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치 선생의 글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굶주림을 곧바로 '음식물에 대한 욕구'로 번역하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토틸라 옥수수빵에 굶주렸지, 결코 칼로리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에 굶주린 것이 아닙니다." 이 대목에서 일리치 선생은 학교교육이 평등한 기회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학교 교육과정을 필수적이라고 여기죠. 왜냐하면 근대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욕구를 무언가를 소유할 권리나 자격으로 해석하게 하거든요. 교육에 대한 욕구도 교과내용의 습득과 연결시킵니다. 


제가 이 구절을 기억하는 이유는 일리치 선생님의 의도와는 좀 다른데요. 저 문장에서 번쩍이는 건 다음의 표현이예요. <'결코 칼로리라고 하는 추상적인 것에 굶주린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것들에 집착하게 되는지 모르지만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 보면 빌리가 어릴 적 살던 동네 풍경이 자주 나오거든요. 그 골목에는 늘 홀로 서 있던 소녀가 있었어요. 저는 일리치 선생의 글에서 그 아이가 자꾸 떠올라요.


《빌리 엘리어트》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1.

영화《빌리 엘리어트》에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여러 문제들이 있다공권력계급공동체상징자본메리토크라시자유 등의 굵직한 주제들이 주렁주렁하다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을 덧대어 읽기도 했다이 글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읽어보려 한다. 1980년대 영국노동자 가족이 겪었던 사회적 고통이 빌리 엘리어트의 성공으로 치장되지 않기 위해서라도조금 다른 방법으로 이 영화를 읽고 비교해 본다《빌리 엘리어트》의 두드러진 중심 공간을 문제삼아 유토피아와 헤테로피아의 관계를 생각한다먼저 재키 엘리어트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풀어보고 난 후 특이성을 갖는 공간이질적인 공간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생각을 덧붙인다.


2. 광부와 댄서

저 유명한 대처리즘의 중심부에 있던 광산촌 더럼에서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노동자 재키는 평생 광부로서 자신과 가족을 지켜온 심지있어 보이는 인물이었다동료와 마을 공동체에서도 신임이 깊은 위치였으나파업의 장기화로 심각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데다아내를 그리워하며 방황하게 되면서 노쇠한 가부장의 모습을 보인다그러던 중 재키는 빌리의 꿈을 보았고 혼란에 빠진다윌킨슨 선생은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쳤는데능력이 남다르다며왕립학교에 오디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한다이 제안에 당황한 재키는 격하게 거부하고 빌리를 설득하려 했으나기어코 윌킨슨 선생으로부터 따끔한 충고를 듣고 얼굴을 붉히고야 만다이 구렁텅이에서 빌리만은 탈출할 수 있다고 윌킨슨 선생은 확신한다잿빛 광산촌에서서로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는 갱도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화려한 미래가 빌리에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들 빌리를 위해 노조를 배신할 결심을 한 후광산노조의 주축으로 활동하던 큰 아들 토니와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하면서재키는 새로운 인물이 된다즉 가족 내에서 무력했던 모습을 벗고 생기를 찾는다아내의 유품을 전당포에 맡기고 마련한 돈으로 빌리에게 오디션 기회를 선물한다그리고 큰 아들 토니를 앞세워 갱도로 복귀하면서빌리의 신세계를 완성할 학자금을 준비한다희생하는 아버지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지 않고군림하지 않으며배경으로 물러서는 아버지가 된다그 결과는 십 년 정도 흐른 후런던의 웅장한 오페라 공연홀에서 보상받는듯 보인다재키 엘리어트는 당당하게 빌리의 가족이 도착했다고 알린다공연의 주인공이 된 빌리의 가족이 여기 왔다고 전한다힘을 잃고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가부장 재키는 구사일생으로 되살아난다가족의 가치를 새로운 형식으로 지켜낸다.  Be yourself!



3.

공간은 모든 공동체적 삶에 근본적인 것이며모든 권력 행사에도 근본적인 것이다.”

『헤테로토피아』는 푸코가 유토피아에 대비시켜 사용하는 용어인데아마 이런 구절에서 매혹적인 유인가를 갖게 된다.


