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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한껏 부풀려진 상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야생의 삶을 결코 잊지 못하는 존재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그냥 동물로 인식하고 싶어한다. 『노루인간』의 다음 구절을 보자. "열일곱 살이 되자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숲에서 보내기로 작정했어. 그리고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치르는 날에 반항심은 절정에 달했어." 저자는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홈스쿨링을 해야 했던, 사회부적응으로 문제를 겪는 소년이었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의 생활세계에서도 인간의 굴레가 족쇄처럼 주어져 있다고 느꼈다. 그러던 저자는 숲이 자신을 맞이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노루와 같은 동물들과 섞여 살면서 비로소 "나를 사물의 질서 속에 있는 나의 진정한 자리로 되돌려 주었"다고 고백한다.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책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 동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동물의 관계를 구축한 저자의 경험은 탈자본주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영감이 될 수 있겠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수사슴과 정면으로 마주쳤어. 늦여름에 사슴이 빽빽 우는 소리는 자주 들었지만 과감하게 다가간 적은 없었어. 열 살 짜리 소년에게 한밤중에 들리는 거친 울음소리는 너무나 위협적이었어. 예상치 못한 마주침에 나는 겁이 나서 돌처럼 굳어버렸어. 내 앞 1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육중한 몸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진동하면서 내는 그 생물이 발산하는 힘에 압도당하고 말았어. 심장이 얼마나 쿵쿵 뛰던지 그 소리가 수백 미터 주위에서도 들릴 지경이었어. 돌연 그가 나를 향하더니 쉰 목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어.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암사슴들이 그보다는 조금 낮지만 강력한 소리로 화답하기 시작했어.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덜 떨렸어. 하이파이 시스템의 저주파처럼 말이야. 마침내 수사슴이 방향을 바꾸었어. 나도 뒤돌아섰어. 그 수사슴 때문에 거기 갔던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이었어. 숲의 우여곡절이 두 존재를 만나게 했듯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어. 얼마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면서 그 수사슴이 내 짧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교훈을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동물은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 했어. 야생이 세계는 초심자에게는 문을 열지 않아. "(『노루인간』)


그렇다면 이 책의 소개말에서  "우리는 자연에 복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보자.  늑대를 개로 길들이듯이 노루를 길들이지 않고, 자신의 몸을 노루에 맞춰 길들임으로써 숲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나무랄 데가 없는 해석같기도 하다. 또 인류세로 접어든 인간의 반성과도 같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자연에 대한 뭔가 초월적인 믿음으로도 들린다. 저자가 노루와 함께 했던 7년의 생활에 대해서는 상상력 말고는 달리 짐작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왜 그곳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는 더듬거리며 이해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모아놓은 다음의 말들도 읽어본다.  "무례한 인간의 행동, 숲의 삶을 더 큰 관점에서 생각, 우리 행성 지구의 미래에 대한 존중이라는 기쁨과 걱정, 종種 간의 사려 깊은 동거의 의미 ..." 등은 "도토리를 주워 먹고, 이슬을 받아 물을 마시고, 노루처럼 낮에 쪽잠을 자고, 감기약으로 담쟁이덩굴과 소나무 싹으로 치료를 하며, 노루를 따라 하루 5킬로 정도 이동하며 생활한 7년"동안에도 인간의 <그것들>을 버릴 수 없었음이 아닐까.



