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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장과 '조직'은 자본주의 사회를 근거짓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시장의 가능성들이란 …  오늘 아침의 저 푸르고 시리도록 맑은 하늘을 만끽하는 모든 생물들에게 닿았던, 자유의 향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조직으로부터 시장'이라는 생산양식이 짙게 응축된 봉합경제에서는, 그 편향성으로, 뭉게 구름이 뛰노는 저 하늘마저 즐길 수 없도록 노동자를 몰아대고 있다. 


'신봉건주의'적 틀로 해석하게 될 때야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의 양상에 주목하길 바랐다. 봉합경제에서는 대결해야 할 지점이 뚜렷하다. 시장을 비판할 게 아니라 '조직'에 주목해야 했다. 누구도 홀로 시장에 참여하지 않는다. 한 명의 자본가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 창의적 아이디어를 마구 쏟아내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날만큼 댓가가 주어질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한 명의 노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쉬지 않고 노동운동을 하더라도 그 영향은 그렇게 커지지 않는다. 한 명의 학자가 제 아무리 24시간 365일을 계급론과 노동가치설을 연구해 보고서를 써내더라도 그 실재는 크게 진동하지 않는다. 주체를 예속적 위치에서 벗어나게 하겠다고 핏대를 세울 게 아니라, 개체들의 놀이터, 쉼터, 일터, 공터를 돋워야 했다. 체계나 제도, 질서 등의 무생물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생물에 주목해야 했다. 위계질서로 고착된 조직은 '조직'이라 부를 수 없다. 주체를 세울 수 있는 곳은 노동자, 한 사람의 내면이 아니라, '조직'이다. 조직의 주체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역사는 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조직'들의 출현으로 전도된다. 이것이 하나의 계급이다. 


현대 신봉건주의에 상존하는 계급이 있다면 당연히 '시민'이다. 산업자본주의가 형성되던 시기에 부르주아는  여러 굴절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 부르주아지라고 부를 계급은 이미 제도적으로 체계로 흡수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유연한 '조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한 명의 부르주아가 변절하느냐에 합류하느냐에 따라 흔들리지 않았다. 그랬다면 계급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조직'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노동이 그들의 생존지위를 흔들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나 노동자다. 아이가 태양에게 묻는다. 어제도 그제도 어디갔어요? 하루종일 비만 내렸어요. 태양은 답하지 않는다. 아이는 어느 순간 알게 될 게다. 태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노동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노동을 어떤 위치에 놓던지 간에 항상성을 갖는 노동자의 위치는 인류 성립의 본질이다. 노동자가 일터로 가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그곳은 일터가 아니라 전쟁터다. 노동자는 적극적으로 생산계약에 참여해야 한다. 그 계약은 근무시간과 보수에 한정하는 고용계약이 아니다. 모든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므로, 계약은 총체성을 지녀야 한다. 


2.

하나의 문제틀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다. 수십 번 대지가 붉으락푸르락 변해가고 있었는데, 아직도 끄적거리고 웅얼거리고 더듬더듬 짚기만 한다. 지지부진 하다가 간혹 참조할 흥미로운 책이나 자료를 발견하게 되면 다시 뽀드락지 올라오듯 서술 욕구가 솟아난다. 지난 달 『불쉿 잡』 목차를 보다가도 그랬다. 세상의 쓸모 여부로 직업을 바라보는 일이 탐탁치 않지만, 경험적이며 실증적인 온갖 자료들을 하나의 문제틀로 만들어 가는 작업은 여전히 힘을 만든다.

  

도서관에 희망도서를 신청하려고 했더니 이미 누군가 대출중이었다. 예약을 걸어 놓고 기다리다가 며칠 전 대출해 왔다. 눈대중으로 읽었고 어떤 부분은 착실하게 짚어가며 다시 읽으려 한다. 역시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답게 1장에 “마피아 행동 대원은 왜 불쉿 직업이 아닐까?”다. 불쉿 직업이 종사자에게 어떤 고통을 유발하고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여러 번 반복되는 사실 중 하나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을 불쉿이라고 여기면서 정신적 폭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레이버가 던진 이 문제의식을 한 자락 잡고서 불쉿 직업과 노동 존엄성과의 관계를 다시 들여다봐야겠다. 그런데 불쉿 직업의 확장이 자본주의의 위기인지 부흥인지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책을 기다렸던 이유인 7장의 “경영 봉건제도하의 정치와 문화는 '원망의 균형'으로 유지된다”의 한 단락이다. 


