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름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시몬 베유였습니다. 달걀 한 알을 배급받기 위해 몇 시간을 줄지어 기다려야 했던 당시의 상황은 스스로 괴물이 되거나 공허한 상실감으로 표류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녀 역시 그 고통 속에서 있었으며, 오직 영혼에 새로운 뿌리를 내려야만 최악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베유가 그랬듯이, “세상이 부여한 가치를 재평가하는 작업을 필요”로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중력의 작용에 얽매여버리는 인간 실존의 강렬함에서 부조리는 생겨난다. 왜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자기 변호가 충돌할 때, 삶은 한없이 가볍고 비루해질 수 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앞에서, 중력의 무게는 숨통을 짓누르듯 버겁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혼란스러운 시기의 유럽에서 살아가면서, 계몽 이후의 이성이 스스로 파놓은 나락으로 치닫는 것을 목도한다. 당대의 인간이 놓였던 실존 조건, '중력'은 결코 녹록치 않았고, 파괴적이었다. 

중력의 법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살기 위해서라기 말하면서 역설적으로 삶을 훼손하도록 작용한다.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중력은 요설의 수사로 가득 찬 선동과 선전이 되어 언어를 기만의 도구로 만들고 사고를 마비시킨다. 시몬 베유는 언어의 무기력함과 한계를 느낀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인간의 생존 조건인 중력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삶과 고통을 오히려 철저히 사유하기로 한다.


(고통에 내몰려) 불행할 때에는, 온갖 집착을 박탈당하더라도 생의 본능은 그대로 살아 있어서 식물이 덩굴을 감듯이 자기의 지주가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감사하는 마음이나 공정함을 간직할 수 없다. 


고통받는 자는 누구나 자기 고통을—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혹은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써—남들에게 알리려고 애쓰게 된다. 이것은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것이며, 실제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은 줄어든다. 아주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또 어느 누구도 괴롭힐 힘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기 안에 그대로 남아 그를 독살시키게 된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은 정신이 산산조각 나서 끝없이 절규하다가, 허무에 도달할 뿐이다. 이 허무는 영혼 전체를 공포로 넘쳐흐르게 한다. 베유는 여기서, 이 공포 앞에서, 삶을 사랑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김은주)



베유는 새로운 뿌리(삶의 거주 방식)를 내리는 일에 집중하면서도, “우리에게 건전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우리를 죄책감에 빠뜨리고 무결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끝까지 “인간의 위대함”을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중력의 법칙을 비판하기보다 “그것이 야기하는 고통의 역학과 심리학을 분석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를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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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이리저리 언급되는 아렌트 파일을 뒤적이다가 ''관조와 행위의 전도가 가져온 인간의 근본적 경험''을 논하는 대목에 머문다. 아렌트는 진리와 지식이 '행위'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 대목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기만적 현상 배후에 있는 진리를 사냥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발생하였다"라는.


"근대의 발견이 낳은 가장 중요한 정신적 귀결이며 또 아르키메데스적 점의 발견과 동시에 이를 수반하는 데카르트적 회의로 말미암아 초래된 결과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의 전도이다.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위계를 전도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가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없애야 한다. 우리는 과학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 응용가능성 때문에 인간조건을 개선하여 지상에서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열망으로 인해 근대과학이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근대의 테크놀로지는 인간이 노동의 고통을 줄이고 인공세계를 건립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위해 고안한 도구의 발전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한 지식에 대한 전적으로 비실천적인 탐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으로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최초의 근대적 도구 중의 하나인 시계는 실제 생활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연 실험을 행하기 위한 보다 고도의 '이론적' 목적 때문에 발명되었다. 이 발명품이 실생활에 유용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곧장 인간 삶의 전체 리듬과 외관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발명가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단지 우연히 발생한 결과물이다. 만약 우리가 인간의 실천적 본능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면, 어떤 테크놀로지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오늘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술 발명품들이 자동적으로 트정 수준까지 개선과 발전을 추진시킬 수 있는 추진력으로 작용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일차적으로 실용적 존재라는 확신만을 계속해서 갖는다면 기술에 의해 조건 지어진 우리 세계는 더 발전하기는 고사하고 존속하지도 못할 것이다.


