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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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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70년대는 사라진 망령이며, 짚어야 할 역사적 기록일 뿐이었기에, 단 한번도 반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너무나도 뻔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배부른’ 나라 만들기는 독재를 위한 허울좋은 명분으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기고 허기졌으며, 또 많은 사람들은 울분 속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그 고난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경제적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았다. 국가경제의 규모가 더 커질수록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차이는 더 심각해졌을 뿐이다. 적어도 배고파 쓰러지는 사람은 없으니…하면서 애써 위안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누구를 밟고 일어서야 했는가. 너무 잊고 사는 것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표면적인 민주 사회의 행진이, 파업과 시위가 사라진 거리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착각이 지배할수록 경제적 부정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의를 막는 것이 파국적 상황인지, 평화로운 침묵인지 따져 물어야 할 때다. 사회 정의를 경제논리로, 국가폭력으로 눌렀던 과거는 경제적 부정의를 정치적 파국으로 덮으려 하는 현실을 만들고야 말았다.


애덤 스미스는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 고 했지만, 지금 경제현실은 부자 한 명을 위해 필요한 가난한 사람 수가 얼마일까 짐작조차 어렵게 만든다. 경제적 재분배, 생존권의 문제를 전방위의, 최우선의 문제로 배치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배부른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어서인가. 끊임없이 먹고도, 채 먹지 못한 식량을 주렁주렁 채워 담아도, 여전히 허기진 사람들이 갇힌 성城벽은 무엇으로 허물 수 있을까. 필시 그것은 삶에서 ‘부채의 문제’를 엄중히 대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삶을 얻었는가? 왜 나는 배고프고, 불안한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묻는다.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그리고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는 10퍼센트는 늘 배고프다.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 프리카리아트에게 경제 불황의 충격은 삶을 해체할 수준에 이르지만, 0.1%의 최상위 부유층은 (여전히) 매일 수십 억원을 벌어들이며 부를 증식해간다. 그들의 호황이 트리클 다운으로 이어졌는가? (trickle down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경제 이론) 국가의 평균 임금 수치가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를 상회할 때 최저 임금은 얼마이며, 그 숫자는 어떤가. 이미 ‘평균치’는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니다. 다분히 공격적인 바우만의 질문을 다시 상기하며, 가난에 덧붙여진 편견과 위선을 바로잡아야 한다.


더구나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1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권리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세계 인구 30억 명이 하루 2달러로 정해져 있는 빈곤선 아레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지위, 능력, 자격, 보수 등이 차이나는 것은 당연하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와 사회의 안녕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기여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거짓된 믿음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은 어느 부분에 먼저 칼을 대겠는가?

충분히 오래 지속된 불평등은 감지하기 어렵다. 평등을 정의하거나 실행하는 문제는 경험치가 미약한 인류에게 어려운 일이다. 삶을 파괴시키는 가혹한 조건들, 추악한 세력들로 가시화되는 불평등의 문제를 역추적하며 그 날을 꿈꿀 수 있을 뿐이다. 바우만은 부자연스러움에 익숙해진 개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현실적’이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여러 세계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규정할 세계에 살면서도 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존재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바우만의 질문에 다분히 섞여 있는 ‘불평등을 기꺼이 감수하는 대중’이라는 전제는 여전히 까칠한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바우만의 질문을, 의문을 강박적으로 묻고 되물어야 한다. 자신에게, 사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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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인간 - 인간 억압 조건에 관한 철학 에세이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지음, 허경.양진성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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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지난 몇 년간 집안 폐인으로 떠돌면서 자주 이렇게 주절거렸습니다. 벽을 보고 읊는 거지요. 지적 신뢰에 기반한 공동체는 불안 그 자체입니다. 불안은 그 자체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겠지만, 지적인 불안은 파국일 뿐입니다. 지적-신뢰 공동체는 정보와 경험의 격차로 인해 늘 비대칭적인 채무관계를 발생시키고, 채무 불이행은 권력을 강화시키게 되곤 합니다. 그래서 늘 묻지요. 공동체가 채무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채권채무, 의무와 죄의 청산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다면? 사회 불평등을 완화/해체할 수 있으려면 어떤 삶의 증거들이 필요할까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신성한 말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장 크고 황당한 채권채무관계를 자연스럽게 주입시키는 억울한 주장아닙니까. 신생아는 사랑과 순수를 상징하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아주 작은 위해爲害도 가할 수 없는 ‘보호대상’이지요. 부모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생명체, 그 자체에 경이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지상에 없었던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한 것이지요. 그런 아기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는 것은, 위대한 신의 이름이 아니면 감행할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아기는 무능력하지만 또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절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 타인에 의해서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존재지만, 그것을 죄라 말하지 않습니다. ? 어째서요? 아기는 무궁한 가능성이며, 미래이며, 완전한 세계일 수 있습니다. 근대의 인간들은 이렇게 아기라는 생명체를 불확실한 세계에 확실한 존재라고 믿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경이감이 옳은 감각이었는지는 근대 이후의 아동-개인의 탄생을 통해 낱낱이 증명되는군요.