"경제의 금융화와 정보산업의 만개, 그리고 불쉿 직업의 확산 사이에는 원천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기존 자본주의 형태의 재측정이나 재조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과거의 것들과 깊은 단절을 가져왔다. 이렣게 말할 수도 있겠다. 불쉿 직업의 존재가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 증식하는 한 가지 이유는 현재 시스템이 자본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아니면 적어도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혹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 밀턴 프리드먼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자본주의는 아니다. 그것은 점점 더 지대 추출 시스템rent extraction으로 변해간다.


이 시스템의 내적 논리, 마르크스주의자가 좋아하는 표현으로는 이 시스템의 “운동 법칙”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경제와 정치의 필수 조건들이 대체로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영주, 봉신, 가신의 끝없는 계층제를 만들어 내는 똑같은 성향을 드러내는 중세의 고전적 봉건제도와 닮았다. 다른 면에서는(특히 그 경영주의적 에토스는) 심오하게 다르다." (313~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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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는 머루밤이다. "門을 연다 머루빛밤한울에 송이버슷 내음새가 났다"에 가깝다. 검은밤이 아니라 머룻빛 밤이다. 새송이버섯은 알지만 송이버섯 냄새는 모른다. 그래도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백석의 시는  머루 밤의 말방울 소리다. 소금을 나르는 당나귀가 서둘러 돌아오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머루 밤만 그득하다. 


여우난곬족族첫 머리는 명절날 엄매 아배 따라 큰집으로 가는 아이가 있다. 아이를 따라 개도 간다. 


"저녁술을놓은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달리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하고 숨국막질을하고 꼬리잡이를하고 가마타고시집가는노름 말타고장가가는노름을하고 이렇게 밤이어둡도록 북적하니논다"


「오리 망아지 토끼」에는, 아배 지게 위에 올라타 산으로 간 까닭에 토끼잡이라도 하려다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난 토끼가 아쉬워 울상을 하는 아이가 있다. 아배는 망아지 사달라 조르는 아이를 달래려 망아지더러 이리 오너라 한다.


"장날아츰에 앞행길로 엄지딸어지나가는망아지를내라고 나는 졸으면

아배는행길을향해서 크다란소리로

-매지야오나라

-매지야오나라"


아이는 자라고, 여승을 만나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을 함께 한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방 안에서 쫓겨난 거미 가족들을 염려하는 어른이 된다.

"거미새끼하나 방바닥에 날인것을 나는아모생각없시 문밖으로 쓸어벌인다

차디찬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쓸려나간곧에 큰거미가왔다

나는 가슴이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쓸어 문밖으로 벌이며

찬밖이라도 새끼있는데로가라고하며 설어워한다"


백석 詩의 아이는, "노란 싸릿잎이 한벌 깔린 토방에 햇칡방석을 깔고" "호박떡을 맛있게도 먹던" 아이는, 산새도 오리도 노루도 토끼도 놀던 아이는, 무섭고 아픈 기억을 넘어선 어른이 되어 있다. 마술이다. "어치라는 산새는 벌배 먹어 고읍다는 골에서 돌배 먹고 아픈 배를" "아이들은 띨배 먹고 나았다고 하였다"는 


가끔 문학은 쓰라린 무엇이 아닌가 싶어진다. 아름다운 동화로 읽으면 더없이 맑다. 낮에 놀던 태양이 밤에 다시 떠서 발밑을 밝혀내는 마술 같다. 그러다 그 세계 속 무엇 하나 내 것은 없구나 싶어지면 그만 가슴이 덜컹거린다. "헐리다 남은 성문"이 된다. "잠자리 조을던 무너진 성터"에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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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자신을 파괴하고 거듭 생성되는 불꽃으로 남고자 했다. 결코 삶을 완성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삶을 느껴보려 한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 광적인 그의 노예로서 말이다.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삶은 위대했다, 운명에 대한 주권을 운명에게 되돌려주었다. 19세기 유럽의 상황을 생각하면 굳이 저 먼 고대의 운명론을 끌어 와서 근대적 주권이라는 개념에 연결시킨 점이 특이하다. 


