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2일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하 호암) 탄생 100년을 맞는다. 일본에서는 삼성의 창업자인 호암이 학문의 영역에 올라 있다. 게이오(慶應)대 종합정책학부 야나기마치 이사오(柳町功·49) 교수는 22년간 호암을 연구해왔다.

야나기마치 교수는 “지난 1세기 최고의 경영자”라고 호암을 평가했다. 지난 20일 야나기마치 교수의 연구실에서 2시간 동안 호암의 기업경영과 철학을 들었다.

-호암은 어떤 사람인가.

“호암 같은 경영자는 현재 일본엔 없다. 그런 스케일과 원대한 철학을 가진 경영자는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시대 미쓰비시(三菱)의 창업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
郎) 정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개발도상 단계에서 경제가 올라갈 때 그런 대단한 인물이 나타났다.”

-스케일이 크다고 했는데 어떤 특징이 있었나.

“호암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제조업을 일으킨 사람이다. 해방 후 전쟁 전까지는 외부에서 받은 원조가 아니면 무조건 무역이었다. 내부에서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삼성물산도 무역업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호암은 무역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제조업을 시작했다. 주변에선 왜 고생해가며 제조업을 하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호암은 ‘무역만 해서는 안 된다. 들여온 재료로 물건을 만들어서 국민에 공급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만든 회사가 제일제당이다. 당시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대 말 삼성전자를 만들었고, 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공업에 들어갔다. 늘 시대적 요청에 부응했다. 나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를 만들고 그 다음에 다른 분야로 다각화했다.”

-어떤 철학을 갖고 기업을 경영했나.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혼다 소이치와 호암의 공통점은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천연자원이 없다. 사람밖에 없다. 사람이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 이들의 기본 생각이었다. 호암은 삼성사관학교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인재를 키우고 육성했다. 이따금 인재들이 다른 데로 떠나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봤다.”

-일본 재계에선 호암을 어떻게 평가하나.

“호암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는 일본의 재계 인사들은 많이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삼성이 지금처럼 큰 회사가 되도록 씨를 뿌리고 환경을 만든 것은 호암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80년대 전두환 대통령 때 나카소네 야스히로(中<66FD>根康弘) 총리와 교류했을 때도 호암의 역할이 컸다. 그는 전면에 많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일 관계를 뒷받침한 공이 크다.”

-호암이 일본 경영인과 다른 점은.

“일본 대기업 사장들은 대부분 샐러리맨들이다. 이들은 매일 출퇴근해 하루 종일 회의하고 경조사를 쫓아다닌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이들은 일상 업무에 너무 바쁘다 보니 깊게 공부할 여유가 없다. 큰 비전을 못 그리는 것이다. 반면 호암은 깊고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어떻게 보면 좀 철학적인 구상도 했다. 오너이기 때문에 시간도 공간도 자유롭게 쓰면서 리더로서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경영인들은 그런 식으로 해야 세계 1위까지 올라가는구나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호암 경영의 강점을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한국 기업 전문가인 일본 게이오대 종합정책학부 야나기마치 이사오(柳町功) 교수가 지난 20일 도쿄 게이오대 연구실에서 삼성 창업자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의 경영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호암은 지난 1세기 최고의 경영자”라고 말했다. [도쿄=김동호 기자]
 
“호암은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중앙집권적인 톱다운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호암이 결정하지는 않았다. 상당 부분을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통상 오너는 모든 것을 챙기고 밑에는 권한을 주지 않는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는데 호암은 그렇지 않았다.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경영체제가 세계적으로 성장한 힘이 됐다는 건가.

“성장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오너 경영이니까 그만큼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반도체 산업은 일본·미국·유럽 기업들이 진출해 있어서 이미 과잉경쟁 상태였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대부분 소극적인 태도로 시장에서 빠져나갔다. 반면 삼성은 앞서 있는 일본 기업들이 후퇴할 때를 틈타 과감하게 투자했다.”

-어느새 삼성이 일본의 전기전자 기업을 추월했다.

“삼성이 1등이 된 이유가 있다. 경영적으로는 과감한 의사결정 시스템, 기술적으론 어느 정도 표준화된 기술을 갖고 대량생산 ·대량판매로 연결시킨 것이 삼성의 힘이었다. 당분간 업계 1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새로운 상품 기술을 개발하지 않으면 1위는 위협받는다. 역시 기술적·창조적 힘이 관건이다. 이런 것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호암이 삼성에 남긴 인재 제일의 경영철학과 도전정신이 필요한 이유다.”

-호암은 이 시대에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나.

