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느는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철학자,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푸코와 데리다의 스승이기도 했던 루이 알튀세르가 아내를 살해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진 바대로, 정신착란을 이유로 면소판결을 받았다. 알튀세르는 안정을 찾은 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통해 자신을 해명한다.


그는 매력적인 사상가다. 마르크스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도 열렬히 지지하는 알튀세르는, 인간주의와 역사주의를 통해 맑시즘을 수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가 구조주의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경험주의에 기반한 인식론을 부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론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논증해봐도 문제 설정 단계에서부터, 선행하는 개념들과 언어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 개체를 행위자actor로 보기보다는, 구조를 구성하는 층위들을 반영하는 대리자agent로 본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친근하다. 한때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자라는 경제결정론적 해석이 안겨주었던, 그 남루하고 인지부조화적인 현실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환호했던 것도 알튀세르와 같은 사상가들 덕분이었다.


그의 살인죄는 더이상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 듯하다. 현대사상가로서 알튀세르의 정신이 여전히 논쟁적이며, 꾸준히 거론되어 왔다는 점과는 사뭇 다르다. 천재의 광기로 일어난 해프닝이라 말할 일은 분명 아닌데도, 사람과 그의 생生을 기억하는 바람직한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신분석자의 입장이 되어 해석했을 때, 묵직한 불쾌함을 느낀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 알튀세르의 뛰어난 후기 사유, 마주침-우발성의 유물론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고통을 관통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조차 공연한 치장으로 느껴졌다. 항변할 권리를 요구하는 죄인과, 말할 권리를 영원히 박탈당한 피해자의 들리지 않는 외침에 주목하자면, 객관성이라는 것이 결코 양쪽 입장을 모두 공평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알튀세르는 친구들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 책을 쓰고 있음을 말하며, 독자에게 “용서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인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없다. 이해하기 싫은 일이 많고, 오해와 이해가 같은 말인지도 모르고 읊을 뿐이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그런 행위를 저지르고 또 그 행위에 대해 내려진, 그리고 자연스러운 표현에 따르자면 내가 혜택을 입었다고 하는 그 면소 판결을 받고서도 침묵을 감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충격적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그런 특전을 누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법정에 출두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출두해야 했다면 나는 답변해야 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랬을 경우 내가 해야 했을 답변이다. 그리고 내가 요구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내게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 당시라면 내게 하나의 의무가 될 수 있었을 일을 지금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내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답변, 실제로 행해지지 않았던 법정 출두의 규정에도, 그 형식에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법정 출두와 그 규정과 형식의 부재, 영원히 끝나버린 그 부재가, 도리어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것을 더욱더 대중의 자유로운 평가 앞에 제시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어쨌든 나는 그렇기를 바란다. 하나의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없이 다른 불안들을 무릅쓰기까지 하려는 것이 내 운명이다. (밑줄은 내가 강조한 것임.)


알튀세르는 무책임 상태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일까? 책임상태에서는 가능했을 형식, 면소판결로 영원히 불가능해진, 그 어떤 형식을 위해 불안을 무릅쓰고 있다고 한다. 소송절차에 따라 공개 심리를 열게 되고, 검찰이 개입하고, 스스로를 해명하는 피의자가 되었다면, 그는 어떤 해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까? 그 해명에 따라 (대중의) 판결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이런 대목에서 말하는 가능성이지 않았을까? “범인은 일정한 징역형에 처해지며, 그럴 경우 그 범인은 사회에 대한 자신의 부채를 지불한다고, 따라서 자신의 범죄에서 '벗어난다''간주되는' 것이다.”


그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가 겪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밑줄을 그어 밝힌 구절,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답변”이라는 표현에 집착하고 있다. 그는 법인격을 완전히 빼앗긴 처참함에 저항해야 했으므로 마냥 침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암흑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기한도 없이 무거운 묘석에 짓눌려 있었던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급성이기는 하지만 일시적인 상태에 그치는 '광기'와 숙명 같은 '정신병'을 전혀 구별하지도 않은 채, 언론들이 부추기는 대로 일반 여론은 미치광이를 단번에 정신병자로 간주하는데, 그때 정신병자라는 의미는 평생 병자를, 결과적으로 평생 강제 수용되어야 하고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자, 즉 독일 언론에서 정확히 지적했듯이 '죽은 목숨'을 의미하고 있다.

