해주시는데. 그러나, 무뚝뚝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말로 빚어지는 인간사 비극이 얼마나 많던가! 그래도 여전히 좀 서운하다. 길 가는 나그넨데,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시면 어디가 덧나시나. 괜스레 앙탈을 부려본다.



아니, 저 산 벼락에 점점이 박혀있는 것은 무엇이냐! 돌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요, 사람이었다! 무슨 공사를 하기에 저토록 위험하게 일을 하는 것인지? 안전장치야 했겠지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 더구나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겐 더더욱 위험해 보인다. 짐작컨대, 낙석 방지 시설을 점검 보완하는 것 같다. 평소 무심하게 봐왔던 낙석 방지 시설이 저런 위험 속에서 만들어진 거구나! 생명을 건 작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부디 안전하게 작업들 마치시기를! 아들아이가 복무하는 JSA에서는 생명 수당이라는 것을 받는다. 부대를 방문했을 때 아들아이가 제 엄마에게 PX에서 화장품을 사주려고 하기에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했더니 생명 수당 받아서 괜찮다고 한 적이 있다. 느낌이 참 거시기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는 아들아이의 선물에 고마워하면서도 연신 거시기한 마음을 토로했다. “아이고, 이거 참, 아들내미 생명 수당으로 화장품을 사다니.” 저분들도 생명 수당을 따로 받으실까? 받으셨으면 좋겠다!



조령 제3관문으로 가는 안내판이 보인다.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무릎과 발이 아우성을 쳐 살짝 망설여진다. 앱으로 살펴보니 9.1km45분 걸린다고 나온다. 왕복이니 2시간은 잡아야 한다. 그냥 지나칠까? 그런데 그냥 가면 너무 서운할 것 같다. 왠지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 아우성을 싹 무시하고 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길 중간중간에 새재를 노래한 한시들을 예쁘장한 목판에 새겨 세워놓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있나! 하나씩 소리 내 읽어 보았다(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인적이 거의 없어 미친놈 소릴 들을 염려는 없었다). 그런데 시 한 수가 유독 마음에 와닿는다.


鳥嶺山路險 조령 산길 험한데

之子欲何之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天寒爲客日 추운 날씨 나그네 신세

月滿望鄕時 둥근 달 아래 고향을 그리네


추운 날씨 험한 산마루에 선 나그네의 처량한 심사가 절절히 느껴진다. 처량한 심사란, 개인사를 배경으로 보면 떠돌이 신세에서 오는 비애감일 테고, 시대사를 배경으로 보면, 힘든 정치 상황에 서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일 터이다. 아무려나, 읽을수록 처량함이 덧보태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장난삼아 글자만 두어 자 바꿔 화답시를 지어봤다.


鳥嶺山路險 조령 산길 험한데

之子欲何之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天熱爲客日 더운 날씨 나그네 신세

日中望梅時 한낮 태양 아래 매실을 그리네


저 이는 떠돌이 신세라 고향을 그리워했지만, 나는 더워서 목마를 지경이라 매실을 그리워했다(매실을 생각하면 입에 침이 고여 갈증이 해소된다. 망매해갈(望梅解渴). 조조가 전시 위급상황에서 발휘한 기지라고 전한다). 정영방(한시 작자, 1577-1650), 죄송합니다. 고귀한 님의 정서를 가지고 저급한 장난질 쳐서. 그나저나 예쁘장한 한시 목판 내용엔 띄어쓰기와 번역이 잘못돼 있다(뭐가 잘못돼 있는지는 사진을 보시며 각자들 판단해 보시기를!). 그리고 시의 제목도 달아놓지 않았다. 살짝, 아니 많이 아쉽다. 제작자님들, 설치물을 보통은 대강 보지만 저처럼 유심히 보는 사람도 있어요. 좀 더 세심한 제작 부탁드려요~.



드디어 역사적인 조령 제3관문 앞에 섰다. 태양을 보며 찍고 또 등지고 찍어보니, 관문에 대한 느낌이 상반되게 느껴진다. 역사적 사실과도 일치되는 느낌. 만약 신립 장군이 탄금대로 군사를 옮기지 않고 여기서 왜군을 방어했다면 어땠을까? 왜군도 당연히 여기서 조선군이 방어하리라 생각했고 힘든 전투일 것이라 생각했다는데, 너무도 쉽게 뚫린 관문에 그들도 의아했을 것이다. 여기서 신립 장군이 치열하게 방어전을 펼쳤다면, 후세 사가들이 말하는 대로, 선조의 의주 몽진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후의 임란 전개는. 조령 관문을 보며 지도자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낀다. 통상 국가에 분단국가에 4개 강국에 둘러싸인 반도 국가인 우리에게 지도자의 판단은 얼마나 중요한가. 해외에만 나갔다 오면 호갱이 돼 돌아오는 굥의 모습을 볼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게 어디 나만의 심정일까?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하산 한다.



