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원에는 가설이 없다


구원을 위한 역사적 임무는 완수되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구원되지 못했다. 메시아는 이천 년전에 다녀갔으며, 노예는 수백 년 전부터 해방되기 시작했고, 인권을 위한 세계적인 기구도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애초에 구원은 없었거나 찰나적인 것이었던 것처럼 부질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부정할 수 없는 구원의 흔적들을 여미며, 부스러기들을 끌어모은다. 구원은 형태도 없이 소리도 없이 고통 뒤에 널부러져 있다.


구원이 무엇인가. 고통의 중단, 죄의 사함, 새로 태어남. 누군가는 고통이 제거되어 즐겁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과거를 용서받고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구원의 기제는 정확히 어떤가, 그런 일들은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가. 구원은 절차가 없다. 가설도 전제도 없이 일시에 초월적 능력자에 의해 일어날 뿐이다.


<2>비평은 악몽이 되고 만다


타자라는 말에는 이질성이 강조되는 지점이 있다. 반면 객체라는 말에는 분리된 상태, 물질성을 띤 영역이 있다. 이질성이란 동질성을 파악한 이후에 나오기 때문에, 타자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 분모가 존재하게 된다. 에둘러 말하면 내 의식에는 타자가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어떤 영역의 누구를 부르고 무엇에 의존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온전한 내가 아니다. 그러니 주체적으로 사고하라는 말처럼 뒤죽박죽이 된다. 자립이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익숙한 관계와 상황에서 자신을 제대로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반대의 경우에서라도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조금의 여지야 늘 생기곤 하겠지만 ‘나’란 그런 존재이다. ‘나’ 이외의 ‘대상’을 바라볼 때 ‘나’의 위치는 언제나 우월하며 자기중심성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와 존재 근거는 늘 세계에 있다. ‘나’는 불완전한 ‘나’일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야 그나마 형태를 드러내곤 하지만 결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나’에 대해서 끊임없이 되묻는다.


참된 삶을 꾸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며 어떤 상태가 되어야 하는가. 어긋나는 상황에, 불안한 관계가 가중되면, 깨져버리는 진심들은 ‘주체’에 더욱 집중하라며 독촉한다. 이기심이 수치심을 덮어버리는 순간은 쉬이 일어난다. 망각 능력은 그 사실을 은폐해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다. 남아 있는 것은 진심과 깨져버릴 때의 고통이다. 더욱 더 완벽해진 알리바이는 ‘억울함’만을 주장하게 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아득히 먼 일이다. 합리적인 사람 혹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는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문제는 자신을 항시 들여다보게 하는 이런 장치와 비평들이 사회를 향하게 될 때 일어난다. 결코 타인에게 들이대지 말아야 할 잣대를 휘두르고 내치는 인물 비평은 독이고 악몽이다. 그 형식이 논문이건 칼럼이건 잡담이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일이다. 비평은 고통의 완화와 나-타자 관계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알리바이를 깨고 반복을 중화시켜 나갈 작은 계기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대체로 나는 실패한 자이다. 건설적인 인간관계를 세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회성을 가졌으며, 체제 바깥을 당당하게 거닐 대안도 갖지 못했다. 소박한 노동으로 일상을 깨우기에는 게으를 뿐만 아니라, 지적 충만감()에 중독()되어 흔들리지 않고 일궈나갈 힘조차 없다. 사회적으로 내 인상()을 투영해보면 루저에 속물 경쟁에서 도태된 잉여이다. 속물이 되려다 동물이 되며 사물이 되고 괴물이 되어간다.


무엇으로 불리건 나와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어찌 다 알겠는가? 속물에서 괴물까지, 모두 내 안에 있겠지만 계속 머무르지도 않으며 그것만이 전부도 아니다. 타자를 부르는 말이 신중해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타자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는 결국 나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주체적으로 자립하며 산다는 확신에서 다른 사람을 비평하는 일은 조롱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3>혁명은 불안했던 과거의 반향이다


우리 시대의 숙제는 속물과 동물, 잉여들을 인간화시키는 것인가 보다. 너도나도 달려들어 나같은 사람들을 새롭게 개화시키려 한다. 그것을 혁명이라 칭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나를 지우고 무언가를 영접해야 하는가, 아니면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미 형성된 자아상()을 개조해야 하는가, 혹은 배제되고 소외된 자리에서 더 무기력한 혁명()을 수행해야 하는가.


구원은 확신에서 비롯되지만 오직 찬란한 미래만을 바라보고 있다. 남겨진 자와 배제된 자에 대한 자리가 부족하다. 비평은 엉켜진 시간을 해명해야 하며, 종결된 위치를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연을 떠나 문화 세계로 진입하던 인간이 바쳐야 했던 공물, 수치심이 개체화의 본질이었다. 수치심을 갖지 못하는 자는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세계는 경고한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나 비평을 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제어한다는 것, 사회적 ‘나’를 돌아보며, 성찰하는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인간화()의 시작이란다. 이제 속물과 잉여, 동물과 식물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정지시켜야 한다. 정지한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불안과 좌절, 고통과 기쁨, 행복 마저도 정지시킨다는 것이다. 정지는 과거를 돋아내는 것이다. 더이상 그것들을 붙들어 맬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혁명과 비평에 공통점이 있다면 정지한다는 것이다. 흐르던 물길이 멈추지 않고 역행할 수 없듯이, 내 자신이 바뀐다는 것은 (그렇게) 일순간 정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이를 악물어야 정지할 수 있을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기득권의 전부였던 자격증도 반납했고, 가진 것도 변변치 않다. 택배상자 몇 개도 채우지 못할 만큼 ‘별 것도’ 없다. 그러나 내 의식은 여전히 몇십 년 간의 연장선에 있고, 하루는 견고한 체제와 몇 사람의 호의에 의존한 채 흘러간다.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자, 노동에서도 관계에서도 성취하지 못하는 자의 아침은 또다른 죄책감을 뒤바른 채 밀려온다. 어떤 연명은 그렇게 사회로부터 불한당 취급을 받는다. 매 끼니를 당당히 챙겨 먹을 자격을 상실시키고야 마는 것이다.


이 말들은 오로지 내 감상에 불과하지만, 방향을 갖고 있다. 감성에 가려진 본성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우연으로 덧씌워진 나와 너의 비밀을 공공연히 하는 것, 그리고 존재가 존재근거인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논리의 일관성이 늘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출처를 밝히는 정밀함도 모른다. 학계()나 사조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다. 공부한 적이 있더라도 그 궤를 이을 능력이 없다. 그저 옮겨적는 글에는 큰따옴표를 붙이거나 들여쓰기를 할 뿐이다. 그것도 불충분하겠지만 능력’껏’이 그정도다.

가끔 메모해 놓은 공책을 죄다 파쇄해 버리곤 하는데, 찢다 보면 잘려나간 종이조각에서 아까운 글귀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잠깐 갈등을 하기도 하지만 대개 그 갈등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발길이 닿지 않는 도서관의 오래된 새 책들 속에서나, 너덜거리고 헤진 신간 헌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고 할까. 오래된 새책이 의미하는 것과 헤진 신간이 말하는 것은 양면일 뿐이며, 같은 줄기의 다른 잎사귀다.


왜 나는 이런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늘 존재에게 존재근거를 대주는 꼴이 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이 정지의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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