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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2 - 자유롭고 행복한 글쓰기란 무엇일까 ㅣ 한국어 글쓰기 강좌 2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9월
평점 :
1. 내
고집이 외로움을 부추기고,
내 거칠음이 고립의 집이다!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글을 쓰고 나면,
어찌 그리 쓸쓸한지 목울대가
움찔하다.
왜,
언제부터 글에 의지하게 되었을까?
자의로 타의로 밖으로만 떠돌았고,
소중한 일상의 궤도를 이탈한 채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길을 몰라 표독스럽게 세상을
노려보기만 하다가,
미련하게 타협하는 방법이 읽고
쓰는 것이다.
그렇게 읽고쓴다는 것은 내 생존력의
근기가 되었다.
몇 줄이라도 끄적이고 나면 뭔가
안전영역에 들어온 것 같은 심정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이겨내야 할 병이다.
실뿌리라도 이 땅에 내리고자
한다면 일어나 섞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또다시 쓰고 읽어야
한다. 위로하는
글이 아니라 확장하는 글을 써야 한다.
호흡을 섞을 여백이 있는 글을
써야 한다.
그 글은 내 것이고 내 것이 아니어야
한다. 글에
누군가의 호흡이 얹어진다면,
그것이 조롱이든 호감이든,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며칠이고
몇 주고 마음으로만 쓰다가 정작 워드파일로 옮기기
시작하면 한두 시간이면 충분하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긴 글도 어렵고,
작고 세밀한 결을 만들기도 쉽지
않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생각의 줄기가 아니다.
(두려움없이)
헤쳐가는 꿈만 꾸다 늙어 간다.
2. 말투를
바꾸면 사고방식이 또 생활이 변하고 운명이
다른 길을 찾게 될까?
『고종석의
문장』이라면 국어의 현재성을 경험하기에 모자라지
않은 선택일 것이다.
'모자라지'를
'부족하지'나
'충분한'을
넣어 읽어본다.
그래도 여전히 처음 선택이 맘에
든다. 이게
문제일거다.
나를 고집하면 나밖에 없다.
왜 '충분한'을
넣지 못하나?
고치고 고쳐 이렇게 다시 쓴다.『고종석의
문장』은 전략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글쓰기
지침서를 애써 외면하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말초적인 계기는 중학교 때다.
젊고 건강한 국어교사는 교과서의
시와 문장을 자주 외우고 읽게 했다.
표준말과 좋은 글의 표본이 담긴
책이 교과서인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슬프다고 해석해 준 시에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고민을 소리내 질문하고야 말았다. 그가 여중생을 두들겨 팬
것은 처음이었을거다.
초여름 짧은 소매 옷,
드러난 목덜미와 어깨는 시뻘겋게
변했는데,
(그에게 호감이 있었던)
내 맘은 더했다.
6교시까지 벌을 서면서도,
내 맘은 슬프지 않은데…
모르는 건 질문하라고 했으면서…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반성을 모르는 아이였다.
또
다른 계기는 “글쓰기”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0년대 초쯤부터 글짓기를 글쓰기로 자연스럽게 바꿔 부르게
된 것이다.
글쓰기는 “참삶을 가꾸는”
것이며,
우리말과 글을 되살리는, 겨레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다.
반면 글짓기는 구태의연하고
작위적인 국어순화운동과도 같았다.
삶을 바꾸는 글쓰기 운동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신문,
텔레비전,
동화,
소설을 뒤집고 찾아,
오염된 우리말과 글에 바른 표현을
찾아주었다.
음식점 차림표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에서
겨레 살리기는 계속되었다.
지난
국어시간을 생각하면 환호할 일이었지만,
내게 그 운동은 또다른 반항심만
부추겼다.
사회적 반응이 커질수록 말의
소외와 역차별이 생기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오염된 말이 지정되었고,
바른말이 눈앞에 있는 데도,
자기 말을 여전히 고집하는 사람은
눈에 거슬려보이고,
바르고 고운말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품위는 없어보이게 된다.
계급 언어가 생기고 문화적 차이가
생긴다. 이런
개인성 혹은 정체성이 불안의 요소가 된다.
내가
벌을 받고 뉘우칠 줄 아는 아이였다면, 좋은 글을 외우고 상냥하고 예의바른 말을 건네는 아이였다면 사회가 원하는
체제로 편입되기 쉬웠을까,
자신을 낮추고 가슴 속에 스승을
기꺼이 모시며,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에 부족함이
없었을까.
그럴 것이다.
누구와
말을 주고받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서 발화가 되었느냐에
따라, 말은
일정한 방향을 갖고 비슷하게 반응한다. 교과서 시에 의문을 품었다. 국어교사의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국어교사가 질문을 기꺼이 수용하지
않았다. 그 체벌을 수용하지 않았다. 교과서를 싫어하지만 시험을 위해 이용만 했다. 처음 시작이 부정이었다. 그 기운이 바뀌지 않고 흐르고 있다.
의문을 지울 것, 이의가 있더라도 유예시킬 것, 거부당함을 반성할 것
3. 『고종석의
문장』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고종석
씨는 아름답고 명료해야 좋은 글이라고 말한다.
한밤중에 읽을 때는
집중하기 어려웠는데,
한숨 자고 난 뒤
읽으니 한결 낫다.
간결하게 설명하고
예를 들어 응용력을 키워주는 책이다 보니 밤보다
아침에 어울린다.
그의 단련된 글쓰기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도 막힘이
없다.
엄청난 양의 지식도
조직되고 정리된 창고에서 자동추출되어 나오듯
끊임없다.
