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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 - 2030 에코페미니스트 다이어리 ㅣ 이매진의 시선 8
안현진 외 지음, 여성환경연대 기획 / 이매진 / 2020년 1월
평점 :
‘이렇게 산다고 세상이 바뀌나?’ 하는 물음이 계속해서 꼬리를 무는 요즘이었다. 쓰레기 문제에 관심을 갖고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하면서 생활을 서서히 바꾸어 온지 2년 정도 흘렀다. 처음의 의욕적이던 마음과 달리 몇가지를 실천하고 나니 새로운 것은 더이상 없었다. 온통 내가 할 수 없거나, 할 수 있더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하거나. 그런데 잠깐, 내가 이렇게 산다고 세상이 바뀌나? 아닌 것 같다. 플라스틱을 마구 쓰던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내가 이렇게 해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해를 별로 안끼쳤어’ 라는 자기 위안 말고는 무엇이 남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 라는 제목의 책이라니. 얼른 생각을 듣고 싶어졌다.
“에코페미니즘을 향한 관심과 의지가 뚜렷한 삶의 지향으로 이어지기에는 문턱이 여전히 높다... 대안적 삶을 고민하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환경 때문에 실천을 주저하는 사람이 많다. 노동, 주거, 공동체 등 무엇 하나 나 한명의 의지만으로 바꾸기 어렵고 내 삶에 필수적인 의식주를 소비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획된 2030 에코페미니즘 포럼과 그 때 만난 필자들과 나눈 여덟가지 이야기들을 다듬어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단다.
[몸다양성] 지워진 몸들의 이야기 - 안현진
[장애] 자연스럽지 않게, 계속 살아가기 - 진은선
[퀴어] 다른 몸들과 퀴어한 자연 - 황주영
[번아웃] 생태적으로 살고 싶지만 배달 떡볶이는 먹고싶어 - 배보람
[자존감]일, 여성, 감정 - 용윤신
[기본소득] 기본소득이 있는 세계 - 김주온
[동물권] 상생하는 페미니즘 - 유비
[돌봄] 내 몸 이야기에 귀기울이기 - 김신효정
내가 그동안 쓰레기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집착하고) 살다가 점차 비건과 기후문제에까지 관심사를 넓혀가게 되었을 때 쓰레기와 기후문제, 비거니즘이 가끔 상충되거나 모두를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만나고 좌절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런 문제가 사실은 나의 좁은 시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사실은 위에서 내가 관심있는 분야 뿐만 아니라 에코페미니즘의 주제는 많고도 많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보면 자연과 여성, 그리고 인간 사회의 여러 소수자 집단들은 열등한 것으로 한데 묶여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마치 상충하는 듯하던 여러가지 문제의 공통점은 은 자연이(그리고 여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혹은 남자) 마음대로 넉넉히 쓰고 버릴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연을 착취하면서도 자연을 신성시하는 경향은 얼마나 많은가. 살면서 내츄럴=자연스러움을 높은 가치로 여기면서도 그 내츄럴함을 위한 자연착취는 얼마나 모순적인지 깨닫지 못했다. 또 남녀차별과 성착취, 성범죄 문제에 기를 쓰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나의 모성,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당연한 기대와 찬양에 대해서는 얼마나 너그러웠던가.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어려운 말 이전에 자연=모성이라는 비유와(Mother Nature 대자연. 영어에는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그 넉넉함을 찬양하고 그에 따르는 희생을 얼마나 흔하고 당연하게 여겨왔는 지를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나오는 한발 더 나아간 이런 시각은 신선했다. “그렇지만 섹슈얼리티에 초점을 맞추면, 자연은 정상과 비정상을 판가름하는 규범으로 소환된다. 문화의 지배 대상인 자연이 이때만큼은 인간이 복종해야지 진리의 장소가 된다. (..) ‘자연’이라는 말이 단지 문화에 대립되는 열등한 짝에서 그치지 않고 때로는 다른 소수자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배제와 불평등을 정당화하기위해 우월한 정당성의 규준으로 작동하시고 한다는 점을 보여진다.” ‘자연’이라는 말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를 품고,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하게 쓰일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자연이 규범이 되는 순간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하나 고르자면 이것이다. 아마 필자의 뇌리에도 꽂혀 인용된 필자의 친구의 대답이다.
“왜 계란과 우유를 먹지 않니?”
“소와 닭의 여성성 착취라서.”
H가 보낸 짧고 굵은 답장을 받은 그 순간이 내 ‘비건페미니스트’모먼트다. (..)비인간 동물이 당하고 있는 재생산 능력 착취를 내가 받는 억압하고 같은 선상에 놓은 순간이다.
비거니즘을 실천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고깃덩어리를 먹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고 난 뒤 여러 달이 흘렀다. 시간이 지나면 나의 생활이 점점 비건화 되겠거니 했던 나의 첫 마음과는 달리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에 지글거리는 삼겹살과 매콤한 치킨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고 있는 요즘이다. 자연스레 행동도 따라오던 제로웨이스트 실천법과는 달리 육식에서는 왜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일까? 계란과 우유는 말할 것도 없다. 아이들은 물론 나도 거의 즐겨 먹는 다고 까지 할 수있다. 소와 닭의 여성성 착취. 여성들을 성착취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을 n번방 범죄자들과 강제임신을 당한 소에게서 짠 우유를 맛있게 먹고 있는 내가 겹쳐진다. 그러나 또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렇지만 비거니즘은 내 페미니즘 실천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또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구가 돼서도 안된다. ‘착취하거나 해하지 말라’고 외치는 데에 정당성이나 조건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지만, 그런 모순이 우리의 피해 사실을 지울 수는 없다.”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소와 닭의 여성성에 대한 공감능력도 높아지겠지.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에서 처음 느꼈던 마음은 ‘하루하루’ 살아도 세상은 안바뀌던데였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보다는 이렇게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 그저 그냥 하루하루가 아닌 이렇게 하루하루 인 걸로.
‘이렇게’ 책이라도 보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만나고 시야를 넓히고 어떻게든 변화의 희망을 놓지않고 살다보면 세상은 분명 바뀔 것이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