["스쳐 지나가는 통로가 있고 거리가 있고 기차가 있고 지하철이 있다카페 영화관 해변 호텔과 같이 잠시 멈춰 쉬는 열린 구역이 있고휴식을 위한 닫힌 구역자기 집이라는 닫힌 구역도 있다그런데 서로 구별되는 이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장소들그것은 일종의 반反공간 contre-espaces이다이 반공간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 어른의 사회는 아이들보다 훨씬 먼저 자기만의 반공간자리매겨진 유토피아모든 장소 바깥의 실제 장소들을 스스로 조직했다예를 들면정원이 있고 묘지가 있고 감호소가 있고 사창가가 있고 감옥이 있고 클럽 메드의 휴양촌이 있고 그 밖에도 많다." (『헤테로토피아』)]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는 실재하는 유토피아이며절대적으로 다른 공간이라고 주장했을 때저항감이 있었는데마치 공간을 텍스트로 옮겨 버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알려진 대로 푸코 자신도 더 전개시키지 못하고 유야무야 덮어버리고 말았다그런데 헤테로토피아가 가정하는 어떤 특정 요소가 사람들을 유혹한다영원성의 양식인 박물관에서 한시적인 시장변두리마을 공터가건물좌판을 헤테로토피아로 등판시킬 때,마음 한쪽 비어 있는 구멍이 그 자리이기라도 하는 냥 끌린다아니뭔가 그럴 것이라는 가능성에 믿음을 실어버린다.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로 지목하는 장소들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데 그 원리가 있다 “유토피아와 대립관계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어제의 헤테로토피아가 오늘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그렇다면 우리가 움직이고 생활하고 거주하는 현실 공간은 유토피아와 헤테로토피아와 어떻게 다른가푸코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 규칙 안에서 작동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유토피아는 상상력으로만 작동하는 현실에 없는 장소를 뜻하는데이때 가상과 허구는 당연하게도 정상적 규칙 밖에 있게 된다헤테로토피아의 경우에도 정상성을 벗어나 질적 차이를 갖는 공간을 말한다푸코는 현실세계의 바깥 공간빈 공간을 사유하며 반反-공간을 설명하며 권력과 지식의 관계를 사유하라고 말한다.


[" 그것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의제기를 수행할 수 있다아라공이 말햇던 매음굴처럼 나머지 현실이 환상이라고 고발하는 환상을 만들어냄으로써아니면 그 반대로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이라고 보일 만큼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냄으로써한동안-특히 18세기에-식민지는 적어도 사람들의 계획 속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했다물론 이 식민지들이 커다란 경제적 유용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거기에는 상상적 가치들이 결부되어 있었으며이 가치들은 확실히 헤테로토피아의 고유한 위광에 빚지고 있었다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 영국의 청교도 사회는 미국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시도했다." (『헤테로토피아』)]



헤테로토피아들이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라고 한다면그 이의제기를 하는 것이 무엇인가공간 자체가 되어야 할텐데위 문단 같은 설명을 보자면그 당사자는 마치 현실의 착취관계를 허물어버리는오히려 착취자의 이의제기의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는 특정 주체계급들처럼 보인다헤테로토피아는 정상성 바깥에서 정상성의 수호천사라도 된 듯하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헤테로토피아로 분류될 수 있는 장소는 50센트 권투 연습 클럽 활동의 장소요노조 회합의 장이며빌리를 돕기 위한 모금 행사장이 되기도 하는 마을공동체 센터다이 센터에서 빌리는 발레 수업을 구경할 수 있었고운명적 일탈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너무나 이상적이다그리고 실재한다지배자도 없고 탄광회사의 규칙도 자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그렇다면 이 마을 센터를 헤테로토피아라고 할 수 있겠는가이 센터는 대처리즘으로 상징되는 영국 사회의 규칙의 범위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그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유토피아도 헤테로토피아도 아니지 않는가마치 광부 재키의 집에 석탄이 떨어졌고피아노를 부숴 만든 장작이 그 난로를 가동시킨 것처럼마을 센터는 장작이 된 피아노이기라도 한 것일까.


재키와 토니 엘리어트 부자는 발레 관람을 위해 코벤트가든에 있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찾는다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허겁지겁 들어선 그 공간은 2300여 개의 좌석이 있는 웅장한 극장이다과거에는 국왕의 지원을 받고 왕과 귀족을 위해 공연한 곳이었으나현재는 입장료를 낸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공연장이 되었다빌리에게 꿈의 공간이었다이제 빌리의 유토피아는 현실 공간이 되었다아니다빌리는 사실 성공한 발레리노로 로얄 발레하우스에서의 공연을 꿈꿨을텐데이를 두고 유토피아라고 할 수는 없다푸코의 지적대로 “사각형의 무대 위에 온갖 낯선 장소들이 연이어지게 만들어지는” 극장이기 때문에 헤테로토피아라고 해보자개인적 의식의 차원을 벗어나 사회적 회로를 돌려보면 이해할 수 있을까로얄발레하우스가 헤테로토피아로서 드러내는 정상성 바깥의 존재-사유는 어떻게 정상성들을 타격할 수 있을까.


재키와 토니에게 이 로열 발레 하우스는 어떤가관람자로 하나의 좌석을 배정받았고공연을 향유할 수 있으나 그들에게 그 곳은 어떤 공간이라고 하겠는가유토피아인가헤테로토피아인가현실공간도 아니라면도대체 코벤트가든 로얄발레하우스는 무엇일까노동자 아들 빌리가 수석무용수가 되었다로얄발레하우스에서.


누가 헤테로토피아를 만드는가일종의 제도적 공간들이다푸코가 헤테로토피아로 제시하는 공간들은 자본주의가 거대한 세계체제로 나아갈 동안 심한 부침을 겪었던 곳들이다푸코의 온갖 헤테로토피아들은 그 공간의 질적 경험들을 아예 지워버리거나정상성의 꼭대기를 향하고 있는 주체들을 환영한다.