절반의 인간, 절반의 노루가 아니다. 노루였던 인간의 고백에서 소외된 인간은 보이지 않는다. 낯설음도 없어 보인다. 이토록 이색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저자의 경험을 기꺼이 껴안기 꺼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노동하는 인간과 노루의 노동의 간격에 닿아 있다.  인간소외의 문제를 고민하던 마르크스가 자연법을 뛰어넘을 때 중시했던 노동개념을 꺼내들어온다. 노루인간과 기계인간은 노동의 소외를 제거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연과의 상호 작용은 너무나 긴밀하고 실존적으로 내밀해서, 우리는 자연을 인간 신체의 “비유기적” 확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노동할 때 자연은 인간적 보철prosthesis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볼 때, 마르크스는 인간들에 관한 최근의 논쟁, 즉 기술을 사용해서 사이보그가 되는 인간들에 관한 논쟁을 [일찌감치] 예견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자연과 관계할 때 이용하는 기계들은 우리의 살만큼이나 우리 신체의 일부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살은 단지 '웨트웨어wetware의 일종으로 나타난다.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노동 개념은 아주 급격히 확장된 인간 개념, 즉 자연 전체를 인간의 '비유기적 신체'로 통합할 정도로 확장된 인간 개념을 낳는다. 우리 자신의 활동에서 낯설어지면서, 우리는 또한 우리 노동이 포괄하는 더욱 확장된 형태의 인간으로부터도 낯설어진다[소외된다]." (『하우투리드 마르크스』,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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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초원님에게 생스투유~ 책 담아갑니다

초원 2021-11-16 12:18   좋아요 1 | URL
이런 한갓진 곳까지 걸음 해주셨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며칠 전 프레이야 님이 올려주신 만요슈, 잘 읽었답니다.
책의 기운을 널리 전하시는 모습도 좋았습니다.

이번 주는 따뜻하네요.
고맙습니다.
 

1.

경제는 좋음과 연결되지 않고 옳음과 연결되는데, 이미 좋음과 옳음 이전에 축적들이 있다. 클레멘트가 교부로서 청빈논쟁을 통해 부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장한 일을 떠올려보자. 클레멘트는 1800년 전 인물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성경 구절을 해석한 일로 유명하다. 십계명을 지켰는데 부자라는 이유로 천국에 갈 수 없을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어렵다고 한 것이지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고 운을 뗀다. 구원은 재산의 여부보다 탐욕과 욕망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배고픈 자들을 도울 수 있고 헐 벗은 자들에게 옷을 나눌 수 있단 말이냐고 재화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부자는 그 자신보다는 형제를 위해 재산을 소유하라고 말한다. 


사제가 추구하는 삶은 평신도의 삶과 다르므로 재산을 포기하고 완전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제의 청빈의무는 “너희 가운데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성서 구절을 강조한다. 악이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욕이라고 주장하며 그 사용법, 사용기술, 사용기능으로 초점을 전환시킨다. 그렇다고 수도원이 교황이 재물을 갖지 않았겠는가. 수도원이 번성한다는 뜻은 이미 재산이 그득함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생명의 나라처럼 말이다. 


1000년이 지나도 수도원의 부유함이 지속된다. 13세기에 들어서면 그레고리우스 9세 교황이 재화에 대한 소유권은 기증한 자에게 있다고 수도회는 소유권을 가지지 않고 사용권을 가질 뿐이라고 칙서를 공포한다. 교황 이노센트 4세는 수도회 모든 재화에 대해 자신이 소유권자임을 밝힌다. 


2.

만약 이 시대가 변화해야할 필요가 있다면,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선 소유와 채무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소유관계와 부채관계를 뒤져야 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에서 털끝만큼이라도 거리를 두고 싶다면 삶이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지, 삶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낡은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중요성을 갖는 '시대정신'이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대체로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시대정신이란 "시대를 반영하는 역사가 자신의 정신일 뿐"이라고 한 괴테의 규정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시대정신의 자리를 정해주고 이를 정의할 줄 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을까? 시대정신의 발견은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면서도 동시에 지성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가의 최고 과제라는 것이 역설적 진리이다." (『의식과 사회』)

"부채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공제’ 기계 혹은 ‘포식’ 기계포획 기계이자거시 경제의 규정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구인 동시에하나의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부채는 또한 집단적 개인적 주체성의 ‘통치’ 및 생산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부채 경제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다. (상호부조연대협력만인을 위한 권리 등과 같은집단행동의 무력화, ‘임금노동자’ 및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조직행동 및 투쟁 기억의 무력화를 보라대출(금융)을 지렛대 삼아 이룬 경제 성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회 보조은퇴 연금직업 교육 등을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집단적 권리로서 바라보는 주체들과 마주하는 것은 ‘채무자’ 소규모 자산가소액주주를 통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부채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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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성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신뢰는 다리를 놓지요."