“앞으로는 창조적 기술, 창조적인 상품이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아이팟과 같은 새로운 개념·상품·시장을 만들어서 슘페터처럼 창조적인 파괴도 해야 한다. 삼성이 투자할 만한 힘이 있었으니까 대규모로 투자했고, 그 결과 성공했다는 게 세상의 시각이다. 하지만 투자할 힘이 있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호암이라는 세기의 경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은 물론 일본의 젊은 세대들도 탄생 100년을 계기로 호암을 공부해볼 필요가 있다.” 

도쿄=김동호 특파원

◆야나기마치 이사오=일본 최고의 한국 기업 전문가다. 일본 게이오대 상학부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공부한 뒤 한국 기업을 연구하기 위해 1988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당시 삼성의 성장은 한국 경제 발전의 압축판이라고 판단해 그 뒤 22년간 삼성과 호암을 연구했다. 일본에서 한국 기업의 역사와 지배구조를 전공하는 교수들과 공동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2002년에는 미국 UCLA대 한국학센터에서 2년간 미국의 시각에서 한국 기업을 연구하기도 했다.
 


 

[출처] “호암은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제조업 일으킨 인물”|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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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어떻게 갔는지를 모르겠네요.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20년이 훌쩍 지나갔어요."

한 프로그램을 20년간 진행한 소감에 대해 배철수(57)는 이렇게 말했다.



배철수, '음악캠프' 벌써 20년
 8일 오후 여의도 MBC 방송센터에서 열린 'MBC 라디오 배철수의 음악캠프 20주년 기념 100대 음반 및 서적 출판 기자간담회'에서 DJ 배철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오후 6시)가 방송 20주년을 맞았다. 1990년 3월19일 처음 전파를 탄 이래 다른 팝 음악 프로그램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동안에도 꿋꿋이 버텨 어느덧 20세가 된 것이다.

8일 열린 '배철수의 음악캠프' 20주년 간담회에서 배철수는 "20년간 너무 행복하게 방송을 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혼자서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생각까지 가끔 한다"며 "그런데 내가 초년고생이 좀 심했기 때문에 그 대가라고 내 자신에게 얘기한다"며 웃었다.

 

그는 얼마나 더 진행할 것 같냐는 질문에 "아주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사퇴할 수는 있지만 지금 현재로서는 뚜렷하게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다"며 "그것은 청취자들이 결정하는 것이다. 청취자들이 내 방송을 계속 듣기를 원하시면 계속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배철수는 20년 장수 비결로 '철들지 않음'을 들었다.

"제 데뷔곡이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였는데, 그래서인지 계속 철없이 살고 있어요. '딴따라'는 철들면 안되는 것 같아요. 특히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진행자가 철들면 재미없을 것 같아요. 전 요즘도 제 또래들보다는 20~30대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는 방송 20주년을 기념해 '레전드: 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과 기념 서적을 냈다.

배철수는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스타일인데 20주년 맞으면서 일이 커졌다. '야, 이쯤에서 은퇴해줘야 진짜 멋있는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며 "사실은 지금 그만둬도 '호상()'이라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는 자신이 선정한 음반에 대해 "중학교 1학년 때 '실드 위드 어 키스(Sealed with a kiss)'를 듣고 처음으로 내 마음이 움직였다. 그 이후로 평생을 음악과 함께 해왔다"며 "음반을 골라서 내는 것에 대해 고민도 했지만 내가 평생 음악을 한 것을 생각하면 음반 100장 선정한다고 해서 누가 크게 야단치거나 욕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다만 제목에 '레전드(legend)'가 붙어 처음에는 무척 반대했어요. 너무 건방지잖아요. 그런데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간 배철수나, DJ 배철수는 결코 전설이 될 수 없지만 이 책에 수록된 100장의 음반은 세계 음악계에서 전설이라 불릴 음반이라 생각됐어요. 또 '배철수의 음악 캠프'라는 프로그램이 처음에 출발한 색을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20년 동안 해온 것은 어쩌면 우리 방송사에 전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제목을 그렇게 지지하지는 않아요.(웃음)"

음반 선정 기준은 평론가와 대중의 눈높이 중간지점으로 택했다고 밝힌 그는 각 음반마다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선정 이유를 달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코멘터리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했어요. 이 책이 팝 마니아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팝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제 코멘터리를 보고 한번 피식 웃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지난 20년에 대해 매일 최선을 다할 수는 없었지만 항상 즐거운 생각만 갖고 진행하려고 애를 썼다고 말했다.

"제가 정한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일단 내 프로그램에서는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나가는 음악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음반회사 친구들이 미는 음악이라고 틀어 준 적도 없습니다. 제가 들어보고 좋으면 틀어줬습니다. 또 1년 365일 항상 그렇지는 못했지만, 360일 정도는 즐거운 마음으로 앉아있었던 것 같아요. 내세울 게 있다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 지각 안 하듯, 저도 우등상은 못 받지만 개근상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20년간 한 번도 지각하거나 펑크낸 적은 없습니다."

