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그가 밀려나던 날 

멍멍이가 일없이 왜가리를 쫒기도 하고 

자전거 바퀴살이 묶인 채 산책길에 뒹글기도 하면 

도시에 더 무슨 반가운 것이 있으랴한다 

꺼슬한 청춘들이 얼어오는 두 발로 지치기도 하고 

부족해진 점심에 애닳도록 간식을 두리번하다

공원엔 김날리는 트럭들에 기름내 들썩이다

이것은 가는것이다


어찌하든 한 시간 끄적이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멍하다.

평전들을 서렁서렁 넘기다보면 이름이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잊지 못할 저녁, 아버지는 열여덟 살쯤 된 벤야민을 루더슈트라세의 이 나이트클럽에 데려가 위층 칸막이 좌석을 마련해주었고, 그 명당자리에서 벤야민은 몸에 달라붙는 흰색 세일러복 차림으로 바에 앉아 있던 창녀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았다. 벤야민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에로틱 판타지를 좌우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모든 수요를 사업과 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이렇듯 가족의 유흥 수요까지 사업과 연결지으려던 것에 대해 아들 벤야민은 "무모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투기 기질"과 긴밀히 관련된 무모함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런 게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벤야민이 회고하는 아버지는 세도와 위엄을 지니면서 동시에 점잖고 정중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감식안을 회고하는 대목, 예컨대 아버지가 와인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구두 바닥이 너무 두껍지 않으면 발볼로 카펫의 품질을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당시 이미 가정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했던 전화로 통화 중일 때의 아버지는 가끔 평상시의 온화함과 상반되는 험악함을 드러냈다. 훗날 벤야민은 자신의 진로 문제로(그리고 처자식 부양의 책임을 회피하고 부모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된 것과 관련된 문제로) 아버지와 여러 차례 심하게 다투는데(벤야민 세대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헝악함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 평전』)

 

면직업계의 거물이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상류층의 호사 취미인 여우사냥을 즐겼고, 멘체스터증권거래소 회원이자 잘나가는 독일계 이주민 클럽인 실러연구소의 운영위원장이었다. 매력적인 스타일리스트답게 엥겔스는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한껏 누렷다. 바닷가재 샐러드,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 샤토 마고, 체코식 필젠 맥주와 비싼 여자들 등등. 그러는 한편으로 40년 동안 카를 마르크스를 먹여 살리고 그의 자녀들을 돌봐줬으며, 마르크스의 분노를 다독여주었다. 동시에 『공산당 선언』의 공저자이자 후일 마르크수주의로 알려지게 되는 사상의 공동 설계자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데올로기적 동반자 관계의 반쪽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20세기 들어 마오쩌둥 주석의 중국에서부터 동독의 슈타지 국가까지, 아프리카의 반제 투쟁에서 소련까지 지구촌 인류의 3분이 1이 다양한 형태로 마르크수주의라고 하는 매혹적인 철학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정책을 설명하고 비행을 정당화하거자 정권 유지를 위해 자주 거론한 인물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엥겔스였다. ... 그는 때로는 잘못 해석되고, 때로는 잘못 인용되기도 했다. 『엥겔스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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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것은 쓰여진 것이지요. 특히 소설의 경우 쓰여지지 않은 소설은 존재하지 않은 셈이지요. 하지만 시는 쓰여지지 않더라도 존재한다고 저는 신념으로서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 시는 거의 모든 만인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가 지니고 있습니다. 한평생 평교원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거니와, 주방에서 조리하면서 식칼을 쥐고 한평생 지내는 사람도 있고, 선로 인부로 지내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요. 그 삶을 보내고 있는 방식이, 자신이 생애를 거기에서 열중하고 있는, 걸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그 사람의 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것이 이미 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나에 관한 한, 일본어로 밑천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일본어를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일본인에 대한 복수인 셈이고, 복수라는 것은 적대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경험을 일본어라는 광장에서 서로 나누고 싶다는 의미에서의 복수입니다.


- 「김시종의 시와 '자서전'」『조선과 일본을 살아가다-제주도에서 이카이노로』를 중심으로 중에서-




 《엑스맨 ; 아포칼립스》이 끝나가는 부분이다. 찰스 자비에 교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진, 네 힘을 쏟아내! 진이 사력을 다해 괴성을 뿜어내자 사방이 거대한 불꽃으로 덮였다. 돌이 갈라져 흙이 되고 하늘은 그 빛을 잃었다. 고대 악마는,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어라는 말을 남기고 모래성이 무너지듯 사그라들었다. 


