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70년대는 사라진 망령이며, 짚어야 할 역사적 기록일 뿐이었기에, 단 한번도 반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너무나도 뻔하게 되풀이되고 있다. ‘배부른’ 나라 만들기는 독재를 위한 허울좋은 명분으로 작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기고 허기졌으며, 또 많은 사람들은 울분 속에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했다


그 고난의 세월이 무색하게도 경제적 불평등은 줄어들지 않았다. 국가경제의 규모가 더 커질수록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의 차이는 더 심각해졌을 뿐이다. 적어도 배고파 쓰러지는 사람은 없으니…하면서 애써 위안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산층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누구를 밟고 일어서야 했는가. 너무 잊고 사는 것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표면적인 민주 사회의 행진이, 파업과 시위가 사라진 거리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착각이 지배할수록 경제적 부정의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의를 막는 것이 파국적 상황인지, 평화로운 침묵인지 따져 물어야 할 때다. 사회 정의를 경제논리로, 국가폭력으로 눌렀던 과거는 경제적 부정의를 정치적 파국으로 덮으려 하는 현실을 만들고야 말았다.


애덤 스미스는 “부자 한 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 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 고 했지만, 지금 경제현실은 부자 한 명을 위해 필요한 가난한 사람 수가 얼마일까 짐작조차 어렵게 만든다. 경제적 재분배, 생존권의 문제를 전방위의, 최우선의 문제로 배치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배부른 사람들이 거리를 채우고 있어서인가. 끊임없이 먹고도, 채 먹지 못한 식량을 주렁주렁 채워 담아도, 여전히 허기진 사람들이 갇힌 성城벽은 무엇으로 허물 수 있을까. 필시 그것은 삶에서 ‘부채의 문제’를 엄중히 대면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삶을 얻었는가? 왜 나는 배고프고, 불안한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묻는다. “우리는 오늘날 정확히 얼마나 불평등한가?” 그리고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상시적인 기아 상태에 있는 10퍼센트는 늘 배고프다. 불안정한 프롤레타리아, 프리카리아트에게 경제 불황의 충격은 삶을 해체할 수준에 이르지만, 0.1%의 최상위 부유층은 (여전히) 매일 수십 억원을 벌어들이며 부를 증식해간다. 그들의 호황이 트리클 다운으로 이어졌는가? (trickle down대기업의 성장을 촉진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를 활성화시키게 된다는 경제 이론) 국가의 평균 임금 수치가 3만 달러를 넘어 4만 달러를 상회할 때 최저 임금은 얼마이며, 그 숫자는 어떤가. 이미 ‘평균치’는 의미 있는 숫자가 아니다. 다분히 공격적인 바우만의 질문을 다시 상기하며, 가난에 덧붙여진 편견과 위선을 바로잡아야 한다.


더구나 부자들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부유해진다. 빈자들은 단지 가난하기 때문에 점점 더 가난해진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1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권리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세계 인구 30억 명이 하루 2달러로 정해져 있는 빈곤선 아레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회적 지위, 능력, 자격, 보수 등이 차이나는 것은 당연하다. 타고난 재능의 차이와 사회의 안녕에 대한 사회구성원들의 기여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거짓된 믿음을 제거하기 위해 당신은 어느 부분에 먼저 칼을 대겠는가?

충분히 오래 지속된 불평등은 감지하기 어렵다. 평등을 정의하거나 실행하는 문제는 경험치가 미약한 인류에게 어려운 일이다. 삶을 파괴시키는 가혹한 조건들, 추악한 세력들로 가시화되는 불평등의 문제를 역추적하며 그 날을 꿈꿀 수 있을 뿐이다. 바우만은 부자연스러움에 익숙해진 개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행위를 한다는 것은 성공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도 현실적’이 되려고 계속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여러 세계 가운데 가장 맹목적인 것으로 규정할 세계에 살면서도 그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역설하는 사람들의 존재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바우만의 질문에 다분히 섞여 있는 ‘불평등을 기꺼이 감수하는 대중’이라는 전제는 여전히 까칠한 탄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바우만의 질문을, 의문을 강박적으로 묻고 되물어야 한다. 자신에게, 사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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