그는 "그러다 보니 생활이 굉장히 폐쇄적이 되긴 했다. 밖에 나가면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만나는데, 그런 사람 만나기 싫어서 기분 좋은 사람만 만나니 교우 관계도 굉장히 축소되더라"면서도 "하지만 20년간 조금은 성장한 것 같다. 방송을 통해 각 분야 대가들을 만나 그분들의 삶의 철학과 자세를 배우니 느낀 게 많았다"고 말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는 20주년을 맞았지만 지난 20년간 국내 팝 음악 시장은 굉장히 축소됐다.

이에 대해 그는 "팝음악을 안 듣는 것은 우리 가요를 많이 듣는다는 것이니 굉장히 긍정적이라 할 수도 있다. 또 1980년대에 조용필 선배를 비롯, '위대한 밴드' 송골매 등이 열심히 했기에 그때 음악계의 대세가 가요 쪽으로 기운 것이 아닌가도 싶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는 "제가 팝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서 그러는게 아니고 지금 우리 가요를 이끌어 가는 친구들을 보면 다 팝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다. 그들이 결국 어른이 돼서 좋은 우리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라며 "세계 음악의 흐름에서 뒤처진다면, 세계로 열린 창을 닫는다면 곧 우리 음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전 제 프로가 한국 가요 발전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고 방송을 했습니다. 일반 청취자도 많이 듣지만, 제 프로는 음악 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그 친구들도 '음악 캠프'를 듣고 있으면 세계 음악계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군요."


 


[출처] 배철수 “신선놀음 20년…‘딴따라’는 철들면안돼” |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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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해방에 앞장섰던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이 12일 200회 생일을 맞는다. 링컨 탄생 200주년을 맞아 미국 전역이 기념 열기로 뜨겁다. 링컨 붐을 주도하고 있는 사람은‘링컨의 재탄생’으로 일컬어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그는 취임 연설에서 링컨 대통령의 연설문을 인용했으며 백악관 집무실에 링컨 초상화를 걸어 놓았다. 링컨은 바로 오바가가 닮고 싶어하는 대통령이다. 가난을 딛고 일어나 변호사가 되어 정치적 격동기에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점에서 오바마와 링컨은 비슷한 점이 많다.

링컨은 정치인뿐만 아니라 인간 승리의 성공 사례로도 본받을 점이 많다. 링컨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매우 심각하고 볼썽 사납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얘기꾼이었고 천부적인 연설가, 타고난 리더였다. 피를 끓게 하는 원대한 계획를 세우고 이를 하나하나 실천해 나갔다. 다음은 칼럼니스트 로스 보네인더(Ross Bonander)가 들려주는 ‘링컨에게 배우는 성공 비결’이다.

1. 말은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하라

미국 하원 의원과 메사스추세츠 주지사,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에드워드 에베렛(1794~1865)은 남들이 알아주는 유명한 연설가였다. 그가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유창한 언변과 수사를 동원해 두 시간 넘게 연설을 했을 때, 링컨은 바로 그 자리에서 3분도 안 되어 연설을 끝냈다. 에베렛의 연설은 거의 잊혀지고 말았지만 총 266 단어에 불과했던 링컨의 연설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유명한 구절과 함께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는 예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제외하면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연설문일 것이다.

[Tip] 프리젠테이션을 하거나 e메일을 보낼 때 말을 너무 장황하게 늘어 놓지 말라. 그것은 자만심과 고집의 표현이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메시지의 요점을 흐리는 결과를 낳는다. 이와 반면에 진솔하고 간단 명료한 표현으로 전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솔직하고 효율적이며 욕심이 없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2. 협박에 굴복하지 말라



 
 
링컨은 1865년 워싱턴 포드 시어터에서 공연 관람 도중 암살당하기 전 적어도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집요한 살해 협박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소 행동이나 정책 수립 과정에서 이를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Tip] 협박과 위협이 무서워 자신의 결심이나 입장을 바꾸지는 말라. 협박에 굴복하고 나면 자신이 일을 주도하고 협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유리한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3. 적과 가까이 하라

정치학자들이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는 기준 중 하나가 바로 인사(人事)다. 자신의 정책을 직접 수행해나갈 장관 등 아랫 사람을 어떻게 선별해 임명했느냐다. 링컨 정부의 내각 임명은 빈틈 없는 선택이었을뿐만 아니라 1860년 대선에서 후보로 출마했거나 출마할 가능성이 높았던 사람들을 총망라하다시피 했다. 에드워드 스탠튼, 사이먼 카메론, 샐먼 체이스, 윌리엄 슈어드, 에드워드 베이츠 등 대선 과정에서 자기와 맞서 싸웠던 사람을 무려 다섯 명이나 장관 등 요직에 임명하는 ‘포용 정신’을 발휘했다. 이에 반해 최근 4명의 역대 대통령들은 라이벌 가운데 기껏해야 한 두 명을 기용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금까지 빌 리처드슨을 포함해 3명의 반대파를 요직에 임명했다.

