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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그가 밀려나던 날 

멍멍이가 일없이 왜가리를 쫒기도 하고 

자전거 바퀴살이 묶인 채 산책길에 뒹글기도 하면 

도시에 더 무슨 반가운 것이 있으랴한다 

꺼슬한 청춘들이 얼어오는 두 발로 지치기도 하고 

부족해진 점심에 애닳도록 간식을 두리번하다

공원엔 김날리는 트럭들에 기름내 들썩이다

이것은 가는것이다


어찌하든 한 시간 끄적이기를 마치지도 못하고 멍하다.

평전들을 서렁서렁 넘기다보면 이름이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이 드러나기도 한다. 


어느 잊지 못할 저녁, 아버지는 열여덟 살쯤 된 벤야민을 루더슈트라세의 이 나이트클럽에 데려가 위층 칸막이 좌석을 마련해주었고, 그 명당자리에서 벤야민은 몸에 달라붙는 흰색 세일러복 차림으로 바에 앉아 있던 창녀에게서 거의 눈을 떼지 않았다. 벤야민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그 후 오랫동안 그의 에로틱 판타지를 좌우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모든 수요를 사업과 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이렇듯 가족의 유흥 수요까지 사업과 연결지으려던 것에 대해 아들 벤야민은 "무모하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투기 기질"과 긴밀히 관련된 무모함이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이런 게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벤야민이 회고하는 아버지는 세도와 위엄을 지니면서 동시에 점잖고 정중하며 준법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아버지의 감식안을 회고하는 대목, 예컨대 아버지가 와인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구두 바닥이 너무 두껍지 않으면 발볼로 카펫의 품질을 구분할 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당시 이미 가정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했던 전화로 통화 중일 때의 아버지는 가끔 평상시의 온화함과 상반되는 험악함을 드러냈다. 훗날 벤야민은 자신의 진로 문제로(그리고 처자식 부양의 책임을 회피하고 부모에게 점점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된 것과 관련된 문제로) 아버지와 여러 차례 심하게 다투는데(벤야민 세대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헝악함을 직접 경험하게 된다. (『발터 벤야민 평전』)

 

면직업계의 거물이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상류층의 호사 취미인 여우사냥을 즐겼고, 멘체스터증권거래소 회원이자 잘나가는 독일계 이주민 클럽인 실러연구소의 운영위원장이었다. 매력적인 스타일리스트답게 엥겔스는 인생의 온갖 즐거움을 한껏 누렷다. 바닷가재 샐러드, 프랑스산 최고급 포도주 샤토 마고, 체코식 필젠 맥주와 비싼 여자들 등등. 그러는 한편으로 40년 동안 카를 마르크스를 먹여 살리고 그의 자녀들을 돌봐줬으며, 마르크스의 분노를 다독여주었다. 동시에 『공산당 선언』의 공저자이자 후일 마르크수주의로 알려지게 되는 사상의 공동 설계자로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데올로기적 동반자 관계의 반쪽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20세기 들어 마오쩌둥 주석의 중국에서부터 동독의 슈타지 국가까지, 아프리카의 반제 투쟁에서 소련까지 지구촌 인류의 3분이 1이 다양한 형태로 마르크수주의라고 하는 매혹적인 철학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이 정책을 설명하고 비행을 정당화하거자 정권 유지를 위해 자주 거론한 인물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엥겔스였다. ... 그는 때로는 잘못 해석되고, 때로는 잘못 인용되기도 했다. 『엥겔스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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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것은 쓰여진 것이지요. 특히 소설의 경우 쓰여지지 않은 소설은 존재하지 않은 셈이지요. 하지만 시는 쓰여지지 않더라도 존재한다고 저는 신념으로서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 시는 거의 모든 만인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가 지니고 있습니다. 한평생 평교원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거니와, 주방에서 조리하면서 식칼을 쥐고 한평생 지내는 사람도 있고, 선로 인부로 지내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요. 그 삶을 보내고 있는 방식이, 자신이 생애를 거기에서 열중하고 있는, 걸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미 그 사람의 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것이 이미 시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나에 관한 한, 일본어로 밑천이 떨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일본어를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일본인에 대한 복수인 셈이고, 복수라는 것은 적대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경험을 일본어라는 광장에서 서로 나누고 싶다는 의미에서의 복수입니다.


