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하늘은 일없이 고대로고, 폭우가 순식간에 물바다를 만들어도 땅은 꺼지지 않더라. 그래,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살고 싶다.


애써 태연하게 말하지만, 바람이 할퀸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넘친 제방을 타고 떠내려간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장대비가 쏟아지고 난 뒤 대기가 얼마나 깨끗한지 잊지 않고 있다. 태풍이 가라앉고 난 뒤 허공은 왜 그리 고요해지는 알고 있는가. 햇빛으로 달궈진 바람과 폭우는 또 그렇게 햇볕에게 뒤를 맡기고 아무 일도 없는 세계를 만든다.


가끔 내가 가진 생각들을 너른 바위 위에 펼쳐 놓고 햇볕에 꾸덕하게 말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수분이 모두 날아간 '사고'뭉치들은 가벼워지겠지. 살며시 ''하고 불면 훌훌 날아가겠지 … .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닌 듯이 기지개를 켜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뜀박질하면서 함성을 지르는 거지.


20169월 무렵 난 아프기 시작했다. 두 달 동안 고통에 먹고 마시지도 못하고 흔들리는 시간을 버티며오직 살 궁리만 하고 지냈다. 이비인후과 호흡기내과 류머티즘내과를 거쳐 가정의학과에 갔을 때였다. 담당의는 몇 가지 검사를 제안하며, 어떤 “얼굴”을 하고 다니는지 아느냐고 질책하며 친구는 얼마나 되는가를 물었었다. 공황장애 상태라 부비동염으로 얼굴 통증을 느끼면 곧 호흡곤란 상태로 빠져들곤 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을병이 아닌 죽을 병에 걸려 있었다.


그때부터 내 공포감을 삭제해 줄, 살 수 있는 방법, 휘몰아치는 공포에 쪼그라드는 몸을 펴게 해 줄 방법을 찾아 매달렸었다. 십몇 년 동안 연락한 적도 없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눠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한방 병원에서 잠깐 만난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주기라도 하면, 가슴 속에 안도감이 잠깐 들곤 했다. 추운 날도 반소매와 반바지 상태로 해를 따라 걸었으며, 영양실조 상태를 만회하려고 고깃국을 먹었었다. 요가 명상을 하며 긴장감을 풀려고 했고, 길가다가 멈춰서 뻣뻣해진 몸을 움직이며 춤인지 체조인지 모를 몸부림을 하곤 했다. 몇 명의 아는 사람에게는 일거리가 필요하다고 애원하기도 했었다. 살려면 그 모든 것은 잠깐이 아니라 지속이어야만 하는데, 안도의 순간은 짧고 불안은 일상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두 시간을 넘게 걷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었다. 입가에 지은 미소가 몹시 어색해 보였는데, 공포가 가득 찬 눈빛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더 급해진 나는 억지 미소가 아닌, 진짜 웃음을 찾으려고 연습을 시작했었다. 개그 프로그램을 찾아보며 웃는 장면을 따라하고, 아이들이 낄낄거리는 것을 흉내냈으며, 복식 호흡으로 생기를 끌어올리려고 했다. 음식점에서 한 무리를 청년들이 왁자지껄 걸어나오는데, 마치 그들의 일행인 것처럼 맨 끝자락에 붙어서 걷다가, 누군가 농담을 하고 다함께 웃음이 터질 때 나도 따라 웃었다.


난 무용담을 늘어놓듯이 살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닌듯이 흘려보내려 한다. 지난 해 늦가을부터 한 주에 몇 킬로씩 살이 붙기 시작하더니 통통한 몸으로 돌아왔다. 호흡기도 관절 통증도 나아졌다. 물론 어떤 부작용도 있었다. 염증이 심해질 때까지 '공황 증상'으로 생각하고 '나는 아프지 않다, 지금 내 신경 시스템이 이상반응을 한다'며 참다가 고생도 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꼭 '이 소리 들려?'하고 묻게 된다.


