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망不忘


어느 시대든 이러한 꿈을 향한 측면, 즉 어린아이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전 세기에 이러한 측면은 아케이드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이전 세대들의 교육이 전통 속에서, 즉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꿈을 해석해준 데 반해 오늘날의 교육은 아이들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프루스트가 하나의 전례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속한 세대가 집단적 기억을 위한 신체적, 자연적 보조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전 세대보다 더 가여운 상태로 방치된 채 고독하고 산만하며, 병적인 방식으로만 아이들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나는 곧잘 쪼잔한 일에 빠져들어 앞뒤 가릴 것 없이 묻곤 했다. 곤경에 이르고서 이제 그 버릇을 고치겠거니 하겠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른바 '싹수가 노래' '싸가지'도 요령도 없는 종자였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대인관계가 없어, 그 대꾸들은 책을 향해 날아가고, 침묵 속에서 대갈들의 기미만 읽을 뿐이다. 공들여 돌이키면 조잡한 일이었고, 들이댔던 질문들도 특정 인물에 닿지 않았지만, 크고작은 파란을 일으켜 제 신세를 구부려뜨려왔던 것이다. 그 불망, 몇 개의 기억들을 불러와 <주체와 구조-사목 권력의 양상>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불충분하더라도 제 짝이 맞춰지고, 너덜거리고 바래버린 상태로 '형태를 잃게' 되었으면 한다.


국민학생 어디쯤, 《양치기 소년》을 수업시간에 들었다. 소년은 양을 지키는 일을 한다. 늑대가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소년은 어느 날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고,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소년의 거짓말이었다. 그 후로도 양치기 소년은 또 다시 거짓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지쳐갔다. 그러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힘껏 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 놈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양들은 늑대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이야기로 듣고나서, 나는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급하게 캐물었다. 소년이 마을에서 쫓겨났나요, 감옥에 갔나요, 마을사람들은 왜 소년을 도와주지 않아요? 왜 거짓말을 했대요? 내 다급한 재촉을 가뿐히 노려보고 난 뒤, 그 노련했던 선생은 거짓말 하지 않기, 어른들 말 잘 듣기, 약속 지키기 등의 훈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나는 양치기 소년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밤낮으로, 마을 밖에서 홀로 양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은 매일 거짓말을 한다. 이야기는 너무너무나 불완전했다.


어떤 밤 양치기 소년의 꿈을 꾸었다. 거적을 두르고 작대기만 가진 양치기 모습만 비추기도 했으나, 대개는 사연을 갖고 꿈 속을 찾아왔다. 내 꿈 속에 나타나 호소하던 소년은 거짓말 했던 걸 숨기지 않았다. 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열던 날, 등성에 서서 지켜봐야만 했던 소년이 일부러 심술나고 질투심에 가득 차 외치면서 거짓말이 시작되었단다. 


어떤 날은 실제로 나타났던 늑대들이 마을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날 꿈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게, 온힘을 다해 “저기 늑대가 도망가고 있어요 보세요 저기요저기” 외치는데 말소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비명소리만 내다가 깨어났었다. 


더러 다친 양을 도와주려고 마을 사람들을 꾀어 낼 거짓말을 했다 한다. 아주 가끔은 너무 심심해서 늑대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늑대가 출현하길 바랐다는 마음을 전하는 소년이 불쌍해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꿈이라는 것도 잊고, 성심껏 대꾸를 해주곤 했는데, 양들과 친해지라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놀이같은 걸 일러 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혼자 보내지 말았으면 했고, 실제 일어난 일 마냥 늑대의 출현을 알리기도 했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멈출 수 없었듯이 나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꿈 속에서조차.


머리통이 크고 나서는 양치기 소년의 꿈은 더이상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불쑥 깊은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학 책을 읽다가, 정신분석에 대해 배우다가, 페미니즘의 계보를 찾다가 문득 나타나 묻곤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라면 양치기 소년/소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 불망의 꿈들은 무한 재현의 미디어, 이미지로서 정치, 이야기로서의 정체성이 범람하던 시대의 사소한 반영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공동체적 시선과 감각으로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지 못한다. 양치기 소년이 이솝 우화 속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집단적 결속과 사회화의 문제로 받아들였어야 한다. 개인을 내세우기 위해서 보편을 특수화로 안내하는 일관된 질서와 방법을 동원하려는 의지를 가졌어야 한다. 내면에 신이나, 위인, 민족이든 또는 스승을 지녔어야 한다.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준거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만이 원칙이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땅에 자연이 생성될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나의 문제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꿈 속의 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을 합당한 행동으로 이끌어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하는데만 전전긍긍했다. 따뜻한 보호 속에서 생활하고 싶음이 내가 가진 소망이었었나 보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보호가 그냥 올 리도 없는데, 마을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양치기 소년 읽기 매뉴얼의 문제는 나의 고질적인 병의 문제이다.