- 「김시종의 시와 '자서전'」『조선과 일본을 살아가다-제주도에서 이카이노로』를 중심으로 중에서-




 《엑스맨 ; 아포칼립스》이 끝나가는 부분이다. 찰스 자비에 교수는 절박하게 소리쳤다. 진, 네 힘을 쏟아내! 진이 사력을 다해 괴성을 뿜어내자 사방이 거대한 불꽃으로 덮였다. 돌이 갈라져 흙이 되고 하늘은 그 빛을 잃었다. 고대 악마는, 이것이 나의 운명이었어라는 말을 남기고 모래성이 무너지듯 사그라들었다. 


인상적인 장면이다. 돌연변이 엑스맨들은 자신들이 가진 초능력을 평범한 지구인을 위해 쓰면서 힘의 출처를 정상화 시키려고 한다. 반면 악마는 고대의 질서로 지구를 되돌려놓기위해 지구인을 희생시키려고 한다. 이 드라마는 두려움의 연쇄에서 극적 전화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대의 혼돈, 괴물같은 힘을 지닌 돌연변이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더 검은 빛에 흡수되는 사람들. 


진에게 두려움에서 해방되면 네 힘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자비에 교수는 마치 프랑스 혁명 전야의 장군과 같다. 너희들을 막고 있는 것은 그림자다, 두려움이다, 그런 약한 것들로는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엑스맨은 지구 인간이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다.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 자, 모든 이의 머리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자, 강철을 움직이고, 레이저로 물건을 녹이고, 번개를 일으킨다. 신의 힘이 얼마일까를 생각하며 만들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점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의 능력을 모두 합해봐야 신과 비슷할 뿐 신의 자리에 앉지 못한다. 엑스맨이 비로소 신이 되는 순간은, 진이 고대 악마를 제거하며 얻게된, 순수한 파괴의 힘을 소유하게 되면서다. 엑스맨은 두려움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생산하는 지배자가 되었다.   


진은 자신의 초능력을 두려워하며 갈등을 겪고 있었고 마침내 혼란이 파괴되며 진 스스로를 살아갈 수 있었다. 초능력이 무능력으로 변환되는 순간 진은 두려움을 지배할 수 있었다고 영화는 말한다.'순수한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는 힘이 두려움이다.   


일본으로 밀항을 감행했던 조선인 김시종이 겪어야 했을 두려움과 갈등은 이중 언어의 문제에서 더 가중되었다. 조선의 감각으로 길어올린 김시종의 시가 일본어로 발표되었을 때,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은 각각 서로 다른 당혹감과 이질적인 시선을 보냈을 것이다. 김시종의 결단은 '재일하는 일본 내 조선인' 어느 하나로도 갈등하지 않고 있다. '시를 살아가다'가 김시종의 삶이며,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제 스스로를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김시종의 시는 '두려움'이 없기에, 더 이상 시인의 길을 파괴하지 못한다. 그런데 진은 시로 살아가고 있을까. 


어떻게든 1시간 글쓰기가 종료되었다. 그냥 올린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삶이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공연한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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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를 돌려놓고 가만 생각한다. 여름이라 빨래는 금방 마를 것이다. 조금 덜 마른 상태라면 드라이기로 말려도 되고 그냥 입고 나가도 무방하다. T는 이 멍청한 일을 반복하는 날 보며 급기야 화를 내기도 했었다. 몇 년 전부터인지 기억도 가물한데, 한 계절에 한 벌로 생활한다. 다른 어려움은 없는데 세탁이 문제다. 여름이면 땀냄새로 일주일에 2~3번은 해야 해서 불편하고, 겨울은 1번이면 충분하지만, 잘 마르지 않아서 문제였다. 탈수 강도를 가장 세게 해놓고서, 쪼그려 앉아 구경한다. 셔츠와 잠바가 뒤섞여 돌아간다. 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2년 정도 세탁기 없이 살았었다. 비누칠하고 비비는 일보다 힘겨운 단계는 짜는 일이었는데, 헹굼 횟수를 줄이려면 최대한, 그러니까 얼굴의 근육까지 긁어모아 용을 써야 했다. 손빨래는 생각보다 골치였다. 겨울 옷은 짜는 일이 만만치 않다보니 헹굼 물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고, 찬물에 손이 시려워서 더운 물을 쓰게 될 때도 있었고, 더러는 마른 후에 비눗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다. 세탁기는 지구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꼬오옥 필요해, 그때마다 중얼거리곤 했었다.


