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일을 하는 사람과 공이 돌아가는 사람이다. 그 중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 그곳은 경쟁이 그리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인디라 간디가 한 말이다. 느긋함과 통찰이 함께 있다.
여름철에 잘 읽히는 추리소설의 고전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시리즈이다. 거기에는 홈즈의 친구인 닥터 왓슨이 함께 등장한다. 홈즈는 냉정할 만큼 논리적이며,예감에 충실하여 종잡을 수 없다. 그러나 왓슨은 인간적이며, 예상이 가능한 인물이다.

홈즈는 천재적이고 괴팍하지만 왓슨은 평범하지만 믿음이 간다. 소설 속에서
완벽한 파트너를 이루고 있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인물 홈즈와 왓슨은 작가인코난 도일의 서로 다른 반쪽을 의미한다. 좋은 동료는 이처럼 보완적이며 함께 있어 완전해진다. .

1998년 11월, 독일의 다임러-벤츠와 미국의 클라이슬러는 합병했다. 이 합병은1990년 파산 직전이던 클라이슬러사의 회생 없이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클라이슬러의 소생은 회장인 로버트 이튼과 사장인 로버트 러츠 사이의 협력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의 협력은 오히려 적대적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러츠는1993년 아이아코카의 뒤를 이어 클라이슬러의 회장이 되기를 원했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이튼이 회장이 되었다. 제트기 조종사 출신인 거칠고 오만한 인물, 주머니 칼로 커피 크림을 저어 그 칼날을 핥는 과격한 인물인 러츠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준사람은 이튼이었다. 이튼은 혼자 클라이슬러를 소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러츠에게 재량권을 주었고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러츠가 개성이 강하지만 그것이 곧클라이슬러의 소중한 자산임을 알고 있었다. 러츠 역시 "이튼은 자만심 대신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업의 성공을 위해 자만심을 억누를 줄 안다... 나는 이튼이 경영하는 클라이슬러에서 더 열심히 일하겠다."라고 말했고 약속을 지켰다.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장점을 보았다. 그리고 함께 성공했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명민하지만 스캔들 투성이인 클린턴과 고어, 트루만과 불굴의 마셜, 마오쩌둥과 주엔라이 등의 정치적 협력관계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인텔의 앤드루 그로브와 크레이그 배럿, 코카콜라의 로베르토 고이주에타와 더글러스 이베스터의 협력관계를 소개한다. 또 체육계의 협력 역시 대표적 사례들를 곁들이고 있다.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다. 그러나 우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를 뿐이다.

다르다는 것을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주연과 조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친구와 동료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로에게서 숨은 재능을 찾아낸 사람들의 이
야기이며, 서로에게서 최선을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당신이 정치가나 사업가가 아니어도 좋다.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상관없다. 무엇을 하든 친구와 동료가 없는 삶은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놓치게 되면 후회할 것이다. 재미있고 유익하며일상에 적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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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진 사람의 고통 만큼 그림자가 남는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따라서 싸울때마다 이기는 사람은 훌륭한 장수가 아니다. 그저 차선의 인물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생각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싸움꾼 중의 하나인 '손자'의 터득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최선이 될 수 있을까 ? 적을 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할 방편으로 보면 동지가 될 수 있다. 적을 파트너로 만드는 것만큼 훌륭한 경쟁은 없다.

일본인들은 이런 개념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 중에 하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꼽는다. 그는 일본의 최고 경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후계자 상이라고 한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죽이지도 않고, 울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울 때 까지 기다리는 유형의인물이다. '너구리 영감'은 그의 트래이드 마크이다. 느긋하고 심계가 깊다. 고도의 전략과 심리적 능난함을 가지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란을 종결하고 260년간의 안정적 막부를 세울 수 있었던 이유는 몇가지로 분석된다. 첫째는 세상을 따른다는 것이다. 민심을 따르고 여론을중요시한다. 백성은 정치가에게 있어 고객과 같다. 그는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 지를 안다. 그리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째는 자기개혁 능력이다. 낡고 오래된 생각을 버릴 수 있어야한다. 스스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중용한다. 셋째는 신뢰가 필요할 때 신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 유지의 기본은 신뢰이다. 한 번 신뢰를 잃으면 필요할 때 신뢰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신뢰와 관련하여 잊지말아야할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한 번 잃으면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잃지 않는 것자체가 중요하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것이다. 무작정 사람을 믿는 것은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예를들어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재물까지 얹어 주면 그는 더 이상 파트너로 남아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인간 관계의 핵심이다.