["만일 자급자족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롭지만 바다의 무한성에 숙명적으로 내맡겨져 있는장소 없는 장소이자 떠다니는 공간의 조각인 배, 19세기의 거대한 배가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이 홍등가에서 저 홍등가로 이 항로에서 저 항로로 전전하면서 우리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동방의 정원 안에 아주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는 것을 찾으러 식민지까지 갔다는 점을 고려하면우리는 배가 왜 우리 운명에서-적어도 16세기 이래로는-가장 거대한 경제적 수단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였는지를 이해하게 된다그것은 특출한 헤테로토피아이다배 없는 문명이란 자녀들이 뛰놀 만한 커다란 침대를 갖고 있지 않은 부모를 둔 아이들과도 같다그리하여 그들의 꿈은 고갈되고정탐질이 모험을 대신하며경찰의 추악함이 해적의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대체하고 마는 것이다."  (『헤테로토피아』)]


만약 빨간나라가 유토피아라면그 안에 헤테로토피아는 어떤 모습일까.


규정된 사회관계로 보자면 엘리어트 가족은 임금노동자 계급이며빌리를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하는 로얄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경제력을 갖고 있다그런데 이 영화는 아버지 재키 엘리어트의 결단 아래 빌리는 꿈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한다신분상승이 문제에는 두 가지 딜레마가 있고각각 다른 존재론적 함의를 갖는다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연이어 나올 것이다성공한 빌리가점점 더 퇴락해져가는 광산촌 더램에서 여전히 분투하고 있을 형 토니와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빌리가 살던 골목길에 홀로 서 있곤 하던어린 소녀는 무얼 하고 있을까.


[* 대항공간이라는 대안도 가능할 것이다한데 우리말에서 '대항'은 맞선다 거스른다는 反의 정적인 의미에 더해덤빈다는 좀더 능동적이며 적극적인 어감까지 담고 있다헤테로피아는 사회에 의해 고안되고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공간이며다만 그 존재 자체로써 나머지 정상 공간들을 반박하고 이의제기하는 공간이기에, '대항공간'보다는 '반공간'이 좀더 적절한 번역어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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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4-18 2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빌리 엘리어트에 대한 이 깊은 해석!
넘 잘 읽었어요.
저는 그저 영화로, 뮤지컬로 보면서 단순하게만 해석했어요^^

초원 2023-04-18 23:31   좋아요 2 | URL
와우~ 감사한 댓글! 뮤지컬까지 보셨군요. 저야말로 페넬로페님이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해요.
 
고종석의 문장 2 -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한국어 글쓰기 강좌 2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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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고집이 외로움을 부추기고, 내 거칠음이 고립의 집이다!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글을 쓰고 나면, 어찌 그리 쓸쓸한지 목울대가 움찔하다. , 언제부터 글에 의지하게 되었을까? 자의로 타의로 밖으로만 떠돌았고, 소중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 채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길을 몰라 표독스럽게 세상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미련하게 타협하는 방법이 읽고 쓰는 것이다. 그렇게 읽고쓴다는 것은 내 생존력의 근기가 되었다. 몇 줄이라도 끄적이고 나면 뭔가 안전영역에 들어온 것 같은 심정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겨내야 할 병이다. 실뿌리라도 이 땅에 내리고자 한다면 일어나 섞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또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위로하는 글이 아니라 확장하는 글을 써야 한다. 호흡을 섞을 여백이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글에 누군가의 호흡이 얹어진다면, 그것이 조롱이든 호감이든,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고 몇 주고 마음으로만 쓰다가 정작 워드파일로 옮기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긴 글도 어렵고, 작고 세밀한 결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줄기가 아니다. (두려움없이) 헤쳐가는 꿈만 꾸다 늙어 간다.



2. 말투를 바꾸면 사고방식이 또 생활이 변하고 운명이 다른 길을 찾게 될까?


『고종석의 문장』이라면 국어의 현재성을 경험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모자라지''부족하지''충분한'을 넣어 읽어본다. 그래도 여전히 처음 선택이 맘에 든다. 이게 문제일거다. 나를 고집하면 나밖에 없다. '충분한'을 넣지 못하나? 고치고 고쳐 이렇게 다시 쓴다.『고종석의 문장』은 전략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글쓰기 지침서를 애써 외면하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말초적인 계기는 중학교 때다. 젊고 건강한 국어교사는 교과서의 시와 문장을 자주 외우고 읽게 했다. 표준말과 좋은 글의 표본이 담긴 책이 교과서인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슬프다고 해석해 준 시에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고민을 소리내 질문하고야 말았다.  그가 여중생을 두들겨 팬 것은 처음이었을거다. 초여름 짧은 소매 옷,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는 시뻘겋게 변했는데, (그에게 호감이 있었던) 내 맘은 더했다. 6교시까지 벌을 서면서도, 내 맘은 슬프지 않은데 모르는 건 질문하라고 했으면서…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반성을 모르는 아이였다.


또 다른 계기는 “글쓰기”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0년대 초쯤부터 글짓기를 글쓰기로 자연스럽게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글쓰기는 “참삶을 가꾸는” 것이며, 우리말과 글을 되살리는, 겨레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반면 글짓기는 구태의연하고 작위적인 국어순화운동과도 같았다. 삶을 바꾸는 글쓰기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신문, 텔레비전, 동화, 소설을 뒤집고 찾아, 오염된 우리말과 글에 바른 표현을 찾아주었다. 음식점 차림표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서 겨레 살리기는 계속되었다.


