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http://pixabay.com/ko/images/search/배롱나무/>



사륜각에 있을 때 해마다

글씨 쓰며 자미화(배롱나무 꽃) 마주했었지

오늘 꽃그늘 아래 취했나니

이르는 곳마다 꽃 찾아와 피어나는 듯

 

歲歲絲綸閣 세세사륜각

抽毫對紫薇 추호대자미

今來花下醉 금래화하취

到處似相隨 도처사상수


<성삼문(成三問, 1418~1456),자미화(紫薇花)>


 

환골탈태란 말이 있다. 면모를 일신했을 때 쓰는 말인데, 본래 한시작법에서 사용하던 말이다. 타인의 시상이나 시구를 빌려 쓰되 흔적 없이 사용한 경우를 일컫는다. 위 시는 백거이(白居易, 772-846)직중서성(直中書省, 중서성에서 숙직하며)을 환골탈태시킨 작품이다. 백거이의 원시는 이렇다.

 

絲綸閣下文章靜 사륜각하문장정    사륜각 문서 작성 한가로우니

鍾鼓樓中刻漏長 종고루중각루장    종고루 물시계 소리 한없이 길게만

獨坐黃昏誰是伴 독좌황혼수시반    황혼녘 홀로 앉았나니

紫薇花對紫薇郎 자미화대자미랑    자미랑 짝은 자미화 뿐

 

자미화(紫薇花)1, 2구는 백거이의 시 전편(全篇)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원시가 갖는 시정(詩情)무료함과 답답함을 무리없이 담아냈다. 특히 해마다[歲歲]’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무료함과 답답함의 시정을 간결하게 잘 담아냈다.

 

그런데자미화(紫薇花)가 여기서 그쳤다면 다소 부족함이 있다. 한 발 더 나아가야 진정 환골탈태란 말을 들을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감은 무엇일까? 바로 무료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난 것을 그리는 것이다. 백거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료함과 답답함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자미화(紫薇花)는 그러한 원작자의 마음을 3, 4구에서 드러내고 있다. 질펀하게 취하여 처처에 난만한 자미화를 감상하는 풍류객의 모습은 바로 무료함과 답답함을 벗어난 상태를 그린 것이다. 진정한 환골탈태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이 시는, 말할 나위 없이, 성삼문 본인의 정서를 표현한 것이지만 이면에는 백거이에게 바치는 진혼의 성격도 함유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백거이가 느낀 무료함과 답답함은 자신의 능력이 사장되는데서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나 시구를 원용(援用)하되 표면적 시정을 넘어 심연의 시정까지 표현해 냈을 때, 이는 모방이 아닌 창작이라고 할 수 있다. 허균은 이 시를 평하여 정이 있다[有情]”고 했는데, 단순히 정감있는 시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원작자의 심연에 있는 마음까지 표현해낸 작품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륜각은 당대(唐代) 중서성(中書省, 왕과 관련된 문서를 작성하던 곳)의 별칭이다. 조선에서는 이에 해당하는 기관이 승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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