인간 손의 망원경과 같은 도구는 마침내 자연 나아가 우주의 비밀을 강제적으로 밝혀냈다. 이 새로운 능돌적 탐구의 결과물이 나온 이후에 행위를 신뢰하고 관조나 관찰을 불신한 이유들은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존재와 현상이 분리되고 진리가 관찰자의 정신적 눈에 더 이상 현상되지도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게 된 이후, 기만적 현상 배후에 있는 진리를 사냥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발생하였다. 지식을 탐구하고 진리를 찾는데 수동적으로 관찰하거나 단순히 관조하는 것은 도대체 신뢰하지 못할 것으로 되었다.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확신해야만 했고 알기 위해서는 행해야만 했다. 지식의 확실성은 오로지 이중의 조건이 충족될 때만 도달할 수 있다. 첫째, 지식은 오로지 우리가 스스로 행한 것에만 관계한다-그래서 스스로 만든 정신의 실체를 다루는 곳에서는 수학적 지식이 지식의 이상으로 되었다-. 둘째, 지식은 보다 많은 행위를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는 본질을 가진다." (『인간의 조건』)

다시 챙겨 읽을 아렌트의 책들을 찾는다. 그리고 저 아렌트의 주된 개념으로서 '행위'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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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와 다른 타인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는 데 필요한 것


누스바움이 법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맡게 되었을 때 수업의 주제는 스토리텔링이었다. 시카고 대학 로스쿨에서 누스바움은, 미국의 예비 법조인들에게 소포클레스에서 플라톤과 세네카를 그리고 디킨스를 읽도록 안내했다. 고전을 낭송하고 문학을 읽는 로스쿨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대학이 교양교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이야기 책에 빠지는 행위가 비경제적이며 쓸데없거나 위험한 놀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문학이 제도권 교육에 들어왔다는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보수적이다. 법학자, 경제학자, 공학자들은 정치적 현실은 경제적 효용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문학과 상상력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까닭은 아마도 '좋은' 이야기의 힘이 지식인-전문가의 역량을 배가시킨다거나, 그들의 결점을 보완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전인교육이라는 구태의연한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의 '마음'을 담은 법과 제도 그리고 공적이고 경제적인 합리성에 의해 완성되는 사회를 열망하기 때문이다 , 문학적 상상력과 경제적 추론의 상관관계를  사유하도록 안내하는 스토리텔링 수업에서 누스바움이 원하는 바도 그럴 것이다. 


표준화된 경제적 패러다임에서 언급되는 각종 지표들로 인간 삶의 가치를 집어내기는 힘들다. 문학 작품을 통해서 "인간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들"을 토론하고, 삶의 질을 포착한다. 누스바움이 세계적인 학자들과 더불어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목표도 그렇다. "자신과 동떨어진 이들의 삶에 개입할 윤리적 상상력"을 교육하고, "타인의 좋음"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는 필수적으로 지닐 수 있도록 한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역경을 해결하고 씨름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실천적이고 공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들은 이러한 :윤리적 입장은 원칙 정립과 형식적인 의사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존엄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윤리학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동떨어진 이들의 삶에 개입할 수 없다면, 우리는 진정한 인간 존재로서 서로 관계를 맺는 데 실패할 것이고, 이러한 개입과 관련된 감정을 갖는 데도 실패할 것이다. 공평성에 깊은 관심을 가져온 상당수의 윤리학자들은 독자나 관찰자의 감정을 훌륭한 윤리적 판단을 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옹호해왔다.(‥‥) 비록 이러한 감정들이 한계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고, 윤리적 추론에 있어 감정의 역할은 엄밀하게 제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감정들은 분명-부분적일지라도-사회정의에 대한 강렬한 비전을 내포하고 있으며,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강력한 동기를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다." (『시적 정의』, 17쪽)


여기에서 눈여겨 볼 점은 독자나 관찰자의 감정을 옹호하고, 그 과정을 '개입'의 일종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편견과 증오로 가득 찬 정치 풍조에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적대자들에게도 그들만의 삶의 이야기가 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희망의 관점이 생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누스바움에게 비판적이던 로스쿨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1180번 학생-시카고 대학은 기말시험을 이름대신 번호만 적힌 상태로 채점한다-은 낙관적인 견해라고 답안을 썼다. "한 개인의 생각, 아마 재판관 한 명의 생각을 바꿀 수"는 있지만 "편견과 증오의 폭풍에 대항하는 아주 미약한 희망의 보호벽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답한다. 대부분의 경우에, 예를 들자면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되묻게 하는 일이 집단의 뿌리 깊은 편견을 맞서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누스바움도 1180번 학생의 생각이 옳다고 인정한다. 