가장 거슬리는 후유증은 인과적인 사고 습관이 생기려는 것이다. 나는 목적론이나 기원을 갖는 세계를 싫어했고 인과론적 분석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곰곰 되짚어 보자면 어릴 적부터 시작되었던 같다. 울면 더 맞는다는 엄포를 들었을 때,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잘못을 했기 때문에 매를 맞아야 하며, 거기에 반성하는 자세라면 울어서는 안 된다는 설교에 저절로 더 맞는 쪽을 택했다. 매를 피해 도망치는 때가 늘었었다. 내게는 잘못과 벌은 별개였고, 아버지 없이 컸다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는 강요도 부당했고, 내 행동과 아버지는 별개였다. 맨발로 뛰쳐나와 뚝방에 앉아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고 있을 때도 슬프거나 비참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런데 공포에 취해서, 내 인간관계가 서툴러서, 내 능력이 모자라서, 내 의지가 약해서, 내가 일을 안해서 … 내 죄가 많아서 …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반성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매를 피한게 아니라 인과적인 상황을 피했었던 것일까.


그러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몸에 집중했으며, 나라는 존재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대로 …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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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6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lavis 2018-02-16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에요 초원님♡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원 2018-02-26 15:29   좋아요 0 | URL
헤이, 요! 여!
어제 만난 사이처럼 가볍게 인사드리구 싶어요.
점심으로 뭐 맛난 거라도 드셨나요.

식후 졸음과 싸워야 할 봄이 왔군요.
벌써 꾸벅꾸벅하면 안될터인데...
살찐 뱃살이 너무 접혀 소화도 안되겠네요.
좀 걸어야겠어요.
clavis님과 더 가까워질때까지

2018-02-17 14: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마스 씨에게

오늘 우리는 토마스 씨의 스피노자를 만났습니다. 스피노자는 언제 만나도 반가운 분입니다. 제가 사는 이곳에서는 수치심을 모르는 …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을 경멸해야 한다는 도덕 감정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경건하고 엄숙한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도처에서 선과 악에 대한 감별사가 여러 이름으로 존재했었고, 우리의 일상은 그 지배적인 권력에 의해 절대적 의미가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괴로운 시절이었으며, 지금도 그 영향력이 도처에 숨어서 시시때때로 출몰하곤 합니다.


그때 우리 세계에 초월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또 자유의지나 영혼불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스피노자는 귀한 말씀의 전도사였습니다. 감정은 치유가 필요한 병리적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고유한 힘을 가진 자연적 현상이라는 대목에서는 많은 위로와 기쁨이 몰려왔습니다. 못나고 어리석다고 여기지도 말 것이고, 착해지라고 채근할 필요도 없이, 더 적합한 관념을 찾아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면 자유롭고 윤리적인 인간일 수 있으니까요.


특히 스피노자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으로 매료되었던 점은, 그가 인간이 동등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 즉 자연의 퍼즐 조각으로서 제가 가진 본성은 자연의 본성이며 타자의 본성이며 우리는 신의 법칙에 따라 운용되는 동등한 양태로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당신의 말씀처럼, 자연이 자신의 법칙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그 무한한 움직임들이 (더 무한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무수한 양태들을 만들어내는 열린 체계라는 점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물론 신비로움은 토마스 씨, 당신의 의도가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우리 몸 자체가 그 신비로움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생각은 자주 잊게 되는 깨달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요, 토마스 씨.

당신의 스피노자를 만나며 저의 고민이 늘었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한 가지 문제에 집중해서 그 마음을 털어내려고 해요. 스피노자가 헤렘이나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견뎌낸 삶은, 윤리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으로 서고자 하는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이어서 자유로운 공동체 • 국가를 향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씨의 스피노자는 어떤 연유에서 세계의 필연성을 인식할 수 있는 지적인 사랑에 집중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내재성의 철학은 스피노자가 고립무원의 당대를 이겨낼 수 있었던 동력이기도 했지만, 정신의 교정을 통해 도달할 지복의 삶은 ''에서 '우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토마스 씨도 그 점을 알고 계시리라 믿으면서도, 제가 좀 서운했던 것은 아시다시피 지금 세계가 글로벌한 하나의 제국으로서 기능하는 듯 하지만, 분열과 배신이 필생의 전략인양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증오와 분노와 슬픔이 넘치는 것이지요.


마치 스피노자 시대의 모습처럼, 그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 세계의 민낯은 우리 일상에서 숨겨진 불안으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해방'을 강력하게 염원했었지요. 그의 방식대로, 또는 토마스 씨의 해설처럼, 제 인식의 틀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매트릭스에 맞춰질 수 있다면 이 불안들이 제거될 수 있을까요? 코나투스는 포기할 수도 양도할 수도 없는 역량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개인을 보존하려는 열망과 반대의 명령을 내리기도 하지요.