양치기 소년을 놓지 못하는 한심함은 종결을 두려워하는 시대의 영향도 있다. 어느 버전, 어느 시즌에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텐데 후속작을 계속 만들고 있다. 양치기 소년에 대한 변론이 비루하고 공황에 빠진 내 삶에 대한 변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면죄부를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가 도대체 뭐가 면죄부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나는 불안장애에 빠졌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꿈으로 만났던 양치기 소년이 맹랑한 대갈만이 아니듯 이 글의 최후도 그러하길 바란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점은 사회를 불변항의 시스템이라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대중이 아닌 '사회'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꿈 속의 양치기도 마냥 무시하기에 무겁다. 만약 질문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꿈 속에 선 양치기 소년은 반복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즐기는 종자가 아니었다. 늑대를 불러내 공동체를 와해하는 흑마술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들판을 가로질러 잃어버린 마지막 양 한 마리를 찾는 '예수'처럼 결연하기도 했다. 양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사고를 치더라도 양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불안장애 이전이다. 지금부터는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의 병상기록이라고 봐도 좋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양치기 소년 읽기의 마지막 매뉴얼을 낭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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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어가는 1시간 끄적이기] 오늘은 6시 32분까지.

이전 글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이어가기. 


필의 22일이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필에게 23일이 22일보다 안도할 수 있는 날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필에게만 머무르는 하루가 문제다. 22일 하루만 넘겨보자!


영화가 말하는 이 판타지스러운 하루의 되풀이는, 과장스러운 표현이겠지만, 고상한 시간의 게임이다. 필이 넌더리를 내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 하루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 아는 것'을 담은 눈은 더이상 삶의 빛을 목격하기 힘들다는 법칙 떄문이다. 인간이 죽음 앞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허무 속으로 끌려들어가며 절망적으로 휩쓸릴 때 대지는 냉각의 시간이다. 만 년의 빙하 위에서 서성이게 된다.


과학의 진보가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 놓고, 다시 하루 월 년으로 묶어 놓았다. 한 사람의 일생은 연결되고 나아가는 시간의 합이며, 단단한 대지라는 위에 건축된다. 삶이 분모가 되고 하루는 n분의 1이 되었다. 인간은 충실하게 그 하루를 더해가며 성장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간단하다. 22일 아침 6시 라디오 방송은 23일 아침과 다르다. 달라지는 것은 시간이고, 그 시간이 '흘러야' 꽃이 피듯 개화할 가능성이 피어난다.


과학의 시간은 때로는 n분의 2의 하루를 혹은 n분의 100의 하루를 구축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의 하루처럼 n분의 0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시간의 게임에 휘말리게 되며 잃게 되는 많은 것들은 잃어버린 0의 시간이 있다고 믿으면서 시작된다.


필의 시간은 대지에 묶여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흐르지 않는다. 묶여버린 인간의 시간은 블랙홀처럼 하루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버린다. 여관주인의 친절한 인사도, 따뜻한 아침 식사도,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도, 차갑고 상쾌한 대기도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리고, 급기야 느낄 수가 없다, 감각할 수 없다. 필은 어떻게든 '하루'를 회복하려고 한다. 그 의욕으로는 시간의 마법을 풀지 못하지만, 친밀성을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쉬이 이어진다. 냉각된 대지 위를 서성이다가 언 손을 비벼 얼음을 녹인다. 택도 없이 얼음은 건재하겠지만, 비비는 손, 맞잡은 손이 있는 한 얼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비로운 시간 속에서 사랑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마법이다.


필의 결말을 좋아할 수가 없다. 사랑이야 인간에게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사랑이 블랙홀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의 블랙홀을 사랑의 블랙홀로 대체하며 처박힌 것은 무엇인가. 분모였던 n은 이제 분자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무감각이 분모의 자리에 앉아 있다.