지난 국어시간을 생각하면 환호할 일이었지만, 내게 그 운동은 또다른 반항심만 부추겼다. 사회적 반응이 커질수록 말의 소외와 역차별이 생기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오염된 말이 지정되었고, 바른말이 눈앞에 있는 데도, 자기 말을 여전히 고집하는 사람은 눈에 거슬려보이고, 바르고 고운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품위는 없어보이게 된다. 계급 언어가 생기고 문화적 차이가 생긴다. 이런 개인성 혹은 정체성이 불안의 요소가 된다.


내가 벌을 받고 뉘우칠 줄 아는 아이였다면, 좋은 글을 외우고 상냥하고 예의바른 말을 건네는 아이였다면 사회가 원하는 체제로 편입되기 쉬웠을까, 자신을 낮추고 가슴 속에 스승을 기꺼이 모시며,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에 부족함이 없었을까. 그럴 것이다.

누구와 말을 주고받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 발화가 되었느냐에 따라, 말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비슷하게 반응한다. 교과서 시에 의문을 품었다. 국어교사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국어교사가 질문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았다. 그 체벌을 수용하지 않았다. 교과서를 싫어하지만 시험을 위해 이용만 했다. 처음 시작이 부정이었다.  그 기운이 바뀌지 않고 흐르고 있다. 


의문을 지울 것, 이의가 있더라도 유예시킬 것, 거부당함을 반성할 것



3. 『고종석의 문장』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고종석 씨는 아름답고 명료해야 좋은 글이라고 말한다. 한밤중에 읽을 때는 집중하기 어려웠는데, 한숨 자고 난 뒤 읽으니 한결 낫다. 간결하게 설명하고 예를 들어 응용력을 키워주는 책이다 보니 밤보다 아침에 어울린다. 그의 단련된 글쓰기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도 막힘이 없다. 엄청난 양의 지식도 조직되고 정리된 창고에서 자동추출되어 나오듯 끊임없다. 은유와 환유의 설명도 귀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간다. 풍부한 어휘력과 유연한 구성력이 장점이다.


고종석의 문장 읽기는 진행 중이다. “논리를 확장”해가라는 지침을 읽고 내 습관을 돌아본다. 피천득의 인연과 같은 미셀러니(몇십 년만에 다시 듣는 용어다)는 한번 싫으면 영원히 그렇다는 걸 확인해준다. 안에서 부르는 이름- 엔도님,  바깥에서 부르는 이름- 엑소님과 같은 고유명사 얘기도 재미났다. 양주동 씨의 『문주 반생기』는 함께 읽어보고 싶다.


동의하고 수용하는 법을 통해 확장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다. 독해력이 문제일까? 고종석 씨는 좋은 글의 표본으로 김현 씨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를 한 줄씩 읽어가며 해설해 준다. 이해하고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애처롭게 어긋난다. 그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이렇게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란 글을 한번 읽어봤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건 '말들의 풍경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한 사람이 보기에도 또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변화하기 때문이다. 실체라는 건 없다. 있는 건 흔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불교에서 익숙하죠. 세상에 완전히 분별되는 것은 없다. 고정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현 선생 자신이 평생 교적을 두었던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김현 선생은 이 글에서 자신의 논리를 찬찬히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그 풍경이 다른데 왜 다른지 설명하고, 그러면서 말들의 흔적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블랙홀은 없다고 주장한 다음, 결국 맨 끝에서 너와 나는 구별지을 수 없다는 말을 던집니다. 조금씩 조금씩 논리를 쌓아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예컨대 '기름물감의 계속되는 덧칠처럼'이라든가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과 같은 비유는 정말 탁월하죠.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제 생각에 아름답고 명료한 글의 한 예가 이 글이 아닌가 싶어 여러분과 함께 읽어봤습니다. (『고종석의 문장』中)


내 식으로 요약한 것은 이렇다. “나와 너가 말을 주고받고 있다. 말들의 풍경은 이중적이고 중첩되어 늘 이동한다. 변화가 본질이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들의 풍경이 변하는 것은 욕망의 노회한 전략의 결과다. 억압된 충동의 흔적이다. 개인성도 없다. 너와 내가 나눈 것은 흔적이다. 네가 강력히 주장할수록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나도 그렇다.”


아름답게 느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와 뜻이 반복되는게 못마땅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개념들의 행진이 거북하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김현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


아름다움을 못 느끼겠다면 명료함이라도 확인해야겠다. 추론해 보자. 풍경이 덧칠되고 변한다고 하는 것은 말하는 주체를 초월한 시각이다. 듣는 주체도 아니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논조도, 의미도 바꿔가며 장면을 연출하겠는가?)  3의 시선으로서 풍경을 끌고 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듣는 사람도 아니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고 한다. 빛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지 물의 성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빛과 물의 관계는 확실하지만 화자와 해석자의 관계는 어떤가. 풍경이 인격이 된 이상(해석자도 말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즉시즉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풍경이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과 같은, 관조하는 시선으로 느껴진다. 불안하다


어떻게 읽어 들어가야 아름답고 명료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더 노력하자. 그래, 작가의 시점으로 보자구. 어떤 작가가 글을 발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요란하게 논평하고, 이리저리 글을 해부한다. 배설하듯 쏟아내는 일련의 비평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면 글은 초라하게 흔적만 남긴다. 욕망의 찌꺼기로 재조합된 요상한 형태의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애초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지만 이제 그마저도 확신하지 못한다. 글도 흔적이고 비평도 흔적이며 작가도 흔적이다.



