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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망不忘

어느 시대든 이러한 꿈을 향한 측면즉 어린아이 같은 측면을 가지고 있다이전 세기에 이러한 측면은 아케이드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그러나 이전 세대들의 교육이 전통 속에서즉 종교적인 가르침 속에서 그러한 꿈을 해석해준 데 반해 오늘날의 교육은 아이들의 기분전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프루스트가 하나의 전례가 없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속한 세대가 집단적 기억을 위한 신체적자연적 보조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이전 세대보다 더 가여운 상태로 방치된 채 고독하고 산만하며병적인 방식으로만 아이들의 세계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나는 곧잘 쪼잔한 일에 빠져들어 앞뒤 가릴 것 없이 묻곤 했다. 곤경에 이르고서 이제 그 버릇을 고치겠거니 하겠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이른바 '싹수가 노래' '싸가지'도 요령도 없는 종자였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대인관계가 없어, 그 대꾸들은 책을 향해 날아가고, 침묵 속에서 대갈들의 기미만 읽을 뿐이다. 공들여 돌이키면 조잡한 일이었고, 들이댔던 질문들도 특정 인물에 닿지 않았지만, 크고작은 파란을 일으켜 제 신세를 구부려뜨려왔던 것이다. 그 불망, 몇 개의 기억들을 불러와 <주체와 구조-사목 권력의 양상>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불충분하더라도 제 짝이 맞춰지고, 너덜거리고 바래버린 상태로 '형태를 잃게' 되었으면 한다.


국민학생 어디쯤, 《양치기 소년》을 수업시간에 들었다. 소년은 양을 지키는 일을 한다. 늑대가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소년은 어느 날 늑대가 나타났다고 소리쳤고,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왔다. 소년의 거짓말이었다. 그 후로도 양치기 소년은 또 다시 거짓말을 하고, 마을 사람들은 지쳐갔다. 그러다가 진짜 늑대가 나타났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힘껏 외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저 놈이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양들은 늑대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아주 짧은 이야기로 듣고나서, 나는 그 소년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급하게 캐물었다. 소년이 마을에서 쫓겨났나요, 감옥에 갔나요, 마을사람들은 왜 소년을 도와주지 않아요? 왜 거짓말을 했대요? 내 다급한 재촉을 가뿐히 노려보고 난 뒤, 그 노련했던 선생은 거짓말 하지 않기, 어른들 말 잘 듣기, 약속 지키기 등의 훈화를 이어갔을 것이다. 나는 양치기 소년을 쉽사리 잊을 수 없었다. 밤낮으로, 마을 밖에서 홀로 양들을 돌봐야 하는 소년은 매일 거짓말을 한다. 이야기는 너무너무나 불완전했다.


어떤 밤 양치기 소년의 꿈을 꾸었다. 거적을 두르고 작대기만 가진 양치기 모습만 비추기도 했으나, 대개는 사연을 갖고 꿈 속을 찾아왔다. 내 꿈 속에 나타나 호소하던 소년은 거짓말 했던 걸 숨기지 않았다. 마을이 떠들썩하게 잔치를 열던 날, 등성에 서서 지켜봐야만 했던 소년이 일부러 심술나고 질투심에 가득 차 외치면서 거짓말이 시작되었단다


어떤 날은 실제로 나타났던 늑대들이 마을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나는 그날 꿈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게, 온힘을 다해 “저기 늑대가 도망가고 있어요 보세요 저기요저기” 외치는데 말소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비명소리만 내다가 깨어났었다


더러 다친 양을 도와주려고 마을 사람들을 꾀어 낼 거짓말을 했다 한다. 아주 가끔은 너무 심심해서 늑대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외로움을 참을 수 없어 늑대가 출현하길 바랐다는 마음을 전하는 소년이 불쌍해 찔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꿈이라는 것도 잊고, 성심껏 대꾸를 해주곤 했는데, 양들과 친해지라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놀이같은 걸 일러 주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혼자 보내지 말았으면 했고, 실제 일어난 일 마냥 늑대의 출현을 알리기도 했다. 양치기 소년이 거짓말을 멈출 수 없었듯이 나는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꿈 속에서조차.