무능력한 상태에서 자립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온갖 지적-신뢰 공동체 프로세스가 작동합니다. 이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원죄와도 같은 채무관계가 끝없이 생성되고 희석되고 강화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제 태어난 아기가 진 빚은 얼마인가요. 어떻게, 무엇으로, 누구에게 갚을 수 있을까요, 10년 후에, 30년 후에는 완전히 가능한가요. 빚에서 해방될 수 있나요. 빚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부채인간의 운명은 주체라는 멍든 영혼을 만들기에 충분하군요.


2. 화폐의 기원은 상품 교환과 무관하다는 증거들이 있습니다. (가족, 사회, 종교, 정치) 세계는 인간 간의 위계를 만들면서 확장합니다. 불균형을 만들며, 무수한 채권 채무 관계를 만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의무를 짊어진 인간에게 채무 관계의 청산은 공동체에 대한 응답의 증표가 되는 셈이지요. 화폐 경제의 시작점을 이렇게 정치적, 종교적 의무의 계산과 청산을 위한 수단에서 보는 시각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습니다.

 

결국 하나의 공동체 혹은 사회의 주요 임무는 무엇보다도 우선 약속할 수 있는 사람, 채권자-채무자 관계에서 자신을 보증할 수 있는 사람, 즉 부채를 갚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에게 부채에 관한 기억을 구성시키고, 망각에 反하는 의식과 내면성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기억, 주체성 및 의식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부채의 의무 영역 속에서이다.


슘페터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채권 채무인 신용화폐를 창조하고 소멸시킬 권력을 은행이 가지면서 나타났다고 합니다. 실물 경제와는 별도로 채권 채무 관계를 생성, 팽창, 수축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역동성과 탄력성을 만들어낸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최근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국가를 넘어 천문학적 규모로 불어난 채무를 일시에 파괴해줄 우주적 힘이 생기지 않는 이상 대책이 묘연해 보인다는 말이겠지요.   


대안적 경제학의 오랜 전통이 이야기하는 대로,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철학적 인류학과 사회학의 관점에서 제기하듯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이 상품 교환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부채의 계산과 청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라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지구적 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소위 디레버리징의 과정을 기계적이고 몰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화폐’라는 신용창출의 기원을 비대칭적인 인간 관계들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는데 동의한다고 해도, 상대적인 관계에서 주체를 설명해 내기에는, 턱도 없이 힘이 달리는데, 오히려 근대는 이 과정을 수월한 것인양 치장해왔습니다. 조상과 후손, 신부와 신도, 남자와 여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이런 연결보다 더 애처로운 꼴이 주체와 객체, -, 개인과 세계의 관계입니다.

 

3. 오랜 시간 죄와 죄책감, 불평등에 집착해 왔습니다. 이미 너덜해진 주제의식에 다시 숨을 불어넣어준 책이 『부채인간』입니다. 묘한 긴장 속에서 읽었고, 또 재빨리 지워지길 바랐지만 어림없더군요. 여러분도 직접 읽어보길 권합니다.


이제 자연과 상품의 이동은 권력관계의 파생에 좌우됩니다. 특정 자본가가 늘 이기지도 않으며,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가 주된 관계도 아닙니다. 채권자와 채무자 구도로 불황기의 손실은 사회화되고, 호황기의 이윤은 사유화된다고 합니다. 공공영역을 대표하는 주체의 형상이 부채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부채는 현대경제의 주체적 동력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주체 패러다임은 억압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약과 신뢰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 단 한 푼도 상환하지 말라고 주문합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권력장치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부채는 사회 전체에 대한 ‘공제’ 기계 혹은 ‘포식’ 기계, 포획 기계이자, 거시 경제의 규정을 만들고 관리하는 도구인 동시에, 하나의 소득 재분배 장치이다. 부채는 또한 집단적 개인적 주체성의 ‘통치’ 및 생산의 장치로서 기능한다.

