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론 머스크가 55조에 트위터를 인수하기로 했다 한다. 착잡한 일이다.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강제 퇴출당했을 때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쉽게 판단이 가지 않았었다. 미국 최고 권력자가 가진 발언의 자유를 트위터는 계정을 정지시킴으로써 제한해 버렸다.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는가. 누구에게 그런가.
이제 세계적 갑부 머스크가 온라인에 자유를 허용해야겠다면서 트위터 주인이 되려 한다. 그의 경영 전략에 따라 상장도 폐지하고 개인 기업이 될 거라고 한다. 머스크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손을 댄 것마다 금으로 변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트위터가 어떻게 바뀌게 될 지 알 수 없다. 공격적으로 여러 미래 산업을 독점하는 일론과 같은 사적 기업가들이 계속 늘어나도 되는 것일까. 계속 거대해질 공룡기업에 대한 견제는 누가 하게 될까. 스타링크로 하늘을 점거하고 화성 프로젝트를 근사한 형태로 설계한, 그 미래는 누구의 미래인가.
데이터는 단순히 이진법으로 만들어졌지만 무엇으로든 변신가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의 비트가 하나의 데이터가 되고 하나의 알고리즘이 된다. 그리고 플랫폼이 형성된다. 처음 트위터는 140자의 제한이 걸린 탓에 확장성 문제가 컸다.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서 위기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트위터 사용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주를 뽐내며 특유의 짧고 강렬한 메시지들을 만들었다. 리트윗되고 재창작되고 응답되는 끝없는 트위터 연결성은 일론 머스크가 탐내는 55조의 가치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55조는 누구에게 갈까. 십여 년 간 수만 개의 트윗을 생산한 계정들은 아닐 것이다.
2.
이곳 알라딘 서재도,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지만, 알라디너들의 발랄하고 진지한 글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나도 가끔씩 공들여 쓴 글을 올리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두서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문득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처음에는 블로그가 가진 사회참여적 성격을 생각하며 애써 의미를 찾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생태계를 지배하는 동력들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올린 글에서는 알라딘 서재의 글쓰기는 무급 노동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올린 글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서도 이용자 약관동의 사용계약이 아니라 생산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신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봉합경제의 특성에서 온라인 글쓰기는 삶의 영역의 분리를 심화시키고, 노동을 더 전설 속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오게 될 밀봉경제는 어느 수준이 될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네트워크, 알고리즘, 콘텐츠 범벅이 된 메타버스의 세계가 그 예시가 될까.
그렇게 혼자 묻고 혼자 덮고 혼자 떠들다 보니 플랫폼 위에서 더 외로운 게 아닐까 싶어진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을 느끼게 될 때는 두 종류의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오락가락하는 기분의 문제다. 독자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예 글쓰기를 그만두지 그러냐는 생각이 함께 든다는 점이다. 클릭 경쟁이 비지니스가 되는 온라인 세상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글을 쓴다는 일은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목소리가 큰 사람, 자극적인 내용을 물고오는 사람만의 온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금방 패배감으로 바뀌게 되는 지점이다.
두 번째는, 알라딘 서재처럼, 블로그 기능을 갖는 곳에서의 글쓰기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서 복잡한 심정이 되곤 한다. 책을 리뷰하거나 추천하는 일이 하나의 권력이기라도 하듯, 힘을 휘두르려는,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소비하는 일에서 여론을 생산하는 위치로 자신을 이동시키면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만약 인터넷 여론장이 현실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단이 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소셜 미디어를 운영하는 기업가들이 전 세계 부를 단기간에 움켜 줄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사소한 글쓰기의 기능이란 새로운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기만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가 많다.
데이터의 힘이 폭증한 새로운 세계에서, 내 데이터의 침묵은 의외로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조금 다른 일일 것이다. 온라인 글쓰기에 대하여/ 좋아요 참여에 대하여/ 블로그에 대하여/ 알라딘 서재에 대하여/ 그 행위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읽기를 해야 한다. 온라인 글쓰기의 발생을 역逆사회화할 방안 같은 걸 상상한다.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학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여기 이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당신의 블로그 생활은 당신의 실생활입니까? 예? 아니오?
3.
플랫폼 자본주의와 플랫폼 노동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들이 나와 있다.
(『피지털 커먼즈』중에서)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들이 일상적으로 생산하는 감정·정서·의식·정동·언어·활동 등 전자적 표현과 지적 유대의 무수한 관계의 갈래들을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고 중개하면서도, 그 집합적 기호를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망 안으로 흡수할 수 있을까를 암중모색하는 이중의 비즈니스 전략을 꾀한다."
"오늘날 ‘공유’(중개)경제는 플랫폼 알고리즘 기술을 기업 경영의 핵심 기제로 삼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을 자신의 장기로 삼는 반면, 노동인권, 이익 배분, 소유권, 의사결정 구조 등 대부분의 민감한 질문에 침묵하면서 실제 공생적 가치를 강조하는 커먼즈적 지향, 즉 ‘공유’(호혜)의 용어법과는 사뭇 다른 경로를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