스피노자의 정치론이 함의하는 국가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한 개인의 내적 인식이 정치적으로 슬픔을 회피하고 기쁨을 증가시키는 이성적 국가의 탄생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요.


올바른 인식이 중요한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관념들이 자연법칙에 어긋나는지 적합한지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쉽지 않습니다. 또 인간이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닌데 겉과 속을 일치시키고, 존재와 사유를 합치시키려는 노력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하는 부적합한 정서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관계에 대한 실존이 드러나는 2종의 인식과 특정한 신의 속성들의 형식적 본질에 대한 관념인 3종의 인식에 이르면, 상상과 우연적인 경험들, 그리고 기호를 통해 획득되는 1종의 인식을 교정할 수 있다는 논리는 … … 그저 아름다울뿐입니다.


토마스 씨는 능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용하라고 말씀하시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보여준 구체적 예시처럼 물리학을 통해 본질을 추적해 재현할 수 있고, 시적 은유를 통해 참된 공명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지요.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고, 우리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겠지요, 당신의 말씀처럼요.


시적 은유는 자연과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지복의 세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이용해 수학적 형식으로 신을 증명했던 스피노자의 방법론은 괴테와 같이 미적 세계 해명 방식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적합할 것이라고도 생각됩니다.


하지만 시적인 감각 방식 및 서술은 오늘날 우리를 부자유로 몰아넣는다는 기호적인 가치와 어떻게 다를까 의문입니다. 토마스 씨, 우리는 정념의 정글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자기자신을 물건들로 증명하려는 이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명품에 중독되고, 마트 쇼핑에 중독되고, 다이소 천원용품에 중독되고, 책 수집에 중독되고 … 이들에게 토마스 씨라면 어떤 말을 들려줄까요.


보드리야르는 물건을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차이를 드러내 주는 것이며, 남들과 다른 위치를 선점하려는 욕망에서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된다는 말합니다. 그 물건이 필요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물건에 맞추어 살게 되고, 자유가 아니라 부자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데에 반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결국 보드리야르는 당신이 말했던 대체될 수 없는 시적 은유와 같이 진품과 복제된 이미지를 구분하게 됩니다.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것, 그래서 실재를 잃어버린 세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고 꼭두각시로 살아간다는 비판이 뒤따르는 것이고요. 스피노자도 자유인과 노예에는 (넘을 수 없는) 질적인 위계가 있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능동과 능동성에서 나오는 행위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토마스 씨, 스피노자는 적합한 인식활동을 많이 할수록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인식은 과학적이며 외부를 포함하는 사유였습니다. 적합한 인식이란 고립된 이성의 활동이 아니라 외부를 관통하는 공통의 유용성을 창출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추상적 결과물이 아니며 생물학적입니다. 축적되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실존 관념이며 신체적 능력의 확장이며, 관계적입니다.


이런 사회적 개체로서의 인간은 끊임없이 모방하고 재현해야 합니다. 인식이, 앎이 특권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공백을 상상으로 메우는 것이라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적합한 관념도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지 그 자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감정은 복사되어도 늘 진본입니다. 기쁨은 전이되고, 전이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만남, 좋은 만남은 코나투스를 촉진시키지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모방하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비난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명품을 사지 못하면 짝퉁이라도 소유하려는 욕망은 기호의 가치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모사된 이미지를 탐닉하는 대중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예술적이고 더 고귀한,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믿음을 파괴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늘 부적합한 관념에 의해 공포와 희망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적합한 관념이 되기 위해 예술과 물리학이 꼭 필요한 것인지, 더 많이 배우는 것이 자유인에 가까워지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싶은 것입니다.


토마스 씨, 저의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의 페르소나』에서 인용한 것이지만, 캐밀 파야의 논의와는 무관합니다.) 태초에 자연이 있었다는 말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기독교적 관념을 뒤엎는 것입니다. 부정된 '말씀'이 도래하게 하지는 말아야지요. <자연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이 남았다>로 귀결되는 것은 스피노자의 노래가 아닐 것입니다.


지난 시간, 인간의 본질은 욕망에 다름아니다라는 스피노자의 인식에 따라 슬픔이라는 끌림과 사드라는 과도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복(절대적 기쁨)을 누려야 쾌락의 절제가 가능하다는 중요한 지점을 되짚었고, 앎의 수행성도 더불어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의 스피노자를 통해서 인식이 중요할수록 적합한 관계를 통해 생성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덧붙입니다.