좋은 세상이다. 누군가 준비해준 편의들이 방을 메우고 있고, 집 밖을 나가도 잘 짜여져 있다. 언제든 이동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맘만 먹으면 준비된 세상은 내 것이 될 수 있다. 요가 하러 가는 건물은 음식점, PC, 피부관리실이 … 빼꼭하게 들어서 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열려 있다. 가끔 열린 뒷문 사이로 음식점 부엌을 들여다 보는데,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 대파를 다듬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습관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저 부엌에도 에어컨이 돌아가고 식기세척기가 윙윙 작동되며 편한 의자 하나 놓아두고, 아 편한 세상이다를 중얼거리게 해주세요.


이런 한탄들은 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상이다. 가끔 한방병원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거 안 좋아져요. 평생 가요. 그는 온갖 통계를 인용하며 날 납득시키려 했다. 빨리 낫고 싶어 안달이 난 환자에게 적절한 말은 아니었지만, 꼭 들려줘야만 했던 말이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공황장애가 오기 전부터 나는 병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한 벌로 생활하면서도 어떤 결핍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편안했다. 바지 하나 더 사라는 T의 압력에 못이겨 막상 사려고 하면 굉장히 피곤했다. 가게까지 가서도 여러 차례 돌아오기도 했었다. 물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내가 사서 입는 옷이 만 원 안팎이었으니 살려면 못 살 일도 아니었다. 불필요한 소비를 하고 싶지 않아하고 변명했다. 한 벌 더 사서 입으면서 누군가를 향한 고마움를 더 많이 느꼈어야 했다.


지금 맹렬하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며 내 마음을 돌려보려고 한다. 이 좋은 세상을 왜 긍정하지 못하는가.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실재 세상이 아니다. 내 생각 속의 세상일 뿐이다. 저마다의 세계를 이 작은 머리로 비평할 일이 아니다. 내가 존재하는 모든 기반에는 누군가의 삶과 노동이 스며들어와 있다. 내가 뭐라도 된 듯이, 이 세상에 슬픔을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가. 또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덧씌우려 하는가. 부정이 내 머리를 장악한다고 무슨 득이 있겠는가.


라캉의 시각은 환자가 치료를 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환자에게 증상이 나타나고 그가 증상에 빠져 있다면, 이는 그 증상 속에 많은 양의 에너지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현재의 증상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많은 양의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는 증상을 통해, 프로이트의 표현대로라면 일종의 <대리만족>을 얻으며, 따라서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환자들은 분석가를 찾아와서 하루빨리 증상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환자는 증상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족>이란 용어는 증상이 제공하는 쾌락을 기술하기엔 너무 단순하다. 현실적으로 불만족을 불평하면서도 끝내 분석가를 찾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는 그들이 불만족과 불평으로부터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만드는 타인들을 비난하면서 만족감을 얻는다.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넣으면서도 엄청난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프랑스어에는 이러한 고통 속의 쾌락을, 불만족 속의 만족감을 지칭할 만한 적절한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이상스다. 주이상스는 자기 처벌이나 고통스러운 일에서 느끼는 흥분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기 증상에서 만족감이나 쾌락을 얻는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늘 그들이 증상을 즐기며 단순히 만족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쾌락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주이상스>라는 용어에는 주체가 어떤 수단으로든지 쾌락을 즐긴다는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1증상이 가져다주는 만족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주체는 그게 만족인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며 불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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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가 변증법적이라고 한다면, 언어론적 전회로 구축된 이 세계도 조만간 역변하게 될 것이다. 무엇을 파괴하게 될 것인지 예측하는 일은 부질없고 부적절하다. 그렇더라도 그 기미를 읽어내는 일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전문가 학자들이다.


어떤 학자들은 역사적 인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전히 '끝없는 단두대' 준비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은 인간 너머를, 경험 너머를 사고하고 있다. 내 편견에서 말하자면 변화는 늘 무언가가 버무려져 있을 때 온다. 집중이 동력이라고, 그래야 거대한 혁명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만, 내 이론으로는 그 반대 양상에서 펼쳐진다.


2.

『숲은 생각한다』가 출간되었다. 작년부터 기다리던 책이다. 온갖 공동체에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 그 답답한 시야에 빛이 될 수도 있겠다. 에두아르도 콘이 소개하는 세계에서는 언어라는 고차적인 상징 질서가 아니더라도 복합적인 의미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류학의 전회는 ≪인간의 위치≫를 조정하는 큰 일에 뛰어들었다. 물리학, 유전자 공학, 생물학 등을 결합한 인류학적 탐색은 마치 만화경 같다.