길가에 소박한 민가 한 채가 보인다. 넉넉해 보이진 않지만, 집 전체를 깔끔하게 가꿔 놓았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상적으로 그렸던 전원의 삶이 그대로 구현된 듯한 느낌의 집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수염 허연 도인풍의 노인이 아무 말 없이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다.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찰칵.



월악산 휴게소라는 데가 보인다. 휴게소를 보니 갑자기 점심 생각이 난다. 시계를 보니 점심 시간에 가깝다. 그런데 휴게소라는 게 좀 걸린다. 정신없이 어수선한 장면이 머리 속에 그려진다. 엣다,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뭐라도 좀 사 먹고 가자. 밥 먹을 장소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돌려 휴게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 별천지다! 어제 봤던 진남 휴게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혹시 진남 휴게소를 운영하는 양반이 여기도 운영하는 건가? 메뉴를 보다 보니 간고등어 백반이 눈에 띈다. 경상도에서 못 먹은 간고등어를 여기서 한 번 먹어보자. 가격이 약간 세다. 만 이천 원. 도보 여행하며 이렇게 비싸게 먹어도 되는겨. 잠은 어쩔 수 없으니 그렇다 쳐도 먹는 것은 좀 싸게 먹어야지. 만 원 이상 되는 건 좀 곤란혀. 아니, 뭐여? 평생 일하고 모처럼만에 긴 여행 나왔는데 그깟 만 이천 원이 아까워서 망설이는 겨. 너무 자신에게 박하구먼. 두 놈이 또 다툰다. 결과는, 뒷놈이 이겼다. 여기도 식혜가 있다. 다행히 자제해서 먹으라는 문구는 없었다. 오만한 자세로 과감하게 3잔을 들이켰다. 주문한 것을 가져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가져다준다. 그것도 젊고 예쁜 아가씨가. 오매, 좋은 거. 하여간 이 자가. 정신 차려! 아가씨에게 물어봤다. 혹시 진남 휴게소 사장님이 여기도 운영하냐고. 내부 시설이 같은 걸 보니 그럴 것 같다며. 아가씨가 방긋 웃으면서 답했다. “아녜요, 달라요. 그때(휴게소 지을 당시) 이런 인테리어가 유행이어서 그래요.” 그랬구나. 땀과 피곤으로 절어 있어서 그런가, 평소 화려한 시설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모처럼 눈 호강을 시켜주는 화사한 인테리어의 휴게소가 고맙게까지 느껴진다(간고등어 백반도 맛있었다). 나는 확실히 선비 체질은 아닌 것 같다.


점심을 먹고 나서 그런지 약간 노곤하다. 발걸음이 느려진다. 수안보에 들어섰다. 신혼여행지로 왔던 곳이다. 넘들은 해외여행, 하다못해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우리는 수안보와 충주호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이모가 해주신 반찬도 싸가지고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궁상을 피웠는지 모르겠다. 처가 택클을 걸었으면 절대 안 했을 텐데, 당시는 처의 눈에 콩깍지가 씌어져 내 말을 무슨 하느님 비서실장 말처럼 따랐다. 신혼여행에 그것도 피 뜨거운 젊은 남녀가 여행을 가는데 침실이 중요하지 그깟 화려한 경치가 무슨 소용이 있냐, 라고 강변도 해보지만 역시 궁상은 궁상이었음이 틀림없는 것 같다. 조카가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도 신혼여행을 유럽으로 가는 걸 보고, 처음에는 혀를 찼지만, 나중엔 그려, 잘했다하고 인정해 줬다(속으로). 그런데 재미난 건 처가 여태까지 그 궁상맞은 신혼여행에 대해 한마디도 불평을 안 한다는 것이다. 신혼여행 중 내가 짜증 낸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흉봐도. 이래서 천생연분인가? 아니다. 속에 품고 있으면서 언젠가 복수하기 위해 날을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 궁상맞은 신혼여행에 대해 조금이라도 후회하는 빈틈을 보여선 절대 안 된다! 으흠!


한때 명성을 날렸던 온천 휴양지 수안보. 지금은 밥상머리에 앉은 파리 날리는 형국이다. 입구에 들어설 때 수안보 초등학교를 봤는데, 학교 건물 규모가 꽤 커 보였지만 정작 학생 수는 100명이 될까 말까 하단다(버스 승강장에서 어느 노인께 들은 말이다). 또 지방 소멸 인구 소멸의 현장을 본다. , 마음 아픈 얘기는 그만~.