츠바이크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역설적 인간으로 믿는 이유는 다음의 구절에서 슬쩍 엿보인다.

 

“매년 유럽에서 생산되는 오십만 권의 책들, 그 책을 한번 읽어 보라. 대체 이 책들이 무엇에 관해 씌어져 있는가? 바로 행복이다. 대개는 한 남자를 원하는 여인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디킨스가 가장 소망하던 것은 명랑한 어린이들과 함께 초원의 오두막집에서 사는 것이다. 발자크는 수백만금의 부 및 귀족의원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성에서 지내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거리, 상점, 값싼 선술집, 밝은 무도회장을 한 번 둘러보라. 그곳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원하는가? 하나같이 다들 행복하고 만족한 부자와 권력가가 되길 원한다.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크의 인물들 중 이를 원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한 사람도 이를 원치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어느 곳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행복의 순간에도 정지하려 들지 않는다.”(121)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발자크, 디킨스, 빅토르 위고, 괴테 등의 작가와 선명한 경계선이 그어지는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다고, 츠바이크는 연신 감탄한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그 정도의 찬사는 당연한 듯도 보인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자판에서 두드릴 때마다 독수리 타법이 된다. 러시아 이름은 왜 이리 길고 거칠까.) 


그렇지만 츠바이크가 그 근거로 가져오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한 해석을 보자면, 잠시 망설여진다. 그들은 『지하로부터의 수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범죄 인간들이다. 사기, 폭력 등의 일과를 황홀감에 빠져드는 순환의 고리로 읽어낸다. 


“욕망은 후회로 변하고, 후회는 또다시 행동으로, 결국 범죄는 고백으로, 고백은 다시 그 황홀감에 빠져들게 하는 순환이 계속된다. 이윽고 운명의 모든 길은 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추락하는 최후까지, 또 다른 이가 그들을 때려눕히기까지 서로 맞닿아 있다.”(211)

 

츠바이크는 당연하게도 카라카조프 가의 사람들에 나오는 인물들을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읽으면 바보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상식적인 사람들에게도 그 소설 속 인물들은 정신병원에 가야할 이상한 인간들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비정상의 인간들을 지구상에 있는 예사로운 인간으로 소설을 통해서 살려낸다. 


“세상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두지 않으며, 자기주장을 관철하려고도 정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을 아낌없이 소모하며, 그 어떤 것도 계산하려 하지 않으며, 아니 영원히 비타산적 인간이 되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 삶을 느끼려 하고, 삶의 그림자나 반영된 이미지, 외적 현실이 아닌 신비스럽고 위대한 근본요소들, 우주의 힘, 생존하는 실존의 느낌을 감지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곳곳에서 매우 원초적인 식물과 같은 삶, 즉 그 삶에 대한 가장 원초적 욕망의 샘이, 그리고 행복도 고통도 원치 않는 근원적 정욕이 솟구친다. 이 원초적 욕망은 이미 삶의 개별형식이 되어 버린, 가치인정 내지 가치구분이 아니라, 숨쉴 때 느끼듯, 완전히 일치된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209)