 

부채 경제는 매우 정치적인 목적을 갖는다. (상호부조, 연대, 협력, 만인을 위한 권리 등과 같은) 집단행동의 무력화, ‘임금노동자’ 및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조직, 행동 및 투쟁 기억의 무력화를 보라. 대출(금융)을 지렛대 삼아 이룬 경제 성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갈등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보조, 은퇴 연금, 직업 교육 등을 자신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한 집단적 권리로서 바라보는 주체들과 마주하는 것은 ‘채무자’ 소규모 자산가, 소액주주를 통치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이다


라자라토가 제기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은 불안 속에 잠재해 있던 저항-무의식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공명이 있습니다. 이제 할 일은 더 철저하게 부채와 죄책감의 기원을 확인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배격할 주체-객체를 바로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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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유토피아 - 좋은 사회를 향한 진지한 대화
에릭 올린 라이트 지음, 권화현 옮김 / 들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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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위해 정의를 팔았습니까? /그걸 어찌 알겠어요. 밥은 보이지만 정의는 보이지 않는데요./ 당신이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는 사이 이 사회는 더 병들고, 사람들은 죽어갑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런가요, 방금 먹은 밥과 김치 몇 조각, 된장국이 훔쳐 먹은 것이었다는 거군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입니다! 계몽이 다시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누가 사회정의를 바랍니까, 누가 사회변화를 이끌어 갑니까?/ 병든 세상을 낫게 한다는 거군요./ 못 믿겠지만 낫기도 합니다. 역사가 그걸 증명하잖습니까!/ 글쎄요, 두 번째 기회를 찾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은 아는데요./ 이래서 계몽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노예 근성을 버리세요. 저주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희망입니다! / 희생이라구요? 해가 기우는군요. 저녁밥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아직 모르는지라. 그건 제겐 너무 먼 이야기라오./ 당신은 채찍이 골수를 뚫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말과 똑같아 보입니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할 것 같군요./ 종국에는 … 도착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랄 뿐이라오.


수천년 역사에 이름만으로도 혀를 찰 독재자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면서도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비겁한 자들이었습니까. 권력에 아부하며 독재에 가담한 자들은 또 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약자와 무고한 자들은 또 누구입니까?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으며, 영원하지도 못했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었나요. 당신은 어떤 삶을 원하는지요. 또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을까요. 무고한 자의 유토피아는 대중의 유토피아와 얼마쯤 같을까요.


비참한 최후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독재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악이 쓰러지고 스러진 그 자리에 강제와 폭력은 교묘하게 부활하고, 비겁한 자, 악한 자, 약한 자, 무고한 자들이 강박적으로 출현합니다. 모든 것은 반복과 각인으로 역사라는 기계에 새겨지지만, 고통은 떠돌고 있습니다. 굴욕스러운 글자를 새긴 채로 역사 너머로 너울거립니다. 불행의 본질이 생존의 위협이었는지, 오명의 굴레였는지 밝히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사에 실눈을 뜨면서 말입니다.


폭군을 저지하고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동력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어쩌면 말입니다. 억압과 폭력을 저지하는 힘은 그것을 만든 힘과 비슷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저항하는 일, 예방하는 힘, 대안을 수립하는 힘은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동력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산업자본이 권좌를 금융자본에 내준 지난 시절을 돌아보십시오, 마냥 헛소리만은 아닐 겁니다.


금융위기는 불패를 모르던 자본주의에 위기로, 파괴 내지 해체의 신호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제도적 변화가 필요했고, 혁명적 형태의 경제체제가 요구되었습니다. 신문은 날마다 위기를 크게크게 부각시키기 바빴고, 새로운 제안들은 제각각의 이상을 머금고 위기에 빠진 경제주체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자리는 국가의 옷을 입은 자본이 다시 자리잡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은 이런 상황에 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강력하고 번드르한 칼날을 휘두를 빅브라더가 늘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안정과 평화라는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먼저 혼란과 불확실성을 견디고 수용해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수확물들이 썩어갈 때까지 건들지 않아야 가능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리얼 유토피아』의 저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효과적인 투쟁 방법을 권고하지도 않고, 정치적 호소력을 가질 의제를 조언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다만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성격을 명료히 하고, 진보세력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는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일종의 “분석틀”을 창조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내 연구의 이론적 좌표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마르스크주의”라는 용어는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전진하는 과학적 이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의를 암시한다. ~ 다른 전통들—게임이론, 분석철학, 페미니즘,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의 다양한 조류들—에서 나온 요소들이 내 경험적 • 이론적 연구의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경우, 나는 이 요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수입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희석시키기보다는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믿는다.