수안보에서 축지법(버스 타는 거야 말로 축지법이 아닐까?)을 사용하야 충주를 거쳐 제천에 뚝딱 도착했다. , 뚝딱은 아니다. 수안보에서 충주까지 40분 정도 소요됐고, 충주에서 제천까지는 1시간 가량 소요됐다. 중간에 터미널에서 기다린 시간까지 합하면 근 3시간 버스를 탔다.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버스를 타서 그런가 간간 졸았다. 제천에서는 버스 터미널까지 가지 않고 중도에 내렸다. 걸으면서 아버지의 체취를 맡아보고 싶었기 때문. 아버지는 왜 제천에 자주 오셨던 것일까? 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드림 모텔을 향해 걸으면서 제천의 공기 중에 섞여 있을 아버지의 체취를 맡아본다.



아버지는 한의사이셨는데(돌팔이 아니다. 정식 한의사이셨다) 이상하게 어머니께 살림할 비용을 내놓지 않으셨다(살림은 어머니가 바느질로 유지하셨다). 그리고 주말이면 어김없이 출타하셔서 월요일 아침 녘에 돌아오셨다. 그때 어디 갔다 오셨냐고 여쭈면 때로는 조치원 때로는 이곳 제천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가 조금 굵어질 무렵 그 말씀은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아버지의 가방엔 늘 마권(馬券)이 들어 있었는데, 조치원과 제천에는 경마장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조치원이나 제천에 아주 안 들르신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곳에 있는 건재 약국의 달력을 가져오신 때도 있었기 때문. 아버지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다. 당연히 어머니와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어머니께서 일 년간 쓰신 일기장이 있는데, 매 페이지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넘쳐난다. 언제였을까, 여성에 대한 아버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여자란 외투와 같은 존재라고 하셨다. 인격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필품 정도로 보셨던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힘듦(5남매 키우랴, 살림하랴) 정도는 안중에 없으셨던 것 아닐까? 그러면, 나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나? 그렇지는 않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희한한 것은,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이상하게 (아버지께) 못 해준 것만 생각난다고 하신 것이다. 어머니는 1년 동안 아버지 영전에 상식(上食)을 올렸다. 내 감정도 그렇고 어머니 감정도 그렇고 이성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러나, 실제가 그런 걸 어쩌랴. 그러니 지금도 공기 중에 섞여 있을 아버지의 체취를 맡아 본다고 제천 시내를 걷고 있는 것 아닌가?


아름다운 충북이라 그런가, 제천 시내는 멀끔했다. 5시가 좀 못 되어 숙소로 점찍었던 드림 모텔에 도착했다. 평시엔 35천 원, 금요일과 토요일엔 4만 원이라고 써놓았다. 가격이 마음에 든다. 객실 점검을 마치고 내려오던 주인과 마주쳤다. 친절한 인상의 남주인이다. 혼자 여행 다니시냐면서, 예약하신 분이냐고 묻는다. 아닌데, 혹시 방이했더니, 있단다. 방에 들어갔는데, 규모는 작지만 깔끔하다. 그런데, 엄청난 크기의 TV가 벽에 걸려있다. 방 규모가 작다 보니 더 크게 보였다. 과장되게 말해 영화관 스크린만 했다. 샤워를 하고 제반 저녁 의식 행사를 마친 뒤 침대에 누워 TV를 켰다. 그런데 화면이 너무 커서 외려 보기가 불편하다. TV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기 때문. 채널을 여기저기 눌러보는데 역시 볼만한 게 없다. 영화도 뭐 나오기는 하는데 액션 종류만 나온다. 애고, 저거 보고 나면 꿈속에서 쌈박질만 할텐데, 그러면 내일 힘든디. 그래도 쉽사리 TV를 끄지 못하고 여기저기 누르다 결국엔 꺼버렸다. 그래, 정명론(正名論)을 한번 실천해보자. ‘드림 모텔에 들어왔으니 꿈이나 꾸지, . 혹시 알어, 꿈속에서 아버지를 뵐지


내일은 평창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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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일 수요일


달콤한 여왕님의 품속에서 잠이 깬 것은 아침 5. 다시 여왕님의 품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위선적인 청정 선비의 자세로 돌아와 과감히 품속을 뿌리치고 빠져나왔다. 너무 과감히 빠져나오는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 앱을 켜고 연풍면까지의 거리를 눌러보니 37km에 도보로 10시간 6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숙박지는 어디로? 온천 모텔과 스토리 모텔이 있다. 오잉? 면 단위에서는 있기 어려운 모텔인데? 문경 새재가 유명 관광지라 있는 건가? 어쨌거나 잘됐다! (잘 되기는! ‘신기루모텔이었다). 청정 선비의 자세로 돌아왔지만, 달콤한 품속 여운을 잊을 수 없어, 달콤한 식사로 여운을 달랬다. 카스텔라와 초코 우유. 날씨를 잠깐 확인하니 주말까지 황사가 심하단다. 마스크를 쓰고 걸어야 하나? 여타 아침 제 의식을 마치고 모텔 밖에 서니, 6. , 연풍을 향하야 출발~!