새로 나온 책들을 보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춘다. 푸른 꽃이 일렁이고 다리 위로 미풍이 날아오르는 봄날, 그 봄날의 가시를 본다.

  

소개글에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감정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 보도록 하면서, 차분하게 다독여 주는 책이라고 써 있다. 31가지 감정이 하는 일을 의인화해서 재치 있게 표현했다고 한다. 

기쁨이 책을 읽으면서 친구에게 달려간다. 미움이 연결선을 물어 끊어버리고 통화가 끊겨버리는 장면도 보인다. 열등감은 철창을 만든다.

감정은 주관적이므로 아이들마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으므로, 꼭 이 장면들을 고집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을 계기로 아이들이 각자의 감정을 돌아볼 기회를 갖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장면들은 뭔가 마음에 꺼스러기를 만든다. 예를 들자면 거대한 신뢰가 흐뭇한 표정으로 두 팔을 들어 다리를 받치고 있다. 신뢰가 하나의 도구를 이용한다. 신뢰가 미소를 짓는다. 신뢰는 왼팔과 오른팔을 평평하게 유지해야 한다. 한쪽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진다면 곤란하다.   


나는 가끔 세상 쉬운 일을 어려워 쩔쩔매는 상황에 빠진다. 이 그림을 봤을 때도 그랬다. '쉽고 간단명료하게 알려 주는 그림책'을 보고서 마음이 뒤죽박죽이 된다. 감정들을 차분해도, 너무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해서 그런가. 다행히 이런 생각을 자주 입 밖으로 내지 않아서 창피를 면한다. 


아무튼 동물들이 튀어 나와 감정을 설명하는 그림들을 보자니, 동물에게도, 야만인에게도 상호부조가 기본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 『만물은 서로 돕는다』가 생각난다. 이익을 위해 진력하고, 경쟁하며 물어뜯는 과정에서 인간 역사가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요약하면 크로포트킨은 황당할 수도 있다. 아니키즘의 맏형인데.) 


19세기는 다윈이 기독교 신앙에 충격을 안기면서 과학이 도덕의 토대가 되던 시절이었다. 진화론은 자본가들의 경쟁으로 풍파를 겪는 사회에 훌륭한 해설서 노릇을 했다. 과학지식은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감정을 다스릴 훈련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과학지식이 더 넓게 퍼져갈수록 공업의 시대는 당연한 현상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크로포트킨은 어떻게 과학을 신뢰하면서, 공업국가를 낙관하면서, 상호부조론을 들어 아니키즘을 제안했을까.



크로토프킨은 세기 말의 혼란 속에서 무정부주의자로 이름을 알렸다. 아니키즘 운동은 "조직적 범죄"라고 비난받았고, 운동가들에게도 따가운 시선이 보내졌었는데, 크로포트킨에게는 달랐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귀족으로, 지리학자로, 반체제 운동가로  "가장 위대한 망명가"로 환대받았다. 


상호부조론 속 동물 세계는 공존한다. 피에 굶주린 개체들이 전투를 통해 살아남아 진화하는 세계가 아니다. 시베리아의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의존하는 조류와 포유류를 관찰할 수 있다. 만물은 서로 깊은 관련 속에 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류도 초기 단계에서부터 상호부조가 디폴트로 작동하고 있었고, 문명화된 이 시대에도 가장 진보적인 제도를 통해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지리학, 물리학, 생물학, 전자기학, 천문학을 중심으로 사회이론을 전개한다. 물질도 에너지도 동물도 인간도 모든 만물은 진화하며 상호의존한다. 인류도 수평적으로 상호 협동하는 코뮌 공동체 위에 거주할 수 있다. 신비롭다.