세계는 인간에게 적합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공포에 지배되지 않는 대중은 공포스런 존재라고 했지만, 언제나 인간의 자유를 극대화시킬 공동체를 구상한 스피노자에게 무한 감사를 드립니다. 불완전하고 잔인하며 살기 힘든 현실은 인간의 관점에서, 감수성의 견지에서만 해석하는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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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7-09-01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반가워요!!초원님~♡♡

초원 2017-09-01 09:56   좋아요 1 | URL
저도 반가워요.
가끔 생각했어요. 뭘 하고 계실까...
감사해요. 불러주셔서.

여름 햇살에 증발시켜 버릴 요량이었던 것들이
이 흐린 날들의 습기 속에 고여 있네요.

비오거나 비올 준비를 하거나
그렇게 오락가락하더니
이제 찬바람이 부네요. 내복을 꺼냈어요.

몸의 건강이 마음과 함께 가더군요.
건강 돌보는 시간 꼭 챙기시길 바래요.

음악이 좋아요. 세 번째 듣고 있는 중...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리의 기적'이 가능한 것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아픔에 서성이는 사람들로 병원은 쉬지 않습니다. 응급실을 지나 심장내과를 지나고 채혈실을 지나다 보면 어디나 대기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정신건강의학과 앞에서 자주 대기합니다. 병원 가는 날 전후에는 꼭 상태가 더 안 좋습니다. 이번에도 자동유리문에 발이 끼여 다쳤으며, 육교 계단에서 구르기도 했습니다. '거리의 기적' 속에서만 머무르고 싶어서 그럴까요.


'거리의 기적'은 병원이 가려주고, 학교가 막아주고, 집구석이 버텨주고, 카페와 술집이 눈부시게 하는 병든 이성이 만들고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어때요?"

잠깐 숨을 멈췄다가 애써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받아들이려구요. 이 상태가 정상이라구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구요."

선생님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다, 멈칫하고 묻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냥 말 그대로요. 예전에도 많이 힘들고 괴롭고 그랬어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불확실한 시간에 들이닥치는 공포와 불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슴이 조이고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으면 등짝까지 아픈 거예요. 그러면 당장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럴 때 T가 말하더라구요. 네겐 그게 정상인 거라구요." 

하여튼 열심히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라며 선생님은 또 한 달 분의 약을 처방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을 치냐고 묻습니다. 답답해 하는 T에게 자유도 주고 싶고, 끊임없이 걱정을 놓지 않았을 M에게도 응답하고 싶었다고 답하고 싶지만, 실상 살려고 했다기보다는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무섭지 않은 척 연극을 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모임을 시작하면서 모호한 가면을 쓰게도 되었습니다. 사기꾼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병든 사람 옆에 누가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매번 페이퍼를 준비해서 드리지만, 그분들이 그것을 읽고 잊어버리거나 버리길 바랍니다. 아니 기억하길 바랍니다. 어떤 병든 이성이 지어내는 사기술을 기억했다가 예방 약으로 쓰길 바랍니다.

지난 독서 모임에서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는데, 이런 사기 페이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

30nbooks 


지난 해

몹시 춥고 붐비던 길목에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천국으로' 초대하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등쪽에 '불신지옥'이라는 큰 간판을 메고, 머리 위쪽으로 붉은 십자가를 인 채, 두 팔을 높이 올리고 외쳤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믿지 않는 자 지옥불에 떨어진다.' 특정한 사람을 택해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시선을 맞추는 것도 아닌 듯 했습니다. 열심히 비슷한 내용을 외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가끔 교회 회보를 쥐어 주며 꼭 믿으라고 당부하던 여느 거리 전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전이시켜 주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혼잡한 거리에서 전도자 주변에 침묵의 원이 그려지곤 했지만, 인파의 무관심은 전도자에게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몇 달 전

부슬비가 내리던 날 저녁 무렵, 버스 정류장에서 화가 난 노인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누구와 싸우는 줄 알았는데 혼자 격앙된 톤으로 훈계하듯 말하고 있었습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그 노인과 등을 지고 모른 체하고 있었습니다. 쉬지 않고 주장하는 내용은 도시 개발에 대한 것도 있고, 일제 시대 건물에 대한 내용도 있었던 것 같지만, 몇몇 단어만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뿐이었고, 맥락은 알 수 없었습니다. 15분 정도 버스를 기다리며 들어야만 했던, '들리지 않는 주장' 은 점점 무거워졌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무슨 일로 마음이 상했는지' 조용히 물어준다면, 저 화가 누그러질까 생각해 봤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에로스의 종말』에서 전도자의 의지와 노인의 감정이 느껴졌다면, 왜 그럴까요? “감정이란 서술적인 것으로 세계가 어떠하다는 느낌과 연관되고, 항구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병철씨라면 노인과 전도자에게는 흥분이나 기분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게는 같은 감정입니다.