얼마 전 강남역 앞 탑 위에서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CCTV 폐쇄회로를 설치한 탑이라서, 그 크기가 너무 협소해서 놀랐다. 고행의 길로 노동자를 내모는 사회를 벗어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울까 생각했다. 서글픔에 울컥하고 무력감에 우울해졌다. 눕지도 못할 크기에서 앉은 자세로 맞이한 오늘 '하루''내일'은 어떻게 다를까. 강남역 위에 유쾌하고 화려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나, 철탑 위 비닐막 안의 시간은 꿈쩍도 없이 단단히 되풀이되곤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시간이 분모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농성장의 시간은 사적 온기가 허용될 수 있을까. 이미 분모가 무너진 후 0의 시간은 그대로 저 깊은 빙하 속으로 내달린다.


필이 그 하루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모두 알아내고 난 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여유가 있었던 반면, 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라진 22일을 알 수 없다. 설령 필이 자신을 후려쳤더라도 필이 친근하게 건네는 인사에 감격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시간 게임, 이런 흐름은 그 시대, 변화의 곡선을 충실히 타고 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이 존재와 장소와 질서를 이해하는 끄나풀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의 가정을 던져볼 것이다. 세 가지 결을 타고 갑니다.


마천루의 설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꾸밈 없는 언어』,

『에로스의 종말』,

사랑의 기쁨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자본주의적 이행과 연결하는『감정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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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떠들어보자. 지금 3시 14분, 4시 14분이 되면 무조건 종료한다.

메모를 하나 찾았다. 이것을 정해진 시간까지 붙들어 매자.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과 주관적으로 구성한 것들은 블랙홀로 흘러간다.

주체론은 세계를 분할 가능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장소로 안내하고 뒤섞는다.

자신이 세계이면서 세계가 아니라는 우회성이 살아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포츠맨십'으로 단련된 육체, '선비정신'으로 조직된 일상, '종교적'으로 들어올려진 평판에 대하여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왜 병에서 건강을 추출해내야 하는가.


영화를 보고 남긴 쪽지다. 이것에 뼈대를 붙여보려고 잠시 줄거리를 떠올린다.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은 판타지해서 로맨틱한 영화다. 필은 부정적이고 건조하게 메마른 사람으로 보였는데, 직업이 기상캐스터라서, 대중을 상대로 소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처지여서 더 절망적으로 하루를 보내곤 한다. 영화의 배경이 봄을 알리는 소식을 전해줄 마못을 기다리는 축제가 벌어지는 지방이어서, 하얀 눈발이 날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고, 매일 똑같은 날이 몇 달이고 반복된다는 점만 생생하게 기억난다(즉 나머지는 정확하지 않다). 


3가지 방향에서 추리를 시작하기로 하자. 

1. 새로운 장으로서의 사랑

2. 시간의 영원성으로서의 허무와 부정

3. 수행성으로서의 사회


<변화에는 하루만 있어도 되잖아>

어제는 오늘이고 내일은 오늘이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배경에서 흡사한 방송을 진행해야 했고, 그렇게 의미를 잃은 일상을 보내던 필이 진짜로 그 하루에 갇혔다. 시간을 거머쥔 필이, 여느 사람이라도 그렇겠지만, 현란하게 그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듯이 금방 시무룩해지곤 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배터지고 먹거나, 싫어하던 친구에게 복수를 하거나, 금지당했던 반도덕적인 일들 또 범죄를 마음껏 저질러도 다시 눈을 뜨면 그 날이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대부분은 공감하는 부분이다. 매일 놀기, 좋아하던 음식을 매일 배터지게 먹기, 매일 자유롭기 ... 이런 '쾌락'들은 반복을 통해서 가치절하되어 간다는 말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아서 몇 번 쯤은 신날 수도 있지만 계속 반복하다보면 이런 '양심' 같은 것들은 가치확대되어 간다는 말이다. 


여하튼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서 전환을 맞는다. 동료였던 리타를 사랑하게 되면서 필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하루의 회로에 갇힌 자유를 이용해서 리타를 마음껏 스토킹할 수 있었고, 리타에 대한 정보가 쌓일수록 필의 감정은 깊어졌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 연애는 거의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실패한다. 이 <<사랑이 실패하는 순간>>에 진짜 마법이 시작된다. 마치 마뭇이 겨울이 물러난 줄 알고 깨어나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하늘을 보고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전환이 시작된다. 마뭇이 되돌아간 시간, 그 시간은 여전히 겨울이지만 이전의 겨울과는 다르다.


