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화 《기생충》을 텍스트로 접근한 후기입니다. 세 가족이 2자 관계를 벗어나길 거부하며 만들어낸 반전의 공간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글입니다. 온갖 영화적 설정에 대한 해석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영화가 가리키는 손가락의 진부함에 대해 생각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요령껏 대처하길 바랍니다.]


근대국가의 명운은 전문가 양성체계에 얼마나 힘을 쏟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과학주의에 근거한 이론이 미래가 되고, 실천이 이론의 과거가 되는 청사진에 의해 조정되고 강제되었다. 시간 당 노동량을 측정했고, 학교와 공장에도 속도는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었다. 사회적 압력이 절실히 요청되던 시대였다. 그 와중에서도 인간은 감각을 통해 예외를 발견하고, 삶에서 놓쳐버린 그 밖의 것들을 상상할 여지를 만들어내곤 했다. 알려지지 않는 현실에 조명을 켜기도 하면서, 뭔지 허구로 보이지만 실체인 것들을 전경화시켜 예술로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삶들이 예술처럼 발원하며, 스스로를 밝히고는 이내 사라지고 했다.


어느날 고개를 들어보니 전문가로서의 예술가 집단이 등장하고, 예술은 이론적 배경 없이 이해하기 힘든, 지적 작업이 필수적인 상태가 되어 있었다. 고급 예술은 미술관, 예술의 전당에 있고, 대중 오락은 텔레비전, 만화책에 있다. 비율과 조화의 예술은 예리한 비평가의 견해가 첨부된 보증서에 의해 마침표를 찍었다. 미학이 멀어질수록 예술은 모호해지고 더 가치가 치솟는다. 예술인들은 기묘한 처지가 된 듯 싶다. 예술가 냄새란 말하자면 편견을 편견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이지 싶다.


지난 주 내내 온라인 어디로 도망다녀도 이 영화 얘기를 피하기 어려웠다. 다른 때라면 방콕하던 습속으로 상관없이 지나갈 수 있었겠지만, 요즘 관심사인 대너리스, 화이트워커, 아리아를 찾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발걸음이었다. 영화가 다른 예술과 달리, 상영이 끝난 후에야 결합하는 관객까지를 포함시킨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제 영화《기생충》은 시작점에 있다고 하겠다. 감독 스스로 반전에 경악할 관객을 상상하고 있다는 점, 각본 • 미술 • 음악 • 배우 등 여러 제작자가 참여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 수많은 설정 장치 들이 미리 주어져야 가능하다는 점 등으로 보자면 그렇게 무리한 생각도 아니다.


관람객들의 후기가 웅변하는 대상은 영화적 설정이고 배역의 현실성이며, 감독의 세계관이었는데 마치 미학을 가슴에 품고, 비평가를 등에 지고, 관객-자본을 문 밖에 둔 채, 작은 노트 패드로 세계를 이해하는 감독의 쌍둥이 형제들 같아 보였다. 이렇게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 형성되는 것일까.


감독이 의도한 절묘한 반전에 소름끼쳐하고, 디테일한 설정에 설득 당한 채 흥분을 쏟아내는 관객들에게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서걱거리는 현실 한 자락을 그대로 꺼내 주는 배우들의 연기로, 눈동자 가득 눈물을 채웠을 관객들의 동력은 너무나 인간적인 현상이지 않은가. 그들이 폭넓게 참여하며 형성한 말들이 모래사장에 새겨놓은 얼굴(하트 heart)처럼 밀려오는 물살에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인간이다. 감독이나 배우에게, 닿지도 않을, 응원과 도발을 끊임없이 보내는 어리석음이 있기에 한없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 혹은 마케터 • 평론가일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감독도 여지없이 이 인간적인 행렬에 함께 할 것이다. 하지만 상품은 사용자와 제작자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전문가는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다. 전문가 아래 연구자들이 있고 그 아래 연구자 지망생이 있다. 그리고 대중이 있다. 마지막으로 쪼그라들어 대중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헤매는 나같은 방랑자가 있다. (이런 지형학적 도식은 얼마나 진부한가.)


진부한 것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성차별적 현실과는 별개로 언제까지라도 모성애는 죽지 않을 것이며, 정치적 현실은 늘 대의라고 포장하는 수사적 힘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몸부림치며 찾아다니는 '포스트휴먼'은 그 진부함들에 대한 문학적 상상으로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적 한계의 영원성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다(는 내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인간적인 것들, 진부한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일이 쉽지 않은 까닭은, 세계가 세계화될수록 개인이 겪는 '세계라는 문제'는 미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일만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도 9.11이라는 커다란 비극 이후 비인간적이고 냉혹하게 보복을 감행하며 미국민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테러에 대한 불안은 상시적인 대응체제를 요구했고, 그 대책은 바로 일상 속에서도 진행되어야 했다. 테러의 냄새는 바로 미국 내에서 미국민들 사이 어디에서도 출현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감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지구 정반대 쪽 거리를 몇 초 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시야는 광범위해졌지만, 정작 이 첨단문명 장치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먹고 놀고 시험 공부하고 친구와 수다를 나누는 일이다. (아이고, 자꾸 샛길로 빠져나가

는데) 여하튼 비교적 쉽게 경제적 분할과 계급적 배치가 수직적 적층 구조로 드러나던 근대와 달리, 현대는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가는 여러 문제들이 횡적인 분할 속에서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수직적 계급 현실이 엄연함에도 그 문제 영역들은 진부해 보인다.