감정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들의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가'에서 '어떤 것을 견디지 못하는가'로 몰입하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신화 속에서 개인들은 고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나서지 않으면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 자신을 돕지 않을 때 누구도 돕지 않는다.


주체의 결단과 실천을 요구하는 말로 들립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인간에게 주체를 회복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타자를 두지 못하는 사랑 불능의 인간들에게 에로스의 권세를 권장하는 한병철 씨에게서도 비슷한 맥락을 보게 된다고 말하는 저는, 잘난 체하는 멍청이는 아닐까요.


한병철 씨가 말하는 부정성은, 내재해 있는 것을 소거하거나 뒤집어 외부로 추방시키도록 만드는 힘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주체의 외부를 사유해야 하는데, 침입을 인식하고 수용하는 과정에 '타자/사회/구조'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치 피로사회에서 “네 스스로 널 착취하고 있었던 거야”라는 성찰의 문구가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문구와 호응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부정하고 의문을 갖는 일, 비판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을 인정하는 자세에서 말이지요. 그렇지만 이론과 주장은 그대로 물질화되지 않습니다. 의식을 통한 결단은 자신에서 시작하는 자기과의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부정성은 추구될 수 없는 부산물이라 할 수 있기에, 그 과정에서 비대해지는 자기의식은 단단한 돌덩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므로 타자와의 접점을 찾고 균열을 응시하는 것이 우리의 필수과제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무엇을 들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모를 뿐이지요. 전도자와 노인에게 말걸기는 못했지만, 만약 다른 공간에서 만났다면, 책을 읽고 담론을 만들며 나누는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락과 종말

돌들이 부딪치면 불꽃이 피겠지요. (그러면 혁명이 아닌가요, 하하하). 모래로 흩어지겠지요. 여전히 흩어진 돌이지만요. 그런데 돌들이 부딪치는 소음에도 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음악이 되기도 하고 악다구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에로스의 종말』에는 이 두 단어가 둥둥 떠다닙니다. 전락과 종말. 용기도 불구화되어 각자 고립되어/ 충동에 기반한 삶을 살기에/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하고,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는/ 사랑의 정치가 없어 적대정치만 넘치는/ 다다이즘에 의미맥락을 상실한 채/ 자기동일성의 지옥 속에서 타자에 대한 환상도 없고/ 타자를 소멸시키는/ 세계를 바라보는 한병철 씨가 선택한 단어입니다.



단순하고 감각적인, 포르노적인 관능으로 전락된, 나르시시즘적 성애로만 남은 사랑은 “다른 삶의 형식과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욕망조차 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말이지요. 근대적 규율사회에서 우리가 <에로스>를 마음껏 향유했었나 하는 점입니다. 종말이라는 상황은 한때나마 무성했다는 것인데, 지속되던 것이 정점을 넘어 끝을 향해 전락해가는 것인데, 한병철 씨의 에로스가 언제 어떻게 창궐했었나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저 혼자 모르고 살았던 것이었나요.



로고스와 에로스가 이로톡 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한병철 씨에게서 오히려 나르시시즘적 주체를 느꼈습니다.



나르시시즘적 주체와 타자 사이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에게 세계는 그저 자기 자신의 그림자로 나타날 뿐이다. 그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줄 모른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경우에만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무시해야할 순간적인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식이 부정성이고 기존의 것 전체를 뒤흔들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맥락에서 보면 무엇이 새로운 것이고 부정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에로스에 의해 신념이 자기화되고, 타자의 침입을 용인해, 전혀 다른 자가 되었다면 무엇이 다른 사회를 가능케 한다는 것일까요. 그 타자는 이미 있던 사람인데요. 역치의 순간이나 형식이 문제라면, 전도자 또한 타자()에게 자아의 자리를 내 준 사람은 아닐까요.