() 정신병원 고독과 침묵 속에서, 묘석 아래에서 그 병자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 2년 전부터 정신병원에서 나온 상태지만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한 사람의 실종자인 것이다. 죽지도 살아 있지도 않고 아직 매장되지는 않았으나, 광기를 지적하기에 매우 적절한 푸코의 표현대로 '활동이 없는' 자다. 실종자.


알튀세르는 자신의 살인장면을 직접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고,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상황으로 이어진 전체적 상황을, 혹은 존재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출생에서부터 분석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어떻게 행동했고, 무슨 생각들을 했으며, “내 뜻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되어버린” 알튀세르의 모든 것을 담고자 한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랑했던 남자-죽은 삼촌으로 살아야 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으로 살고도 싶고, 어머니의 사랑을 얻고도 싶은, 양가 감정에 사로잡혀 끝없이 갈등해야 했다는 것이다. 파국에 대한 두려움,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었고, 불안 속 자기파괴의 과정에서 아내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3자의 입장으로 (자신에 대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대조한 알튀세르는 비판적으로 고백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타인에게 자신을 알린다. 주변 인물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전문가에게 문의하며, 신문 기사를 조사하고,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들이 끼친 영향을 분석 평가한다. 일기나 회상록에서 멈추지 않고, 법적이고, 제도적인, 정신분석학적인,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들을, 그의 경험을 매개로 설명하려 한다.


누구나 몇 번쯤은 속내를 드러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질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럴 때의 속내란, 억울함을 공표하거나 죄책감을 씻는 쪽으로 향해지기가 쉽다. 그렇다면 이 책을 적고 있는 알튀세르의 “답변”이라는 표현은 어떤가. 누군가 묻고 있다는 것이다. 비평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변명도 아니고, 항변도 아니다. 답변이다. 냉정하게 들리는 것이 왜인가. 답변이라니. 누구에게, 무엇에 대해?

알튀세르는 자신의 생을, 개인적 관계와 일상을, 세계에 노출함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검증받고자 했다. 피해자 엘렌느,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고통받는 당사자들에게 답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자서전-답변서는 한 사람의 生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빛나는 순간이 영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해석자가 항상 존재하는 것처럼, 비극의 순간이 영원에 이르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분석자가 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늘 정당성을 입힐 수 있는 것도, 세상 누구보다 자신만큼 자신의 삶을 잘 분석하고 해석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는 대개 오해와 비슷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온전히 혹은 객관적으로 알 수는 없다. 나는 너 그리고 세계와 섞여 존재하는 것이기에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일기도 회상록도 아닌 글을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방어적인 속성은 없앨 수 없겠지만, 사회적 공간으로 나온 이상 감당해야 할 무수한 뒷말, 저항, , 폐기처분의 위험을 안으면서, 무언가를 입증하고자 했다. 사회적 공간에서, 개인을 떠난 지점을 만들어 분석하고 해석하는 일은 철저할수록 좋다. 사회적 가치와 의미는 늘 일정한 목적과 방향성을 갖고 있다. 이 책의 의미는 이미 사회적이다.


알튀세르가 정신분석자의 위치에서 자신을 해명한 일이 (여전히) 부자연스럽지만, 나는 계속 반복해서 말하며 믿으려 하고 있다. 누구나에게 말할 권리가 있다고. 그 권리란 내가 좋을 때,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적용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그 공간과 성격을 고려해서 듣고 사회적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전달해야 한다.


말할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는 수많은 타자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반복하면 할수록 슬프다. 믿으려 하면 할수록 고통스럽다. 내용도 형식도 갖지 못하고 묵묵히 견디다 떠나간 이들, 아무 것도 없이 살다가, 흔적없이 사라진 그들의 침묵이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가슴 답답하다. 현실에서 말할 권리는 생존권과 연결되어 작동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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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티는 표상주의자와 어떻게 대화하겠다는 것이었을까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보잘것 없어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지루할 수도 있고 때로 거북스러울 수도 있으며, 그 자체의 불완정성으로 인해 부족하거나 억울할 수도 있다. 현실을 ‘드러내는’ 일이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주 말하게 되지만 우연의 능력이 그 숨겨진 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연성을 말하다 보면 몇몇 사람이 떠오르는데, 리처드 로티가 그렇다. 로티는 우연성을 표상주의를 격파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 인상을 받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로티가 말하는 우연성은 보편성보다 더 강력한 규준이 되는 듯하다.