다시 요약해 보자면, 횡적인 분할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온갖 것들이고, 상징과 상상의 엉겨붙음이고, 가치의 교란이다. 최근 80~90년대를 회고하는 많은 영화가 그렸던 풍경이 레트로 문화를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면서 유행을 이끌어었던 것도, 횡적 분할에 대한 위로이며 결코 세계라는 문제와 대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떠나가버린 세대를 안전하게 대면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잠시 커피 한 잔이었다고 할까. 아무튼 어떤 균열을 시간의 힘으로, 눈물의 동의로 밀어버렸기에, 추억영화가 던지기 쉬운 진부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 《기생충》은 반지하를 빈곤의 장소화로 묘사하고, 언덕 위 저택을 부딪힘이 발생하는 권력의 공간으로 정형화했을 뿐만 아니라, 80년대 운동권 서사까지 끌고들어와 억압적 장치로 배치했다. 영화에 짙게 깔린 구조적 결핍이나 판에 박힌 인과론적 형식이 관객에게 케케묵은 답답함을 안겨줬을텐데, 관객은 진부함을 느끼지 않는듯 보인다. 왜 그럴까.


《기생충》에서 두드러진 단어인 '기생충''냄새'는 손쉬운 전이가 가능한 개념이다. 주홍글씨가 되어 어디에든 기생할 수 있다. 비난의 은유로 사용하는 벌레 충蟲의 대상은 너나없이 누구도 될 수 있지만, 모순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더 빈번하게 발견되곤 한다. 그렇다면 주홍글씨는 사실 내용이 없는 말이다. 이 내용없는 말에 '냄새'라는 자연적인 사실성을 덧대어 응축시킨 덕분에 《기생충》은 현실성을 부여받는다.


솔직히 이 영화의 광고를 보고 먼저 떠오른 짐작으로는, 그레고리 잠자처럼 인간 정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뒤집어써야할 존재의 껍데기와 그것을 벗게 되었을 때야 드러날 역설적 상황을 그리지 않았을까 했었다. 하지만 텍스트로 알게 된 이 드라마의 뼈대는 이렇다.


아무도 변호하지 않는 몰락한 80년대 운동권이 지하실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열정만 가득해 여러 사업을 전전하다 끝내 몰락한 사업가는 스스럼없이 지상에서 반지하로 급기야 지하실로 침잠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상상력은 유일하게 문광(의 선택)에만 허용되고, 나머지는 수학문제를 풀어가듯 정해진 순서대로 조립되길 기다리며 대기중인 레고 인형들이다.


없는 데 있는 듯 속임수를 써서 환기시키려는《기생충》의 기생충은 유령인가. 누가 기생충인가. 어떤 꾸밈말에 지나지 않는가. 흘러다니는 오해로 빚은 말이라면 영화 속에서 어떻게 환기가 되었는가. '오해를 심화시키려고 얹어놓은 '냄새'는 비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지점에서 어떤 충격을 받아야 할까. '냄새'는 인종문제에서부터 슬럼가 사회문제로 더구나 문화자본으로서 취향에 이르기까지 너무 많은 실체들을 담고 있다. 향초, 향수, 방향제, 섬유유연제, 아로마향이 담배 냄새, 노인 냄새, 땀냄새, 입냄새 등과 대척점에서 갈등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실에서, 새삼스레 가난 냄새와 사랑 냄새는 숨길 수 없다는 주장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너무 사실적이어서 그런가. 구조의 진부함이 냄새라는 환상적 적대와 뭉쳐 사라져 버렸다.


이미 말한 바 다시 강조하자면 반칙은 반갑지 않다. 냄새나는 지형적 위치로 끌려가 되살려낸 가부장적 질서가《기생충》중심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세 가족의 지탱점으로 작용하는 가부장적 질서가 다양한 양상으로 이 범죄 드라마를 더 모호하게 하며 진부함을 가린다. 노사갈등이 노노갈등으로 이동하더니, 노노갈등의 양상이 노노적대까지 오고 있는 듯하다. 냄새 자본은 경제적, 문화적 분할을 상징하는 기표가 되었지만, 범죄는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둘을 섣불리 묶지 않고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가난해서 냄새가 나고 무시당해서 폭주하는 기생충이라니. 이런 작위적 연결이 마치 그럴듯한 예술로 둔갑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계급에 전형적 인물을 인쇄하는 일이 계급현실을 직시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짧은 글을 쓰면서, 열 번도 넘게 자조어린 반성을 했다. 누가 염치 없는 사람인가. 누가 부당 이득을 원하는 사람인가. 누가 단물을 빨아먹는가를 분석하고 색출해내는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제발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맞지 않을 수도 있어. 이런 … 쓸데없는 자기해석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덤으로 얻은 신경증일 것이다. 계산에 밝고 교양이 있어 적당히 이익을 나눌 줄 아는 시민이 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싶지도 않다.


더구나 계급을 동물화하거나 악마성을 끄집어내는 매개로 '냄새'라는 감각을 이용해 빈곤계급과 구시대 운동권과 실패한 자영업자를 엮어내는 기술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기생충들의 접전을 묘사한 이 영화는 욕심을 초과하는 농담이거나 문화자본가의 전략 상품이다.



 "유령은 항상 그 거기에 있다. 비록 그것들이 실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록 그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록 그것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가 우리의 입을 열자마자, "거기에"를 다시 사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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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6-1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최근 글이 있군요. 전 아직 기생충을 안 본 상태여서 글을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보고 나면 와서 읽으려고요...
 

