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

니체에게 양심이란 자신에 대해 좋은 감정을 지니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양심이 침식당한 결과다. 자유롭던 인간이 지닌 양심과 사회에 합류한 인간이 갖게된 양심의 가책은 모두 인간이 동물에서 탈피하면서 얻게 된 것들이다. 너무 잘 알려진 바, 니체는 양심의 가책을 넘으라고 한다.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구별하라고 한다. 길들이기의 도덕에서 벗어나와 힘에의 의지를 믿는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아니라 창조하는 자연의 힘에서 존재를 회복하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니체를 떠올릴 때는 그럴 때가 아니다. 기존의 도덕들을, 이 세계가 내게 던져 준 선악판단을 넘어서려고 할 때가 아니다. 흔적도 없는 도덕을 붙들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순간이다. 파괴되고 경멸이 가득한 세상에서, 폭력이 범벅이 된 생활세계를 목격하게 될 때, 지금 이 혼란이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각일 수 있는지를 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를 제대로 살지 못해서 수없이 많은 밤을 양심의 가책을 안고 지샜다. 지금 이 세계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면 무엇에 의해 그럴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내가 아프고 병든 게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니체에게 물었다. 어떻게 나만 그 세계에서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느냐고 버텼다.  


2.

평생이 사춘기다. 모든 살아 있는 형상들은 자기-자신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자연의 필연적 경향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이냐. 나, 이놈, 정신차리라. 내게 자연을 거스르는 거대한 힘이라도 있는 게냐. 그럴 리가 없잖은가. 그렇다면 뭔가. 방랑하도록 태어난 게 아니냐. 생명이란, 원체, 완전체 같은 거하고는 거리가 먼 게 아닌가 말이다. 허허. 나는 앞으로도 계속 헤매고 울렁거리며 훌쩍거리겠지만, 그게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렷다. 잠깐만 기다리게. 성미가 급한 탓에 천지분간을 못하는 게구나. 내가 그리 흔들린다 하여 세상도 그럴 거라 믿는 게냐. 내가 헛된 일을 하는 동안 누군가는 또 장한 일을 허는 거겠거니 해볼 수도 있것지. 거봐라. 우쩌다 그런 걸 생각허는 날은 아마도 더 심한 풍랑에 빠지겄지. 아니여. 내 안에 내재하는 목적이 있다허면 말이다, 왜 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지를 생각하며 더 울적해질 게 아니여. 그러면 이렇게 방향을 틀어야허것지. 지금 내게 이짝저짝 가르는 말들이 필요한 게 아니구나 해야허지. 자연에 목적이 있다허면 인간이 알 수 없는 거고, 자연이 확연히 드러나는 자체라면 내가 허우적대더라도 그렇거니 해야허지. 


그렇지, 그래. 그러허더라도 '너'를 생각하는 순간 그런 건 까마득히 사라지는 거여. 너가 아파하고 너가 힘들어하는 얼굴이라면 말이여. 자연이 그러하니 세상이 이러하니 그렇거니 해야허지 할 수가 없어지는 거지. 그럴 때면 '나'로 시작헌 회오리가 태풍처럼 몰아치는 거여. 허허. 이제 뭔 생각을 해야 허는지 짐작이 가지. 나 ,회오리도 너, 태풍도 좋지 않어. 나와 너와 세상과 자연이 죄다 각자로 나타날 수가 없는거잖어. 나는 너이고 이런 게 아니여. 나이고 너이고 세상이고 자연이여. 나따로 너따로 세상따로 자연따로 그런 거는 해로워. 


가려진 해를 보며 진짜 해를 보고 싶다 허는거지. 해를 잘 알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생각허는거지. 해를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 잘 모르는 건 아닐거여. 해를 따로 생각헐게 아니란 말이여. 유일하게 해가 중심일 때가 있기는 허지. 어스름하게 올라오는 아침해를 두고 다함께 맞이하는거 그런거 말이여. 나에겐 너뿐이여 허면서 얼싸안고 해맞이를 하는 거 그런거 아니여. 나는 여기에서 너는 그곳에서 세상은 저기에서 자연은 사방에서. 말없이, 주고받고 그런 것도 없이, 그런게 함께한다는 거지. 


*이 그림은 <제목 없음 43>입니다. 금지를 금지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두 개의 초대장>

미국에 사는 갑부가 4천억 달러를 투자해서 미래 도시를 만든다고 한다. 도시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한 미래도시라고 한다. 5백 만명을 거주시킬 계획이며, 헨리 조지 방식의 토지소유제까지 도입한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다. 15분 이내에 직장도 학교도 시장도 문화센터도 갖춘 도시는 온갖 첨단 설비에 의해 운영된단다.갑부는 거주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또 다른 갑부인 머스크는 화성 프로젝트 X를 설명한다. 미소를 띤 얼굴과 정중한 태도로 화성에서의 미래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한다. 