인상적인 장면이다. 돌연변이 엑스맨들은 자신들이 가진 초능력을 평범한 지구인을 위해 쓰면서 힘의 출처를 정상화 시키려고 한다. 반면 악마는 고대의 질서로 지구를 되돌려놓기위해 지구인을 희생시키려고 한다. 이 드라마는 두려움의 연쇄에서 극적 전화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혼돈, 괴물같은 힘을 지닌 돌연변이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 검은 빛에 흡수되는 사람들. 


진에게 두려움에서 해방되면 네 힘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자비에 교수는 마치 프랑스 혁명 전야의 장군과 같다. 너희들을 막고 있는 것은 그림자다, 두려움이다, 그런 약한 것들로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엑스맨은 지구 인간이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다.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 자, 모든 이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자, 강철을 움직이고, 레이저로 물건을 녹이고, 번개를 일으킨다. 신의 힘이 얼마일까를 생각하며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점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능력을 모두 합해봐야 신과 비슷할 뿐 신의 자리에 앉지 못한다. 엑스맨이 비로소 신이 되는 순간은, 진이 고대 악마를 제거하며 얻게된, 순수한 파괴의 힘을 소유하게 되면서다. 엑스맨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생산하는 지배자가 되었다.   


진은 자신의 초능력을 두려워하며 갈등을 겪고 있었고 마침내 혼란이 파괴되며 진 스스로를 살아갈 수 있었다. 초능력이 무능력으로 변환되는 순간 진은 두려움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영화는 말한다.'순수한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힘이 두려움이다.   


일본으로 밀항을 감행했던 조선인 김시종이 겪어야 했을 두려움과 갈등은 이중 언어의 문제에서 더 가중되었다. 조선의 감각으로 길어올린 김시종의 시가 일본어로 발표되었을 때,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은 각각 서로 다른 당혹감과 이질적인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김시종의 결단은 '재일하는 일본 내 조선인' 어느 하나로도 갈등하지 않고 있다. '시를 살아가다'가 김시종의 삶이며,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제 스스로를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김시종의 시는 '두려움'이 없기에, 더 이상 시인의 길을 파괴하지 못한다. 그런데 진은 시로 살아가고 있을까. 


어떻게든 1시간 글쓰기가 종료되었다. 그냥 올린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삶이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공연한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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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不忘


어느 시대든 이러한 꿈을 향한 측면, 즉 어린아이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전 세기에 이러한 측면은 아케이드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의 교육이 전통 속에서, 즉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꿈을 해석해준 데 반해 오늘날의 교육은 아이들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하나의 전례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속한 세대가 집단적 기억을 위한 신체적, 자연적 보조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전 세대보다 더 가여운 상태로 방치된 채 고독하고 산만하며, 병적인 방식으로만 아이들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나는 곧잘 쪼잔한 일에 빠져들어 앞뒤 가릴 것 없이 묻곤 했다. 곤경에 이르고서 이제 그 버릇을 고치겠거니 하겠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른바 '싹수가 노래' '싸가지'도 요령도 없는 종자였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대인관계가 없어, 그 대꾸들은 책을 향해 날아가고, 침묵 속에서 대갈들의 기미만 읽을 뿐이다. 공들여 돌이키면 조잡한 일이었고, 들이댔던 질문들도 특정 인물에 닿지 않았지만, 크고작은 파란을 일으켜 제 신세를 구부려뜨려왔던 것이다. 그 불망, 몇 개의 기억들을 불러와 <주체와 구조-사목 권력의 양상>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불충분하더라도 제 짝이 맞춰지고, 너덜거리고 바래버린 상태로 '형태를 잃게' 되었으면 한다.