모자母子는 서로에게 다정할 수 없었다. (아니 느낌대로 말하자면 냉혹한 훈육과 무관심-배척의 평행선 위에 있었다) 그리고 삶이 어둑해져 왔을 때, 마냥 무정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늙은 아들은 혜자할머니의 진심을 뒤늦게 인정하면서 통곡한다. 뒤이어 행복한 결말이 온다. 돌덩이 같던 늙은 아들의 가슴에 훈풍이 불고 가족은 행복해보인다. 온기를 느낄 수 없었던 부부관계는 이혼의 위기에서 벗어났고 무엇보다 늙은 아들은 내일을 계획하는 열정을 보인다. 혜자할머니는 늙은 아들 부부와 함께 요양원을 떠나 복사꽃이 피는 담장 속 아늑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행복의 열쇠는 늙은 아들의 회심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 이제까지 유지해왔던 모든 분노와 방황을 내려놓는데, 이런 결단은 언제나 경이감을 준다. 우리가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이 장면은 상투적이어서 경건하다. 삶에 대한 투쟁이 마치 냉담했던 어머니의 입에서 널 진심으로 아낀다는 말 한마디를 듣는 일에서 끝나는 것처럼, 희망을 갖는 일은 일상을 건져올리는 그곳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의 다정한 독백이 아니라, 늙은 아들의 자기구원에서 눈이 부신 날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제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를 보았다. 모든 회차를 보지 못했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했지만, 초반 줄거리가 시간여행자의 모험에 맞춰져 있었다면, 후반은 '기억의 구성과 자기자신'으로 급변하는 전개에 실망과 환호가 엮여 있을 거라 짐작한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혜자할머니는 주변의 모든 이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기쁨을 나누고, 고통 속에 있던 그들을 구원하는데, 이것은 치매를 겪고 있는 노인의 꿈이었다. 현실 속의 혜자할머니는 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던 효녀도 아니고 애인의 운명을 전환시킨 해방군도 아니었다. 공안정국에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사고로 다리를 절단해야 했던, 가족이 와해되던 순간을 홀로 견뎌야 했던 '한 여자'였다. 

드라마 속에는 빈곤한 화해와 용서가 넘쳤다. 어떤 이는 미봉해 버린 용서의 서사에 노여워 할 것이고, 어떤 이는 가족의 기원을 되묻기도 할 것이다. 내 관심은 '죽어감'에 집중되어 있었다. 혜자할머니는 신체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던 환자였다. 치매노인의 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 푸코의 언급이 떠올랐다.

고대의 개념들 속에는 노년, 생의 마지막 순간, 죽음에 대한 과도한 가치 부여가 발견되는데 이는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죽게 되는 순간, 혹은 체험할 것이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노년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전 생애를 조각해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었을 때 그 추억의 강렬한 빛으로 인해 타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목표가 되는 바고 또 바로 그 순간 개인은 자기 자신을 실제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186쪽)

푸코가 자기 자신을 '만들어야 하는 예술작품'이었다고 말하면서 자아도 주체도 아닌 지점에 (老)인간을 서게 했을 때 상상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혜자할머니는 꿈을 꿨고 그 속에서는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잃어가는 기억과 새로 만들어지는 꿈은 혜자할머니의 죽어감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일까. 


~ 사람들이 작업을 가하고 또 미학적 가치들에 따라 공들여 만들려고 시도한 자기라는 대상은 숨겨졌다거나 소외됐다거나 무언가에 의해 왜곡됐다거나 재발현해야 할 어떤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는 예술작품입니다. 자기는 만들어야 하고 말하자면 자기 앞에 놓인 예술 작품입니다. 그리고 고유의 자기는 자신의 생의 종말에 즉 죽는 순간에 도달하게 됩니다. (185쪽)

그러니까 자신을 왜곡된 상태에서 발현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소외된 존재라고 사유하는 일이야말로 자기소외가 될 수도 있겠다. 고유의 자기를 지나 자기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은 파레시아와 어떻게 연결된다는 것일까. 혜자할머니는 꿈을 통해 자기창조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혜자할머니의 자기소외일까. 


내 병은 '죽을 것 같음'을 생생하게 느껴야 한다는 공포 자체였다. 죽을 것 같음은 신체를 거쳐서 나온 '움직이는 말'이었다. 나는 종일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음과 싸워야 했는데, 명백히 그것은 '살고 싶음'이 아니었다. 죽을 것 같음과 '죽어감'은 멀리 떨어져 있다. '죽어감' 속에서 발견하게 될 눈부신 장면과 죽을 것 같음의 공포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지난해 푸코의 『살의 고백』이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는 뉴스를 들고 난 후부터,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구글 번역기를 이용해 그 내용을 수소문하려 했지만 알 수 없었다. 살이 던지는 말들을 듣고 나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될 것도 같았다. (그 희망은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것이 아니다) 



"눈 쓸어요 … 우리 아들 학교 가야 하는데 … 아들은 몰라도 돼요, 우리 아들만 안 미끄러지면 돼요.." 눈길을 쓸고 있던 혜자할머니는 아들에게 말을 건네지만 치매로 인한 기억장애로 그가 아들인 줄 모른다. 늙은 아들 울컥 마음을 푼다. 그리고 혜자할머니가 듣고 싶었을 말을 골라 건넨다.  "아드님 한 번도 안 넘어졌대요. " "정말이에요? … 울지마요, 왜 자꾸 울어. "  이 장면은 <눈이 부시게>의  주요한 지점이다. 늙은 아들은 혜자할머니의 말 한 마디에 드러난 진실에 감동하고 모든 것을 덮는 눈덩이 마냥  “엄마였어, 평생 내 앞의 눈을 쓸어준게, 엄마였어”를 내뱉고 비명을 지르며 운다.  뒤이어 뛰어온 아내가 "당신이 이렇게 부드러운 얼굴로 어머니를 보는 거 처음이네," 한다.


모자의 행복은 혜자할머니가 늙은 아들을 식별하지 못했을 때,  타인에게 건네는 다정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아들이 아닌 낯선 존재에게는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아들도 자신을 몰라 보는 노인에게는 온화한 눈빛을 보낼 수 있었다. 서로를 가족으로 엮이지 않을 때에야 드러날 수 있는 타인의 얼굴이라고나 할까. 혜자할머니의 눈부신 날은 자신에 대한 모호한 사랑이 가득하다. 


