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견딜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 부수고 싶을 때가 있는가, 상처를 외면하는 분노에 휘둘려 관계를 끝내버리고, 상황을 무력하게 밀어내 버릴 때가 있는가. 간절히 원하며 구하는 것이 자신을 향한 여러 종류의 애정/확신이라면, 치를 떨며 떼어내고 싶은 것은 또 어떤 종류의 것들인가.

 

2. 유신을 다시 불러올 수 없다며, 밤잠을 설치던 천 만이 TV를 닫고 신문을 찢으며 저주의 말들을 내뱉는다. 남편(아내)과도 아이와도 말을 섞을 수 없었다고 목놓아 우는 수많은 부모들도 있다. 끝나지 않는 통증과의 싸움으로 지쳐버린, 울음조차 멈춰버린 환자들이 간절히 기도한다. 급식 시간마저 따돌림의 폭력을 삼켜야 하는 학생들이 서럽게 숟가락을 든다. 30년 인생이 담긴 일터를 한 순간에 태워버린 자연/인간 앞에서 말을 잃은 노인이 술잔을 들이킨다. 잃어버린 관계들과 회복하지 못하는 일상으로 타격을 입은 영혼들은 참을 수 없는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면 묻게 된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디까지 참아야 할까. 무엇을 참을 수 있을까.

 

3. 그 누구도 아닌, 무엇도 되지 못하고, 시간을 먹을 수 없어 토하지도 못하는, 고장난 사람은 그저 목격하고 목격할 뿐이다. 그렇게 고장난 진술이 시작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지 않고, '왜'를 묻는 것은 끝이 없는 동그란 공 안에 갇히는 꼴이다. 

 

4. 지난 수첩과 노트 중 얼마쯤은 미련없이 처리했지만, 내내 남아도는 끈질긴 녀석들이 눈 앞에 근심이 되어 나타나곤 한다. 찰나의 반전을 인식하고 입을 반쯤 벌리게 되었을 때, 흩어지는 생각들을 고스란이 늘어 놓게 될 때, 까칠한 낙담으로 자아를 한없이 천하게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심사가 사나워 질 때면 어김없이 끄적였다. 수첩이든 휴지든, 메모지든 가리지 않고...그렇게 하고 나면 한결 편해졌는데, 마치 부정적인 기운이 종이 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부풀려진 감성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길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맨 바닥의 감정이 드러나곤 했는데, 본능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고백이란 감성적 표출이 우연처럼 글처럼 튀어 나왔다.

 

5. 안면이 있는 시인이 있었다. 등단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위해 참여하는/ 시를 위해 산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어느 강좌에서 그 시인을 만났을 때 어색하게 농담을 건넨 적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떠다니는 어휘와 문장들을 옮겨 보곤 한다. 그렇게 글을 쓰는 건 시인의 자질이 아니냐'고. 시인의 대답은 의외였는데, 대강 이런 식이었다. 밤에 쓰고 낮에 후회하게 되는 낯 뜨거워지는 욕심들은, 과잉이 넘쳐나기 쉽상이니 혼자만 보고, 책상 맨 밑 서랍에 보관만 하라고. 맞는 말일 거다.

 

6. 고장난 진술에 뒤태라도 드러내려고 30'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서랍 밑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애써 꺼내놓는 무식함은 끝내 버릴 수 없는 것들을 걸러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작업이라 우긴다. 질기게 반복되는 어휘를 30개쯤 추리고, 20개로 7개로 2개로 줄이고 버린다. 이 엉큼한 시도가 꺽이지 않게 된다면, 한 번쯤은 글을 시를 써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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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 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나에겐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친구들은?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조국은?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미인은?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하겠소만.