로티가 누구인가. 듀이를 대놓고 싫어하고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남몰래 의심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로티를 비롯한 프래그머티스트들은 본질-현상, 객관-주관을 탐구하거나 타자라든지 헤게모니를 연구해봐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고, 세상이 자유로워지거나 불평등이 해소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감소시키고, 평등을 증가시키도록 하는 실천적인 유용성에 집중한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본질이나 세계를 담을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완성하려 했다면 로티는 적용과 대응관계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고 말하며, 철학적 원리나 위대한 사상을 중심으로 사회를 개조해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로티의 이런 노력이 닿는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다. 고착되고 습관화된 어휘나 서술을 거부하고 자아창조에 열정을 가졌으나, 사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사회적 정의나 연대의 고리를 만들지 않는 사람, 자유롭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인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새로운 대안은, 이미 가지고 있는 규준을 들이대며 논해봤자 갈등만 심해진다는 것이다.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 종결되지 않는 대화와 타협 과정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예외도 없고 입증도 필요없는 만고의 진리만 찾다가 지치지 말고 개인의 자아창조와 일상의 변혁을 시도하는데 집중하자는 것이다. 절대정신,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으니 역사도 당연히 우연한 산물일 뿐이다, 로티에게는.


언뜻 혹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자유를 돌보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본다.” 상식이 굴레가 되지도 않고, 이론이 족쇄가 되지도 않고, 다른 인간에게 굴욕을 당할 필요도 없는 사회, 오직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참여하는 자유로운 사회, 얼마나 평화로운가. 맥락화를 본질이나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몰아(沒我)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말이다.

로티가 결국 호출하는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마지막 어휘를 만드는, 만들어진 어휘를 스스로 갱신할 수 있는, 재서술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인간, 낡은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 놀이를 할 줄 아는, 책과 건축물, 그림, 노래, 문학작품을 만드는 만화가, 저널리스트, 작가를 호출하며 문화정치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로티의 우연성이 무기가 되기엔 애초에 글렀다.


2. 우리를 고통 속에 붙잡아두는 것은 무엇인가


집단지성을 말하고 변화의 등燈을 높이 들던 때가 언제입니까.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이 대중은 피로감을 느끼고 흩어집니다. 또 누군가는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해 공격성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부모 세대는 등골이 휘던 청춘이 억울하고, 자녀 세대는 불안정한 위치로 방황합니다. 세계는 별반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먹고, 일하고, 씻고 자는 것은 그대로이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가치를 일궈내거나 희망을 떠들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 스멀거리며 의문이 피어납니다. 이래도 될까. 학대와 방임으로 손상된 시간들, 끊이지 않고 증가하는 잔인한 사건들, 목숨을 걸고 지켜도 지켜지지 않는 소중한 생명들…. 공습으로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휴전을 기뻐하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이 그토록 갈구하는 독립국가와 개방된 경제가 있는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요.


세계는 확연히 갈라졌습니다. 아군아니면 적군입니다. 신분상의 차별 못지 않은 경제와 문화의 차별은 인류 문명 멸망의 충동을 부채질 합니다. 도서관의 분류코드가 무색하게, 더 세밀하게 분자화된 개인의 세계에 인공적인 네트워크는 독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적대자를 설득하는 것은 진작 포기하고, 서로를 벌레와 쓰레기로 칭하기 바쁩니다. 로티 방식으로 충고하자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행 규준을 내려놓고, 문제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서구 지성인의 생활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정의며, 누가 정의를 누가 말하느냐로 구분하고 싸우는 것이 불평등을 해결해주지 못하니 말입니다. 일부는 맞는 것 같고 또 전부는 그른 것 같습니다. 대화할 수 있는 동료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정치적 대화는 그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얼마 전, 미국인 기자를 참수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큰 비난을 샀습니다. 동영상은 신문 기사에서도, 유투브에서도, 개인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유포자의 의도가 통한 것일까요. 설마 하는 생각에 접속했습니다. 재생 버튼 위에 마우스 포인터를 갖다 대고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현실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슷한 시기 가자 지구 어린이들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500여 명 사망했으나, 세계인들은 그 상황을 용인한(유도한) 가해자에게 폭격을 멈추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도 끊임없이 잔인한 사건들이 자행되지만 침묵 속에 놓입니다. 비단 사회적인, 정치적인 권력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이미 개인 간의 관계는 정치사회적 구조를 완벽하게 답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잔인합니까. 왜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했을까요.