이렇게 잡다한 말들을 쏟고 있지만 나는 내내 늙은 아들이 마주한 것은 '죽어감'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죽어감은 자신을 예술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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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누워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리고 다시 보았는데 이미 지나가 버렸고, 찰나의 호기심은 병증에 쉽게 굴복했다. 울렁거림이 무슨 자랑거리도 아니고 중요 주석이 될 것도 아닌데, 내가 화이트워커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어떤 서늘함을 설명하려면 내 병증을 곁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니까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면 그 드라마를 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또 봤더라도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금씩 좋아진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여름부터 울렁거림이 심해져서 좀 비참했었다. 새로운 증상이 추가된 것이라, 하루가 태극의 분할선처럼 울렁거림과 '울렁거림을 기다림'으로 양분되었다. 그것은 손발이 묶인 것처럼 움직임에 강한 제동을 걸었고, 쓸모 없고 좀더 무가치해진 인생을 조롱하듯, 공포에서 울렁으로 바뀐 증상이 버거웠다. 

이 울렁증이 사라지면 밖으로 나가봍테다 다짐해도 막상 덮쳐오는 우울을 막을 힘은 없었다. 종일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리다가 화이트워커를 보게 된 것이다. 대지는 하얀 얼음으로 덮이고 태양빛은 흔적도 없는데, 말 위에 앉아 마법사의 지팡이를 들고 파랗게 불타는 눈빛을 보내고 있던 화이트워커는 필시 다시 짚어봐야 할 문제적 존재였다. 


한 달 쯤 후에 다시 화이트워커를 찾아보면서 <화이트워커의 존재론과 근대성의 파편>이라는 다소 웃기는 글을 쓰기도 했다. 대충 기억하면, 하이데거는 트라클의 시에서 푸른 야수를 언급하는데 화이트워커는 그 거울 속이거나 거기서 튀어나온 존재고, 다면신이 근대의 절정에 선 존재라고 썼다. 대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가을이 되면서 연례행사처럼 문서를 상당 부분 삭제하는데 그때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이렇게 아픈 상태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글 쓸 자격이라도 주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뭐라도 끄적거리게 되니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처음 본 말이 있다. 우리 인생 최대의 선은 남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라고 현관에 써 있었는데, 거기에 덧붙여 <조금 덜 괴롭히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되풀이 말하곤 했다. 껍데기 밖에 없는 삶인데 유일하게 매달리는 글쓰기는 조금 덜 괴롭히기 위한 노력이라고 자조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인가 진지충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별 감정이 생기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벌레나 괴물에 더 감정적인 이입을 하는 경향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진지하다는 말이 냉소적으로 쓰일 때는 남을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에만 골몰하는, 어찌보면 한없이 이기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자신이 아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양 군다는 말일테다. 어떤 면에서 정말 인간적이지 않은가. 

벌레와는 우정을 나누지 못하고 내 집으로 초대하지도 않는다. 그런 대상인 것을 벌레는 알까. 벌레는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인간이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것은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지만, 벌레나 괴물이라면 무관할 것이고 벌레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낙담할 것이다. 


지금부터 써보려고 하는 말들은 무용하고, 필시 알 길 없는 괴물의 감정일텐데, 벌레가 지나간 자리에 행적을 남기듯이 뭔가 남겨보려는 깜찍한 버둥거림이다. 

계획은 이렇다. 오래 전부터 주장했던 지점을 다시 짚어보고, <<세 번째 사람>>에 대해 덧붙여진 생각을 정리할 것이다. ( 나를 정당화하려는 추접한 욕망이 싫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쓴다.) 민주주의라거나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부감을 갖고 있었고, 이런 패러다임으로 시대를 해석하는 경향을 '삶'에 비춰 비판하고 싶었다. 내게 이 시대는 <<신봉건>>이다. 新은 다른 버전의 봉건이라는 의미였고, 그 생각을 벼르고 별러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있었다. 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뜨아함과 실소였었다. 아마도 농담이거나 벌레의 행적을 들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나이가 들수록 나는 내 세계에 갇혀 지내게 되고, 그 생각을 교정할 길은 요원하다. 굳이 찾아보자면 덮었던 글을 다시 써야 할 이유는 있는 셈이다. 되짚어 가다보면 거기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겠다.

몇 가지 조정을 불가피하다. 예를 들어 근대의 '정점'에 선 인물로 명탐정 코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화이트워커와 다면신을 불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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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라의 움직이는 말, 머무르는 몸


    프로이트가 도라를 다그칠 때 억장이 무너졌다. 도라가 당당하게 맞설 때조차 그녀의 어깨가 쪼글아들어 있었을 걸 생각하면 목울대를 치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언어가 '가능성' 을 불러내는 행위라고 하면 그 순간 프로이트는 도라의 적이었다. 프로이트가 자주 비판받던 주제 중 하나가 성차별적 진단인데,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분석자 프로이트가 도라 위에 군림하던 순간을 잊기 어렵다.


도라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프로이트에게 분석치료를 받게 되었다. 발작적인 기침과 실신, 우울증, 그리고 주기적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던 도라에게서 프로이트는 (여성) 히스테리를 포착해 낸다. 이후 도라의 '억압된 욕망의 기원'을 읽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당시 18세였던 도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속에 있었다. 도라는 어머니와는 불편한 관계였으나, 아버지와는 가까운 편이었고, 이웃인 K부인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도라의 아버지는 K부인과 불륜 관계였는데, K씨는 도라에게 성적 접근을 했고, 도라는 이를 거부했다.