이 공개된 초대장은 사실 공수표여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초대장을 공개하면서 여유롭다. 미래도시와 화성 이주를 향한 열망이 지구의 대안이기라도 하듯이 당당하다. 그렇다. 이 두 개의 사업은 말하자면, 공개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봉합경제의 한 양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에 연결될 수 없겠지만, 마치 이들의 비지니스가 지구의 운명을 개척하는 선구안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투자를 유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구에 절망한 사람들은 화성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상상할 것이며, 인간에 절망한 사람들은 미래도시 프로젝트에 열광할 수도 있겠다. 


<두 개의 법안>

텍사스에 낙태금지법이 있다고 한다. 반면 일리노이주에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한 남성을 고소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고 한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성범죄자나 가정폭력범을 고소하도록 하고 벌금을 부과하는 법이란다. 벌금이 만 달러부터 매겨지는데, 절반은 텍사스에서 낙태를 하지 못해 일리노이주로 오는 여성들의 낙태 수술을 지원한다고 한다. 


이 대립하는 법안은 자기결정권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을 의미한다. 자기결정권이 자유와 만나는 곳에 어떤 진실이 있다고 확신한다. 낙태를 하지 않겠다는 일도, 낙태를 하겠다는 일도 자기구성의 윤리에 닿아 있다. 낙태를 막느냐 허용하느냐에만 몰입한다면 영영 '문제'로만 남게 될 수도 있겠다.   


< 두 개의 시간>

눈이 아파서 머리가 어지러워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듣게 된 정보를 끄적인다. 공들여 누군가 써 놓은 글을 읽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는다는 행위는 일단 나를 고양시키는 일이다. 글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접촉하는 일은 자신을 중단시키고 작은 분기점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목적이 분명한 독서라도, 읽기에 빠져 있다가 간혹 정신을 차리게 되면, 자신과 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 사소하고 담백한 행동이 삶의 고양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왜 삶을 고양시켜야 하는지 의문에 빠지곤 한다. 


책을 '읽기'가 아니라 책을 '쓰기;가 문제다. 읽기에는 해가 덜하다. 쓰기에는 독이 있다. 어떤 독은 그래,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도 하겠다. 그러나 그때의 약이란 하나의 비평이므로 '읽기'를 떠난 상태다. 좋은 독을 생산한 저자가 인기를 얻는다기 보다는, 비평 무대에 오른 글이 약의 가능성을 두드리는 것이다. 비평은 다른 종류의 '쓰기'다. 쓰기의 독과 비평의 약 사이에서 인과는 개인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래도 독이다. 그래서 쓰려는 자는 늘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만들어진 독이 어디로 가겠는가. 인기 없는 글을 쓰는 사람은 실은 독이 아주 미량이라 독도, 약도 아니라는 뜻이다. 글을 쓰고 더 쓸쓸해질 때면 이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해독중이라고. 만들어진 독이 저절로 해독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이다.


자신의 인식 수준을 참된 방향으로 끌어가려는 도덕적 국면을 만들어야 한다. 나라는 동굴을 개방시켜서 편견을 조정하는 자발성을 소박하게 경험해야 한다. 그런 의지를 티끌만큼도 갖지 않은 읽기는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고, 고립을 자초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달래고 달래도 그럴 수 없다 한다. 왜 자신의 삶을 고양되거나 파괴될, 무시무시한 무대 위에 올려놓아야 하느냐고, 울분이 솟는다. 여기에 두 개의 시간이 흐른다. 읽기의 시간과 쓰기의 시간.  나는 영영 주체적 삶을 살 수 없거나, '주체'는 '나'라는 생명활동이 일어나는 이 몸과 연관이 없다 하겠다.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87>입니다.  트러블드 워터 속에서-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랫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중세 사회는 여성에 대한 혐오가 수도원 운동을 통해서 확산되었답니다. 이브가 순진한 영혼이었던 아담을 유혹해서 신의 명령을 어겼다는 것이지요. 모든 인간의 고통을 최초의 여성인 이브에게 돌리고 있어요. 그들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남성의 영혼이 여성의 감각/육체를 지배해야만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근데 이상하게도 이런 여성 혐오는 여성 숭배와 함께 나타났다지요. 성이 만악의 근원이라면서 금욕을 강조하던 시대, 장자상속제로 수많은 남성들이 수도원으로 향하던 시대, 성적 만족을 위해 여성들을 유괴하던 수많은 범죄자 남성들이 빈번하던 시대가 중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지금과 무엇이 달라졌는가 싶어집니다. 그 시절에도 연애는 사건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답니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그들이 나눈 편지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아벨라르는 서양 중세철학에서 실재론과 유명론이 대립할 때, 논리학을 신학, 테올로지 théologie로 전개시켰던 학자입니다. 그는 의심하고 탐구하면서 진리에 도달한다는 보편자 이론을 등에 업고, 당대의 철학자들을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마저 논리로 분석하는 사람이 어느 날 엘로이즈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16세 여성임에도 그 학식이 돋보여 왕국의 많은 남성들의 숭배 대상이었답니다. 37세가 될 때까지 별다른 여성 교제 경험이 없던 아벨라르는 당장에 엘로이즈를 공략할 준비를 합니다. 엘로이즈가 숙부와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정 교사로 취업하죠. 그리고 엘로이즈와 수업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나눕니다. 