[Tip] 적과 가까이 하면 그의 동태를 예의 주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팀이나 부서, 회사 등에서 공동 전선을 구축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들의 능력과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도 있다.

4. 변화에 순응하라

미국 컬럼비아대 역사학과 에릭 포너 교수는 명쾌한 정치분석으로 유명한 오피니언 잡지‘국가(The Nation)’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간 링컨은 성장 잠재능력을 지난 위대한 정치가”라고 말했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보자면 링컨은 인종차별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평등의 원리에 반하며 인간의 노동에 대한 댓가를 받을 수 정당한 권리를 박탈한다는 이유로 노예제도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즉각적이고도 전적인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생각을 달리했다. 흑인 노예해방은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미국 남부 지역의 백인들의 ‘재산’손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었다. 남북전쟁이 한참 치열할 때 그는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노예해방이 어마어마한 정치적,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즉각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노예해방 선언으로 미국 남부지방의 경제는 피폐해졌고, 자신이 이끌던 북군(北軍)의 병력은 오히려 증강되었다. 20만명의 흑인 노예들이 북군에 가담했다. 링컨은 타이밍의 귀재였던 것이다.

[Tip]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행했던 대통령 당선 수락 연설에서“이것이야 말로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미국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우리나라는 완벽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변화에 순응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여라. 새로운 변화를 개척함으로써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기회를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한 발전 가능성은 열려 있다.

5. 리더십의 기회를 잡으라

링컨은 대통령의 역할에 대한 정의를 새로 내린 인물이다. 위기 때에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대통령 고유의 권위를 내세웠다. 그 가운데 모두가 대중의 인기를 끈 것도 합법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국회가 휴회 중일 때 군대를 소집해 전쟁을 했다. 이것은 명백하게 미국 헌법 제6조의 위반이다. 인신보호 영장 발부를 연기해 수천명의 적들을 감옥에 넣기도 했다. 이것은 정당한 법 절차를 요구하는, 같은 헌법 조항의 제5 부칙을 위반한 것이다. 링컨에게 의회란 미국 연방이 분열되고 나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통령을 국정의 최고 권위자로 격상시키고 다른 정부 기관은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돕는 역할로 격하시켰다. 그를 가리켜 독재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가 노예해방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으며 미국 연방의 분열을 막아낸 데 대해서는 아무도 할 말이 없다.

[Tip] 직무내용 설명서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리더십을 맡기려고 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특히 그렇다. 법규를 위반하거나 회사 정책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능한 해결책이 떠오를 것이다. 비현실적이거나 낡아빠진 정책에 얽매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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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에서도 대폭발 일으킨 빅뱅

 

데뷔 후 1년 만에 ‘거짓말’이라는 노래가 인기를 끌면서 대중은 빅뱅이 그저 그런 아이돌 그룹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빅뱅은 스스로를 ‘자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자가 발전형 아이돌’이라고 표현한다. 다섯 명의 멤버들은 그룹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솔로가수, 작곡가, 배우, 예능인으로 활동하며 숨은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래도 성에 안 찬 모양인지 이 다재다능한 다섯 남자는 출간 보름 만에 17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지난 1월 말 출간된 ‘세상에 너를 소리쳐’는 다섯 명의 빅뱅 멤버가 지은 ‘자기계발서’다. 그들은 이 책이 어쭙잖은 자서전이나 성공담을 엮은 책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자신들이 데뷔 과정에서 겪은 고난과 역경을 솔직히 써내려갔을 뿐이라고. 그리고 자신들처럼 ‘꿈을 향해 매진하라’고 소리친다.


빅뱅은 아이돌 그룹의 전형적인 요건들을 갖추지 못했다. 눈을 뗄 수 없는 환상적인 외모의 ‘얼굴마담’도 없고, 폭발할 듯한 가창력의 소유자도(?) 없다. 하지만 발표하는 곡마다 인기를 끌며 지난해 음반 판매량이 50만 장에 달했다. 이에 힘입어 멤버들은 솔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구수한 매력을 가진 대성은 ‘날 봐 귀순’이라는 트로트를 발표해 주목받았고, 태양과 승리 역시 솔로 활동을 통해 가려져 있던 개성을 마음껏 표출했다. 그룹 내에서 가장 준수한 용모를 가졌다 할 탑(T.O.P)은 드라마에 출연해 배우로서 신고식을 치렀고, 리더인 G-드래곤은 빼어난 작곡 실력으로 빅뱅을 싱어송라이터 그룹으로 등극시켰다.


