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장 짧게 빛나는 


'노동은 우연과 같다'는 말, 얼마큼 황당한 주장일까. 노동은 가장 빛나는 순간을 갖자마자 스러진다. 노동의 결과는 늘 노동하던 행위자의 것이 아니게 된다. 당신이 길을 걷거나 버스로 이동 중일 때, 집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잠자리에 들게 될 때,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을 때 노동이 보이는가, 문화가 보이는가. 세계는 노동으로 이루어져 왔고, 또 그렇게 이어갈 테지만 기억되는 것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자도 아니다.


인류의 생존은 노동 그 자체였으나, 현대인은 노동을 불필요한 과정이거나, 여가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여가가 보편적 생존을 보장해줄 수 있다면 좋을 일이다. 최소한 노동자의 <헌신>에만 의존하지 않는 생존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연성으로 드러나는 <노동의 힘>과 노동자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고 노동자의 위치는 회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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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당신의 생각처럼, 인과적으로 추동되거나 조직되어 있지 않다. 어느 날 문득 솟아난 아스팔트 위의 꽃을 보고도 의아해하지 않을 과학적 사고가 충만한 당신. 당신의 일상은 시간과 공간으로 조직되어 있고, <우연>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을 기세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한 줌의 낭만으로 채색된 감성과의 우연한 조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에게 필요한 믿음은, 삶은 그저 <우연>이고 본능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사고방식과 달리 삶은 인과율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고, 합리적으로 관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실제는 찰라에 가까워서 움켜쥐기도 지속하기도 어렵지만, 외려 상징은 단단하게 뿌리내릴 힘을 가진 채 영원할 수 있다. 모든 삶은 순간에 머물면서 끝없이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지만, 진리는 끝없이 외연을 확장해가며 권력이 된다.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본질로서의 실제가 아니며, 실재적인 삶 자체도 아니다. 삶 속에서 진리를 지속시키려는 노력, 그 엄청난 비극의 결과일 뿐이다.

 

삶에 <우연>을 회복시키고 싶다. 그리고 당신과 만나고 싶다. 우연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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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데미 경계생활인 3.5기 》

아카데미 경계생활인의 3.5기는 모종의 결핍과 한 갈래의 과잉으로 아카데미 재생산에 가담할 수 없었던 한 개인의 자백문입니다. 허망하고 무참한 갈등의 골이 '시민아카데미'의 존재방식에 배치됨을 느끼는 순간 저는 발화를 멈춰야 했었는데, 그 실패의 허우적거림을 낱낱이 보고해 달라는 제안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는 내용이 **시민아카데미의 사유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어 어떤 <고달픈> 반복을 재현하더라도, 허무주의를 극복하려는 반(反)시대적 증상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08년 늦은 봄, 저는 이론을 공통분모로 하는 약한 결합체가 저와 같은 시민(市泯/愍)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세계인식을 위한 비판적 이론도 필요했고, 계층/계급적 관점이 섞이는, 정치적 문제에서 사회적 문제로의 <접근>법이 절실하기도 했습니다. 현실사회에서 개인의 존재와 윤리는 길항되고 있어, 주체는 만성적 신경증을 앓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공통의 이해관계/정서를 갖지 않는 타인과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절박함은 점점 더해져 갑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민 + 아카데미의 결합은 자연스럽다고 못해 반가운 미소가 되었습니다. 이질적인 지적 • 문화적 생활기반을 갖고 있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토론은 행동하고 사고하는 주체로서 우리사회의 균열을 <적합>하게 인지할 소중한 계기가 될테니까요. 그런데 시민아카데미에 참여한 이후로 늘 어떤 '말랑말랑한' 것을 요구하는 압력을 느껴야 했는데, 인문적 성숙이나 사회적 정의에 대한 경향이라기보다는 흠결없는 교양에 가까웠습니다. 융화에 대한 압력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융화의 과정과 경로가 문제라는 것이지요. 은혜로운 삶을 증언하려고 교양을 공부하는 것과 존재의 허무/무기력을 탈피하기 위해 '진보적' 이론들을 학습하여 '정신'에 채우는 것은 그리 다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일들을 낭만적 퇴폐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개인/시민들의 삶의 타협점들이 어떻게 생성되고-소비되는지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되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 점이 시민+아카데미가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아카데미는 인문학 학원도, 학술 단체도, 정치적 공동체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얌전한 <수강생>만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요. 말할 수 없는 주제는 왜 그리도 많았을까요. 예민한 사안이라며 참여정부와 계급문제 등을 금기하더니, 실존적 문제들은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참기 어려웠던 점은 면박을 당하거나 냉대를 경험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문제제기가 사무국과 운영위원들의 의도와 결정에 따라 좌지우지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분들과의 융화를 위해, 자원활동을 하고 뒷풀이도 따라가고, 무급 인턴을 제안하기도 했었지만, 취향 아카데미를 위한 <투명인간 만들기>와 <師的 아카데미 구하기> 방어벽은 좀처럼 가셔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개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 수준의 문제, 관심영역의 문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민아카데미 속에서 지식 • 담론이 유통되고 환기되는 구조가 자본의 교환과 이동에서 일어나는 '과잉'과 '축적체계'와 묘하게 닮아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체제가 분할분리를 통해 고통을 상처로 만들 때 비극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안해 봅니다.
1. 전문가-아마추어, 강사-수강생의 체계가 무력화된 공간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새로움은 낡고 익숙해서 무감각해진 어휘에서부터 탐색해 들어가야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을 남루하게 헤집어, 바야르가 말한 것처럼, <내면 책>과 <화면 책>의 모호함을 인정하고 <유령 책>이라는 (담론)생성공간에 자유를 허용했으면 좋겠습니다.