-돈은 어떤가?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불가사의한 이방인이여?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흘러가는 구름을….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유명한 시인 보들레르는 ≪이방인≫에서 의연하다. 그는 날아오는 질문에 캐묻지 말기를 바라는 듯, 냉정하게 답한다. 묻는 자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줄기차게 대상을 변형시켜 가며 기어이 답을 하게 만든다. 보들레르에게 가족은 없다. 친구는 의미를 모른다. 조국은 잃어버렸다. 불멸의 여신이 아니므로 미인도 사랑할 수 없다. 돈은 싫다. 오로지 구름만, 흘러가는 구름만 사랑한다. 詩가 이끄는 방향대로 가 보자. 서글픈 서정성으로 넘쳐나는 구름은 흘러갈 뿐이고, 보들레르 곁에는 누구도 아무도 없으며 불멸을 향해 간다.

 

『악의 꽃』을 낭독하며 옮겨적을 때는 속물적인 현실의 생활방식에 저주를 퍼부으며, 보들레르와 같이 고독한 시인이 되어 토사물이 넘치는 파리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런데 『파리의 우울』을 묵독하며 옮겨적을 즈음에 보들레르는 더 이상 말을 건네오지 않았다. 보들레르는 그렇게 죽었다.


문학 비평 이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저자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삶을 검토하여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있었던 문학 공부가 오늘날에는 독자, 이데올로기, 수사학, 텍스트의 미적 구조, 텍스트를 산출한 문화에 초점을 맞춘다." 뿌리를 잃어버린 작품에 실망하고, 도식적인 비평 이론에 질린 독자라면 저자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반가울 것이다.

 

그런데 독자의 내면에서 죽은 보들레르는 '저자의 죽음'이라는 비평 문화에 의한 희생자일까. 미학적 취향 문제로 보들레르를 내치게 된 것일까. 아니면 계급적 관점에서 부르주아 지식인이었던 보들레르를 비판하느라 저자를 죽게 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분명 그런 이유는 아니다. 왜 보들레르는 독자의 내면에서 죽었는가.


동시대에 비슷한 성장환경을 가졌던 문학인 오노레 드 발자크는 보들레르가 끌어올려질 때 늘 함께 올라오는 인물이다. 발자크가 버젓이 독자의 내면에 남아 있고, 좋아할 수 없었던 李箱 김해경이 아직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보들레르가 사라진 것은 이상한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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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을 찾아 본다. 우연으로 개입된 본능을 목격한다.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살아'내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잊어버리고 묻으버리면서, 당위를 찾아내고 돌이키면서, 복원되는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가는' 인간들, 그 속에서 살아'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오로지 현재를 살아내는... 그래서 살아'있'는 사람들 말이다.      

 

어떤 망설임들이 있었다. 이 막연하고 공공연한 장소에 쓰잘데없는 사념들을 다시 불러올 필요가 있을까. 망설임은 비싼 값을 치르고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볼성 사나운 치장일 뿐이다. 나열하고, 잊지 않고 살아'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사념의 시작은 아는 할머니의 한 마디 말에서 시작되었다. "박근혜 빼고는 모두 다 빨갱이랜다." 정치권의 선동질에서 시작되었겠지만, 넓게 보자면 이 '말'의 근원지는 40~70년대 해방과 전쟁 속의 삶이었을 것이다. 전태일 평전에서도 증언하고 있었던 '선택과 삶'을 연관시키는 목격담은 시대정신의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 노인의 '말'은, 지금껏 벗겨져 나간 살갗의 각질 양만큼 '삶을 위협하는 목록'이 쌓여있음을 확인시킨다.

 

시대는 비극을 안고 살아간다. 빨갱이에 대한 원색적인 저주와 마르크스에 대한 숭고한 복원이 평행선으로 달린다. 작은 규모의 마르크스 세미나를 찾아 갔다. 세 모금에 만원이나 되는 찻값을 지불하고, 두세 바가지의 비난을 들어야 했는데, 비난의 부당성을 나열하기엔 무덤덤하므로, 못다한 이야기나 한 자락 풀어놓는다.(사실 찻값 때문에 화가 조금은 난다. 이틀치 밥값을 그렇게 날려버린 것에 대해서...말이다.)