"오스트리아 전쟁포로들이 키에프의 거리를 지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을 때, 이를 본 러시아 농촌 여인들은 그들의 손에 빵이나 사과 때로는 동전 따위를 건네준 바 있다. 수많은 러시아 남자와 여자들은 적과 동지, 장교와 사병 등을 가리지 않고 다친 자들을 돌보아주었다.


전쟁이 벌어진 프랑스와 러시아에서 마을을 떠나지 못한 늙은 농민들은 민회를 열어 '그곳(전쟁터)'에 나간 사람들의 논밭도 경작해주기로 결정하고 적의 포화를 무릅쓰며 쟁기질을 하고 씨를 뿌렸다. 프랑스에서는 전국에 걸쳐 협동 취사장과 공산당원 식당이 생겨났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벨기에를 위해 자발적인 원조를 보냈고, 러시아 인민들은 국토를 유린당한 폴란드인에게 원조를 보냈다. 벨기에와 폴란드를 돕기 위해 벌어진 운동에는 무보수로 참여하는 자발적 행동과 에너지가 엄청나게 발휘되고 있다. 여기서는 '자선 행위'의 속성이 사라진 대신 순수한 이웃돕기가 이뤄진 것이다."


가만히 크로포트킨의 말들을 듣는다. 러시아 농촌 여인들이 건넨 빵과 사과, 동전에 깃든 마음은 무엇일까. 다친 자들을 돕는 마음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늙은 농민들이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상황에서 쟁기질을 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영국과 미국이 국가적 원조를 보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 마음들을 전부 다 동일한 상호부조와 연동할 수 있을까.


'순수한 이웃돕기'가 지배동력이 되는 아나키즘의 사회를 위해서는 또 어떤 마음이 필요할까. 크로포트킨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통해 정치적으로, 더불어 경제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가 가진 자 편에" 서 있는 탓에 불의와 억압, 독점의 체제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과학을 업은 자본주의의 전개 경로에 국가독점 자본 체제가 세워질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빵의 쟁취』는 소수 권력자에게 집중된 세계를 비판한다. 단순한 공정함보다 상호부조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수단 사유화의 늪에서 꺼낼 힘, 국가를 폐지할 힘은 개인이 자율성을 회복하는 결단에서 나올 수 있을까. 국가로 자본으로 축적된 생존경쟁의 결과를 뒤엎을 힘이 이웃과의 연합으로 가능할까. 의지로 혁명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오늘 카불에서 일어난 일들을 듣고 있다보면 우리는 아득한 세계의 비참을 마주하게 된다. '국적'으로 보호되는 권력의 실상은 어떤가. 그들의 고난이 국가로부터 국가에 의해 국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인지 ... 누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가 있어 고난에 처하고 국가가 없어 보호막이 사라지는 세계에서 빵은 어떻게 쟁취할 수 있을까.


또한 생산수단이 인류의 공동재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어떤 '러시아 여인과 늙은 농부가 만들어낸 연합'에 얼마나 닿아 있을까. 생산수단은 이미 권력자의 재산권으로 보호되고 있는데, 어떻게 그 권한을 폐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가. 그 혁명이 가능하더라도 그 혁명이 상호부조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믿어질 수 있을까. 


가끔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써내려간 문서들을 보다보면 이상하게도 봄날의 가시를 떠올린다. 그토록 악한 감정들이 생산되던 시대에 어떻게 레지스탕스가 태어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유대인을 다락방에 숨겨주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살아남기 위해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 뭔가를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감정을 알아야 한다. 주관적인 상태로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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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아요' 취소 소동 


인간의 길은 애처롭거나, 위태롭거나, 열에 들떠 있을 때 혹은 따분할 때 드러나기 십상이다. 사람이 살아가 는 동안 발생하는 수많은 사태와 경험들에 '인간의 말'이 섞일 때에야 비로소 그 현상들이 '길'로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이란, 문법도 없이 떠돌아도, 그 자체로 하나의 공통되는 기반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내 가 쓴 글이 그랬듯이, 어떻게든 세상에 개입하려는 흔적들이라서, '글' 홀로는 어차피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이 라서, 명암이 존재한다고 여겼다. 글이 연대나 덕성, 교양 같은 종류의 토대가 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어떤 '사이'에 끼어야만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좋아요가 취소되는 경험을 하면서 글이 아닌 기호 의 세계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추적하게 되었다. 