문경시 불정길을 지난다. 도로 아래 재미있는 이름이 눈에 띈다. 도토리 방앗간. 우리들 식품이란 이름이 덧붙어 있는 걸 보니, 가공식품 상호 같다. 도토리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듯. 도토리란 이름도 방앗간이란 이름도 정겹다. 도토리 세 알 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랴어릴 적 불렀던 노래와 익숙한 속담 때문일 터. 작명을 잘한 것 같다. 그나저나 예전엔 도토리묵이 귀하고, 귀해서 그런지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는데, 요즘에 먹는 도토리묵은 왜 그리 밍밍한 것인지? 너무 쉽게 먹을 수 있게 되서 그런 건가, 내 입맛이 변한 건가?



새재란 선입견 때문인지 마주치는 산들의 위용이 그간 지나오며 본 산들의 위용에 비해 한결 더 위엄있게 다가온다. 사진 한 장 찰칵!



오미자 테마 터널이란 안내판이 눈에 띈다. 모처럼만에 관광을 한 번? 입장료를 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시에서 운영하는 관광소가 아니고 사설 업체에서 운영하는 관광소이다. 옛 철도 터널을 오미자 테마 터널로 바꿔 놓은 것인데, 감성이 무뎌서 그런가, 왜 오미자 테마 터널이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다. , 있구나! 음료를 파는데 음료의 주재료가 오미자였다! 손님이 나 혼자였는데, 이른 시각부터 판매대를 지키는 분들이 안쓰러워 팩 음료 2개를 샀다. 지나가는 바람처럼 휙 한 번 둘러보고 동굴을 빠져나왔다.



11시가 돼간다. '진남 휴게소'라는데가 눈에 띈다. 휴게소 음식은 별론데그래도 누룽지보다는 나을 터. 딱 좋은 점심 타임이라 망설이지 않고 휴게소 문을 열었다. , 이게 웬 별천지냐? 휴게소, 하면 그려지는 그렇고 그런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화려한 장식이 번뜩이는 도심 한복판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들이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내가 혹시 잘못 들어왔나? 문을 열고 나와 다시 간판을 보니 분명히 진남 휴게소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식당과 쇼핑을 겸한 휴게소인데, 장식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다. 그나저나 내겐 점심만이 중요할 뿐. 식당 쪽에 가서 메뉴를 보니, 돌솥밥이 눈에 띈다. 1만 원. 무난하다.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판매 데스크 저쪽에 식혜를 비치해 놓았다. 오메, 내가 좋아하는 거. 직접 담갔다는 내용을 강조하는 문구가 붙어있고, 많이는 드시지 말란다. 이건, 맛있다는 반증.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내가 들어섰을 때 한 분이 식사하고 있었고, 뒤이어 연세 든 노부부가 들어왔다)살살 눈치를 봐가며 3잔을 먹었다. 자랑과 당부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점심다운 점심을 먹고(밥도 맛있었다) 휴게소를 나왔다. 나오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감동스러워서!



씨름 연습장으로 변한 초등학교 폐교를 지난다.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보고 그 애들이 들려주는 온갖 사연을 들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묵묵히 서 있다. 느티나무 잎 사이로 비치는 하얀 햇살이, 하얗기에 더 마음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제 폐교의 아픈 사연은 그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황사가 심하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지날 때만 해도 몰랐는데 노변의 하얀 배꽃들 색이 바래 보일 정도다. 마스크를 써야 하나? 한동안 쓰고 걷다가 답답해서 벗어 버렸다. 코털도 있고 허파 꽈리도 있는데, 걸러지겄지! 야잇, 중국 놈들아, 대국 위세만 부리지 말고, 아름다운 덕으로 감화 좀 시켜봐라! 도대체 니덜도 힘들다매 왜 이리 황사 문제를 해결 못 하는 거냐! 무슨 무슨 타령들 하더만서도 내 보기엔 니덜 의지 문제 같다. 니들 황사 문제 해결하면 내 애정 보너스 점수 1점 더 준다! 알아들었지?