4. 아무래도 어렵다


"아름답고 명료한"을 찾지 못하고 또 날이 샜다. 좋은 글이란 그저 '마음에 흡족한'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권위를 인정하고 그렇다고 일단 믿고 봐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영 내가 아니다. 고집과 거칠음을 어찌 대면할 것인지 모르겠다.


말은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다루는지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설레게 다가올 수도 있고 혐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대화로 오가는 의미도 종결되지 않고 대화 후에까지 다른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


말의 실체는 없지만 있다. 말 이후에 말 이전과 다른 지점이 물리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말들은 형체가 없지만 강한 물리력이 있어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일상의 대화는 그저 흐르지만- 일상의 총체- 삶을 이룬다. 흔적이 아니고, 각기 다른 장면의 연속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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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8
에드거 앨런 포 지음,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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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은 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붉은 죽음의 가면」, 에드거 앨런 포


당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 “날카로운 고통과 현기증이 갑작스레 엄습하는 데 이어 엄청난 양의 피가 모공에서 흘러나오면서 피부가 썩어 들어가며”, 얼굴에 진홍색 얼룩이 생긴다. 발병에서 죽음까지 고작 삼십 분밖에 걸리지 않는 병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프로스페로 왕이 택한 '붉은 죽음'을 피할 방법은 어쩌면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궁정의 기사와 귀부인 친구 천 명을 자신의 대사원으로 불러낸 것이다.


왕과 조신들은 일단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 육중한 망치와 용접 도구를 사용해 문의 자물쇠를 녹여 봉해 버렸다. 초대자들이 발작적인 절망이나 광포한 충동에 이끌려 밖으로 뛰쳐 나가거나 누군가 성안으로 뛰어 들어올 가능성을 완벽히 차단할 목적에서였다. 사원에는 식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었다. 그처럼 철통같이 방비했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자신들이 전염병에서 완벽하게 격리되었다고 생각했다. 바깥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돌보면 될 일이었다. 당분간은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슬퍼하거나 생각하는 것조차 어리석은 일이라고 보아 마땅했다. 왕은 사람들에게 온갖 오락거리를 제공했다. 어릿광대, 즉흥시인, 발레 무희, 연주자 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미녀와 포도주도 있었다. 사원 안엔 이 모든 것과 안전이, 그리고 사원 밖엔 '붉은 죽음'이 있었다.


음악과 시가 흐르는 궁정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줬다.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가 흐르는 거리로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이제 초대받은 자들은 안도하며 풍요로움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자물쇠를 녹인 사람도, 초대자를 선별한 사람도 왕이었으니, 굳이 성벽 밖의 통곡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세상 모든 불행을 구원할 방법이란 없지 않겠는가. 옆집의 불행은 안 된 일이지만, 모두 죽는 일도 없어야 한다. 포도주와 미녀를 즐기는 연회에서도 왕과 초대자들은 성벽 밖의 불행을 외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름답게 슬퍼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이 성대한 축제를 맞이하여 일곱 군데 방의 장식을 대부분 직접 진두지휘했다. 그리고 가장무도회 참석자들도 그의 취향을 고려해 가장할 인물의 성격을 정해야 했다. 반드시 괴상한 모습으로 가장하라는 지침이 하달되었고, 참석자들은 휘황찬란하고 번쩍번쩍하는, 그리고 자극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훗날 에르나니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아름다운 모습, 음란한 모습, 괴상한 모습도 많았고, 끔찍한 모습도 여럿 있었으며, 혐오스러운 모습도 적지 않았다. 무도회장은 마치 수많은 환영들이 일곱 군데 방의 안팎을 둥둥 떠서 오가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들, 이 환영들이 각 방의 안팎을 비틀비틀 오가는 동안, 그들의 모습은 각 방의 색깔을 반사했고, 교향악단이 연주하는 환상적인 음악은 그들이 내딛는 발소리의 반향처럼 들렸다.


경쾌한 가면무도회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몇 달째 계속 진행되어도 지루해지는 법도 없었다. 향연은 끝없이 그들의 심장을 미치게 만들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방의 정적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검은 방은 핏빛 창문과 벽시계로 군중을 위협했다. 벽시계의 타종 소리가 궁정에 울려 퍼질 때면, 음악은 멈췄고 춤도 정지된 채 불안감이 뒤덮였다. 군중은 짧은 시간이나마 깊은 명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종소리는 허공에 오래 머물지 않는 법이다. 금새 음악은 이어지고 군중은 무도회를 즐겼다. 어느 밤 종소리가 들리고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아무리 방종한 인간이라도 심장 안에는 심금을 울리는 감정이 존재하는 법이다. 생사가 모두 놀이에 지나지 않는 완전히 타락한 사람에게도 농담거리로 삼을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 그 사람은 키가 크고 훌쭉했는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수의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가면은 딱딱하게 굳은 시체의 표정과 너무나 똑같아서 아무리 꼼꼼히 뜯어봐도 그것이 가면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모인 향연 참석자들 모두가 지금까지 묘사한 그 모든 것을 용인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참아 줄 수는 있었을지 모른다. 그 가장 무도자가 감히 붉은 죽음의 역병에 걸린 환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누가 감히 왕의 심기를 건드리려고 했을까. 왕은 분노로 그 자를 교수형에 처할 것을 명했지만, 침입자의 끔찍한 모습에 놀라고, 알 수 없는 경외의 감정에 사로잡힌 조신들은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수치심에 휩싸인 왕이 직접 침입자를 처단하려 달려갔다. 그리고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왕은 칼을 휘두르지도 못했다. 순식간에 왕은 죽었다.