도라가 프로이트에게 전한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아버지와 K부인이 자신을 K씨에게 제공함으로써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고 느꼈다. ~ 도라의 아버지는 K씨의 즐거움을 위해 도라를 내줄 의향이 있었다는 그런 의미다. 도라가 14세에서 16세 사이에 이 모든 사건을 겪었다는 점을 들자면… 굉장히 지저분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프로이트의 기록에는 도라가 프로이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여러 순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예로 간주되는 것은, 프로이트가 도라에게 실제로 K씨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의 히스테리는 부분적으로 K씨를 향한 바로 이 억압된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을 때이다. 도라는 최종적으로 프로이트의 해석에 굴복하고 말았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그의 해석을 부인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는데, 치료 과정의 대부분이 프로이트와 도라의 의지 싸움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프로이트 콤플렉스』)


도라는 K씨의 강제 키스가 혐오스러웠다고 말하지만 프로이트는 그렇게 느끼는 일이 “이미 전적으로 완벽하게 히스테릭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도라가 자신의 욕망에 불안을 느껴 정반대로 반응했다는 말이다. 도라가 돌연 치료거부를 선언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치료에 실패한다. 그런데 이 실패는 상담치료의 실패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피분석자 도라의 저항을 통해서 '전이'라는 정신분석의 중요 개념이 창발되었기 때문이다.


도라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도라는 말하고 있었다. 신경증은 신체에 머무른다. 그리고 신체는 움직이는 말을 생산해잰다. 도라의 말은 프로이트의 의식을 지나쳐 무의식을 통과해서 다시 도라에게로 이른다. 프로이트는 다만 의식에 머무르는 말로 도라를 분석한 것은 아니었을까.) 도라가 무의식의 욕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했을까는 여전한 의문이다. 프로이트의 기록에 따르면 도라의 가장 깊은 분노는 아버지가 그것을 믿어주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도라의 아버지는 호숫가에서의 장면을 도라의 상상력의 산물로 곧바로 간주해버렸는데, 그의 행동들 중 이것만큼 도라를 실망시킨 것은 없었다. 도라가 그때 어떤 일을 그저 상상했을 뿐이라고 아버지가 생각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고 그녀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프로이트 콤플렉스』)


프로이트가 수행한 분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또다른 열네 살 소녀가 앓고 있는 복통을 시끄러운 히스테리 증상으로 진단하는 바람에 두 달 후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을 떠올리자면, 정신분석은 뭔가 추악한 짓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도라의 선언은 그냥 나온 거라기 보다는 프로이트를 통과해서 나온 '움직이는 말'이었으니까.


(도라) “내가 오늘 마지막으로 여기 온 걸 아세요?”

(프로이트) “그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해 주었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도라) “그래요, 난 새해가 될 때까지 참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치료를 위해서라고 해도 이제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어요.”

(프로이트) “언제든지 당신이 원하면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은 치료를 계속해 보도록 하죠. 언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까?”

(도라) “ 2주 전쯤이었어요.”

(프로이트) “ 2주 전의 통지였군요. 내가 마치 하녀나 가정교사가 된 것 같습니다.”(『프로이트 콤플렉스』)



2. 애거서 크리스티의 움직이는 몸


근대 유럽의 탈주술적 세계로의 진입에 걸맞는 옷이었을 정신분석이, 동양인 여성에게도 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렇게 시작했던 글이 있었다. 1) 오래 전 일이지만 그 당시의 문제 의식을 조금 끌어와서 미스 마플과2) 미니멀리즘을 잠시 생각해본다.


프로이트는 주술적 신비에 머물면서도 탈주술적 세계를 배반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사드, 나르시스 등은 문학과 신화에서 차용되어온 판타지인데 전통과 맞서지 않을 뿐 아니라 더 심화시킨다. … 또 현실 원칙은 훌륭한 자기관리서로 손색이 없다. 동양적 사유의 특색이 흔들리지 않는 인격 수양에서 시작되는 서사인데 프로이트의 출발선과도 잘 어울린다.


반대편에서 볼 때도 프로이트는 꽤 매력적이다.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던 인간 정신의 구조가 프로이트의 지도로 안정감을 찾았다. 그러나 이는 인간이 만든 억압에 주목하게 하면서 기껏 만들어 놓은 현실 원칙을 불안하게 할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의식이 아니라 알 수도 없는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왕관을 우습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예측 가능한 과학은 예측 불가능한 뇌-마음의 영역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려고 기를 쓴다.


인간을 향한 회색의 시선을 유지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어떻게 일상생활의 시선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기에 적합한 자료다. 애거서의 많은 작품에서는 “아이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한다거나 “본능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향한 육체의 강력한 충동”이라는 프로이트의 명제가 그대로 드러난다. 도라의 사례와 비교하며 『0시를 향하여』를 읽어본다. 이 작품의 중심 인물은 네빌, 오드리 … 등으로 배틀 총경의 딸 실비아나 앰프리 교장은 배경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베틀 총경은 교장 앰프리로부터 딸 실비아가 도난 사건의 범인임을 자백했다는 편지를 받는다. 앰프리 여사는 성공한 교육자이고 '자기 결정'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교육에 적용하고 있었다. 먼저 앰프리 교장의 입장을 들어보자.


중요한 것은 말이지요, 올바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건 아이 자신입니다, 배틀 총경님. 실비아 자신이란 말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실비아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타격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라는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알아내야 하는 건 실비아가 이런 짓을 하게끔 만든 배후의 이유입니다. 그건 아마도 열등감이 아닐까요? 총경님도 아시겠지만, 실비아는 운동을 잘 못합니다. 다른 영역에서 자신을 돋보이고 싶은 막연한 욕구, 자신의 자아를 주장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우선 총경님을 혼자서만 뵙자고 한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0시를 향하여』)


이제 실비아의 얘기를 들어보자. 키가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에 비쩍 마른 아이가 우울한 얼굴에 눈물 자국이 그대로 인 채로 머뭇거리며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마비된 것 같았어요. 저는 틀린 단어를 답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단어들, 그러니까 다람쥐나 꽃 같은 단어를 생각해 내려고 애썼는데, 앰프리 선생님은 거기 서서 그 나사 송곳 같은 두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아빠도 아실 거예요. 그 파고드는 듯한 눈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점점 더 긴장했어요. 그러고는 며칠 후 앰프리 선생님이 저에게 아주 상냥하게, 그리고 모든 것을 정말로 잘 이해한다는 듯이 말을 건네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제가 그랬다고 말했어요. , 아빠,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마음이 편했는지 몰라요!”(0시를 향하여』)