문경 새재 입구를 알리는 거대한 관문이 보인다. 글씨를 보니 박 대통령 글씨 같다(확인은 안 했지만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예전엔 저분 글씨를 여기저기서 봤는데, 지금은 드물게 본다. 90년대 만화 연수를 받으러 서울 남산에 간 적이 있는데, 흉물스럽게 가려진 박 대통령의 글씨를 본 적이 있다. 이 또한 세상만사 새옹지마로구나. 한때는 무슨 보석인 양 취급되던 것이 이제는 똥통의 휴지 조각 같은 대접을 받으니. 그나저나 남도 그렇고 북도 그렇고 그 위대한 지도자들의 글씨 때문에 금수강산은 만신창이 아닌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통일된다면 골칫거리들일 것 같다. 병영사회를 구현했던 지도자들의 기념물이라고 그대로 놔두려나?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관문을 쳐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나는 이화령 쪽으로 간다.



자전거 도로가 있어 걷기에 편하다. 그런데 관리가 안 된 듯 자전거 휴게소가 중간중간 있는데,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데크가 썩어있어 잘못 디뎠다간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졸속 행정 과시 행정의 슬픈 장면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무리한 4대강 사업에 아편 주사 격으로 만든 자전거 도로. 밀어붙였던 자 물러나고 감방 가니, 내가 언제 저 사업에 참여했냐고 시치미 뚝 떼는 지방 행정의 낯 두꺼운 민낯을 본다. 허기사 억지로 참여했으니 뭔 의욕이 있어 사후 관리를 허겄어?



모닝 차 한 대가 앞에 서 있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내리더니 사진을 찍는다. 음심이 발동해 수작을 부렸다. “찍어 드릴까요?” 셀카를 찍는 것 보다 누가 찍어주는 게 더 온전한 사진이 되기에 친절을 가장하여 음심을 발동한 것이다. “아녜요!” 샐쭉 대답하고 바로 차를 타고 이동한다. 오매, 창피한 거~. 부끄부끄. 그런데 얼마를 올라갔을까, 아까 만났던 그 아가씨가 또 사진을 찍는다. 그냥 지나치는 수밖에. 이 아가씨, 뒤에서 사진 찍기를 마쳤는지 다시 차를 타고 내 앞을 지나간다. 이러기를 3번 더했다. 그런데 의외로 내 걸음이 빨랐는지 이 아가씨가 늦장을 부렸는지 아가씨가 차를 세운 지 얼마 안 돼 바로 내가 따라잡았다. 원치 않은 스토커가 된 셈. 애라, 기왕에 버린 몸, 용기를 내어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연구를 하시나요?” 셀카를 찍는 게 아니고 도로 주변을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녜요. 도로 관리 때문에 찍는 거예요. 걸음이 무척 빠르시네요?” 한다. “.” “어디 가세요?” “연풍 갑니다~” “.” 헤어지고 다시 걷는데, 차는 오던 방향 반대로 내려갔다. 문경의 공무원이었던 것 같다. 연풍은 충북 지역. 이화령 이전(以前) 지역의 도로 형편을 알기 위해 잠시 현장 출장을 나왔던 모양이다. 아까 오면서 봤던 그 형편 무인지경의 자전거 도로 휴게소 사진도 찍었을까? 부디 찍었기를! 조금 더 수작을 부릴 수 있었는데살짝 아쉬운 마음을 담고 다시 발길을 옮긴다. 하여간, 이 자가정신 차렷!


이화령 통과 터널이 보인다. 웅장하다. 터널을 지나기 전 올라 온 경북(문경) 쪽 사진을 찍고, 터널을 지나 저 아래 보이는 충북(괴산) 쪽 사진을 찍었다. 경북 쪽은 황사가 덜한데 충북 쪽은 황사가 몹시 심했다. 뭐여, 황사, 너도 지역 차별하는 겨! 그럼, 못 써!



이화령 휴게소에서 비싼 자판기 캔 음료(보통 1천 원인데, 15백 원 이었다. 큰 액수엔 둔감하고 작은 액수에만 민감하다. 찌질해서 어쩔 수 없다)를 한 잔 들이켜고 이화령 하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전거 도로가 잘 돼 있어 걷기 편했다. 난생처음으로 명박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굴곡진 이화령 고개를 마음 편하게 내려와 드디어 연풍에 도착, 면내에 잠시 들려 간식거리를 사고, 목표했던 숙소로 향했다. 온천 모텔과 스토리 모텔 두 개가 있었는데, 왠지 스토리 모텔이 더 나을 것 같았다. 보편적으로 구식 이름을 쓰는 곳보다 알 수 없는 야리꾸리한 외래 이름을 쓰는 곳이 시설이 더 낫기 때문이다. , 이 국어를 사랑하지 않는 자여, 그대 이름은 ㅇㅇ이로다!