도스토예프스키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 현실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실존의 황홀감을 감각한다. 다른 작가들이 현실의 크고작은 혼란을 경험하면서, 저항하면서, 끝내 조화를 이뤄내려는 인물을 창조할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내면 속에서 영혼을 구원해 낸다. 긴장을 자아내는 범죄 장면에서조차 그 비참을 비껴가지 않고 통과한다. 숭고한 것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유명한 『지하로부터의 수기』의 단락을 읽어 보자. 1인칭 소설이지만 루소처럼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쓴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진실한 고백록으로,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필연이 절대 질병도 부패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단 저지른 일은 절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법이다. 하는 것을 강렬하게 의식하고 그걸 빌미로 남몰래 속으로 나 자신에게 이를 갈고 또 갈고 나 자신을 물어뜯고 쥐어뜯으며 못살게 굴고, 그러다 보면 쓰라림이 마침내는 어떤 치욕적이고 저주스러운 감미로움으로 바뀌고, 마침내는 단연코 진지한 쾌감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렇다. 쾌감, 그야말로 쾌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낸 건 늘 정확히 알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들도 이런 쾌감을 맛볼 때가 있을까? 내 여러분에게 설명해 주겠다. 이 경우 쾌감은 바로, 자신의 굴욕을 너무도 선명하게 의식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었다. 즉, 막다른 벽에 다다랐다는 것을, 이건 추악하기 짝이 없지만 달리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을, 더 이상 출구도 없고 절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설령 뭐든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원하지 않을 것임을, 설령 원한다고 한들 사실상 마땅히 변할 대상이 전혀 없을 테니까 결국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에 쾌감이 생기는 것이다. “( 『지하로부터의 수기』)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은 발전하는 인류도 아니고, 질서를 찾는 문화인도 아니다. 자신 속에서 영혼을 구원해내고야 만다. 비참한 범죄 인간이 숭고한 것을 찾아서 마침내 승화를 이뤄내고야 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짐작하기로는 아래와 같은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2만 페이지에 달라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그 어디에도, 그 인물들 중 누가 앉고, 먹고, 마시고 하는지는 전혀 씌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느끼고 말하고 투쟁할 뿐이다. 통찰력의 혜안을 가지고 꿈을 꾸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잠자지 않는다. 또한 쉬지도 않으며, 언제나 열병을 앓고, 생각에 잠긴다. 그들은 결코 식물도 짐승도 아니고 무위도식하지도 않으며 멍청하지도 않다. 언제나 움직이고, 흥분하며 긴장하고, 늘 깨어 있다. 지나치게 각성된 인간존재다.”(240)


도스토예프스키 200주년 기념판이 나온 데에, 성평등을 위해 개역을 했다는 문구를 읽고서 떠오른 생각 때문에 다시 이 문제적 인간이 떠올랐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연구한 프로이트는 그를 천재 예술가이면서 범죄에  탐닉한 인간이라고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더구나 프로이트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소녀를 성폭력한 범죄 경력을 갖고 있다고 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의식 근처에서 문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다시 책을 뒤적여 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대체 도스토예프스키를 어떻게 읽어야 하겠는가. 


영혼의 통증을 느낀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나 그의 주인공들이 아니라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뛰쳐 나간 리자가 아니었을까. 세계문학은 폐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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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아마도 진화론에서부터 검토해야 한다. 진화론은 냉혹해 보인다. 적자생존이라고 하는 -살아남지 못할 종들에 대해 연민조차 갖지 않는 과학·기계적인 학설로 여겨진다. 그런데 진화 개념을 보급시키기 시작한 분야가 '사회학'이라는 사실을 앞세워 생각하면 뭔가 다른 측면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거되지 못하는 게 무엇이어야 하느냐에 대한 기준 말이다.

 

 "진화의 이데올로기는 19세기 후반을 장식한 보편적인 시대정신"이었다. 유럽에 혁명의 동요가 요동치던 18세기, 그 시대가 저물어 가던 즈음, 어떻게 진화의 이데올로기가 번성할 수 있었을까. 진화론적 시각에서 보면 비합리적, 야만적인 장애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했다. 단순하게 보자면 인민을 해방시키려면 '기존 인민'이 사라져야 한다. 모두가 돌아버린 것인가. 그냥 행복해지기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인가. 


그 부침의 회오리는 자본주의의 번성과 엮여 있다. 제국주의가 끝없이 정복전쟁을 일삼으며 진화 이데올로기를 동력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추측만으로도 진화론에 대한 긍정성이 말끔하게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 영국이 식민지 행정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동인도 대학>은 '미개 사회'를 향한 압력만은 아니었다. 진화론의 기본 혁명 구도는 문화인으로 거듭 태어난 '新'인민을 요구한다. 진화론에 알레르기가 생기는 지점도 그곳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화론에 대한 다른 사유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진화론은 혁명의 시대와 자본주의의 번성과 제국적 정복 충동과 연동되어 떠오른다. 분명 진화론은 새로운 진보였다. 이 새로운 관념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처럼 떠돌면서 혁명의 공기를 계몽의 공기로 둔갑시켰다.  혁명의 시대가 만든 어떤 것이 계몽의 시대를 만든 것인가. 진화론은 혁명가가 꿈꾼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가. 혁명 자체가 잠재적으로 지니게 되는 폭력은 진화론과 닿아 있는가.


