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효고현에서 태어났다.

 

 

23살에 학생신분으로 결혼.

피터캣이라는 재즈바를 7년간 경영.

1979년 3월 야구 경기를 관람하던 중 안타가 되어 날아가는 공을 보면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1979년 6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어떤 기관에 속하지 않고 재즈바를 운영하고 새벽에 식탁의자에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이 점도 대단하다. (남들은 대학에서 국문학과며 문창청년을 몇 년해도 될까 말까 한데 말이다!)

 

 

 

'먼 북소리'의 하루키처럼 여행하고 '노르웨이의 숲'를 쓴 하루키처럼 쓰고 싶다.

정말 질투나는 사람이다.

그 많은 재산이 있어도 티 하나 안나는 사람이다.

그저 달리며,소박한 곳에서 와인을 마시며,이국의 도시를 여행하며,밤 10시에 잠들어 아침에 글을 쓰고 오후에는 자신의 생활을 즐기는 남자.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이 남자.

 

군대 시절.

나는 훈련의 긴 밤에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이 따위로 글을 잘 쓰는 인간이 대체 누구냐? 며 밤을 새워 읽으며 글의 힘과 그 내용에 감탄한 적이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하루키에 대한 삶의 방식과 글 쓰기는 나에게 로망이다.

 

 

 

 

 

 

 

 

 

 

 

 

 

 

 

 

 

어느 여름 날,

 

새파란 파도가 밀려오는 파라솔 밑에서

시원한 바람과 그 바람속에 나의 향기를 띄우고

해먹에 누워 하이네캔 맥주를 마시며 다시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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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군대 라는 말은 그 자체 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아픈 추억들이 있다.

이 아픈 추억 이라는 것 또한 절실하게 , 간절하게 배움 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 이다.

하지만 얻고 배우는 인생의 크나큰 차이는 사뭇 개개인 다를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그 자체가 힘들다  생각한다.

누구나 힘들다, 누구나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차이는 사뭇 다르지 않다.

해병대, 특수부대를 나오고 힘들게 군 생활을 하여야만 군대 생활을 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멋진 군생활이라고 할수는 있지만 그 차이라는 것또한 별반 없다.

군대라는 그 안의 사회와 격리된 생활이 힘든것이다.

방위 생활도 나름데로 힘들고 취사병, 서무병도  다 나름 데로의 그 고충이 크리라.

군대는  군대 라는 그 자체가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들을 이겨냈다는 자체 만으로도, 몸건강히 잘 세월을 이겨 냈다는 자체만으로도 휼륭히 군생활을 잘 해낸 것이다.

 

추운 겨울 12월의  어느날 군대를 입대했다.

하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눈이 펑펑 밤새도록 내렸다.

첫날 그 어설픈 군인의 군복을 입고 내리는 창밖의 눈을 보노라니 과연 내가

제대 라른 것을 할날이 있을까?   정말 갑갑 하고도 보이지도 않는 그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퇴소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아내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훈련소 따라 오면 고무신 거꾸러 신는 다기에 전주터미널에서 군대가는 것도 아닌것 같이 가까운 곳에 가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버스에 올라 오지 않았던가?  같이 훈련소 까지 올것을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그 밤에 나는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못할것 같은  두려움에 밤을 지세워야만 했다.

과연 내가 이 훈련소를 나가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 것이 두려웠다.

 

시간이 지독하게도 흘러 훈련소를 퇴소하고 후반기 교육을 광주에서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3개월 시간동안도 두려운 것은 어느곳으로 자대배치를 받는 다는 것인가?

아내가 면회오기 쉬운 곳으로 제발, 가까운 곳으로 자대배치를 받게금  해달라는 기도가

나의 마음을 다해 기도하는데 들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이 두려웠다.

내 소원이  다해 원하는 곳으로 배치를 받아 자대 배치 받던 그 날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자대를 배치받아 신고식을 하려 하는데 날 쳐다보는 그 많은 고참들의 시선...

그 눈빛들이  비슷한 나이의 사람에게서 나는 그 눈동자가 참으로 두려웠다.

 

나는 기갑부대,  전차 조종수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를 그 때처럼만 했으면 아마 고시라도 합격했을 것이다.