경영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문제이다. 꿈을 다루고,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시장의 움직임과 고객의 요구를 따라간다. 의욕과 정열을 다루는가 하면, 정보와 이성적 판단을 함께 다룬다. 제도와 시스템과 기술을 통합하여 최선을 이끌어 낸다.

돈은 그저 경영의 결과일 뿐이다. 아이러니칼하고 다행스럽게도 돈이 목적인 기업은 한 두 번의 전투에서 이길 때도 있지만, 결국 다른 기업에게 세상을 넘겨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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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근 30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 파란 바다를 잊을 수 없다. 햇빛은 맑고 밝았다. 절벽에 부셔지는 파도는 눈부셨다. 바람은 그 속을 자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이미 너무 늙어 청춘을 즐길 수 없게 된 죄수 하나가 뗏목에 누워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얼마나 통쾌한 엿먹어 라였는 지 모른다. 자신을 가두었던 사람들, 자기의 실패를 즐겼던 사람들을 향한 악의 없는 조롱, 나는 그 때 그 늙은 몸 속에서 싱싱한 소년을 느꼈다.

영화 '빠삐용'에 나오는 주인공의 외침은 내게 이렇게 입체적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 통쾌함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 후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것을 기억해 낼 수는 없다. 단지 '인생을 낭비한 죄'를 짓고 싶어하지 않았던 한 사람을 뚜렷이 기억할 뿐이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모범생처럼 곁눈 팔지 않고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하여 의사나 변호사가 되는 것일까 ? 아무런 정신적 방황도 없이 평생 앞만 보고 달려가 사다리의 꼭대기에 가있는 야망을 이룬 거물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허망한 짧은 인생, 실컷 퍼먹고 퍼 마시다 가는 것이 오히려 남는 인생일까?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내가 되어 치열하게 살고 싶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원치 않는 일을 하며 평생을 살지 않을 것이다. 기름 진 저녁 한 상을 벌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을 팔지 않을 것이다.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내 시간의 일인생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산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몸 속을 흐르는 피가 되고 골수가 되어 태어난 그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은 남이 되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가 인정해 주는 기준, 즉 출세하면 그것이 저인 양 거들먹거리며 사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가 알아주지 않으면, 가슴이 떨리고 기가 질려 어쩔 줄 몰라 때로는 우울하게 때로는 난폭하게 살다 가는 것이다.
부를 팔 수밖에 없다면 즐거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나의 삶을 즐길 것이다. 언젠가 그 하루 전체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삶은, 온통 자유로운 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를 얻기 위한 싸움과 인내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건져 낸 슬픔과 깨달음 그리고 행복인지 모른다. 나는 오직 내가 되어, 60억 인류 속에 서로 같지 않은 하나로 살다 가고 싶다. 그 때 신은 나에게 '자신이 허락한 유일한 인생을 낭비한 죄'를 나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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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오피니언 (1999년 4월 12일)
아름다움에 대한 공명(共鳴)-동아일보(아침을 열며)
아주 오래 만에 그곳에 갔다. 작은 딸 아이도 데리고 갔다. 나무바닥으로 된 홀은 그때처럼 내 발자국 소리에 울리고 있었다. 공간이 비어 있으면 울림이 있다. 나는 그 울림이 좋다. 내가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던 때, 어느 평일 오후쯤에 그곳 덕수궁 현대미술관 분관에서 느꼈던 한가함과 여유로움은 그 텅빈 울림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 마음속의 살림이 많이 늘어난다. 공간이 채워지면 울리지 않듯, 재고 계산하고 쓸데없이 바쁜 마음은 감정의 울림을 가지지 못한다. 살면서 쌓아 놓은 묵은 살림들이다. 지켜야할 약속, 오늘 처리해야할 급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들, 어제 있었던 작은 다툼, 어른답지 못했던 행동, 아침 신문에서 읽은 정치가들의 불가사의한 행태와 그것이 신문의 앞면을 차지하는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것들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익숙해져간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익숙한 일상은 편안한 행복을 보장하는 것 같지만,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둔해지고 무거워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름다움에 공명(共鳴)하지 못하게 된다.

아름다움이 울리지 못하는 마음이 지배하는 사회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동강을 지구상에서 없앨 계획을 짠다. 밤의 탐욕과 담배연기 자욱한 카지노, 네온사인과 레이저빔 속에 상가와 음식점으로 가득 찬 거리를 더 많이 제주에 만들어 내려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마시고,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지만 끊임없는 기갈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너무 빨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함께 섞여 달려가고 있다. 아직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을 다행스러워하며.

