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티는 표상주의자와 어떻게 대화하겠다는 것이었을까


현실을 드러내는 것은 보잘것 없어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지루할 수도 있고 때로 거북스러울 수도 있으며, 그 자체의 불완정성으로 인해 부족하거나 억울할 수도 있다. 현실을 ‘드러내는’ 일이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자주 말하게 되지만 우연의 능력이 그 숨겨진 힘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연성을 말하다 보면 몇몇 사람이 떠오르는데, 리처드 로티가 그렇다. 로티는 우연성을 표상주의를 격파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런 인상을 받아서 일지도 모르지만, 로티가 말하는 우연성은 보편성보다 더 강력한 규준이 되는 듯하다.


로티가 누구인가. 듀이를 대놓고 싫어하고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남몰래 의심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로티를 비롯한 프래그머티스트들은 본질-현상, 객관-주관을 탐구하거나 타자라든지 헤게모니를 연구해봐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렵고, 세상이 자유로워지거나 불평등이 해소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잔혹한 행위를 감소시키고, 평등을 증가시키도록 하는 실천적인 유용성에 집중한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본질이나 세계를 담을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완성하려 했다면 로티는 적용과 대응관계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고 말하며, 철학적 원리나 위대한 사상을 중심으로 사회를 개조해나가는 것을 거부한다.


물론 로티의 이런 노력이 닿는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다. 고착되고 습관화된 어휘나 서술을 거부하고 자아창조에 열정을 가졌으나, 사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사회적 정의나 연대의 고리를 만들지 않는 사람, 자유롭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인간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새로운 대안은, 이미 가지고 있는 규준을 들이대며 논해봤자 갈등만 심해진다는 것이다.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보다, 종결되지 않는 대화와 타협 과정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보편성이라는, 예외도 없고 입증도 필요없는 만고의 진리만 찾다가 지치지 말고 개인의 자아창조와 일상의 변혁을 시도하는데 집중하자는 것이다. 절대정신,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으니 역사도 당연히 우연한 산물일 뿐이다, 로티에게는.


언뜻 혹하는 주장이기도 하다. “자유를 돌보면 진리는 스스로를 돌본다.” 상식이 굴레가 되지도 않고, 이론이 족쇄가 되지도 않고, 다른 인간에게 굴욕을 당할 필요도 없는 사회, 오직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참여하는 자유로운 사회, 얼마나 평화로운가. 맥락화를 본질이나 정당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몰아(沒我)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렇지만 말이다.

로티가 결국 호출하는 사람이 누구냐 말이다. 마지막 어휘를 만드는, 만들어진 어휘를 스스로 갱신할 수 있는, 재서술을 통해 공동체의 문제를 일시적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인간, 낡은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 놀이를 할 줄 아는, 책과 건축물, 그림, 노래, 문학작품을 만드는 만화가, 저널리스트, 작가를 호출하며 문화정치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로티의 우연성이 무기가 되기엔 애초에 글렀다.


2. 우리를 고통 속에 붙잡아두는 것은 무엇인가


집단지성을 말하고 변화의 등燈을 높이 들던 때가 언제입니까.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이 대중은 피로감을 느끼고 흩어집니다. 또 누군가는 이 기회를 적절히 이용해 공격성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부모 세대는 등골이 휘던 청춘이 억울하고, 자녀 세대는 불안정한 위치로 방황합니다. 세계는 별반 변한 것 같지 않습니다. 먹고, 일하고, 씻고 자는 것은 그대로이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과, 가치를 일궈내거나 희망을 떠들 의지가 사라진 자리에 스멀거리며 의문이 피어납니다. 이래도 될까. 학대와 방임으로 손상된 시간들, 끊이지 않고 증가하는 잔인한 사건들, 목숨을 걸고 지켜도 지켜지지 않는 소중한 생명들…. 공습으로 폐허가 된 건물 사이로 휴전을 기뻐하는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이 그토록 갈구하는 독립국가와 개방된 경제가 있는데도 왜 우리는 여전히 또다른 고통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요.


