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가 올바른 삶의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믿는다면 정치 행위를 도덕의 영역으로 끌고 오거나, 윤리적 주체를 연대의 정치로 밀어넣어야 한다. 정치인과 정치를 일치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튀어 나온다. 정치인이 올바른 '정치적 '의제'를 던지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인이 자신이 살아낸 삶의 결과로 그 실존의 '정치의제'를 던지는 것을 희망할 것인가. 


지금 사회는 이 두 시야 사이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뭔가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 없다. 정치적 힘은 전자의 '의제'로 발휘되기 힘들다. 또 후자의 '카리스마적 지배력'만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정치적 힘이 발생하는 곳에는 이미 중첩된 '진동력'이 작동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의제와 다층적 삶이 연동한다고 봐야 한다. 의제만으로 어렵다, 인물, 아이콘, 스승, 지도자 홀로도 어렵다. 오늘날 플랫폼이 그렇듯이 정치적 힘은 인간다움을 설명하는 언어만으로는 부족하고, 언어가 끝없이 변주되고 재생되고 파급될 장場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정치를 무엇이라고 해야할까.

 

2. 

번스타인이 아렌트를 평가하던 대목을 보자. 아렌트가 지적한, 가장 문제적인 현대정치의 징후는 무국적 인간에 대한 경고라고 했다. 그런데 아렌트의 이 언급은 투명한가. 숨긴/드러내고 있지 않는 부분이 없는가를 생각한다. 국적을 갖는다는 말이 담지할 수 있는 범위가 크다는 주장은 어찌보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큰 위력을 가진 채로 일상을 지배했었다. 예를 들자면,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저 빈곤한 땅들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해야 하도록 안내하는 지배담론들이 많지 않은가.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다. 그 땅에서 태어났다면 나의 생존을 위해 대항해야 할 지점들이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가진 권리를 드러낼 층위가 상이했을 것이다. 


아렌트 또한 18년 동안 무국적 상태로 유럽과 미국에서 거주하며 겪은 국적자의 권리를 체험했을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무엇이' 보장할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현대정치에서 무국적 인간이 겪게 될 위기를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프간을 보며, 무국적 상태로 난민이 된 이들을 보며, 이상한 배반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아프간에는 누가 남게 될까. 아프간에는 서방세계가 거부하는 세력들과 그리고, 탈출할 엄두를 내지 못한 사람들이 남을 것이다. 지난 20년 간 미국과 그 우방은 아프간에서 군사와 경제를 담당한 실질적 힘이었을 것이다. 그 지배적 힘에 조력했던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의사로 법조인으로 경제인으로 전문가로서 힘을 행사했을 것이다. 그들이 빠지고 난 후의 아프간은 어떻게 될까. 그 남은 자들은 국적이 여전히 유효한 사람들이지만, 무국적자로 난민이 된 이들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될 권리라는 게 있기는 할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렌트는 인권에 기대어 '권리를 가질 권리'를 주장한다. 무국적이란 인권이 상실된 상태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주권이 갖는 보편타당성이 무국적 인간에게는 비극을 안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극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국가/공동체가 무국적 인간에게 주권/인권을 부여해야 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게 된다. 


물론 아렌트의 이론에는 하나의 민족 혹은 인종이 국가를 장악하고, 소수 민족, 인종을 추방하는 전체국가를 힘껏 비판한다. 민족이나 종교가 국가의 법과 제도를 장악하고 난 후의 인권 상실을 우려한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혹은 국가화한 민족을 마냥 비관하고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독자적 힘에서 민주적원천을 찾기 때문이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며 평등한 권리를 통해 공동체의 운명을 습득한 사회는 민주적 성원권을 가질 기반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권리를 가질 권리는 혈연 공동체도 아니고 인종적 집단도 아닌 시민적 민주주의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아렌트를 읽다보면 거대하고 실재적이었던 국가권력 보다 인간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하는 권리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집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민이 만들어내는 공적 영역이 각 시민들의 정치 행위를 보장하고, 인권을 주장할 권리를 부여할 '권력'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의 논의에서 아렌트가 가진 위치가 여실히 드러남도 알 수 있다. 아렌트는 독일을 급하게 떠나야 했던 유대인이었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권리'를 드러낼 수 있었다. 아렌트는 독일 중심 위치에서 활동하던 지식인이었다. 그 점은 그가 가진 커다란 사회자본이었고, 그 힘은 성원권을 요구할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인권, 성원권, 국민주권, 시민권 등을 고려하기엔 현실 속의 '평등한' 논의 지평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렌트를 다시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어떻게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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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를 가리는 전쟁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대만과 한국은 아프간과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했다. 아프간과는 내전 상태에 기초한 방위조약을 맺었다는 말이다. 한국과는 동맹의 관계이므로 공동의 이익을 중심으로 서로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연하면서도 씁쓸하다. 내전은 여타의 전쟁보다 더 곤란하고 비참하다. 자신과 전쟁을 치르게 되면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승패와 상관없이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다. 더불어 아프간에서 보듯 외부 국가가 지배적 힘이 될 경우에 그 비참의 결은 더 다층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다시 겪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전쟁이고, 우리는 그런 가능성을 제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곤란한 상황에 있는가.