그러나 변화란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가장 훌륭한 변화의 방법은 변화 자체를 선도하는 것이다. 선도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추종자에 불과하다. 추종자는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작은 마음의 공간 안에 다른 사람이 만든 가구를 사들여 그 속에서 자신을 잊고 산다. 마음의 공간 어디에도 자신의 모습은 없다.

한 집단에 의해 공유되는 공통의 원칙을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정신적 공간을 꽉 메우고 있는 대량 생산된 가구 같은 것이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을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변화를 창조한다는 것은 누군가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가가 되지 않으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레닌은 피투성이의 무서운 혁명가고, 코코 샤넬은 냄새가 좋은 부드러운 혁명가이다.

좋은 혁명가가 되어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공간을 많이 비워 놓아야한다. 애초에 잡동사니들을 들여놓지 말거나, 살면서 쌓아 놓은 묵은 허섭쓰레기를 버릴 수 있어야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연연해하는 사람들은 결코 미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이 주도하는 개혁은 늘 말뿐이고, 실제는 언제나 기존의 원칙이 확장되는 곳을 향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는 늘 성공한 과거일 뿐이다. 겨울이 되어도 잎과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처럼 그들은 기득권을 버리지 못한다.

봄이 되어 나무에 꽃이 피어나 곱다. 꽃은 지난 겨울 모든 것을 버린 나무가 새로 만들어 낸 미래이다. 작년 여름의 그 뜨겁던 햇빛을 담은 열매와 푸르고 무성한 잎을 버리지 않고, 올 봄에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는 나무는 없다. 아직 꽃도 새 잎도 피우지 않고 서있는 석조전 앞의 화살나무를 보며, 그 벌거벗음 속에서 가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는 방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을 듣는다. 새롭게 채워 나가야할 비어 있는 우주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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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것일까?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 것일까? 1998년을 전후하여 직장에서 발생한 가장 커다란 변화는 직장인들의 내면적 자기퇴직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지시에 따라 시키는 일은 한다. 그러나 더 이상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인생은 퇴근 시간 후부터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라인하르트 휀(Reinhard Ho:hn)은 이것을 내면적 자기 퇴직이라고 부른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살길을 찾아 인터넷 속의 증권가를 헤매고, 전직과 창업과 자격증의 언저리를 방황한다.
한국이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추세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독일의 베르텔스만(Bertelsmann)재단의 위촉으로 본(Bohn)의 한 경제.사회 연구소에서 2000명의 중견및 신입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4%가 바로 이런 내적인 자기 퇴직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퍼블릭 아젠다 포럼(Public Agenda Forum)의 조사에서도 약 75%의 직원이 현재의 직무에 만족하지 못하며 자신의 능력을 다 쓰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애써서 모방하려는 서구 사회의 모델도 직원의 잠재력을 몰입시켜 기업의 성과에 직결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지나간 산업사회의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충성심'이라는 핵심적 관계소(關係素)대신 지식사회에 걸 맞는 새로운 관계소의 정립이 시급해 졌다. 경영인들에게 두 가지만 절실한 제안을 하고 싶다.
첫째는 진정으로 직원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지식사회에서는 사람만이 자산이다. 마쓰시다는 '우리는 직원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진심으로 자랑한다. 빌 게이츠는 자신이 '스마트 피풀'(Smart people)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 자신의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잭 웰치는 자기 시간의 반 이상을 사람에게 쏟고 있다고 한다. 진정으로 직원을 소중하게 여길 때만이 직원은 감응한다.
둘째는 권위주의를 제 1의 적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버릴 수 있어야한다. 지시와 통제에 기초한 권위주의는 모든 분야에서 정신을 묶고 두고있는 뿌리깊은 인습이다. 다른 나라 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극복할 수 있다. 권위주의는 폐쇄성으로 인간의 정신을 죽인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상상력을 죽이고 창의력의 뿌리를 뽑아낸다. 개인이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없을 때, 정신은 괴멸한다. 경영진의 역할은 통제와 외적 동기 유발이 아니다. 개인들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유재량의 여지를 부여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경영의 시급한 과제이다.
또한 나와 같은 직장인들에게 한가지의 제안을 하고 싶다. 동기유발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어떤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책임지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 회사의 문제를 자신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올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그 문제에 몰두하게 된다. 일에 대한 열정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만이 오직 나의 일에 몰두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위해 먼저 무엇을 시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기대이다. 상황에 종속될 뿐이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찾아 나서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자기를 믿는 것이 남을 믿는 것 보다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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