3. 웃음기 가신 얼굴들


제대로 걷기가 힘든 인파 가운데 서 있습니다. 팔꿈치도 치이고 옆구리도 찔리면서, 더 밀리지 않으려고 그 자리를 고수해봅니다. 몇 걸음을 떼어 봤지만, 이내 가다서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밤이 깊을수록 인파의 이동속도는 동동거리며 달립니다. 마지막 시외버스 시간이라도 되는 냥, 급하게 해내야 할 과제를 독촉받은 양, 매끈하지 못한 걸음걸이로 서너 개의 입구를 통과해 모이고, 12개의 출구로 흩어집니다. 어디로들 갈까요. 자정이 다가오는데 어디로들 가시나요?


지하상가 불이 꺼지기 시작하고 모두가 빠져나간 대합실은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몇 시간 후, 날이 밝고 해가 뜨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다시 누군가 몰려올 것이고, 또 빠져나갈 것입니다. 이곳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러라고 만든 곳이니까…중얼거리다가 얼척진 생각을 합니다. 그냥 이곳에 침낭을 펴고 잘 수 있을까. 종일 지친 몸뚱아리는 외려, 멀리, 저멀리 누추한 집을 찾아가는 것보다 그걸 원할텐데. 이름표를 ‘침실’이라 붙이고 저 반듯하고 깨끗해 보이는 대리석 바닥 한자락에 폭신한 이불을 깔면—누구라도 피로를 풀 수 있다면. 다같이 그러면 이상할 것도 없는데—집 구하느라 입술 바트지 않을텐데. 집세에 공과금에 애타지 않을텐데. 모이고 흩어지는 대합실을 여기저기 만들게 아니라, 누구든 지나다 잠잘 수 있는, 아무나 말끔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공동’의 침실을 만든다면, 웃음기 가득한 아침이 올 수도 있을텐데….


허망하고 미련한 생각입니다. 이상이란 그렇게 허투루 흐르기 쉽습니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본능이 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직장에서 2시간을 달려야 한다고 해도, 몇 번의 환승을 거듭하며 비탈길이라도 올라야 한다고 해도, 돌아올 공간이 절실합니다. 도착한 집이 뒤척일 공간도 없는 작은 방일지라도, 축축한 냉기가 흐르는 동굴일지라도, 바라고 원하며 안도합니다. 싸우고 억눌리고 곤두서있던 정신과 마음을 내려놓을 장소가 절실한 우리시대에 공동 침실은 재앙이 되기 쉬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우둔한 생각은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현실회피의 증상? 육체의 신호일 수도 있겠지요. 그도 아니면 우연인가요. 전자라면 깨어남을 필요로 할테고, 후자라면 거듭남이 호출될 겁니다. 마지막 경우라면 정지하고 멈추는 반복을 계속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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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원에는 가설이 없다


구원을 위한 역사적 임무는 완수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구원되지 못했다. 메시아는 이천 년전에 다녀갔으며, 노예는 수백 년 전부터 해방되기 시작했고, 인권을 위한 세계적인 기구도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애초에 구원은 없었거나 찰나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부질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정할 수 없는 구원의 흔적들을 여미며, 부스러기들을 끌어모은다. 구원은 형태도 없이 소리도 없이 고통 뒤에 널부러져 있다.


구원이 무엇인가. 고통의 중단, 죄의 사함, 새로 태어남. 누군가는 고통이 제거되어 즐겁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과거를 용서받고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구원의 기제는 정확히 어떤가, 그런 일들은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가. 구원은 절차가 없다. 가설도 전제도 없이 일시에 초월적 능력자에 의해 일어날 뿐이다.