3.

사회과학의 위기라는 의견들이 있다. 문화적 현상을 해설하는 역할만 하다가는 유행을 확대시키거나 금지를 생산하는 일만 하게 됨을 걱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었는가. 사회적 얽개를 짜거나 새로운 사유를 펼치는 일에 헌신하는 사회과학자의 ''바른 이상에 대한 집착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끝났다는 의견들이 있다.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국가는 살아 남았음은 그들에게 큰 근거가 된다. 경험적으로만 생각해도 혼동되는 부분이다. 죽어서야 사는 일이 어디 한둘인가. 살아있음이 치욕인 일도 얼마나 많은가.


4.

칼럼「프랑스 현대철학 써먹기」를 읽었다. 

 http://hankookilbo.com/v/436c28f5c02244bc89aefded8ae0e5b5

 

그냥 지나치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뭐가 끄적거린다.


산울림을 부릅니다, 아니 벌써.

사랑과 평화가 한동안 뜸하군요.

모스크바 공산당에게는 5,000명의 록커가 있어요.

비틀즈의 노래는 어쩌다가 삐라를 타고 말았나요.

체 게바라의 턱수염은 뽀샵기계로 박대당하지 않아요.


꾸덕꾸덕한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애써 놓친 맥락을 찾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냉기만 흐른다. 냉소는 오만 속에서 나오는구나 싶다. 이럴 때는「혁명에 대한 실용적 지침들」혹은「냉소를 활용한 요리팁」정도는 써야 할텐데 내게 그런 열정은 없구나. 팥빙수의 계절이다. 수염과 노래 • 기계 • 철학의 열정과 냉소를 버무리면 팥빙수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사람은 사회적 독서를 통해 무엇을 말했을까? 말하고자 했을까가 아니고.


4.

국립현대미술관 5월의 행사를 소개한다.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

수직에서 수평으로: 예술 생산의 변화된 조건들


미 이종간의 결합과 해체는 상식적인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술 텍스트들은 구체적인 것들에 점점 더 관여한다. 그것들은 단순히 사회 또는 문학에 집중하기보다는 “산, 과일, 대기 효과, 핵 탄두, 샌드위치, 자동차, 역사적 사건 [그리고] 유물”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사물의 이런 맹습의 주창자들은 다양한 이름 아래 자신의 동지들을 결집시켰는데, “생기적 유물론”과 “새로운 자연주의”는 “객체 지향 존재로”과 “사변적 실재론”과 친근하다. 그렇지만 이런 유형의 사유에 대한 기억하기 쉬운 가장 포괄적인 이름은 “새로운 유물론”인 듯 보인다.

(이언 로우리 서평,onto-cartography』)

출처: 사물의 풍경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YJHp

5.

들뢰즈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분법적 통설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면서 카오스적인 정념을 강조한다. 들뢰즈가 더 정밀한 세계로 들어가서 광범위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고자 했을 때, 그러니까 “수학을 매개로 한 자연-신체-정념의 해명”을 시도했을 때, 정언의 세계로 직진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들뢰즈가 그 자신의 의도 내에 아직도 있다면, 바로 『BTS와 예술혁명』 같은 연구서들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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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슨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타자에 대해 말하고 설명하고 정의를 내리고 평가하려는 욕구를 뛰어넘어야 하며,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올슨은 아무리 견고한 지배체계 내에 있다 하더라고 신뢰와 욕망의 흐름 속에서 이미 운동과 변형이 발생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이 부분만 놓고 보자면 올슨의 “귀를 기울인다”는 실천철학이나 품행론의 평범한 격언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한 번 보겠습니다.