"우리는 '공상'에 호소하는 것으로만 수년간 고착화된 혐오와 차별이 바뀌기를 희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공상은 그것이 적절하게 실현되었다 할지라도, 온갖 고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의 미약한 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을 고래해볼 때, 위 학생의 비판에 공감할 이유는 충분하다. ... 사람들의 이러한 거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여기서 옹호하게 될 '공상'이라는 형태가 갖는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유형의 공상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불평등하고 협소한 인간적 공감을 익힌 사람들의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정의』, 20쪽)

누스바움은 현대 사회가 공감과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분위기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쉽게 그 힘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렇기에 더욱 '공상'을 부인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인간적인 함양으로 유지되길 바란다. 누스바움은 좋은 '공상'의 힘은 제도를 인간적으로 구축할 힘을 갖고 있으며, 제도적 견고함이 제도적 주체를 정립할 수 있다고 1180번에게 말하고 있다. 제도적 주체, 곧 공감의 보편적 수용이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수업에 참가했다면 아마도 "제도 그 자체는 '공상'의 통찰력으로 인도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누스바움의 주장을 회의했을 것이다. 공상의 힘이나 공감의 능력이 아니라 모든 제도에 깃들어 있는 '공상'의 통찰력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오늘날의 문제는 바로 그렇게 심화되고 있다. 



2.  

일자리를 구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서성인다. 고민을 나눌 사람도 없다. 너무 막막해서 떨린다. 경력이 단절된 채 살림과 사람을 줄여나가다가 50대가 된 구직자의 자리는 어디일까. 지금이라도 기술을 배우며 앞날을 희망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가슴이 벌렁거린다. 지금 내가 찾고 있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일자리가 생긴다면  '나를 맞춰가면서' 하겠다고, 일자리만 달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다. 


누스바움은 "'공상'을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단락의 말은 사회정의를 말하기 때문에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일자리의 미래를 그리지 못하는 일에 덧대어 생각하면, 대체 상상, 공상, 이야기 이런 것들이 어떻게 힘을 갖게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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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7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2-09-18 11:32   좋아요 2 | URL
천천히 읽고 좋은 리뷰 남겨주세요!

[˝지금 당신은 19세기 말의 집들을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집들은 마치 다 똑같이 생겼소, 그리고 저 모든 사람들은 일을 하러 가고 있고 그들 또한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오. 하지만 브론테가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이오.˝ 각각의 집과 가정에 있는 ...그 각각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정념에 관한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지요.] 173쪽에서.

우리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어서 즐거운 날이기를 바래요.

그리고 반사 ~ 행복한 주말 보내시어요.

2022-10-01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초원 2022-10-02 13:29   좋아요 2 | URL
아직 공부가 끝나지 않았군요.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쉽지 않은 길을 묵묵히 걸어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존경합니다. 멀리서 일군 작업이 꼬옥~ 성과를 거두시길 빌어요. 그리고 어느 날이라도 좋은 소식 전해주시면 저도 무척 기쁠거예요.

2022-10-03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3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3 09: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22-10-03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s://youtu.be/xgvckGs6xhU

저에게 설렘을 주는 음악이 있어 함께 나누어봅니다. 이야기와 공상의 힘을 믿으며,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책 추천 부탁드려요. 이북으로 읽어보려고요 초원님😀🙏

초원 2022-10-03 11:55   좋아요 2 | URL
클래비스님을 설레게 하는 음악이 김동률의 <출발>이네요. 여행자의 시선이 느껴져요. 일상에 빠져나온 내가, 어딘가 낯설고 두근거리는 거리에서, 눈과 귀와 온몸으로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요. 좋아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군요. 클래비스님도 곧 다시 시작하는 시간인데, 잘 어울려요.