연풍면 소재지에서 물경(!) 50분을 걸어 도착한 스토리 모텔! 그런데 이게, 웬일이냐! 모텔 앞에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건축 자재 같은 것도 널브러져 있다. 폐업!! 온천 모텔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이도 폐업!! 어쩌자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고. 땅을 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무거운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연풍면 소재지로 향했다. 그런데, 나 같은 어벙한 자가 또 있었다. 아까 이곳으로 올 때 자전거 여행자인 듯한 사람이 지나갔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내가 한참 이곳으로 가고 있을 때 다시 나를 지나쳐 연풍면 쪽으로 갔던 것. 필경 나 같은 낭패를 봤을 것이다. 사람, , 같은 여행자끼리 친절 좀 베풀어 주지. 시간상으로 봤을 때 내가 숙소를 찾으러 가는 것으로 보였을 텐데. 애라, ×, 가다가 빵구나 나라! 애맨 사람에게 괜스레 화풀이를 했다.


연풍면 소재지엔 숙소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새재 파크. 후기 평이 안 좋아 스토리를 찾아갔던 건데 이젠 별수 없이 고개를 납작 숙이고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4만 원을 달란다. 현금 운운하며 트라이를 하려다, 그만두고 얼른 값을 치른 뒤 방으로 들어갔다. 5만 원 아니 6만 원을 달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지 않은가. , 나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ㅇㅇ이로다! ‘파크라는 말이 무색하다. 심하게 말하면 여인숙 수준이다. 그러나 역시 있을 건 다 있다. 샤워를 한 뒤 이하 모든 저녁 제반 의식을 치른 뒤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아무래도 코털과 허파 꽈리 기능이 시원찮은가 보다. 샤워를 했음에도 뭔가 매캐한 느낌이 속에서 올라온다. 그놈의 황사. 예의 또 부질없이 TV를 켜고 이 채널 저 채널을 돌리다 그냥 꺼버렸다. 야들아, 제발 좀 재미난 것 좀 올리고 보라고 강요하렴! 옆 방에서 약간 다투는 듯한 소리가 난다. 나처럼 어벙한 서방 때문에 형편 무인지경의 모텔에 들어와 화가 난 마누라가 투정을 부리고 덩달아 짜증 난 남정네가 뭐라고 하는 듯싶다. 화해들 하셔, 그래도 댁들은 둘이 왔잖여, 나는 혼자라고~! 잘 들 주무시소. 불을 끄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내일은 제천까지 간다. 제천, 아버지가 생전에 주말마다 출타했다 돌아오셨을 때, 어디 갔다 오셨냐고 여쭈면 가장 많이 언급하셨던 고을! 과연 제천엔 무엇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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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일 화요일


530, 눈을 떴다. 앱을 켜고 문경 시내까지 거리 검색을 했다. 48km에 도보로 12시간 30분 걸린다고 나온다. 오늘은 어느 모텔서 잘까? 이제는 눈만 뜨면 잘 곳부터 찾는다. 숙박지 앱 여기 어때를 켜고 문경 시내 일원의 모텔을 검색해 봤다. 저가 순으로 훑어가며 댓글 평을 읽는데, ‘퀸 모텔이 눈에 띈다. 시설은 약간 노후됐지만 가성비가 좋고 무엇보다 주인이 친절하단다. 그래, 여기로! 저녁 6시쯤 숙박지에 들어가려면 빨리 준비해야겠다. 어제 샀던 호박죽으로 아침을 먹고 간단히 세수를 한 뒤 제반 아침 의식을 끝내고 민박집을 나섰다. 630. , 여왕님 품을 향하야 출~!


날이 좀 어둑하다. 기분도 덩달아 살짝 눅눅해진다. 역시 사람은 자연의 일부분. 과수 전문 인력을 댄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그런데 작업 현장 관리 필수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인력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는(못한다는) 불평이 많아 덧붙인 모양이다. 저기서 대는 인력은 십중팔구 외국인 근로자들일 것 같다. 이제 농촌에서 이분들 없이는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느 모텔에선가 지방 TV 방송을 보는데 농번기를 대비해 베트남과 인력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은 게 아니라, 됐다고 말해야겠다. 우리도 70년대 외국으로 그 나라에서 하기 힘들어하는 일을 할 근로자를 보낸 적이 있는데, 과문해서 그런지, 농업 관련 근로자를 보냈다고 들어본 적은 없다. 그것은 그 나라가 생명과 직결된 먹을거리에서만큼은 자주성이 필요하다고 여겨 인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나라의 농촌 인력 외국인 의존 심화는 화근(禍根)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당장에야 언 발에 오줌 눗기로 인력 공급 문제가 해결되겠지만, 결국은 농촌 문제를 더 악화시킬 것 같다. 당국자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플래카드를 보며, 대안도 딱히 없으면서, 머리 무거운 질문만을 던지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식량 주권만은 지켜야 하는데....