그리스 철학을 공부하며 연애를 하게 된 두 사람은 솔직했답니다. 두 사람의 연애는 편지와 고백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공부를 위해 마련된 별채에서 책을 펼쳐놓고 공부보다 사랑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내 손은 나의 책으로 가는 일보다 더 자주 그녀의 가슴으로 갔던 것이네. 사랑은 두 사람의 눈을 교과서의 문자 위를 더듬게 하지 않고 서로의 눈망울 속에 머물게 했네. 의혹을 보다 잘 피하기 위해 때로 나는 매질을 가하기까지 했다네, 그것은 분노의 매질이 아닌 사랑의 매질이었으며, 미움의 매질이 아닌 애정의 매질이었던 것이네. 그리고 이 매질은 온갖 향료보다도 더 감미롭기만 했던 것이네."


아벨라르가 젊은 수도사를 위해 쓴 편지에서 육체의 죄를 떠나야 한다면서 자신의 불행한 역사의 시작점을 전하던 구절입니다. 아벨라르가 엘로이즈와의 연애를 죄의 사건으로 기록하면서도 회상하는 대목이 예사롭지 않지요. 이들의 비밀연애는 엘로이즈가 임신하게 되면서 숙부에게 발각됩니다. 분노한 숙부를 달래려고 아벨라르는 비밀결혼을 하게 됩니다. 아벨라르는 엘로이즈에게 숙부의 집에 있지 말고 수녀원에 들어가 있으라고 말합니다. 


숙부는 조카 엘로이즈를 몰래 수녀원으로 보낸 아벨라르의 진심을 의심하게 되고, 결국 복수를 감행합니다. 아벨라르는 숙부가 보낸 사람들에 의해 거세 당합니다. 이 사건 이후 아벨라르는 자신의 방종을 치료한 신의 은총으로 이 비극을 기록하지요. 그 회고록은 거듭 난 수도자의 기록이 됩니다. 


엘로이즈는 어떤 여성이었을까요. 세간의 관심을 끌던 소녀가 중년의 가정교사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아벨라르가 세상의 찬란한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습니다. 임신이 탄로났을 때 아벨라르가 제안한 결혼도 반대합니다. 사랑하는 아벨라르의 명예를 손상시키기 싫다는 것이지요. 자신의 앞날과 자식의 미래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내라는 칭호가 보다 신성하고 건전하게 판단되겠지만 나에게는 언제고 애인이란 명칭이 보다 감미로웠던 것입니다. 당신만 싫지 않다면 첩이라는 명칭이고 창녀라는 명칭이고 다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당신을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춤으로써 그만큼 더 당신의 총애를 차지할 것이며 당신의 영예로운 명망을 손상시키는 일 또한 덜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엘로이즈는 "남편을 그의 인격보다도 그 지위로 선택하는 여자는 자기 자신을 파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부유한 사람에게,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자기 몸을 팔려고 하는 행위를 반대합니다. 결혼의 현실을 보라고도 합니다.  "신학이나 철학의 명상 속에 잠겨 있을 사람이 옆에서 들리는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며, 유모의 노랫소리며, 집안 살림에 분주한 하인배들의 시끄러운 소요 소리를 견딜 수 있겠습니까?" 엘로이즈는 아벨라르가 위대한 철학자가 되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로이즈는 자발적으로 수녀원에 남아 수녀가 되었고, 수녀원장으로 생을 마칩니다. 그리고 아벨라르와 함께 묻힙니다. 


엘로이즈는 뛰어난 문장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철학에서부터 신학까지 풍부한 인문의 열정을 가졌습니다. 결혼에 대해, 여성의 삶에 대해 편안한 위치를 고집하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철학과 철학자에 대한 신념을 위해 결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엘로이즈를, 근대적인 의미에서, 실존적인 인간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용기있는 여성으로 기억될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하는 아벨라르와 달리 수녀원장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엘로이즈를 보십시오. "우리가 함께 맛본 저 사랑의 기쁨이 너무나 감미로워 그것을 뉘우칠 생각이 일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내 기억에서 지워 버릴 수도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엘로이즈에게 붙어서 따라다니는 '중세 지식인 여성'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 던진 질문의 내용을 보십시오.