공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 지금은 디스토피아 속 악몽의 세계인가. 그렇다면 어느 부분이 그런가. 억압과 폭력은 유신정권이나 일제강점기, 조선시대보다 더한가. 불평등은 어떤가. 내 유년기보다 더 기회가 부족한가. 더 형편 없는 식사를 하고 더 남루한 생활을 하는가. 사람들이 입만 열면 헬조선이라 한다던데 정말일까. 지금 여기를 지옥으로 여긴다면, 그들은 대체 어떤 이상향을 꿈꾸고 있을까. 설마 내가 안락하지 않은 세상은 모두 디스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아직도 우리는, 집 안에서 집 밖에서 일터에서 공론장에서, 어김없이 타인을 겁박하고 타인을 소외시켜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잃지 않아야 할 귀중한 생명들을 너무나 어이없게 보내야 하는 상황을 대면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공포 속에서 숨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리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헬조선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무엇을 먼저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인지 검토해야 한다. 어떤 문제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더듬어 봐야 한다. 그런 이후에 이상향은 입 안에 담겨질 것이다. 허무맹랑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내 앞날을 걱정하는 이기주의가 공동체의 미래를 염려하는 이타주의와 어긋날 필요가 없는 세상을 원한다. 그 관계가 적대가 된다면 다가올 미래는 암흑이 될 것이다. 사회가 고통 속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어떻게 자신만의 행복을 동시에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일터에서 집 안에서 공론장에서, 마음 편하게 행복해도 될 시대를 원한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해야만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 이상주의가 우리를 다시 겁박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2. 디스토피아와 하나의 유토피아

우리는 '진짜'라고 말하곤 했다. 어떤 일은 사실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도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 어떤 때는 현실에 없는, 일어나기 힘든 일에 대한 열망이 힘을 발휘했다. 상상하는 대로, 바로 희망의 힘으로 인간의 시대는 창조되어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짜투성이에 꿈이 사라진 시대라고들 한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유가 '사실'의 전모를 밝히는 일인지, 저 너머의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일인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이 쓸모없는 짓을 하려는 이유는 비교적 명확하다. 사실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와 어긋날 필요가 없다,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와 등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 그런 때가 오면 명랑은 저절로 올 것이다. 

오웰과 모어를 통해서 시작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이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된 때가 1948년이란다. 조금 놀랐다. 냉전시대가 키운 덕일까. 문학평론에서 조지 오웰의 작품은 이른바 일급의 소설이 아니라고들 한다. 그런데 『1984』뿐만아니라 『동물농장』의 인기는 대단했다. 지금도 현재형이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유명세를 탄다.


그것도 놀라운 일이다. 디스토피아의 전형처럼 제시되는 '오세아니아'의 여러 상황들은 1984년이 아니라 2020년에 어울린다고들 한다. 감시자, 빅브라더, '메마른 악몽', 전체주의 국가, 폭력의 일상화. 