머리통이 크고 나서는 양치기 소년의 꿈은 더이상 꿀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불쑥 깊은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학 책을 읽다가, 정신분석에 대해 배우다가, 페미니즘의 계보를 찾다가 문득 나타나 묻곤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이라면 양치기 소년/소녀에게 무슨 말을 할까. 그 불망의 꿈들은 무한 재현의 미디어, 이미지로서 정치, 이야기로서의 정체성이 범람하던 시대의 사소한 반영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공동체적 시선과 감각으로 양치기 소년을 떠올리지 못한다. 양치기 소년이 이솝 우화 속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집단적 결속과 사회화의 문제로 받아들였어야 한다. 개인을 내세우기 위해서 보편을 특수화로 안내하는 일관된 질서와 방법을 동원하려는 의지를 가졌어야 한다. 내면에 신이나, 위인, 민족이든 또는 스승을 지녔어야 한다. 인간의 길을 벗어나지 않을 준거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만이 원칙이고 자신만이 존재하는 땅에 자연이 생성될 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나의 문제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꿈 속의 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말을 걸지 않았다. 양치기 소년을 합당한 행동으로 이끌어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하는데만 전전긍긍했다. 따뜻한 보호 속에서 생활하고 싶음이 내가 가진 소망이었었나 보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보호가 그냥 올 리도 없는데, 마을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런 면에서 양치기 소년 읽기 매뉴얼의 문제는 나의 고질적인 병의 문제이다.


양치기 소년을 놓지 못하는 한심함은 종결을 두려워하는 시대의 영향도 있다. 어느 버전, 어느 시즌에서라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텐데 후속작을 계속 만들고 있다. 양치기 소년에 대한 변론이 비루하고 공황에 빠진 내 삶에 대한 변론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면죄부를 주기 위해 글을 쓰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가 도대체 뭐가 면죄부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나는 불안장애에 빠졌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


꿈으로 만났던 양치기 소년이 맹랑한 대갈만이 아니듯 이 글의 최후도 그러하길 바란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점은 사회를 불변항의 시스템이라 당연시했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대중이 아닌 '사회'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꿈 속의 양치기도 마냥 무시하기에 무겁다만약 질문을 바꿨다면 어땠을까 …마을 사람들이 보호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내 꿈 속에 선 양치기 소년은 반복적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불안을 조장하며 권력을 즐기는 종자가 아니었다. 늑대를 불러내 공동체를 와해하는 흑마술사도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때는 들판을 가로질러 잃어버린 마지막 양 한 마리를 찾는 '예수'처럼 결연하기도 했다. 양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사고를 치더라도 양의 안위를 걱정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불안장애 이전이다. 지금부터는 공황상태에 빠진 환자의 병상기록이라고 봐도 좋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양치기 소년 읽기의 마지막 매뉴얼을 낭송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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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어가는 1시간 끄적이기] 오늘은 6시 32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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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의 22일이 다시 시작된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필에게 23일이 22일보다 안도할 수 있는 날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필에게만 머무르는 하루가 문제다. 22일 하루만 넘겨보자!


영화가 말하는 이 판타지스러운 하루의 되풀이는, 과장스러운 표현이겠지만, 고상한 시간의 게임이다. 필이 넌더리를 내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 하루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 아는 것'을 담은 눈은 더이상 삶의 빛을 목격하기 힘들다는 법칙 떄문이다. 인간이 죽음 앞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허무 속으로 끌려들어가며 절망적으로 휩쓸릴 때 대지는 냉각의 시간이다. 만 년의 빙하 위에서 서성이게 된다.


과학의 진보가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 놓고, 다시 하루 월 년으로 묶어 놓았다. 한 사람의 일생은 연결되고 나아가는 시간의 합이며, 단단한 대지라는 위에 건축된다. 삶이 분모가 되고 하루는 n분의 1이 되었다. 인간은 충실하게 그 하루를 더해가며 성장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일은 간단하다. 22일 아침 6시 라디오 방송은 23일 아침과 다르다. 달라지는 것은 시간이고, 그 시간이 '흘러야' 꽃이 피듯 개화할 가능성이 피어난다.


과학의 시간은 때로는 n분의 2의 하루를 혹은 n분의 100의 하루를 구축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의 하루처럼 n분의 0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시간의 게임에 휘말리게 되며 잃게 되는 많은 것들은 잃어버린 0의 시간이 있다고 믿으면서 시작된다.