가요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는 평가가 과하지 않은 빅뱅이지만 그들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집안의 반대, 주위의 불신, 불투명한 미래 등 가수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게다가 빅뱅은 서바이벌 형식의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데뷔 과정이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 힘든 시기를 견디게 한 힘은 가족들의 응원, 음악을 향한 열정과 고집 그리고 상투적이지만 언제나 고결한 꿈과 희망이었다. 함께 혹은 따로 있어도 여전히 근사한 다섯 남자 빅뱅,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실력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G-드래곤


빅뱅의 리더 G-드래곤은 스무 살 청년이지만 여전히 소년의 외양을 갖고 있다. 깨물어주고 싶은 순한 미소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돌려 말하는 것 같다. ‘거짓말’ ‘하루하루’ 등 빅뱅의 대표곡들을 작곡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마냥 해사하게 웃고 있을 때면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도련님’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빅뱅을 갑자기 뜬 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저희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는지 책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저희를 제대로 알리고 싶었거든요.”


무엇이든 확실한 게 좋아 놀 때는 여한 없이 놀고, 일할 때면 또 온 신경을 집중해 매진한다는 G-드래곤은 대충주의를 끔찍이 싫어한다. 그런 성정은 하루 12시간 춤과 노래, 운동과 외국어를 배우는 혹독한 연습생 생활 6년을 버티게 한 동력일지도 모른다.





▲ 빅뱅은 멤버들 스스로 만든 아이돌이라고 말하는 팀의 리더, G-드래곤.

1995년 ‘꼬마 룰라’로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YG엔터테인먼트와 인연을 맺은 G-드래곤의 미래는 마냥 밝아 보였다. 낙천적이고 맹랑했던 꼬마 권지용(G-드래곤
의 본명)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빅뱅의 멤버를 뽑는 서바이벌 오디션이 진행되면서 그는 노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을 음악 작업으로 달랬고, 양현석 대표가 내준, 일주일에 한 곡씩 작사·작곡을 해오라는 숙제도 꼬박꼬박 하면서 실력을 쌓아나갔다. ‘빅뱅은 실력파라기보다 노력파에 가깝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아이돌이라기보다는, 본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자가 발전형 아이돌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G-드래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며 꿈을 키울 청소년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위치에 섰다.


“저희가 선배 가수들을 보며 꿈을 키웠듯이 어디에선가 빅뱅을 보면서 꿈을 키우는 친구들이 있길 바랍니다. 꿈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린다면 지금의 빅뱅보다 더 나은 위치에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자신을 믿고 꿈을 믿어라, 대성과 태양


지금은 누가 뭐래도 국내 최고의 인기 그룹이지만 한때 빅뱅의 멤버 중 두 사람은 집안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패밀리가 떴다’에 고정 출연 중인 대성과 솔로 활동으로 자신만의 확실한 매력을 선보인 태양은 데뷔 전 부모님을 설득하면서 자신들의 꿈을 향한 열정을 재확인했다.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달리 집에서는 그저 조용한 아들이었다는 대성은 특히 부모님과의 갈등이 심했다. 애초에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대성(大聖)이라는 이름마저 ‘큰 목소리로 말씀을 전파하라’는 뜻을 담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던 완고한 아버지도 결국 아들의 황소고집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부모님을 설득하기 전에 ‘과연 내가 음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러 차례 자문해 봤어요.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기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죠. 이번에 출간된 책에서 가수 되기를 반대하던 시절의 대목을 읽으신 부모님이 뒤늦게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힘든 시간 동안 대성을 견디게 한 또 하나의 버팀목은 긍정의 힘이었다. 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역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 데뷔 전에는 집안의 반대, 데뷔 초에는 성대 결절 때문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던 대성. 그래도 그는 언제나 웃고 또 웃었다. 그 모든 것이 꿈 하나만 좇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좌)부모님의 반대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대성. (우)앞으로 더 멋진 음악을 선보이겠다고 자신하는 태양.

“빅뱅은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어요. 그 시간들이 너무 힘들었지만 꿈을 잃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지금도 자신을 믿고 꿈을 향해 나간다면 무슨 꿈이든 다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요.”


리더 G-드래곤이 ‘죽을 때 마지막으로 그 자리를 지켜줄 단 한 명의 친구’로 꼽는 태양 또한 집안의 반대라는 난관에 부딪쳤다. 가수가 되기 전까지는 미덥지 못한 아들이었던 태양. 책이 출간된 후 그의 어머니는 “책에 나온 대로만 열심히 살아간다면 엄마는 아무 걱정 없겠다”며 이제는 아들을 든든하게 생각한다.