그러자 연회 참석자들이 역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 특유의 광적인 용기를 발휘하여 검은색 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그 가장 무도자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경악에 사로잡혀 흠칫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칠흑빛 시계의 그림자 안에 미동도 없이 꼿꼿이 서 있던 그의 커다란 몸을 거칠게 붙잡은 순간, 그가 쓴 시체 같은 가면과 무덤에 바르는 회반죽 덩어리 같은 그의 몸 안에 아무런 실체도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붉은 죽음의 역병이 그들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가 밤의 도둑처럼 그들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향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씩 이 방 저 방을 피로 장식하며 쓰러졌고, 각자 특유의 절망적인 자세로 죽어 갔다. 칠흑빛 시계의 생명도 마지막 향연의 생명과 함께 사라졌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어둠과 종말을 부른 붉은 죽음조차도 (실체가) 없다. 가면 무도자는 가면을 쓰지도 않았다. 무도회 참석자 전원이 화려하고 기이한 가면으로 맨살을 숨긴 것과 반대로, 붉은 죽음은 아무 것도 없다, 가릴 것도 없다. 심지어 붉은 죽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은 건조하고 기괴하다. 온 나라를 철저히 파괴한 붉은 죽음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하게 가로 막는다. 유황과 불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를 안타까워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큰 죄를 저질렀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죄악이나 탐욕으로 처벌받거나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는 잔혹 동화에도, 추리소설에도 넘치게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공멸은 별다른 이유가 없어 보인다. 자신만 살기 위해 울타리를 친 왕을 (법과 도덕으로) 처벌하려는 것인가. 문밖에 이른 죽음을 외면하고 여흥을 즐기는 군중에 내린 윤리적 단죄인가.


굳게 잠긴 성문도 뚫고, 왕의 통치도 무력화하는 붉은 죽음이 실체도 없이 떠돌고 있다면, 당신도 집 안팎을 뒤돌아 봐야 한다. 죽음의 종소리는 숨결이 되고, 가면도 없는 맨살 거죽이 피부가 되어 스르륵 다가오고 있는 붉은 죽음은 실체 없는 삶이다. 누군가는 저 깊은 내면에 잠들어 있는 붉은 죽음을 깨울 여흥을 마련할 것이다. 당신이 그 곳에 초대되든 그렇지 않든 붉은 죽음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2.「재판관이 되거나 연출가가 되거나」


지난 번 글에서 법관과 연출가를 희망하는 현실을 문제삼았다. 이 둘의 위치는 다른 듯 보이지만, 되려고 하는 이유에서 닮았다. 누구의 잘못인지, 어떻게 되었어야 했는지에 관심이 많다. 또 일상이나 사물을 적절히 배치할 권력을 원한다. 갈등이 발생하는 일에, 불안이 야기되는 상황을 종결시키려고 모종의 행위를 고정시킨다. 상황과 행위의 적절성을 판단하고, 그 결과에 맞는 옷을 입어야만 한다.


'붉은'이라는 색감이 '죽음'을 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본질은 '가면'조차 없는 허공이지 않은가. 죽음의 당사자가 아닌, 죽음을 관찰하는 자라면, 죽음에 이르지 않기를 열망하는 자라면, 과장(표현)도 할 것이고, 죽음에 가면을 씌우고도 싶을 것이다. 붉은 가면인가? 죽음의 가면인가?


삶이란 마냥 (고정된) 실체가 없는데도, 가면에 연결시켜 이해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화려할수록 단단할 수록 정체성의 지옥에 빠져들게 되는데도, 저항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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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예찬 프런티어21 14
알랭 바디우 지음, 조재룡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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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널 사랑해”는 사랑의 선언이지만, “서로서로 사랑하십시오”는 공허한 표현이라고 말하는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신성하게 다루지 않는 사회를 문제라고 말합니다. 철학자가 사랑을 주제로 말하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더구나 남녀 간의 사랑을 거론하니 낯선 일입니다. “사랑해”하고 말할 때마다 “살아야 해”라고 다짐하는 사회에서 보자면 적절한 주제입니다만,

그의 사랑예찬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파리에 '미틱'이라는 만남 알선 사이트가 유행합니다. 바디우는 위험 없는 사랑, 좌절이 없는 사랑을 제안하는 광고에서 사랑까지 안전한게 접근하려는 체제에 경고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런 것들이 사랑으로 촘촘히 짜여진, 타자에게서 비롯되는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된 온갖 경헙을 완전히 회피하려 한다는 데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위험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성은 계약을 통해 제한된 쾌락을 제공하는 대신 안락을 담보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적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위험과 모험에 뛰어들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플라톤은 사랑의 경험이 보편의 씨앗이라고 했답니다. 자기중심성, 이기주의를 벗어나려면, 하나가 아닌 둘의 세계를,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통해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사랑은 보편적 가치의 이행 요소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연으로 만남이 발생하고, 선언을 통해서 진리를 구축하는 사건이 됩니다.