미시정치학은 상투적인 것, 규칙들, 관습들과 독단적이고 원칙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밖으로 밀어낸다. 살아 있는 체험, 즉 아이들이 보여주는 비인칭적, 단수적 생성들은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달라서 그러한 것을 참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다. 바로 이럴 때는 폭력적이다. 그 위험성에 소름이 돋을지도 모른다. 만약 아이들의 잠재성을 인정하고 교실에서 생성이 일어나도록 하고자 한다면 어려움에 직면해야 하고 폭력에 민감해야 한다. 푸코가 이야기했듯이 모든 것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실험을 시작했던 많은 교사들은 시작한 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유아교육 읽기』, 리세콧 마리엣 올슨)


그리고 나서 들뢰즈의 질문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정으로 아이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들뢰즈는 이 질문에 사로잡혔다. 들뢰즈는 푸코가 빈번하게 타자의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다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쳐주고자 했던 푸코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타자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아이들의 연령이 어릴수록 우리는 아이들을 대변한다. 어린아이들이 미성숙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렇게 표현하고 다룬다. (같은 책)


몇 달 전 이 책을 읽고 난 후 들뢰즈를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속의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한다. 이 무엇은 재인의 대상이 아니라 근원적인 마주침이다.” 이 구절은 마치 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해주는 것 같더군요. 2010년에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필사했었지만 페이퍼는 만들지 않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들뢰즈에 대한 특별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들뢰즈 독자도 유아교육 전공자도 아니지만 이러한 실험 자체가 주는 매력에 이끌려 다시 들뢰즈를 보게 되었습니다. 속도는 느립니다


  '귀 기울이기'와 '타자를 대변하기' 의 차이, 그리고 비인칭적 , 단수적 생성의 폭력 가능성 .... ... 


BTS와 예술혁명』이 출간되었습니다. 바로 도서관 희망도서에 신청하고, 저자의 강연회에 참석했지요.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만들어가는 예술혁명이라니요, 『문화과학』2018년 봄호에서「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의 접근과 뚜렷하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더구나 연구자는 상당히 용기가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문화과학』을 통해 방탄소년단을 알게 되었을 때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혐오 담론 7년」,「역진의 정치성」에 시선이 갔었지요. 이규탁 씨의 이 글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들뢰즈를 중심에 둔 사유 실험으로서 두 권의 책을 펼쳐 놓고 마주치게 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BTS와 예술혁명』이 중심입니다만, 뭘 알아서 논하려는 것보다, 이 책들을 둘러싼 흐름, 그러니까 '실험적 경험론'의 가능성에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통해 유아교육 읽기』가 『BTS와 예술혁명』에서 하는 말을 듣고 응하는 것이지요, 그 역도 가능하구요.


저자 강연회에서 연구자(이렇게 부르고 싶군요)는 매우 상기되어 있었고 부정적인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다고 말하는 솔직한 분이었습니다. 마지막 질의 응답시간을 듣지 못했지만,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을 겁니다. (강연 자료 없이 진행된 행사라 기억에만 의지해서 쓰고 있음을 참고하세요.)


「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규탁)에 따르면, 방탄소년단은 3세대 아이돌에 속합니다. 메이저 3대 기획사가 아닌 중소기획사 소속으로, 2013년에 데뷔하고 바로 멜론 뮤직 어워드 신인상 및 골든디스크 신인상을 수상하며 10대 초등학생과 중학생 사이에서 유별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아미>들은 유튜브 댓글 및 커버댄스, 반응 동영상 등을 통해 글로벌한 마케팅을 활발하게 시작했으며 곧 케이팝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합니다. 이후 20179월 발매한 <Love Yourself 'Her'>가 빌보드 7위를 기록하며 정상에 서게 되었는데, 특히 미국이나 유럽에서 보기 어려운 이국적인 이미지, 격렬한 안무와 퍼포먼스, 훌륭한 라이브까지 소화하는 실력으로, 2017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 '톱 소셜 아티스트' 에서 축하 공연 무대까지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국내 어떤 가수도 해내지 못한 일을 방탄소년단이 새로운 기록을 세우며 갱신해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규탁 씨의 논의를 요약해서 보자면,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다른 남성 아이돌 그룹처럼 팬들의 수용 및 창작 행위로 만든 다양한 커버댄스 영상, UCC 수용자가 만든 콘텐츠가 큰 역할을 했답니다. 이 마케팅은 2007년 원더걸스 'Tell Me' 열풍 이후 활용된 직캠, 반응 동영상 등으로 유튜브를 통해 업로드되고 다시 페이스북으로 인스타그램으로 공유되므로, 해외 팬들의 수용 및 창작에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3세대 아이돌의 경우에는 음악 제작 과정, 안무 연습 과정 같은 평소 생활, 일거수일투족이 담긴 콘텐츠가 포함된 음악 외적인 콘텐츠를 직접 제작해 수용자들에게 활발히 제공한다고 하는데요, 네이버에서 운영하는 브이앱은 “대한민국 최고 스타들의 각본 없는 실시간 방속이 시작된다” 라는 약속으로, 물리적인 거리와 시장 여건의 미성숙으로 관련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운 해외 팬들에게 패션, 사생활 등을 활용하는 360도 마케팅. 모든 각도에서 스타를 바라볼 수 있도록 노출시키는 매체가 되고 있답니다.