배틀 총경은 딸 실비아의 무죄를 밝혀낸 구원자이다. 앰프리 선생은 비언어적, 암시, 연상 등의 심리학적 수사로 실비아를 검거했다고 주장하지만, 날카로운 배틀 총경의 정확한 진단은 진실을 관통한다. 앰프리 교장이 자랑스럽게 검거 과정을 적발했을 때 배틀 총경은 침착하게 얼굴엔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게 “고맙습니다. 선생님.”하며 “선생님이 괜찮으시다면 이제 제 딸을 보고 싶군요.” 라고 답한다. 그리고 실비아에게도 “마음 고생이 심했겠구나, 그렇지? … 네가 어떤 아이인지 아빠는 줄곧 알고 있었어. … 너는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거야. 그것도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말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긴 하다만.” 그렇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배틀 총경은 『0시를 향하여』의 탐정 역할을 맡은 경찰로서, 증거도 없는 사건의 해결을 위해, '아주 이상한 방식'을 이용해 범인 네빌의 자백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할 일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배틀 총경의 다음 말에 주목해 보자. “이 학교에서 네가 훔친 건 아무것도 없단다. … 너는 아주 드문 유형의 거짓말쟁이일 뿐이지.” 실비아가 자식이라서 물불가리지 않고 믿어준 것은 아니라는 말이고, 그 아주 이상한 방식도 정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어떻게 보면 냉정한 분석가의 진단이다. 바로 프로이트와 같은 분석가의 태도다. 배틀 총경은 시종일관 '네 아빠라서가 아니라 도둑이 어떤 인간들인지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딸의 무죄를 확신했다는 말이다.


앰프리 교장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범인을 검거했다.


저는 학생 전원을 소집하고 이 사태에 대해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저는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지요. 실비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전 알 수 있었습니다. 죄책감이 어린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이었어요. 바로 그 순간에 저는 누가 범인인 줄 알 수 있었던 겁니다. 저는 실비아를 불러다 책임을 추궁하기보다는 실비아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한 테스트를 실비아에게 해보았습니다. 단어 연상 테스트였지요.”(0시를 향하여』)



3. 미니멀리즘으로 실뜨기하기


결정적인 열쇠가 하나 있다. 실비아는 앰프리 여사가 파악하지 못하는 엉뚱한 유형이었다. 애거서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상황이 주어진 시간과 주어진 장소로 총집결되는 최정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배틀 총경이 분석가의 위치를 차지하는 듯 보이지만, 애거서 크리스티가 반영한 그 시대의 프로이트는 포와로다. 탐정들은 모두 신경증을 앓고 있다. 홈즈가 중독자이며 포와로도 그렇게 표현되는데,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남성) 신경증의 전형적인 인물들과 유사하다.


울프맨과 래트맨 연구는 모두 프로이트가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한 사례 연구들이다. 울프맨과 래트맨을 괴롭혔던 신경증적 문제들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같은 염려와 동정심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그 두 사람이 병에 맞서면서 보여 준 창조력과 끈기에 감탄을 표하기도 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남성 환자들의 고통스럽지만 창조적인 질병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 콤플렉스』)


그러나 미스 마플은 좀 다르다. 홈즈가 근대과학의 최신 정보에 능통하고 포와로가 명망 있는 다국적 탐정인 반면 마플은 소설을 읽고 뜨개질을 한다. 세인트 메리미드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도 별로 없는 평범한 할머니다. 평범이라고 표현했지만, 현대에서도 그렇지만 나이 많은 여성은 여러 가지 악덕을 갖게 되고, 마플이 그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렇지만 내 생각으로는 미스 마플은 애거서 크리스티와 가장 닮았다. 애거서는 셜록 홈즈를 즐겨 읽었지만, 포와로를 탄생시켜 전세계에서 두번 째로 많이 읽힌 작가가 되었다. 포와로는 프로이트가 탄생한 시공간을 그대로 복사하고 있는 전형적인 인물에 가깝다. 그런 포와로를 역전시켜 놓을 인물로 미스 마플이 등장했다고 말하면 어색한가. 미스 마플은 여성 신경증, 히스테리가 없는 탐정이다. 탐정이 아닌 탐정이다.


탐정에 열광하는 일은 말 그대로 미니멀리즘을 맛보는 일과 흡사하다. (미술 음악 문학 … 암것도 모르지만 회색 뇌세포를 사용해서 추측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어떤 시간, 모종의 공간이 하나로 모아질 때 놓치지 않고 따라오는 리듬이 있다. 그 리듬을 읽어내고 진단해서 엉킨 실타래를 말끔하게 풀어내는 일을 탐정이 한다. 미니멀리즘은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최소한의 표현, 최대한의 일치로 본질을 표현한다. 단조로움은 담백함이다. 도라의 일상은 길고 긴 싸움이었고 추적이었고 긴장이었지만, 히스테리라는 진단 앞에서는 투명해지고 미니멀리즘해진다.


나는 가끔 마플이 하는 말을 따라한다. 인간의 본성은 어디를 가도 대체로 거기서 거기에요,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인정하고 나면 행복해져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을 전부 그대로 믿어선 안되죠. 전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보이면 아무도 믿지 않아요! , 저는 늘 스스로 증명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의 본성을 잘 안다고 자만하는 탐정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게는 … 자신을 믿고 자신을 딛고 그리고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최소한의 겸손을 가진, 탐정의 실뜨기로 들린다.


*나는 어제 아팠다. 지금도 아프다, 아마 내일도 아프겠지만, 굳이 내 자신에게 왜 나아지지 않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도라는 내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미 도라의 말은 내게 들어와 있다. 말하지 않아도 말이 움직인다. 머물러야 하는 말은 없다.