 



 『유토피아』는 공화국의 이상적 형태를 고민하던 토머스 모어의 작품이다. 새로운 섬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출현하는 1516년의 '유토피아'는 21세기의 현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유효할까.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구체적'인 허구를 통해 그려진다. 유토피아(천국)가 신의 섭리에 의해 저절로 오는 게 아니라,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노력들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 다른 지위를 얻게 된다. 아이들을 한없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대법관까지 지냈던 인문학자이며 정치가였던 모어는 종교개혁에 반대하며 사형당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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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의 저 유명한 말은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힘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가 된다." 보부아르가 내재성에 연결된 육체에 해석적 시선을 내놓고 난 후에 세상은 '여성'을 (두드러진 무대 위로 올리고) 문제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젠더- 페미니즘 사상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버틀러도 『제 2의 성』과 함께 시작했다고 하지 않는가.  보부아르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에 묶여 버린 '여자'의 숙명을 사회적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보부아르와 상관없이 언제나 여자의 일생은 늘 문젯거리였다. 가부장제는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허난설헌도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탄식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보부아르가 말을 뱉어내자마자 여성들이 너나없이 요동쳤다고 한다면, 이미 반응할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또 그만큼 (보부아르의 발화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킬 힘도 갖고 있었다고 봐야한다.



보부아르는 계획에 없던 글쓰기 목록이었지만, 최근 여러 곳에서 보부아르를 둘러싼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발견되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마농 그라시아가 쓴 『We Are Not Born Submissive : How Patriarchy Shapes Women;s Lives』에 대한 서평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여성의 'submission(순종, 굴복)'에 대해 '보부아르 방식(방법론)'의 분석을 시도한다.


보부아르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여성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보부아르는 당연하게도 사르트르를 복사하는 후학이 아니다. 여성주의가 만들고 있는 불편함에 대해 거리낌 없이 분석하면서, 지금 우리가 왜 다시 보부아르를 읽어야 하는지 제시한다. 여성에게 닥친 상황에 주목하려면, 여성의 "순종을 여성을 탓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종이 무엇인지 제대로 풀어 이해하는 비신비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의 문제를 드러낸다.


"가장 독립적인 페미니스트 여성도 남자들이 자신에게 던지는 정복의 시선을 즐기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고, 자기 파트너의 팔에 유순하게 안기고 싶은 순간, 혹은 더 큰 만족을 준다고 여겨지는 활동들 대신 가사 노동-잘 개켜진 빨래나 예쁘게 차려진 아침 식탁의 작은 기쁨들-을 더 좋아하는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과 즐거움은 그들의 독립성과 양립 불가능한 것인가? 지금까지 이어진 수 세기 동안의 페미니즘을 배신하는 것인가? 남자들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대하면서도 성평등을 요구할 수 있는가? " (「다시 보부아르와 여성의 순종을 말하는 이유」중에서)


가르시아는 여성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표면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거역할 수 없는 '여자의 일생'이 있는 게 아니라고, '여성의 관점에서 순종을 설명하는 최초의 현상학적 분석'을 시도한다. 나는 자유의 문제, 특히 여성의 자유를 논하는 부분에서 튀어오르는 말을 애써 뒤로 해야했다. 우선 이 서평과 가르시아가 말하는 바를 따라 읽으려고 노력한다. 조금 더 묵혀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싶다. 


하지만 보부아르의 저 유명한 말에 대해서는 한 마디 거들 수 있겠다. 보부아르의 저 선언은 '여자들'을 절대적 타자로 만들 수 있는 힘 또한 가졌다고 말이다. 보부아르가 만들었던 여자로서의 경험 전반에 대한 현상학적 참여로, 전형들이 쏟아져 나올수록, 전형적 인물들이 드러날수록, 그 반대의 인물들도 만들어졌다고 말이다. 우리는 한 겹의 질곡을 더 얻은 셈이라고 말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이라는 지옥을 설명할 때, 나를 바라보는 자를 매개자로 불러세웠다(『사르트와 폭력』). 그 바라보는 자들의 시선은 나를 객체화, 대상화시킨다. 그러면서도 주체는  때로 그 '시선'들을 필요로 한다. '나'는 시선을 내게 두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기 바란다. '나'는 바라보는 자가 없이 홀로 고독할 때 삶의 의미를 함께 잃는다. 