알라딘 블로그에 글쓰기는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리의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자신 이 저자로 위치지어질 수 있지만 포스팅되는 순간 이미 하나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글쓴이 자신마저 '포스팅 된 글'을 마주하게 된다. 발표된 글은 저자 자신이었으나 곧 자신이 것이 아닌 처지로 이동하게 된다. 이런 생 각이 강해서일까, 내게는 잘 쓴 글도 무식한 글도 없었다. 그래서 몇 년동안 썼던 블로그 글들이 쓸쓸하게 던 져져 있었더라도 특별히 신경쓸 일은 아니었다. 실제 인간관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글쓰기가 아니었기 때 문이었다. 나의 고립된 입장이 글의 운명을 통해 거리두기를 가능하게도 했다. 글이 내던져지고 방치되고 실 패하는 양상은, 손톱만큼이라도 톺아볼, '사이' , 틈새로 안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 나는 아팠고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풍부하게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닥치는 대 로 전화를 하고, 아무 곳에라도 찾아가 나와 어울려 달라고 애원했지만 대개 그 결과는 계몽으로 끝맺음하곤 했다. 이곳 알라딘에서도 나는 절박하게 글을 썼고, 환자가 된 내게 필요한 '관계'를 요청했었다. 다른 곳과는 조금 다른 달콤한 개입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곰*님, 클*님 등의 유명한 알라디너들이 찾아와서 '좋아요'를 누 르며 건넨 댓글들에 안타까운 인간애가 묻어났다. 매일 수천 개의 생각들이 태어나고 구르고 회전하는 알라 딘에 이름을 달고 건네는 말들은 아름다운 개입임에 틀림없었다. 그 분들 덕에 좋아요를 받고 댓글도 얻는 행운도 누렸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병을 핑게로 치료관계를 지속할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도 몇 분이 응원하는 마음으로 좋아요를 누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정성에 대한 응답을 못 드리고 있어서 …할 말이 없다. 


그렇게 나는 좋아요의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달 전쯤 새로운 책을 검색하러 들렀을 때 하나의 글 에 '좋아요'가 추가된 것을 확인하는 메시지를 봤다. '좋아요'는 하나의 메시지가 아니니까, 힘내세요에서 조 금 더 분발해주세요, 반가워요, 왔다 갑니다 등의 다양한 의미가 있을테니, 고맙고 미안했다. 그런데 지난 달 에야 그 좋아요가 취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취소가 가능한지 몰랐는데 조금 착찹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의 착각인가 싶어서 그런 기능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내 글에서는 테스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법석에 개의치 않을 다른 서재를 찾으려다가 머릿속에 작은 소동이 일었다. [나는 생각보다 늘 한 걸음 더 비루하구나. 싫어요나 관심없어요는 괜찮은데 좋아요의 취소는 싫은건가. 그랬구나. 두려움은 좋아요의 없음이 아니라 싫어요와의 거리감에 있었구나.] 


오늘날 '좋아요'를 둘러싼 관심/무관심은 손가락으로 춤추기 운동이기도 하고, 자신의 손가락에서 인간의 길 을 열어내려는 요령이기도 하다. 한 번의 클릭으로 다수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으며, 무한하게 관계를 확장 해 나갈 수도 있다. 어렸을 때 교육받은 인사 예절은 길고 지난한 사회생활에 중요한 동력이 될 수 있듯이, 이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매너란 새벽에 내려 쌓인 눈기둥처럼 혹독한 시절을 보낼 난방시스템과 같다. 좋 아요와 좋아요 취소는 여러 의미를 함축하는 기호다. 