배워야할 것도 많았지만 외워야할 것도 많았고 연이은 훈련과 밤의 근무, 나의 신병생활은 그저 냄새나는 그 구막사 화장실에서 아내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받을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은 군대를 갔다온 사람만이 알아줄 것이다.

구타 근절이라는  목표아래, 구타가 사라지고 가혹행위가 점차 없어진다 고는 하는 그 시절이었지만 구타는 음성적으로 윗사람들의 눈에 보이지만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판치고 있었다.

맞는 다는 것은 그리 두렵지 않다.

윗 고참들 부터 맞는 그 소리, 그 소리가 무섭다.  내 차례가 다가오는 순간이 두렵다.

 

 정말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앞도 볼틈도 없이 그렇게 열심히 군생활을 해나갔다.

그리고 내가 일병 2호봉 때쯤 어느 토요일 부대원들이 한 내무반에 모여 비디오를 보는 시간이 왔다.  그러던중 누군지 정중앙에 의자를 놓고 앉아 많은 병사들이 볼수가 없었다.

누군지 보니 하사관 출신인  나와 입대가 비슷한 하사였다.

기갑부대 특성상 하사관이 부대원 40%를 차지 하고 있었고,이 정중앙에 앉아있는 하사는 우리 고참들과 후임들이 가장 싫어하는 눈에 가시같은 하사였다.

고참들에게 교육을 당시 그렇게 받았다.  절대 하사관들에게 경어도 쓰지 말것이며 깡다구로 절대 지지도 말라고...

내 바로 앞에 않아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내입에서는 쌍소리가 나오고 비디오 전세냈나..  들릴듯 하게 내가 내밷고 말았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자리였지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그 순간이 정말 싫었다.

그말을 듣고 말싸움이 붙었고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가는 것은 오랜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당직사관에게 보고가되고 부대원전체가 군장을 싸고 연병장을 돌았다.

고참들은 잘 했다며 격려를 받았지만 나는 무언가 깊숙한 깊은 곳으로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결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 기분이...

 

적중했다.

중대장에게 보고가 되어  진술서를 시작으로 사고경위에 대한 내용증명과 여러 정황이 담긴 수십장의 종이를 쓰고 또 쓰고 밤을 거의 새우듯 섰다.

그리고 이어지는 징계위원회와 사실처럼 하는 상황재연, 내가 배우가 된듯하다.

그렇게 일주일 가까이 가는 그 순간이 너무도 길었다.

어떻게든 정확한 말이 없고 군기교육대를 갈것이냐, 영창를 갈것이냐, 대체 어떻게 한다는 것이냐  앞을 알수 없는 그 시간이 고통의 두려움 이었다.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것은 몸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고통받게 한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10일간의 완전군장에 연병장을 도는 것으로 매듭 지어졌다.

내 안에서 나온 나의 말한디의 위력은 이처럼 나를 힘들게 15일의 댓가를 치루게 만들었다.

 

군인은 군인 다워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내 주관이었고 고참들에게는 책임있는 후임,

후임에게는 솔선수범이지만 강하고 자기위치를 아는, 그리고 후임답게 하는 후임이 되게금 가르쳤고 어쩌면 강요를 많이 하였는듯 하다.

웬지 나약해지고 군인 답지 않은 느낌을 그 즈음 후임들에게서 느꼈다.

보상심리는 아니 었지만 저게 군인 맞나 하는 후임도 여럿이 보였다.

그때가 상병 6호봉 때이다.

이제 병장도 채 2달이 남지 않았다.

그러던중  내 인생의  관점과 군생활을 확 두바꾼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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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고독하게 쓸쓸히 고민도 했고 담배를 피우고 한숨을 짓기도 했다.

여름에도 앉았었고 떨어지는 낙엽속의 가을에도 앉았었다.

겨울이면 눈을 맞기도 했고 봄이 오는 그 시간의 틈새에서 새살이 돋는 나무를 보았다.



사무실 뒷편에 자리잡은 이곳에 난 자주 가려하지 않는다.

이곳만 가면 마음이 찹작해진다.

공간이 주는 그런 묘한 매력에 습관적으로 감수성이 몰려오는 그 느낌이 나는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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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1992년 12월23일 군대를 입대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둔 날 훈련소에 온 것이다.

하늘은 내 마음을 아는지 눈이 펑펑 밤새도록 내렸다.