 

지점들, 시련들, 시도들, 새로운 사실들의 출현이 존재하며, 매 순간 “둘이 등장하는 무대”를 재연해야 하며, 새로운 선언에 필요한 용어들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최초에 선언된 바로 그 사랑도, 역시 “다시 선언”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이 애초에 격렬한 실존적 위기이기도 한 까닭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진리의 모든 과정처럼 말입니다.

 

거래에 의해 사랑을 유지하려다 보면 사랑은 무엇이 됩니다.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온갖 고독을 넘어서 세계로부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포획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안전성을 담보해서도 안 된다. 소비의 달콤함에 젖어서도 안 된다. 열정을 절약하며 쾌락을 채워서도 안 된다. 이런 금지문들로 사랑을 논하는 것은 탐탁지 않은 일입니다. 사랑과 非사랑을 분류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성을 추동하는 욕망을 설명하니까요.

 

그러나 어떤 순간 바디우의 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경험이 동일성과 차이 사이의 충돌과 파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렷하게 부각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할 힘을 준다는 사실 말입니다.

 

중요한 작품들, 위대한 소설들은 자주 사랑의 불가능성, 사랑의 시련, 사랑의 비극, 사랑의 이탈, 사랑의 이별, 사랑의 목적 등을 토대로 집필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지속성에 대해서는 별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실제로 부부의 속성이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해 보입니다.

 

바디우는 사랑과 정치를 섞지 말라고 따끔하게 충고하지만, 코뮤니즘 안에서 차이를 부정하지 않고도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하는데 사랑의 경험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을까요.

 

주체를 회복하려는 바디우의 사랑론은 타자의 육체를 매개로 해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삶의 신비를 역설하는 것 같습니다. , 주체가 담을 수 있는 타자의 한계치로 사랑을 설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단정은 저의 개인적인- 위험한 해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성이 행사하는 무자비한 폭력에 매정하게 노출되어 이리저리 휩쓸리는 지금 여기에 필요한 경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사랑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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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편혜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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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을 지워줄래?>


따로 떼에서 보면 살아있는 존재와 그 환경은 다 정상이 아니다. 그들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 간의 관계다.”(캉길렘)


이상문학상 수상작 「몬순」은 잠시나마 말문을 막아버렸다. 허탈감은 문학상 뒷단의 텁텁함을 상상하게도 만들었다.  완성이나 정상적인 접근을 바라는 내 모자란 이성이 발동해, 공격할 지점을 찾기 바빴다. 쉬운 일이었다. 실망하고 외면하는 일은 언제나 쉽다. 이후에 맺어야 할 관계가 난감해지는 것은 인상비평의 당연한 순서다. 비평은 재비평 되어야 한다. 「몬순」이 작가에 의해 재창작되는 일은 없겠지만, 독자에 의해 재비평 되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상이 주는 무게 때문이 아니라,  재비평으로「몬순」의 온기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찬사와 마찬가지로 비난도, 무관심도, 개입이다. 작품을 비평한다는 것은 삶에 개입하는 것과는 다르다. 개체 차원의 적응과 집단 수준의 대응이 달라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인상을 잠시 내려놓고, 어떤 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가, (작품 속) 인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그래서 시점이 중요하다. 시점은 방향과 위치를 이동 시킬 수단이다. 독자가 자신의 관점 너머를 상상할 여지를 가지려면, 때로는 작가가 안내하는 주인공의 심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비평이 아니라 재비평이다.

시점을 선택했다면 그 시점으로 이동해 다시 읽고 써야 한다. 매개가 될 재료를 찾아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애착을 보류해야 한다. 말이 쉽지 그게 쉬운 일인가.


의사는 아기에게 정기적인 예방주사를 놔주었다. 시시콜콜한 감기를 앓을 때면 처방전을 써줬다. 나중에 아기의 차가운 팔다리를 주물러보고 감은 눈을 억지로 뜨게 하고 망막출혈을 확인한 것도 그 의사였다. 태오는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는 의사의 멱살을 힘껏 잡았다. 화가 나 씩씩거리고 몸을 흔드는 태오에게 의사는 부모 노릇도 못하는 주제에 엉뚱한 데서 화풀이냐고 소리쳤다. 멱살을 잡은 게 먼저였는지 그 얘기를 들은 게 먼저였는지 헛갈렸다. 진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흩어졌고 몇 사람이 달려와 태오를 의사로부터 간신히 떼어놓았다.