라이트는 소련이 해체되고 “역사의 종말”이 선언되던 1990년대 초에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라이트의 관심사는 ‘착취’에서 ‘계급’,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변화하는데요. 사회권력과 급진민주주의를 그 중심에 놓고 대안을 탐구합니다. 자본주의를 작동하는데 착취가 작동하지만 자본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축이라는 라이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부정적/ 적대적 현실세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도 보여집니다.

 

마르크스주의자 라이트가 “꿈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이고 유토피아적 꿈에 탐닉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 실제 현실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민주정치를 중요하게 배치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며 그 ‘전통’ 안에 묶어둘 몇 가지 기준을 덧붙입니다.


1. 사람들에게 해악을 가하는 한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진단과 비판

2. 계급적 지배 • 착취 관계들의 체계로서의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

3.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

4. 자본주의를 재생산하고 자본주의의 변혁을 가로막는 메커니즘들에 대한 관심

5. 의식적 투쟁이 의도되지 않은 사회변화의 누적 효과들과 상호 작용해서 변혁이 일어난다는 이해


라이트는 국가와 경제에 대한 사회권력 강화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제대로 된 민주화 과정이 계급구조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라이트의 주장은 노동계급이 더이상 종속되지 않을 유일한 길인것도 같습니다.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사회정의와 정치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을 힘차게 확대하며 자본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대한 사회권력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대단히 진지하게 취급한다는 것을 뜻한다. 넓고 깊은 사회권력 강화는 우선 국가권력을 시민사회에 근거한 사회권력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개념의 통상적인 의미이다. 민중에 의한 지배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에서 나오는 권력이 국가에 근거한 권력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권력 강화는 국가에 대한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경제권력이 사회권력에 종속됨을 뜻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이 더 이상 생산적 자원이 배분과 사용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아마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사회권력 강화는 시민사회 자체를 민주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폭이 좁은 결사체와 폭이 넓은 결사체들이 민주평등주의적 원칙들에 따라 조직되고 이러한 결사체들이 두터게 형성된 시민사회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통제하는 노동계급의 탄생이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라이트가 발견한 네 종류의 틈새에서 급진적 사회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읽혀지기도 합니다.

 

1. 낙후된 도시였던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 시티는 부패와 정치적 후견 관행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원을 재배치 하는 시민권력을 탄생시킵니다. 참여적 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합니다.

2. 反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위키피디아는 위계적 통계가 아닌 수평적 호혜성의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3. 몬드리안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복합기업으로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입니다. 위계적 권력관계와 자본주의적 재산관계가 필요하지 않으며, 비노동자 소유자 없이 광범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합니다.

4. 합법적 시민권을 가진 거주자는 무조건적 기초소득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빈곤선” 이상으로 살기 충분한 월간 생계비를 지급받습니다. 노동의 수행 여부나 기타 형태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보편적 기초 소득의 적용은 反빈곤 소득 지원 프로그램, 복지 정책을 제거함으로써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기여 소득을 허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얼마 간은 순 수혜자로, 얼마 간은 순 기여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라이트는 4년 동안 18개국을 여행하면서 대학에서 학술회의,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여합니다. 동료 학자나 아내와도 자전거 여행이나 도보 여행, 산책 등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했다고도 합니다. 잘 듣는 사람은 많이 본다고 할까요. 리얼유토피아를 주장하는 라이트는 현실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입니다.

 

그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일단 의심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시민권력은 부정의를 제거할 단일한 힘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위키피디아가 기부금으로 운용되는 지식의 유통 채널만은 아니라는 것, 소유자가 된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경영을 배격할 것이라는 것, 복지 대신 기초 소득의 보장이 소외와 차별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공상 대신 실질적인 이상을 보여주는 라이트의 연구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이 모든 미혹이 걷힌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만.

 

 

상당한 사회학자 라이트의 저작을 읽고 난 리뷰의 시작치고는 감상적이며 남루합니다. 너덜거리는 일상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참된 자유라고 강조하며, 인간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다원적 모델을 제안하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지 못하다니요. 멈춰 버린 까닭에 이탈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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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표현된 불행 - 황현산 비평집
황현산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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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의 상대말을 찾다 헤매고 있다불행은 사태이며 인식이지만…… 반추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불행은 온전히 주관적인 것도 아니며, 객관성만으로도 지탱하기 어렵다. 주객관계를 넘어서지만 정작 초월적이라고도 할 수 없다. 오직 세계에 대한 진술에서만 힘을 얻는 요상한 개념이(이라고 생각한). 사태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도록 조종하는 ‘불행’이라는 번역의 기제는 행운이나 행복과는 다른 차원에 머무른다. 무엇이 혹은 누가 ‘불행’인지를 혼란스럽게도 만든다. 미지에서 캐낸 비극적 정서-불행은, 오늘 같이 흐린 날, 다시 펼쳐 들기 손쉽다.