국민학생 어디쯤, 《양치기 소년》을 수업시간에 들었다. 소년은 양을 지키는 일을 한다. 늑대가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소년은 어느 날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고,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소년의 거짓말이었다. 그 후로도 양치기 소년은 또 다시 거짓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지쳐갔다. 그러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힘껏 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 놈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양들은 늑대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이야기로 듣고나서, 나는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급하게 캐물었다. 소년이 마을에서 쫓겨났나요, 감옥에 갔나요, 마을사람들은 왜 소년을 도와주지 않아요? 왜 거짓말을 했대요? 내 다급한 재촉을 가뿐히 노려보고 난 뒤, 그 노련했던 선생은 거짓말 하지 않기, 어른들 말 잘 듣기, 약속 지키기 등의 훈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나는 양치기 소년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밤낮으로, 마을 밖에서 홀로 양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은 매일 거짓말을 한다. 이야기는 너무너무나 불완전했다.


어떤 밤 양치기 소년의 꿈을 꾸었다. 거적을 두르고 작대기만 가진 양치기 모습만 비추기도 했으나, 대개는 사연을 갖고 꿈 속을 찾아왔다. 내 꿈 속에 나타나 호소하던 소년은 거짓말 했던 걸 숨기지 않았다. 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열던 날, 등성에 서서 지켜봐야만 했던 소년이 일부러 심술나고 질투심에 가득 차 외치면서 거짓말이 시작되었단다. 


어떤 날은 실제로 나타났던 늑대들이 마을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날 꿈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게, 온힘을 다해 “저기 늑대가 도망가고 있어요 보세요 저기요저기” 외치는데 말소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비명소리만 내다가 깨어났었다. 


더러 다친 양을 도와주려고 마을 사람들을 꾀어 낼 거짓말을 했다 한다. 아주 가끔은 너무 심심해서 늑대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늑대가 출현하길 바랐다는 마음을 전하는 소년이 불쌍해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꿈이라는 것도 잊고, 성심껏 대꾸를 해주곤 했는데, 양들과 친해지라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놀이같은 걸 일러 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혼자 보내지 말았으면 했고, 실제 일어난 일 마냥 늑대의 출현을 알리기도 했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멈출 수 없었듯이 나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꿈 속에서조차.


머리통이 크고 나서는 양치기 소년의 꿈은 더이상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불쑥 깊은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학 책을 읽다가, 정신분석에 대해 배우다가, 페미니즘의 계보를 찾다가 문득 나타나 묻곤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라면 양치기 소년/소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 불망의 꿈들은 무한 재현의 미디어, 이미지로서 정치, 이야기로서의 정체성이 범람하던 시대의 사소한 반영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공동체적 시선과 감각으로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지 못한다. 양치기 소년이 이솝 우화 속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집단적 결속과 사회화의 문제로 받아들였어야 한다. 개인을 내세우기 위해서 보편을 특수화로 안내하는 일관된 질서와 방법을 동원하려는 의지를 가졌어야 한다. 내면에 신이나, 위인, 민족이든 또는 스승을 지녔어야 한다.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준거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만이 원칙이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땅에 자연이 생성될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나의 문제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꿈 속의 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을 합당한 행동으로 이끌어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하는데만 전전긍긍했다. 따뜻한 보호 속에서 생활하고 싶음이 내가 가진 소망이었었나 보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보호가 그냥 올 리도 없는데, 마을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양치기 소년 읽기 매뉴얼의 문제는 나의 고질적인 병의 문제이다.


양치기 소년을 놓지 못하는 한심함은 종결을 두려워하는 시대의 영향도 있다. 어느 버전, 어느 시즌에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텐데 후속작을 계속 만들고 있다. 양치기 소년에 대한 변론이 비루하고 공황에 빠진 내 삶에 대한 변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면죄부를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가 도대체 뭐가 면죄부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나는 불안장애에 빠졌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꿈으로 만났던 양치기 소년이 맹랑한 대갈만이 아니듯 이 글의 최후도 그러하길 바란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점은 사회를 불변항의 시스템이라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대중이 아닌 '사회'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꿈 속의 양치기도 마냥 무시하기에 무겁다. 만약 질문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꿈 속에 선 양치기 소년은 반복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즐기는 종자가 아니었다. 늑대를 불러내 공동체를 와해하는 흑마술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들판을 가로질러 잃어버린 마지막 양 한 마리를 찾는 '예수'처럼 결연하기도 했다. 양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사고를 치더라도 양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불안장애 이전이다. 지금부터는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의 병상기록이라고 봐도 좋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양치기 소년 읽기의 마지막 매뉴얼을 낭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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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어가는 1시간 끄적이기] 오늘은 6시 32분까지.

이전 글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이어가기. 