필은 덤으로 얻은 시간을 마치 다시 반복되지 않는 듯이 보내면서 시간의 허무을 이겨낸다. 여느 날처럼 일어나 조금 더 진심을 갖고 사람들을 바라본다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진해서 돕는다든지, 심지어 싫어하던 자에게도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 일은, 마치 ~듯이 행동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를 실증하듯이 평온해지고, 그 결과 리타의 사랑을 얻게 된다.


피아노를 배우는 필은 그 실력이 늘어날수록, 연습을 통해 연주가 완성될수록 기쁨을 느낀다. 그런 '쾌락'은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것이며,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와 피아노 선생님과 피아노 치는 자신과 피아노로 연주되는 곡이 모두 같이 '우리'가 된다. 마치 사랑이 그렇듯이 '언어'와 '관계'와 '세계'가 하나의 장에 머무른다. 


주체는 나를 생각하고 나다운 행위를 통해서 나를 입증하지 않는다. 행위를 통해서 '나'가 발생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상투적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느낀다. 


필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된 것도 '사심없음'을 수행했기에 가능하다고 영화는 애써 말한다.


<사막의 물방울처럼>

나는 이제 조금 더 다른 쪽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싶다. 영화의 제목을 한글로 블랙홀로 바꾸면서 말해지고 있는 '무의식'을 말이다. 필은 나만이 절망인 세상에 사는 인물이다. 곧 그 절망은 블랙홀인데, 모든 일상을 하나의 구덩이로 몰고가는 것 말이다. 벌써 15분이다. 1분이 지났다.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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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2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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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 0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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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3 1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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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6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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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 온 책> 장에, 눈에 띄게 접혀지고 낡아져 버린 상태로 있었다. 여러 사람이 다투어 읽다 간 흔적들이다. 호기심에 그 책을 꺼내다가 '부르디외'라는 것을 알고, 망설이지도 않고, 제자리로 밀어넣어 버렸다. 도서관 서가를 맴맴돌며 대출해 갈 책을 찾다가, 다시 돌아와, 꺼내든다.


지식인들은 특정한 사고범주와 정신구조에 사로잡혀 있는데, 특히 학계를 무조건 신봉하고 거기에 애착을 가집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이런 애착이 정치적 애착보다 훨씬 더 심각한 왜곡을 가져옵니다. 저는 학계에 속한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해관심보다는 학구적 이해관심에 훨씬 더 좌우된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접하는 사유대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사유수단을 제 것으로 만들 때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나마 아주 미미한 정도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사유의 주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요인들을 스스로 인식하는 한에서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사회학 말고도] 정신분석 등의 다른 수단들 또한 이 같은 인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이 보통 저를 해석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부르디외가 위 인용구 속에서 짧게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아우라가 벗겨질 일은 없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효과이듯이 부르디외의 반대자도 효과다. 부르디외의 고독은 학문 장 안팎에서 상징자본이다. 이 무한한 벗겨내기 게임이 '사회'라면 누구보다 오래도록 학문 장에 거주할 사람은 부르디외일 것이다.


의식철학이 가정하는 보편적 상태를 비판하던 부르디외가 사유했던, ... 감각적 이성의 세계(場)에 대한 거부반응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내 상태에 대한 염증과 실망이 크다. 나를 포섭하고 있는 사회를 탈성화시켜서 얻게 된 것은 '매몰차게 무언가를 벗겨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다름 아니다. 그 마지막 임계점이 '사회'라는 공백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라는 결여가 되기도 어렵지 않다. 

 

아무튼 이 책을 빌려와 절반쯤 읽다보니 만물상 부르디외에 대한 기억이 새록하다. 국가와 자본의 착취구조에 기대 사회변동을 논하는 한계를 간파하고, 장場‥아비투스‥ 상징폭력 같은 유무형의 개념들로 사회세계 일반을 설명하면서 '자본'을 의미론적으로 확장시킨다. 