산모롱이 도로를 지나가는데 친근감 가는 문구의 플래카드가 눈에 띈다. “할배요, 할매요 산불 내면 큰일납니데이~.” 봄철 논둑 밭둑 태우다 산불로 옮겨붙는 경우가 많아 경각심을 주려 붙였을 터이다. 경직된 문구보다 한결 호소력 짙어 보인다. 봄철 논둑 밭둑 태우기는 아무 효과 없다는 것을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농사짓는 분들, 특히 연세 드신 분들에게는 그게 다 마이동풍인 것 같다. 본격 농사 전 논둑 밭둑에 불을 한 번 싸질러야 개운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이 연례행사가 근절되질 않는다. 강력하게 처벌한다는 문구까지 써놨지만, 근절되긴 어렵지 않을까 싶다. 고정관념이란 얼마나 강력하고 무서운 것인가!



어둑한 풍경들을 계속 만난다. 저런 풍경의 그림을 어디서 봤을까? 컨스터블의 작품이었나? 먹물 빛 구름을 배경으로 검녹의 둔중한 산이 침묵에 잠겨있는데 그 아래 붉은빛 감도는 벚꽃 길이 실처럼 둘려있다. 얼마 가니, 이번엔 좀 밝은색인데, 그래도 여전히 색조는 어둡다. 옅은 먹물 빛 구름을 배경으로 검녹색 산 위에 연녹색을 살짝 터치하고 밝은 회색의 바위를 조금 드러냈다. 오늘은 하느님이 아무래도 살짝 우울하신 것 같다. 하느님, 기운 내세요! 화이팅!



상주 시내로 들어서는데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머물렀다는 객사(客舍) 상산관(商山館)이 보인다. 본래 있던 자리에서 이리저리 옮기다 이곳에 정착됐다는데, 꽤 웅장해 보인다. 더구나 어둑한 하늘을 배경으로 보니 더더욱 웅장해 보인다. 시간이 되면 한번 들려보고 싶은데, 마음이 바쁘다. 어서 빨리 여왕님의 품속으로!



배가 고프다. 아침을 죽으로 먹었으니, 당연한 일. 시계를 보니 1230분이다. 배낭에서 누룽지를 꺼내 씹으며 간다. 좀 부드러우면 좋겠는데, 딱딱해 얼마간 입에 옹물었다가 씹는다. 처음엔 멋모르고 우적우적 씹다가 입천장에 상처를 냈다. 요령이 생긴 것. 경험만큼 확실한 앎은 없다.


경천대(擎天臺)라 써 놓은 우람한 안내석이 보인다. 하늘을 떠받치는 누대라높은 곳에 있다는 뜻인가, 꼿꼿한 모습이란 뜻인가, 의미가 분명치 않다. 한문은 조사가 발달하지 않은 글이라 종종 의미 전달이 불분명하다. 게다가 압축력 또한 강해 의미 전달을 더욱 어렵게 한다. 자신의 무식은 탓하지 않은 채 의미가 불분명한 누대 이름을 한문 탓으로 돌려본다. (나는 우람한 안내석 밑에 쓴 새 상주 로타리 클럽이란 명칭만 보고 여기가 무슨 골프장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유명 관광지였다. 로타리 클럽을 골프 클럽 쯤으로 여긴 무지이니 '경천'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문경 가는 입간판이 보이는데 농암가는 노정도 안내해 놓았다. 농암, 아들아이가 다닌 대안학교 샨티가 있던 곳이다(지금은 서산으로 옮겨왔다). 낯익은 이름이라 친근감이 든다. 아들아이는 풀무 농업학교에 합격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이곳을 택했다. 아내와 나는 속으로 많이 아쉬웠지만 아들아이의 의견을 따랐다. 아내는 그래도 종종 샨티 학교에 들렀지만 나는 아들아이가 그곳을 졸업할 때까지 몇 번 안 가봤다. 아이가 미워서가 아니고 단지 너무 멀어서. 4시간이 걸리는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면 초주검이 됐다. 아들 아이한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들아이가 샨티 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대안 학교들이 호응을 받았는데 지금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대안 학교에서 시도했던 내용들이 공교육에 많이 들어왔고, 입시도 전만큼 경직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다 보니 대안 학교 학생 수가 많이 줄고 그만큼 학교 운영이 어려워져 문 닫는 학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정확한 내용은 아니다). 외국의 유명한 대안 학교, 서머힐 같은 학교가 우리나라에도 건재했으면 좋겠는데.