첫날 그 어설픈 군인의 군복을 입고 내리는 창밖의 눈을 보노라니 과연 내가

제대라른 것을 할날이 있을까?   정말 갑갑 하고도 보이지도 않는 그 시간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선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퇴소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훈련소 따라 오면 고무신 거꾸러 신는 다기에 전주터미널에서 군대가는 것도 아닌것 같이 가까운 곳에 가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버스에 올라 오지 않았던가?  같이 훈련소 까지 올것을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그 밤에 나는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못할것 같은  두려움에 밤을 지세워야만 했다.

과연 내가 이 훈련소를 나가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 것이 두려웠다.

 

 

 

남자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 이다.

하지만 얻고 배우는 인생의 크나큰 차이는 사뭇 개개인 다를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그 자체가 힘들다  생각한다.

누구나 힘들다, 누구나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이다, 차이는 사뭇 다르지 않다.

해병대, 특수부대를 나오고 힘들게 군 생활을 하여야만 군대 생활을 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멋진 군생활이라고 할수는 있지만 그 차이라는 것또한 별반 없다.

군대라는 그 안의 사회와 격리된 생활이 힘든것이다.

방위 생활도 나름데로 힘들고 취사병, 서무병도  다 나름 데로의 그 고충이 크리라.

군대는  군대 라는 그 자체가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생활들을 이겨냈다는 자체 만으로도, 몸건강히 잘 세월을 이겨 냈다는 자체만으로도 휼륭히 군생활을 잘 해낸 것이다.

 

 

 

 

 

논산 훈련소,후반기 교육을 5개월 받고 경기도 파주에서 나는 기갑부대,  전차 조종수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공부를 그 때처럼만 했으면 아마 고시라도 합격했을 것이다.

배워야할 것도 많았지만 외워야할 것도 많았고 연이은 훈련과 밤의 근무, 나의 신병생활은 그저 냄새나는 그 구막사 화장실에서 그녀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작은 위로를 받을을 뿐이지

다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을 찾기는 힘들었다.

그 힘겨움은 군대를 갔다온 사람만이 알아줄 것이다.

 

1994년 ..

어느덧 내가 군입대를 한지도 20개월 가까이 흐른 것이다.

상병6호봉 까지 오르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땀과 노력, 그리고 밤이슬을 맞으며 아내을  얼마나 그리워 했던가.  거꾸로 돌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했는데 나에게도 그런  똑같은 시간 이었지만 왜 그리도 더디게 갔던 시간들 이었던가...

병장이 그리 멀리 있지도 않았다.  고참들에게도 인정 받고 나름데로 나의 위치도 굳건히 다져진 그런 시간이었었고 군생활도 이제는 꽃을 조금씩 피울때가 된것이다.

아직 제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예전 이병, 일병 때에 비하면, 갓 상병일때에 비하면 너무도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때가 상병 6호봉 때이다.

이제 병장도 채 2달이 남지 않았다.

그러던중  내 인생의  관점과 군생활을 확 뒤바꾼 거대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장난이라고 생각했고 군생활중 일상같았던 사소한 일때문에 나는 영창을 15동안 가게 되었다.

 

 

그 밤에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일주일에 2~3 통씩 편지를 보냈는데 15일을 보내지 않으면 걱정을 하겠지.

적당한 분량으로 훈련중이고 바빠서 그런다고 군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나는 아주 잘 지내는 것처럼 편지 3통을 썼다.

후임에게 5일 간격으로 부치라는 당부를 꼭 전했다.

그리고 날짜는 다르게 썼고,   보고싶다,, 그리고 사랑한다 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티코 안이다.

간밤에 거의 잠은 자지 않았지만 전혀 피곤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긴장도 긴장 이었지만 어쩌면 홀가분한 마음 뿐이었다.

그래.  15일만 버티면 모든것이 끝나는 것이겠지..

어쩌면 희망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소대장과 선임하사.

좁은 티코 안에는 흘러 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처음 듣는 이 노래는 나의 심금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귀에 너무도 간절하면서 아쉽게 들려오는 이 노래는 무엇인가?

그것은 팝송이었다. 애절하면서도 리듬이 서글픈 이 팝송은 무어란 말인가?