“막연히 ‘하고 싶다’는 의욕과 희망적인 생각만 갖고는 안 돼요. 부모님을 설득할 만한 계획을 세우고 의지를 보여드리면 부모님도 언젠가는 허락하실 수밖에 없죠. 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제 꿈과 그 꿈을 어떻게 이루어갈지에 대해 계속 말씀드리면서 설득했어요.”


그리고 이제 태양에게는 함께하는 멤버들이 있는 한 앞으로 더 멋진 음악을 보여줄 자신감까지 생겼다. 


“가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정말 음악을 좋아해야 한다는 거죠. 그냥 가수가 아닌 진정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즐길 줄 아는 가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가족이 있기에 지금이 있다, 탑과 승리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고현정이 ‘뭘 좀 아는, 느낌 있는 매력남’으로 추켜세웠던 탑(T.O.P). 그는 빅뱅의 맏형이면서 뚜렷한 이목구비와 강인한 눈빛, 탁월한 목소리로 팀에서 가장 먼저 대중에게 주목 받은 멤버다. 2007년에는 드라마 ‘아이 엠 샘’에서 ‘학교 짱’ 역할을 맡아 배우 신고식을 치르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의 유명한 래퍼’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탑은 ‘랩을 실컷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YG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이 되었고, 빅뱅에 합류해 바람대로 실컷 랩을 하고 있다. 그룹 내에서 확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는 탑이지만 그 역시 혼란스러운 시절을 겪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술과 담배로 이성을 마비시키며, 형체도 알 수 없는 세상의 불의와 싸우기 위해 두 눈에 독기를 품었던 지난 기억들’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청소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정해진 나 자신은 없다는 것을요.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겁니다.”


흔들리던 탑을 붙들어준 또 다른 이름은 가족이다.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응원하고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이 계셨기에 힘들어도 앞만 보고 달려올 수 있었죠.”





▲ (좌)자신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조언하는 맏형, 탑.(우)‘타고난 자신감’으로 역경을 이겨낸 팀의 막내, 승리.

얼마 전 솔로 활동을 시작하며 숨겨진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팀의 막내 승리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친다. 나머지 멤버들이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지’ 의아해 할 정도. 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처음 기자회견을 갖는 거라는데 가장 여유로운 사람 역시 승리다.


“저희가 이렇게 많은 취재진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갖기까지는 멤버들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어요. 정말 노력 면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형들이 있어 다행이에요. 형들이 잘할 때마다 저 역시 뒤쳐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죠.”


YG엔터테인먼트의 한 관계자는 ‘태양이 부정적인 평가를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승리는 칭찬을 동력으로 삼는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타고난 자신감’으로 무장한 승리이지만 그도 한때는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고향 광주에서는 알아주는 재주꾼이었는데, 서바이벌 오디션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실력을 절감하며 좌절한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가수 되기를 포기하라고도 했다. 승리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오늘 이 눈물을 쏟게 한 사람들한테 떳떳하게 보여줄 거야. 내가 그렇게 형편없는 놈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밥은 못 먹어도 자존심은 있어야 사는 놈’이라고 말하는 승리의 자신감은 부모님의 응원 속에서 지금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부모님께서 책을 보고 ‘아들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엄마, 아빠도 분발할게’ 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저를 보면서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니 뿌듯했죠. 그런데 죄송하게도 엄마, 아빠 더 분발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앞으로 더 열심히 할 거거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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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 만능주의 한풀 꺾이면서 인기·'副'자 '次'자 붙은 직함 뛰어넘어
'2인자'라는 자체가 훌륭한 목표

고어·발머·이학수가 훌륭한 2인자 ·맨유 박지성·선덕여왕 출연 고현정도




일러스트=박상훈 기자 ps@chosun.com
윗사람 모실 때는 "선배니~임" 하는 콧소리에 안면 근육을 총동원한 웃음과 온몸을 부르르 떠는 아양을 정성껏 버무리고, 후배들에게는 "똑바로 해 이것들아…, 미친 거 아니야?"라고 호통치며 군림하는 코미디가 요즈음 큰 화제다.

'분장실의 강선생님'이란 이름의 이 코너는 상사와 후배 사이에서 끊임없이 표변하는 '밉상 2인자(안영미씨)'를 웃음의 요체로 삼는다. 이 패턴은 매주 반복되지만 대중들은 식상하지 않은 채 발을 구르며 폭소한다.

왜일까? 우리 사회 전역에 퍼진 서열과 권력의 문화, 그리고 그 공간에 창궐하는 2인자들의 행태와 변이(變異)를 이 코너가 절묘하게 풍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사가 부하를 칭찬하자마자, 직전까지 무시하던 부하를 곧바로 칭송하는 2인자의 돌변(突變)은 이 풍자의 백미이다.