아내 분은 휴가가 끝나셨나요? 요새 통 안보이시네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여자가 물었다. (18)


의사 역시 태오의 생각을 거들었다. 아내분의 우울한 기분이 심려스럽다고 했다. 태오는 경솔하고 무책임한 의사의 말에 화가 났다. 화가 난 나머지 의사의 멱살을 잡은 채로 앞뒤로 흔들었다. 태오가 한 짓은 금세 아파트 주민에게 퍼졌다. 태오가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소문이 돌지 않았을 것이고 흥미로워하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어두워진 틈을 타 아파트 유리창이 깨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태오는 정확히 몰랐다. 모르는 채 일단 인생을 살았다. 시간이 지났다. 점차 그날의 일을 유진에게 묻지 않게 되었다. 어떤 유의 대답을 바라지 않는다면 질문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재미로 질문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27)


아내도 여기에 온 적 있어요. 아기 혼자 재워두고요.”

태오가 말했다. 그는 조심하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도 앴다. 억지를 부린다는 걸 알았지만 확신을 버리지 못했다. 술에 취해서는 아니었다. 태오는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런데도 몹시 취한 느낌이 들었다. 하마터면 다 말해버릴 뻔했지만 뒤쪽 테이블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 정도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29)


「몬순」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단편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전개방식 때문에, 끊임없이, 읽기를 멈추고 장면을 상상해야만 했다. 시점이 부자연스럽고, 문체로만 끈질긴 고통을 설명하려는 것 같아 거북스럽기도 하다. 소설 속 어느 귀퉁이에서도 아기를 찾을 수 없었다. 태오의 아기는 끝까지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아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유진은 태오의 기분에 따라 해석되는 사람이며, 이웃집 여자, 의사 모두 누군지 알 수 없는, 혹은 알 필요가 없다고 작가가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나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첫인상이 전부인 등장인물들. 태오는 어떤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 뿐, 길을 막아 버린다


그날 태오는 나무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아파트로 갔다. 서둘렀다. 아기는 홀로 있었다. 다행히 푹 잠든 것 같았다. 태오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자고 있는 아이 곁에 누웠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그를 안도하게 했다. 그러자 궁금해졌다. 잠든 아기를 홀로 두고 어딜 간 걸까. 급한 일이 있을 게 무언가. 누굴 만나러 간 걸까. 그게 누굴까. 두꺼운 나무문이 머릿속에서 안달했다. 태오는 아기가 깨지않도록 조심하며 일어섰다. 아이가 조금 칭얼거렸다. 몸을 뒤척였다. 태오는 깜짝 놀라 멈춰섰다. 아이가 칭얼대다 몸을 엎드렸다. 다시 잠들었다. 새근거렸다. 태오는 분명 그 소리를 들었다.

아까 그곳에 닿기도 전에 아파트 쪽으로 황급히 걸어오는 유진이 보였다. (30)


유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태오의 추궁과 의심을 홀로 견뎠다.

대신 태오가 자주 물었다. 정말 그게 다야? 유진이 모르는 척 잡아 뗀다는 듯이, 내 말 안 믿지? 유진이 여러 번 되풀이한 설명을 다시 한 번 침착하게 끝내고 태오에게 물었다. 태오는 침묵함으로써 유진을 실망시켰다. 그다음은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유진은 울먹였고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32)


밝은 빛 속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유진이 자신의 말을 다 듣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두려웠다. 태오의 말은 유진의 분노를 살게 분명했다. 유진이 모든 걸 알고 있다면 태오가 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불빛이 태오의 무익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막아주었다.(33)


몬순과 단전이라는 배경이 보내는 메시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불어온 후에야 방향도 크기도 알 수 있다는 계절풍” 몬순처럼 불확정성은 삶을 휘돌고 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아기의 죽음 이후, 부부가 나눠 가진 책임과 오명의 굴레는 아파트 단전이라는 상황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불안을 껴안고 살고 싶지 않은데,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머물러야 하기에, 비극 후의 삶은 고단하다. 태오가 암흑이 된 후에 유진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태오의 이 독백이 그들 삶을 이어갈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암시들은 사실, 고통 앞의 인간에게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이다. 단전 속의 어둠도 그냥 어둠이 아니다. 더 밝아지고 안전해질 미래를 안내하는 어둠일 뿐이다. 폭풍우 속의 정전처럼 불시에 들이닥친 정전일지라도, 스위치 켜듯, 끄고 닫을 수 있는 상황을, 끔찍한 삶의 비극에 빗댈 무언가로 촉발하는 것은 허무하다.


<알리바이를 찾아서>

태오를 애써 설명해보자면 알리바이를 찾는 사람이다. ‘오해’로 버림받지 않기 위해, ‘오명’을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쉬지않고 자신을 옹호한다.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려는 사람의 눈에 타자가 들어올 일은 없다. 말할 수 없는 사실에 초조하다. 알아낼 수 없는 진실에 불안하다. 접근하지 못하는 절망감에 떠돌고 있다.

때로는 타인에게 죄를 묻고, 흑백을 논하기도 하면서, 모종의 상황을 연출한다. 삶이 불안하고 불안정한 것은 방향이나 크기를 알 수 없어서가 아니다. 알리바이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태오는 죄가 없음을, 있었더라도 그간의 고통이 상쇄해 갔을 거라고 말한다. 이 소설이 알리바이다

재비평을 시작한다면 태오의 알리바이를 깨든지, 숨겨진 인물들을 불러내든지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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