좀 오래된 일인데, 『구별짓기』를 읽고난 후에 낭패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위대한 개츠비』의 캐러웨이를 끌어들여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앞 부분은 이 블로그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정작 본론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https://blog.aladin.co.kr/722236154/5800861


부르디외가 주관과 객관의 이항대립을 기피하고 만들어낸 이중적 객관화가 실은 두 개의 모순이거나, 하나의 모순 자체가 드러내는 이중성일 뿐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 가정을 설명하고 싶어서 부르디외의 70년대 작업보다 40~50년 차이가 나지만 피츠제럴드의 사회를 끌어왔고, 무엇보다 구별짓기를 설명하기에 맞춤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중적 모순, 체제와 삶의 양식>

개츠비는 결사적으로 부를 축적한 '성공한' 자본가이지만 주류 사회 진입에 실패한다. 사회세계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비밀'이 있고, 그것은 지식이나 기술처럼 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습득할 수 없다. 개츠비는 얻고자 한 욕망이 뚜렷했고, 추동력도 있었으며, 더불어 자본시장의 작동방식에도 민감한 유사자본가였음에도, 강 건너 마을()에 합류하지 못했다.  사회적 게임이 가능하려면 참가자들이 집합적 믿음을 갖고 그 장면에 투입되어야 하지만, 개츠비와 그 저택의 파티(집합)에는 그것만큼 결여된 것이 없었다.


피츠제럴드가 캐러웨이를 동원해서 설명하는 사회세계는 마침내 미서부의 건국정신에 도달해서 멈춘다. 경제적 격차가 사랑의 실패로 연결되거나, 경제적 성공이 사랑의 실패로 연결되는 사회적 게임은 상징적 권위와 체화된 자본의 폭력적 지배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이냐. 부르디외의 심각하고 끈질긴 성찰은 그 자신도 그 반대자도 캐러웨이도 톰도 피츠제럴드도 그대로 두었지만, 윌슨도 머틀도 데이지도 모두 내 처지로 만들어버리지 않는가 .... 뭐 이런 결말이었다. 


지금 다시 부르디외를 읽고 개츠비를 만난다면 조금 다른 지점에서 서성거릴 수 있을듯도 하다.

요즘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 (테니스 선수였던) 조던의 감각을 갖는다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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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칭과 3인칭에서 2인칭으로, 그리고 비()인칭/무인칭/()인칭으로 바꾸어 말하려 해도, 여전히 전지적 시점이란 살아있다. 이제 무()인칭이 아니라 0인칭을 생각한다. ()인칭의 발견이다.]


사회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무()인칭의 관점을 유지하려고 했다. 개인의 합을 초월하는 '사회'는 다자多者를 품을 수 있도록 무인칭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회는 권력의 원천으로서, 발전의 법칙으로서 일자一者의 말을 한다. 이익사회 속에서 수많은 개체들의 난립으로 보이지만, 실은 기존 사회 속으로 재결합할 여러 통로(사회적 관계)가 증대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 더 나아가 국가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다. 사회는 이름 없음에서 시작하지만, 끝내 이름을 부여하는 장소가 되어왔다. 무인칭은 실패의 장소다. 자연이며 인간이며 사물인 사회를 상상하기 위해서 공인칭이라는 비어 있음을 요청해 본다.


왜 탈인간, 포스트휴먼을 상상하겠는가. 근대가 만든 인간상이 무참히 깨져가고 신선한 관점으로 이동이 필요한 학자들의 상품이기도 하겠으나,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근본 불안의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위로 발생되는 실천력을 사회-역사에 새겨넣는 일에 무관심하거나 실패했고 근본적으로 이탈해 있다. 사회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대개 불분명한 사랑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계몽의 이상이었던 <성숙한 인간 사회>는 냉소 속에서 모욕을 견딜 운명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어쩌면 도덕적이고 본질적인 명령이, 통일된 디딤판을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직관적으로 느끼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판단으로, 10분 만에 수백 명의 생명을 구하기라도 한 것처럼 뽐내듯 말한다. 이란에 폭격될 무기가 모두 파괴되어 더 이상 공격할 수 없는 상태라도 되었다면, 트럼프의 그 위선에 박수를 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의 뻔뻔함과 파렴치함으로 인해 보호되는 사회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법' 에 대해서는 대화가 불가능해 보이고, 세계는 불만족이 아니라, 끔찍함으로 연결되는 <지금여기>의 곤란은 '()/() 인간'을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다. 과학자에게서도, 형이상학자에게서도, 심지어 종말론자들에게서도 이 흐름이 빗겨가지 않는다. 이 글은 인간적인 것들을 빗겨가는, 아주 작은 상상을 해보려는 시도의 출발이다.