2022-10-03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4 0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4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4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22-10-04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원님, 그 구절 찾아서 제 북플에 남겨놨어요. 제가 완전히 다르게 이해했던데요?😅😆

2022-10-04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6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논점은 비판의 맥락이 아니라는 주장을 다시 하게 된다.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나 새로운 자본주의에서의 '자유'나 문제를 해결하는 논쟁점을 생산할 수 없다. 오히려 자유를 말하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 열흘 전에 올린 포스팅에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공언하면서 트위터를 인수한 일론 머스크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지젝이 올린 칼럼 〈우크라이나의 자유, 어산지의 자유〉을 읽게 되었다. 맙소사, 지젝이 내가 이야기하던 《신봉건주의》를 그대로, 그러니까 그대로 말하는 것이었다. 지젝은 관심에 없던 사람인데 <신봉건주의>를 통해서 비판이론을 전개하던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져야 할 게 아닌가 싶다. 지젝은 대체 어떤 경로로 신봉건을 말하고 있을까.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41990.html

- 한겨레신문 5월 8일자, 〈우크라이나의 자유, 어산지의 자유>


아무튼 그의 칼럼에 의하면 자유는 다시 사유되어야 한다.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영국에서 범죄인인도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미국으로 송환될 경우 징역 175년형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하면서 지젝은 글을 열었다. 그리고 서구 세계의 자유가 어떤 한계를 보여주는지를 설명하려고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를 예시로 들고 있었다. 플랫폼에서의 자유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가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다면 표현의 자유가 지켜지는 것이다."라고.


다음 문장을 보자. "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주요 공유자원 중 오직 기업이라는 사유재(심지어 이 경우는 한 기업인)만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 곳이 됐단 말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제 자유가 신봉건주의에 의해 수호되는 시대가 됐다. 또 다른 문제는 머스크가 '표현의 자유'를 좋고 싫음이라는 의견의 문제로 정의하면서, 모든 의견을 동등하게 다뤄도 상관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본인권, 교육, 의료에 관한 진실이 그런 문제에 해당하는가?"


지젝은 자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쓴 글에서는 이렇다.


https://blog.aladin.co.kr/722236154/13563451

- 5월 2일, <여기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몇 년 전에 올린 글에서는 알라딘 서재의 글쓰기는 무급 노동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올린 글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서도 이용자 약관동의 사용계약이 아니라 생산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신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봉합경제의 특성에서 온라인 글쓰기는 삶의 영역의 분리를 심화시키고, 노동을 더 전설 속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오게 될 밀봉경제는 어느 수준이 될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네트워크, 알고리즘, 콘텐츠 범벅이 된 메타버스의 세계가 그 예시가 될까." 


지젝이건 다른 누구이든 간에 우리는 동시대를 살고 있으며 세계체제에서 묶여 있기 때문에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딜레마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가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할 자유 같은 걸 놓고 경쟁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야 할 대안이란 국가와 민족에 얽매이지 않을 지점에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거기에 있다. 


이 참에 지젝에게 관심을 가져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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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론 머스크가 55조에 트위터를 인수하기로 했다 한다. 착잡한 일이다.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강제 퇴출당했을 때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쉽게 판단이 가지 않았었다. 미국 최고 권력자가 가진 발언의 자유를 트위터는 계정을 정지시킴으로써 제한해 버렸다. 상징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는가. 누구에게 그런가. 


이제 세계적 갑부 머스크가 온라인에 자유를 허용해야겠다면서 트위터 주인이 되려 한다. 그의 경영 전략에 따라 상장도 폐지하고 개인 기업이 될 거라고 한다. 머스크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손을 댄 것마다 금으로 변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트위터가 어떻게 바뀌게 될 지 알 수 없다. 공격적으로 여러 미래 산업을 독점하는 일론과 같은 사적 기업가들이 계속 늘어나도 되는 것일까. 계속 거대해질 공룡기업에 대한 견제는 누가 하게 될까. 스타링크로 하늘을 점거하고 화성 프로젝트를 근사한 형태로 설계한, 그 미래는 누구의 미래인가.


데이터는 단순히 이진법으로 만들어졌지만 무엇으로든 변신가능한 힘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의 비트가 하나의 데이터가 되고 하나의 알고리즘이 된다. 그리고 플랫폼이 형성된다. 처음 트위터는 140자의 제한이 걸린 탓에 확장성 문제가 컸다. 경영실적이 좋지 않아서 위기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트위터 사용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주를 뽐내며 특유의 짧고 강렬한 메시지들을 만들었다. 리트윗되고 재창작되고 응답되는 끝없는 트위터 연결성은 일론 머스크가 탐내는 55조의 가치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55조는 누구에게 갈까. 십여 년 간 수만 개의 트윗을 생산한 계정들은 아닐 것이다. 