필의 시간은 대지에 묶여 더 나아가지 못한다, 흐르지 않는다. 묶여버린 인간의 시간은 블랙홀처럼 하루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버린다. 여관주인의 친절한 인사도, 따뜻한 아침 식사도,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도, 차갑고 상쾌한 대기도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버리고, 급기야 느낄 수가 없다, 감각할 수 없다. 필은 어떻게든 '하루'를 회복하려고 한다. 그 의욕으로는 시간의 마법을 풀지 못하지만, 친밀성을 확보하려는 욕망으로 쉬이 이어진다. 냉각된 대지 위를 서성이다가 언 손을 비벼 얼음을 녹인다. 택도 없이 얼음은 건재하겠지만, 비비는 손, 맞잡은 손이 있는 한 얼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비로운 시간 속에서 사랑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마법이다.


필의 결말을 좋아할 수가 없다. 사랑이야 인간에게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사랑이 블랙홀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의 블랙홀을 사랑의 블랙홀로 대체하며 처박힌 것은 무엇인가. 분모였던 n은 이제 분자가 되었다. 사랑이라는 무감각이 분모의 자리에 앉아 있다.


얼마 전 강남역 앞 탑 위에서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CCTV 폐쇄회로를 설치한 탑이라서, 그 크기가 너무 협소해서 놀랐다. 고행의 길로 노동자를 내모는 사회를 벗어나기가 이렇게도 어려울까 생각했다. 서글픔에 울컥하고 무력감에 우울해졌다. 눕지도 못할 크기에서 앉은 자세로 맞이한 오늘 '하루''내일'은 어떻게 다를까. 강남역 위에 유쾌하고 화려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나, 철탑 위 비닐막 안의 시간은 꿈쩍도 없이 단단히 되풀이되곤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시간이 분모가 되어버린 세계에서 농성장의 시간은 사적 온기가 허용될 수 있을까. 이미 분모가 무너진 후 0의 시간은 그대로 저 깊은 빙하 속으로 내달린다.


필이 그 하루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모두 알아내고 난 후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여유가 있었던 반면, 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라진 22일을 알 수 없다. 설령 필이 자신을 후려쳤더라도 필이 친근하게 건네는 인사에 감격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시간 게임, 이런 흐름은 그 시대, 변화의 곡선을 충실히 타고 있다. 시간을 이해하는 일이 존재와 장소와 질서를 이해하는 끄나풀이 되기를 바라며, 하나의 가정을 던져볼 것이다. 세 가지 결을 타고 갑니다.


마천루의 설계자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꾸밈 없는 언어』,

『에로스의 종말』,

사랑의 기쁨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자본주의적 이행과 연결하는『감정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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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떠들어보자. 지금 3시 14분, 4시 14분이 되면 무조건 종료한다.

메모를 하나 찾았다. 이것을 정해진 시간까지 붙들어 매자.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과 주관적으로 구성한 것들은 블랙홀로 흘러간다.

주체론은 세계를 분할 가능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장소로 안내하고 뒤섞는다.

자신이 세계이면서 세계가 아니라는 우회성이 살아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스포츠맨십'으로 단련된 육체, '선비정신'으로 조직된 일상, '종교적'으로 들어올려진 평판에 대하여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왜 병에서 건강을 추출해내야 하는가.


영화를 보고 남긴 쪽지다. 이것에 뼈대를 붙여보려고 잠시 줄거리를 떠올린다.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은 판타지해서 로맨틱한 영화다. 필은 부정적이고 건조하게 메마른 사람으로 보였는데, 직업이 기상캐스터라서, 대중을 상대로 소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처지여서 더 절망적으로 하루를 보내곤 한다. 영화의 배경이 봄을 알리는 소식을 전해줄 마못을 기다리는 축제가 벌어지는 지방이어서, 하얀 눈발이 날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고, 매일 똑같은 날이 몇 달이고 반복된다는 점만 생생하게 기억난다(즉 나머지는 정확하지 않다). 


3가지 방향에서 추리를 시작하기로 하자. 

1. 새로운 장으로서의 사랑

2. 시간의 영원성으로서의 허무와 부정

3. 수행성으로서의 사회


<변화에는 하루만 있어도 되잖아>

어제는 오늘이고 내일은 오늘이고,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배경에서 흡사한 방송을 진행해야 했고, 그렇게 의미를 잃은 일상을 보내던 필이 진짜로 그 하루에 갇혔다. 시간을 거머쥔 필이, 여느 사람이라도 그렇겠지만, 현란하게 그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만, 우리가 짐작하듯이 금방 시무룩해지곤 한다. 좋아하는 음식을 배터지고 먹거나, 싫어하던 친구에게 복수를 하거나, 금지당했던 반도덕적인 일들 또 범죄를 마음껏 저질러도 다시 눈을 뜨면 그 날이다. 