자신들 만의 '서사(敍事)를 만들어낸 것이 가장 주요했다고 볼 수 있다. '서사'에는 중소기획사 소속으로 대형 기획사의 거대한 힘을 등에 업은 다른 그룹 및 그들의 팬들과의 경쟁, 굉장한 미남이나 교포 혹은 외국인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능력 있고 의욕적이며 더불어 소탈한 한국 청년들의 성장기( 『방탄소년단이 '떡밥'들로 만든 세계』, 강명석) , 때로는 전형적인 '2' 감성처럼 느껴지지만 그만큼 10대들의 감수성을 솔직히 담아낼 수 있기에 그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가사 등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다. (「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규탁)


연구자가 방탄소년단을 만난 건 2017년 초반이었기에 '늦덕'이라고 합니다. 방탄소년단에는 팬클럽인 <아미>가 있는데, 말그대로 군대처럼 조직되어 운영되는 측면도 있어 보입니다. 연구자도 <아미>였기에, 강연의 절반은 “얘네는 다르다 … 어린애들이 어떻게 이런 말을 … 진정성 있는 아이돌 …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는게 고맙다 …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다른 버전을 보여준 … 방탄소년단에 대한 찬가를 (뮤직비디오를 통한 미학적 시선으로)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정신분석학적 '부친 살해'를 통해 수직적 위계구조를 무너뜨리는 「I need you」를 해설했으며, 「봄날」을 통해 그려낸 세월호와 관련된 사회적 메시지에 주목했고, 「피땀 눈물」에서 이카루스의 추락과 피에타, 데미안 등의 연결구조와 <아미>들의 해석본으로 이어지는, 네트워크-이미지가 형성되는 지점을 짚어주었습니다.


연구자의 관심은 시종일관 방탄소년단과 <아미>가 만들어내는 “예술 형식”에 있어 보였습니다. <아미>는 단순히 방탄소년단이 만든 곡을 듣고 소비하는 세력이 아니고, 수많은 해석본을 만들어내는 동반자라는 것입니다. <아미>들은 뮤직 비디오의 많은 쇼트들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속 • 반복 • 연작으로 의미를 생산하고, 전체 서사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하나의 곡이 발표되면 즉시 무수한 해석본이 생성되는 것이지요. 이 작업을 위해서 <아미>들은 니체를 읽고 데미안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도 테마에 따른 기승전결에 의해 구성되며, 각각의 에피도 기승전결을 갖는 구조이므로, 전체적인 서사를 이해하는 선지식이 없으면 자발적 조력자가 되기도 어렵게 되고, <아미>들은 연관된 생산물을 제공하는 조력자가 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연구자는 <아미>의 충성도는 전지구적 연대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예로 <아미 캠페인>을 통해 무슬림의 날을 만들고 폭력을 끝내자 • 히잡 쓴 여성을 보호하자는 공동 선언을 하는 것이죠. 미국 내 10개의 <아미> 지부가 있고, 중위가 지휘자로 있으면서, 방탄소년단을 알리기 위해 방송에 희망곡을 신청하는데 … 라디오를 뚫기 위해서 대응 매뉴얼을 만들어 계속 전화하고, 상처받으면서도 노력해서 결국 … 라디오를 통해서도 방탄소년단의 메시지를 공유해나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연구자는 '방탄현상'의 몇몇 지점에서, '최대한의 변경'을 자발적으로 행하는 <아미>문화에서, 문단과 문단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일관성'으로 엮여가는 서사에서 들뢰즈를 떠올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따로 놀던 한 줄 한 줄이 나중에는 모두 다 한곳에서 만나고 있음을 느낄 때, 그리고 각각의 철학자에 대해 독특하고 개별적인 해석이 궁긍적으로 하나의 흐름에로 귀속되고 있음을 느낄 때, 바로 그 순간이 독자가 들뢰즈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요, 또 그의 사유를 맛보는 가장 큰 기쁨의 순간이 될 것이다.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근본적이고 글로벌한 무의식을 통한 연대 … 세계는 변화할 필요가 있고 더 큰 자유와 해방을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에 감응한 … “ 방탄소년단과 <아미> 현상은 『BTS와 예술혁명』에서 들뢰즈의 리좀적 혁명 상황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이규탁 씨는 “연중무휴 감시 체제”로 감정노동으로 사적인 영역을 잃어버린 3세대 아이돌에 대해 방탄소년단이 보낸 메시지가 자신들에게 되돌아오는 회로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직업인으로서의 아이돌'이라고 하는 공적인 영역과 업무를 마치고 '퇴근'한 이후 자연인으로서의 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희미해짐을 의미하며, 더불어 케이팝의 세계화가 심화되는 요즘이라면 극단적으로 낮과 밤의 구분 없이 매일 24시간을 아이돌로서 살게 됨을 뜻한다.