 

발제자는 이글턴의 입을 빌려 말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완벽하다는 게 아니라 신빙성이 있다는 걸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고유명사화 되었다. 그의 이론이 사회적으로 떠돌고, 정치 제도화되었을 뿐 아니라 강력한 대항 담론으로써 세계를 배회하며 일상에 충격을 안겨 주었던, 수많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어색한 일도 아니다. 이글턴의 말대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분열과 갈등이며, 모든 사회는 계급 투쟁의 역사라고 주장하며 생산양식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점은, 언제 들어도 참신한 선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곡해된 사상가 마르크스를 원래의 자리로 돌리려 애를 쓰는가. 더럽게 꼬인 생산관계라는 악몽이 자본주의라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글턴의 반박은 꽤 짜임새 있다. 먼저 마르크스 이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점들을 차근차근 짚어보고, 마르크스 원본을 복원하려 노력한다.

 

명백한 결함 중 하나인 역사적 결정론이 정치적 무사안일주의, 파시즘 등으로도 나타날 수 있음을 을 쿨하게 인정하면서도, 마르크스는 "역사를 인간이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고 두둔한다.  더불어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고, "현존하는 질서를 폐지하는 현실적인 운동"으로서 공산주의를 제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은 평탄한 연속성과 철저한 단절 둘 다를 거부한다고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노동하고 욕망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피조물" 인간은 자신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마르크스주의가 경제 환원적이라는 세간의 비난도 모두 바로잡는다. 돈이 가진 마술같은 면을 믿고 행동하는 은행업자, 금융전문가, 재무부 관리, 기업 임원이 바로 경제적인 선차성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역설한다. 이글턴의 마르크스는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고 있다. 자본주의가 가장 좁은 의미의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 반면, 마르크스에게 '의미 있는 생산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조립이나 양 도축보다는 예술"에 더 가깝다.

 

(창조와 예술이 노동운동과 계급투쟁에서 부각되는 것은  "계급은 경제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받침한다. 주체로 각성될 계기가 필요하다, 준비된 지도층이 요구된다는 등의 되풀이되는 문제제기...이런 접근들은 불안을 유발하고 차별을 부르는 심리적 요인이 될 뿐이다.)

 

결국 마르크스에게 인간은 자기 실현 자체가 목적인 존재이며, 정신적 성취를 위한 일정한 물질적 조건을 필요로 할 뿐이다. 자유롭고 자기실현적이며 사회를 의미있게 바꿀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글턴의 논변으로 마르크스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며, 그의 이론은 대안이 분명해졌는가. 자본주의로 쌓여진 자원을 재배치하고, 경제적인 것 너머를 사유하는 활동을 위해 다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잠들었다. 그의 여파는 전쟁과 분열, 그리고 정치를 가로질러 일상에 숨어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사이에 둔 역사는 가슴을 치는 인류애도 만들었으며, 저주를 부르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무기로도 작용했다. 그와 더불어 살인력(殺人歷)과 근원적인 증오를 낳은 것도 부정될 수 없다. 

 

마르크스를 깨우는 자들을 경계한다. 그의 본의를 읽는 것에 치중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일 뿐이다. 이미 주체인 사람들을 향해 주체로 꺠어나라고 이중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가 우리 일상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살아'내'라고 말해주는 의식되지 않을 믿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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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슬픔은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해석으로 동정(pity)하고, 상상으로 고통을 공감한다. 자기애(自己愛)를 부풀리는 것에 왜 동조해야 하는가. 영화 피에타가 딱 그렇게 흉물스럽게 다가온다.


성스럽다는 것은 슬픔을 동반하지 말아야 한다. 슬픔은 철저히 인간적인 정서이며, 본능이다.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공감하는 매개로서 종교성이 가미되는 절차는 늘 신격화와 관련되어짊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게 되기 쉽다. 이것은 인간이해에 대한 반역이다.

 

에서 시작되는 고통과 외로움, 슬픔과 분노는 뼈아픈 비용을 치르고야 얻게 되는 인간성의 회복을 증명하는 듯하지만, 이런 장치들은 인간성의 영역을 저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며 인격 상실의 기준을 추궁할 뿐이.