좀 이상한 일이지만 대부분은 공감하는 부분이다. 매일 놀기, 좋아하던 음식을 매일 배터지게 먹기, 매일 자유롭기 ... 이런 '쾌락'들은 반복을 통해서 가치절하되어 간다는 말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아서 몇 번 쯤은 신날 수도 있지만 계속 반복하다보면 이런 '양심' 같은 것들은 가치확대되어 간다는 말이다. 


여하튼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서 전환을 맞는다. 동료였던 리타를 사랑하게 되면서 필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하루의 회로에 갇힌 자유를 이용해서 리타를 마음껏 스토킹할 수 있었고, 리타에 대한 정보가 쌓일수록 필의 감정은 깊어졌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 연애는 거의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실패한다. 이 <<사랑이 실패하는 순간>>에 진짜 마법이 시작된다. 마치 마뭇이 겨울이 물러난 줄 알고 깨어나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하늘을 보고 다시 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전환이 시작된다. 마뭇이 되돌아간 시간, 그 시간은 여전히 겨울이지만 이전의 겨울과는 다르다.


필은 덤으로 얻은 시간을 마치 다시 반복되지 않는 듯이 보내면서 시간의 허무을 이겨낸다. 여느 날처럼 일어나 조금 더 진심을 갖고 사람들을 바라본다든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자진해서 돕는다든지, 심지어 싫어하던 자에게도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 일은, 마치 ~듯이 행동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를 실증하듯이 평온해지고, 그 결과 리타의 사랑을 얻게 된다.


피아노를 배우는 필은 그 실력이 늘어날수록, 연습을 통해 연주가 완성될수록 기쁨을 느낀다. 그런 '쾌락'은 몸과 마음이 함께 가는 것이며, 성장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와 피아노 선생님과 피아노 치는 자신과 피아노로 연주되는 곡이 모두 같이 '우리'가 된다. 마치 사랑이 그렇듯이 '언어'와 '관계'와 '세계'가 하나의 장에 머무른다. 


주체는 나를 생각하고 나다운 행위를 통해서 나를 입증하지 않는다. 행위를 통해서 '나'가 발생한다는 말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상투적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진리라고 느낀다. 


필이 사회적 인정을 얻게 된 것도 '사심없음'을 수행했기에 가능하다고 영화는 애써 말한다.


<사막의 물방울처럼>

나는 이제 조금 더 다른 쪽에서 영화를 바라보고 싶다. 영화의 제목을 한글로 블랙홀로 바꾸면서 말해지고 있는 '무의식'을 말이다. 필은 나만이 절망인 세상에 사는 인물이다. 곧 그 절망은 블랙홀인데, 모든 일상을 하나의 구덩이로 몰고가는 것 말이다. 벌써 15분이다. 1분이 지났다. 그만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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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20: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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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1 0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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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3 19: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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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6 2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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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 온 책> 장에, 눈에 띄게 접혀지고 낡아져 버린 상태로 있었다. 여러 사람이 다투어 읽다 간 흔적들이다. 호기심에 그 책을 꺼내다가 '부르디외'라는 것을 알고, 망설이지도 않고, 제자리로 밀어넣어 버렸다. 도서관 서가를 맴맴돌며 대출해 갈 책을 찾다가, 다시 돌아와, 꺼내든다.


지식인들은 특정한 사고범주와 정신구조에 사로잡혀 있는데, 특히 학계를 무조건 신봉하고 거기에 애착을 가집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 이런 애착이 정치적 애착보다 훨씬 더 심각한 왜곡을 가져옵니다. 저는 학계에 속한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해관심보다는 학구적 이해관심에 훨씬 더 좌우된다고 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접하는 사유대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나아가 사유수단을 제 것으로 만들 때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나마 아주 미미한 정도로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사유의 주체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결정요인들을 스스로 인식하는 한에서 자기 사유의 주체가 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사회학 말고도] 정신분석 등의 다른 수단들 또한 이 같은 인식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해 사람들이 보통 저를 해석하는 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부르디외가 위 인용구 속에서 짧게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아우라가 벗겨질 일은 없을 것이다. 부르디외가 효과이듯이 부르디외의 반대자도 효과다. 부르디외의 고독은 학문 장 안팎에서 상징자본이다. 이 무한한 벗겨내기 게임이 '사회'라면 누구보다 오래도록 학문 장에 거주할 사람은 부르디외일 것이다.