특히 케이팝 아이돌은 남녀을 불문하고 음악적인 역량 외에 훌륭한 인성, 즉 “팬에 대한 겸손과 헌신, 그리고 팬들의 요구에 응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나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가 된 지 오래다.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그들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과 더불어 자신들에게 부과된 감정노동을 거의 극한까지 수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음악콘텐츠 자체의 매출보다 오히려 비음악콘텐츠의 매출과 중요성을 확장했다. (「방탄소년단 :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소통 방식, 그리고 감정노동」,이규탁)


모든 아이들이 방탄소년단이 된다면 아니면 아미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외치겠지요.


어른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Everybody say No.

나는 꼭두각시 인생이 아니라고,

남의 꿈에 갇혀 살지 않을거라고.

3포세대 5포세대

그럼 난 육포가 좋으니까 6포세대

이런 게 방탄 스타일 난 좀 쩔어


연구자는 연구자이면서 <아미>로서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어쩌면 연구자의 욕망 자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그 자체로 혁명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후속 연구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이 시도가 제게는 들뢰즈를 이용하는 여러 갈래로서 의미가 있습니다만, 또 무엇이 세계를 억압하고 있는가, 어떻게 억압당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단절, 외로움을 근간으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매개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탄소년단과 <아미>는 수평적 관계가 되고 있다 → 아미 없이 영광도 없다는 전개가 수목구조를 탈피하는 것인지도 더 고민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BTS와 예술혁명』에 이어서 '방탄현상'을 바라보는 해석본들이 줄을 이어 나오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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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4-23 2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사한 텍스트가 차이와 반복이었다니.. 감탄하게 됩니다.. ㅎㅎㅎㅎ
저도 미시정치학에 관심이 많아서 푸코와 미시사를 다룬 책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정치지리학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지리학... 재미있더라고요..
방탄소년단 혁명.. 요거 함 찾아 읽어봐야겠네요...

초원 2018-04-24 19:27   좋아요 0 | URL
곰발님, 잘 지내시죠? 글쎄 전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A4 150장 정도인 걸 보면 모두 다 쓰진 못했나봐요. 너무 어려워서 천천히 읽어 도움되라고 썼는데 …
근데 베낀다고 해서 뭘 더 알게 되진 않더라구요.

도시가 좋긴 하군요. 지금 창밖에선 나무들이 몸부림을 치는데 저는 구경할 뿐이니 … 정치지리학이 그렇게 재미납니까? 저도 찾아봐야겠네요.

포스트잇 2018-04-24 0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주제네요. 예술혁명...까지는 모르겠고, ‘감정노동‘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같은 형태의 아이돌 산업은.. 어느 단계가 지나면 우리나라에서는 사양산업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경제면이나 사회적으로 어느 국면이 지나면 더이상 할 수 없는 산업이지 않을까..생각합니다만,,,,
...잌;;;;; 여기저기서 돌 날라오는 소리가...;;;;

초원 2018-04-24 19:26   좋아요 0 | URL
포스트잇님,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아니 이 분은 누구신가요? 고전소설 속 탐정 분위기가 물씬 풍기네요.
요즘은 뭘 조사하고 계신가요? 탐정은 그림자가 되어야 하는군요. 귀는 보이는데, 다른 부위는 암흑 속으로 들어가 있어요. 돌이 날아오거든 얼른 저 커다란 모자 밑으로 숨으셔도 되겠어요.


혁명이라는 말을 선언으로 읽지 않고, 연구로 보니까 뭔가 새롭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에휴.

지난 주말부터 긴장상태가 심해서 회피나 우회의 수단으로 쓰다보니 더 두서가 없었는데 …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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