필의 22일이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필에게 23일이 22일보다 안도할 수 있는 날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필에게만 머무르는 하루가 문제다. 22일 하루만 넘겨보자!


영화가 말하는 이 판타지스러운 하루의 되풀이는, 과장스러운 표현이겠지만, 고상한 시간의 게임이다. 필이 넌더리를 내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 하루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 아는 것'을 담은 눈은 더이상 삶의 빛을 목격하기 힘들다는 법칙 떄문이다. 인간이 죽음 앞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허무 속으로 끌려들어가며 절망적으로 휩쓸릴 때 대지는 냉각의 시간이다. 만 년의 빙하 위에서 서성이게 된다.


과학의 진보가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 놓고, 다시 하루 월 년으로 묶어 놓았다. 한 사람의 일생은 연결되고 나아가는 시간의 합이며, 단단한 대지라는 위에 건축된다. 삶이 분모가 되고 하루는 n분의 1이 되었다. 인간은 충실하게 그 하루를 더해가며 성장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간단하다. 22일 아침 6시 라디오 방송은 23일 아침과 다르다. 달라지는 것은 시간이고, 그 시간이 '흘러야' 꽃이 피듯 개화할 가능성이 피어난다.


과학의 시간은 때로는 n분의 2의 하루를 혹은 n분의 100의 하루를 구축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의 하루처럼 n분의 0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시간의 게임에 휘말리게 되며 잃게 되는 많은 것들은 잃어버린 0의 시간이 있다고 믿으면서 시작된다.


필의 시간은 대지에 묶여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흐르지 않는다. 묶여버린 인간의 시간은 블랙홀처럼 하루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버린다. 여관주인의 친절한 인사도, 따뜻한 아침 식사도,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도, 차갑고 상쾌한 대기도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리고, 급기야 느낄 수가 없다, 감각할 수 없다. 필은 어떻게든 '하루'를 회복하려고 한다. 그 의욕으로는 시간의 마법을 풀지 못하지만, 친밀성을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쉬이 이어진다. 냉각된 대지 위를 서성이다가 언 손을 비벼 얼음을 녹인다. 택도 없이 얼음은 건재하겠지만, 비비는 손, 맞잡은 손이 있는 한 얼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비로운 시간 속에서 사랑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마법이다.


필의 결말을 좋아할 수가 없다. 사랑이야 인간에게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사랑이 블랙홀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의 블랙홀을 사랑의 블랙홀로 대체하며 처박힌 것은 무엇인가. 분모였던 n은 이제 분자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무감각이 분모의 자리에 앉아 있다.


얼마 전 강남역 앞 탑 위에서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CCTV 폐쇄회로를 설치한 탑이라서, 그 크기가 너무 협소해서 놀랐다. 고행의 길로 노동자를 내모는 사회를 벗어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울까 생각했다. 서글픔에 울컥하고 무력감에 우울해졌다. 눕지도 못할 크기에서 앉은 자세로 맞이한 오늘 '하루''내일'은 어떻게 다를까. 강남역 위에 유쾌하고 화려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나, 철탑 위 비닐막 안의 시간은 꿈쩍도 없이 단단히 되풀이되곤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시간이 분모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농성장의 시간은 사적 온기가 허용될 수 있을까. 이미 분모가 무너진 후 0의 시간은 그대로 저 깊은 빙하 속으로 내달린다.


필이 그 하루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모두 알아내고 난 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여유가 있었던 반면, 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라진 22일을 알 수 없다. 설령 필이 자신을 후려쳤더라도 필이 친근하게 건네는 인사에 감격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시간 게임, 이런 흐름은 그 시대, 변화의 곡선을 충실히 타고 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이 존재와 장소와 질서를 이해하는 끄나풀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의 가정을 던져볼 것이다. 세 가지 결을 타고 갑니다.


마천루의 설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꾸밈 없는 언어』,

『에로스의 종말』,

사랑의 기쁨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자본주의적 이행과 연결하는『감정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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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떠들어보자. 지금 3시 14분, 4시 14분이 되면 무조건 종료한다.

메모를 하나 찾았다. 이것을 정해진 시간까지 붙들어 매자.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과 주관적으로 구성한 것들은 블랙홀로 흘러간다.

주체론은 세계를 분할 가능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장소로 안내하고 뒤섞는다.