의식철학이 가정하는 보편적 상태를 비판하던 부르디외가 사유했던, ... 감각적 이성의 세계(場)에 대한 거부반응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내 상태에 대한 염증과 실망이 크다. 나를 포섭하고 있는 사회를 탈성화시켜서 얻게 된 것은 '매몰차게 무언가를 벗겨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다름 아니다. 그 마지막 임계점이 '사회'라는 공백이 아니라 '자기자신'이라는 결여가 되기도 어렵지 않다. 

 

아무튼 이 책을 빌려와 절반쯤 읽다보니 만물상 부르디외에 대한 기억이 새록하다. 국가와 자본의 착취구조에 기대 사회변동을 논하는 한계를 간파하고, 장場‥아비투스‥ 상징폭력 같은 유무형의 개념들로 사회세계 일반을 설명하면서 '자본'을 의미론적으로 확장시킨다. 


좀 오래된 일인데, 『구별짓기』를 읽고난 후에 낭패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위대한 개츠비』의 캐러웨이를 끌어들여서 글을 쓴 적이 있다. 앞 부분은 이 블로그에도 흔적이 남아 있는데 정작 본론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https://blog.aladin.co.kr/722236154/5800861


부르디외가 주관과 객관의 이항대립을 기피하고 만들어낸 이중적 객관화가 실은 두 개의 모순이거나, 하나의 모순 자체가 드러내는 이중성일 뿐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 가정을 설명하고 싶어서 부르디외의 70년대 작업보다 40~50년 차이가 나지만 피츠제럴드의 사회를 끌어왔고, 무엇보다 구별짓기를 설명하기에 맞춤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중적 모순, 체제와 삶의 양식>

개츠비는 결사적으로 부를 축적한 '성공한' 자본가이지만 주류 사회 진입에 실패한다. 사회세계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비밀'이 있고, 그것은 지식이나 기술처럼 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습득할 수 없다. 개츠비는 얻고자 한 욕망이 뚜렷했고, 추동력도 있었으며, 더불어 자본시장의 작동방식에도 민감한 유사자본가였음에도, 강 건너 마을()에 합류하지 못했다.  사회적 게임이 가능하려면 참가자들이 집합적 믿음을 갖고 그 장면에 투입되어야 하지만, 개츠비와 그 저택의 파티(집합)에는 그것만큼 결여된 것이 없었다.


피츠제럴드가 캐러웨이를 동원해서 설명하는 사회세계는 마침내 미서부의 건국정신에 도달해서 멈춘다. 경제적 격차가 사랑의 실패로 연결되거나, 경제적 성공이 사랑의 실패로 연결되는 사회적 게임은 상징적 권위와 체화된 자본의 폭력적 지배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것이 무엇이냐. 부르디외의 심각하고 끈질긴 성찰은 그 자신도 그 반대자도 캐러웨이도 톰도 피츠제럴드도 그대로 두었지만, 윌슨도 머틀도 데이지도 모두 내 처지로 만들어버리지 않는가 .... 뭐 이런 결말이었다. 


지금 다시 부르디외를 읽고 개츠비를 만난다면 조금 다른 지점에서 서성거릴 수 있을듯도 하다.

요즘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 (테니스 선수였던) 조던의 감각을 갖는다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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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와 외관이 전혀 다른 것에서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하는 루소의 얼굴은 창백합니다. 사실 창백했던 것은 내 얼굴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이중성과 위선'에 대한 질타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소를 읽다보면 덕의 지배와 자유를 원하는 열망과 만나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해, 자기 안의 풍요로움을 버리고 예속되는 사회인에 대한 비판의 맥락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실제의 자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별에서 위압적인 호사(豪奢)의 과시와 기만적인 책략,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에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인해,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자기 동족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족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그들의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그들의 원조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중간 정도의 사람들도 그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동족이 자신의 운명에 관심을 갖도록, 실질적으로나 표면상으로 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이라 생각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위선적이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권위적이고 냉혹하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수 없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기에게 그다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는 그들을 속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침내 인간은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진정한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재산을 늘려 남보다 우위에 서려는 열망때문에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친절의 가면을 쓰기 일쑤이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10)


'욕망이나 정념이 불평등을 만든다'고 비판적 시각을 들이미는 루소는 정작 문제의 본질을 소유권으로 향하게 합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읽고쓰기를 중단하고 세상의 절망을 부추기는 '인문'을 저주했습니다. 시민 아카데미에 참여하려다 봉변을 당한 뒤, 구역질 나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중화시키려는 몸부림이었지만, 개인()에 대한 집중은 전제주의만큼이나 위험한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중성을 보란듯이 시전하고, 위선을 치장하는 세태에 저항하는 길은 사회적 요인과 언어적 요소에 주목하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가정해 봅니다.