<2>비평은 악몽이 되고 만다


타자라는 말에는 이질성이 강조되는 지점이 있다. 반면 객체라는 말에는 분리된 상태, 물질성을 띤 영역이 있다. 이질성이란 동질성을 파악한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타자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 분모가 존재하게 된다. 에둘러 말하면 내 의식에는 타자가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영역의 누구를 부르고 무엇에 의존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한 내가 아니다. 그러니 주체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처럼 뒤죽박죽이 된다. 자립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익숙한 관계와 상황에서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반대의 경우에서라도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조금의 여지야 늘 생기곤 하겠지만 ‘나’란 그런 존재이다. ‘나’ 이외의 ‘대상’을 바라볼 때 ‘나’의 위치는 언제나 우월하며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와 존재 근거는 늘 세계에 있다. ‘나’는 불완전한 ‘나’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야 그나마 형태를 드러내곤 하지만 결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참된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 어긋나는 상황에, 불안한 관계가 가중되면, 깨져버리는 진심들은 ‘주체’에 더욱 집중하라며 독촉한다. 이기심이 수치심을 덮어버리는 순간은 쉬이 일어난다. 망각 능력은 그 사실을 은폐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다. 남아 있는 것은 진심과 깨져버릴 때의 고통이다. 더욱 더 완벽해진 알리바이는 ‘억울함’만을 주장하게 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아득히 먼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문제는 자신을 항시 들여다보게 하는 이런 장치와 비평들이 사회를 향하게 될 때 일어난다. 결코 타인에게 들이대지 말아야 할 잣대를 휘두르고 내치는 인물 비평은 독이고 악몽이다. 그 형식이 논문이건 칼럼이건 잡담이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일이다. 비평은 고통의 완화와 나-타자 관계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알리바이를 깨고 반복을 중화시켜 나갈 작은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나는 실패한 자이다.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회성을 가졌으며, 체제 바깥을 당당하게 거닐 대안도 갖지 못했다. 소박한 노동으로 일상을 깨우기에는 게으를 뿐만 아니라, 지적 충만감()에 중독()되어 흔들리지 않고 일궈나갈 힘조차 없다. 사회적으로 내 인상()을 투영해보면 루저에 속물 경쟁에서 도태된 잉여이다. 속물이 되려다 동물이 되며 사물이 되고 괴물이 되어간다.


무엇으로 불리건 나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어찌 다 알겠는가? 속물에서 괴물까지, 모두 내 안에 있겠지만 계속 머무르지도 않으며 그것만이 전부도 아니다. 타자를 부르는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타자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는 결국 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자립하며 산다는 확신에서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3>혁명은 불안했던 과거의 반향이다


우리 시대의 숙제는 속물과 동물, 잉여들을 인간화시키는 것인가 보다. 너도나도 달려들어 나같은 사람들을 새롭게 개화시키려 한다. 그것을 혁명이라 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나를 지우고 무언가를 영접해야 하는가, 아니면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미 형성된 자아상()을 개조해야 하는가, 혹은 배제되고 소외된 자리에서 더 무기력한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가.


구원은 확신에서 비롯되지만 오직 찬란한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다. 남겨진 자와 배제된 자에 대한 자리가 부족하다. 비평은 엉켜진 시간을 해명해야 하며, 종결된 위치를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연을 떠나 문화 세계로 진입하던 인간이 바쳐야 했던 공물, 수치심이 개체화의 본질이었다.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자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세계는 경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나 비평을 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 사회적 ‘나’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인간화()의 시작이란다. 이제 속물과 잉여, 동물과 식물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정지시켜야 한다. 정지한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불안과 좌절, 고통과 기쁨, 행복 마저도 정지시킨다는 것이다. 정지는 과거를 돋아내는 것이다. 더이상 그것들을 붙들어 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혁명과 비평에 공통점이 있다면 정지한다는 것이다. 흐르던 물길이 멈추지 않고 역행할 수 없듯이, 내 자신이 바뀐다는 것은 (그렇게) 일순간 정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이를 악물어야 정지할 수 있을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기득권의 전부였던 자격증도 반납했고, 가진 것도 변변치 않다. 택배상자 몇 개도 채우지 못할 만큼 ‘별 것도’ 없다. 그러나 내 의식은 여전히 몇십 년 간의 연장선에 있고, 하루는 견고한 체제와 몇 사람의 호의에 의존한 채 흘러간다.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자, 노동에서도 관계에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의 아침은 또다른 죄책감을 뒤바른 채 밀려온다. 어떤 연명은 그렇게 사회로부터 불한당 취급을 받는다. 매 끼니를 당당히 챙겨 먹을 자격을 상실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이 말들은 오로지 내 감상에 불과하지만, 방향을 갖고 있다. 감성에 가려진 본성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우연으로 덧씌워진 나와 너의 비밀을 공공연히 하는 것, 그리고 존재가 존재근거인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논리의 일관성이 늘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출처를 밝히는 정밀함도 모른다. 학계()나 사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다. 공부한 적이 있더라도 그 궤를 이을 능력이 없다. 그저 옮겨적는 글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거나 들여쓰기를 할 뿐이다. 그것도 불충분하겠지만 능력’껏’이 그정도다.