은유와 환유의 설명도 귀에 걸리는
것 없이 술술 넘어간다.
풍부한 어휘력과 유연한 구성력이
장점이다.
고종석의
문장 읽기는 진행 중이다.
“논리를 확장”해가라는 지침을
읽고 내 습관을 돌아본다.
피천득의 인연과 같은 미셀러니(몇십
년만에 다시 듣는 용어다)는
한번 싫으면 영원히 그렇다는 걸 확인해준다. 안에서 부르는 이름- 엔도님, 바깥에서 부르는 이름- 엑소님과 같은 고유명사 얘기도 재미났다. 양주동 씨의 『문주
반생기』는 함께 읽어보고 싶다.
동의하고
수용하는 법을 통해 확장하는 것을 연습해야 한다.
어떻게 가능할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다.
독해력이 문제일까?
고종석 씨는 좋은 글의 표본으로
김현 씨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를
한 줄씩 읽어가며 해설해 준다.
이해하고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지만
애처롭게 어긋난다.
그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이렇게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란
글을 한번 읽어봤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건 '말들의
풍경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한 사람이 보기에도
또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변화하기
때문이다.
실체라는 건 없다.
있는 건 흔적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불교에서 익숙하죠.
세상에 완전히 분별되는 것은
없다. 고정돼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현 선생 자신이 평생 교적을
두었던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김현 선생은 이 글에서 자신의 논리를 찬찬히
차곡차곡 쌓아 올립니다.
'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그 풍경이 다른데 왜 다른지
설명하고,
그러면서 말들의 흔적까지 빨아들일
수 있는 블랙홀은 없다고 주장한 다음,
결국 맨 끝에서 너와 나는 구별지을
수 없다는 말을 던집니다.
조금씩 조금씩 논리를 쌓아나가고
있어요.
그리고 예컨대 '기름물감의
계속되는 덧칠처럼'이라든가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과
같은 비유는 정말 탁월하죠.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제 생각에 아름답고 명료한 글의 한 예가 이
글이 아닌가 싶어 여러분과 함께 읽어봤습니다. (『고종석의 문장』中)
내
식으로 요약한 것은 이렇다.
“나와 너가 말을 주고받고 있다.
말들의 풍경은 이중적이고 중첩되어
늘 이동한다.
변화가 본질이다.
영원한 것이 없기 때문에 흔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말들의 풍경이 변하는 것은 욕망의
노회한 전략의 결과다.
억압된 충동의 흔적이다.
개인성도 없다.
너와 내가 나눈 것은 흔적이다.
네가 강력히 주장할수록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나도 그렇다.”
아름답게 느껴야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
한 문장 안에 같은 단어와 뜻이
반복되는게 못마땅하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개념들의
행진이 거북하다.
풍경은 그것 자체가 마치 기름물감의 계속적인
덧칠처럼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로 덧칠되며,
그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마치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
풍경은 수직적인 의미의 중첩이며,
수평적인 의미의 이동이다.
그 중첩과 이동을 낳는 것은 사람의
욕망이다.
욕망은 언제나 왜곡되게 자신을
표현하며,
그 왜곡을 낳는 것은 억압된
충동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본능적인
충동이 모든 변화를 낳는다.
본질은 없고,
있는 것은 변화하는 본질이다.
아니 변화가 본질이다.
(김현의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中)
아름다움을
못 느끼겠다면 명료함이라도 확인해야겠다. 추론해 보자.
풍경이 덧칠되고 변한다고 하는
것은 말하는 주체를 초월한 시각이다.
듣는 주체도 아니다.
(말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논조도, 의미도 바꿔가며 장면을 연출하겠는가?) 제3의
시선으로서 풍경을 끌고 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도 아니고 듣는 사람도
아니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빛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색깔이 변하듯 변한다”고 한다.
빛의 색깔이 변하는 것이지 물의
성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빛과 물의 관계는 확실하지만
화자와 해석자의 관계는 어떤가.
풍경이 인격이 된 이상(해석자도
말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즉시즉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풍경이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신'과
같은, 관조하는
시선으로 느껴진다.
불안하다.
어떻게
읽어 들어가야 아름답고 명료하다고 느낄 수 있을까. 더 노력하자.
그래,
작가의 시점으로 보자구.
어떤 작가가 글을 발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요란하게 논평하고,
이리저리 글을 해부한다.
배설하듯 쏟아내는 일련의 비평들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나면 글은 초라하게 흔적만 남긴다.
욕망의 찌꺼기로 재조합된 요상한
형태의 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애초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지만 이제 그마저도 확신하지 못한다.
글도 흔적이고 비평도 흔적이며
작가도 흔적이다.
4. 아무래도 어렵다
"아름답고 명료한"을 찾지 못하고 또 날이 샜다. 좋은 글이란 그저 '마음에 흡족한'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권위를 인정하고 그렇다고 일단 믿고 봐야 하는데, 그런 모습은 영 내가 아니다. 고집과 거칠음을 어찌 대면할 것인지 모르겠다.
말은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다루는지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설레게
다가올 수도 있고 혐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대화로 오가는 의미도 종결되지
않고 대화 후에까지 다른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
말의
실체는 없지만 있다.
말 이후에 말 이전과 다른 지점이
물리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말들은 형체가 없지만 강한 물리력이
있어 구조적이기 때문이다.
말들은,
일상의 대화는 그저 흐르지만- 일상의 총체- 삶을 이룬다.
흔적이 아니고,
각기 다른 장면의 연속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