만약 그 '타자'가 주체의 자족성을 깨뜨릴 줄 알고, 부정의 미학을 즐길 수 있으며, 탁월한 뭔가를 성취한, 아름다운 타자라면, 그래서 사회가 조금 더 달라질 수 있다면... 한병철 씨의 주장에 설득당해야 하는 것일까요.


에로스의 근본에는 향유나 권능의 어법으로는 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수동성이다. (중략)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자기를 기초 지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 자신의 기원이 자신 안에는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비슷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는 위 인용문은, ? ?, 『에로스의 종말』과 전혀 다르게 작용할까요. 사랑이라는 사건은 들이닥치는 것이지, 내가 결단해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후적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인과 관계, 상관 관계, 이해관계

난과 폭력은 인과관계일까요. 가난한 나라, 가난한 가족, 가난한 사회에서 더 많은 슬럼가가 형성되고 폭력과 범죄율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가난해서 폭력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과 폭력을 어떤 관계로 봐야 할까요.


인과 관계는 투입을 막지 않는 이상 그대로 반복됩니다. 상관 관계는 조건을 조정하면 반복되지 않는 지점을 찾을 단서를 제공해 줄 수도 있겠지요. 가난 자체만 보면 인과적으로이지만, 가난과 폭력은 근접성이 높아질 뿐이므로 인과적이거나 낙인으로 작용할 필요가 없습니. 가난을 구제하느냐, 폭력을 제거하느냐. 국가 제도의 대부분의 해결책들은 가설을 세우고, 관계를 지배하는 이론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해 관계까지 얽힌 차원에서는 더 그렇겠지요. 예를 들어 식민지 조선인 95%이상의 처지가 일본인 최하층 노동자의 처지와 비슷했다는 점을 보더라도, 회색의 지대가 존재하게 됩니다. 선진국의 폐기물이 후진국의 산천을 덮고 있다는 사실도 끔찍한 관계의 진실을 다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한병철 씨의 주장과는 다른 결이지만, 이론의 종말에서 제기하는 일부 논점은, 훌륭한 가설의 세계가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하며, 사람의 시간이 아니라 이론의 역사를 세웠다는 점에서, 담론의 상황으로 끌어올려져야할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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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

요가 수업 중에 어디선가 시큼한 냄새가 났다. 무슨 냄새인지 알아내려고 킁킁거렸다. 방귀 냄새가 분명했다. 잠시 숨을 참으며 냄새가 가라앉기를 기다렸지만, 상당시간 냄새는 주변을 맴돌았다. 문득 내가 알게모르게 나아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에는 강사의 "궁둥뼈를 누르세요"라는 말에도 피식 웃음이 났었는데, 오늘은 방귀 냄새에 반응하며 잠시 시름을 놓기도 한다.


<합장>

요가 시작과 끝에는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마주 모으며 "나마스테"라고 인사한다. 존중하고 사랑하라는 뜻이라며 꼭 덧붙이는 강사의 말이 끝나면, 나는 곧잘 눈물이 나곤 했다. 모든 것을 사랑할 준비를 하겠습니다라고 하듯이 나마스테를 되풀이 쏟아내곤 했다. 


요즘은 합장을 하며 울지 않는다. 내가 좋아져서라기 보다는 합장의 상태를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두 손바닥을 붙여 일심(一心)을 만들어 기도했다면, 지금은 왼쪽 손바닥으로 오른쪽을 밀고, 오른쪽 손바닥으로는 반대쪽으로 밀어낸다. 두 손바닥을 붙여 하나로 만들고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아픈 그 상태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하게 해주세요"라는 염원을 담았을 때는 눈물이 났는데,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손바닥들이 밀어내는 힘으로 합장을 하니, 눈물은 말라갔다. 보기에는 변화가 없는 형태인데, 내 손과 마음의 상태는 다르고도 같다. 


<기적>

지난 겨울 몹시 힘들었을 때 요가를 시작했다. 아침마다 요가 학원을 향해 걷다가..., 강추위 속에서도 도시가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 늘 '기적'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간밤의 고통과 상처들을 묻고, 마치 오늘은 어제의 슬픔과 좌절을 잊었다는 듯이, 버스 기사님은 시내를 돌고 있었고, 해장국집 아주머니는 열심히 식탁을 닦았고, 편의점 청년은 스마트폰을 잠시도 놏지 않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불안 속에 서 있는 내게는 기적과 같았다. 순식간에 택시는 문앞에 도착할 수 있고, 한순간도 쉬지 않는 네트워크를 유지시키는 비결은 뭘까. 모두들 어떻게 이 힘든 시대를 건너고 있을까. 