쓰고도 남을 재산을 움켜쥐고도 더 가지려 애쓰는 사람들을 질타하고, 건전한 시민을 촉구하는 계몽주의자로 루소를 이해하는 흐름과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을 소유권, 사유재산제도에서 찾고 이를 전복하려는 혁명가로 루소를 바라보는 흐름 사이에는 독자의 오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라는 단절이 있습니다. 장자크 루소는 1712년 출생입니다. 루소를 이해하려면 그의 평전을 읽고, 당시 시대 상황을 파악하고, 동시대 지식인들을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루소 연구자도 아니고 루소의 정통성을 밝힐 문헌의 계보를 엮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주의가 일궈 온 예속의 정당성을 가뿐히 제껴버리고, 인간의 자연권을 근거로 정치적 승리를 희망했던 루소를 통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세계를 인식하는 단절이 존재합니다. 고통과 참상을 해석하는 퇴행적 시선들은 극적 갈등 상황을 끊임없이 재현하며 불안과 악덕을 장려합니다. 인민(people, 人民 ; 혹은 시민, 노동자, 비관적으로 국민)이 예속을 벗어나, 주권자의 위치를 회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비관론이 휘몰아칩니다. 루소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노예가 된 인민이 쇠사슬에 매인 채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비참하기 그지없는 예속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이 멸시하는 저 자유라는 유일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쾌락과 안식, 부와 권력, 심지어 생명까지도 바치는 사람들을 볼 때, 그리고 자유롭게 태어난 동물이 감금 상태를 몹시 싫어하여 감옥의 쇠창살에 머리를 찧어대는 모습을 볼 때, 또한 벌거벗은 수많은 미개인들이 유럽인의 향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독립을 지켜나가려고 굶주림과 불, 칼과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자유에 대한 논의는 노예들의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인간 불평등 기원론』, 122)


인민이 평화와 안식을 찬양하며 누리고 있는 쾌락과 안식에 대한 루소의 반감은 노예와 쇠사슬이라는 비유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노예가 된 인민은 자유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자유와 독립이 무엇인지 더 짚어볼 문제입니다. 다음 글에서 첫 번째 회의 문제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루소에 따르자면,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발생하는 것은 불평등이 심화된 사회의 증거입니다. 전제정치가 실행되고 있는 사회입니다. 자연법만이 지배하던 인류에게 사회가 형성되고, 소유 재산이 확대되면서 부자들은 적대자들을 자신들의 방어자로 만들려는 의지를 '법과 소유권'의 탄생으로 현실화 했다고 합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이해관계가 법이라는 공정한 영역이 탄생하면서 중재된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법률이 발달하고 행정 제도가 세밀하게 완성되어 갈수록 강자와 약자의 거리는 더 멀고 깊어지게 할 뿐이었다고 진단합니다. 합법적인 권력이 아닌, 독단적인 권력으로 변화된 세계에는 주인과 노예만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주인 한 사람의 의지가 현실이 되는 가혹한 세계 말입니다.


신분과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하찮은 학문에서, 이성과 행복과 미덕에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분열의 씨가 뿌려질 수 있다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상호간에 불신과 증오를 불어넣어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무질서와 변혁 속에서 전제군주제는 그 추악한 머리를 서서히 쳐들어, 국가의 어느 부문에서건 선량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짓밟고 국가 République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시대는 혼란과 재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전제군주제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폭군만을 갖게 된다. 이 순간부터는 풍습이나 미덕이 문제되지 않는다. “정직한 것에 대하여 아무런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전제군주제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전제 군주 외의 다른 어떤 지배자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135)


그런데 요상한 것은 이 불평등 최후의 단계, 전제군주제라는 폐허를 바라보는 루소의 또다른 시선입니다. 오직 한 통치자, 지배자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또다른 완성 가능성에 대한 내포라는 것입니다. 본질적 특성을 바꿔 개선하는 변화의 역사를 말하는 루소의 말이 '어둠이 짙을수록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니라) 절망만 깊어진다'는 외침을 덮을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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