1완성하지 못한 글쓰기 주제가 여럿이다. 그 중 하나가 <황금율의 역사 – 누가 왜 프로이트를 강박하는가>인데, “질문하는 자와 응답하는 자”의 관계론이며 대화론이다. 루소의 학술진흥원이라든지 대한민국의 인력개발기관이라든지 누군가 갑자기 정신이 급변해 연구지원금을 투척해준다면 다시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유태인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열등하며 이방인으로 자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일에 눈꼽만치도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왜 혈통이나 또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소위 나의 민족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로이트는 저주받은 운명 속에서도 독립적인 판단을 가진 인간으로 우뚝 서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정신분석에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2며칠 전 곰발님의 포스트에서「미니멀 룩의 정석」을 읽고 몇 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포스트는 곰발님이 좋아하는 작가가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을 출간했는데, 그의 글들이 시대의 빈곤을 말하기 좋은 담백하고 건조한 문장이라는 극찬이었다. 사교를 모르는 나는 그때 댓글로 미니멀리즘에 대해 뭔가 끄적여보고 싶었는데, 신간을 축복하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듯하여 생각을 접었다. 곰발님이 응원하셨으니 그 책은 아마 더 흥하게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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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6-15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글 제가 알라딘에서 3년 내에 읽었던 글 중 가장 탁월합니다.. ㅎㅎㅎ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한자 한 자..
포와로를 역전시킨 인물이 미스 마풀이라는 지적에 무릎 탁, 쳤습니다..ㅎㅎ




그런데 도라가 나중에 자살했나요 ? 전 왜 기억에 없는 거죠 ?


초원 2018-06-20 13:06   좋아요 0 | URL
지난 이틀 동안 ˝질서로 복원되는 청소과정˝이라는 곰발님 의견에 골똘했습니다.
그런데 별 진척이 되지 않는군요.

처음 읽었을 때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요. 곰발님은 에너지로 혹은 정보로 ‘사건‘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고, 그 부분이 여전히 어색한데, 뭔가 다른 갈래의 생각들을 촉진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글로 한번 써보고 싶군요.)

범인은 이미 있었던 것이고 그 존재를 드러내는 일을 탐정이 합니다. 하지만 진상이 드러나는 중에 발생하는 어긋남들, 그리고 범인이 확정된 후, 그러니까 죄인에 대한 처벌이나 사건으로 뒤틀린 균열들에 대한 후속 처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요. 공동체의 비극은 그렇게 다시 시작됩니다.

탐정의 일도, 작가의 의무도 아닌, 피해자와 관련자(독자까지 포함된)들의 몫이 되는 고통의 순환구조에서 오는 무력감을 썼습니다.

이런 논리는 자유연상을 분석하고 꿈을 해석하는 정신분석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는 생각에서, 전경과 배경이 역치될 수 있는 순간들을 상상했습니다. 실뜨기라는 희망사항을 덧붙였지만 여전히 의문부호입니다.

이어지는 글이 있는데 언젠가 곰발님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늘 싱싱한 투쟁력으로 알라딘 왕좌를 놓치지 않는 분이신데. 제게 따뜻한 말씀을 나눠주셔서 다시 또 고맙습니다.

(참, 뱃 속의 악성종양으로 인한 통증을 히스테리 증상으로 오진해서 두 달후 사망에 이르게 한 열네 살 소녀는 도라가 아닙니다. 도라는, 다시 찾아 확인해보진 않았지만, 기억으로는 k부인의 자녀가 사망한 후에 그 부인에게 위로를 전했다는 후일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잘 지냈다는 말이겠지요. 도라는 타고난 투쟁력을 가진 여성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15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탐정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주장합니다.

추리소설의 핵심은 엔트로피(무질서)를 네트로피(질서)로 복원시키는 과정 아닙니까.
무질서해서 뒤죽박죽인 사건을 청결한 네트로피로 되돌려놓는 것. 일종의 추리소설은 청소하는 과정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초원 2018-06-18 12:5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곰발님...
제가 출연료도 드리지 않고 글 속에 출현시켜드렸네요.

잘 지내시죠?
가끔 알라딘에 들리게 될 때마다 곰발님 댁은 찾아뵙거든요.
여전한 모습 뵐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웃게 되지요.
늘 좋은 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 <증거기반의학의 철학>에 관심이 갔습니다.
탐정의 방법론이 의사나 철학가, 사회과학자와 다르겠지만
어떻게 데이터, 자료, 사실, 증상 ...등을 분류, 해석, 진단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말다 하다보면 뭔가 통계청 직원이 된 듯도 하더이다.

곰발님 댁에 ‘새빨간 활‘이라고 명패가 있던데 무슨 뜻일까 궁금했습니다.
선주민들의 사회에서는 활이 여성이고 화살이 남성이던데요.
그런 의미는 아닐 것 같고
새빨간 펜이라거나 붉은 망토가 연상되었답니다.
저처럼 여성임에도 추리 능력이 꽝인 탐정불능도 있답니다.

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구요.

clavis 2018-06-16 14: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원님 무지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나요?^^글 잘 읽고 갑니다 무지 멋있어요ㅎㅎ

초원 2018-06-18 13:17   좋아요 1 | URL
와~~ 클라비스님, 오우~ 클라비스님.
너무 반갑습니다.
제가 아파서 좋았던 일도 있는데요.
그 하나가 클라비스님이나 곰발님과 같은 좋은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클라비스님
침착하고 당당하게 그리고 담백하고 청아하게
잘 이겨내셨길 빌었습니다.

들리지 않아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니까
어떤 말은 영원히 들리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저 혼자 하는 기도들이 있습니다.

지난 번 클라비스님 댁 포스트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계시는 모습을 읽으면서
잘 되실거라고...믿었습니다.

어떤 길 위에서든 클라비스님만의 리듬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들려지기를...

물과 비타민 많이 드시고
혹여 지치더라도 금방 펄쩍 뛰어오르시길...바래봅니다.