시를 만나는 일이 드물었다. 읽는 일이 드물고, 적는 일은 더 그랬으니 당연하겠지. 시에 마음을 담지 못했던 이유는 모른다. 간혹 국어시간, 시와 그 해석을 일부러 외워야 했었던 일이나, 그 짧은 몇 줄로 궁극을 담아내는 이름모를 시인들에 대한 반감이었을 수 있겠다. 굳이 그 이유를 따져물을 만큼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알지 못했기에 좋아할 수도 없었던 것인가.


그럼에도 시 속에서 어떤 존재감이 큰 덩어리들을 만나기도 했었다. 한 아해가 오고, 또 다른 아해가 오고, 제 삼, 제 사, 제 오의 아해들이 질주하는 ‘말’들로 채워진 시도 그렇다. 유명한 그 구절을 어디서 읽은 것인지 아니면 들은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 단순한 문장의 반복이, 살아간다는 것이 서러웠던 어느 날, 내 안에 너무 많은 놈들이 활개치는 것을 낱낱이 들여다봐야 했던 그런 날 무엇으로도 표현해내기 어려웠던 그 몹쓸 감정들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한 놈이 있고, 또 한 놈이 있고, 제 삼, 제 사, 제 오의 놈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음이 괴롭고 무서웠던 날 그 시가 불현듯 기억이 났었다. 그리고 마치 연결된 동작인 것처럼, 터질것 같던 가슴이 눈알 속으로 모이는 듯하더니, (물방울이 되어) 일시적으로 사라져버렸었다.

만났다고는 했지만, 그건 아마도 시 자체가 아니라 ‘나’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 시는 아직도 내게 친근한 존재는 아니다. 아는 체 인사를 건넬 수도 없다. 그 시는 여전히, 레드빛 카펫을 밟고 있을 것이 분명한 머나먼 존재다. 뭔 얘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시작하는가.


시를 모르니 시 비평집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인데, 제목때문에 계속 마음이 쓰였었다. 잘 표현된 불행이라니. 어색했지만 호기심을 일게도 했다. ‘불행’이 있는데 ‘잘’ ‘표현된’이라니. 불행을 관전하는 작자作者인가. 어떻게 해야 불행이 잘 표현될 수 있단 말인지. 표현된 것은 불행인가, 표현하는 사람인가? 불행에 대한 태도인가. ‘잘’이 수식하는 것은 ‘표현’이니, 이 제목의 강조점은 ‘불행’ 자체는 아닐 것이다.


잘 표현된 불행』은 불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보다 불행을 자신과 분리시키려는 자가 찾는 책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얼마간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불행을 잘 표현해서 행운을 쥔 문학가! 도서관에서 검색할 때마다 여전히, 아직도 ‘대출중’인 것을 확인한다. 인기가 많은 책이 분명하다. 대기 시간이 지속될수록 분해하고 싶은 욕구는 더 커진다. 그건 오기에 불과하지만, 모난 자가 일상을 지탱하는 요령이다. 그렇게 건방지고 모호한 헛소리라도 쓸어내야만 하루를 지탱할 수 있다.


기다리며 몇 가지 짐작을 한다. 하나는 이렇다. 불행한 사태는 삶의 한 축이다. 그러나 대부분 불행이라고 느끼는 장면들은 ‘만들어진’ 불행, 가짜일 뿐이다. 잘 만들어진 불행, 멋지게 표현된 불행은 왜곡이고 망상이며 현실이 아니다. 가짜 불행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 젖어 있는 현실이 진짜 불행이라고 고발한다. 개인적 경험의 질박한 한계, 사유의 불충분으로 생긴 현실을 낱낱이 펼쳐 해체시킨다.


(치유를 원하는 세태에) 대중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은 불행을 ‘표현’하라는 것에 관한 계발서/혁명서일 수도 있겠다. 시의 세계는 고통 너머에 있다. 현실의 고통에서 또 다른 현실을 보며 그것들을 초극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시인/비평가는 암담한 현실의 동아줄이다.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온다면 계속 우는 아이로 남을 것인가? 불행이 넘친다. 감당못할 불행을 견디는 동아줄을 찾는 것이 연대이며, 예술이다.