문화진화설은 19세기 전반의 헤겔, 콩트, 생시몽 등을 매개로 콩도르세 및 튀르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면서, 사회 속의 인간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제가 동일함이 곧 내용도 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건이 『고대 사회』의 서두에서 밝힌 것은 인류 기원의 단일성, 동일한 발전 단계에서의 인류 욕구의 유사성, 동일한 사회적 조건에서의 인간 정신 작용의 제일성齊一性 등이다. 즉, 문화 및 사회에 내재된 합리성은 인간의 동질적, 일반적 환경으로서의 역사에 비추어서만 이해가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와 사회가 발전의 단계에 따라 구분됨과 동시에 동질적이고 단일한 연속선상에 배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화론적 시각은 생물학 뿐만 아니라 이후 세계에 긴 그림자를 남긴다. 유럽의 역사주의가 이렇듯 진화론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적극적으로 진화론을 고려해야 한다. 모건의 인류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인간은 동일하게 출발했다, 인간은 동질적 욕구를 갖는다, 동일한 사회적 조건은 동질적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진화론을 이끈 학설은 박물학과 민속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져 봐야 한다. 이 박물학은 실증적인 속성을 가진다. '실증'이라거나 '사실'이라거나 '조사'나 '비교법'이 어떤 굴절을 겪어야 진화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유물 한 점을 놓고, 지층 한 단락을 보고, 가족 결합 형태를 정리해서, 언어 체계를 비교해서 문명을 읽어야 한다.   


문화진화론은 문화가 갖는 총체성에 근거를 둔다.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 관습 등의 총체적인 복합으로서 문화는 그 시대 인간이 이루어 낼 수 있었던 사고와 행위 법칙 등의 보편적 원리를 찾아낼 토대가 된다. 그 문화의 성격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의 언어와 신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다. 과실을 따던 인류가 불을 사용하고, 토기를 제작하던 시대로 진입하면서 겪게 된 '진화의 시간'을 생생한 감각으로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실증적이기에 눈 앞에 그 인류를 대하듯 한다. 마치 엎어질 수 없는 사실 마냥 받아들인다. 멸종된 동식물의 종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유적으로 사회도태된 인간을 상상해 버린다.


문화진화론에서 문화라는 총체적인 시각은 문화 행위자로서의 인간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문화 유물에 연결된다. 언어도 신앙도 예술도 가족도 도덕도 모두 '물적 위치'를 갖게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진화론을 다시 사유할 거리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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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린 상태라면 그 저울이 기울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드라마 <로스쿨>의 마지막 회 중 한 단락을 보았다. 늙고 지쳐보이는 피고가 간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선처해 주십시요. 살 날 얼마 남지 않은 저를 위해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제 손자가 지금보다 더 힘들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판사는 변호사를 구하라고 조언한다. 이 재판을 보고 있던 로스쿨 학생이 판사에게 휴정을 요청한다. 노인의 상태가 힘들어 보이니 잠시만 쉬어갈 수 있도록 해 달라 한다. 판사가 허락하고, 법정에 홀로 남은 노인에게 로스쿨 학생은 재판에 관련한 사연을 듣게 된다. 노인의 아들이 연대 보증을 했는데 그 아들이 사망하면서부터 밀린 이자가 원금을 초과하게 되었단다. 그리고 그제서야 채권자가 압류하겠다는 소송을 진행시켰단다. 노인은 아버지를 잃은 손자와 근근히 살아가는 중에 황당한 일을 당한 것이란다. 로스쿨 학생은 노인에게 몇 마디의 말을 따라 외우게 한다. 판사에게 그대로 말하면 됩니다. 판사님, 이미 이 사건의 채권 소멸시효는 지났습니다. 