<부재하는 이름>


무엇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왔든지 간에, 우리는 오늘날 신의 이름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진실의 이름으로 이야기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왜냐하면 진실이란 무엇인가의 이름 이아니라 하나의 담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아데미아, 민중의 부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서 출발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민중을 포기해야만 했던 사람은(다른 방도를 취할 수 없었던 그는) 해야 할 말의 이름까지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더 이상 그것의 이름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재고나 후회 없이 정치가 고유의 공간을 잃어버렸고 정치의 범주들이 도처에서 무너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데미아(민중의 부재), 아노미아(이름의 부재), 아나르키아(무정부 상태)는 전부 동의어이다. 이름의 부재 속에서 확산되는 사막을 명명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그는 아마도 말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불과 글 』우리의 글쓰기가 가야할 길, 아감벤)


토요일 저녁 가게 문을 닫으려고 할 때, 손님 한 분이 어색한 걸음으로 들어오셨다. "책 좀 빌릴 수..."하면서 책장 앞에서 주춤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하며, 대여는 하지 않지만,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이곳에서 읽으실 수는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냐며 스윽 책꽂이를 한번 둘러보고나서 또 머쓱한 모습으로 "책을 좀 읽어보려고.."하셨다. 근방에서 일하는데 오며가며 여러 번 창밖으로만 구경하셨단다. "토요일인데 늦게까지 일하셨네요" 하자 "우리는 주말 그런거 없어요"하신다. 찾으시는 책을 물었으나, 가볍게 읽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서만 읽으면 되느냐고 한다. 결국 빌려드리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읽으시고 돌려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왜 책이 필요한지 어떤 책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피곤한 주말 저녁에, 따뜻한 밥상이나 술 한잔이 아니라 책을 찾는 중년의 손님에게 그 책 두 권이 어떤 시간을 갖게 할까 염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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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4-23 23: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즘 마음 상태는 어떠신지요 ? 30인의 서점은 운영이 잘 되고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이거 별탈 없으셔야 하는데.. 저도 이번에 책을 정리하면서 깨끗한 책을 찾아 보내드려야겠다 하고 살폈더니.. 제가 워낙에 밑줄 긋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깨끗한 책이 없더군요... 다음에는 밑줄 긋지 말아야 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초원 2017-04-24 13:50   좋아요 0 | URL
이미 한 점들이 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번지게도 하고, 뒤집기도 하는 회색 유머를 구사하는 곰발님의 글들을 보면 절로 유쾌해지지 않을 수 없어요. 그래서 곰발님의 책에도 어떤 흔적들이 담겨있을까 기대하게 됩니다. 제가 이 서점을 닫을 때에는 모든 책들을 전부 나눌 생각인데. 그때쯤이면 곰발님과 맞교환을 하고 싶기도 합니다. 낙서 가득한 곰발님의 책과 1년 간 여러 사람의 손자국이 꾹꾹 찍힌 서점의 책들을 서로 나눠가질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서점은 예상대로 돈먹는 하마입니다. 손실을 줄이는 길은 책을 덜 사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 초라한 현실이지요. 제가 운영자로서는 빵점이라는 것이 불안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응원에 힘입어 꾹꾹 견디고 있습니다.

제게도 멍때리는 날이 오기를 빌어봅니다.
그나저나 심상정 씨 미소가 포근하군요!

hnine 2017-04-24 04: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글은 저 역시 여러번 느꼈던 것이기도 해요. 그렇게 저 역시 다시 마음을 일으키던 순간들이 생각나네요.

초원 2017-04-24 14:00   좋아요 0 | URL
이렇게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도 ˝다시 마음을 일으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창밖을 보니 기적의 거리에 햇볕이 쨍쨍하네요. 이불도 말리고, 꿉꿉해진 마음자락에도 온기를 넣어주고 싶군요.