내 직장, 내 모임에 한두명은 꼭 있는 '그분'들을 떠올리며 미소 짓게 만드는 공감대가 이 코미디의 핵심 경쟁력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2인자는 갈수록 점점 더 다양하게 변주(變奏)되는 인기 코드이자 화두(話頭)이다.

2인자는 더 이상 단순히 한 조직의 '부(副) 자', '차(次) 자' 붙은 직함 혹은 최고위직 바로 밑의 고위직만을 뜻하지 않는다. 직능 다양화와 더불어 웬만한 조직에서는 이제 예전처럼 모든 사람이 피라미드의 정점만을 향해 달리지 않는다. 그래서 '2인자'는 '1인자 바로 밑의 직위'란 뜻에서 '조직 곳곳에 일상적으로 상존하는 상하관계 중 아래쪽 구성원'의 지칭으로까지 의미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나아가 '하루빨리 1인자에 오르고 말겠다'는 출세 만능의 세태가 한풀 꺾이고 '가늘고 길게'를 표방하는 현실적 안주 전술이 폭넓게 지지층을 확보하면서, '2인자'는 '1인자로 가는 중간 교두보'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훌륭한 목표로의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바야흐로 '2인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우리 대부분은 생활 어디서든 한번쯤 2인자이자 참모가 되게 마련이다. 2인자는 이제 개인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이자 지혜와 전략의 기지로, 조직에는 번성과 융화의 관건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박지성은 2인자 시대의 상징

컨설팅회사인 올리버와이먼의 정호석 서울지사장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모범적 2인자의 상징으로 꼽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박지성 선수"라고 지목했다.

박지성이 속한 구단은 세계 최고의 명문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맨유의 1인자라면 역시 루니나 호날두 같은 세계 정상의 스트라이커 혹은 '카리스마의 지도자' 퍼거슨 감독을 들 수 있다. 박지성은 1인자를 돕거나 1인자의 지시를 받는, 하지만 그 역할은 구단 전체의 성과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전형적 2인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박지성은 이 구단에서 묵묵히 그러면서 정말 경이로울 정도로 열심히 뛰는 선수로 통한다. 퍼거슨 감독의 용병술에 따라 수비형 포지션과 공격형 포지션을 오가지만 그는 공격을 주로 맡는 날도 수비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다.

박지성의 가치는 일반적 축구 중계 화면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만을 따로 찍은 비디오 화면을 볼 때 비로소 두드러진다. 정 지사장은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는 박지성을 보면서 감독이나 동료들은 깜짝 놀라게 마련인데, 그런 식으로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어느 날 문득 공헌이 느껴지는 감동'이야말로 바로 2인자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말했다.

박지성에게 '1인자의 자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 대표팀의 캡틴(주장)이자 전방 공격수로서 중요한 대목마다 골을 기록하며 월드컵 본선행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맨유에서는 자신에게는 적합하고 남들은 흉내 내기 힘든 위상으로 옮겨 '온리 원(only one)의 가치'를 창출하며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2인자의 처신이 헷갈린다고? '내가 만약 성실하고 과묵하고 겸손하고 유능한 박지성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떠올려보면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조언이다.

■ 조형기·고현정·허영만의 2인자 역설

'2인자여서 더 행복하다'는 역설이 2인자 시대의 대표적 현상이다. 올해 상반기 방송가에서는 '1인자 MC들이 퇴출당한 아침 토크쇼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2인자 MC 조형기씨'가 잔잔한 화제였다. 불황의 여파로 몸값 비싼 프리랜서 진행자들이 쫓겨나는 와중에서도 그만은 살아남은 것이다. 바로 2인자 처신전략 덕분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TV에서 "간판은 계속 바뀌어도 나는 늘 보조"라고 투덜대는 식으로 웃음을 안겨줬지만 실제로 그는 제작진의 토크쇼 전면 배치 권유를 완강히 거부해왔다고 한다. 한 중견 PD는 "조형기씨는 예능 오락 PD들이 꼽는 최고 두뇌의 진행자"라며 "바람을 맞고 책임을 져야 하는 1인자 자리를 고사하고 양념 같은 2인자로서 강력한 경쟁력을 축적해온 덕분에 간판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획득했다"고 평가했다.