자신이 세계이면서 세계가 아니라는 우회성이 살아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포츠맨십'으로 단련된 육체, '선비정신'으로 조직된 일상, '종교적'으로 들어올려진 평판에 대하여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왜 병에서 건강을 추출해내야 하는가.


영화를 보고 남긴 쪽지다. 이것에 뼈대를 붙여보려고 잠시 줄거리를 떠올린다.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은 판타지해서 로맨틱한 영화다. 필은 부정적이고 건조하게 메마른 사람으로 보였는데, 직업이 기상캐스터라서, 대중을 상대로 소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처지여서 더 절망적으로 하루를 보내곤 한다. 영화의 배경이 봄을 알리는 소식을 전해줄 마못을 기다리는 축제가 벌어지는 지방이어서, 하얀 눈발이 날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고, 매일 똑같은 날이 몇 달이고 반복된다는 점만 생생하게 기억난다(즉 나머지는 정확하지 않다). 


3가지 방향에서 추리를 시작하기로 하자. 

1. 새로운 장으로서의 사랑

2. 시간의 영원성으로서의 허무와 부정

3. 수행성으로서의 사회


<변화에는 하루만 있어도 되잖아>

어제는 오늘이고 내일은 오늘이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배경에서 흡사한 방송을 진행해야 했고, 그렇게 의미를 잃은 일상을 보내던 필이 진짜로 그 하루에 갇혔다. 시간을 거머쥔 필이, 여느 사람이라도 그렇겠지만, 현란하게 그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듯이 금방 시무룩해지곤 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배터지고 먹거나, 싫어하던 친구에게 복수를 하거나, 금지당했던 반도덕적인 일들 또 범죄를 마음껏 저질러도 다시 눈을 뜨면 그 날이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대부분은 공감하는 부분이다. 매일 놀기, 좋아하던 음식을 매일 배터지게 먹기, 매일 자유롭기 ... 이런 '쾌락'들은 반복을 통해서 가치절하되어 간다는 말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아서 몇 번 쯤은 신날 수도 있지만 계속 반복하다보면 이런 '양심' 같은 것들은 가치확대되어 간다는 말이다. 


여하튼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서 전환을 맞는다. 동료였던 리타를 사랑하게 되면서 필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하루의 회로에 갇힌 자유를 이용해서 리타를 마음껏 스토킹할 수 있었고, 리타에 대한 정보가 쌓일수록 필의 감정은 깊어졌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 연애는 거의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실패한다. 이 <<사랑이 실패하는 순간>>에 진짜 마법이 시작된다. 마치 마뭇이 겨울이 물러난 줄 알고 깨어나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하늘을 보고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전환이 시작된다. 마뭇이 되돌아간 시간, 그 시간은 여전히 겨울이지만 이전의 겨울과는 다르다.


필은 덤으로 얻은 시간을 마치 다시 반복되지 않는 듯이 보내면서 시간의 허무을 이겨낸다. 여느 날처럼 일어나 조금 더 진심을 갖고 사람들을 바라본다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진해서 돕는다든지, 심지어 싫어하던 자에게도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 일은, 마치 ~듯이 행동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를 실증하듯이 평온해지고, 그 결과 리타의 사랑을 얻게 된다.


피아노를 배우는 필은 그 실력이 늘어날수록, 연습을 통해 연주가 완성될수록 기쁨을 느낀다. 그런 '쾌락'은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것이며,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와 피아노 선생님과 피아노 치는 자신과 피아노로 연주되는 곡이 모두 같이 '우리'가 된다. 마치 사랑이 그렇듯이 '언어'와 '관계'와 '세계'가 하나의 장에 머무른다. 


주체는 나를 생각하고 나다운 행위를 통해서 나를 입증하지 않는다. 행위를 통해서 '나'가 발생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상투적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느낀다. 


필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된 것도 '사심없음'을 수행했기에 가능하다고 영화는 애써 말한다.


<사막의 물방울처럼>

나는 이제 조금 더 다른 쪽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싶다. 영화의 제목을 한글로 블랙홀로 바꾸면서 말해지고 있는 '무의식'을 말이다. 필은 나만이 절망인 세상에 사는 인물이다. 곧 그 절망은 블랙홀인데, 모든 일상을 하나의 구덩이로 몰고가는 것 말이다. 벌써 15분이다. 1분이 지났다.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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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2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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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 0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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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3 1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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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6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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