생각하기 싫은 짐작은 이런 쪽이다. 죽음과 소외, 고통이 난무한 상황을 실감나게 들여다보게 해주고, 밀착된 언어로 얼마나 끔찍한지, 얼마나 참담한지, 운명을 잘 설명해주는 책 말이다. 적나라하게 잘 묘사된 책. 잘 표현’된’의 느낌은 그랬다. ‘된’이라는 수동태를 취함으로써 불행 자체가 사람과 분리되어 격상되어 버리는 느낌이다. 혼을 빼고 불행을 관조하는 기계와 같고, 불행한 타자가 우글거리는 장면을 참관하는 증인이다. 당장에는 쓰라린 공감을, 종국에는 고통과 불행을 회피해야 할 대상으로 각인시키며, 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스탠스를 취하게 하는. 불행한 현실을 잘 보여주려다 외려 그 현실을 덮게 되어 버릴 수도 있겠다고 말이다.


마침내 잘 표현된 불행을 열게 되었다. 길게 이어갈 요량으로 ‘읽고 받아적는 길’을 택한다. 예상과 다르다. 바타유의 존재론적 효과로 시작된 첫 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괴롭기까지 하다. 여러 시간을 같은 대목을 반복해서 읽기만 한다. 간신히 몇 장을 옮겨적는데, 그 중간에 이런 낙서를 휘두르고야 만다. “힘들다. 지루하고………불행한 현실을 ‘잘’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은 이래서 불행입니다 라고만 읽힌다. 현실과 이론을 잇는 ‘표현’들의 어색함, 거부감이 싫다. 과정과 결론이 자꾸 뒤엉키는 것도 ……. 젠장! 나는 왜 이모양인가. 재주도 의지도 용기도 없으면서 책 한권 끝까지 읽어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거냐. 멍청한 년. 쥐뿔도 없는게 타박만 만들 줄 안다


여기까지가 작년의 일이다. 잘 표현된 불행은 어떤 질문도 응답도 없이 덮였다. 아마도 다음의 대목에 이르러서 밀어냈었지 싶다.


젊은 시인들이 변방의식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이 땅이 행복하고 풍요로워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 불행이 우리의 불행이 아니라 이 다국적 자본의 시대에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불행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며, 그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려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서구 편향’ 따위의 말은 이제 통용될 수 없으며, 해체니 일탈이니 하는 무의미한 말로 그들의 작업이 환원될 수도 없다. (68)


젊은’ ‘용기’는 ‘훌륭하게’ ‘통용’되겠지만, ‘변방’의 ‘무분별한’ ‘무의미’는 사라지지 않고 일상에 달라붙어 있다. 이 땅은 전혀 풍요로워지지 않았는데, 불행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고 있는데, 젊은 용기는 어떻게 불행을 “훌륭하게” 표현하게 되었을까.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무분별한 소비자가 되어 어두운 시대를 기어다니는 무의미한 시간들 사이에서, 젊은 시인은 어떻게 의미를 찾아 낼 수 있었을까. 젊은 시인의 문학적 소재가 되어 떠돌다 사라졌던 무의미한 사건들은 지금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까. 문학이 부르는 것은 체계와 운명인가, 사람인가. 시가 의미를 찾아내는 장치라면 모르는 게 좋겠다. 소설이 가치를 분별하는 무대라면 보지 않는 게 낫겠다.


한 해가 지났다. 며칠동안 레비나스의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을 옮겨적었다. 철학 강의록이었는데 한 장에 한번씩은 눈물이 났다. 감정에 호소하는 글이 아닌데도 연이어 눈물을 쏟았다. 벌건 대낮에 멀건한 정신으로. 아무래도 내 몸뚱이에 ‘불행’이 각인되어 있나부다. 불행, 불행은 도처에 스며 떨어질 줄 모른다. …… 잘 표현된 불행을 다시 펼친다. 기대도 짐작도 없이 읽고 쓴다. 한달음에 몇 장을 누빌 수 있었다뛰어난 문학비평이, 훌륭한 예술론이 자리잡고 있다. 작년과는 다른 출발이었지만 여전히 불만스럽기는 하다. 이것은 글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일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쓸 때 그는 자기 언어를 은유나 상징으로 보지 않는다. 그가 보는 것은 현실이며 그는 그 현실을 산다. 이를테면 이성복은「남해 금산」의 첫대목에서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라고 읊는다. 이 시구를 다음과 같은 말로 풀어놓으면 아마 이해하기 쉬울지 모르겠다. ‘사랑하던 한 여자를 잃고 내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다. 그 여자는 돌이 된 내 가슴속에 박혀 있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 질이 다르고 기운이 다르다. 풀어놓은 글에서 ‘돌처럼 굳어졌다’거나 ‘그 여자가 굳어진 내 가슴에 박혀 있었다’는 말은 절망과 불모의 상처를 표현하는 수사적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이성복의 돌은 현실의 돌이다.(142)