사르트르의 대항폭력은 지배폭력과는 다르다. 또 말에 호소하는 방식의 폭력과도 다르다. 그렇다면 지배의 언어(폭력)도 아니고, 대항의 언어(폭력)도 아닌, 제3의 언어(폭력)는 가능할까.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상호주체적 관계를 창조할 수 있을까. 보부아르의 선언이 아직까지 혼란의 중심에 있는 이유다.



보부아르를 다시 읽기 시작한다. 보부아르의 발화는 '여성적'인가. 여성이 여성동지를 가질 수 있을까.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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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에도 기술이 필요해요. 세상에 나와 얼마 안 된 친구들이 뭔가를 배우고 싶다면 바로 그 '기술'을 권하고 싶어요. 인간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하는 모든 존재들은 한 마디로 단순하게 또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던져진' 존재들이거든요. 내던져진 이후에는 '별꼴 다' 보고 듣고 하는데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며 스스로를 에둘러 폄하하면서도 안정감을 회복하려 하죠. 같은 꼴의 운명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어떤' 던져진 존재들은 그 편평한 지반을 못 견뎌 합니다. 허둥대고 버둥거리며 특별한 '자신'만의 시원을 찾고 싶어합니다. 자연에 내던져진 모든 존재들 속에서 바로 그 특수한 시원을 찾으려던 존재들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거죠. 자연에서 '그들의 역사'를 분리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한 듯 합니다.


다시 첫 문장으로 가서 저항과 기술을 생각해 봅니다. 뭔가를 배우고 싶은 인간이 어째서 저항을 하게 되는지는 그 내력을 보세요. 자연으로부터 분리를 꾀하던 인류의 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인간에게 저항은 뗄려야 뗄 수 없는데, 어떤 저항은 내력도 맥락도 사정도 없이 돌출하기도 한다는게 문제죠.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불가능한 독립'을 꿈꾸게 된 데에는 인간 옆의 인간 그 옆의 인간 또 그 뒤의 인간과 함께 이룬 저항이었습니다만, 그 편평한 지반을 흔들고 싶어하는 특수한 분리 시도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억누르기 힘든 인류의 내력이 당신을 저항하게 만든다면 기술을 사용하라고 권합니다. 의도라거나 의지라거나 정신이라든가 믿음이라거나 하는 것들보다 중요한 것이 기술입니다. 특히 기계적인 기술이 좋습니다. 똑딱똑딱 어느 지점에서나 한결같이 지나가는 시간과 펄떡펄떡 쉼도 없이 넘나드는 심장을 닮은 기계적인 기술들은 대개의 경우에 좋은 일들이 함께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떠나 온 자연과 가까운 순간을 경험하도록 합니다.


봄날이 오나 봅니다. 1시간 전까지 펑펑 내리던 눈발이 사라진 하늘을 보세요. 혹한을 일으킨 기술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가려졌던 태양이 빛의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봄날에 얕트막한 보도블럭 아래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자리를 잃은 자들이 쉼없이 잔뼈를 이곳저곳 심어보려 한들 뭐 그리 큰 해가 되겠습니까. 그 저항들은 자연의 기술인데요. 저항이 자연으로 다시 태어나는데요. 


그런데 어떤 저항은 잔뼈가 되고 또 어떤 저항은 가시가 됩니다. 역사는 잔뼈를 굵은 줄기로 키워내는 개체들을 영웅으로 다잡아 말합니다. 성공한 저항은 잔뼈이며 실패한 저항은 가시가 됩니다. 저 서양의 옛날 사람 '멕베스 같은 인물'들이 뱉어내는 진심들을 들어보세요. 잔뼈와 가시를 어떻게 분리하는지 살펴보세요. 편평한 지반이 어떻게 배반되는지 확인해보세요. 


"우리의 어제는 우리 모두가 죽어 먼지로 돌아감을

바보들에게 보여주지.

꺼져라, 꺼져라, 단명하는 촛불이여

인생이란 걸어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잠시 동안 무대 위에서 거들먹거리고 돌아다니거나

종종거리고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서 잊히고 마는 처량한 배우일 뿐.

떠들썩하고 분노 또한 대단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바보 천치들이 지껄이는 이야기"

(『맥베스』5막 중에서)

여러분도 알다시피 참고할 만한 것이 없는 자가 잔뼈의 기술을 배우고 싶어하며 그냥 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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