2018-06-18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19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수 이상은의 노래 제목입니다. 새빨간활이라고... 노래 끝내줍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6-21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원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길어서 아예 포스팅했습니다..
 

세 달 전에 책방 문을 닫으면서『서점은 죽지 않는다』를 보게 되었다. 왜 죽지 않을까. 죽지 않는 것이 있을까. 내가 열었던 책방은 죽었다. 아니. 혹시 어딘가 다른 형태로 살아 있나.


살다-죽다. 태어나다-죽다. 살다와 태어나다는 같은 위치에 있는 말인가? 살다-죽다는 단선적이며 내부의 문제이며 개체라 할 수 있는데, 태어나다-죽다는 태어나다-죽다-태어나다-죽다-태어나다 … 다수성을 가질 수 있으며 외부적이며 능동과 피동의 사이를 오가는 문제라서 얼마든지 교차와 복선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죽다-죽다는 같은 위치에 있다. (내맘대로 사전, 12)


책방에는 여러 손님들이 오갔다. 그들에게는 사연이 있었으며, 웃음 뒤켠에 서글픔이물들어 나직하게 흘러나오곤 했었다. 그들은 책방 문을 열듯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 용기까지 갖고 있었다. 세상을 대하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던 사람들은, 병들어 있는 내게 여러 요령들을 일러 주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어렵지 않았고 때로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내 이야기를 묻는 시선에는 도통 익숙해질 수 없었다. 책방은 사적인 원환(圓環)을 발견 • 극복하는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책방의 모습은 사적인 원환을 다시 쓰고 직면하는 공간(空間)이었을 것이다.


서점 손실이 누적되고 내 병은 정체될 무렵, 한 손님이 서점을 흥하게 할 수 없어도 망하게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내던졌다.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신경 써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분은 활기차고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였으며, 서점이 성공할 수 있도록 청소년 대상 강좌를 열어보라는 제안을 하는 등의 사업전략을 적극적으로 제안해주셨던 분이었기에 어떤 행간도 읽지 못한 채 그저 고마움만을 내보였었다. 그러다 다른 손님까지 그 말을 인용하며 사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확실히 하라고 했을 때도 감사함의 인사를 반복했으며, 운영상의 어려움을 내외없이 내뱉었던 내 실수에 영향을 받은 덕담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꽤 여러 명이 모인 모임에서 그분은 다시 그 이야기의 확장판을 웃으며 들려줬는데, 모임이 끝나고 내가 처했던 상황을 조금 더 파악할 수 있는 말을 가까운 지인을 통해 들었다. 망하게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는 어렵다며, “그분은 진심같던데 …”라는 물음표를 훅 던져 주었던 것이다.


이미 그 손님에게 책방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지만, 죽었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그 손님과의 마지막 만남은 좋지 않았고, 나는 그 말에 전염되어 망해가는 서점, 죽어가는 책방을 느끼고 있었다. 망할 것이야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죽는다는 것은 염두에 없었다. 당연히 죽어야지 하는 마음도 들었다. 나에게 책방은 내 원환의 체계가 어떤 모습인지 다시 직면하게 해주었다


그분과 또다른 손님에게는 명확하게 보이는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한방병원에서 만났던 아주머니와의 만남이 다시 반복되고 있었던거다. 그 아주머니는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인생을 긴 시간 동안 성의껏 들려주었었다. 연간 천만 원 이상의 기부자 대열에 설 수 있도록 만들었던 원동력으로 끈기와 근성을 잃지 않았던 점을 강조했었다. 몸에 남은 흉터와 수술 자국도 확인시켜줬고, 자긍심 어린 눈빛도 보여주었다. 내가 앓고 있는 병은 한가하고 게으르며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거라고, 내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필요한 목록을 일러줬었다. 그 당시 내게 그 강의는 옳고그름의 선상에 있지 않았고, 살려고 붙들어야 하는 '정상성'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었다.


야물지 못한 일처리와 탐탁치 않은 독서모임의 내용 등 … 그 손님에게는 거친 덕담을 건넸던 한방병원 아주머니처럼 격한 심랑이 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떨림이 멈추지 않고, 무섭기만 하던 때였기에 그 거침은 내게 부드러움 자체였지만, 그런 상황들은 맥없이 현실 곳곳에 반복되곤 했다. 여러 사적 체계들이 섞이지 못하고 교차한 부분도 없이 허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허공이 내 사적 원환에 진동을 준다.


인과적인 분석만큼 원한 감정도 싫어한다. 불쾌했던 순간을 재연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유쾌했던 순간을 지속하는 것도 껄끄럽다. 망한 서점이 무엇/누구 때문이라거나, 병든 내 신체가 불행한 과거 경험때문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내 촉은 현재이며 내 감각은 현실이고 내 사유는 세계라는 그것들을 다 담고 있다. 공포와 고통만 느껴지게 하던 내 병증은 내 촉과 감각을 의심하게 했다.


사적 요인들에 떠밀려 쾌락/불쾌의 장면을 강박적 충동적으로 재연하기보다 미래를 향해 주체적, 창의적으로 연기하거나 일매지게 계획하는 능력은 인간의 생산적 활동에 동원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코드다.(66, 『집중과 영혼』)


이런 구절을 읽을 때면 어김없이 거부감이 들고 의문의 또아리가 커졌었는데, 같은 문맥의 그 손님과 아주머니에게는 말없이 고맙다고 연신 말하며 경청했다. 이제 … '정상성'을 다시 생각하게 하며 애써 찾아본다


아뿔사, 고깝게 멀어지게 하던 차가움을 다시 확인한다. 정말 죽음으로만 끝낼 수 있는 원환의 체계가 있을까봐 무서워진다. 당연하지, 그렇지만 너의 촉과 감각은 허공을 느끼라고 하잖아, 이 멍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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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8-02-26 19: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점은 망했으나 봄은 왔으니 셈셈이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