구원은 늘 죄와 고통을 덮는 무덤이다. 그런데 그 죄가 죄일 필요가 없는 문제라면, 그 고통이 당연한 본능이라면, 이런 가정들은 구원에 다른 관점을 제기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이다. 고통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원에는 구세주가 설정되기 때문에 늘 일정한 가치체계를 갖게 된다. 인류에게 변하지 않고 흐르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저 높은 곳에 설정된 정신성이 아니라, 정신성을 지지하는 가치의 체계다. 만약 <가치>라는 놈이 필요하지 않게 된다면, 구원이라는 무덤도 생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예술의 영역이라 장치, 연기 등의 창작성에 집중 해야겠지만 그런 영역은 잘 모른다. 예술을 향유하는 대신 작품을 통해 구현되는 메시지에 집중하는 방식을 택해서 피에타라는 영화를 살펴본다. 물론 메시지는 그런 설정과 대사 등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이겠지만, 종국에 남는 것은 늘 한 마디의 <>이기 마련이라(담론의 종착역이 제도나 정치 같은 맥락이다).


1. 모성 : <띠다><띄이다>

띠는”은 “띄는”의 오타가 아니다. “모성을 띠는”이 내포하는 성질을 말한다고 하면, “모성을 띄는”은 두드러지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모성이 아닐 수 있다. 영화는 <진짜 모성>의 절절한 고통으로 복수를 결심하게 하고, <가짜 모성>을 뒤집어 씌워 강도에게 접근하게 한다. 강도가 모성을 인식한 후, 그 가족애가 파괴되는 과정을 재현(체현)하게 한다. 대중은 모성을 가진 어머니의 복수극이 구원의 열쇠가 되는 과정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언뜻 속아넘어가기 좋은 모양새다. 하지만 <진짜 모성>에서 벌써 의문이 발생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지키지 못했다.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성의 불완전함에 대한 좌절감, 어머니의 죄책감은 모성인가. 모성을 흉내내는 장면은 도드라지지만 정작 모성은 애매하기만 하다. 어머니는 “죄책감을 띤” 상태로, <가짜 모성> “복수심을 띈" 채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모성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2. 복수 : <계몽><전체주의>

어머니의 죄책감에 대한 반사는 복수로 나타난다. 그리고 어머니는 직접적인(표면적인) 범인 강도에게 복수를 꿈꾼다. 그런데 엉뚱하게 돈이 문제라고 하면서 천민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진단한다. 대사 곳곳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는 돈의 문제는 두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 어머니는 복수의 과정에서 돈이 진짜 범인임을 알게 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돈의 착취 구조는 너무나 강력하니까 무엇으로도 깨지기 어렵다. 두 번째로 자본의 폐허로 무너진 장소에서 피해자들은 만날 수밖에 없다, 가해자의 장소는 이미 그곳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파괴를 부추기는 범인으로 당연시되는 것이 체계이며, 자본이다. 복수가 인정받는 것은 사태의 부당성 때문이다. 혹은 부당성 보다는 인지상정일 수도 있겠다. 대체로 이것들은 사회의 폐해를 지적하고 ‘옳은’ 것을 실행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영화의 모양새를 보면, 자본주의라는 악습을 타파할 계기로 <가족>을 불러온다.


불행한 일이다. 가족이데올로기와 그 변형들은 자본주의를 아주 탄탄히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황당한 영화에서 돈도, 돈을 움직이는 자본가들도 꿈쩍하지 않는다. 현존질서를 받침하고 있는 무능한 자들만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현실이라고 해석하는가.


3. 자비 : <거대><미세>

스크린에서 장밋빛 꿈을 꾸고, 일상을 무력하게 수용하지 않도록 영화는 친절하게 안내하는 듯하다. 케이지에서 탈출한 토끼가 도로 위에서 치어죽는 장면을 연출하고, 강도 역시 도로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설정되었다. 그러면서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토끼와는 달리 강도는 스스로 십자가의 위치에서 구원과 자비의 메시지를 던지도록 강요한다. 어느 부분에서 현실을 보고, 자각해야 하는가.