「남해 금산」은 해설해 놓은 말과는 정반대로 읽혔지만, 그대로 따라가 보기로 하자. 로버트 씨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절망에 빠진 나머지 닥치는 대로 일상을 부숴나갔다. 그의 생에 더이상의 환희는 찾아올 것 같지 않다. 로버트 씨는 잔뜩 취한 채 시를 쓴다. ‘내 마음은 돌처럼 굳었어요/ 돌이 된 내 마음속에 제인이 박혀 있어요/ 누구도 빼낼 수 없어요.’  이성복 시인의 시도 다시 보자.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경험으로 생긴 이별의 감정에만 충실한 로버트 씨는 돌이라는 사물에 모든 걸 의지한 채 현실을 슬퍼한다. 로버트 씨는 “절망과 불모에 대한 낡은 수사법 하나를 던져놓”았지만, 이성복 시인은 “절망과 불모 그 자체인 바윗덩이 하나를 세워놓”았다. 이 슬픔과 절망은 누구의 현실인가. 낡은 수사법으로 세워진 돌덩이와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바윗덩이! 발길에 채이는 보잘것 없는 돌덩이를 경멸하는 말은 분명 아니겠지만, 현실과 수사는 이미 상징체계 안에 두터운 가치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어쩌면 모든 해석은 권력이고 폭력이다.

 

누구나 해석의 칼날을 휘두른다. 모냥 당하기만 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역동적인 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동질적인 현실이 그 수사법에 의해 결을 달리 한다는 것은 참기 힘들다. 이 이별과 절망이 로버트 씨의 것인지, 시인의 것인지, 모든 이의 보편성을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많은 불행의 위계를 파악할 때 (질적) 차이를 준거로 들이미는 것은 상당히 억울한 일이다.


 제인의 사랑()이 사라졌다. 로버트가 절망한다. 그뿐이다. 해와 달에 의해, 물과 바람에 의해 녹아 스러져 모래가 되고 흩어진 사랑이 돌이 되어 다시 출현하는 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을 노래하는 로버트는 실재한다. 로버트의 노래는 그를 위로할지 모른다. 사랑은 거품이라고. 그러나 이는 모두 사라진 사건의 사후(後)일 뿐이다. 시도 거품이다. 그뿐이다.


이 책에는 아름다운 시인들과 작품들이 자주 인용되는데, 김수영 시인과 이상 시인의 시 세계는 특별하게 읽힌다. 이 시인들의 언어가 가진 힘이 비평가를 어떤 감동으로 이끌고 있는 듯하다.

김수영은「절망」이라고 이름 붙은 수 편의 시 가운데 하나에서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이라고 썼다. 이 시구는 아름답다. 낱말과 선율이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분석하기 좋게 짜 맞춘 지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암담함을 말하면서 암담한 현실을 충전된 언어로 들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충전된 언어에서 발휘되는 힘이 바로 현실 위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현실이며,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라고 말할 때의 그 딴 곳의 바람에 해당한다. 비평은 시와 더불어 그 힘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144)


현실이 있고 또 하나의 현실이 있다. 관념은 과거의 족쇄이고 이미지는 현실의 감옥이라고 말한다. 암묵적 시 쓰기를 공모하는 현실을 용서하지 않았던 시인을 칭송한다.


'온몸으로 시 쓰기'의 본뜻'도 거기 있다. 지식체계에 복무하기를 거부하고 탈주의 모험을 감행하는 그의 시가 말끔하고 지적으로 숙련된 외관을 누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311)


비평가가 하고 싶은 말은 “김수영은 다른 방식으로 지적이”라는 것이다. 기성 문단의 영향을 받지 않고, 단편적 지적 구조를 답습하지 않는 참신함으로 새로운 심미감이 확장된다. 정신과 감각을 모두 사용하여 사소한 것까지 집중할 때 은유적 힘을 얻는 알레고리적 계기가 작동된다고 한다. 시인이 현실을 움직인다기 보다는 시가 가진 능력으로 현실을 움직인다고 말한다.