우리 내외가 아들아이를 대안 학교에 보낸 것은 학교 현장에서 보고 겪은 지긋지긋한 입시 교육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 자신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교 시절이 큰 동기가 됐다. 당시 학교 시절을 흐뭇하게 추억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내겐 정말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시절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푸르른 봄날 같은 시기를 온통 입시 공부라는 회색빛으로 물들인 시절을 아들아이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공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선생으로 제 자식을 대안 학교에 보낸 것에 부끄러움이 있었지만 정말 자식에게는 끔찍한 입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딸아이가 고교 1년을 다니고 자퇴한다고 했을 때 두말 않고 허락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들아이가 샨티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행복했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너무 부모 의견만 강권해 아들 아이의 진로를 방해한 것인지도 모른다(강권했다고 했지만 윽박지른 건 아니고 어렸을 때부터 분위기를 그런 식으로 조성했다). 하여 나중에 원망을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말 아들아이에게는 끔찍한 입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끔찍이란 말을 벌써 두 번이나 사용했다. 내게 고교 시절은 그만큼 끔찍했다). 아들아, 후일 애비를 원망할지라도 애비의 이 절실했던 마음만큼은 이해해 주렴(아들은 지금 스물넷인데 군대에 가 있고 대학 1학년 휴학 중이다).



문경 시내에 들어섰다. 앱을 켜고 퀸 모텔을 찾았다. 방향을 확인하고 걷는데, 이상한 느낌이 든다. 왠지 목표 장소와 멀어지는 것 같은 것. 앱을 켜고 다시 확인해 보니, 아뿔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앱을 켠 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내가 있는 위치 방향과 가야 할 방향으로 일치시킨 뒤 걸어야 하는데, 대충 경로만 확인하고 걸었더니 이런 사단이 생긴 것이다. 하여간 이놈의 방향 감각은. 허벌나게 걸어 겨우겨우 퀸 모텔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7시였다. 모텔은 댓글에서 본 것과 달리 그렇게 노후돼 보이지 않았다. ()에서 인정하는 모범 숙박업소라는 작은 패가 붙어 있었다. 주인(여주인이다)도 친절했다. 가격은 4만 원. 방에 들어가니 리모델링을 한 듯 내부가 화이트 톤으로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풀 먹인 듯한 약간 빳빳하고 하얀 침대 보를 대하니 후줄근한 차림으로 걸터앉기가 미안했다.


배가 고프다. 저녁을 한 끼 사 먹자. 모처럼 용기를 내어 모텔을 나와 식사할 곳을 찾는데, 모텔이 외곽 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마땅히 먹을 만한 데가 없다. 순대국밥집이 눈에 띄어 들어갔는데, 여주인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내부를 보니 오픈하지 얼마 안 돼 보였다. 두 종류의 순대국밥이 있는데, 그냥 순대국밥을 시켰다(순대만 넣은 것을 달라고 했어야는데, 큰 실수였다). 잠시 뒤 나온 순대국밥. 오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잡다한 것들만 가득하네. 순대는 3개 밖에 없었다. 나는 순대국밥에 들깨를 많이 쳐서 먹는데 이 집엔 들깨 통이 없었다. 들깨 없냐고 물으니, 국밥에 넣었는데 부족하냐며 쥐꼬리만큼 퍼다 준다. 한 숟가락 뜨는데 조미료 냄새가 역하다. 끝까지 먹을 수 있을까 싶다. 분기탱천 악전고투하며 최선을 다해 먹었지만 끝내 다 먹을 수가 없었다. 내 생전에 이렇게 맛없는 순대국밥은 처음이다. 8천 원이었는데, 정말 본전 생각이 간절했다. 숙소로 돌아오며 파리바케트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카스텔라와 초코 우유를 샀다.


숙소로 돌아와 가족 단톡방에 소식을 전하고, 샤워 이하 제반 저녁 의식 행사를 마쳤다. 뽀송한 침대에 들어가니 더없이 기분이 좋다. ~ 이런 것이 여왕님의 품이구나. 느긋하게 베개에 기대 리모컨을 누르고 TV를 보는데, 오늘은 볼 만하게 나온다. 장사 천재 백종원. 이 양반을 모로코에 데려다 놓고 생면부지의 땅에서 장사를 시키는 프로그램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궁금한데 정해진 짧은 시간 안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사시킨다. 장사에 천재적 감각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저 양반 이젠 아내(소유진)보다 더 유명하더구먼. 최근엔 예산 시장 살리기도 하는 것 같던데. 훌륭하고 멋져 보이는데, 다만 소심하고 걱정 많은 내겐(더구나 현미식과 채식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저 양반의 음식이 건강한 건지에 대해선 자꾸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맛있고 잘 팔리는 음식=건강한 음식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 이 사람아, 걱정 접어! 자네 건강이나 잘 챙겨! 그려, 맞어! TV를 끄고 불도 끄고 여왕님 품속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내일은 괴산 연풍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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