아마도 로스쿨 학생들이 노인에게 관련 법 단락을 조언해 주지 않았다면 판사는 원고의 압류 신청을 받아들여 노인의 재산을 몰수했을 것이다. 노인이 가지고 있던 재산 뿐만 아니라 앞으로 노인이 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소득에 대해서도 제한을 걸었을 것이다. 노인은 한달 내내 일하고 난 뒤에도, 1일에 있던 부채가 31일에는 더 늘어나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판사는 왜 채권 소멸시효와 같이 어렵지 않은 법 조항을 노인에게 일러주지 않았을까. 왜 압류 신청 자격을 상실한 자가 압류 신청을 하는 재판을 지속하며 쓸데없는 비용을 발생시켰을까. 


재판은 판사가 누구의 편이 아님을 전제하는 공익적 과정이다. 판결은 판사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어야 한다. 누구나 재판정에서는 동일한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당위가 실제 재판에서 얼마나 유효할까. 피고가 된 노인이 선처를 부탁하며 읍소한 발언은 대항권을 갖지 못한다. 노인의 절박함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 재판의 분쟁 상황은 채권법에 있기 때문이다. 반면 압류를 신청한 금융업자는 연대보증인을 세울만큼 채권 전문가인 것이다. 이 두 원고와 피고를 저울 위에 평평한 상태로 올려 놓을 방법이 있을까.


'정의의 여신'이었다면 노인의 형편을 보십시오, 노인은 빚을 갚을 형편이 아닙니다. 재산도 없고 앞으로 발생할 근로소득도 손자의 생활비입니다. 또 그 빚은 노인이 쓴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압류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빚을 갚도록 강제하는 연대보증을 하는 자를 엄벌하겠습니다. 생활권을 해치는 소송을 일으키는 자를 단죄하겠습니다. 이렇게 재판을 진행할 수 있었을까. 


드라마 속에서 읍소하던 노인도 이 재판을 계기로 사회적 발언을 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 생산력을 제공하고, 양육을 책임지고, 빚까지 공유하고, 고난을 홀로 책임져야 한다면 국가사회는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하면서 항의할 것이다. 재판정에서 원고를 향해 우리 손자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선처를 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가끔 법치를 의심하게 되는데, 아마도 그 '법'이 너무 인간적이면서 또 너무 인간적이지 않아서 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법에 더 의존해야 한다면, 그래야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열렬히 고민해야 할 것이다. '법'이 무엇인지를, 법을 준수한다를 삶의 어디에 위치지어야 하는지를 말이다. 매번 고소 고발 당하지 않을 일인지를 확인하며 행동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법이 파괴된 자리에 찾아오는 종결자일 때 삶은 계속 피폐해질 것이다. 


법의 필요는, 노인이 아들을 잃었을 때 슬퍼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도록, 남겨진 손자를 돌볼 여력이 제공되고, 노인에게 더 부과된 의무만큼 함께하게 될 조력자가 늘어나도록 배치하는 '법'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낭만적인 퇴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법과 비리를 고발하는 여론 심판과 재판이 정치사회의 전부인양 보여질 때야말로 다른 상상력이 요구되는 게 아닐까. 법과 법의 집행과 법의 조각을 사유해야 할 필요성 말이다. 법이 인간의 생활에 먼저 도착해 지배하는 위치가 아니라, 생명을 따라오도록 해보자. 그런 법이라면 재판정에서 원고와 피고는 동등한 위치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판사가 아니라, 생명의 법이 인간의 마주침을 조력하게 되는 법을 바란다. 



'정의의 여신' 조각상은 눈을 가린 상태로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 위에 무엇이 올려질 지 모른다. 저울을 든 손이 떨릴 때도 있다. 무엇보다 책임을 가르는 재판이 끝나고 난 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도 없다. 눈을 떠요.  


『소송』) “우리를 고용한 상급 관청이 이런 체포 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체포 당사자의 신원과 체포 사유에 대해 상세하게 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우리도 알고 있소. 거기에는 착오가 있을 수 없지. 나는 말단 부서의 일밖에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바로는, 우리 관청은 주민들에게서 죄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고, 법에 쓰여 있듯이 죄에 이끌려서 감시인들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것이 법이라는 거요. 거기에 무슨 착오가 있겠소?” “난 그런 법은 모릅니다.” … “이봐 빌렘, 저자는 법을 모른다면서도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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