가끔 메모해 놓은 공책을 죄다 파쇄해 버리곤 하는데, 찢다 보면 잘려나간 종이조각에서 아까운 글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잠깐 갈등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 갈등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발길이 닿지 않는 도서관의 오래된 새 책들 속에서나, 너덜거리고 헤진 신간 헌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할까. 오래된 새책이 의미하는 것과 헤진 신간이 말하는 것은 양면일 뿐이며, 같은 줄기의 다른 잎사귀다.


왜 나는 이런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늘 존재에게 존재근거를 대주는 꼴이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정지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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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송에선 글로벌 나눔을 '권유'하고 있다. (불 꺼진 방에서, 노트북 화면은 주변을 지워가며 간간히 파르르 떨어 댄다.) 까만 피부에 창백한 소년은 맨 땅에 둘러않은 여러 가족들 너머에서 너무 담담히 말한다. "그저께부터 굶었다." 어렵게 마련한 옥수수죽 한 냄비를 마당에 내놓고 가족들을 불러 모은 어머니는 정작 자신은 식사를 하지 못한다. 소년과 또 다른 소년은 '엄마'를 따라 먹지 않았지만, 이내 옥수수죽 냄비는 동이 난다.

생뚱맞게도 남겨진 죽 냄비 바닥이 안타깝다. 왜 닥닥 긁어먹지 않고 식사 자리에서 물러나는가. 소년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틀을 굶고도 죽 한 주먹을 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일상적인 저녁은 짧은 식사와 긴 침묵으로 채워진다.

 

아주 적게 먹고도 생존할 수 있도록 유전자적 변이가 일어난 것인가. 그렇게 진화한 인류인가. 아니면 식욕이 억제되도록 훈련된 정신력인가. 그것도 아니면 습관의 힘인가.

 

어머니는 끼니 걱정을 멈추지 못하는 생활에도, 주거 환경이랄 수도 없는, 울타리만 있을뿐인 집 걱정보다도 먼저, 소년의 공책을 산다. 옥수수죽이나 쌀 100g 아니다, 공책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어머니의 믿음이 소년을 이끄는 것일까. 가족들을 위해 옥수수죽을 탐내지 않고 공책을 찾는 소년의 현재는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다.

 

2. 세계의 모든 상황은 결국에는 자신의 삶으로 들어와 이해되고 조작된다. 소년의 얼굴에서 창백함을 읽어내는 것도, 죽 냄비 바닥에 남겨진 누룽지가 시선을 끄는 것이 그렇다. 배고픔에 대한 공감력 또한 저마다의 크기로 읽혀질 텐데, 내 경우에는 늘 한 장면에 집중된다. 그 소년만 할 때, 한동안 집에 먹을 것이 없곤 했다. 그 시절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어느 날은 너무 배가 고파 온 집안을 뒤지다 종지에 담긴 된장을 찾아냈었다. 된장을 수도물에 풀어 벌컥벌컥 마셨는데...배가 불렀다기 보다는 먹는 행위에서 어떤 안정감을 느꼈었다.  