2.

이곳 알라딘 서재도, 예전만 못하다고들 하지만, 알라디너들의 발랄하고 진지한 글들이 끝없이 올라온다. 나도 가끔씩 공들여 쓴 글을 올리기도 하고, 즉흥적으로 두서없는 넋두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문득 문득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처음에는 블로그가 가진 사회참여적 성격을 생각하며 애써 의미를 찾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생태계를 지배하는 동력들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올린 글에서는 알라딘 서재의 글쓰기는 무급 노동이 아니냐고 묻기도 했었다. 그리고 연이어 올린 글에서,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서도 이용자 약관동의 사용계약이 아니라 생산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었다. 신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봉합경제의 특성에서 온라인 글쓰기는 삶의 영역의 분리를 심화시키고, 노동을 더 전설 속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했다. 미래에 오게 될 밀봉경제는 어느 수준이 될 지 짐작도 할 수 없다. 네트워크, 알고리즘, 콘텐츠 범벅이 된 메타버스의 세계가 그 예시가 될까. 

 

그렇게 혼자 묻고 혼자 덮고 혼자 떠들다 보니 플랫폼 위에서 더 외로운 게 아닐까 싶어진다. 무엇보다 그런 마음을 느끼게 될 때는 두 종류의 생각이 교차한다. 하나는 오락가락하는 기분의 문제다. 독자가 없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아예 글쓰기를 그만두지 그러냐는 생각이 함께 든다는 점이다. 클릭 경쟁이 비지니스가 되는 온라인 세상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글을 쓴다는 일은 나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목소리가 큰 사람, 자극적인 내용을 물고오는 사람만의 온라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금방 패배감으로 바뀌게 되는 지점이다. 


두 번째는, 알라딘 서재처럼, 블로그 기능을 갖는 곳에서의 글쓰기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에서 복잡한 심정이 되곤 한다. 책을 리뷰하거나 추천하는 일이 하나의 권력이기라도 하듯, 힘을 휘두르려는, 글쓰기가 되기도 한다. 소비하는 일에서 여론을 생산하는 위치로 자신을 이동시키면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만약 인터넷 여론장이 현실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단이 될 수 있었다면, 어떻게 소셜 미디어를 운영하는 기업가들이 전 세계 부를 단기간에 움켜 줄 수 있게 되었을까. 이런 사소한 글쓰기의 기능이란 새로운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기만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가 많다. 


데이터의 힘이 폭증한 새로운 세계에서, 내 데이터의 침묵은 의외로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조금 다른 일일 것이다. 온라인 글쓰기에 대하여/ 좋아요 참여에 대하여/ 블로그에 대하여/ 알라딘 서재에 대하여/ 그 행위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읽기를 해야 한다. 온라인 글쓰기의 발생을 역逆사회화할 방안 같은 걸 상상한다. 사회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학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여기 이 알라딘 서재에서 무얼 하고 계신가요? 당신의 블로그 생활은 당신의 실생활입니까? 예? 아니오?


3.

플랫폼 자본주의와 플랫폼 노동에 대해서 이미 많은 연구들이 나와 있다. 


(『피지털 커먼즈』중에서) "플랫폼 기업은 이용자들이 일상적으로 생산하는 감정·정서·의식·정동·언어·활동 등 전자적 표현과 지적 유대의 무수한 관계의 갈래들을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고 중개하면서도, 그 집합적 기호를 어떻게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망 안으로 흡수할 수 있을까를 암중모색하는 이중의 비즈니스 전략을 꾀한다." 


"오늘날 ‘공유’(중개)경제는 플랫폼 알고리즘 기술을 기업 경영의 핵심 기제로 삼아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능력을 자신의 장기로 삼는 반면, 노동인권, 이익 배분, 소유권, 의사결정 구조 등 대부분의 민감한 질문에 침묵하면서 실제 공생적 가치를 강조하는 커먼즈적 지향, 즉 ‘공유’(호혜)의 용어법과는 사뭇 다른 경로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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