몇 가지 공인칭으로 가는 길을 찾아본다

- 불안과 고통을 삭제시키려는 <'인간적' 개입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 결핍을 채우려고 <발생을 가속화시키지 않는다>. 

- 쾌락의 활용에 <조직적 양식>이 형성되지 않는다


몇 가지 가능한 조건을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우선 '놀이하는 인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놀이하는 주체는 0인칭의,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쓸 수 있을까.


지난 해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의 저자가 강연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우리는 왜 타인을 미워하는가」라는 제목이었다.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라는 동화를 통해, 줄리엣 미첼이 말하는 동기간 관계가 인간조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명했다. 부모 곰과 아기 곰이 살던 집에 골디락스가 나타나 아기 곰의 스프와 의자와 침대를 뺏어간다. 아기 곰에게 골디락스는 “죽이고 싶도록 미운 타인”이 되었는데, 골디락스는 곰의 집에 침입한 이방인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여자동기 sister이라는 것이다


미첼은 『동기간-성과 폭력』을 통해, 오이디푸스의 삼각구조가 말하는 부모와 자식 관계에 주목하지 않고, 측면에서 옆 사람의 자리를 확보해줄 수 있는 동기간, 친구간, 측면관계의 생성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동기간인 아기 곰과 골디락스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인정하는 수평적/측면적 생활터전을 발생시킬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아기 곰의 증오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차이를 존중만 해서는 안되고, 차이와 동일성을 동시에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놀이연구가 이상호의 말을 인용하며, 아이들이 규칙이 있는 놀이를 통해서 문화의 기본, 황금율을 배울 때, 허약한 체력과 소심성, 정서불안 등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청소년 문제가 “놀이 왜곡과 부재”라는 진단 아래 놀이가 아이들 자신을 변화시키고 함께 노는 사람을 변화시키며 나아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강연자가 미첼을 강조하는 것은 부모자녀 관계가 커다랗고 수직적인 차이인 반면, 형제자매 관계는 작은 차이이기 때문이다. 이 작은 차이(일상적인 것들)에서 미움과 증오의 트라우마가 생성되기 쉽기에 증오가 없는 사회를 위해서는 자발적인 놀이문화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미첼의 『동기간-성과 폭력』에서 중요한 점은 모자관계와 사회화 과정에 필요한 문화적 토대가 아니라 정치-사회적 위치를 확보할 기반으로서의 '여성의 자리', 페미니즘의 정치적 지형이다. '동기간' 보다 '성과 폭력'에 집중하게 된다는 말이다. 줄리엣 미첼은 여성운동의 원로이며 마르크스와 정신분석을 결합해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하는 사회주의 정신분석가이다. 미첼이 페미니즘을 연구하며 동기간에 집중한 것은 남녀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에 두어야 그 이후의 여성주의가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내 생각과는 별개로 미첼이 사회적 형제애를 내세워, 증오로 얼룩진 측면관계를 복원하려 한 점을 강조하고, 놀이를 통해 그 가능성을 짚어준 점은 우리가 곱씹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의제다.


쌩퉁맞지만, 그 무난한 주장 위에서 미끄러지는 하나의 지점으로 인해, 그 강의는 지루해지고 말았다. 강의 말미에 요즘 아이들이 'ASMR(자율 감각 쾌락 반응)'에 미친듯이 반응한다고 냉소적으로 언급하며, 왜 그런 것들에 집착하는지 안타깝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그런 현상들에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볼수록, 그 무의미함이야말로 의도이면서 의도가 아니며, 사회적 구속도 자기구속도 아니지 않은가. 우적거리며 음식물 씹는 소리, 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 쓱삭쓱삭 필기하는 소리 … 규율이면서 규율이 아니기도 한, 신체적이면서 정신적인 것이며, 언어도 아니고 기호도 아닐 뿐더러 생성도 아닌 그 효과음들이야말로 <지금여기>를 살고 있는 자들이 누리기 좋은 최대한의 쾌락이며, 저항이 아닐까.