 

우리는 소년과 소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또 너무 잘 알고 있으며 강력하게 개입되어 있다. 개입된 방식을 극명하게 해명해내기 어렵다. 그것은 소년과 소녀의 삶이 '거울' 안에 비친 '우리'의 얼굴이며, 우리가 되어버린 탓에 '일자一者'로 혹은 개인으로 해석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자신의 삶이 세계에 대한 해석인 것과 모순된다. 이 낯익은 모순은 근본적인 방어의식일 수 있다. 소년의 삶에서 우리를 읽지 못하고, 자신만을 읽는 적극적인 방어 자세 또한 낯익은 모순을 드러내기엔 역부족이다. 적극적인 방어는 개인의 소멸과 함께 쉽게 허물어 질 수 있으며 터무니없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해명방식에 관심이 적다. 아니면 이미 해명된 것으로 간주한다. 소년과 소녀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그렇게 말한다. 봉사단체의 손에 밀가루와 학용품이 전달되고, 그린스카우트는 식량 재분배를 주장하며, 수많은 동맹에 의해 저항의식이 고양된다. 우리의 해명방식은 소년에게 약자의 멍에를, 혁명 투사의 지위를 지워주기에 바쁜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큼 전달될 수 있을까. 소년은 언제나처럼 우리의 삶에 개입되어 있다. 세계를 해석한 내 삶에도 소년이 있다.   

 

3. 소녀는 보이지 않는다. 창백한 소년만을 남긴채 사라진다. 소녀가 10대를 지탱했던 경구가 있었다.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 우리 인생 최고의 선이다." 소녀는 된장물을 마셔도 남을 괴롭히지 않고 사는 자신에게 만족했던 것일까. 소녀가 20대가 되면서 '남을 괴롭히는' 사람, 정확하게 20대가 된 소녀의 눈에, 남을 괴롭히는 者들을 찾아내는 것에 골몰하며 소녀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항의하며, 저항하며, 남을 괴롭히지 않는 사람이 넘치는 세상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떠벌리곤 했었다.  

30대가 된 소녀가 자신을 비교적 명확한 형상으로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는, 온전한 슬픔에만 빠져 지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나도 남도 선도 보이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몇 년을 보낸 소녀가 10대의 경구를 되살리면서, 이번에는 '선'이라는 자체를 부정하기에 바빠졌는데, 그 결과 '남'이 사라질 지경에 이르렀다.

소녀는 보이지 않지만 소녀는 여전히 있다. 지워버리라고 명령하는 세계를 향해 우스운 꼴을 할 지언정 마냥 서 있다. 

 

4. 무언가를 보지 못하는 것과 지워버리는 것은 비오는 풍경을 창 안에서 보는 것과 창 밖에서 보는 것만큼 다른 일이다. 이별이란 비를 맞는 것이다. 처마도 없고, 작은 움막을 만들 나뭇잎조차 없는 광야에서 무방비한 상태로 맞는 것이 이별이다. 온전한 이별이다.

세계는 완벽한 이별만이 멀쩡한 허우대를 유지한 채 돌아다닌다. 때론 우산을 쓰기도 하고, 때론 비옷을 입기도 하면서 완벽한 이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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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버려진 노트에서 오래된 감성들을 일껏 꺼내놓는다. 이 감성들이 낡은 교만으로, 허영에서 나왔다는 따위의 설교를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들에서 입증되는 것이 결국 자본주의적, 공리주의적 정치성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미디어는, 변하지 않는 막강한 주제(구도)들에 버둥대다가도 즐거운 여유를 선물한다. 불화의 고리는 참신한 어휘로만 무장한 비극적 영웅 서사, 곧, 파워 엘리트에 의해 끊어진다. 그 한결같은 사적 의욕을 미디어는 새로움으로 조명한다.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지식인들의 설교에 무방비로 노출된 본능들은 처참할 지경이다. 그 꼴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은, 낮게, 겸손하게, 그러나 누구보다 강력하게 강제하는 삶의 정치성을 얼마간은 내려놓는 것이다.


숭고함을 내려 놓으면... 궁극적 진실에 대한 강박을 쓰러뜨리면...생산적 불화를 거부하면....무엇이 남는가. 바꿔 생각해야 한다. 뒤집혀 버린 본능을 읽어내려면 물구나무를 서든지, 눈을 감고 최대한 우매한 상태에서, 문명에서 멀어져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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