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3월 즈음으로 개정해야 한다. 바람이 땅 밑을 흔들어 대기가 진동할 때 너나없이 이때다 싶어 고개를 들이밀어 '나 여기 있소'를 주장할 때 새해가 함께 열리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아직 깨고 싶지 않은 웅크린 몸을 뒤흔들어 대지도, 대기도, 하늘도, 강물도 얼어붙은 날에 이제부터 새해라고 밀어붙이면 그야말로 어거지로 다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지난 해를 반성하라고 재촉했으면서, 그 성찰의 쓰라림이 무뎌지기도 전에 '뭔가'를 도모하라고 하니 참으로 번개불에 콩 볶아야 할 심정이 되는 것이다.
때는 2022년이 시작된 날 거금을 들여 산 매생이를 넣어 떡국을 끓여 먹으면서 '뭔가'를 결심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그만 비뚤어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새로운 일을 찾자, 아니야, 새로운 일을 찾지 말자.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일을 찾자, 아니야,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을 찾아보자. 그래, 지금까지 무시했던 일을 해보자. 그렇게 만든 '뭔가'에 대한 생각은 마지막에 가서야 로또를 사보자는 원대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로또를 사서 당첨이 되는 꿈을 꿔 보자. 매주 천 원의 거대한 꿈을 심어보자. 보름달에 빌어보자. 달빛의 정기로 로또에 당첨되면 엄마에게 작은 텃밭과 키우고 싶어했던 송아지 두 마리를 선물하자. 그리고 남은 돈으로 적당히 큰 트럭에 책을 가득 싣고 골목길 사이에 정차하자. 논둑길 앞에, 선착장 옆에, 시끌벅적한 시장 뒷편에, 산골짜기 입구에 몇 개의 의자를 놓고 기다리자. 아무도 주인일 수 없는 자리가 있다하자. 여름에는 시원한 미숫가루를 타고 겨울이면 생강을 진하게 끓인 차 한 잔이 놓이는 자리를 만들자. 누군가는 푸념을 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아무나 자신의 책을 트럭 서가에 꽂을 수 있다고 하자. 좋은 책도 위대한 작가도 없는 점점 더 낡아지고 흐려지는 자리를 그려보자. 주인장은 내가 아니라 로또라고 말하자. 로또는 천 원의 꿈이라고 말하자. 천 원의 꿈을 잘 쓰는 방법은 천 개의 자리로 배분하는 거라고 하자. 수많은 천 원의 꿈들을 모아 하나의 거대한 꿈으로 뒤바꿔 버리는 게 아니라, 하나의 꿈을 천 원의 무수한 꿈으로 피워내는 거라고 하자. 아직은 로또의 꿈을 포기하지 말자고 하자.
2.
공공도서관에 한 달에 한 권을 희망도서로 신청할 수 있는데,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제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만족을 준다. 더구나 내 처지에 책 구입은 사치라서, 이렇게라도 한 권의 기쁨을 누려보곤 했다. 그런데 올해는 되는 게 없다. 지난 1월 신청한 책이 꼬이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후보군이 될 책은 여러 권 있었다. 그 중에서 예정에 없던 책을 신청하게 된 까닭은 초판 한정 오디오 파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광고 때문이었다. 그 책의 이해할 수 없는 판매방식으로 인해 1월, 2월, 3월의 기쁨은 통째로 끝나버렸다.
지금 4월을 기다리는 희망도서 목록을 꺼내본다.
『어린이 동지』. 어린 병사가 게릴라 분대장이 되어서 혁명의 길 위에 있다면 누구나 학대와 착취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 만연한 학대와 착취가 그곳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지배계급도 없고 인종차별도 없다는 마오쩌둥주의 공동체를 통해 인권과 복지를 생각한다.
"비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여러 가지 묘사는 아동병사는 희생자나 악당 또는 영웅이라는 틀에 박힌 아동병사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원인이 됐다. 이런 담론에서 아동병사는 '이국적인 것이 되고 맥락 밖으로 밀려나며 본질화되고', 이로써 그들의삶을 특징짓는 복잡한 면모를 잃어버린다(Denov 2010: 13). "
『근대의 관찰들』. 루만은 체계이론가로, 내가 지닌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장場으로 파악하는 습관에서 벗어날 참고점을 제시해준다. 그래서 어렵고 지루하지만 다시 도전할 이유가 된다.
"포스트모던"선언은 적어도 하나의 기여를 했다. 자기기술이 옳다는 확신을 상실했다는 것을 근대사회 자신이 알게 된 것이다. 근대사회의 자기기술은 매번 다르게도 가능하다. 즉 그것은 우연한 자기기술이다. 위험 가득한 세계인 뉴욕 지하철 노선처럼 포스트모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들이 밝은 조명 아래 그리고 계속 돌아가는 텔레비전 카메라 앞의 특정한 장소에 몰려든다. 이는 지적인 생존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그러는 동안 일어난 일은 일어났고, 사회는 도달한 곳에서 출발하여 미지의 미래로 진화한다.
‥‥ 우리는 사회 안에는 사회에 대한 구속력 있는 어떠한 재현도 없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체계가 다시 관찰되고 기술되는 과정에서 체계 자신 안에서 제시되고 관철되어야 하는 체계의 자기관찰과 자기기술 형식의 성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것이다." (『근대의 관찰들』미리보기 중에서)
『랭스로 되돌아가다』. 에리봉의 이야기가 궁금하진 않았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의 내가 보기에, 부모님은 근본적으로 그들이 계속 유지해야 했을 존재를 배반했다. 내가 그들에게 느낀 이 경멸은 무엇보다도 그들을 닮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아가 내가 그들에게 바랐던 존재와 닮지 않겠다는 표현이었다. 나에게 ‘프롤레타리아’는 책에서 얻은 개념이었고 추상적인 관념이었다. 부모님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 ‘소외된 노동자’와 ‘계급의식’ 사이를 갈라놓는 거리를 개탄하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진실은 이 ‘혁명에 입각한’ 정치적 판단이 내가 부모님과 가족에 대해 내리는 사회적 판단과 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 욕망을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날의 마르크스주의는 내게 사회적인 탈동일시의 벡터였다. "(『랭스로 되돌아가다』중에서)
이 책을 읽고나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르게 될 거다. '그들'이 언제나 '부모'였다면, 에리봉은 언제 '아들/자녀'였을까. 더불어 에리봉은 '어떤 랭스'로 되돌아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