2. 관계는 덕이고 덫이다 


지난 해 내내 주야장천 무정사회와 사회자본을 생각했다. 자유로운 글쓰기로 덕을 얻으려는 노력이야말로 완전한 경제적 문제이기에, 그래서 고용계약이 아니라 생산계약이 필요하고, 봉합경제가 밀봉경제로 이행해 가는 비용을 최소화하자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좋아요/좋아요 취소 현상은 진부하거나 부정적이지 않다. 인간 의 언어로써 세계를 재현하려했던 과거 역사를 보자. 신성과 이성과 지성을 두고 벌어졌던 대단히 치열한 논 쟁들이 세계원인과 초월세계의 복잡한 장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과 글'이 인간의 절망과 신의 부재만 드러낸 채 끌려다니고 있다는 의심도 지울 수 없지 않은가. 


좋아요 현상은 기호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말과 글을 하나의 사물-기호로 대체하는 시도로 볼 수도 있다. 좋아요 현상이 영혼이 없는 행위라거나 서사가 없다거나 상업적이라는 지적들은 부적절한 문제제기 다. 대중의 양심은 그런 자리에서 나오기도 하고, 평등이란 자리를 확보하는 데서 오기보다는 관계와 위계를 지우는 데서 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좋아요 한 표는 1인 1표에서 1인 10,000표를 찍을 수 있겠으나, 그 관계는 그렇게 파괴적이지 않다. 다만 좋아요에 무정이 담겨질 수 있다면 말이다. 


십몇 년 전 퇴사를 하고 찾아간 아카데미에서 따돌림을 당할 때 말을 걸어준 분이 여*님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성공한 알라디너셨다. 조직운동가이며 직장인이며 예술가인 그 분이 개인적인 시간을 내서 뭐가 문제인가를 내게 물었었다. 작은 식당 안에서 손대지도 못한 음식을 앞에 두고, 민감성의 기반을 무너 뜨리고 감수성의 시대가 되었다고 말했다. 상세한 기억은 없지만 내가 주장한 바는 '민감성과 감수성'의 대립 에 대한 불만이었다. 마치 무분별한 자극과 충동의 지점에 민감성이 있고, 감수성은 타자를 포용하는 민주 와 인권의 지점을 드러낸다는 듯, 정서와 태도를 강요하는 조직들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세상이 관계중심으 로 사람들을 괴롭힐 때 필요한 것은 관계를 유보하고, 감(수)성을 해체할 계기라고 … 혼자 떠들다가, 난감해 하는 여*님을 느꼈다. 나는 서둘러 다음에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며 종결의 인사를 건넸고 빠르게 퇴장했다. 아직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여*님은 여전히 좋아요 현상의 한 자락을 어디선가 성공적으로 펼치고 있을 것이다. 


관계는 덕이고 덫이다. 너와 나는 어떻게 결합하고 헤어져야 하는가. 너와 나는 어디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 는가. 덕이 본성이듯 덫도 그렇다면, 이 두 항의 얼마나 멀리 떨어져야 안전한 시차를 경험할 수 있게 될까. 


"연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해주는데, 우리는 이것을 타인의 불행에서 생겨나는 슬픔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행복에서 생겨나는 기쁨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 다음 타인에게 잘 대해준 이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호감이라 부를 것이며, 타인에게 잘못 대해준 이에 대 한 미움을 분개라고 부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 것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때까지 아무런 정서도 갖지 못하던 것에 대해서도, 만약 우리가 그것이 우리와 유사한 것이라고 판 단한다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우리와 유사한 것에 대해 잘 대해준 이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며, 반대로 우리와 유사한 것에 대해 잘못 대해준 이에 대해서는 분 개하게 된다." (『윤리학』, 스피노자) 


타인의 행복에서 생겨나는 기쁨은 모방이다. 좋아요 춤추기는 쉬이 모방된다. 정서 모방이 정서적 수동성을 강화한다는 스피노자의 논리와 맞닿게 되더라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정서 모방을 따라 지성이든 아니든 우정을 맺고, 그 사랑이 덫이 되더라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손쉽게 좋아요로 연결될 수 있을텐데, 까다롭게라도 사랑해요로 이어질 수 있을텐데, 아주 드물게라도 '별들의 우정'으로 엮일 수 있을텐데 왜 우리는 오늘 적이 되었는가. 


