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이 펑펑 내린 날이었다. 모든 걸 집어삼킬 기세로 내려앉아 있더니, 어느새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역시 눈은 아무리 많이 내리더라도 언젠가는 사라져 버리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본 이후 바뀌었다. 이 소설 속에서도 눈이 많이 내린다. 모든 걸 묻어버릴 듯 맹렬한 기세로 내리는 눈이 덮으려 하는 것은 끔찍한 기억이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기에 피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더욱 참혹했던 사건의 기억.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심지어 아직 신발도 신어보지 못한 아이까지 스러져야 했던 제주 4·3 사건의 기억.
     
 1부 '새'를 처음 열어가는 화자는 소설가 경하다. 그는 제주 4·3사건에 대한 책을 쓴 이후로 그 기억에 갇혀 있다. 벌판에 검은 나무들이 눈을 맞으며 서 있는 꿈, 그 똑같은 꿈을 수없이 반복해서 꾸었고, 마음이 쓰여 그 꿈을 영화감독이자 친구인 인선과 함께 '작별하지 않는다'란 프로젝트로 재구성해보기로 한다. 그런데 프로젝트가 자꾸 미뤄지면서 경하의 마음도 바뀌어 인선에게 관두자고 한다. 인선은 '어쨌든 난 계속하고 있을거야(54면)'라고 답한다. 
     
 그러다 제주에서 목작업을 하던 인선이 사고를 당해 입원하며, 경하에게 자신이 키우는 새를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눈이 많이 내려 얼어 죽을지 모른다면서. 끔찍한 눈보라를 뚫고 경하가 찾아갔을 때 새는 이미 차갑게 굳어 있었다. 경하가 이 새를 고이 묻어 주는 장면은 그녀가 4·3 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그만 묻어 주려는 것과 겹쳐 보였다. 인선에게 프로젝트를 중단하자고 했을 때처럼.
     
 그렇지만 2부 '밤'의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찾아온 인선(또는 인선의 혼)에게, 경하는 ‘새를 묻었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4·3사건의 직격탄을 입은 가족을 둔 인선에게 '이제 그만 그 기억을 보내자'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경하는 오히려 인선과 그의 어머니가 모은 기록들을 보며 인선과 함께 4·3 사건을 파고들어 간다. 신문 스크랩으로 사실관계를 확인해 가며 생존자들과 당시 주변인들의 증언을 되짚는다. 이 과정에서 경하는 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사진과 증언들을 계속해서 마주한다.
     
 인선은 희생자들의 기억을 그냥 묻어둘 생각이 전혀 없다. 아무리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온 세상이 눈에 뒤덮이더라도, 그 기억은 묻힐 수 없으니까. 인선은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무서운 고통(311면)’과도 같은 지극한 사랑으로 희생자들을 감싸주고, 경하가 프로젝트를 그만두자고 했을 때 내놓았던 대답처럼 이들을 계속해서 기억하려 한다. 이 사건으로 오빠를 잃고 평생을 바쳐 그의 자취를 찾아 헤멨던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결국엔 경하도 인선에게 동참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3부 '불꽃'에서 모든 걸 집어삼키는 굵은 눈발에 성냥불이 자꾸 꺼지다, 결국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325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경하도 진실을 마주하고 기억할 용기와 동력을 얻지 않았을까.
     
 물론 제주를 집어삼킬 듯했던 소설 속의 눈도 언젠가는 녹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눈은 돌고 돈다.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다시 응결(135면)'할 수 있다. 칠십 년 전 제주도의 시체를 덮었던 그 눈이, 지금 우리에게 떨어지는 눈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눈에 휩쓸렸던 기억도 마찬가지다. 그 기억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순환하며 남아 있다.
     

 다시 창밖을 본다. 마침 오늘도 함박눈이 쏟아져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 눈도 당연히 녹겠지만, 그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다. 4·3 사건의 기억처럼. 희생자들의 기억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다가와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슬펐지만, 인선과 그의 어머니가 그랬듯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고 기억하고 싶다. 이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선 안 되니까. 눈처럼 순환하는 이 기억과도 작별하지 않겠다. 그래야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