방영 중인 사극 '선덕여왕'에서 '미실'이라는 2인자 배역을 고른 고현정씨의 선택도 비슷한 맥락이다. 고현정씨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당연히 선덕여왕 역을 맡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첫 사극에 도전하는 고씨는 드라마 제목과 동명(同名)이어서 더욱 시청률 부담이 많았을 1인자 역을 고사하고, 2인자의 악역을 자임했다. 현재까지 그녀의 선택은 적중하고 있다는 평이다.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다양한 소재를 소화해온 것으로 유명한 당대의 만화가 허영만씨는 평소 인터뷰에서 "나는 항상 2인자"였다고 말한다. "1970년대에는 이상무씨, 1980년대에는 이현세씨에 밀려 1인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인자였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장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 게 허영만씨의 회고이다. 늘 수성(守城)에 신경 써야 하고, 실패의 부담이 크며, 때로는 '자만의 덫'에 빠지기 쉬운 1인자보다 2인자의 공간이 훨씬 자유롭고 널찍하다는 의미다.

■ 대표적 2인자 저우언라이와 이학수

전문가들이 성공적 2인자로 꼭 거론하는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을 주군으로 모신 저우언라이(周恩來)이다.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저우는 자신에게는 없는 카리스마를 마오에게서 발견한 후 자청해서 그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저우는 늘 마오의 반걸음 뒤에서 '영원한 2인자'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실제로 중국을 이끈 두뇌는 저우언라이였다고 평한다.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이 없었다면 중국 혁명은 결코 불붙지 않았겠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다 타서 재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왼쪽부터) 앨 고어, 스티브 발머, 이학수, 저우언라이, 조형기, 고현정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도 한국 1등 기업의 신화를 1인자와 함께 쓴 '뛰어난 2인자'로 꼽힌다. 이 전 부회장은 '오너 1인자'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직관·내향·은둔'이란 특성을 엄청난 성실함과 과감한 조언으로 훌륭하게 보완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학수 전 부회장이 이건희 전 회장에게 사재(私財)를 내고 삼성자동차를 털자고 적극적으로 조언하면서 삼성은 삼성차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훨훨 날 수 있었다는 진단이다.

이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가 이룬 궁합과 비슷하다. 이철희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본부장은 저서 〈1인자를 만든 2인자들〉에서 "게이츠가 MS의 두뇌라면 발머는 MS의 심장이고, 게이츠가 기술자·전략가·총사령관이라면 발머는 사업가·책사·야전사령관"이라고 비유했다. 보스와 참모, 1인자와 2인자가 이렇게 능력과 적성의 아귀가 맞을 때 그 기업과 조직은 최고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디즈니의 전(前) CEO 마이클 아이스너도 2인자 프랭크 웰즈가 헬기 사고로 죽을 때까지 행복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웰즈와 편안한 동료처럼 지낸 아이스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웰즈의 사무실을 하루에도 10번 이상 찾으며 조언을 구했다. 아이스너는 포천(Fortune)지와의 인터뷰에서 "웰즈는 '결점만 보는 사람' 역할을 하면서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디즈니의 경영 목표인 '최고 아이디어의 성공 보장'을 도왔다"고 말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한 앨 고어 부통령은 '미국 부통령의 역사를 새로 쓴 인물'로 꼽힌다. 고어는 강력한 비전과 조언을 통해 클린턴의 변덕과 스캔들을 감싸 안으며 미국의 기술·환경·무역정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가를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는 클린턴보다 늘 카메라에 작게 잡히도록 신경 쓰는 식으로 현명하게 주목을 피하면서 2인자의 선을 넘지 않았다.

■ 2인자가 잘해야 양뇌형 기업 가능

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상상력과 직관의 우뇌'와 '이성과 논리의 좌뇌' 분류법이 관심을 끌고 있다. 컨설팅사인 베인&컴퍼니는 최근 "업(業)의 번영을 위해 경영에서 양뇌의 활성화가 점점 긴요해지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았다.

혁신의 대명사로 불리는 애플(Apple)사의 간판 스타는 스티브 잡스. 하지만 애플 신화의 궤적을 되짚어보면 최고운영책임자(COO)인 팀 쿡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우뇌의 잡스와 좌뇌의 쿡이 행복한 조화를 이룬 것이다. 국내에서는 우뇌형으로 평가받는 구본무 LG 회장의 곁에 '좌뇌형 경영인' 남용 LG전자 부회장이 절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광훈 중앙대 교수(경제학)는 "최근에는 R&D의 D가 'Development'가 아니라 'Design'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21세기는 기업 경영에서 우뇌적 기능, 곧 통섭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며 "1인자인 오너를 바꾸기 힘든 한국 기업의 특성을 감안할 때 '컵 모양에 따라 변하는 물' 같은 유연성이 2인자에게 점점 더 요구된다"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 전문업체인 '오피스h'의 황의건 대표는 "대중들이 '분장실의 강선생님'의 괴팍한 2인자를 보며 공감한다는 사실은 아직도 그런 2인자들이 넘쳐난다는 방증"이라며 "고품격 고성능의 세련된 2인자가 늘어야 우리 경제와 사회의 질적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훌륭한 기업엔 훌륭한 2인자 있어|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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