 비평가는 "아무리 난폭하거나 실망스러운 현실도, 아무리 조야하고 생경한 언어도, 그것이 인간의 마음과 깊고 감동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시가 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고 거듭 믿는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정신적으로 각성된 감성에 좌우되는 실천은 위험하다. 감성은 다듬어지는 것이며 여전히 마음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는가. 감동에 실린 난폭하고 생경한 언어는 또 다른 장면을 연출할 동력이 되겠지만, 감동의 생성과 소멸에 따르는 관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이 거래되고 정보력이 힘이 되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실은 늘 갱신되는데 아름다운 시는 그자리에 붙박혀 있다.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 보면 길이 만들어진다.” 나는 육사가 「曠野」를 쓸 때, 루쉰의 이 말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믿는다.(695)


시인은 비평가의 말처럼 다녀서 만들어질 새로운 길을 믿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늘 예술에 메마른 회한을 느끼는 것은, 배척을 배제한 새로운 심미감들이 길이 되어 다닐라치면 처음부터 있었던 길이었다는 것을 애늦게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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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사회주의를 넘어
앙드레 고르 지음, 이현웅 옮김 / 생각의나무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1. 잘 알려진 뭉크의 그림, 절규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두 명의 친구가 있다. 뭉크가 “피 같은 구름이” 뚫고 나오는 절망을 온몸으로 느꼈을 때, 오슬로의 피오르드를 함께 산책하던 친구들은 평온해 보인다. 두 손으로 감싸쥔 구겨진 얼굴 속에 노을이 반사되고, 둥그렇게 열린 동공에는 산책자들이 얼비춘다. 뭉크의 이 유명한 명화 <절규>의 완성은 자연을 뚫고 나오는 뭉크의 뭉개진 얼굴에서가 아니라, 노을과 일상을 즐기는 두 친구로부터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은가.)


2. 앙드레 고르는 사르트르에 의하면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다. 고르가 30년간 아내를 간호하다 함께 죽음의 길을 떠난 일은 세간에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 그의 나이가 84세였다는 점이 중요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가 평생을 자본주의와 현대정치를 예리하게 비판했고, 보편적 무능력 상태에서 벗어나는 주체를 열망했었다는 점에서 삶의 일관성을 오래도록 유지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앙드레 고르가 아내와 함께 맞이한 죽음의 순간은 ‘희망’과 ‘절망’이 일치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의 선택에, 그녀의 동조에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많은 시간을 ‘선택’ 하기 위해 쓴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또 선택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남김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요구하는 사회에 우리는 물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절망이 ‘선택의 중지’로 이해되기도 한다.


3. 고르가 아내에게 보내는 D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고 한다. 그 책을 따라 읽어볼 욕심은 앞으로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 고르라는 ‘남편’으로부터, D라는 ‘아내’에 이르는 메시지를 타고 흐르는 사랑에 기반하여, 고르와 D의 죽음의 순간을 연결해내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다. 그 연결지점은 그대로 두어도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는가, 아니 설명도 필요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일이 아니던가. (말하자면 개인 고르와 직업인/사상가 고르, 그 사이를 어떻게 분리-통합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각각의 인간은 현실을 긍정/부정하며 희망/절망을 쌓아간다. 그것들은 ‘선택’에 의해 완성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하는데, 인격과 의지로 부풀려지기도 하고, 무능력으로 내동댕이 쳐지기도 하면서, 그 모양새를 변형해 나가지만 결국 어떤 완결된 구조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4.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았다. 그렇게들 ‘진단’한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 스스로 해체될 줄 알았던 자본주의는 여전히 잘 굴러간다. 아니다, 더 악독해졌다고들 한다. “자본주의는 비정상적 상태에서도 계속 작동하는 법을 알며, 심지어 그 상태에서 새로운 힘을 끌어낸다.” 고르는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통해, 생산력이 발전하면 사회주의의 물적 토대가 완성될 거라는 예측이 오산이었다고 말한다. 발전하는 생산력 속에는 자본주의적 본성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생산력 발전이 탄생시킨 노동자 집단은 생산력을 소유할 기회를 점점 잃어가고 있고, 이해관계에 첨예하게 반응하는 임금노동자만 넘쳐 나게 되었다는 비판은, 노동계급의 해체를 상징하는 것인가.


노동계급이 정당을 조직하고 국가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에서 ‘시민 권력의 탄생으로 복지국가를 건설하게 되면’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노동은 사라졌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에 의해 힘을 잃어가고, 현실사회주의가 완전한 몰락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 우리사회는,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의 본성이 결코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끔찍한 불안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고르는 묻는다. “누가 혹은 무엇이 그 생산양식 • 생산력 • 생산관계를 변화시킬 것인가?”

 

5. 사회주의를 현실로 불러낼 계급이 사라졌다. 하지만 고르의 진단에는 여전히 혁명의 주체는 견디기 힘든 행위적 제약을 경험하는 계급-존재들이다. 자본에 의해 부정되는 노동관계 속의 주체성으로 인해 필연적 모순이 존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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