"회개할 필요가 없는 평범한 사람 99명 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이 천국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린다는 성경 말씀을 지적하며 왜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이 회개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분명히 더 낫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한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서간집에 나타난 한 지식인 여성의 담론」)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55>입니다. 질문하라, 사과가 아니라 말씀에 대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 잘 지내지?


너도 알고 있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려 봤으면 해. 울프가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했다"고 썼어. 어쩜 그럴까, 의심스럽지. 여성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왜~? 미적 감각을 표현하려고 했을까. 첫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도 알잖아. 직접 꽃을 산다는 건 어떤 꽃을 사고 어떻게 장식하고 뭐 그런 걸 염두에 둔다는 거잖아.댈레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식탁을 꽃으로 장식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는 거야. 


애니야, 클라리사가 정말 원해서 꽃을 사고, 바느질과 파티를 즐겼을까. 그래, 나도 알지. 클라리사는 버지니아 울프가 만든 소설 속 인물이라구. 그래. 버지니아 울프는 어떻게 클라리사가 꽃을 사면서 파티를 준비하는 소설을 쓸 생각을 하게 되었냐구.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냐? 여자들이 하는 모든 일들 중 나쁜 일이 있냐는 거야. 아, 미안해, 꽃을 감상하려고 굳이 꺾고 자르고 다듬고 믹스해서 뭔가를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싫긴 하지. 하지만 그게 도덕을 파괴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잖아. 사소하고 한심해서 더 우스운 일이지. 


싫어하는 글쓰기를 오늘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뭐 떠오르는 게 없어? 좀 더 노력하면 누군가 좋아해 주기라도 할 줄 안거야? 애니야. 아직도 모르겠니. 그런 건 습관이라고 해야 해. 


클라리사가 전통적인 여성성을 나타낼 파티라든가 그런 속물적인 캐릭터를 입고 연기하는 건 버지니아의 의도라고. 여성이 하는 일이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래서 여성이 담당했던 노동은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된다구.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소중하지, 누군가에게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좋은거야. 뭔가 크고, 더 중층적이고, 대단한 걸 찾으려면 아마도 여성적인 것들을 모두 모른체 해야 할 거야. 그래서 여성적인 게 필요한 거야.


"그러나 문간에 앉은 가장 추레한 여인들도, 가장 낙담한 비참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삶을 사랑한다. 그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의회의 법도 그들을 다스릴 수 없다고 확신했다." (『댈러웨이 부인』)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40>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멈추고 싶으면 멈추게 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대중성을 비판하는 근거의 상당 부분은 총체성을 향해 있다. '총체성'은 결정론이거나 목적론적 해석이다. 제임슨과 같은 이론가에게 있어서의 총체성은 개인이 경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은 실재보다는 구조나 체제를 작동시키는 원인-형식에 가깝다. 그런 면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경험한 실재의 풍부함을 근거 삼아 총체성을 주장하려 한다면 이는 상상의 관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총체성을 따라가다 보면 경험의 부정이 일어난다. 가끔 이런 상황이 흔하게 일어난다. '네가 뭘 알아'. '야, 그럼 너는 뭘 알고 있는데?' 


"개인 주체가 그 또는 그녀 자신이 계급에 의해 규정된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충분히 의식하면서, 순전한 명징성과 사유의 힘으로 이데올로기를 조절한다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계기에 대한 비전은 한갓 신화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체계에서는 오직 집단적 통일성(그것이 특정계급, 즉 프롤레타리아의 통일성이건, 또는 그 '의식의 기관'인 혁명적 당이 지닌 통일성이건)만이 이런 투명성을 성취할 수 있으며, 개인 주체는 항상 사회적 총체성 내부에 위치하게 된다."(『정치적 무의식』)


제임슨이 인용한 벤야민의 『역사 철학 테제』의 다음 구절을 보자.

"과거의 모든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리자로 등장하는 자는 누구라도 패자의 나뒹구는 시체들 위로 행진하는 오늘날의 지배자들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전리품들은 관례대로 그 개선 행렬 속에서 드높이 운반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문화유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사적 유물론자들은 그 문화유산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탐색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탐색할 때마다 그러한 문화재들은 곳곳에서 공포심을 가지고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 기원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문화재들이란 그것을 생산한 위대한 창조자들의 노고뿐 아니라, 그 동시대인들의 이름 모를 강요된 노동에 힘입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문명의 기록치고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니었던 것이 없다."(『역사 철학 테제』)

벤야민의 이 '성찰'을 '위대한 사유'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찬란한 문화 유산에 매혹될 때 긍정성을 갖거나 부정성을 갖는다는 말이 '문명'이나 '야만'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님도 분명하다. 문화유물을 대할 때 야만의 기록으로 읽더라도 '총체성'은 실재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총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저 너머에 있는가.



* 이 그림은 <제목 없음 126>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