청계천은 서울의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아픈 일부분이다. 강도는 기원을 잃은 청계천의 망나니로 나온다. 모성애를 경험하지 못해 괴물이 되었다고 말한다. 모성을 잃은 것은 돈의 착취 때문이라고 부연한다. 반면 모성을 경험하고 잉태한 청계천 주민들은 가족을 위해 사채도 불사하고, 불구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생존한다. 그들의 삶이 이렇게 그려지도록 만드는 예술에 실망할 따름이다.


거대한 구조는 지식을 생산하고 일상을 지배하는가. 일상은 구조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고 보는가. 우리가 불행한 것은 구조적 지배 때문인가. 강도의 불행은 미세한 일상의 흔들림에서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인가. 어머니와 외출하고, 감정을 나누고, 죽은 생선을 사다 먹는 것에서. 영화는 거대와 미세 사이에서 제멋대로 현실을 조작한다. 구원이 불가능한 구조에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해괴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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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일제히 말합니다, 사랑에 빠졌다고, 운명에 굴복한다고, 사랑의 꽃을 가져야겠다고, 기도합니다. 사랑은 지옥의 고통이며, 욕망의 정념이고,황홀한 쾌락이기도 합니다.

 

아름답도다!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 사랑은 바람의 손짓 따라 춤을 추는 그녀의 머릿결에, 유혹하는 검은 눈동자에, 무지갯빛 살결을 감싼 치맛자락에 붙어 있습니다. 낙원의 문을 열어줄 것 같은 아름다운 여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사랑의 기도를 다시 불러 봅니다.

 

고통에 빠진 카지모도는 지옥을 관장하는 사탄에게 구원을 바랍니다.

욕망에 빠진 프롤로는 인류의 십자가를 진 구세주를 염원합니다.

쾌락에 빠진 페뷔스는 순결한 여인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각기 다른 세 명의 구애자들의 노래에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사탄의 정령이 되었다가, 숙명의 원죄를 진 여인이 되었다가, 남자를 유혹하는 순결한 그녀가 되기도 합니다. 에스메랄다, 그녀는 누구입니까?

 

세 명의 구애자는 말합니다. "내게 첫 번째 돌 던지는 자 누구"냐고요. 사랑이<세계의 확장>이라면 이들의 사랑은 오직 자기애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스메랄다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헌신은 자기파괴적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사랑을 비난과 윤리의 메커니즘으로 논하는 자는 사랑을 모르는 자일까요.

 

추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자, 카지모도. 오직 노트르담 종탑에서 자신을 묶어두어야 했던 그가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순간, 사랑이 옵니다.

 

영혼까지 헌신하고 복종해야 했던 신부 프롤로. 금기로 가득찬 성서에서 눈을 들어 '아름다움'을 <욕망>하는 순간, 사랑이 옵니다.

 

결혼의 성전으로 순결하게 걸어가던 페뷔스. 사회적 지위를 유보하며, '아름다움'을 쾌락으로 <육체화(경험)>시키는 순간, 사랑이 옵니다.

 

사랑은 모두 다르게 오기 때문에 언제나 짧고 강렬하며, 일상과 세계가 없는 듯이 생기를 머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금지시킬 때 사랑은 질적 변화를 유도하게 됩니다. 새로운 사랑이 오기 전에 사랑은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복원시키고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랑의 잔영들로 괴로움에 빠졌다면 사랑이 하나의 부재라는 것을 상기하십시요.

 

 당신의 사랑은, 이 가을 어떠하십니까?

 

막힌 노트르담 성당 벽에서 상상적 사랑을 일구는 카지모도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였습니다.

닫힌 노트르담 창살에서 우울증적 사랑을 지속시키는 프롤로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였습니다.

황량한 노트르담의 길 위에서 쾌락적 사랑을 불태운 페뷔스에게 필요한 것은 고뇌였습니다.

 

집시라는 '없는 자'의 숙명을 안고 살던 에스메랄다는 사랑이라는 하나의 부재를 증명합니다. 사랑의 찬가는 높이 멀리 퍼지지만, 유령처럼 떠도는 에스메랄다는 좀처럼 잡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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