전주가 길면서 애답게 부르는 이 여가수의 목소리는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소대장에게 다시 한번 틀어 주기를 부탁 했다.

한번 더 들으니 너무도 좋았다. 제목을 묻자 " 포논 브론디스의 what,s up " 이란 것이었다.

너무도 좋아 두 번을 더 들으면서 목적지를 향했다.

 

 

 

 

지옥같았던 영창에서의 15일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것이 아닌 견디고 버티는 생활이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분명 그 곳은 사람이 사는 곳이지,괴물이 사는 곳이 아니었기에...

 

드디어 15일이 지났다.

어떻게든 시간은 분명히 가는 것이구나. 고맙다   감사한 시간아...

훈련복을 벗고 다시 내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소대장이 두부를 건냈다.

나는 고맙지만 치워 달라고 했다.

두부는 죄 지은 사람이 먹는 것이지 나는 먹을 수가 없다고 했다.

 

소대장의 티코에 올랐다.

시동을 켜고 출발을 하는데 음악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 포논 브론디스의  what,s up " 이었다.

계속해서 리바이얼로 나오고 있었다.

내마음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준비 하셨을까?

김상병과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다... 아니 흘리고 싶었다...

 

 

 

지옥같았던 15일을 이겨내준 그 명곡, 지금도 그 노래를 들으면 팔에서 소름이 돋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명곡    [4 Non Blondes] 의 WHAT,s up 을 신청합니다.

 

 

 

참 그녀는 지금도 제 옆에서 아내라는 이름으로 곁에 잘 있습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이 8월에 군대를 갑니다.

오랜 시간 견뎌준 아내 김지영에게 이공간을 빌어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덕분에 항상 귀한 방송 잘 듣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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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역뒤

안양역 뒤, 그러니까 양명고 옆 지금의 대우아파트에서 2번째 새로운 일을 했다.  

순전히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양수,원배가 있어서 무조건 안양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이 녀석들 학교 그만두고 왔다는데가 고향선배가 일하는 이 건설현장이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파트 벽과 자재들, 높은 층에서 바라본 안양시내의 전경들, 그리고 추웠던 날에 불깡통으로 언손을 녹이면서 일했던 날들... 

 

노가다도 많은 분야가 있는데 내가 했던 분야는 전기분야였다.

 아파트의 전기분야와 시멘트를 섞어 굳게 하는 일, 옹벽을 세워서 그 안에 철근을 넣었던 일이 주류다. 아침 6시면 일어났다. 아파트 현장 사무실 같은 곳에 숙소를 정해서 5명정도 잤는데 일어나면 세수보다 더 먼저 이불개고 밥먹는게 일이었다

. 함바집에서 먹었던 밥은 참 맛있었다. 양도 많고 맛도 있고 어떤 날은 아침부터 막걸리 한잔 먹기도 했다. 여러 아파트들 사이로 왔다 갔다 하는 일은 은근히 힘도 들었지만 재미도 있었다. 일 좀 할 만하면 새참에 또 일하다 점심에 또 새참에 하다보면 저녁이다. 저녁이면 고기안주에 항상 막거리를 마셨다. 소주도 마시고... 그리고 언 물로 세수하고 찟고 숙소로 들어온다.  그해는 참 눈이 많이 왔다. 그리고 젊은 날이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도 없었다. 인천에서처럼 용접안하고 자유롭게 하는 그 일이 재밌었다.

 

쉬는 날이 따로 없었기에 기분이 동하면 저녁에 안양역 근처로 술을 마시러 자주 갔다. 지금처럼 멋지게 선 안양역이 아니었기에 그 당시는 초라한 건물에 그 주위에 술집이 많았다. 안양역 바로 밑 따따부따 라는 커피솝 겸 호프집이 있었다.

낮에는 커피팔고 밤에는 맥주를 파는 집이었는데 자주 그 집에 갔다. 양수라는 친구와 자주 갔는데 그 집에서 일하는 아가씨 둘과 친하게 됬다. 이름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혜숙이라는 아가씨와 은미라는 아가씨였다.나이가 우리보다 많은 23살이었는데 우리도 나이 구라를 좀 쳤다. 어두운 조명의 커피솝겸 맥주집,그리고 술 마시고 취하는 젊은이들.. 정말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그렇게 몇번을 가다가 크리스마스  날 친구 양수에게 전화가 왔다.