산책도 하고 쉬어가는 하루 되시길 바랄게요.

clavis 2017-04-24 09: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기적처럼 살아낸 4월을 뒤로하고 바닷가 내 고향으로 휴가가는 기차 안입니다^^

초원님 오랫만의 글 넘나 반갑고 기쁩니다^^햇살도 좋고 읽고 있는 책도 좋고 그래요

초원 2017-04-24 14:08   좋아요 1 | URL
클래비스님, 저도 기차타고 여행가고 싶어요. 햇살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슬그머니 졸다가 살포시 어깨를 기대고 싶어요. 옆자리 승객이 놀라서 제 머리를 서둘러 밀쳐낼 때까지라도, 짧은 순간의 멍때리기를 즐겨보고 싶어요.

4월의 힘들었던 시간들이 썰물을 타고 쓸려가길 바래요. 밀려들어오는 바닷물들은 5월의 노래가 분명할 거라고...
 

몇 시간을 혼자 있다가 목구멍이 조여오는 느낌에 달달한 과자 한쪽을 부셔 먹었다. 이도 별반 소용이 닿지 않아 물을 마시고, 호흡법을 시행했다. 어림없다는 듯이 그대로인 불안을 향해, 옛 방법을 소환해 보기로 했다. 현실을 우회할 가장 편한 방법. 읽고 쓰기. 며칠 동안 손님 한 명 없는 공간을 개선할 방법도 소질도 없어, 불안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래 다시 그거라도 해보는 거야. 덤벼보는 거야 네게, 내게.   


책 한권을 들고 바깥으로 나가니 해는 이제 스러져가고 있었다. 가게 모퉁이 벽에 기대어 내리 책장을 넘겼다.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마르쿠스 가브리엘.  


문체가 너무 발랄하여 가벼운 미소가 지어졌다. 철학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의지가 넘친다. 새로운 리얼리즘을 여는 젊은 천재라는 소개말이 겸연쩍다(왜 내가 부끄러워하지?) 어느날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와 함께 식사를 하다 얻은 단상을 토대로 포스트모던 이후를 사유할 "새로운 리얼리즘(신실재론)"의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작년 가을 내내(아프기 직전까지) 필사하던 영역이 '전체(혹은 세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현대철학의 경향들이었다. 사막여우 님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인류학적 경향들에서 크게 고무되었었고...<식인의 형이상학>에 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나만의 리뷰를 작성하고 싶었던 책이었는데 그만 난 불안의 늪에 빠져버리고 말았었다. 



오늘 불안을 안고 읽는 가브리엘은. 현대철학의 경향을 이끌고 있는 떠오르는 스타 철학자이다. 그의 출발은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렌즈(구경꾼)의 존재의 문제다.


새로운 리얼리즘이란 바로 이것이다. 옛 리얼리즘, 곧 형이상학은 오직 구경꾼 없는 세계에만 관심을 가진 반면, 구성주의는 정말 자기도취에 빠져 <나>라는 사람이 지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고 공상하는 모든 것이 세계라고 주장해 왔다. 두 이론 모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늘 그리고 어디에나 구경꾼이 있는 것이 아닌 세계에서 구경꾼은 어떻게 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과제를 나는 새로운 존재론으로 풀어 보고자 한다.(17쪽)


가브리엘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결코 전체는 파악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두고 "무슨 세계관을 이야기하는가?"라고 말하며 "세계를 제외한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위대한 철학 물음이라는 미로를 헤체 나갈 참된 길을 찾는 일에만 매달려 볼 생각이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대체 무엇인가?(28쪽)


칸트를 구성주의자로, 로티를 덜 과격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로 소개하는 가브리엘의 "철학적 회의"를 즐길 여유가 생긴다면, 조만간 이 책의 리뷰도 써보고 싶다. 

그의 전제를 따라가면서 자그만 의문을 해결해 보면 좋겠다. 우주에서부터 마음까지 고유한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긍정하면서, 왜 부정하는 것들이 생겼을까?


**

불안을 추방시키지 못하고,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내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 안의 것들도, 사회의 관계들도, 마주할 사람들과의 대화도, 익명의 시선도, 그리고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행위들도 두렵다. 

두렵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동네에 사는 3살 꼬마의 걸음걸이, 학원 앞에서 동그렇게 모여 서서 "나나 나나 나나나나 나나"를 외치는 소녀들의 웃음, 기꺼이 터지고 마는 새순의 출현.....


두렵지 않다는 것은

그 행위와 감정을 흉내내고 싶고, 재현하고 싶고, 반복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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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1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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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2 07: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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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13 0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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