2. 비용없는 쾌락도 승인하는, 어휘와 개념을 해방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혐오해야 한다는 '정신적' 강박에서 여유로워지려면, 체제적 해석과 어휘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유형화된 언어와 개념이 선택과 실천에서 큰 제약으로 작용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논증 너머에 있는, 이탈된 것들에 관심을 갖고 언어를 바꾸는,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실제적' 강박, 상상력을 허용하였으면 합니다.

3. 적(敵)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회의가 필요합니다.

의도와 결과를 고민하며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모임을 만들어가지만, 공동체 '강령'을 최우선할 것이 아니라면 敵은 필요합니다. 그 敵의 발생이 我를 인간으로, 敵을 짐승으로 만드는 -인간/생명에 위계를 許하는 파시즘적 경향만 아니라면- 敵은 다양할수록 좋겠습니다. 자발적이면서 경쟁적(敵)으로 대립하는 소모임 연구 단위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4. 해마다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으면 합니다.

사무국은 아이템을 수렴할 필요가 있지만 기획은 회원들의 몫이어야 합니다. 선출직 운영위원은 기획의도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겠지만 해매다 새로운 운영주체들에 의해 다른 계절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2인칭의 시점은 1인칭의 조건없는 교환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5. 수강 비용에 대한 경제논리에서 벗어났으면 합니다.

유명인/전문가를 '섭외'하고, 수강료를 납부하여야 참여자격이 생긴다면 '본전'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강좌에 수강료가 부과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회원의 회비로 재정이 어렵다면 후원사업을 따로 진행하더라도, 앎의 교환에 거래가 배척되길 바랍니다.

6. 공간의 독, 쓸쓸함의 근원을 없애면 좋겠습니다.

온라인 홈페이지는 공적인 공간이라해도 고답적이며 의견이 첨삭되는 통로가 부족합니다. 블로그도 소수에 의해 기획된 느낌이 강합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들지 드나들 수 있는 따뜻한 공간, '사무실'이 아닌 공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시민(市民)과 인문(人紋)이라는 궤도에서 살아가는 '활동가'나 '후원자'의 삶을 잘 알지 못하며, 삶은 그 모든 회의와 방관과 배신에도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귀결을 부정했기에 궤도에서 이탈하는 추행을 저질렀는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적절한 '거리두기'에 실패함으로써 관계를 파탄시킨 책임이 있지만, 아카데미는 사적 인간관계의 확장으로만 유지되는 조직공동체 문화를 탈피해야,『산문적 시민사회의 비열성』을 경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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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버몬트 대학에서 럭스 마틴은 미셸 푸코를 인터뷰한다. 사막을 걸을 땐 사막을 느껴야 하지만, 그의 인터뷰에는 저작에서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푸코가 있었다. 그런 일은 많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가끔 있어서 더 따뜻해질 수 있다.  대담하는 내내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푸코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푸코는 멋지다. 자신을 드러낼 줄 아는 모든 사람이 멋지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사회-정치-경제-역사와 관련되어 있으며, 상당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카테고리나 형태상의 구조와도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고는 각종 사회관계가 아닌 다른 무엇입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사고하는 방식은 논리의 보편적 카테고리에 의해 적절히 분석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사와 체계적인 사고분석 사이에는 길-통로 (아주 좁다란 통로일 수 있습니다) 가 놓여 있는데, 이것은 사고의 역사가가 걸어온 길입니다. <자기의 테크놀로지, 20쪽>

한동안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 주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워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계획이, 그 의도가 아무리 선의의 것이라 할지라도 억압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20쪽> 

내가 특별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몇몇 사람들이 나를 학생들의 지적 건강을 해지는 위험 인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적 활동에 있어서의 건강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 거기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26쪽> 

내가 분석한 것이 항상 정치작용과 연관되므로 내가 변화의 불가능성을 주장했다고 추측한 모양인데, 어째서 그런 추측을 하게 되었습니까? <감시와 처벌> 전체는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새로운 사고방식이 발생하는 경위를 명시해 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7쪽> 

내가 휴머니즘에 대해 염려하는 것은, 휴머니즘이 우리 윤리의 특정한 형식을 어떠한 종류의 자유이건 그것의 보편적인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듯 휴머니즘은 좌익이나 중도파나 우익이나 모두 무지개빛 배합을 한 정치의 온갖 측면에서, 이것이 휴머니즘이라고 독단적인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29쪽> 

나의 연구는 다음 세 가지의 전통적인 문제입니다. 1) 학문적 매개로 드러나는 진리, 다시 말해 문명화 과정에서 그토록 중요히 여겨지고 우리에게 주체이며 동시에 객체가 되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진리의 게임>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는 무엇인가?<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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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이 되어버린 약자들을 부각시키라고 하지만, 정작 배경도 되지 못하는 존재,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 사회적 전경(前境)과 무관해진 존재들이 있다. 진보를, 민주주의를 숙의하라는 주문은 권리가 부재한 생존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유발하기도 한다.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사회적 정의가 보편적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무관한 존재들을 무지한 존재로 만들어 가며, 억압적 평형을 유지시켜 간다.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어떤 사회적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서로에게 폭력적인 조롱과 불신으로 반목하는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민중은 어떤 의미일까. 상처가 되는 고통을 인내하며 오늘을 어제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보내야 할 연대는 어떤 종류의 것이어야 할까. 존재에 위계를 만들어 불투명한 카스트를 만들어가고 있는 '투사'들에게 되돌아갈 영광이란 얼마쯤 빛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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