 

 혜숙이라는 아가씨가 양명고 밑 다리에 와있다고 나오란다. 녀석 좋다고 나가더니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잘 됐나보다 했다. 그날 눈도 참 많이 왔는데...  아침에 부시시한 눈으로 녀석이 들어왔다. 어디서 자고 왔냐고 물었더니 그 혜숙이라는 아가씨집에서 자고 왔단다... 

날씨는 더 추워지고 힘들었지만 친구따라 같이 일하는 재미에 빠져 힘든 줄도 몰랐다. 인천에서 일할 때 30만원도 못받던 월급이 그 곳에서는 50만원이 넘었다. 하루 일당이 그 때 25000원 정도 였었지...  그러면서 혜숙이라는 아가씨와 양수랑 셋이 자주 만났다. 혜숙이라는 아가씨가 참 착햇다. 옷을 야하게 입고 화장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나름 청순한데가 있다고 내가 청바지도 입고 화장도 옅게 하고 청바지에 운동화 신으면 이쁘겠다고 했더니... 어느날 전화가 울렸다. 

 

양명고 밑 다린데 나올 수 없냐고 전화가 왔다. 친구랑 같이 아닌 나만 나오라고 했다.왜 나만 나오라고 한거지.

혼자 나갈 수도 있었는데 그 것을 친구에게 말했다.그 당시 의리라는 것을 중요시했던 때라 친구에게 말하니 열이 받은 얼굴로 같이 나가자고 했다.

 배신감이 느껴졌나보다. 같이 나가서 나만 멀리 떨어져 있는데 둘이 말다툼 같은 소리가 나고 친구가 고함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친구는 먼저 가버렸다. 그리고 가로등밑에 그 혜숙씨가 홀로 있었다. 모든게 내 탓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냥 얼른 가야지 하고 뛰는데 그녀가 달려왔다. 죄의식이 느껴져 더 빨리 달렸다. 그녀도 정말 열심히 나를 쫓아왔다. 그리고 마주섰는데 그녀의 얼굴이 빨갛다. 울기도 하고 뺨을 맞았는지 볼이 빨가스름했다. 

 

"전 항상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자상하게 자기를 격려해준 내가 좋았다고 말했다. 친구는 이기주의적이고 배려심이 없고 거칠어서 부담스럽다고 말햇다. 부담줄려고 한게 아니고 힘든 일들이 있어서 대화나 하려고 나에게 전화했노라 라고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그제야 자세히 보니 얼굴에는 화장도 전혀 안하고 머리에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벙어리 장갑을 끼고 청바지를 입었으며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영락없은 대학생의 표정 그대로였다.그리고 정말 귀여웠다. 귀엽고 이쁘다고 말했더니 웃음띤 얼굴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나에게 술한잔 사줄 것을 제의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돈을 번다는 놈이 세상에 돈이 없다니...

돈이 없는게 그렇게 한심스럽고 안타까운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술 마시기에는 그렇고 집에 바래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한잔 사줄 것을 말 못했다. 알량한 자존심도 자존심이지만 친구에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이 후회한다. 그때 따뜻하게 밥이라도 사 줄 것을, 술이라도 한잔 어떻게든 사줄 것을...) 그리고 걸었다. 그 때는 그 길이 어딘줄 모르겠더니 박달동이었다.

박달동 시장가기전에 그 쪽이었다.한참을 걸어가는 데 서로 말이 없었다.

 

 그녀가 거의 다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들어가겠노라고 말하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왔다. 나는 너무도 미안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일침을 더 가했다. 난 친구가 더 소중하다고 이런 나를 이해해달라고... 그녀가 고개를 떨구며 입으로 손을 가져가면서 뒤돌아 갔다. 아마 우는 것 같은 느낌이다... 

돌아오는 내내 정말 후회를 했다. 어쩌면 지금도 후회를 한다. 그 때의 안타까움을...미안함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에 침울했다. 그 날이후로 그녀를 다시 한번도 만난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많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한번은 꼭 만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 세월이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리고 얼마후 양수라는 친구와 나는 그 안양을 떠나게 된다. 친구의 여러 사정으로 떠나게 됐는데 나도 친구따라 또 강남가는 심정으로 또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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