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
훗날 로즈 장학생 선발을 위한 에세이에서 클린턴은 자신이 조지타운에 온 것은 ‘실천적인 정치가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며, 옥스퍼드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자신이 이미 깊이 빠져버린 정치 세계의 압박에서 잠시라도 떠나길 원한다고 썼다. 클린턴은 남부 지역에 할당된 네 명의 로즈 장학생 중 한 사람으로 최종 선발되었다. 외교위원회에서 상사로 모시고 있는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처럼 로즈 장학생이 된 것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밝고 확신에 찬 화술, 그리고 유머감각 덕분에 그는 인터뷰나 대중 연설에서 늘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빌 클린턴은 힐러리를 가리켜 ‘내가 인생에서 만난 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자’라고 말하곤 한다. 클린턴의 예일대 법대 동창인 힐러리 로댐은 탁월한 변호사인 동시에 아동복지 전문가였다. 공부에 매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했던 2년간의 옥스퍼드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온 클린턴은 1972년 예일대 로스쿨의 강의실에서 커다란 안경을 낀 힐러리 로댐을 만나게 된다. 힐러리는 당시 로스쿨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소문나 있었다. 법대의 남학생들은 너무나 똑똑하고 빈틈없는 힐러리를 경계했지만 클린턴은 바로 그 같은 똑똑함 때문에 힐러리에게 끌렸다.
로스쿨 졸업 후 두 사람은 각각 아칸소 로스쿨 교수와 매사추세츠의 아동보호재단에 취직해 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강력한 추천으로 힐러리는 아칸소 로스쿨로 직장을 옮겼고, 두 사람은 1975년 10월11일 빚을 내 산 집의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어디로 보나 젊고 평범한 부부였지만, 클린턴의 가슴속에는 더 큰 야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에 대한 야망이었다. 처음 나선 하원의원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워싱턴을 목표로 한 야심을 약간 수정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남부에 위치한 아칸소는 작고 보수적인데다 대다수의 미국인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였다(이 때문에 1992년 대통령선거 당시, 공화당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인들 모두가 아칸소 사람들처럼 평생 닭털이나 뽑아야 할 것’이라는 비방광고를 하기도 했다). 대신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아칸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 적절한 지역이었다. 클린턴은 아칸소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주유소, 교회, 잡화점에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목장에 가면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즉석에서 로데오 경기에 나서고 마을 축제의 토마토 빨리 먹기에 참가해 식탁 위의 토마토를 모조리 먹어치우기도 했다. 아칸소 주민들은 명석한 머리와 능란한 화술을 갖춘 동시에 이웃집 청년처럼 친근해 보이는 젊은 후보에게 매료되었다. 이런 장점을 등에 업고 클린턴은 약관 서른둘의 나이로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된다.
아칸소 주지사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유능한 행정가, 그리고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었다. 그는 아칸소를 다스리며 추진력 있는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발휘했다. 예를 들면, 1985년 일본의 산요전기가 아칸소 포레스트시티에 있는 TV 부품공장을 닫으려 하자 클린턴은 직접 오사카로 가서 산요전기 회장을 설득했다. 그가 내놓은 카드는 “철수하지 않으면 월마트에서 산요전기의 TV를 팔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산요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이후 8년간 월마트는 2000만대 이상의 산요 TV를 팔았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로 취임할 때, 부부의 외동딸 첼시는 두 살이었다. 첼시는 유치원 선생님이 부모의 직업을 물으면 “엄마는 변호사고 아빠는 전화하고 커피 마시고 연설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클린턴은 주지사 집무실에 딸을 위한 작은 책상을 가져다두고 첼시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그것은 그의 친아버지가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이상적인 남편과 아버지인 주지사의 모습은 아칸소 주민들에게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끔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클린턴은 지역방송국 기자인 제니퍼 플라워스를 비롯한 여러 여자와 외도를 즐기고 있었다.
‘소년 주지사’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주지사 정도의 직위에서는 그의 외도가 걸림돌이 될 수 없었지만 대통령선거라면 문제가 달랐다. 1992년, 걸프전 승리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7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클린턴은 민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그의 텃밭인 아칸소 주에서도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밀릴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클린턴에게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자신의 장기인 풀뿌리 민주주의 방식의 선거운동, 그리고 주지사로 쌓아온 행정가로서의 능력, 여기에 더해 12년간 계속되어 온 공화당 집권을 종식시키고픈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민주당 예비경선은 그의 예상대로 돌아갔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동안인 그는 ‘소년 주지사’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송거스, 브라운, 봅 케리 등 다른 후보들을 차근차근 물리쳐나갔다. 유권자들은 일단 그의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 능력에 매료되었고, 두 번째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그리고 여성과 유색인종을 배려하는 정강정책에 기울었다. 여성, 백인 블루칼라, 흑인 유권자들이 그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중간에 제니퍼 플라워스 스캔들, 마리화나 복용 문제, 병역기피 등 갖가지 악재가 터져 나왔지만 놀랍게도 대중의 지지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와 맞붙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화당 측은 ‘남부의 가난한 촌놈’으로 그를 비난했고, 보수적인 TV대담 프로그램은 클린턴을 불러놓고 20분 내내 혼외정사에 대한 질문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의 지지도는 더 올라갔다. 어차피 미국인 대다수는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중산층이며, 그런 중산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클린턴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도 매력적인 후보였기 때문이다. ‘뉴욕 포스트’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이처럼 유례없이 비난을 받고도 클린턴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가로서 그의 자질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점을 증명한다”라고 쓰기도 했다.
아칸소 주지사선거 시절 목장과 주유소, 잡화점을 방문했던 것처럼 클린턴은 부통령후보인 앨 고어 부부와 함께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오하이오,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를 거치는 1600㎞의 버스 유세에 나섰다. 군중이 모여 있으면 어디에나 멈춰 서 즉석 유세를 하는 방식의 선거운동은 클린턴의 이미지만큼이나 새롭고 신선했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세 번에 걸친 TV 토론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CBS TV에서 방송된 후보 토론회가 끝난 후, 시청자의 53%는 클린턴 후보가 가장 잘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중산층 유권자들은 TV에 비친 클린턴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친구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는 곧 그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반면, 조지 부시 후보가 잘했다는 평가는 25%에 불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