세계는 확연히 갈라졌습니다. 아군아니면 적군입니다. 신분상의 차별 못지 않은 경제와 문화의 차별은 인류 문명 멸망의 충동을 부채질 합니다. 도서관의 분류코드가 무색하게, 더 세밀하게 분자화된 개인의 세계에 인공적인 네트워크는 독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적대자를 설득하는 것은 진작 포기하고, 서로를 벌레와 쓰레기로 칭하기 바쁩니다. 로티 방식으로 충고하자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행 규준을 내려놓고, 문제만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서구 지성인의 생활양식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정의며, 누가 정의를 누가 말하느냐로 구분하고 싸우는 것이 불평등을 해결해주지 못하니 말입니다. 일부는 맞는 것 같고 또 전부는 그른 것 같습니다. 대화할 수 있는 동료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정치적 대화는 그것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얼마 전, 미국인 기자를 참수하는 동영상이 공개되어 큰 비난을 샀습니다. 동영상은 신문 기사에서도, 유투브에서도, 개인 블로그나 카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유포자의 의도가 통한 것일까요. 설마 하는 생각에 접속했습니다. 재생 버튼 위에 마우스 포인터를 갖다 대고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 현실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비슷한 시기 가자 지구 어린이들이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500여 명 사망했으나, 세계인들은 그 상황을 용인한(유도한) 가해자에게 폭격을 멈추게 해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도 끊임없이 잔인한 사건들이 자행되지만 침묵 속에 놓입니다. 비단 사회적인, 정치적인 권력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이미 개인 간의 관계는 정치사회적 구조를 완벽하게 답습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잔인합니까. 왜 재생 버튼을 누르지 못했을까요.


3. 웃음기 가신 얼굴들


제대로 걷기가 힘든 인파 가운데 서 있습니다. 팔꿈치도 치이고 옆구리도 찔리면서, 더 밀리지 않으려고 그 자리를 고수해봅니다. 몇 걸음을 떼어 봤지만, 이내 가다서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밤이 깊을수록 인파의 이동속도는 동동거리며 달립니다. 마지막 시외버스 시간이라도 되는 냥, 급하게 해내야 할 과제를 독촉받은 양, 매끈하지 못한 걸음걸이로 서너 개의 입구를 통과해 모이고, 12개의 출구로 흩어집니다. 어디로들 갈까요. 자정이 다가오는데 어디로들 가시나요?


지하상가 불이 꺼지기 시작하고 모두가 빠져나간 대합실은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몇 시간 후, 날이 밝고 해가 뜨면, 웃음기 가신 얼굴로 다시 누군가 몰려올 것이고, 또 빠져나갈 것입니다. 이곳은 원래 그런 곳이니까, 그러라고 만든 곳이니까…중얼거리다가 얼척진 생각을 합니다. 그냥 이곳에 침낭을 펴고 잘 수 있을까. 종일 지친 몸뚱아리는 외려, 멀리, 저멀리 누추한 집을 찾아가는 것보다 그걸 원할텐데. 이름표를 ‘침실’이라 붙이고 저 반듯하고 깨끗해 보이는 대리석 바닥 한자락에 폭신한 이불을 깔면—누구라도 피로를 풀 수 있다면. 다같이 그러면 이상할 것도 없는데—집 구하느라 입술 바트지 않을텐데. 집세에 공과금에 애타지 않을텐데. 모이고 흩어지는 대합실을 여기저기 만들게 아니라, 누구든 지나다 잠잘 수 있는, 아무나 말끔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는 ‘공동’의 침실을 만든다면, 웃음기 가득한 아침이 올 수도 있을텐데….


허망하고 미련한 생각입니다. 이상이란 그렇게 허투루 흐르기 쉽습니다.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본능이 되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직장에서 2시간을 달려야 한다고 해도, 몇 번의 환승을 거듭하며 비탈길이라도 올라야 한다고 해도, 돌아올 공간이 절실합니다. 도착한 집이 뒤척일 공간도 없는 작은 방일지라도, 축축한 냉기가 흐르는 동굴일지라도, 바라고 원하며 안도합니다. 싸우고 억눌리고 곤두서있던 정신과 마음을 내려놓을 장소가 절실한 우리시대에 공동 침실은 재앙이 되기 쉬울 겁니다.


그렇다면 그 우둔한 생각은 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현실회피의 증상? 육체의 신호일 수도 있겠지요. 그도 아니면 우연인가요. 전자라면 깨어남을 필요로 할테고, 후자라면 거듭남이 호출될 겁니다. 마지막 경우라면 정지하고 멈추는 반복을 계속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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