너와 나는 왜 평등한 곳에서 만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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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로나마 시대의 정신들을 쫓아보고자 했다무수한 독자들이 믿고 따르던 길을 걷다보면 염치 정도는 아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긴 시간 책상머리에 붙어있다 눈을 들어보면 글자가 그득한 노트와 눈물자국뿐이었지만그 길이 나쁜 일은 아닌거라 생각했다그리고 '시대정신'들에게 긴 세월 영화를 안겼으니 실패한 독자의 길이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여겼다.


세상은 여지없이 재앙을 만들어낸 입구로 누군가를 안내한다말이 시대의 정신일리가 있는가말은 늘 글자였고 이미지였고 매체였다말이 말할 수 있는가. '시대정신'들은 '말 자체'가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들은 비평문을 갑옷처럼 두르고 무서운 '메신저', '인간매체'무수한 삶에 달라붙어 호령했다. '네가 먹는 음식을 돌아보라네가 선 곳을 점검하라네가 말하는 본새를 자각하라너희는 무고한 시대 정신을 다잡아 괴물의 먹이로 만드는 양아치다정신은 판매되는 것이 아니고 욕설은 교양이 아니다. 너는 쓰레기를 줍고 있다, 너는 실패한 떨거지 인생이다.'


그들이 쌍심지선 눈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그들의 동료인가 아니면 형식을 내팽개친 지식들에 열광하고 편견을 고수하는 대중 독자인가그들의 정신력으로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이 나라는 썩어가는 절망의 시간 속에 있다그렇다면 그런 시대에 지혜는, 내적으로도 태도로도 발화의 모양새로도 배치됨이 없어야 한다는 비평문이 간섭하는 바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들어가어떻게 작용하는가누군가가 부를 일구고스타일을 만들어 성공하고세력의 말을 모아 돌을 던지는 과정에 무엇이 사용되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는가.


내가 정신들을 좇았던 일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그들이 스스로를 시대정신으로 삼고자 했던 일도 잘못이 아니다내게 남은 것이 염치가 아니라 수치라고 해서 '누구'의 '잘못'일 수는 없지 않은가지금 극적 시간 속을 살고 있는 나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잘못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일이다잘못에 대한 사유란… ''을 끝없이 추동해야할 <지배로서의 정치>를 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이다.


지배자로서 ''의 위치는 얼마나 유혹적인가어느 누구도 폭력만으로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고 말한다순수 폭력이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그러나 순수 정신순수한 마음순수한 말, 순수한 행위는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깊고 순수한 ''이 절망의 시대를 건널 방주라도 된단 말인가타락하지 않기 위해서 글쓰기를 한다고 여긴다면 글은 이미 지배자가 된 것이다지배로서의 정치는 유예의 시간 속으로 삶을 욱여넣는다.


"역사를 하나의 소송으로 기술하기. 이 소송에서 인간은 말없는 자연의 대리인으로서 창조에 대해, 그리고 약속된 메시아가 오지 않은 데 대하 고소를 제기한다. 그러나 재판정은 미래에 올 것에 대한 증언을 청취하기로 결정한다. 미래를 느끼는 시인, 미래를 보는 조각가, 미래를 듣는 음악가, 미래를 아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비록 모두가 메시아의 도래를 증언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판결을 내리지 못하는 재판정은 감히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자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새로운 고소가 끊이지 않고 새로운 증인들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고문과 수난도 있다. 배심원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인간인 원고와 증인들 모두를 똑같이 의심하면서 듣는다. 배심원 자리는 그들의 자손들에게 세습된다. 마침내 배심원들은 자신들의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마지막에 그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원고와 증인들만 남게 된다." (『한 우정의 역사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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