그렇다면 저자가 크고 단단한 것들로 사유를 확장해가려고 동화나 놀이 같은 작고 사소한 것들을 이용하는 것일까. 작은 것들이 빛나던 전통이 사라진 세계의 결과는 어둠을 잃은 세상이라는 도식이 전부일까. 애써 그 주장을 밝게 끌어올려, 내 방식대로 해석해보자면, 이익사회로 들어서면서 공동체가 가능했던 공동사회가 사라졌고, 타인의 자리-옆자리 관계가 불가능해졌지만, 평등과 자유, 황금율 같은 향유해야 할 이념들을 부르고 안착시킬 문화를 차근차근 가꿔 나가야 한다. 저자가 가진 폭넓은 적용력과 개념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 돋보이는데도 굉장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보편성, 황금율, 개념, 관념 … 놀이하고, 다양성을 확장하고,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적 자유에 매몰되던 세계를 공적 자유를 꿈꾸는 세계로 확장시킬 수 있으리라는 논리에는, 미안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90년대 학생운동이 '생활 소모임'운동으로 전환되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다함께 전통놀이와 사물놀이를 즐기고, 꾸준히 학습하고, 생활 모범을 통해 동력을 확보해 가는 수평적 소모임들 말이다. 놀이하는 학교, 모험하는 사회는 생기있는 마을 공동체를 상상하기에 더없이 좋다. 그러나 이 시대가 어두운 것은 놀이터에서 유리조각을 줍던 페스탈로찌가 사라져서도 아니고, 동기간 형제애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도 아니고, 놀이 문화 때문도 아니다.


놀이 이론은 <사회적인 구속>이며 <자기결박>이 되어야 하는가에 의문을 던져본다. '놀이'의 영역이 어디까지일까.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포켓몬 고」같은 증강현실 게임도 놀이일까. 예를 들자면 위 『일상적인 것들의 철학』 저자는 대중문화의 상상력이란 오락이지 문화가 아니라고 단언했었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등을 전쟁 • 모험과 일상을 분리시킨다고 비판적으로 본 점으로 미루면, 아닐 것이다.

이제까지 놀이를 두고, 아래 표와 같은 대치상황이 벌어졌으나, 여기에 하나의 칸을 만들어 덧붙인다. 이동연이 지적하는 '서드라이프' 정도가 되겠다.


놀이하는 인간은 사유가 정지된 인간이다

놀지 않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다

상징계 진입에 실패하고

인생에 아무런 쓸모도 없이 게임에 몰두한다

자극이 부족한 삶이 내적 동기부여를 빈곤하게 한다

놀이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보상물이다


「서드라이프란 무엇인가; 기술혁명 시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하여」, 이동연

온라인 게임 등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게 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융합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 안으로 들어와 개인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놀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포켓몬 고'는 이러한 현상의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서드라이프 Third Life라고 명명하고 싶다.


~ 서드라이프의 시대에는 가상현실이 실제 현실의 공간 안으로 들어와 그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특이점을 생산한다. 기술이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소멸시켜 새로운 감각의 순간을 창출하는 것이다.


『특이점』의 저자 레이 커즈와일은 ~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아서 C. 클라크의 세 번째 법칙을 떠올린다. 조엔 롤링의 해리포터 이야기 ~ 가상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 터무니없는 공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포터의 모든 마법은 내가 책에서 소개할 기술들을 통해 틀림없이 실현될 것이다. 퀴디치 경기, 사람이나 물건을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일은 완전한 가상현실 뿐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나노 기계 장치를 통해서 실현가능하다.


커즈와일의 특이점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 혹은 로봇틱스에 의한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 환경의 탄생이다.



생물학적 인간을 뛰어넘는, 기술과 존재가 뒤섞이는 새로운 인류를 예측하는데 게임이나 대중문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적지 않다. 포켓몬을 포획하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6개월 동안 87km를 걸었다. 감각을 이용하고 가상현실에 집중하며 더불어 증강현실에서 살아간다. 게임은 놀이가 가진 특성을 포함해 발전해 가는 중이고, 여전히 놀이처럼 현실과 가상의 상호작용을 고려해야 하는 하나의 산업이고 문화다.


다시 0인칭의 가능성을 놀이에서 보는 문제를 생각한다. 이어지는 부분은 다음 글에서 만나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가면과 욕망』,『천 개의 고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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